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8일 일요일

71. 일본국의 출현

고대부터 왜(倭, 야마토)로 불리던 열도의 이름이 일본으로 바뀐 것은 서기 670년 경이다. 서기 663년 백강의 전투 (The battle of baekgang) 이후 “대왕의 나라 쿠다라(百濟)”가 사라지자 열도는 홀로 서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어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 하였으며 이 때부터 비로소 자주권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일본열도는 백제의 일부였으며 백제왕실의 관리 아래 있었다. 본국은 망했지만 일본열도를 관리하던 백제왕실은 천손강림의 역사관을 열도에 정립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하여 자신들을 하늘의 자손으로 신격화하고 일본의 왕을 천황이라 칭하였다. 백강의 전투에 참전하였던 텐무천황 (622 – 686)이 일본의 역사서 편찬을 명하였다 하니 실로 발 빠른 대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부터 일본이라는 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고 많은 용어가 새로 등장한다. 천황, 동궁(東宮), 태자(太子)등의 용어도 이때 등장하였다. 이 때까지 야마토에서는 현직의 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이는 백제에서 야마토의 왕을 결정하므로 야마토에서는 누가 다음 왕위에 오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해당되는 동궁이나 태자 등의 용어를 쓰지 않았다. 백제가 멸망한 뒤 일본에서는 부왕 재위중 동궁이나 태자를 지정하여 자기 후손이 왕위를 잇도록 하는 장치를 만든다. 백제멸망 이전에는 열도에 없던 제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서기 670) 12월 왜국(倭國)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붙였다고 하였다.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서기 945년 성립한 구당서(旧唐書)에 일본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일본국은 왜의 다른 명칭이다. 이는 나라가 해뜨는 곳에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이요, 혹은 말하기를 왜국이라 함은 떳떳치 못한 이름이어서 스스로 싫어해서 이름을 일본이라 고친 것이다.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或曰、倭國自悪其名不雅、改爲日本。

백제의 무령왕 이후 야마토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은 것은 안칸천황이 케이타이의 뒤를 이어 야마토를 장악한 서기 531년이다. 안칸(安閑)– 센카(宣化) 는 무령왕의 동생이며 킨메이(欽明)는 무령왕의 아들이다. 그 뒤 안칸(安閑)– 센카(宣化) – 킨메이(欽明) – 비타쯔(敏達) – 요메이(用明) – 스슌(崇峻) – 스이코(推古) – 죠메이(敍明) – 코오교쿠(皇極) – 코오토쿠(孝德) – 사이메이(齊明) – 텐찌(天智) – 코우분(弘文) – 텐무(天武) – 지토우(持統)까지 일본서기에 나온다. 위에 기록된 천황들 가운데 스슌과 스이코시절 야마토는 백제에 반기를 들고 열도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나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있던 백제 세력에 의해 모두 좌절되었다.

서기 587년 4월 2일 요메이(用明)왕이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놓고 불법승 (仏法僧)의 삼보(三宝)에 귀의 (帰依)하겠다고 선언한다. 천연두가 창궐하던 시대였다. 천연두에 걸린 왕이 절에 들어가 부처님께 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데리고 왕이 누워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서기 587년 4월 야마토의 요메이(用明)왕이 불문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6월 카시키야 히메 (炊屋姫尊, 후일의 스이코 여왕) 의 명에 의하여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와 야카베황자 (宅部皇子)가 토벌된다. ( 64. 아좌태자 및 67. 간고지 가람연기의 암시 참조). 그 해 7월 요메이(用明)왕이 죽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가 토벌되고, 8월 스슌(崇峻, 530 – 592)이 등극한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을 일본서기는 불교도입을 둘러 싸고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일으킨 전란쯤으로 기술하였으나 간고지 가람연기에는 이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다. 이는 이 사건이 불교와 관계없는 순수한 정치적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서기는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카시키야 히메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린 것으로 기록하여 주살된 것 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아나호베황자는 당시 큐우슈우 왕이었고 요메이(用明)왕이 불문에 들어가면 야마토왕이 될 사람이었다.

당시 야마토는 비다쯔(敏達)의 비(妃) 카시키야 히메 (炊屋姫尊, 후의 스이코여왕),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 스슌(崇峻)등을 중심으로 야마토의 자결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가 이에 반대하여 백제와 큐우슈우가 지정한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를 제거한 것이 서기 587년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이었다고 본다. 불교도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라는 일본서기 설명은 큐우슈우의 존재를 감추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때 주살된 아나호베황자가 킨메이(欽明)왕과 그의 비 소가노 오아네(蘇我小姉) 사이에서 태어 난 아나호베황자(穴穂部皇子)로 본다. 그러나 큐우슈우 왕 아나호베황자 (? – 587) 는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요메이(用明)왕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나호베황자 (? – 587)와 관련된 일본서기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아나호베황자의 주살은 백제와 큐우슈우에 대한 야마토의 반역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백제의 의지에 없던 스슌(崇峻)이 출현한다. 일본서기는 요메이(用明) 왕이 587년 7월 9일 죽었다고 기록했으나 그는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따라 우사시 (宇佐市)의 불문에 귀의했을 것이다. 당시의 우사(宇佐)는 “67. 간고지 가람연기의 암시”에서 거론된 법흥황 (훗날의 백제 법왕)의 수도였다.

