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31. 乙巳의 變 (Isshi Incident, 645)

백제 무왕 42년 (641) 봄 3 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 하였다. 무왕의 원자 의자왕은 무왕 재위 33년(632) 태자로 정해졌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야마토의 34대 敍明천황 (Emperor Jomei)은 서기 641년 10월 붕어하여 대궐북쪽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를 백제대빈이라 하였다. 敍明天皇에 이어서 서기 642년 2월 그의 황후가 35대 皇極天皇 (Empress Kogyoku)으로 즉위한다. 을사의 변이란 서기 645년 6월 14일 궁중의 皇極天皇의 면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을 탈취한 사건을 이른다.

우리가 보고있는 황실의 역사기록 (일본서기)은 이긴 자의 후손들이 손 본 내용이다.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천황가는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천황가에 배반하는 나쁜 놈,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를 처단한 것으로 기록하고 이왕 나선 김에 개혁 (大化의 改新)을 내세워 무늬만 개혁을 하는척 한다. 개혁이란 예나 지금이나 혁명뒤에 따라다니는 법이다.

이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일본서기 皇極天皇 조에 나와있는데 그 기술이 하도 불친절하여 일류 탐정소설을 읽는 것 같다. 현재까지 어떤 역사학자도 이 무렵의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백인 백색, 오직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맛이나 보고 넘어가자.

서기641년 11월 백제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다. 서기 642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및 같은 어머니가 낳은 누이 - 여자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거기에 유명인 40여명이 섬에 유배되었다. 백제국왕은 “새성 (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저지르니 사자들 편에 귀국하겠다고 하거든 천황이 허락하지 말라”고 전했다. 2월 천황은 교기를 불러 아즈미의 야마시로노 무라지의 집에 살도록 해 주었다. 4월 교기가 종자를 데리고 천황을 배알했다. 소가노 에미시가 우네비의 집으로 교기등을 초대하여 담소한 뒤 많은 선물까지 주었다. 그러나 이 때 새성 (塞城 또는 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5월 교기등을 불러 말타고 하는 활쏘기를 구경시켰다.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5월 24일 교기가 처자를 데리고 쿠다라의 오호이 (지명, 百濟大井)의 집으로 옮겼다. 7월 22일 대좌평 지적등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교기앞에서 씨름을 시켰다. 지적등은 연회가 끝나고 교기의 집까지 가서 문전에서 배웅했다.

죽었다던 지적이 조정의 연회장에 살아 나타나는데 대한 설명이 없다. 백제왕자 교기(翹岐)를 翹企로 쓰면 “긴 줄 후미에서 발 돋움을 하면서 제 차례를 기다린다”는 뜻이 되므로 교기라는 명칭은 많은 함축을 가진 말일 것이다. 그러나 훗날 역사의 전개에 이 이름은 다시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이름들만 나오므로 교기가 훗날의 누구에 해당하는지 알수 없다.

서기 644년 봄 1월,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는 신관(神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임하지 않았다. 그때 카루황자 (輕皇子)도 다리가 아파서 조정에 출사할 수 없었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는 가루황자와 친한 사이였으므로 병 문안을 갔다. 카루황자는 자기의 사랑하는 황비 아헤노 우지를 보내 카마코가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봐 주었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는 공명정대하고 충성심이 강 한 사람이었다 (쿠데타 주체세력이 혁명에 성공한 뒤 기록한 내용임). 그는 황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전횡을 일 삼는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를 제거하고 황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지도력을 가진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차차 나카노 오호에 황자 (中大兄皇子)에게 기울었다. 나카노 오호에황자가 어느 날 法興寺에서 축구를 하다가 신발이 벗겨져 날아갔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카마코가 신발을 줏어와 무릎을 꿇고 나카노 오호에황자 에게 신겨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미나부치 쇼안 (南淵請安)의 학당(學堂)에 함께 다니면서 공자와 주공의 가르침을 강의 받았는데 오고 가는 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소가씨를 섬멸할 방도를 모의하였다. 카마코는 소가씨 일족이면서 소가노 에미시 (蘇我蝦夷, 이루카의 부친), 소가노 이루카에게 비판적인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 (蘇我倉山田石川麻呂)를 한편으로 끌어들여 이시카와마로의 딸과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혼인시켜 결속을 다진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자들이 공물을 바치는 날을 소가노 이루카 암살의 날로 정했다.

