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8일 수요일

83. 七支刀は 璽書である


 

韓國日本論爭中である 韓日關聯古代史 一番重要考古學的遺物つが 七支刀である. 奈良県天理市石上神宮に保存されていた七支刀は1500年以上もその存在が忘れられていたが 明治時代初期 時の 石上神宮大宮司であった菅政友が刀身に金象嵌銘文が施されていることを見して硏究けられ 1953(昭和28) 国宝指定された.

製で身の左右に各3本の枝刃を段違いに造り出した特異な形をしたで全長75センチ, 下から約3分の1のところで 折損している. 身の棟には表裏合わせて62字の銘文が金象嵌で表わされており そのが明治以降けられ 現在では 大体次の判讀されているがこの判讀では意味がきちんと分らない. 黑い4字は判讀不可とされている.

()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 ()
()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銘文についてはこれまで様々究がなされてきた. 銘文の判はもちろん 彫られた場所についても 表は東晋で 造された際に刻まれ 裏は百で刻まれたなどのもある. しかし容は百王が倭王に贈ったとの解が定とされ 時の背景として 高句麗の迫を受けていた百が 倭との同盟を求め 贈られたとされている.

銘文の冒頭には「泰■四年」の文字が確認できる. 年紀の解して泰和四年として369年とする (福山敏男, 浜田耕策ら)が ありこの場合 東晋の太和4(369)とされる.

銘文の解釋についても自分の立場によって色色の異論がある.

泰和四年1116日丙午の日の正陽の時刻に百たび練った 鐵 の七支刀を造った. この刀は出でては百兵を避けることが 出. まことに恭恭たる侯王が佩びるに宜しい. 先世以 未だこのような刀は 百には無かった. 王と世子は生を 聖なる晋の皇帝に寄せることとした. それ故に東晋皇帝が百王に賜われた「旨」を 倭王とも共有しようとこの刀を 「造」った. 後世にも永くこの刀をえ示されんことを. (浜田耕策の2005解釋)

上の銘文解釋はどうしても正しいとは見えない.文脈が自然でなく作爲的のような氣がす.1600年前の人たちの切實で具體的な必要の上で造られたはずの刀である. 抽象的又は衒學的な言辭で要点がぴんとこないと曲學阿世な解釋と見てよい. 當代の人たちはただ62字の文字を借りて自分の願いを明かに表したと信じたら易くて明瞭な解釋の方が望しい.

上の銘文の中で 奇生(聖音)のところが一番 問題になる. 七支刀の寫眞を見ると奇生は讀の能性はない.問題は(聖音) である.この2字はよく見えない.字形(聖)のように見えるが()の方が相應しい.次の字は()あるいは()とされるが() の方がもっともある. (聖音)誤讀であったことを知らなかった學者たちは上のようなおかしい解釋をするしかなかった.



そうなると(聖音)なく(璽書)になる. 上の銘文は “百濟王 世子奇生(璽書)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の方が 正しいと思れ. 百濟王が世子奇生に璽書を下し(世子奇生)を倭王に任命するつもり造た. この解釋はたれがたれになぜ 造たが明瞭である. んの余計な說明もいらない. 奇生は百濟世子の名前である. 孫の枕流王の名前と思われ.

し問題はここら始ま. 七支刀の銘文の正しい解釋が出來ても今までの歷史がこれを受容しない. 人はみん”今”をもって1,600年前を判斷しようとしている. 歷史も同である. 七支刀の銘文は百濟王家が倭をも經營していたと 證言すからだ.

七支刀寫眞をComputer 畵面で巧みに操縱して見ると()の解讀不可とされている4字が少し見える. 完全はないけど推測出來いは見える. 解讀不可とされている4字は暢德興福とす. 終(作) (作)なく() と讀める. そして次の新しい銘文が得れ.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暢德興福祖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 世子奇生璽書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暢德興福祖の下になにしい標識と見えるある. 自然侵蝕とは違う. 丸い玉璽の跡と見る事が.興福祖に小さい文字がある. みん5字である. Computer 畵面操縱して見ても字が小さすぎ. 一番 上“百”よう三番目は”國” ようである. しいて見れば“百濟國王印”又“百濟國之印”と思われ.

