2007년 10월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왕흥사적의 목탑기초(심초석)부분에서 서기 577년 (위덕왕 24년) 제작되어 수납된 사리장엄구와 각종의 장식품등을 발굴하였으며, 완전한 모습으로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발표하였다. 왕흥사적목탑은 실재하지않으나 조사결과 가로세로 1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었다. 사리용기에 백제왕의 이름이 각인된 명문이 발견되어 당시 역사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577년 2월 15일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위덕왕의 실명)이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 이 명문에 의하여 왕흥사적의 사리장엄구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 창건되었다는 것,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년경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제시대 왕흥사는 사비성이 있는 부소산에서 봐서 금강 건너편 대안의 울성산(131미터) 산록에 건축되었다. 삼국사기는 왕훙사 창건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왕 2년 (600) 정월 왕흥사 창건착수하여 무왕 35년 (634) 2월 낙성되다. 절은 강변에 붙었고 채색장려하다. 왕은 항상 배에 타고 절에 들어가 분향한다.
현재의 일본 아스까데라(飛鳥寺)는 아스까촌 (明日香村)의 넓지않은 경내에 安居院이라는 조그만 전당과 상처투성이 大佛의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스까데라의 전신인 호꼬지(法興寺)는 당시의 숭불파였던 소가노 우마꼬 (蘇我馬子)가 用明천황 2년 (587)의 발원에 의하여 세워진 소가씨의 사원이다. 소가씨는 587년 배불파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와의 전쟁에 앞서 싸움에 이기면 불사를 건립하겠다고 서원한 바 있어 승전후 아스까의 마가미노 하라 (眞神原)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崇峻天皇 원년 (588) 백제왕에게 法師와 工匠의 파견을 부탁한 바, 백제에서 승려, 사리, 목수, 주물기술자, 기와기술자, 화공이 헌상되었다. 또 여승을 백제에 보내 법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592년 法興寺의 불당과 보곽공사를 시작하다. 593년 推古天皇 원년 탑의 심초에 사리가 안치되고 심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596년 8년만에 아스까데라의 낙성식이 있었다. 아스까데라는 탑을 세개의 금당으로 둘러 싼 일탑삼금당 양식의 가람배치였다. 이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는 四天王寺식이나 法隆寺식과 다른, 유례가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그보다 약 1세기 먼저 조성된 고구려의 금강사(金剛寺) 사지인 청암리 사지와 같은 양식으로 알려져 왔다.
을사의 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나까노 오호애황자와 나까토미 가마타리의 초대면이 이 절에서 이루어졌고, 645년 소가노 이루까를 암살한 혁명군은 이 절에 군영을 설치하고 甘樫丘 (아마까시노 오까)에 웅거하고 있던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까의 부친)를 압박하였다.