혁명 주체세력은 나카노 오호에황자 (中大兄皇子), 카루황자(輕皇子), 나카토미노 카마코 (일명 나카토미 카마타리, 훗날 후지와라 카마타리),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의 4명이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이 일본서기의 이 시점에서 처음 등장하므로 과거에 이들의 아이덴티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쿠데타의 결과로 당시의 권력자 소가노 이루카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皇極天皇은 퇴위되어 현 시코쿠 (四國) 高知市 아사쿠라 (朝倉)신궁에 유폐된다. 그러나 쿠데타의 실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皇極天皇곁에 시립하고 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 615 – 645)였다. 이 사람은 백제 의자왕의 장자로 皇極天皇 다음 천황이 될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사건후 승려가 되어 목숨을 보전코자 간청하였으나 3개월 뒤 모반죄로 처형된다. 모반자가 누구인지 정말 헷 갈리는 것이 역사이다. 황위 정통 승계권자를 젖히고 방계의 황자가 천황의 자리를 도둑질한 것이 을사의 변의 진상이다.

쿠데타 이후 카루황자가 36대 孝德天皇 (Emperor Kotoku)으로 즉위하고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황태자로 봉한다. 카루황자는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외삼촌이다. 카루황자와,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 齊明은 일본서기에 찌누왕 (茅渟王) 소생으로 되어 있으나 찌누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백제 무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가 훗날의 37대 齊明天皇 (Empress Saimei, 601 – 661)인데 孝德天皇(? – 654)이 죽은 뒤 655년 천황으로 즉위하여 661년 죽었다.

 따라서 나카노 오호에황자는 17년간 황태자 신분이면서 실제로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왜 그는 17년간 권력의 실세였으면서도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의 출생의 약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의 역사의 전개는 그가 즉위하지 않은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나카토미노 카마코가 간언하여 즉위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가 일찍 즉위하였다면 백제멸망 이후 당나라에 의해 전쟁범죄자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齊明天皇을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이메이와 코오교쿠를 동일인으로 일본서기를 기록함으로써 시호이외의 이름, 타카라황녀, 타무라황녀, 타메황녀등을 누구로 봐야 하는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름들이 皇極천황의 이름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皇極天皇(Empress Kogyoku, 594 – 661, 비타쯔 천황과 스이코 천황의 딸)과 齊明天皇 (Empress Saimei, 601 – 661, 백제 무왕의 딸 또는 찌누왕의 딸)이 동일인이라고 일본서기는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렇게 되면 황실의 위협이었던 소가노 이루카를 처치하여 황실의 권위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것이 을사의 변이다. 을사의 변으로 천황이 폐위되어 유폐된 일은 없었다고 일본서기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하여 일본황실은 을사의 변을 일으킨 쿠데타 주체세력의 후손들이 맡게 되었고 조상들이 저지른 권력탈취의 수치스련 기록을 황실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서기1948년 부여읍에서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가 발견되었다. 여기 나오는 대좌평 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서기654년 세운 석비로 “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게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옥을 파 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그 높고 자애스런 모습은 신령으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라는 내용이 해독 가능하다. 지적이 나카토미 카마코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교기가 나카토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천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나카토미 카마코 (中臣鎌子)의 이름이 출세함에 따라 나카토미 카마타리 (中臣鎌足)로 또 후지와라 카마타리 (藤原鎌足)로 바뀐다. 후지와라씨(藤原氏)는 일본역사상 최고의 명문명가이면서도 어디서 왔는지 의문에 쌓여있고 후지와라씨의 원조로 알려진 카마타리(鎌足)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게 없다. 그가 백제에서 온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위에서 이미 언급된 누군가일 수 도 있다. 들어갈 수록 미로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일본역사의 재미이다.

야마토의 33대 스이코 천황 (推古天皇, 593 – 628재위)시절 서기 600 – 629년 구주백제왕으로 야마토를 지배하였던 多利思北孤는 백제 아좌태자의 장자였다. 아좌태자는 일본에서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彦人大兄皇子)로 불렸고 敏達天皇의 황자로 기록했다. 스이코 천황은 넷째 딸 타메황녀 (眼田皇女)를 多利思北孤의 황후로 주었다. 수나라 기록에 나온 왕비 계미(鷄彌)이며 훗날의 皇極天皇이다. 그런데 618년 백제의 무왕은 齊明공주를 多利思北孤에게 시집보냈다. 多利思北孤는 무왕의 조카이다. 이 여인이 훗날의 齊明天皇 (601 – 661)이다.

