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0일 금요일

76. 우금암(禹金巖)을 아시나요




우금암은 전북 부안군 상서면(上西面)의 우금산(331 미터) 정상에 있다. 산 꼭데기의 거대한 바위가 현저하게 눈에 띄어 바위의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바위의 이름을 따라 산의 이름이 우금산이 되었으며 이 봉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백제시대 산성도 우금산성이라 불린다

전라북도 문화관광사이트는 다음과 같은 우금산성 정보를 제공한다

우금 산성은 1974 9 27일 전북기념물 제 20호로 지정된 산성으로 주류(周留), 위금암(位金岩 )산성 혹은 울금바위 산성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성곽은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주변 산봉우리와 함께 아래의 산골짜기를 감싸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3,960m에 달하며 높이는 3m 내외로써 인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성곽이다. 성곽의 북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북장대(北將臺)가 있고, 남쪽에는 남장대(南將臺)가 있다. 성의 내부에는 묘암사(妙岩寺) 터와 함께 많은 건물지들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에 가 있던 부여풍(扶余豊)을 받들어 백제 부흥군이 663년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우금암(禹金巖)은 위금암(位金巖), 우진암(禹陣巖), 우금암(遇金巖), 울금바위 등으로도 불린다. 왜 그렇게 불리는지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으나 한결같이 근거없는 낭설일 뿐이다. 신라 장군 위금이 이 바위에 와서 석성을 쌓고 적을 막아서 위금암이라 부른다거나 삼한시대 우, 진 두 장군이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므로 우진암이라 한다던지 당의 소정방이 김유신을 이 곳에서 만났으므로 우금암(遇金巖)이라 한다는 둥 무의미한  정보가 카피되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조시대 그려진 이 바위의 그림이 미국에서 발견되었다. 서기 1770년 그려진 그림에 우금암(禹金巖)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이 바위는 이조시대에도 우금암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의 울금바위 그림 찾았다.   
 
 18세기 조선 화단의 총수(總帥)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이 서기  1770 2월 전북 부안 변산반도 일대를 스케치한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가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에서 발견됐다. 길이 268.4, 높이 25.6, 닥종이에 먹으로 그린 두루마리 그림으로 스케치 6점과 여행기로 구성됐다.

표암은 아들 완() 1770년 부안현감으로 발령난 것을 계기로 지인(知人)이었던 정읍현감과 함께 부안 지역 경승지를 여행했다. 표암은 우금암(현재 울금바위로 불림)과 용추(龍湫·현재 직소폭포), 월명암 낙조대(落照臺), 지금은 없어진 실상사와 극락암 등을 방문했고, 이를 화폭에 담았다.”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가 취재한 2005 3 14일 기사)

이 바위에 복신굴(福信窟)이라 불리는 굴이 조성되어 있다. 200여명의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굴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서기 662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용삭 2(662) 7월에 인원과 인궤 등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과 대산책(大山柵)·사정책(沙井柵) 등의 목책을 함락시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이하 생략)

이때 복신이 이미 군권을 독점하면서 부여풍(扶餘豊)과 점차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풍이 이것을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는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

위의 기사 중 우리의 관심은 복신이 병을 핑계로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장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는 부분이다. 복신이 당시 굴 속에 기거하고 있었다고 하며 우금암에 복신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현존한다. 그리하여 우금산성이 백제의 최후의 항전 중 수뇌부들이 있었던 곳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우금암을 포함한 능선 양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동쪽이 묘암(妙巖), 서쪽이 개암(開巖)골이다. 개암골에 개암사가 있다. 묘암골에 백제 부흥군이 옹립한 풍장왕의 거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 폐허로 남아있다.