七支刀 百濟王 璽書である. 肖古王は世子奇生を倭王に封したが 歲幼ら皇太后が登場しこれを摂政の元年とした. 西紀 368である.

日本書紀 神功皇后の出産 記事ある. 十二月, 皇后は筑紫で誉田天皇を生んだ。土地の人は、「宇瀰(宇美町)でお産みになられた」と喜んだという。

誉田天皇は仲哀天皇の第四子である. 母は気長足姫尊(神功皇后)という. 天皇は 皇后が新羅を討った年の冬十二月 筑紫の蚊田で生まれた. 幼い頃より賢く先見の明があり風格が漂っていた. 天皇が生まれる前 天神地祇に守られて朝鮮半島への遠征に成功した. そのためか生まれた時から腕の肉が鞆〔とも〕(弓を射るための装身具)のような形に盛り上がっていた。それで誉田天皇と名づけられた. (とも)日本書紀 提供するつの端緖になる.

神功 五十二年の秋九月 久低たちが千熊長彦とともにやって来た. そして七枝刀, 七子鏡等様々な宝物を献上し「我が国の西に流れる川は 七日以上も遡ったところに水源があります. この水を飲み この水源である谷那の鉄山の鉄を採掘して永続して献上しましょう」との言葉を伝えた. そしてまた 王は孫の枕流(トムル)王に「私が交流を続けている東方の日本国〔やまとのくに〕は 我が国の勢力拡大に協力してくれ それによって地盤を安定させることができた. おまえも友好を重視し貢物を絶やさないようにすれば 私の死後も安泰だろう」と語った. これより後、毎年朝貢があった。

孫の枕流(トムル)王の登場日本書紀 提供するもう つの端緖であ. 枕流王は百濟(トムル)王とまない. この(トムル)は 鞆(とも)たと思われ. 皇后が筑紫で生んだのは 誉田でく大鞆和気命である. 大鞆和気命は應神く王孫の枕流(トムル)をさす. 又は 菟道稚郎子である.

日本書紀 應神條の後継ぎの決定の記事ある. 四十年の春正月。天皇は大山守命, 大鷦鷯尊を呼び 「おまえたちは子がかわいいか」と尋ねた. 二人は 「とてもかわいいです」と答えた. 天皇は次に、「年長と年少の子ではどちらがかわいいか」と尋ねた. 大山守命は 「年長の方がかわいいです」と答えた. 大鷦鷯尊は天皇の顔色から心中を察し 「年長となってしまえば不安はありません. しかし年少であれば いろいろと手を焼かされるので 愛情も深くなります」と答えた. 天皇は大いに喜び 「その通りだ」と答えた. 実は天皇は菟道稚郎子を太子にしたいと思っていて 二人の意向を知るために尋ねたのである. 同月 菟道稚郎子を嗣(後継ぎ)と定めた. 同日 大山守命に山川林野等国土の管理を任せた. 大鷦鷯尊には太子の補佐を任せた。

冬十月。豪族たちは皇后を皇太后(天皇の母)と呼ぶことにした。これを摂政の元年とする。 三年の春正月。誉田別皇子(大鞆和気命 )を皇太子(後継ぎ)とした. そして磐余(奈良県桜井市)を都とした. 若桜宮というらしい.

應神十五年の秋八月 百済の王が阿直岐を派遣して良馬二匹を献上した.それで阿直岐に軽坂の馬小屋で飼育させその地を厩坂と名づけた.阿直岐はまた文献にも詳しかった.そこで太子の菟道稚郎子の師匠とした.天皇が「あなたのような博士(ふみよみひと)はほかにもいるのか」と尋ねると阿直岐は王仁という者を推薦した.