사이메이는 조숙한 편이었던지 시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서기 619년 아야(漢)황자를 출산하였다. 多利思北孤의 자식으로 보기에는 너무 빠른 출산이었다. 일본서기는 타카무쿠왕( 高向王)과의 사이에 아야황자 (漢皇子)을 두었다고 하였으나 타카무쿠왕( 高向王)이 누구인지 파악되지 않는다. 아야황자 (漢皇子)는 多利思北孤 즉 敍命천황의 소생으로 입적되나 왕위계승 서열에서 밀려난다. 이 글에서는 아야황자를 위에 나온 백제왕자 교기로 본다. 혈통상 황위를 넘볼 수 없는 왕자이므로 翹企 (긴 줄 후미에서 발돋움하며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림)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쿠데타에 의지하여 권력을 탈취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多利思北孤의 구주백제 수도는 오오이다 현(大分縣) 나카즈시 (中津市)였으며 수 나라의 사신 배세청이 서기608년 방문했던 왜의 수도란 이 곳을 말한다. 齊明는 서기 618년경 구주백제 수도였던 나카즈시로 시집와서 629년 多利思北孤가 야마토의 敍明天皇으로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이 기간에 齊明은 하시히토황녀 (間人皇女),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 百濟王 善光을 낳았다.

서기 629년 敍明天皇은 왕비 계미(鷄彌) 즉 타메(田眼)황녀 또는 타카라황녀(寶皇女)와 함께 야마토로 떠나고 구주백제는 서기642년까지 齊明이 맡았다. 641년 敍明天皇이 백제 의자왕으로 떠나자 타카라 황후가 皇極天皇으로 즉위한다. 敍明천황의 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와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가 천황의 최측근이었다.

서기642년 구주백제에서 齊明의 모후가 사망한다. 일본서기 皇極조에서 1월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나온 것이 이것이다. 헌데 그때 齊明의 남동생 카루황자 (輕皇子, 훗날의 孝德天皇)가 정변을 일으켜 구주백제왕이 되고 齊明, 교기를 비롯한 가족 측근 모두를 추방한다. 거기서 쫒겨난 사람들이 야마토로 몰려들어 3년후 을사의 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그때 구주백제왕이었던 카루황자도 정변에 참여하므로서 자동적으로 구주백제가 야마토에 흡수된다.

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30. 敏達天皇(Emperor Bidatsu)의 家系

비다쯔(敏達)천황 (30대)은 킨메이(欽明)천황의 두째 아들로 어머니는 센카(宣化)천황의 딸 이시히메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572년 4월 3일 천황에 즉위하여 그 달 쿠다라노 오오이 (百濟 大井)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비다쯔(敏達)천황은 백제 성왕의 왕자임을 이미 전회에서 거론했다. 쿠다라노 오오이노미야 (百濟大井宮) 터는 현재의 나라현 코오료우쬬(廣陵町) 쿠다라(百濟)로 비정한다. 이곳에 쿠다라데라(百濟寺) 삼중탑이 남아있고 그 지역이 쿠다라(百濟)로 불리고 있으나 궁궐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서기575년 1월 오키나가 마테왕의 딸 히로히메(廣姬)를 황후로 세웠다. 황후는 1남 2녀를 낳았다. 첫째가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 (押坂彦人大兄)황자, 두째가 사카노보리 황녀, 세째가 우지노 시즈카이 황녀라 한다. 그 해 11월 황후 히로히메가 죽었다. 서기576년 3월 누카타베(額田部)황녀를 황후로 맞아 2남 5녀를 보았다. 이 시대 불교수용여부를 두고 논란이 심했으나 비다쯔(敏達)는 불교를 공인하지 않고 두창으로 585년 사망했다.

서기 576년 두번째 황후가 된 누카타베 황녀가 서기 592년 12월 33대 스이코(推古) 여왕이 되는데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조에 그녀는 18세 때 황후가 되었고 34세에 남편을 여이었으며 39세에 천황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스이코천황은 서기 554년 출생한 것으로 되며 누카타베 황녀가 18세 때 시집왔다면 서기 571년 결혼한 것으로 된다. 이는비다쯔(敏達)가 즉위 전에 누카타베 황녀와 혼인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첫째 황후가 575년 죽어서 576년 두번째 황후로 누카타베(額田部)황녀를 들였다는 것은 거짓이 된다.

왜 일본서기에 이런 모순된 기록이 생겼을까?

본업이 역사학자가 아닌 아마츄어 역사학도에게 드는 느낌은 29장에서 나온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 기사가 누군가 다른 백제 주요인물의 기록을 여기 갖다 붙였기 때문에 생긴 모순이라고 생각된다. 킨메이(欽明)조의 이시히메(石姬)와 같은 방법으로 백제 위덕왕의 황후 히로히메(廣姬)를 비다쯔(敏達)의 황후로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다음에 등장할 34대 죠메이(敍明) 천황 때문이다. 죠메이천황은 이후의 일본황실을 열어 갈 38대 텐찌(天智)천황과 40대 텐무(天武)천황의 부친이다.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백제 위덕왕의 왕자 아좌태자 (일본의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의 아들이다.

