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9일 일요일

63. 유우랴쿠(雄略) 시대의 진상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5년 추 7월 대지진이 있었다. 지진의 기록이 일본역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인교우(允恭) 5년이 서기 몇 년인지 확인할 기준(Reference)이 없다. 일본은 인교우(允恭) 5년을 서기 416년으로 치고 있다. 인교우(允恭)의 재위를 고진(高珍)이 쯔쿠시(筑紫)의 쿠루메시(久留米市)에 들어 온 서기 410년부터 헤아릴지, 야마토를 정복하고 아스카에서 즉위한 432년부터 헤아릴지 고민해야 된다. 일본은 서기 412년을 인교우(允恭) 원년으로 친다.그러나 일본서기의 연대는 자의적으로 기록되어 역사의 연대를 헤아리는 기준(Reference)으로 쓸 수 없다. 일본서기의 윤공 5년이 서기 몇 년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뜻이다.

서기 438년 송서(宋書)에 왜왕 찬()이 죽고 동생 진()이 왕이 되었다. 왜왕 진(),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서기 443년 송서에 왜왕 제(),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42 (서기 453) 춘정월 천황이 사망했다. 헌데 신라의 왕이 천황의 붕어소식을 듣고 놀라, 조공선 80척의 선단에 악단원을 태워 파견하였다. 이들이 쯔시마( 對馬)에 정박하여 호읍하고 쯔쿠시(筑紫)에 도착하자 또 호곡하였다. 나니와(難波)에 닿자 하얀 마포 옷을 입고 많은 헌상품을 나르고, 여러가지 악기를 안은 채 나니와(難波)에서 서울까지 울며 연주하며 행진하여 빈소에 참례하였다. 겨울 10월 천황을 장사지내고 11월 신라의 조문단이 귀국하였다.

아나호 천황(穴穗天皇, 安康)은 윤공천황의 두째 아들이다. 서기 453년 겨울 10월 장의가 끝났다.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는 여성문제로 신망을 잃었다. 호족들도 태자를 따르지 않고 모두 아나호 황자의 즉위를 바랐다. 이런 사실을 알고 태자가 선수를 쳐서 아나호 황자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아나호 황자도 군대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이 권력투쟁에서 아나호가 승리하여 키나시노 카루 (木梨輕) 태자가 자살하였다. 그 해 12월 아나호 황자가 나라현(奈良県) 텐리시( 天理市)의 아나호 궁()에서 즉위하니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인교우(允恭) 4 (서기 433년 무렵으로 본다) 천황은 “옛적에는 어떤 씨족도 자신의 지반을 지켜, 카바네()가 잘못 됨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즉위하고 나서 호족이 서로 상하를 다투고 치세도 안정되지 않는다. 그동안 실적이 없어 원래의 카바네()를 잃은 자도 있고 남을 속이고 고위의 씨족 이름을 자칭하는 자도 있다. 치세가 안정되지 않는 것은 이런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리라. 나는 박식하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잘못은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호족들은 각자 옳바른 씨성을 보고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모든 씨족들은 쿠카타치(盟神探湯)를 통하여 본래의 신분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쿠카타치(盟神探湯)란 가마솟에 진흙을 물에 섞어 끓인 다음 각자 손을 그 속에 담가 진실을 말 한 사람은 무사하고 가짜는 화상을 입는다고 믿어 사람을 재판하는 고대의 재판 방식이다. 거기 담가서 확인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재판에 질테니 무조건 따를 수 밖에 없는 재판이다. 고대 일본에서 사람의 시비, 정사를 판단하기 위한 주술적인 재판을 말한다. 나라현(奈良県) 아스카 무라(明日香村)에 있는 아마카시노 오카(味橿丘) 에서 모든 고위급 관료들이 이러한 신명재판(神明裁判)에 의하여 새로운 신분을 부여 받았다. 백제출신 호족들을 견제하고 고구려계의 득세를 노린 권력개편인 셈이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카와치의 찌누(茅渟, 大阪市남서부)에 감추어 두고 총애하던 후비, 소토호시노 이라쯔메(衣通郞姬)와 인교우(允恭)의 장자  키나시노 카루(木梨輕)태자의 스캔들을 일본서기는 약간 각색하여 동모형제간의 근친상간으로 바꾸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것이 형제간의 치정보다 더 금기시 된다는 의미이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사태를 깨닫게 되자 태자가 선수를 쳐서 아버지를 독살한다. 인교우(允恭) 24년의 독살기사에 이어 18년을 건너 뛴 다음 42년 천황의 사망기사가 나온다. 서기 453 1월 인교우 사망, 12 14일 아나호 (穴穗)황자가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를 제압하고 천황으로 즉위한다.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마치 신라가 야마토 천황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 사람들은 이 기록 그대로를 믿는다. 쯔쿠시(筑紫)의 안라라국(安羅羅國 = 穴穗國)왕 김무(金武)는 인교우(允恭)천황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사람이다. 신라의 의사를 불러 와 인교우(允恭)의 병을 고쳐 준 인연으로 인교우(允恭)는 김무(金武)를 아들처럼 대 하였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사망하자 쯔쿠시(筑紫) 주둔군 사령관, 신라의 장군 김무(金武)가 야마토에 문상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무는 천황 사망의 배후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김무는 문상객으로 위장한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토오쯔 아스카궁 (遠飛鳥宮)에 도착한다. 품 속에 무기를 감추고 구슬픈 장송곡을 연주하면서 상복을 차려 입은 신라의 군사들은 유유히 궁궐에 들어 온 것이다. 이들이 갑자기 군사로 돌변하여 천황 살해범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를 응징하고 야마토를 장악한 뒤 인교우(允恭)의 후계자임을 선언한다. 나중 등장하는 유우랴쿠(雄略)가 이때 35세의 팔팔한 나이였으나 도덕성에서 김무에게 압도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인교우(允恭)가 야마토를 장악하자 인교우(允恭)를 닌토쿠(仁德)의 아들로 기록하듯, 김무도 인교우(允恭)의 아들 아나호(穴穗)황자로 기록되어 야마토의 황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만세일계를 자랑한다. 그로부터 3년 후 서기 456 8월 안코우(安康)가 살해되고 11 13일 유우랴쿠(雄略)가 하쯔세노 아사쿠라궁(泊瀨 朝倉宮)에서 즉위한다. 유랴쿠(雄略)는 인교우(允恭)의 친 아들이니 일본이 다시 고구려 세력이 된 것이다.