서기 587년의 야마토의 반란은 591년 큐우슈우 정벌로 이어진다. 스슌(崇峻) 4년 (서기 591) 11월 4日,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각 씨족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부장(副将), 대장( 隊長)으로 하여 2만여의 군사를 딸려 쯔쿠지(筑紫)에 출병하였다

서기 591년 야마토의 큐우슈우 정벌의 결과를 알리는 기사는 없지만 591년 큐우슈우의 법흥년호(法興年號) 선포, 592년 야마토의 스슌(崇峻) 암살은 큐우슈우 세력이 그 후의 사태를 주도하였다는 증거이다.

스슌(崇峻) 5년 (서기 592) 11월 3일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는 스슌(崇峻)천황을 살해하고 당일 쿠라하시노 오카노 미사사기 (倉梯岡陵)에 매장하였다. 이 시역사건에 대하여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는 아무 문책도 받지 않았고 계속하여 권좌에 있었다. 이는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의 의지에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다.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란 누구일까?

우리는 일본열도의 역사가 만세일계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거론되고 있는 시대에 세개의 권력주체가 존재하였다. 하나는 백제본국의 위덕왕, 또 하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의 천황, 세번째 주체는 열도의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구주백제 (九州百濟)의 존재이다. 이 시대 야마토의 천황은 큐우슈우(九州)를 지배하지 못 하였다.

스이코(推古) 4년 (서기 596) 11월 호코지(法興寺) 가 완공되고 다음 해인 서기 597년 4월 백제의 아좌태자가 아스카를 방문하였다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아좌태자 (570 – 598)는 일본역사에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 (押坂彦人 大兄) 황자라고 기록되었고 여러가지 정황을 참작하여 서기 598년 아스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아좌태자는 백제 위덕왕의 장자이며 큐우슈우의 왕이었고 현 오오이타(大分)현 우사시(宇佐市)가 그의 수도였다. 당시 야마토는 큐우슈우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서기 598년 12월 백제의 위덕왕 또한 역사의 인물이 된다. 같은 해에 백제왕계의 본류 위덕왕 부자(父子)가 사망한 것이다. 백제왕위는 위덕왕의 동생 혜왕과 법왕이 즉위하나 단명으로 끝나고 서기 600년 무왕이 즉위한다. 백제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큐우슈우 왕으로 아좌태자의 8살 된 어린 아들, 타무라(田村) 황자가 즉위하자 기회를 엿보던 야마토는 열도의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큐우슈우를 공격한다. 섭정 우마야도 토요토 미미 (廄戶豐聰耳) 황자가 이 독립전쟁(?)에 가장 열성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는 백제왕실의 방계이므로 야마토의 왕이 될 가능성도 없었고 서기 602년과 603년의 큐우슈우 원정군 사령관들이 모두 그의 동생들이다.

8 세기 일본서기 편찬시 야마토의 유일정통성을 확보하려던 역사가들이 섭정 우마야도 토요토 미미 (廄戶豐聰耳) 황자의 대 백제 독립노선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 것이 그 후의 쇼토쿠태자 (聖德太子) 의 기록들이다. 백제본국이 없어지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되었던 7세기 말 일본은 쇼토쿠태자를 이상적인 성인 정치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야마토는 백제와 아무 관련도 없으며 쇼토쿠태자와 같은 이상적인 지도자들이 열도에 율령제를 도입하여 근대적인 국가의 틀을 만들었다고 역사를 미화한다. (37. 성덕태자 편 참조)

스이코(推古) 8년 (서기 600) 춘2월 신라와 임나가 서로 공격하였다. 여왕은 가야를 구하기 위하여 사카이베노 오미 (境部臣)를 대장군으로, 호쯔미노 오미 (穗積臣)를 부장군으로 임명하고 일만여의 병사를 주어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곧장 신라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 신라에 상륙하였고 다섯 개의 성(城)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신라왕은 백기를 들고 투항하여 타타라(多多羅), 스나라(素奈羅), 호찌키(弗知鬼), 와다(委陀), 남가라(南迦羅), 아라라(阿羅羅)의 여섯개의 성(六城)을 할양하였다.