일본서기 텐찌(天智) 원년 서기 662 5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텐찌천황은 백제의 왕자 풍장등에게 원군을 인솔하여 백제에 파견하였다. 백제 부흥군은 산악지의 요새, 주유성(일본서기 州柔城, 삼국사기 周留城)에 농성하면서 나당 연합군과 대치가 계속되었다. 그해 12월 주유성의 장군들이 모인 가운데 풍장이 제안을 내 놓았다. 그것은 주유성을 버리고 피성(避城, 현 전북 김제)으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주유성은 식량 생산지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매말라서 인민들이 기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두 조용히 듣고만 있는 가운데 에찌노 타쿠쯔(朴市田來津)간언하였다. 주유성이 식량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힘 든 장소라는 잇점이 있다. 거기다 피성은 적의 근거지에서 하룻밤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적이 지금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유성이 공격하기 힘 들어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유성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 닥치지도 않은 걱정을 하는가. 이 곳을 떠나 우리에게 살 길이 있다고 믿는가. 주유성을 버리는 것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의 간언은 받아 들여지지 않고 피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타쿠쯔가 예상했던데로 두 달후 다시 주유성으로 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 663 3월 전장군 카미쯔케노노 키미 와카코(上毛野君稚子), 하시히토노 무라지 오호후타(間人連大蓋), 중장군 코세노 카무사키노 오미 오사(巨勢神前臣), 미와노 키미 네마로(三輪君根麻呂), 후장군 아헤노 히케타노 오미 히라부(阿部引田臣比邏夫), 오호야케노 오미 카마쯔카(大宅臣鎌柄)를 보내 2 7천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서기 663 6월 백제왕 풍장은 복신에게 모반의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신하들에게 물은 다음 복신을 참수하였다. 그 해 8 13일 신라는 백제왕이 우수한 장수를 참수한 것을 듣고 백제에 들어 와 주유성을 취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신라의 의도를 간파하고 제장들에게 지금 대일본국의 구장() 이호하라(廬原君臣)가 만여명의 건아들을 인솔하고 바다를 건너 오고 있다. 제장들은 백촌강에 나가 그들을 맞으라.” 고 하였다.

17일 적이 주유성에 이르러 그 왕성을 포위하였다. 대당(大唐)의 군장들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27일 일본의 선두 선단이 도착하여 대당의 선단과 교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불리하여 물러나고 대당은 진지를 견고하게 지켰다.( 戊戌, 賊將至於州柔,繞其王城. 大唐軍將率戰船一百七十艘,陣列於白村江. 戊申, 日本船師初至者與大唐船師合戰. 日本不利而退, 大唐堅陣而守)

28일 일본제장과 백제왕은 기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 우리가 앞 설테니 너희는 뒤 따르라고 서로 주장하였다. 거기다 일본의 중군은 대오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대당의 견고한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대당은 좌우에서 협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군의 패배가 이어지고 물에 빠져 익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배의 방향을 돌릴 수도 없었다. (현해탄을 건너 온 대군이 흘린 피로 백촌강이 핏빛으로 물든 가운데) 타쿠쯔는 하늘을 우러러 죽기를 맹세하고 이를 갈며 수십명의 적을 도륙한 뒤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은 몇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己酉,日本諸將與百濟王,不觀氣象而相謂之曰「我等爭先,彼應自退.」更率日本亂伍中軍之卒,進打大唐堅陣之軍.大唐便自左右夾船繞戰.須臾之際,官軍敗績.赴水逆死者眾.艫舳不得迴旋.朴市田來津仰天而誓,切齒而嗔,殺數十人,於焉戰死. 是時,百濟王-豐璋與數人乘船逃去高麗)
 
9 7일 백제의 주유성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 나라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주유가 떨어졌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백제라는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다시 올 수 있겠는가! 테레성(弖禮城)에 가서 일본의 군장들과 앞 일을 의논하자. (九月,辛亥朔丁巳,百濟州柔城,始降於唐.是時,國人相謂之曰:「州柔降矣,事無奈何.百濟之名,絕于今日.丘墓之所,豈能復往.但可往於禮城,會日本軍將等,相謀事機所要.」)