인교우 치세 서기 440년경부터 백제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의 책임자가 개로왕자였고 그는 당시 왜왕 제()로 행세하였다. 동정모인 55, 서복중이 66, 도평해북 95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송서의 기사가 이 때의 이야기이다. 일본열도의 변두리에서부터 백제의 탈환작전이 전개되고 열도에 두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된다. 서기 443년 왜왕 제()가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받는다. 서기 451년 송은 다시 왜왕 제()에게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한다.

서기 453년 인교우(允恭)사망, 456년 안코우(安康)사망, 그리고 유우랴쿠(雄略)의 시대가 시작된다. 일본에서는 유우랴쿠(雄略)의 시대를 서기 457년 유우랴쿠(雄略) 원년, 서기 479년 유우랴쿠(雄略) 23년으로 기록한 일본서기를 믿고 있다. 일본서기는 유우랴쿠(雄略) 23년 간 왕위에 있었다고 조작하여 그 동안에 일어난 역사를 그의 치세에 일어 난 일처럼 만든 것이다.  

서기 455년 백제의 개로왕자는 백제 21대 개로왕으로 즉위한다. 일본서기 유우랴쿠 2년 추 7월 백제가 천황을 위하여 이케쯔히메 (池津媛)라는 여성을 보냈으나 이 여성이 천황을 싫어하고 이시카하노 타테(石川楯)라는 자와 눈이 맞아 천황이 격노하여 그 남녀를 불에 태워 죽였다.

백제신찬 (新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해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은 아레나코(阿禮奴跪)를 파견하여 여자를 구 하였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 챠쿠케이 에하시토(適稽女)을 착식(着飾)하여 제출(提出)하였다. 유우랴쿠(雄略)는 백제의 개로왕이 보낸 여자를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한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대동하고 일본 쿄우토(京都) 북부해안 미야즈 (宮津)에 상륙하여 질풍노도처럼 나라분지의 카쯔라기산 (葛城山)까지 밀고 들어 와 유우랴쿠(雄略)와 대치한다. 그는 일본의 방방곡곡의 지리에 밝은 사람이다. 서기 458년 일어난 일이다.

고사기 유우랴쿠 시대의 기록을 보자.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거대한 맷돼지가 나타났다. 천황이 활을 쏘자 맷돼지가 성을 내고 굉음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천황은 겁에 질려 개암나무 위로 뺑소니쳤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4년 추 8월 천황은 요시노미야 (吉野宮)에 가서 그 부근에서 사냥을 하려고 활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부( = 등에)가 천황의 팔을 물었다. 그러자 아키즈(蜻蛉 = 잠자리)가 나타나 아부(등에)를 잡아 먹어 버렸다. 벌레마져도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이니 아키즈(蜻蛉)의 공적을 기려 야마토()란 이름을 아키즈 시마(蜻蛉嶋)로 바꾸노라. (多古牟良爾 阿牟加岐都岐 曾能阿牟袁 阿岐豆波夜具比 加久能碁登 那爾於波牟登 蘇良美都 夜麻登能久爾袁 阿岐豆志麻登布) 라는 시를 실었다.

위의 신화에서 아부는 유우랴쿠(雄略)의 이름, 유무(幼武)에 대응하고 아키즈로 표현된  세이네이(蜻蛉)는 세이네이(淸寧)와 동일한 발음으로 세이네이천황 (淸寧天皇) 즉 백제의 곤지를 의미한다. 서기 458년 유우랴쿠(雄略)는 곤지를 당하지 못하고 사로 잡힌다. 이리하여 곤지가 일본의 주인이 된다. 야마토의 이름이 아키즈시마 (蜻蛉嶋), 즉 곤지의 섬으로 바뀐다.

또 어느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모든 수행원들이 빨간 허리띠를 메고 파란 옷을 입었다. 그 때 건너 산에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복이나 모양이나 사람들이 천황의 행렬과 꼭 같았다. 거기서 천황이 “야마토에 나 말고 왕이 없는데 거기 가고 있는 것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는 모양도 천황과 똑 같았다. 그래서 천황은 크게 노하여 모두 활을 겨누자 저 쪽에서도 똑 같이 활을 겨누었다.

거기서 천황이 “이름을 대라. 이름이나 알고 싸우자”하니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알려주마. 나는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한 마디로 분별하여 말하는 카쯔라기(葛城)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 이다” 라 하니 천황이 겁에 질려 “알아 모시겠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신령님께서 현세(現世)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읍니다.”라 하며 대어도(大御刀)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 그러자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는 손을 치며 모든 물건을 받았다.