일본서기는 야마토가 큐우슈우를 공격한 것을 모두 신라를 공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서기를 읽을 때는 문자에 구애되지 말고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서기 562년 킨메이 (欽明) 시대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하였으므로 이 시대 임나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았고 야마토가 큐우수우를 공격한 것을 신라을 공격하였다고 빗 대어 기록한 것이다. 초전에서 소정의 성과를 거두고 철군한 듯 한데 그 후 큐우슈우 측이 고분고분하게 야마토를 따르지 않고 저항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는 백제 무왕이 즉위한 뒤 곧 정권을 안정시키고 큐우슈우의 안보를 챙긴 결과일 것이다. 야마토의 우마야도 토요토 미미 (廄戶豐聰耳) 황자는 서전의 승리로 권력기반을 다지고 자기의 궁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스이코(推古) 9년 (서기 601) 2월 황태자가 이카루가궁(斑鳩宮)의 건설에 착수한다. 그 해 9월 신라의 첩자 카마타(迦摩多) 가 쯔시마에서 체포되어 야마토로 압송되고 11월 조정은 신라침공에 관해 논의한다. 신라의 첩자 또한 신라가 아니라 큐우슈우에 대한 이야기로 본다. 대백제 강경파 우마야토 (廄戶) 황자가 반란의 목소리를 높이던 스이코(推古) 10년 (서기 602) 봄 2월 쿠메황자(來目皇子)를 격신라장군(擊新羅將軍)으로 임명하고 25,000명의 군사를 배속시켰다. 그 해 4월 쿠메황자는 쯔쿠지(筑紫)에 상륙하여 시마노 고오리(島郡)로 진군하여 군량수송 선박을 징발한다. 6월 오호토모노 무라지 쿠이 (大伴連囓), 사카모토노 오미 아라테 (阪本臣糠手)가 백제에서 돌아왔다. 이 때 쿠메황자는 병들어 누워 정벌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10월 백제승 관륵(觀勒)이 입조하여 역본, 천문, 둔갑, 방술(方術)의 서적을 바쳤다. 다음 해 (서기 603) 봄 2월 쿠메황자가 쯔쿠지에서 사망하였다.

일본서기는 쿠메황자가 큐우슈우에서 병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전쟁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서기 602년 야마토 군은 큐우슈우군의 반격을 받아 야마토의 사령관이 부상으로 전사한다. 쿠메황자는 당시의 섭정 우마야도 (廄戶)황자의 동부동모의 친동생이다. 백제왕의 명을 전하는 사절들이 분주하게 백제와 야마토를 왕래한다. 관륵과 같은 거물 승려가 야마토에 들어 와 선진의 문물을 전수하고 야마토의 지배자들에게 백제왕의 뜻을 전한다.

스이코(推古) 11년 (서기 603) 4월 쿠메황자의 배 다른 형 타기마(當麻)황자를 정신라장군(征新羅將軍)으로 임명하였고 7월 3일 타기마황자가 나니와(難波)를 출항하였다. 그는 7월 6일 하리마(播磨)에 도착하였으나 그와 동행하던 그의 처 토네리 히메왕 (舍人姬王)이 아카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아카시의 히가사노 오카노 우에(赤石檜笠岡上)에 장사지내고 타기마황자가 돌아 와 전쟁이 중지된다. 그 해 10월 천황은 거처를 오하리다 궁(小墾田宮)으로 옮긴다.

서기 603년의 타기마황자의 큐우슈우 원정 또한 실패로 끝난 듯 하다. 큐우슈우 군이 반격에 나서 야마토를 향하여 진격한다. 현재의 오오사카를 출항한 타기마황자의 군대가 코오베(神戶)에 도착했을 때 이미 큐우슈우의 군대는 거기까지 진출하여 야마토의 원정군을 괴멸시켜 사령관의 아내가 전사하고 큐우슈우 군은 야마토를 접수한다. 일본서기에 큐우슈우 군이 야마토를 접수하였다는 직설적인 기록은 나오지 않으나 전후사정을 고려하면 그렇게 추측된다.

일본서기는 신라원정군의 기사를 흐지부지 마루리하고 곧 쇼토쿠태자의 제도개혁으로 주제를 바꾼다. 12 관위제와 17조 헌법이 나오고 불교흥륭의 조가 발표되며 견당사가 파견된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이 모든 개혁정치를 야마토의 것으로 만들고 이 시대 야마토의 자주권을 추구하였던 쇼토쿠태자의 공로인 것 처럼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기를 읽어가면 변명이나 거짓으로 기록하기도 하지만 전후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명백한 인과관계를 밝히지 않은 채 주제나 인명을 달리 하는 기사가 이어져 나오는 수법을 구사한다. 후인들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며 역사를 기록 한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큐우슈우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이 전쟁의 주모자 들을 관대하게 처벌한 것 같다. 주모자 우마야도 황자는 모든 정치에서 손 떼고 불교에 전념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다리시북고의 할머니에 해당하는 스이코 여왕은 그대로 왕위에 남아 다리시북고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불교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수서 왜국전에 기록된 다리시북고는 타무라(田村)황자이며 아좌태자의 아들로 서기 600년 큐우슈우 왕이 되었다.