드디어 침복기성(枕服岐城)에 수용되어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고 알렸다. 11일 무테(牟弖)에 도착. 13일 테레(弖禮)에 도착하다. 24일 일본의 선사(船師)와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首), 억례복류(憶禮福留)와 국민들이 테레성(弖禮城)에 도착하였다. 25일 일본을 향하여 출항하였다.
(遂,教本在枕服岐城之妻子等,令知去國之心. 辛酉,發途於牟. 癸亥,至禮. 甲戌,日本船師及佐平余-自信、達率木素貴子、谷那晉首、憶禮-福留并國民等至於禮城. 明日,發船始向日本)

서기 1997년 전영래(全榮來) 원광대학교 교수는 삼국사기, 신구당서, 일본서기가 기록한 백촌강과 주유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비정하였다. 우선 기벌포(伎伐浦)와 백강(白江)을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의 개화(皆火), 흔량매(欣良買)로 보았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강 하구 유역이다. 당의 13만 대군을 끌어들인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불의에 도성을 함락당한 백제유민은 임존(任存), 주류(周留)의 두 성에 의지하여 웅진의 당군을 곤경에 빠뜨린다.

신라는 이를 구원한다는 명분아래 출병하였으나 실은 이를 틈타서 독자적으로 두량이성(豆良伊城)을 탈취하려 꾀하였다. 이 두량이성을 일본서기는 쯔누성(州留城), 삼국사기는 주류성(周留城)이라 하였다. 서기 661 3 12일 신라군은 고사비성(古沙比城)에 주둔하여 백제의 두량이성과 8 – 9 킬로미터 떨어져 서로 대치하였으나 4 19일 헛되이 퇴각한다. 신라장군 품일은 고부의 고사비성에 머물며 두량이성(사산산성) 36일 간이나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고사비성은 정읍시 고부면의 금사동산성(金寺洞山城)이다.

일본서기가 기록한 지명 무테(牟弖)는 옛 미동부리(未冬夫里) 즉 현재 전남의 남평(南平) 광주지방이다. 후일 무등산 혹은 무진악(武珍岳)으로 불리는 이름이다. 테레(弖禮)는 백제의 동노현(冬老縣) 지금의 보성군 조성(鳥城), 득량(得粮)면 일대이다.

주유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난민들은 9 7일 부안의 주유성을 떠나 11 200리 떨어진 광주(무테)에 도착하였고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여 13일 광주에서 135리 떨어진 보성의 득량에 이르렀다. 피난의 행렬은 하루 약 45리 꼴로 걸은 셈이다. 24일 침복기성의 가족들도 득량에 도착하였고 이들은 9 25일 일본으로 출항하였다.

이 장면의 역사기록은 설명이 필요하다. 백제의 최후를 몸소 체험한 지배층이 향하고 있는 일본이란 백제사람들에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사람들이 현재 갖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정서로 이 시점의 역사를 이해하면 안 된다. 이해의 시작은 일본이란 국명이 서기 670년 무렵에야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기 663년 백제부흥전쟁이 무위로 끝난 시점에 일본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왜()로 표현된 열도의 집단은 백제의 일부였다. 일본서기가 이 무렵의 기사에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제인들은 9 25일 보성군 득량만을 떠나 타국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열도에 있는 자기 나라 땅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풍장의 어머니가 전쟁중 사망한 사이메이(齊明)천황이며 풍장의  또 다른 이름이 오호아마황자 (大海人皇子, 훗날의 天武天皇, 622 – 686)이다.  그는 고구려고 간게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전쟁터를 빠져나온 풍장을 태운 선박이  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은 일본이다. 그가 가장 안전한 곳을 버리고 왜 고구려로 가겠는가? 부여풍장과 오호아마황자와 관련된 기사는 지금까지 "21. The Battle of Baekgang, 32. 죠메이(舒明)천황, 34. 부여풍장은 누구인가, 41. 선광사 연기, 71. 일본국의 출현"에서 나왔다.

삼국사기 지리지가 기록한 백제의 개화(皆火)는 지금 계화(界火)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계화도 간척사업이 있었던 곳이 바로 백제의 개화(皆火)현이다. 한자로 개화라 하였지만 우리 말은 갯벌이었을 것이다. 그냥 갯벌. 개는 발음되는 그대로 개, 벌은 불 화()가 된 것이다. 갯벌의 또 다른 표현이 기벌(伎伐)이다. 그리하여 개화(皆火)든 기벌(伎伐)이든 모두 갯벌인 것이다.