위의 구절을 서기 458년 유우랴쿠(雄略)가 백제의 개로왕과 곤지에게 제압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대어도(大御刀)는 천황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유우랴쿠(雄略)는 이후 퇴위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된다. 유우랴쿠(雄略)의 재위가 23년간이라고 기록되는 것은 역사의 표면에 백제가 드러나는 것을 덮기 위하여 고안된 장치이다. 신화와 역사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강은 넓고도 깊다.

서기 461년 백제의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 개로왕은 동생인 코니키시(軍君)에게 “ 너는 일본에 들어가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곤지(昆支)는 “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읍니다. 다만 국왕의 부인 한 사람을 저와 동행시켜 주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카스리노키시(加須利君)는 임신한 부인을 코니키시에게 맡기며 “ 이 부인은 이미 출산이 가깝다. 혹시 가는 도중 출산하면  어디서든 배에 태워 보내라” 이 부인이 바로 이히토요(飯豊)황녀였다 (구자일 설). 6월 카스리노키시 말데로 부인은 쯔쿠시(筑紫)의 카카라시마(各羅島, 현 加唐島)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세마키미(嶋君)라 지었다. 코니키시(軍君)는 가을 7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서기 461년 곤지의 야마토 입성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호토모노 무로야노 오호무라지 (大伴室屋大連)가 코니키시(軍君)를 맞아 들인다. 세이네이(淸寧)천황이 탄생하고 야마토는 다시 백제의 손에 들어 온 것이다.

같은 달 키비노카미쯔 미찌노 오미 (吉備上道臣)가 야마토의 내란의 소식을 듣고 호시카하 황자에게 가세하기 위하여 40척의 선단을 출발시켰으나 상황이 이미 끝난 것을 알고 철군하였다. 전편의 “62. 고구려산성 코우라산 코우고이시 (高良山神籠石)” 에서 키노죠우 (鬼の城, 오니노키라고도 읽는다)가 거론된 바 있는데 키비노 카미쯔 미찌노 오미 (吉備上道臣)는 오니노키(鬼の城)를 근거로 하는 세력이며 고구려에 충성스런 사람들이니 일본을 탈환하고 있는 백제세력과 전쟁이 불가피하다.

세이네이(淸寧)원년 춘정월 이하레(磐余, 奈良県井市・橿原市)의 미카쿠리궁 (甕栗宮)에서 즉위했다. 공로를 인정하여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를 오호무라지(大連),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眞鳥)를 오호오미(大臣)로 하여 군신들의 역직을 정하였다.
   
일본에서는 세이네이(淸寧) 원년을 서기 480년으로 친다. 왜냐하면 유우랴쿠가 서기 457 -  479년까지 23년간 재위한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우랴쿠의 시대를 457 458년의 2년 간으로 본다. 서기 461년 곤지가 야마토에 들어 와 세이네이(淸寧) 천황이 되었으며 세이네이(淸寧) 원년은 서기 461년이다. 따라서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기에 들어 있는 이후의 모든 역사적 사실은 세이네이(淸寧) 천황 시대에 생긴 일이 된다.

서기 462년 송서에 왜왕 제() 죽고 세자 흥( = 곤지 = 세이네이)을 세우다. ()이 송에 견사하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는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7년 추 7월 천황은 미모로노 오카 (三諸岳)의 귀신이 보고 싶으니 잡아 오라고 명한다. 신하가 미모로노 오카(三諸岳)에 올라가 큰 뱀을 잡아왔다. 그러나 천황이 몸을 청결하게 씻지 않았으므로 큰 뱀이 굉음을 지르며 눈을 번득였다. 천황은 눈을 마주 바라볼 수도 없어 안으로 피하고 뱀은 산으로 돌려 보냈다.

유우랴쿠(雄略) 7년이면 서기 463년으로 대강 알맞는 타이밍이다. 서기 458년 체포된 유우랴쿠(雄略)는 미에(三重)현 이가시(伊賀市)에 연금되었다. 서기 463년 야마토의 왕 곤지가 유우랴쿠(雄略)를 불러 근황을 물었다. 고구려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협조해 줄 수 있는지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우랴쿠(雄略)는“이 놈아! 날 죽여라” 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대화는 끊기고 유우랴쿠(雄略)는 다시 돌려 보내져 서기 479년까지 유배 상태로 있었다. 서기 479년 곤지와 시마왕이 일본을 떠날 때 그를 살해했을 것이다.

미모로노 오카의 귀신에 이어 유우랴쿠(雄略) 7 8월 키비노오미(吉備臣)의 모반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키비(吉備)의 오니노키(鬼の城)에 웅거하던 고구려 세력의 토벌작전이 전개되고 70인의 모반세력을 살해한다. 유우랴쿠(雄略)기에 기록된 키비노오미(吉備臣)의 모반이나 고구려와 신라와의 전란등의 기사는 모두 일본 내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잔당을 소탕하는 곤지의 전쟁기사이다. 신라출병 기사가 있고 여러 명의 야마토 장군들이 전쟁중 사망한다. 큐우슈우(九州)의 쯔쿠시(筑紫)와 쿠루메시 코우라산(久留米市 高良山)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고구려와 신라군이 소탕된다.