스이코 시대의 견당사 기사는 모두 다리시북고의 견수사 기록의 카피이며 서기 630년 죠메이 2년의 제 1차 견당사 기사는 다리시북고의 견수사의 후속편이다. 왜냐하면 서기 628년 할머니 스이코(推古) 여왕이 운명하자 큐우슈우 왕 다리시북고가 죠메이(敍明)천황으로서 야마토를 직접 통치하기 때문이다. 수서 왜국전에 나오는 그의 견수사 파견은 그가 큐우슈우 왕일 때의 기록이며 서기 630년 야마토의 제 1차 견당사는 그가 야마토의 죠메이(敍明)천황이 되어 파견한 기록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629년 죠메이천황의 즉위와 관련하여 장문의 권력투쟁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 부분은 소설로 친다.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야마토는 스스로의 왕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적이 없으며 스이코 여왕의 야마토 정권은 서기 603년의 패전이후 사실상 다리시북고의 지배 아래 있었다.

서기 670년 출현하는 일본은 서기 629년 즉위하는 죠메이 천황에서 그 뿌리가 시작된다. 일본서기는 죠메이 천황과 관련된 기록을 최소화 하였으나 이 사람은 백제, 큐우슈우, 야마토를 호령했던 자이안트이다.

서기 663년 백제의 멸망과 일본의 출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 34년전, 서기 629년 야마토의 죠메이천황이 등장한다. 일본서기는 죠메이천황기에 그의 전력에 관하여 일절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기 593년생이며 629년 죠메이 천황등극시 37세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백제 위덕왕의 직계손자인 타무라황자가 나이 37세가 될 때까지 일절 공직을 수행하지 않고 개인의 신분으로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일본의 역사에 이 부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죠메이천황에 관련된 보다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사람의 아들들에 의하여 일본국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오직 수서 왜국전에 서기 600년과 607년 다리시북고의 견수사 기사가 남아 있지만 일본서기에 다리시북고의 기록이 없으므로 일본은 다리시북고 = 타무라황자 라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서기는 그의 시호를 오키나가 타라시히 히로누카 천황 (息長足日廣額天皇) 이라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타라시히 히로 (足日廣) 부분이 위의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와 같은 말이라고 본다. 타라시(足)는 다리시(多利思)와 같은 말이며 히히로(日廣)가 북고(北孤)와 대응한다.

그는 비타쯔천황의 손자이며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彥人大兄皇子)와 어머니 누카테 히메(糠手姬) 황녀사이에서 서기 593년 태어났다. 우리는 지금까지 히코히토 황자란 백제의 아좌태자(570 – 598)의 일본 이름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족보는 백제 위덕왕 – 아좌태자 – 다리시북고 (타무라 황자)로 되는데 위덕왕 (일본이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을 일본서기에 기록할 수 없으니 위덕왕의 친 동생 비타쯔의 후손으로 처리하였다.

서기 628년 3월 7일 스이코(推古)천황이 사망하고 629년 정월 4일 타무라 황자(田村皇子)가 즉위하니 그가 죠메이(敍明) 천황이다. 그 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서기 593년 큐우슈우의 토요노쿠니(豊國) 우사(宇佐), 현재의 우사신궁 (宇佐神宮) 자리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누카테 히메(糠手姬) 황녀는 타무라(田村)황자, 나카즈(中津)왕, 다라(多良)왕의 3 형제를 낳았다. 누카테 히메의 이름은 타무라(田村) 황녀라고도 하는데 그녀의 이름을 따라 장남의 이름이 타무라 황자가 되었고 이후 이들 주변에 타무라(田村), 타카라(寶), 다메(田眼)등의 비슷한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일본서기 죠메이 2년 (서기 630) 정월 12일 타카라(寶)황녀를 황후로 세워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가 카즈라기(葛城)황자, 두째 하시히토(間人) 황녀, 셋째 오호아마(大海)황자이다. 여기 등장하는 두 황자가 나중 텐찌(天智)와 텐무(天武)천황이 되어 현 일본천황가의 조상이 되므로 죠메이(敍明)천황이야말로 천황가의 뿌리인 것이다.

또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딸 호테이노 이라쯔메(法提郎媛)와의 사이에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 615 – 645) 황자를 낳았다. 그런데 고사기의 비타쯔 기록에는 비타쯔와 스이코 사이에 태어 난 타메(田眼)황녀가 죠메이(敍明) 천황에게 시집갔다고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이 기록이 빠져 있다. 고사기는 스이코천황에서 끝나므로 죠메이시대의 역사는 고사기에 없고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부분이다. 고사기에는 없고 일본서기에서만 다룬 제 34대 죠메이 천황에서 41대 지토천황까지의 역사는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당시 황실의 역사관에 맞춰 적극적인 가공을 서슴치 않았을 부분이다. 8 명의 천황이 기록된 세월이지만 죠메이 당대와 그의 자식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이다.