十六年の春二月王仁が渡来した.そこで太子の菟道稚郎子の師匠とした.諸文献を学ばせると様々な知識をまたたく間に吸収した.王仁は書首等の始祖である.

日本書紀は別別記事ようにあちこち分散しているが同じ 記事破片であ. 神功皇后は子供を帝王に育てる爲に百濟一の學者を招聘し菟道稚郎子(世子奇生)の師匠とした.

應神天皇の子は男女あわせて二十人である. 大山守命と大鷦鷯尊菟道稚郎子 10 – 17年上である. 百兵とは 菟道稚郎子のらのをいであるとわれ. 肖古王が菟道稚郎子を孫子代百濟世子とする同時倭王宣言したのは西紀368で菟道稚郎子5歲であ. 百濟貴須40代後半, 神功皇后は30歲程であったとわれ.
 
摂政の皇太后が直面した問題菟道稚郎子年上皇子をど服從させるかであり, その百濟王(菟道稚郎子の祖)權威爲 七支刀に百濟王璽書金象嵌列島ってたのであろう.

) この七支刀解說當該 Blog “3.칠지도(七支刀) 새서(璽書). 日本語飜譯である. 人とはかしい存在であり眞實だって直ぐ心てくれない. ただこんなるなとてくれればいである.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82. 사카후네이시(酒船石)


서기 645 7 10 아스카(飛鳥) 이타부키궁(板蓋宮)에서 정변이 발생하여 당대의 실력자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 궁중에서 살해되고 코우교쿠(皇極)천황이 실각된 사건을 잇시노헹 (乙巳の變)이라고 부른다. 사카후네이시는 아스카(飛鳥) 오카(岡)마을의 낮으막한 언덕위에 있으며 이타부키궁을 서쪽으로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다. 서기 1927 4 8 사적(史跡)으로 지정되었다. 아스카무라 아스카 보존재단은 다음과 같은 설명문을 작성하여 현장에 게시하고 있다.


석조물은 현재 상태로 길이 5.5미터, 2.3미터, 두께 1미터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북측과 남측의 일부가 결손되어 근세 어딘가로 반출되었다고 여겨지는 가공흔적이 남아있다. 돌의 상면에 원형과 타원형의 얕은 웅덩이를 만들고 이것들은 가는 홈으로 연결되어 있다. 술을 짜는 용기라고도 하고 기름이나 약을 만들기 위한 도구라고도 한다.그러나 돌에서 동쪽으로 40미터 떨어진 약간 고지대에서 여기에 물을 끌어 들였다고 생각되는 토관(土管) 돌로 만든 물통이 발견되어 정원(庭苑) 시설이라는 설도 있다. 

아스카(飛鳥)에는 많은 고대의 석조물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석조물에 관한 기록이 없으므로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인지 밝혀지지 않은 남아 있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카후네이시이다. 아스카 보존재단의 설명문에서 거론하지 않은 천문관측설, 천황들의 제사용이라는 , 점을 치는 도구라는 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서기 1992 사카후네이시에서 75미터 떨어진 북측 사면에서 돌담이 발견되었다. 나라현립 만요우문화관 (奈良県立 万葉文化館) 들어선 언덕과 사카후네이시가 있는 언덕 사이의 골짜기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서기 2000 발굴조사에서 소판형석조물 (小判形石造物) 거북형석조물(形石造物) 발견되었다. 모두 물을 담아 흘러 보낼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바닥은 돌을 도랑과 계단이 있고 전체가 돌담으로 둘러 쌓여진 구조였다.  거북형 석조물은 전장 2.4미터, 2.0미터이며 머리와 꼬리 그리고 발이 조형되어 있다. 갑라부분이 직경 1.25미터, 깊이 20센티미터 정도로 속을 파낸 용기이다. 머리부분의 구멍으로 물이 흘러 들어와 꼬리부분의 구멍으로 흘러 나가는 구조이다. 꼬리부분의 구멍을 막으면 물을 저장할 있다. 소판형 석조물은 길이 1.65미터, 1미터로 깊이는 20센티미터로 물을 저장할 있게 되어있다. 배수구는 거북의 머리에 있는 구멍으로 연결된다.