그러니 죠메이 천황 (훗날의 의자왕)과 그의 아버지 아좌태자 (일본명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족보가 필요하다. 아좌태자의 족보를 만들기 위하여 그의 어머니 히로히메를 어딘가 꼭 끼워 넣어야 되는데 가장 적당한 곳이 위덕왕의 친동생 비다쯔 (敏達)이다. 따라서 히로히메를 비다쯔의 족보에 올리고 히로히메를 첫 황후로 만들어 아좌태자 (일본명 押坂彦人 大兄皇子)가 비다쯔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뒤 첫 황후가 죽어서 다음 황후를 뽑았다는 등의 거짓말을 하게되는 것이다. 위덕왕은 서기 530년생, 비다쯔 천황은 538년으로 본다.

누카타베 황녀는 명실상부한 비다쯔(敏達)의 정비(正妃)로 비다쯔(敏達)의 즉위전에 결혼하여 즉위후에 황후가 된 것이다. 백제와 일본의 황실을 혈연적으로 분리하기 위하여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고민하여 내 놓은 결과물이 일본서기의 혈연기록이다.

1. 皇后(前):広姫(ひろひめ、息長真手王の女) 敏達4年(575年)薨去

押坂彦人大兄皇子(おしさかのひこひとのおおえのみこ、麻呂子皇子)
逆登皇女(さかのぼりのひめみこ、坂騰王)
菟道皇女(うじのひめみこ、宇遅王) 伊勢斎宮

2. 皇后(後):額田部皇女(ぬかたべのひめみこ、後の33대 推古天皇)2남 5녀(일본서기)

菟道貝鮹皇女(うじのかいたこのひめみこ、菟道磯津貝皇女・静貝王) 聖徳太子の妃
竹田皇子(たけだのみこ)
小墾田皇女(おはりたのひめみこ)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
鸕鶿守皇女(うもりのひめみこ、軽守皇女・宇毛理王)
葛城王(かずらきのみこ、古事記のみ)
尾張皇子(おわりのみこ)
田眼皇女(ためのひめみこ、多米王) 舒明天皇の妃
桜井弓張皇女(さくらいのゆみはりのひめみこ、桜井玄王・由波利王) 押坂彦人大兄皇子の 妃・来目皇子の妃
 
3. 夫人:老女子(おみなご、春日臣仲君の女)

難波皇子(なにわのみこ) 橘朝臣・路真人・甘南備真人・大宅真人などの祖
春日皇子(かすがのみこ) 春日真人などの祖
桑田皇女(くわたのひめみこ)
大派皇子(おおまたのみこ、大俣王)

4. 采女:菟名子(うなこ、伊勢大鹿首小熊の女)

太姫皇女(ふとひめのみこ、桜井皇女・布斗比売命)
糠手姫皇女(ぬかでひめのみこ、田村皇女・宝王・島皇祖母命)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舒明天皇の母