타메(田眼)황녀의 기록과 관련하여 고사기가 완성된 서기 712년과 일본서기가 완성된 서기 720년의 역사인식에 변화가 감지된다. 고사기가 기록한 타메(田眼)황녀의 기록을 일본서기는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죠메이(舒明) 3년 (서기 631) 3월 백제왕 의자(義慈)가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가 나온다. 훗날의 기록을 보면 이 때 풍장(豊章)뿐 아니라 왕자 선광(善光)이 함께 야마토의 죠메이천황에게 왔다. 당시 백제는 무왕의 치세로 의자왕은 서기 641년 즉위한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서기 631년 의자왕이 일본에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고 적었다. 일본역사가들은 통상 죠메이천황의 둘째황자 오호아마(大海)가 서기 631년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풍장과 오호아마가 동일인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때부터 그는 두 개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죠메이 13년 (서기 641) 10월 9일 천황이 쿠다라노 미야 (百済宮) 에서 죽었다. 10월 18일 천황의 빈소를 차렸는데 동궁 (東宮) 히라카스 와케 황자 (開別皇子) 가 16세의 나이로 조사를 읽었다는 기사로 죠메이기가 끝난다. 죠메이기의 마지막에 한 줄 무심하게 첨가된 히라카스와케의 나이 16세라는 기사는 심오한 역사적 의미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쿠테타를 통하여 천황가를 탈취한 텐찌천황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예로부터 상(上)을 범(犯)하는 것을 가장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보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은 천황가에서 확립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권력을 장악한 자기 자신들이 바로 을사의 변이라는 쿠테타를 통하여 황실을 범하였다. 세월이 지나 그 후손들이 자기 조상들의 행위를 미화하고 역사를 재단하여 상(上)을 범(犯)했던 일이 없었던 것으로 만든 것이 서기 720년 일본서기를 완성한 사람들이 한 일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42년 (서기 641) 봄 3월 왕이 죽었다. 서기 641년 의자왕이 즉위했다. 백제의 무왕이 서기 641년 3월 사망하고 그 해 10월 9일 야마토의 죠메이 천황도 사망하고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한다. 요새 말로 하면 백제 주식회사 일본지점장이 백제본사 사장으로 부임한 것이 아니겠는가?

서기 641년 히라카스와케 황자가 나이 16세로 조사를 읽었다는 기사는 텐지천황의 생년이 서기 626년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삽입된 기사이다. 왜 그의 후손들은 그가 서기 626년에 태어났다고 증언할 필요가 있었을까? 첫째 이유는 죠메이 천황과 그의 부친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 ( = 아좌태자) 는 백제 위덕왕의 적통이므로 쿠테타 세력들은 자기들의 혈통을 히코히토 또는 죠메이에 연결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죠메이와 텐찌의 모친 사이메이(齊明)가 함께 생활한 것이 10여년 밖에 되지 않으므로 그 10여년 간에 해당되는 서기 626년 텐찌가 태어난 것 처럼 하기 위하여 첨가된 기사일 것이다. 이 기사 때문에 일본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텐찌의 서기 626년 출생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서기 671년 병사한 텐찌는 46세의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 되었다. 몸이 허약했다는 기록도 없고 요양다닌 기록도 없는 건강한 텐찌가 46세에 죽었다는 것은 어딘가 수상하다. 그의 동생 텐무는 65세를 살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타무라(田村)황자는 서기 593년 토요노쿠니(豊國)의 우사(宇佐)에서 당시 큐우슈우 왕 아좌태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무렵 아좌태자의 숙부 법왕대왕 (서기 599년의 백제 법왕)은 아좌태자에게 큐유슈우 왕의 자리를 맡기고 불법을 펴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좌태자가 서기 598년 야마토에서 사망한다. 서기 600년 수서왜국전에 나오는 아베계미(阿輩雞彌)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나이 8세로 큐우슈우의 왕이 되었다. 아베계미(阿輩雞彌)는 일본에서 오호기미(大王)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의 시대 서기 600년과 607년의 견수사 기사가 있고 수의 배세청이 608년 큐우슈우의 다리시북고를 면담하고 돌아갔다.

백제 위덕왕 사후 백제왕권이 안정되지 않고 큐우슈우왕으로 나이어린 손자 다리시북고가 즉위하자 야마토의 스이코 여왕은 섭정 우마야토 황자의 주청에 따라 서기 600년, 602년, 603년 큐우슈우를 병합하고자 3 차례의 정복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야마토가 패배하여 이후 우마야토 황자는 정치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이며 스이코 여왕은 큐우슈우의 개혁을 받아 들인다. 여기에서 17조 헌법이니 12 관위제가 등장한다. 서기 610년이 지나면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혼인 할 나이가 된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딸 호테이노 이라쯔메(法提郎媛)가 큐우슈우에서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황자를 출생한 것은 서기 615년 경의 일이다. 따라서 호테이노 이라쯔메(法提郎媛)와의 혼인은 서기 614년경의 일이 된다.