그러면 흔량매(欣良買)의 원래 우리말은 무엇이었을까? 흔량매는 희얀() ()였을 것이다. 백강 또는 백촌강이란 이름이 바로 흔량내에서 유래한다. 흔량내를 지금 동진강이라 부른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내륙의 땅처럼 보이지만 현 동진강 하류는 대부분 갯벌을 통과하여 서해로 흘러 들었고 그 곁에 백산(白山)이 자리잡고 있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백산성이 있다. 백산성에서 동진강이 내려다 보인다. 백제의 흔량매현을 통일신라는 희안(喜安)현으로 고쳤다. 우리 말 희얀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동진강 하구의 백산은 높이 47미터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주위가 온통 갯벌인 평지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이며 옛부터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항구로 사용되었다.  

개암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서기 634(무왕 35) 백제의 왕사(王師)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라고 전해 온다. 사찰의 이름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배경은 뒷산 정상의 웅장한 우금바위(또는 우금암)의 전설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이 개암사 창건에 대한 역사기록도 조선후기에 편찬된 사적기(寺蹟記)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적기는 1658년 금파당(金波堂) 여여(如如)스님이 엮은 개암사중건사적기(開巖寺重建寺蹟記) 1640년 월파자(月坡子) 최경(崔勁)이 지은 법당중창기문(法堂重創記文), 1941년 주봉당(舟峰堂) 상의(尙毅) 스님이 편찬한 개암사중건연혁기 (開巖寺重建沿革記) 등이 있으나(www.simjeon.kr/xe 사찰순례) 그냥 전해오는 내용을 적은 것으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개암사 뒷 산 꼭데기에 있는 우금암에 복신굴이 있다고 하였다.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는데 서쪽 바위에 복신굴이 있고 인접한 동쪽 바위에 또 다른 굴이 조성되어 있다. 복신굴처럼 지상에 조성된 게 아니라 지상에서 약 20 미터 높이에 위치하므로 사다리가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다. 이 굴의 이름이 원효방 또는 원효굴이라 불린다. 서기 676년 신라의 원효가 개암사에 와서 수도했으므로 원효방이라 한다고 전 해 온다. 그러나 서기 676년 원효(617 - 686)는 변산반도에 와서 한가로이  수도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인격이었다.

고려시대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 원효방(元曉房)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이규보는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 兼 掌書記)라는 첫 벼슬을 받아 전주로 부임, 의욕적으로 각 고을을 돌아 다니며 보고 들은 바를 수필 형식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남행월일기이다.

서기 1200(庚申) 8 20 부령(扶寧 지금의 부안) 현령(縣令) 이군(李君) 다른 손님 6 - 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뜨락과 창과 문이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이후생략)

원효방은 겨우 8 되는데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헤어진 누비옷에 도를 닦는 모습이 고고하였다.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초상화가 있고 외실에는 () 하나 켤레 찻잔(茶병) 불경놓은 책상만이 있을뿐 때는 도구도 없고 시자(侍者)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蘇來寺, 현 내소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 : 불공)에 참예할 뿐이라 한다.

개암사 뒷 산에 있는 우금암에서 고부쪽을 바라보면 우금산 코 앞에 삿갓 모양의 작은 산이 있다. 해발 107미터에 불과한 작은 산이며 입산(笠山) 또는 사산(蓑山)이라 불린다. 백제 시대 이 산의 우리 말 이름이 도롱이(蓑 또는 笠)뫼이다. 도롱이란 풀을 엮어 비 올 때 뒤집어 쓰던 우비(雨備)이다. 도롱이뫼가 한자로 두량이산(豆良伊山)이며 이 곳에 구축된 성이 두량이성이다. 따라서 주유성이란 의미상으로 이 곳을 말하나 근거리에 있던 본성 우금산성도 지금 주유성이라 불리고 있다


우금산성을 정면에서 수호하는 전초성은 두량이성과 바로 옆에 위치한 주산(舟山, 231))의 소산리 산성이다. 주산(舟山)은 원래 배뫼였으며 백제시대에는 이 곳까지 선박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배를 맨다는 의미로 배맷산이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배뫼의 뫼는 산()을 뜻하며 배뫼가 주산의 원래 이름이었다고 본다.   