누카타베 황녀가 낳은 5녀 가운데 오하리다 황녀와 사쿠라이노 유미하리 황녀의 두 딸이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에게 시집갔다. 놀라운 것은 타메(田眼 또는 多米)황녀로 기록된 넷째 딸이 죠메이(敍明)천황 (위의 히코히토 황자의 아들)에게 시집간 사실이다. 결국 5녀 가운데 딸 둘을 히코히토 황자(아좌태자)에게 보내고 한명의 딸을 그의 아들 죠메이(敍明) 천황에게 시집보냈으니 아좌태자 부자가 백제와 왜의 왕위 계승권의 중심인물임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 – 의자왕(죠메이천황) –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황자로 이어지는 백제의 적장자들의 명단이다. 소위 백제왕실의 장손들의 리스트인 것이다. 부부가 모두 천황을 지낸 비다쯔(敏達) – 스이코(推古)천황의 커플조차 자기 아들을 황위에 세우지 못 하였다. 왕위 계승권은 적장자가 0 순위였던 것이다. 왜의 죠메이(敍明)천황이 서기641년 백제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물론 일본측 기록은 641년 죠메이(敍明)천황이 죽었다고 되어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상기 가계에서 네번째에 있는 우네메(采女) 우나코의 기사이다. 우네메(采女)란 천황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궁에 들어 온 여자이다. 따라서 천황의 비로 들어 온 여자보다 신분이 낮은데 천황의 눈에 들어 자식을 갖게 되면 비가 된다. 우네메(采女) 우나코가 낳은 누카데 히메 (일명 타무라 황녀 또는 타카라 왕) 황녀와 히코히토 황자 사이에서 죠메이(敍明)천황 (593 – 660)이 태어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 때부터 타무라(田村), 타카라(寶), 타메(田眼), 타미(多米), 계미(鷄彌)등의 비슷한 이름이 남녀불문하고 죠메이(敍明)천황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붙여진다. 우리 말의 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죠메이(敍明)천황, 코우교쿠(皇極)천황, 사이메이(齊明)천황 그리고 죠메이(敍明)천황의 어머니 이름이 모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죠메이(敍明)천황에게 스이코(推古)천황의 딸 타메(田眼 또는 多米)황녀가 시집가는데 죠메이(敍明)천황은 593년생, 타메황녀 594년생이다. 서기594년이라면 스이코(推古)천황 40세때이므로 자식을 낳을 수도 있는 나이지만 비다쯔(敏達)천황이 서기585년 사망했다 하므로 부친이 누구일지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비다쯔(敏達)천황은 왕위를 물러나 더 살아 있었을 수도 있다. 타메황녀는 죠메이(敍明)천황의 황후였고 천황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을 낳지 못 하였다. 이 여인이 죠메이(敍明)천황 다음의 35대 코우교쿠 천황 (皇極 天皇, Empress Kogyoku, 594 – 661)이 되나 서기 645년 을사의 변으로 쿠테타의 제물이 되어 추방된다.

이때 죠메이(敍明)천황의 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의 나이가 천황이 될 나이에 미치지 못하여 그가 30세가 될 때까지 코우교쿠(皇極)천황이 한시적으로 천황자리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는 대략 615년생이며 30세가 되는 서기 645년 그가 천황이 될 해에 맞춰 쿠테타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 코우교쿠천황을 폐위시킨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테타 그룹은 자기들의 반역의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훗날의 사이메이천황 (齊明, Empress Saimei, 601 – 661)과 코우교쿠 천황이 동인인물이라고 역사를 조작하여 자기들이 천황을 폐위시킨 사실을 은폐한다.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29. 백제와 일본황실의 혈연관계

지금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부여의 부여씨(扶餘氏)가 백제왕실뿐 아니라 일본황실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제와 일본은 동일한 세력집단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서로 외국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백제 무령왕이 구주백제를 설립한 후로 구주백제왕을 거친 왕자가 백제왕 또는 야마토천황으로 부임한다. 백제왕과 혈연적으로 약간 소원하거나 야망이 있던 야마토의 천황들은 가끔 백제나 구주백제로 부터 독립하고자 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서기 645년 야마토의 궁중에서 황실내부 사람들에 의해 쿠테타가 발생하고 이 쿠테타에 의해 백제 의자왕이 낙점한 후계세력이 제거된다. 일본역사에서 乙巳의 變으로 불리는 이 정변은 황실내부 방계세력이 중심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며 역사의 정당성을 얻고자 꾸며 낸 것이 타이카노 카이신(大化 改新, Taika no Kaishin)이라는 캐치프레이스였다. 쿠테타의 주모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황자 ( 38대 天智천황)는 서기645년부터 661년까지 천황자리에 외삼촌과 어머니를 앉히고 본인은 황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치밀하고 냉혈한 사람이었다.

이 정변으로 백제 의자왕의 아내 코우교쿠(皇極)천황 (Empress Kogyoku, 594 – 661)이 유배되고 의자왕의 적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615 – 645)황자도 반란죄로 처형된다. 의자왕의 황실을 떠 받히고 있던 당시 정계의 실력자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가 궁궐안의 천황면전에서 도륙된다.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바쁜 백제 의자왕은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란사건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훗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 황자의 후손들이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이 정변과 관련하여 조상들의 무자비한 행적을 감추고자 이 무렵의 역사가 제 멋데로 재단되어 미화된다. 일본서기가 완성된 서기 720년 텐찌(天智)천황의 자식들이 천황자리에 있었다.

백제왕실과 일본황실은 동일한 집안세력이라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하여 약간은 소설같은 이야기를 엮어가야 된다. 소설같은 이야기라 하였으나 일본서기 기록 자체가 모호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혈연과 나이등에 정설이 없는 것이 정설이므로 사실 일본서기 자체가 소설인 것이다.