야마토의 스이코 천황은 큐우슈우의 무력앞에 굴복하였고 자기 손자에 해당하는 다리시북고에게 넷째 딸을 주었다. 그녀가 문제의 비타쯔 천황의 딸 타메(田眼)황녀이며 서기 613이나 614년경 혼인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타메(田眼)황녀는 천황의 딸이므로 황후로서 손색없는 혈통이다. 고사기에는 기록되었으나 일본서기가 무시하고자 한 타메(田眼) 황녀는 불행하게도 자식을 생산하지 못 하였다. 자식을 남기지 못한 탓으로 그녀는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운명이 된다. 역사는 중조(重祚, 두번 왕위에 오름)라는 특이한 케이스를 여기 적용하여 타메(田眼)황녀와 사이메이(齊明)를 동일인으로 만들어 타메(田眼)황녀를 역사에서 지워버린다. 그렇게 하여 조상들이 상(上)을 범(犯)한 전례 또한 역사에서 삭제하는 효과를 거둔다.

죠메이 천황에 이어 제 35대 코우교쿠(皇極)천황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타메(田眼)황녀이다. 그러면 역사의 승자들의 그룹인 사이메이(齊明)는 어떻게 되었을까?

죠메이(敍明) 2년 (서기 630) 정월 12일 타카라(寶)황녀를 황후로 세워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가 카즈라기(葛城)황자, 두째 하시히토(間人) 황녀, 셋째 오호아마(大海)황자이다. 자식들을 보면 사이메이(齊明)의 기사지만 타카라(寶)황녀라는 기술은 타메(田眼)황녀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타메황녀를 지우고 사이메이로 덧 칠했기 때문에 타카라 황녀가 실제 사이메이의 이름인지 아닌지 혼란이 생긴다.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사이메이(齊明)는 시종 사이메이로만 지칭한다.

사이메이(齊明)의 출생년을 두고 일본 역사가들은 둘로 갈린다. 서기 594년 설과 601년 설이다. 사람이 둘이므로 두개의 출생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라고 믿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코우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코우교쿠(皇極)를 서기 594년 생, 사이메이(齊明)를 601년 생이라고 본다. 일본서기는 이 두 사람을 한 사람으로 기술하므로 혼란이 가중된다.

일본서기는 코우교쿠(皇極) 천황 즉위기에서 아메토요 타카라 이카시히 타라시 히메 ( 天豊財重日足姫= 皇極)천황은 비타쯔 천황의 증손이고 히코히토 오호에(彦人大兄)황자의 손자로 찌누왕(茅渟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키비히메왕 (吉備姫王)이다라고 기술했다. 여기 등장하는 찌누왕은 사이메이(齊明)의 아버지이며 히코히토 황자와 오호마타왕 (大俣王, 漢王の妹)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고사기에 나오지만 아이덴티티가 확인되지 않는 인물이다. 우리는 “64. 아좌태자” 편에서 사이메이(齊明)의 혈통이 조작되었다고 하였다. 이들의 연령상 사이메이(齊明)와 죠메이(敍明)의 항렬이 다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억지로 사이메이(齊明)의 혈통을 히코히토 황자에게서 찾는다. 이는 히코히토의 혈통이 백제왕실의 본계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기록을 의문시 하는 우리는 찌누왕(茅渟王)을 백제의 무왕(무강왕, 마동)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백제의 무왕은 사이메이(齊明) 공주를 큐우슈우의 다리시북고에게 떠 맡겼다. 토요노쿠니(豊國) 의 수도 나카즈(中津)에서 다리시북고가 사이메이(齊明) 공주를 맞은 것은 서기 618년 경이다. 당시 그곳에는 비타쯔의 딸 타메(田眼) 황녀가 황후로, 호테이노 이라쯔메가 비(妃)로 함께 살고 있었다. 이미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가 네살 쯤 됐을 무렵이다. 여기서 약간 비약적인 추리가 요구된다. 사이메이(齊明) 공주가 시집와서 열 달이 채 되기 전에 해산(解産)하는 일이 벌어졌다. 서기 619년 사이메이가 아야황자 (漢皇子)를 출산하였다.