일본서기에 세이네이(淸寧)천황의 사적(事蹟)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것 또한 작위라고 보며, 실제로 그는 인교우(允恭), 안코우(安康), 유우랴쿠(雄略)시대를 청산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고분과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에서 출토된  와카타케루 대왕검 (獲加多支鹵大王劍)의 신해(辛亥)년이 서기 471년이라면 당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소탕작전을 전개한 천황은 세이네이(淸寧)였다.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多加利足尼其已加利獲居其名多加披次獲居其名多沙鬼獲居其名半比(表)其名加差披余其名乎獲居臣世々為杖刀人首奉事至今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事根原也(裏)

일본서기는 백제의 영향이 없었던 것처럼 기록하므로 많은 영향을 남긴 사람일 수록 사적을 감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이네이(淸寧)야말로 야마토를 재건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0 (서기 475)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 와  7일간 밤 낮으로 왕성을 공격했다. 왕성은 함락되고 본거를 잃었다. 국왕과 황후, 황자들은 적에게 살해되었다.

야마토에 있던 곤지가 서기 477년 백제에 나왔다. 삼국사기 문주왕 3(서기 477) 4월 왕의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맏 아들 삼근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고 나온다. 곤지는 백제에 들어오기 전 시마왕을 왜무왕(倭武王)으로 삼고 야마토의 왕권을 넘겼다.

왜무왕(倭武王)이 서기477년 남송에 상표문을 올린 것이 이 때이다. 상표문의 내용은 온통 아버지 제() 즉 개로왕의 업적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개로왕의 왕자들이 모두 사망한 지금 시마왕은 개로왕의 뒤를 이을 맏 아들이  된 것이다.

따라서 477년부터 왜무왕이 천황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백제와의 관련을 피하기 위하여 왜무왕은 아예 천황에서 제외되었다. 왜무왕을 계산하면 22대 세이네이(淸寧), 23대 왜무왕, 24대 이히토요황녀(飯豊皇女), 25대 켄조우(顯宗) 의 순으로 된다.

송서 순제 승명 (宋書 順帝 昇明) 1 (서기 477) 왜에서 사신이 와서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는 스스로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을 칭하였다. 전사한 개로왕의 장자가 백제를 포함한 7국제군사를 자칭하는 것이니 별로 모순되는 요구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송서 순제 승명2(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거기서 백제에 대한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송 황제는 그를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3 (서기 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하고 있던 곤지왕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쯔쿠시국(筑紫國)의 병사 5백 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24대 동성왕이다. 유우랴쿠(雄略) 23년이라 하나 세이네이(淸寧)천황 치세이며 그에게는 이 때가 가장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될 시기였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동년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백제도 전쟁물자를 보내 왔을 것이다. 거기서  쯔쿠시국(筑紫國)의 아찌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이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는 유일한 관련기록 이다. 서기 479년 세이네이(淸寧) 천황과 왜무왕이 위의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진다. 유우랴쿠를 죽이고 떠났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서 무었을 하였는지 모른다. 야마토는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유랴쿠(雄略) 22년 추 7월 타니하노 쿠니(丹波, 京都府北部・中部)의 요사노코호리(余社郡, 宮津市) 쯔쯔카하(管川)에 살던 미즈노에노 우라노 시마코 (瑞江浦嶋子)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중 거대한 거북을 낚았는데 거북이 여자로 변하였다.  우라노 시마코 (浦嶋子)는 그 여자가 맘에 들어 아내로 삼았다. 그리하여 함께 저편의 봉래산()을 찾아 선경(仙境)을 헤멨다.

위와 같은 몇 줄의 신화가 왜 유우랴쿠(雄略)기 마지막에 끼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기사를 작성했던 사람들은 분명히 뭔가 멧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신화를 남겼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가  시마왕(斯麻王)이 서기 479년 고구려를 응징한다면서 아무 성과를 내지 못 한 것을 야유하는 기사라 읽는다. 우라노 시마코 (浦嶋子)라는 이름은 시마왕(斯麻王)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서기 479년 송에 보낸 상표문을 보면 뭔가 큰 일을 낼 것처럼 요란하였는데 아무 성과를 내지 못 한 것을 역사가들이 꼬집은 것이 아닐까.   -

) 이 글은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을 참조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 내용을 해석한 것입니다.

2009년 7월 3일 금요일

62. 高句麗山城 高良山神籠石


서기 1898 찌쿠고국(筑後) 코우라산 코우고이시(高良山神) 학계에 소개되면서 코우고이시()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코우라산(高良山)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 치쿠고강(筑後川) 남안 동서 방향으로 돌출한 미노우산지(耳納山地) 서단부 있다. 코우라산(高良山) 남측 1500미터에 걸쳐 1300개의 열석() 확인되었다. 북측에도 열석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확인된 없다. 高良山神 알려진 북부 큐우슈우에서 10개소, 세토나이(瀨戶內) 연안 6개소에 걸쳐 존재가 확인되었고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神籠石란 표고 200 – 400미터의 산 허리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한변이 대략 70 cm 정도의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배열한 것을 말한다. 골짜기에는 성벽을 쌓고 수문을 설치하였다. 高良山神籠石가 발견되고 나서 처음에는 신성한 영역(靈域)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후 발굴성과가 쌓여 가면서 산성(山城)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神籠石의 축조주체와 건설의 경위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주장이다.

대략 70 cm x 70 cm x 100 cm 규격으로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표고 200 – 400 미터의 산허리을 감싸, 山頂쪽으로 板築된 土壘를 설치하고 이 列石 바깥에 목책을 두른 것이 이 산성의 본래 모습이었다고 본다. 전쟁이 터지면 민간인과 군인이 모두 산 정상에 피신하여 적과 대치할 수 있도록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텐찌(天智)천황 때 산성(山城)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나와 있다. 백제 멸망 후 큐우슈우(九州)를 비롯한 여러 곳에 조선식산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神籠石에 관해서는 역사 기록이 없다. 神籠石가 조선식산성보다 시대적으로 앞 선다고 보나 누가, 언제, 왜 축조하였는지 모른다. 역사가들이 이러한 성을 쌓을 필요가 있을 만한 시대를 찾기 위하여 아무리 역사책을 더듬어 보아도 서기 527년의 이와이(磐井)의 난 이외에 九州에서 역사적 이벤트를 발견 할 수 없다. 역사에서 찾아지는 것이 없으니 이와이(磐井)에게서 설명을 구하려 하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현실이다.