일본서기 킨메이(欽明)천황 (Emperor Kimmei) 치세 13년 여름 4월 (서기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 (箭田珠勝大兄) 황자가 죽었다는 기사가 다짜고짜 등장한다. 킨메이(欽明)천황이 즉위하고 황후를 세울 때 540년 1월 15일 센카(宣化)천황의 황녀 이시히메(石姬)를 세워 황후로 세웠다. 이시히메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자를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라 한다. 다음을 오사다노 누나쿠라노 후토타마시키 (譯語田渟中倉太珠敷 = 후의 비다쯔천황) 이다. 가장 밑을 카사누이 (笠縫)황녀라 한다. 이렇게 킨메이(欽明)천황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그가 일본서기에 딱 두번 나오고는 서기 552년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 대신 백제왕자 여창이 일본서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시적인 언급을 피하고 일본서기 저자들은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역사를 기록하였다. 킨메이(欽明)치세 14년 (서기553) 백제의 왕자 여창은 전군을 몰아 고구려에 들어가 백합벌에 성채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서기 554년 왕자 여창은 나이많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이 해 그의 아버지 성왕이 전사한다. 555년 백제왕자 여창은 동생 혜(惠, 후일의 백제 혜왕)를 킨메이(欽明)왕에게 보내 성왕사망을 보고한다. 그 해 8월 왕자 여창은 출가하여 수도하면서 부왕에 대한 불효를 참회하겠다고 신하들에게 선포한다. 557년 백제 왕자 여창이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552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죽었다는 기사가 왜 실렸을까? 서기 552년 이후 이 사람은 일본을 떠나 백제에서 생애를 보낸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왕자 여창은 위덕왕으로 598년까지 무려 44년간 왕위에 있었다. 일본의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백제에 오면 왕자 여창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성왕이라면 킨메이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백제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떼어내서 독자적인 일본황실 계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왕자 여창이 성왕의 아들인 이상 킨메이천황의 황후로 기록된 이시히메(石姬)도 성왕의 황후로 보아야 된다. 성왕이 무령왕의 적장자이므로 성왕 다음의 백제와 일본의 왕위계승권은 성왕의 아들들이 0 순위였다.

그럼 킨메이천황 다음에 즉위한 30대 비다쯔(敏達, Emperor Bidatsu)천황을 보자. 그는 위의 이시히메 소생의 두째 황자이다. 바로 위덕왕의 동모형제이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 무령왕의 두째 아들이었던 흠명의 소생이 아니라 사실은 성왕 ( 일본서기는 성명왕으로 호칭하여 흠명과 같은 명(明)을 붙였다) 의 아들이었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에게 백제의 무령왕, 성왕, 그리고 의자왕은 골치아픈 존재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아들들이 일본황실 역사에 나오게 되는데 그들의 족보를 비슷한 시기의 일본역사에만 나오는 천황에게 갖다 붙여야 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들을 낳은 어미들까지 다른 천황의 황후로 기록되는 우스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29대 킨메이(欽明)천황의 가족을 모두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모두 15남 8녀의 자식을 기록했는데 4명이 후일 천황으로 등극한다. 여기서 황후로 기록된 이시히메가 성왕의 황후인데 시동생 킨메이의 황후로 역사에 기록된 이유는 이미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2명의 천황을 배출한 키타시히메는 누구의 아내였을까? 우선 13명의 자녀가 기록된 것부터 좀 구린내가 난다. 그러나 2명의 천황은 역시 성왕의 자식이라 봐야 되지 않을까.

오아네노 키미가 출산한 4남 1녀가운데 하츠세베 황자가 32대 스슌(崇峻)천황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킨메이(欽明)의 자식인 것이 확실하다. 자식의 숫자로 보더라도 한 사람의 자식으로 15남8녀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皇后:石姫皇女(いしひめのひめみこ。宣化天皇の皇女)2남 1녀

箭田珠勝大兄皇子(やたのたまかつのおおえのみこ、八田王) : 백제왕자 여창 (530 – 598)
渟中倉太珠敷尊(ぬなくらのふとたましきのみこと、30대 敏達天皇)
笠縫皇女(かさぬいのひめみこ、狭田毛皇女)

妃:稚綾姫皇女(わかやひめのひめみこ、『古事記』に小石比賣命。宣化天皇の皇女。) 1 남

石上皇子(いそのかみのみこ、上王)

妃:日影皇女(ひかげのひめみこ、『古事記』になし。宣化天皇の皇女?)1 남

倉皇子(くらのみこ。『古事記』に宗賀之倉王として、母は糠子郎女)