일본서기는 사이메이(齊明)천황 즉위기사에서 처음에 요메이(用明)천황의 손자 타카무쿠왕(高向王)을 만나 아야황자 (漢皇子)을 낳았다. 후에 죠메이(敍明)천황을 만나 2남 1 녀를 낳았다. 죠메이 2년 (서기 630) 황후가 되었고 서기 641년 겨울 10월 죠메이천황이 붕어하자 다음 해 정월 황후가 천황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우리는 서기 630년 황후가 된 것은 비타쯔 천황의 황녀 타메(田眼)이며 그녀가 죠메이 이후 코오교쿠천황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 사이메이(齊明)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이메이(齊明)는 죠메이(敍明)천황과 혼인하기 전 사고를 겪었을 것이다. 함께 가까이 지내던 황자 급의 청년, 어쩌면 다리시북고의 친 동생과의 사이에 염문이 있었거나 겁탈 당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의문의 청년의 이름이 일본서기 어딘가에 어떤 형태로든 적혀 있다고 본다. 일본서기는 타카무쿠왕을 만나 아야황자를 낳았다고 했는데 타카무쿠왕의 아이덴티티도 파악되지 않는다. 문자에 얽메어 찌누왕이나 타카무쿠왕을 파악하려고 땀 흘려 온 수 많은 역사가들이 아직도 정체를 파악하지 못 한다. 이는 이 이름들이 역사적 의미맥락을 갖는 게 아니고 그냥 적어 놓은 암호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기 618년 큐우슈우의 나카즈에 시집 온 사이메이(齊明)가 서기 619년 시집 온 지 열달이 되기 전 아야황자를 낳았다. 아야황자는 죠메이 천황의 자식으로 입적되나 왕위계승 서열에서 밀려난다. 그의 이름이 코우교쿠 천황기에 기록된 교기(翹岐) 이다. 쿠테타와 같은 방법이 아니고는 그는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출신이었다. 교기에 관한 기사는 “65. 한인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를 죽였다” 에서 자세히 나왔다. 서기 642년 교기가 큐우슈우에서 추방되어 야마토에 흘러 들어왔을 때 그는 이미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서기 619년 생이라면 나이 24세때 야마토에 흘러들었고 을사의 변을 일으킨 서기 645년 27세, 텐찌천황으로서 사망시(서기 671) 53세가 된다.

다리시북고에게 사이메이(齊明)가 시집 온 것은 서기 618년, 다리시북고가 죠메이 천황으로 야마토로 옮겨 간 것은 서기 629년이다. 그러므로 사이메이(齊明)가 다리시북고와 함께 한 것은 약 10여년에 불과한 셈이다. 히라카스와케 황자가 서기 626년 태어났다고 기록한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의도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히라카스 와케 황자 즉 훗날의 텐찌가 죠메이의 아들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죠메이 13년 (서기 641) 10월 9일 천황이 쿠다라노 미야 (百済宮) 에서 죽었다. 10월 18일 천황의 빈소를 차렸는데 동궁 (東宮) 히라카스 와케 황자 (開別皇子) 가 16세의 나이로 조사를 읽었다.” 일본서기 기록데로라면 그는 17 세때 처자를 거느리고 야마토에 흘러들어와 20세 때 을사의 변이라는 쿠테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나이 46세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현실감이 떨어진다.

사이메이(齊明)는 다산(多産)의 체질이었는지 2남 1녀를 낳았다고 하였다. 서기 622년 풍장을 낳고 625년 선광을 낳았다. 하시히토(間人) 황녀는 아마 풍장보다 먼저 태어났을 것이다. 풍장은 오호아마(大海)황자란 이름도 갖는다. 백강의 전투이후 당과의 전쟁책임을 둘러 싼 교섭에서 백제부흥전쟁에 참가한 제 1 급 전범인 풍장을 살리는데는 오호아마 황자란 이중의 신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제의 왕자로 인질로 와 있던 풍장은 부흥전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일본을 떠났고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고 잡아 떼었을 것이다. 오호아마 황자는 그러한 교섭이 진행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서기 629년 다리시북고가 야마토로 옮길 때 큐우슈우의 통치는 사이메이(齊明)에게 맡겼고 타메(田眼)황후와 호테이노 이라쯔메 (후루히토 오호에 황자의 어머니)는 천황을 따라 야마토로 옮겼다. 서기 631년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큐우슈우에서 어머니 사이메이(齊明)와 함께 살던 풍장과 선광이 야마토의 아버지 죠메이 천황에게 옮겨 간 것을 뜻한다.

사이메이(齊明)와 그녀의 남동생 카루황자(輕皇子, 603 – 654, 훗날의 孝德천황)는 큐우슈우에 남았다. 서기 642년 큐유슈우에서 사이메이(齊明) 여왕의 모친 키비히메왕이 사망하여 초상을 치르던 중 카루황자가 쿠테타를 일으켜 큐우슈우의 왕권을 장악하고 사이메이 여왕, 하시히토 황녀, 교기왕자와 그의 처등 유명인사 40여인을 섬에서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코오교쿠 천황기에 기록된 이와 관련된 내용은 “65. 한인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를 죽였다.” 에서 자세하게 나왔다.

그러면 사이메이(齊明)의 첫 남자 즉 아야황자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일본서기가 타카무쿠왕 (高向王)이라는 암호로 처리하고 끝낸 듯 보이면서 몇 군데 흔적을 남겨 놓고자 한 청년을 우리는 다리시북고의 친 동생, 나카즈 왕 (中津王)이라고 본다. 그는 여기저기서 세성충승(塞上忠勝)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일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히라후 (阿曇山背連比羅夫), 쿠사카베노 키시 이와카네 (草壁吉士磐金), 야마토노 아야노 후미노 아타히 아가타 (倭漢書直県)를 백제의 조사(弔使)에게 보내, 그 나라의 근황을 물었다. 조사(弔使)는 “백제국왕은 나에게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 귀국하는 사신에 딸려 귀국시켜 달라고 하거든 천황은 허락하지 말라』고 말했다” 고 한다. 백제의 조사(弔使)의 종자( 従者)들은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 (大佐平 智積)이 죽었다. 또 백제의 사인이 곤륜(昆倫)의 사자를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금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누이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들 40여명이 섬에 버려졌다.』고 한다.

