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34. 부여풍장은 누구일까

서기 665년 9월 23일 당은 백제진장 유덕고(劉德高)와 곽무종(郭務悰)을 일본에 파견했다. 파견원 254명, 7월 24일 쓰시마 도착, 9월 20일 쓰쿠지를 거쳐 9월 22일 표함을 진상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663년 백강의 전투에서 백제-왜의 동맹군을 격파한 뒤 승전의 여세를 몰아 일본에 들어 온 점령군이었다. 이들의 최대의 관심은 백제의 마지막 항전의 구심점이었던 풍장왕의 행방이었다. 백강의 전투중 홀연히 사라져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인물, 부여풍장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범(戰犯)이었다.

敍明 3년 3월 (631년)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 서기의 이 기사는 분명히 엉터리이다. 왜냐하면 631년 백제왕은 무왕이며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므로 631년 백제 의자왕이 야마토의 敍明天皇에게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낼 수는 없다. 왜 이런 기사가 필요하였을까. 이는 역사를 하루하루 일기처럼 기록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100년 후에 역사를 한꺼번에 기록한다면, 기록자는 후일의 일을 미리 알고 현재의 일을 기록하므로 후일을 알기 때문에 일으킬 수 있는 실수이다. 풍장이 백제왕자로 일본에 인질로 있어야만 훗날 어떤 역할을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敍明 7년 (635) 쯔루기 연못 (劍池)에 기이한 연꽃이 피었는데 한 줄기에 두 송이의 꽃이더라 (一莖二花). 한 줄기에 두송이의 꽃이란, 원래는 한 사람인데 두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일인이역의 배우같은 것일까.

660년 당 – 신라군이 백제를 멸하자 백제의 잔존세력이 일본에 구원군을 요청하면서 체일중인 왕자풍장을 국주로 맞을 의향을 전해 왔다. 齊明天皇은 661년 (齊明 7년) 1월 6일 九州에 가서 백제부흥군을 진두지휘코자 나니와(難波)를 출항하여 九州를 향하여 서진한다. 1월 8일 오까야마(岡山)시 동남부에 위치한 오호쿠(大伯)에 닿자 오호다황녀 (大田皇女)가 딸을 출산하였으므로 이름을 오호쿠황녀 (大伯皇女)라 지었다. 오호다황녀는 齊明天皇의 손녀이며 황태자 나까노 오호애황자 (中大兄皇子)의 딸이다. 출항한지 이틀만에 출산할 만큼 산월이 가까운 임산부까지 백제원정단에 포함시킨 걸 보면 황실의 구성원은 남녀불문 총 출동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쟁준비로 난리통인 九州의 쓰쿠지(筑紫)에서 오호다황녀 (644 – 667)는 663년 두째, 오호즈황자 (大津皇子)를 출산한다. 오호즈(大津)는 오미(近江)의 오호즈가 아니라 쓰쿠지의 나노 오호즈 (娜大津)이다. 661년 첫째 오호쿠황녀, 663년 두째 오호즈황자를 낳은 것이다. 또 우노노 사라라 황녀 (645 – 703, 훗날의 持統天皇)도 662년 쿠사가베황자를 출산한다. 두 여인이 모두 天智天皇의 딸로 형제간인데 동일한 남편,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의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오호아마황자는 훗날의 天武天皇 (622 – 686)이며 天智天皇 (619 – 671)의 동생이다.

나까노 오호애황자 (훗날의 天智天皇)의 동생 오호아마황자 (훗날의 天武天皇)가 이 아이들의 아버지인데 그 무렵 전혀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백제왕자로 적힌 풍장만 쓰쿠지의 전진기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왕족은 齊明天皇, 나까노 오호애황자, 백제왕자 풍장, 풍장의 숙부 새성 충승 (塞城 忠勝)뿐이다. 새성 충승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새성이란 아명이며 충승이란 어른이 된 뒤 품위를 갖춰 붙인 이름일까? 역사가 명백한 기록을 하고 있지 않지만 충승은 충지(忠志)란 동생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백제 부흥군으로 주유성에 있다가 패전후 항복했다고 당 나라 기록이 전한다. 일본서기에 야마토의 敍明天皇밑으로 기록된 두명의 동생, 中津王 - 多良王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그러면 오호아마황자는 일본서기 어디에 등장할까? 敍明 2년 (630) 敍明의 가족소개에서 大海皇子 (오호아마황자, 훗날의 天武天皇)로 등장한다. 다음은 天武 원년 (672)의 자기소개에서 어릴 적 大海人皇子 (오호아마황자)라 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전부이다. 그것도 첫번에는 大海, 두번째는 大海人이다. 敍明紀, 皇極紀, 孝德紀, 齊明紀의 629년부터 661년까지 형인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대활약을 보인 반면 동생 오호아마황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661년 오호다황녀가 백제원정단의 뱃길에서 오호쿠황녀를 출산했다. 아이 아빠라는 오호아마황자는 어디에도 보이지않고 왕자풍장과 동행한 백제 구원군의 선상에서 생긴 일이다. 662년 우노노 사라라황녀가 다시 오호아마황자의 아들을 낳고, 663년 오호다황녀가 두째 오호즈황자를 출산한다. 주변에 황실의 남자라고는 풍장뿐이다. 오호아마와 풍장 즉 天武와 豊璋은 한 줄기에 핀 두 송이의 연꽃이었다.

631년 백제의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 이 때 풍장뿐 아니라 풍장의 동생 선광 (善光 후일 禪廣, ? – 692)이 함께 야마토의 아버지, 敍明天皇 옆으로 왔다. 둘 다 敍明과 齊明간에 九州의 나까즈에서 태어 난 아들이다. 풍장이 10세, 선광이 6세정도의 나이였으리라. 선광은 정치보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지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백제왕자 신분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당의 유덕고는 그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天智天皇이 완강히 저항하여 선광은 승려로 일생을 보냈다.

당과 일본의 전후처리 협의 과정에 오호아마황자는 그 아이덴티티에 의심을 받지 않았다. 인질이었던 백제왕자 풍장은 자국의 전쟁에 가서 행방불명으로 일본은 그 이상은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왕자 풍장과 관련된 사람들은 당의 관리와 대질심문 전에 살해되었으리라. 665년 하시히토 황녀가 죽었는데 667년 2월 어머니인 齊明과 합장하였다. 이 무렵 오호다황녀의 무덤이 곁에 있었다고 하였다. 오호다황녀는 667년 24세로 죽었다.

그 해 3월 수도를 오미(近江)로 옮긴다. 이 때 야마토 지역은 당의 관할지역으로 양도하고 九州에 당의 쓰쿠지 도독부가 설치된다. 일본도 백제처럼 당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은 죽은 사람의 무덤까지 확인했는지 제명천황과 간인황녀의 합장이 이 무렵 이루어진다. 제명천황은 전쟁을 명령한 당사자이므로 시체까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길고 긴 줄다리기 끝에 당과의 전후책임문제가 매듭지어진 후에야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천황에 즉위하니 668년 정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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