妃:堅塩媛(きたしひめ。蘇我稲目宿禰の女) 7남 6녀

大兄皇子(おおえのみこ、31대 用明天皇)
磐隈皇女(いわくまのひめみこ、夢皇女) 伊勢斎宮
臘嘴鳥皇子(あとりのみこ、足取王)
額田部皇女(ぬかたべのひめみこ、33대 推古天皇)
椀子皇子(まろこのみこ、麻呂古王)
大宅皇女(おおやけのひめみこ)
石上部皇子(いそのかみべのみこ、伊美賀古王)
山背皇子(やましろのみこ、山代王)
大伴皇女(おおとものひめみこ)
桜井皇子(さくらいのみこ、桜井之玄王)
肩野皇女(かたののひめみこ、麻奴王)
橘本稚皇子(たちばなのもとのわかみこ)
舎人皇女(とねりのひめみこ、泥杼王) 当麻皇子の妃

妃:小姉君(おあねのきみ。蘇我稲目宿禰の女)4 남 1녀

茨城皇子(うまらきのみこ、馬木王)
葛城皇子(かずらきのみこ)
穴穂部間人皇女(あなほべのはしひとのひめみこ) 用明天皇の皇后、聖徳太子の母
穴穂部皇子(あなほべのみこ、須賣伊呂杼・天香子皇子・住迹皇子)
泊瀬部皇子(はつせべのみこ、長谷部若雀命・32대 崇峻天皇)

妃:糠子(ぬかこ。春日日抓臣の女)1남 1녀

春日山田皇女(かすがのやまだのひめみこ)
橘麻呂皇子(たちばなのまろのみこ、麻呂古王)

2008년 11월 9일 일요일

28. 왜왕 多利思北孤의 遣隋使

중국사서에 나타나는데 정작 일본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일본역사는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자기역사를 기록할 때 그보다 앞 서 기록된 중국의 기록을 참고로 하기 때문에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다. 앞에서 이미 거론된 3세기의 히미코(卑彌呼)여왕의 중국교류 기사가 묘하게 가공되어 히미코의 이름이 일본역사에서 제외되었다. 서기 266년부터 147년간 일본역사 기록이 중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후 413년부터 502년까지 왜의 5왕 (The Five Kings of Wa) 기사가 나타난다. 이 또한 일본기록에 없는 부분이다. 일본은 지금도 이 기사를 확인되지 않은 역사로 간주한다. 일본의 역사를 기록할 때 자국의 방침에 맞지않는 부분은 고의적으로 제외한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데로 그것이 일본황실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그들의 역사를 보면 된다.

백제 27대 위덕왕( 554 – 598재위)시절 중국에서는 400여년간 계속된 대륙의 이합집산을 끝내고 581년 수(隋) 양제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내의 혼란이 계속된 400여년간 중국주변의 소국들은 작은 규모의 분쟁을 하면서 살았으나 강력한 정권이 대륙을 차지한 이 시대는 분열에서 통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절이었다.

이 시절 隋書 동이 왜국전에 서기 600년과 607년 왜국왕이 隋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왕의 姓은 아매(阿每), 이름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號를 아배계미(阿輩鷄彌)라 한다. 왕비의 이름도 계미(鷄彌). 이 나라 사람들은 거리를 재는 리(里)의 개념을 모르고 왕래하는데 걸리는 날짜로 거리를 말한다. 국경은 동서로 5개월, 남북으로 3개월 걸리며 각각 바다에 이르게 된다. 야마타이(邪摩堆)가 수도이며 魏志에서 말한 야마타이이다. 아소산이 있고 이유없이 하늘에 닿을듯 불길이 솟구쳐 제사를 지낸다. 관리의 등급을 12개로 나누어 관리하는 관위 12계의 제도를 운영하고있다.

607년 多利思北孤는 다시 수 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라고 기록하여 수양제를 격노하게 한다. 일본인들은 그 시절 이만한 기개를 가진 천황이 있었다고, 일본이 수나라와 맞 먹는 강력한 나라였다고 좋아하면서도 이 천황의 아이덴티티를 밝히지 못한다. 일본역사를 기록할 때 부끄러운 역사든 자랑스런 역사든 있는 그데로 기록하고자 했다면 중국사서에 있는 역사가 일본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불행하게도 일본은 자랑스런 역사만을 고집하였다. 앞 장에서 논의된 구주백제와 관련된 역사는 일본황실에서 없었던 일로 결정하여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 때 없어진 역사를 살려 낼 기개와 양심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608년 수양제는 배세청(裵世淸)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배세청은 백제의 진도, 남해도를 거쳐 쓰시마, 잇끼도를 지나 九州의 筑紫, 다시 동쪽으로 진왕국 기타 10여국을 거쳐 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筑紫에서 동쪽은 모두 왜라고 한다. 이때 배세청이 왜의 수도 야마다이를 방문하고 왜왕 多利思北孤를 만나고 돌아갔다. 그가 방문했던 왜의 수도는 현 오오이타 현 나가즈(中津)였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9년(608) 수나라 배세청이 우리나라 남로를 거쳐 왜에 사자로 갔다고 보인다.