九州의 이곳 저곳에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 10개소의 神籠石가 확인되는데 왜 일본의 역사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이 없을까? 이런 기록이 없는 것은 일본서기나 고사기가 객관성이 결여된 역사서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황실의 만세일계라는 신화를 위하여 역사서에 작위가 가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일본 고대사의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았다는 기록은 반 쯤 거짓이다. 천황가의 만세일계는 천황가에서 만든 신화일 뿐 인간세의 역사의 격류는 고대사의 천황만을 피해 가지 않는다. 천황의 재위기간도 작위가 많다. 일본서기의 단편적 기사는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 있으나 위의 천황의 혈통과 재위기간은 믿을 게 못 된다.

그 옛날 0.7 x 0.7 x 1 미터의 석재를 가공하여 표고 200 – 400미터의 산 허리까지 운반하여 산성을 쌓으려면 수 많은 인력과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대규모의 전쟁 행위가 역사에 빠져있다. 일본황실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이 기원전 660년부터 현재까지 만세일계로 내려 왔으니 아무도 황실에 도전하면 안 된다는 신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일본 역사서는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황실이 정복되었던 역사적 사실은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였다. 


코우라야마(高良山)는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에 있고 서쪽으로 뻗은 미노우산(耳納山)의 서쪽 끝 부분이다. 미노우 연산(耳納連山)의 서단에 위치한 코우라산(高良山)은 표고 312미터로 시내 어디서도 바라보이는 쿠루메시 (久留米市)의 심벌이며, 옛날에는 타카무레야마 (高牟禮山)라고 불렸다.


미노우 산지(耳納山地) 쯔쿠시평야(筑紫平野) 가운데에 위치하며 아리아케해(有明海)에서 치쿠고강(筑後川) 따라 북상하면 평야가 목처럼 좁아지는 부분에 반도상으로 돌출해 있다. 高良山神籠石 묻혀져 있는 선단부 부근, 히젠(肥前), 히고(肥後), 찌쿠젠(筑前), 후젠(豊前) 방면등 큐우슈우 각지 빠지는 교통로 근방을 통과해야 되는 전략적 요충이다. 거기에 찌쿠고강(筑後川) 끼고 있으니 하천 매개 하는 수상교통으로 보더라도 전략거점에 다름 아니다.



高良山 중턱에 高良大社 자리잡고 있고, 高良大社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高良玉垂命) 불리는 카미사마(神樣) 모신다. 高良大社 닌토쿠(仁德)천황 55 (서기 367) 또는78 (서기390) 진좌(鎭座), 리쮸우(履中)천황 원년 (서기400)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高良玉垂命神社” 기재되었고, 명신대사(名神大社) 지정된 찌쿠고국(筑後國) 1 ()이다. 제신(祭神)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高良玉垂命) 국내최고 신명장(神名帳)으로 알려진 “筑後國神名帳” 의하면 조정으로 부터 정일위(正一位) 수여되었다고 한다.


닌토쿠(仁德)천황은 313년부터 399년까지 8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초대천황 진무(神武)의 즉위를 기원전 660년으로 올리기 위하여 인교우(允恭)이전의 천황연대를 고무줄처럼 늘려 잡은 탓이다. 실제 닌토쿠(仁德)천황은 서기 397년 즉위하여 419년 전사할 때까지 22년간 왕위에 있었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사망 서기 394년은 정확한 기록이며 공위(空位)의 3년을 계산에 넣으면 닌토쿠 원년은 서기397년이 된다. 따라서 닌토쿠(仁德) 55년이나 78년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고 역사를 다루어야 되는 역사가들이 딱할 뿐이다. 그러므로 상기의 高良大社 유서내용(由緖內容) 가운데 닌토쿠(仁德)천황 또는 리쮸우(履中)천황의 시대는 취하나 서력에 해당되는 연도는 고구려, 백제, 유송의 기록과 일본서기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정한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란 역사상의 누구일까? 위의 高良大社 유서내용(由緖內容) 가운데 닌토쿠(仁德) 또는 리쮸우(履中) 천황의 시대가 인정된다면 5세기 초의 어느 때의 일이 된다. “玉垂”의 원래 일본어는 우즈(ウズ)이며 진귀하다는 뜻의 고어(古語)이다. 어느 특정인물의 이름 “珍”을 일본어로 우즈(ウズ)라 읽고, 우즈(ウズ)를 다시 한자로 玉垂라고 쓰고, 玉垂를 또 훈독하여 타마타레로 읽게 된 것이다. 서기 438년 송서(宋書)에 나오는 “倭王 珍”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서기 438년 倭王 珍은 야마토의 주인이 되어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의 遠飛鳥宮에 군림하게 되나 지금 우리는 九州 福岡縣 久留米市 高良山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서기 410년 경의 역사를 더듬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을 따라가 보자. 서기 400년 영락10년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비병… 농성 왜구.. 성을 쳐부시고 ….안라인 수비병……….…쳐부시고……안라인 수비병.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서기 404년 영락14년,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서기 407년 영락17년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佳城,○○○○○○, 나○성 등을 다시 깨트렸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가장 요긴한 대목에서 해독불가한 글자가 너무 많아 안타깝다. 서기 400 기사를 보면 고구려군은 임나가라국 종발성까지 쫒아 가는데 종발성이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대강 현재의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이 있는 지역 또는 김해시의 가락국 왕궁이 있던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