우금암을 울금바위라고 한다는 전승은 14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진실에 근접한다. 개암사 뒷 산의 거대한 바위의 순수한 우리말 이름은 울근바위였을 것이다. 지금은 울퉁불퉁, 울쑥불쑥, 울근불근으로 남아 있는 우리 말이다. 설악산의 울산바위는 울산에 있던 바위가 금강산으로 옮겨 가다가 힘이 빠져 설악산에 주저 앉게 되었다고 하나 이 바위 또한 울근바위였을 것이다. 주위보다 불쑥 튀어 나온 바위라는 의미의 보통명사가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울금바위가 되었고 그것을 한자로 적다 보니 우금암이 된 것이다.

백제의 갯벌현은 현대인들의 눈에도 갯벌로 인식되고 있다. 서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식량증산을 목표로 간척사업이 시작된 백제의 개화현은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새만금 방조제 건설 공약으로 또 다시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이 된다. 그리고 백제인들이 바라보던 갯벌은 모두 육지가 되었다. 그 땅 속 어딘가에 서기 663 8 27일 백강의 전투중 전사한 1만 여명의 백제인들이 잠 들어 있다.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은 막대한 양의 골재를 필요로 하였다. 변산반도의 산악지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골재를 채취할 수 없다. 국립공원을 제외하고 주변의 야산에서 골재를 채취해야 되는데 백제가 갯벌현이라 불렀을 정도로 평탄한 땅에 야산이 별로 없다.  

위에서 거론한 부안군 주산면의 주산(배뫼산)은 소산리 산성이 있는 곳이다. 주산은 지금 새만금 방조제 공사용 골재 채취장이 되었다. 주산의 허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

우금암에서 고부평야를 바라보면 고부면의 두승산 (444미터)이 보이고 두승산 전면으로 영원면 은선리에 천태산(195)과 응봉산(229)이 있다.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백제시대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으로 비정되는 금사동토성(金寺洞土城)이 이 곳에 있다. 이 성은 장문리(長文里)와 은선리(隱仙里)의 경계를 이루는 응봉산(鷹峯山, 229미터)의 북쪽 계곡을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石築山城) 이다. 성의 이름은 골짜기의 이름 금사동을 따서 삼았다. 성의 둘레는 2,365m인데 북쪽 골짜기에 문터(門址)와 수구(水口)가 있다. 산의 정상쪽으로는 봉우리가 있으면서 내성(內城)을 이루었고, 남문터와 내성 북쪽으로는 우물터 세곳과 수구터 세곳이 있다. 이와같이 내외이중(內外二重)의 성터는 옛 백제지역(百濟地域)의 중요한 성터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의 것으로서 주목되며, 따라서 이 성은 백제(百濟) 후기(後期) 5방성(五方城) 가운데 중방(中方)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의 터로 추정된다

은선리 삼층석탑 동쪽으로 보이는 천태산도 새만금 방조제 골재 채취장이 되었다. 백제 부흥전쟁의 최후의 항전지의 양측 유적, 부안 주산면의 주산과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천태산이 동시에 새만금 방조제 공사용 골재를 제공하면서 산 허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현지의 개발반대 기사를 전라도닷컴(www.jeonlado.com)에서 발췌한다.