2008년 4월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절로 알려진 나라의 아스까데라의 원형은 부여 왕흥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를 내 보냈다. 신문은 와세다 대학의 오호하시 가츠아끼 (大橋一章)교수등 일본연구팀이 금월 초 부여 왕흥사유적지를 조사한 결과 거기서 출토된 기와의 문양과 탑의 구조등이 아스까데라의 유물과 거의 일치함을 밝혔다. 오호하시교수는 두 절이 동일한 기술자에 의해 창건되었다는데 이견이 없다고 말했다. 아스카데라는 일본유일의 1탑3금당식이다. 왕흥사는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연결된 사천왕사식으로 보이나 회랑의 동서에 있는 부속건물이 후일, 아스카데라를 지을 때 금당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함께 연구에 참가한 국학원대학의 鈴木靖民 (스즈끼 야스타미 ) 교수는 아스카데라 창건은 백제왕과 왜왕간의 활발한 교류를 의미하며 역사서에 당시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꼬가 낙성식에서 백제의 의복을 입고 참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이 연재기사를 읽어 온 독자들은 이때 백제와 야마토가 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소가노 우마꼬가 백제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 저자 주)
2008년 11월 중순 동경 국학원대학에서 백제 왕흥사유적 관련 심포지움이 열렸다. 2007년의 발굴조사 결과 일본最古의 사원 아스카데라와 왕흥사의 가람배치에 유사점이 눈에 띄어 연구자를 크게 자극하였다. 지난 반세기동안 아스카데라의 원류는 고구려 평양의 청암리(淸岩里) 사지 (寺址)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움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표되었다. 한국 문화재청의 김용민 발굴조사과장의 보고에 의하면 왕흥사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정림사(定林寺)와 능산리사 (陵山里寺) 두개의 사원에서 금당의 동서로 긴 건물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제까지 탑과 금당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사천왕사식으로 보아왔으나 이로써 왕흥사와 닮은 구조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병호학예원은 “왕흥사만이 특별한 구조를 가진게 아니라 백제에는 사천왕사식과 다른 독자의 가람배치가 있었다”고 한다. 능산리사는 강당의 양 옆구리에도 건물이 부속되는 등 세부는 다르나 백제식이라는 호칭명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2008년 12월 4일 아사히신문 문화면 기사)
여기에서 1탑3금당이니 하는 가람배치 용어가 나오는데 설명이 필요하다. 사찰하면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떠 올리게 되지만 사찰의 기본은 대웅전이 아니라 탑이다. 원래 사찰의 가장 본질적인 경배의 중심은 대웅전 밖에 호젓이 서 있는 탑 구조물이다. 탑(Stupa)이란 인도의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의 무덤을 의미하며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수납했던 곳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 탑(Stupa) 중심구조였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불상중심구조로 변화하므로 탑과 금당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초기 불교에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의 근본취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아이콘적인 구체형상으로서 부처를 기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의도로 불교에서는 우상숭배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대웅전에 안치된 금빛찬란한 오늘날의 부처님의 형상은 훨신 후대에 대승불교운동과 함께 출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대에 따라 탑과 금당의 배치관계에 변화를 수반하므로 불교사학자들에게 가람의 배치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정림사는 왕궁에서 연장된 대로에 면한 부여의 상징, 능산리사는 왕가의 능묘를 수호하는 절이었다 하며 왕흥사보다 앞 서 서기 567년 지어졌다. 성왕이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한 뒤 성왕의 아들 위덕왕 시절 사비성은 사찰건립의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리라. 요새 말로 하면 백제에서 사비성 천도와 함께 시작된 건설붐이 推古天皇 시대 아스카(飛鳥)의 건설붐으로 이어진다. 이 시대의 백제와 일본관계를 근대국가의 외교관계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 백제 성왕의 장자가 위덕왕 (일본에서 야타노 다마까스노 오호애황자)으로 사비성 사찰건립의 주체였고, 일본의 敏達, 用明, 崇峻, 推古天皇이 위덕왕의 동생들이다. 위덕왕은 부왕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았고 부처님에 의지하여 부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그는 일본의 동생들에게도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도록 독려하고 사찰건립을 지원하였다. 그의 뜻을 받들어 그의 동생들 , 조카들(聖德太子), 손주(敍明天皇)들이 불법을 일으키고(法興), 불법을 융성하게 하고 (法隆), 불법을 널리 퍼뜨린(廣隆) 결과가 호꼬지(法興寺), 호류지(法隆寺), 고류지 (廣隆寺)등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백제 사비성에서 터득한 대형사찰 건축및 불상제작의 노하우는 당시 일본의 사찰을 건립하는데 그데로 전해 졌다. 백제의 첨단 건축기술이 채용된 첫 번째 사례가 아스카데라였다. 아스카데라는 일본에 처음 등장한 기와지붕이었으며 그 기둥이 주춧돌위에 세워진 첫번째 건물이었다. 백제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은 아예 가족을 데리고 거기서 살게 되었으니 일본의 아스까 문화란 백제의 문화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