  
서기 404 야마토의 仁德천황은 야마토의 군대를 파견하여 아신왕의 백제군과 연합작전으로 대방땅을 공격한다. 仁德천황과 아신왕은 근구수(應神王) 아들로 형제간이다. 서기 407 고구려의 응징이 따르는데 서기 400 정벌한  한반도를 넘어 큐유슈유(九州)로 작전지역이 확대된다. 고구려는 대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일거에 장악하는 작전을 쓰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왕자 한 사람을 파견하여 열도를 점차적으로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 임무를 받고 큐우슈우에 들어 온 왕자가 진()이었고 쿠루메시(久留米市) 코우라산(高良山) 중턱에 고구려의 전초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곳에 지금 코우라 대사 (高良大社) 자리잡고 있다.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였고 코우라야마(高良山)는 고구려군의 비상시를 대비한 산성이 된다. 야마토를 정복 할 때까지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이다. 광개토대왕의 왕자 高珍은 서기 410년경 久留米市 高良山에 들어 왔을 것이다. 실제 仁德 14년인 셈이나 일본서기의 셈법으로 헤아리면 反正5년으로 표기된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가 高良山의 高良大社에 鎭座한 것이 바로 서기 410년, 仁德 14년이었다.

서기 412년 영락 22년 10월 광개토대왕이 나이 39세로 사망한다. 서기 414년 9월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진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는 이때 고구려에 들어가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417년 경 쿠루메시(久留米市)에 돌아왔다.

일본서기 仁德 12년 (서기 417) 7월 고구려가 철로 만든 방패와 표적을 보내왔다. 8 월 고구려의 사자를 환대했다. 오하쯔세노 미야쯔코(小泊瀨造)의 祖先의 스쿠네노오미(宿禰臣)를 천황은 사카노코리노 오미(賢遺臣)라 불렀다. 무심하게 기록된 이 부분을 주의깊게 살펴야 된다. 인교우(允恭) 천황의 시호가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으로 宿禰天皇이기 때문이다. 고진(高珍)이란 이름의 고구려군 사령관이 직접 야마토의 닌코쿠(仁德)천황을 찾아와 고구려의 무기를 과시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14 (서기 419) 천황이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사냥하였다. 사슴, 원숭이, 멧돼지가 여기저기 흘러 넘치도록 많이 있는데도 파리처럼 잽싸게 도망가며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점을 보니 섬을 지키는 귀신의 심술 때문임을 알았다. 아카시(赤石, 兵庫縣明石市) 바닷속에 진주가 있는데 진주를 갖다 바치면 짐승을 잡을 있도록 하겠다는 신탁을 얻었다. 여기저기서 아마(海人) 모아 赤石 해저로 내려 보냈으나 수심이 깊어 아무도 바닥까지 잠수하지 하였다. 그러자 아하노쿠니(阿波国) 나가노무라(長邑) 사는 오사시(男狭磯) 아마(海人) 허리에 줄을 감고 잠수하였다. 한참만에 나온 그는해저에 커다란 전복이 있는데 뭔가 빛을 발하고 있다 보고했다. 오사시(男狭磯) 다시 잠수하여 전복을 안고 나왔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전복을 쪼개자 뱃속에서 복숭아씨와 같은 커다란 진주가 나와, 진주를 신에게 바치고 많은 짐승을 사냥하였다. 또한 오사시(男狭磯) 희생을 슬퍼하여 묘를 만들어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묘는 지금도 있다고 전한다. 사카이() 거대한 仁德천황릉을 연상하면 된다.

위의 기사를 우리는 仁德천황의 사망기사로 이해한다. 仁德천황의 이름은 오호사자키(大鷦鷯)인데 윗 기사는 오사시 (男狭磯)의 사망을 전한다.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호사자키(大鷦鷯)가 전사하고 야마토는 패배하였으나 고구려군은 야마토로 진격하지 못 하고 九州로 퇴각한다. 이번 전쟁에서 사카노코리노 오미(賢遺臣)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고 본다.

고구려의 왕자 高珍은 이때부터 병석에 누워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이 때 高珍이 머문 곳이 현 高良大社이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가 高良山의 高良大社에 진좌하여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군은 쿠루메(久留米)로 퇴각하여 사령관이 완치될 때까지 공격에서 수비로 작전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백제와 킨키(近畿)의 야마토로부터 언제 반격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고구려군은 만주에서부터 자기들의 장기(長技)인 산성축성에 들어간다.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랴오닝성 본계시 환런의 오녀산성(五女山城) 사진을 보면 고구려인들이 九州에서 무슨 대비를 할 지 감이 잡힌다. 고구려가 개국초기 자기보다 강한 적을 예상할 때 그들은 산 정상에 피난처를 마련하였다. 九州에 집중되어 있고 세토나이 (瀨戶內)의 전략적 요충에 고구려의 산성이 건설된다.


일본서기 인교우기(允恭紀)를 인용한다. 오아사즈 마와쿠고노 스쿠네 (雄朝津間稚子宿禰) 천(第19代允恭天皇)은 한제이 천황 (反正天皇)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천황은 어려서부터 소극적이었다. 어른이 된 뒤에 큰 병을 앓았던 일도 있어 별로 활동적이지 못 했다. 한제이(反正) 5년 봄 1월 한제이(反正)천황이 사망했다.