“문화유적의 보고 배메산 훼손 중단하라! (http://jeonlado.com/v3/print_paper.php?number=8244)
주산 주민들, 배메산 문화유적 문화재 지정 촉구 (20060308)

지난 2 7일 오전 10, 부안 주산에서 새벽에 집을 나서 눈길을 달려온 주산 주민들과 문화연대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 위원회 위원장, 문화재 전문위원)는 서울 창덕궁 앞에 위치한 문화연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유적의 보고 배메산 훼손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배메산은 오는 3월 하순께 새만금방조제 최종 2.7km 구간의 전진공사와 끝물막이 공사를 앞두고 토석 채취 작업이 한창이다. 공사를 맡고 있는 현대건설 관계자에 따르면 “들어가는 돌은 160만㎥ 가량인데 90% 정도 확보했고 대석 36만㎥ 외부에서 들여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16만여㎥는 이미 확보했고 앞으로 20만여㎥ 가량의 물량이 더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토석을 채취하기 위해 방조제 인근 야산에 석산개발 허가가 나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고 있는 중이며, 주산면 배메산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배메산의 주산쪽 개발업체의 허가 물량만 해도 약 47만㎥이며 방조제를 다 막은 후에도 내부개발을 위한 138km의 방수제를 쌓으려면 토석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배메산의 토석채취 허가는 더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지점에 해발 231m의 배메산(주산)이 있다. 옛날에는 이 산 바로 앞에까지 조수가 드나들어 배를 메어두었다 하여 ‘배메산’이라 불렀다 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에서부터 조선시대 유물까지 출토되고 있다.

이미 1975년 전주시립박물관장 전영래씨에 의해 볍씨 토기가 발견되었다.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 소산(배메산)성터에서 발견된 토기편은 사질민무늬토기로서 홍도(紅陶), 흑도(黑陶), 마제석검편(磨製石劍片), 석촉(石鏃), 삼각형돌칼, 홈자귀 등과 함께 발견된 것인데, 그 아랫면에 찍힌 볍씨자국은 길이 6.5mm, 3.8mm로서 장폭비(長幅比) 1.71이다. 소로리 볍씨 발견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유물로 당시 일본이 주장했던 벼농사 일본 전래설을 뒤집는 발견이었다.

서기 2000년 문화재 지정신청이 되었으나 전라북도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부안군은 이 일대에 대한 채석허가를 내주기 시작했다. 2003 8월부터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으나 특별한 유물이 없다고 하여 채석을 해도 무방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기 전에 이미 채석 허가가 난 상태이다. 문화재보호법상 3만 제곱미터 이상의 개발에서는 지표조사를 해야 한다는 효력은 1999년부터 이지만 이곳의 채석은 3만 제곱미터를 초과했는지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이나 부안군은 답변이나 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다.

1984년 문화재 지표조사와 2004년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에서 유물산포지도를 작성했다. 당시 유물산포조사는 이 일대의 문화유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2003년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문화재지표조사에 심각한 허점이 있는 것이 발견된다. 문화재청과 전라북도와 부안군은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지표조사에 대해 정밀 확인을 하지 않고 채석 허가를 해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배메산의 채석 상황은 유물산포지역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마치 유물산포지역을 섬 처럼 만들어 놓고 채석을 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잘못된 지표조사와 잘못된 채석허가로 인해 고대 백제의 주요 문화유적지가 흔적을 알 수 없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배메산은 고대 백제의 역사문화경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눈에 보이는 유물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해 문화유적의 진정성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유적은 당해 문화유적이 내포하는 진정성과 역사문화경관 차원에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한다.”

개발과 보존사이에서 어디 쯤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위의 기사는 2006 3 8일 나왔지만 공사는 계속되어 서기 2011년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는 완료되었고 주산과 천태산은 처절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간척사업으로 확보한 내륙의 광활한 토지를 앞으로 어떤 용도로 쓸지 알 수 없다.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는 땅을 만들고자 간척사업을 해 온 것이 된다. 지금은 농경용 토지가 필요한 시대는 지났다. 남한은 생산되는 쌀이 남아돌아 걱정인 시대가 되었다. 새만금 사업은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이지만 사업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즉흥적인 선거공약 때문에 타당성이 의문시되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인 것이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쓴 책 이름이다. 그는 하바드 대학교 정치철학 교수이다. 이 책이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1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한국사람 50명 가운데 1명이 이 책을 구매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라는 물음에 목 말라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개발과 보존사이에서 현명한 판단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