헌데 이 부분이 후대에 교묘하게 요리되어 일본서기에 기록된다. 推古치세 15년(607년) 7월 오노 이모꼬(小野妹子)가 견수사(遣隋使)로 파견된다. 608년 4월 이모꼬는 백제경유로 배세청과 함께 귀국했다. 수나라 황제의 친서를 이모꼬는 제출하지 않고 오는 길에 백제에서 빼앗겼다고 변명한다. 구주백제 왜왕 다리시히꼬의 외교기사를 마치 야마토의 推古천황이 한 일처럼 황실의 역사로 미화한다. 수나라 황제의 친서를 수나라 사자 배청과 함께 오는 길에 백제에서 강탈 당 했다고 거짓말까지 역사에 나열한다. 이런 짓까지 해야만 황실의 역사가 고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였을까. 일본서기는 배세청이 야마토의 천황을 만나고 간 것으로 역사를 도둑질한다.

아배계미, 593년 백제 아좌태자의 장자로 태어났다. 백제쪽에는 아좌태자의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5년 (597년)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하였다고 나와있다. 아좌태자는 이 해 야마토에 가서 사촌동생 성덕태자의 초상화를 그려 준 것으로 되어있고 이 그림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초상화로 궁내청에 보관되어있다. 아좌태자는 백제 27대 위덕왕의 장자로 일본에서는 오시사까 히꼬히도노 오호애 (押坂彦人大兄)황자 (생몰년 미상이나 570 – 598로 추측한다) 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593년부터 구주백제왕이었으며 위덕왕 다음의 백제왕이 될 신분이었으나 위덕왕보다 1개월 먼저 죽었다. 이 사람이 요절하므로서 백제왕위는 위덕왕과 동 세대의 늙은 동생들이 즉위하여 혜왕, 법왕 모두 1년만에 죽고 법왕의 아들 무왕(일본호칭 지누(茅渟)왕 – 서동요의 마동, 무강왕)이 젊은 나이로 그 뒤를 이었다. 이 바람에 아배계미는 600년부터 8세의 나이로 구주백제왕이 되었고 수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이 때 야마토의 천황 스이꼬(推古)나 섭정 성덕태자와 관계없는 구주백제의 외교기록이며 야마토는 구주백제의 우산아래 존재하고 외교권이 없었다.

아배계미는 촌수로 따지면 성덕태자의 조카이다. 당시 섭정 성덕태자는 어린 조카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여 구주백제 정벌전쟁을 시작한다. 이 전쟁을 일본역사는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으로 기록하여 역사를 제 멋데로 가공한다. 일본서기가 그렇게 되어있으니 요즘도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성덕태자의 친동생)를 격신라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츠쿠지(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과 히로꼬의 첫 아들)가 다시 정신라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히메왕 (舍人姬王, 흠명과 기타시히메의 제 13자)이 아까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602년과 603년 아마토의 구주백제 정복전쟁에서 야마토가 오히려 구주백제의 반격을 받아 정복된 것을 이런 식으로 기록하였다. 602년 야마토 군은 치쿠지에서 격파되고 총사령관마져 전사하였다. 603년 야마토 군은 구주백제군의 반격으로 오오사까의 바로 코 밑에 해당하는 아까시(현재 고베시) 에서 총사령관의 아내가 전사할 정도로 패배한다. 당시의 야마토의 실력자들, 推古천황, 성덕태자, 그리고 소가노 우마꼬는 구주백제의 多利思北孤 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구주백제의 관위제도를 도입하고 헌법 17조를 반포하여 구주백제의 개혁요구에 따른다. 훗날 구주백제를 역사에서 삭제한 야마토의 천황가는 이 모든 개혁이 성덕태자의 작품으로 포장하여 성덕태자를 일본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 지금도 일본의 지폐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덕태자는 이때 구주백제 정벌에 실패하여 정치에서 손을 떼고 불교에 전념하는 조건으로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다. 역사는 실제보다 성덕태자(574 – 622)의 모습을 과장되게 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