돌연 붕어 호족들이 당황하여, 닌토쿠(仁徳)천황의 아들, 오아사즈마 (雄朝津間) 황자 오호쿠사카 (大草香) 황자 사람가운데 조용한 성격의 雄朝津間 皇子 나으리라고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길일을 골라 그에게 나아가 즉위를 구하였으나 雄朝津間 皇子 사양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중병을 앓아 걸어 다니는 마저 들어. 누구에게도 처참한 치료도 보았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그것이 부왕 (仁徳天皇)에게 알려져, 치료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의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해서야 설사 오래 산다 하더라도 중책을 맡기겠느냐?하고 질책받은 일도 있다. 천황 형님 두분도 내게 아무 대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내막은 호족들도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호족들이 다시 엎드려천황 없어서는 인민 다스려 지지 않읍니다.하며 간원했으나 雄朝津間 황자 다시병인(病人)에게는 무리라며 고사했다.


원년(元年) 겨울 12월 비() 오시사카 오호 나카쯔 히메 (忍坂大中姫, 백제 아신왕의 )가 호족들의 곤혹스러워 함을 알고, 물이 그릇을 황자에게 당신이 즉위하지 않으니, 들이 당황해 하고 있읍니다.라고 말을 붙여 보았으나 황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돌아 보지도 않았다. 大中姫命 난처한 나머지, 잠시동안 그냥 있었다. 겨울이라 거센 바람에, 들고 있던 용기의 물이 넘쳐, 정도의 추위속에서 大中姫命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황자 놀라서 일으켜 세우며즉위 중대사이므로 지금까지 거절했으나 족들의 바램이 진지하니 이상 사양하지 않겠다 하였다. 大中姫命 기뻐하며 호족들에게 궁에 모이도록 전했다. 이렇게 하여 雄朝津間 황자는서기 432 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3 춘정월 사자를 신라에 파견하여 의사를 구하였다. 가을 8 신라에서 의사가 천황을 진찰하였다. 병이 나아 천황은 의사를 후하게 사례하여 귀국시켰다고 나오는 것이 允恭천황의 병과 관련된 내용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동맹국이므로 자국의 군대를 九州 파견하고 있었다.


후쿠오카시(福岡市) 사와라구(早良區) 있다. 무로미강 (室見川) 이라는 실개천의 동안(東岸)이다. 실개천 무로미강 (室見川) 따라 올라가면 카나타케시(金武市) 나오고 근처에 요시타케 타카키(吉武高木)유적이 있다. 천손강림의 전설의 고개 히무쿠토우케 (日向峙) 부근이다. 사와라(早良) 신라(新羅)에서 말이며 카나타케(金武) 김무(金武) 신라군의 사령관의 이름이다. 고구려군의 동맹군으로 九州 상륙하여 카나타케시(金武市) 주둔하였다.


서기 419 부상으로 쓰러진 고구려군 총사령관 高珍 병상에서 여러 해를 보낸다. 고구려 최고의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신의 가호를 빌었으나 사령관은 완쾌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에 급히 고구려식 산성이 축조된다. 산성의 흔적을 지금 코우고이시()라고 부르고 있다. 처음 발견될 영역설(域說) 연상하였던 학자들이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코우고이시 () 카미사마 (神樣) 강림하여 앉을 있도록 마련된 이와쿠라(磐座)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소위 () 들어 박힌 돌이다.


서기 428년경 신라군의 김무(金武) 신라에서 명의를 사람 데려 온다.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신라에서 의사가 오고나서 고진(高珍) 병이 나은 같다. 金武 이후 高珍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金武城 安羅羅國王으로 진다. 福岡市 전체가 金武 安羅羅國이다. 安羅羅國 이때 고구려의 가장 가까운 맹방인 것이다. 신라군의 金武 允恭 다음에 등장하는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즉위를 둘러 ()치레 이야기의 진상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다. 당시의 진실과 일본서기 기록의 의미에는 지대한 편차가 존재한다.


일본서기에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천황이 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리쮸우(履中)天皇, 한제이(反正)天皇, 인교우(允恭)天皇 3명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 났다고 되어 있다. 리쮸우(履中) 닌토쿠(仁德) 아들이 맞고, 한제이(反正)는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 아들이다. 인교우(允恭)天皇 고구려의 왕자 高珍으로 야마토를 정복한 적장(敵將)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만들어 만세일계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高珍이 야마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전쟁행위가 모두 역사기록에서 제외된다. 천황가의 만세일계 그리고 영원한 군림만이 천황가의 목표였고 이를 위한 심모원려가 일본서기였다. 이런 역사서를 기본으로 고대사를 연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학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천황가의 역사조작은 치밀하고 완벽하여 지금까지 아무도 일본열도의 神籠石가 고구려의 유물이라고 생각 해 보지 않았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28 (서기 429)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상표문에고구려의 , 야마토국를 지도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 격노하여 고구려의 사자를 야단치고 상표문을 찢어 버렸다고 나온다. 우리는 기사가 서기 429 高珍 건강을 회복하고 야마토에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으로 본다. 당시 야마토의 천황이란 한제이(反正) 말한다. 태자 兎道稚郞子 이미 고인이었고 反正천황은 兎道稚郞子 아들이니 일본서기 저자가 착각한 같다.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한 反正천황은 미야즈로 도망간다. 서기 432 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高珍 19 인교우(允恭)천황으로 즉위한다. 일본서기는 그가 닌토쿠(仁德)천황의 셋째 아들이라 기록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神籠石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코우라산 (高良山): 福岡県久留米市 高良山 南側의 約1500미터에 걸쳐 約1300個의 列石이 確認되었다. 北側에도 돌이 있었다고 推定하나 確認된 바 없다. 이 부분은 日本書紀에도 기록된 天武7年12月(서기 679)筑紫의 大地震으로 崩壊되었다고 생각된다.