유물은 사이메이(明) 천황 제작되고 뭔가 제사가 행해진 유구(遺構) 아닐까 추정하나 확실한 것은 모른다. 사카후네이시의 바로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이지만 양자의 관련에 대해서도 알려진 없다.

이전부터 인식하고 있던 사카후네이시, 2000 발굴된 거북형 석조물과 소판형 석조물 그리고 주변의 유구를 일괄하여 지금 사카후네이시 유적(酒船石遺跡)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사카후네이시가 나중 발견된 유적과 아무 연관이 없다면 이들을 통털어 사카후네이시 유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다.

그럼 사카후네이시는 어디 쓰이는 물건일까? 술을 만드는데 썼다고 전해 사카후네이시라고 불려 왔다고 하지만 과연 만드는데 있는 물건일까? 길이 5.5미터, 4.0미터, 두께 1미터의 돌덩어리가 만드는데 필요할 같지는 않다.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이루어진 석조물을 보고 사람들은 어떤 심오한 뜻이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하므로 오리무중에 빠진다. 지금부터 1400 전의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아스카의 역사를 연구하는 후타쯔키회() 2007 11 10 5 정례회에서 아스카무라 교육위원회 문화재과 주사, 아이하라 요시유키(相原嘉之) 선생을 강사로 초빙하여 사카후네이시 유적에 관한 강연을 들었는데 강연 내용이 인터넷에 올라 있다. 거기서 아이하라 선생은 사카후네이시의 결손부를 복원하여 완정한 원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는게 너무 많아 지나치게 현학적이 되어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위의 스켓치를 보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매우 단순하고 명백하였다. 1400 전의 인간들은 소나 말에게 물을 먹일 도구가 필요하였다. 짐승들의 힘으로 움직이지 않을 무게를 가진 도구라야 한다. 어딘가에서 물을 끌어 A에서 물을 주입하고 여섯 마리의 짐승이 한꺼번에 물을 마실 있도록 고안되었다. 일대에 마굿간이 있고 말을 기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 구릉지 주위로 설치된 마굿간의 경계로 쌓은 돌담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사카후네이시의 용도를 밝히기 못한 역사학계는 이 돌담의 성격을 가지고 또 헤메고 있다. 일본 역사서는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람을 특칭하고 있다.

우마야도(厩戸) 황자가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우마야라고 읽히는(廐, 속자) 마사(馬舍) 뜻한다고 하니 우리 말로 마굿간에 해당한다. 그는 31 요우메이(用明)천황의 둘째 아들로 서기 574 출생하여 622 사망하였다. 33 스이코(推古) 천황시절 섭정으로 정치에 관여하였다고 하며 사후 쇼우토쿠(聖徳) 태자로 추서된 인물이지만 그에 관한 역사기록은 픽션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의 연고지가 하나 있다. 지금 타찌바나테라(橘寺) 있는 아스카의 타찌바나 마을이다. 타찌바나 마을은 사카후네이시가 있는 오카(岡) 마을과 이웃해 있다. 걸어서 불과 10 내에 이를 있는 거리이다. 우마야도 황자가 태어났다는 마굿간과 타찌바나테라 지역은 그의 아버지 요우메이 천황의 근거지일 것이다. 우마야도(厩戸) 황자는 마굿간에서 말을 기르는 업무를 했을지도 모른다. 우마야도 황자는 분명 사카후네이시의 원형을 필요로 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카후네이시는 우마야도이시(厩戸石)로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2000년 발굴된 아랫 쪽의 거북형 석조물과 소판형 석조물은 사람이 사용하던 우물로 세월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손도 씻고 발도 씻고 음료수로도 쓸 수 있는 시설이다. 그것을 구태여 천황이 제사지낼 때 쓰는 물로 한정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역사는 지배자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