위의 세성(塞上)은 백제 의자왕의 동생으로 읽힌다. 그리고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누이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들 40여명이 섬에 버려졌다.』고 한다. 여기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라고 나온다. 제왕자(弟王子)란 세성(塞上)을 뜻한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4월 10일 소가노 오호오미(蘇我大臣)가 우네비(畝傍)에 있는 자택으로 백제의 교기등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좋은 말 한필과 20정의 쇠붙이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蘇我大臣 於畝傍家 喚百済翹岐等 親対語話 仍賜良馬一疋 鉄二十[金+廷]唯不喚塞上)

소가노 오호오미(蘇我大臣)가 우네비의 자택에 교기를 초대하였는데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왜 기록하지 않아도 좋은 세성(塞上)의 이름을 이곳에 남겼을까? 아들은 불렀지만 그 생부는 부르지 않았다는 의미로 역사가들이 남겨 둔 표지처럼 보인다.

일본서기 코우토쿠(孝德)천황기 백치원년 (서기 650) 2월 15일 연초의 조하를 드리듯 조정에 의장대를 설치하고 좌우대신 백관들이 자하문밖에 4열로 도열하였다. 전면에 흰꿩을 실은 수레를 네 사람이 끌고 아와타노 오미 이이무시 (粟田臣飯蟲)가 이들을 인솔하고 어전으로 나아갔다. 좌우대신이 백관 및 쿠다라노 키미 풍장 (百済君豊璋), 그 동생 세성충승 (其弟塞城・忠勝), 고구려의 시의 모치(毛治), 신라시학사등(新羅侍学士) 등을 인솔하여 정면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그 동생 세성충승 (其弟塞城・忠勝)이라 하여 풍장의 동생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백제 의자왕의 동생으로 새겨야 되며 세성(塞城)의 한자 표기가 다르게 나온다. 세성(塞城)과 충승(忠勝)은 동일인의 이름이다. 후에 백제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가 나오므로 이들은 타무라(田村)황자의 동생들 나카즈왕(中津王)과 다라왕(多良王)의 백제식 이름으로 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형제는 백강의 전투시 주류성(周留城)에 있다가 당의 포로가 되었다.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된 뒤 사이메이(齊明) 6년 (서기 660) 10월 여왕은 조서를 발표하고 백제부흥전쟁을 명한다.

“옛적에도 백제가 우리에게 군사적지원을 요청한 경우가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단절된 왕조를 복원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언제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다. 백제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우리의 지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처한 우리의 결단은 확고하다. 나는 우리 장수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갈래로 진군하도록 명 할 것이다.”

.”詔曰「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絕, 著自恒典。 百濟國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枕戈嘗膽, 必存拯救。 』遠來表啟,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雲會雷動, 聚集沙彔, 翳其鯨鯢, 紓彼倒懸。 宜有司具為與之, 以禮發遣。 」云云。 送王子豐璋及妻子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立豐璋為王, 立塞上為輔, 而以禮發遣焉。

위의 조서가 끝나고 왕자 풍장과 처자, 그의 숙부 충승등을 보냈다. 이들의 실제 출전은 사이메이 7년의 일이다. 어떤 책에 이르기를 천황이 풍장을 왕으로 세성(塞上)을 대신으로 삼아 출전식을 거행하고 보냈다고 한다. 역시 세성과 충승은 동일인이었다.

위의 기사에 의하여 세성(塞上)은 의자왕의 동생임이 확실하다. 의자왕이 서기 593년 생이므로 세성(塞上)은 아마 595년 경 태어났을 것이다. 서기 601년 생인 사이메이와 큐우슈우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므로 서기 618년경 두 사람이 사고 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하다. 물론 이 사고(事故)는 다리시북고에게 사이메이를 주기로 결정되기 이전에 생긴 일이므로 지탄 받을 일은 아니었고 그냥 철부지 아이들의 불장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꾸어버린 불장난이었다.

코오교쿠 원년 (서기 642) 기사에서 “ 백제국왕은 나에게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 귀국하는 사신에 딸려 귀국시켜 달라고 하거든 천황은 허락하지 말라』”라 하였다.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는 의미는 사이메이가 시집가기 전 그가 사고를 친 장본인이라고 증언함이 아닐까? “세성은 나쁜 짓만 하고 다니므로 …”라고 의자왕의 언사를 빌어 일본서기를 편찬하던 역사가들은진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