2. 조야마 (女山): 福岡県미야마市瀬高町女山에 있다. 가까운 高田町의 竹飯의 山에서 1미터 内外의 長方形의 石을, 잘라내서, 山위로 날라 총 3킬로 가까이 整然하게 나열하였다.

3. 오쯔보산 (おつぼ山): 佐賀県武雄市橘町에 있다. 昭和39年調査에서 列石의背後에 版築에 의하여 축조된 土塁가 存在하며, 또 列石의 全面에 3 미터 間隔으로 堀立柱의 痕跡이 발견되어 山城임이 確定的으로 되었다.

4. 라이잔 (雷山): 福岡県前原市의 雷山(標高955m)의 北中腹, 標高400 – 480 미터의 山中에 축조된 고대산성이다. 城의 範囲는 東西300m, 南北700m정도로 생각된다. 여기서 糸島地方은 물론 博多湾이나 玄界灘까지 일망무제로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5. 고쇼가타니 (御所ヶ谷): 福岡県行橋市西南部와 京都郡勝山町, 犀川町가 境界를 接하는 山塊에 位置하며, 그 대부분이 유쿠하시시 (行橋市) 側의 南斜面에 있다. 列石東端部에 있는 標高 247m의 호토기산(ホトギ山)을 最高所로 하여, 그 延長은 約3km에 달한다. 土塁는 높이 約5m、幅 約7m로 質이 다른 흙을 版築工法에 의하여 쌓아 올렸다.

6. 카케노우마 (鹿毛馬): 福岡県嘉穂郡頴田町에 있다. 서기 1997년까지의 調査 結果, 水門部(西側谷部分)에2개의 暗渠와 版築에 의한 土塁의 모양이 알려졌다. 이번 調査에서 土塁中에 直径45cm의 기둥(柱)이 발견되고, 약 3m 間隔으로 8本을 나열한 것이 確認되었다. 以前부터 確認된 바 있는 約3m 間隔으로 列石前에 설치된 直径 約30cm의 기둥과 今回 発見된 土塁中의 기둥을 組合하여, 다시 板材를 써서, 列石을 基礎로 설치된 土塁를 축조했다고 생각된다. 土塁中의 柱列의 存在는, 古代의 版築이라는 土木技術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暗渠는 모두 全長約 18m 規模로, 土塁幅 約9m, 柱의 間隔3m를 단위로 하는 工事의 規格性이 엿 보인다.

7. 하키 (杷木): 福岡県朝倉市杷木地区에 있다. 神籠石은 長尾城과 우노기죠우 (鵜木城)를 둘러 쌓듯 약 2km에 걸쳐 縦横70 cm정도의 큰 돌을 이어놓고 土塁를 쌓았다. 2 곳에 水門이 보이고, 옛날의 土木工事가 나무랄 데 없었음을 보여준다.

8. 이와키산 (石城山): 山口県熊毛郡大和町에 있다. 서기 1909년 秋 発見되었다. 당시까지 九州이외에는 存在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던 神籠石의 遺跡이 本州에서도 発見되었으므로, 考古学界의 注目을 받았다. 列石線은 南側鶴ヶ峰부근標高342m를 정점으로 下向하여, 石城五峰(高日ヶ峰・星ヶ峰・鶴ヶ峰・築ヶ峰・大峰)을 둘러 싸고, 下部는 北水門의 標高 約268m까지 내려온다. 列石線의 総延長은 2533m에 이르는 大規模의 것이다. 列石線이 골짜기를 건너지른 곳에는 높은 돌담 벽을 쌓고, 그 중앙부에 수문을 설치하였다.

9. 키노죠우 (鬼の城, 오니노키라고도 읽는다): 岡山県 소우샤 (総社) 市에 있다. 壁은 要所에 높은 돌담을 쌓아 연결하기도 하며 強固한 土塁를2 .8 Km정도 둘러 쌓았다. 城壁은 幅 約7m, 높이 約6m, 外・内側에 평평한 돌이 1.5 m幅으로 깔려있다. 城壁이 골짜기 부분에 水門이 설치되어 있다. 現在6개소 確認되었고, 모두 하반부는 돌담, 상부는 土塁의 構造이다. 이 水門은 城内의 물을 管理하기 위한 排水口이다.

城門은 東西南北의 4 개소에 있고, 모두 通路部分에 바닥돌이 깔려있다. 西門 南門은 거의 같은 規模의 門으로, 12本의 기둥으로 지지된 楼門으로 생각된다. 西門부근에는 角楼라 불리는 防御施設이 있다. 城内는30 ha에 달하는 넓이이며, 城庫로 보이는 礎石建物跡도 6 -7棟 発見되었다. 여러 神籠石遺跡 가운데서도 중요도가 높은 城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오부쿠마 (帯隈): 佐賀市 北部山麓에 있는 오부쿠마야마 (帯隈山) 에 축조된 古代山城의 흔적이다. 서기 1941년 発見되고, 1964년 発掘調査되었다. 切石을 연결한 列石線은 北側山頂部에서 내려와 南側山 기슰을 돌아, 말굽쇠 형상을 하고 있다. 돌은 花崗岩으로, 높이 60센티 정도의 直方体로 절단하여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