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4일 토요일

8. 노량(鷺梁)과 노루목(獐項)


서기 1934년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 박부용의 노래로 노들강변이란 신민요가 발표되었다.

노돌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여나 볼가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미드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여기 등장하는 노돌강변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부근의 한강변을 뜻한다. 노돌의 노()는 강변에 노니는 백로(白鷺)를 말하고(?) 돌은 돌양()으로 노량이 되었다. 원래는 노돌이었던 것을 노돌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후세 사람들이 노들로 부르게 되어 노들강변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서기 1598 12 16일 이순신 장군이 퇴각하던 일본의 함대를 무찌른 노량대첩의 전승지가 노량(露梁)이다. 남해도와 하동군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다이다. 이번에는 이슬로(), 돌양()이란 한자를 쓴다. 서울의 노량은 백로()를 뜻한다고 하였는데 노량대첩의 노량은 이슬로()를 쓴 것은 바다의 안개와 관련시킨 것이라(?)는 해설이다. 똑 같은 노량이 한 쪽은 백로요 한쪽은 이슬이라는 것은 노량의 가 확실히 해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남군과 진도 사이에 흐르는 명량(鳴梁) 또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의 전승지인데 진도군지(郡誌)는 이 곳을 노돌목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노돌목이라면 노량으로 바꿀 수 있으니 제3의 노량이 출현한 셈이다. 그러면 노량이란 무슨 말일까?  

()이 들어간 대표적인 지명은 노량, 명량, 견내량, 칠천량, 착량(搾梁, 강화도 손돌목), 사량도 등이다. 모두 물을 건너 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경우의 양(梁)은 돌양으로 도랑에서 돌(똘)로 변한 것을 받아 양(梁)으로 표기한 것이다. 

노량의 가 무슨 말인지 알기 위하여 삼국사기 지리지를 뒤져 임진강에서 한강의 노량진과 비슷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는 곳을 찾으니 현재의 임진강 철교 부근에 고구려의 장항현(獐項縣)이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임강현(臨江縣, 경기도 장단군 강상면 임강리 일대)은 본래 고구려 장항현(獐項縣, 古斯也忽次라고도 한다)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臨江縣 本高句麗獐項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獐項縣一云古斯也忽次). 장항현은 한자 표기이며 이를 고구려 말로 쿠시야코치(古斯也忽次)라고도 하였다.

코치(忽次)는 구(口)를 뜻하며 일본어에서 쿠찌(口)로, 한국에서는 곶(串)으로 정착된 말이다. 장항현에서는 목항(項)이 코치(忽次)에 해당한다. 그러면 노루를 뜻하는 고구려어가 “쿠시야”가 되며 현대어의 “노루”와 다르다.

동 지리지에 경기도의 안산시가 다시 쿠시야코치(古斯也忽次)로 나타난다. "장구군(獐口郡, 경기도 안산시 일대)은 본래 고구려 장항구현(獐項口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안산현(安山縣)이다." (獐口郡 本高句麗獐項口縣 景德王改名 今安山縣 獐項縣一云古斯也忽次).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는 바다를 대규모로 매립하여 고구려 시대와는 딴판인 모습이다. 바다를 매립하기 전 바다로 흘러드는 개울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하여 물을 건너 다닐 필요가 많은 지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안산시에 임진강을 건너는 곳에 붙여진 이름, 쿠시야코치가 있었다고 삼국사기 지리지는 기록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시대가 흐르면서 고구려어의 쿠시야(古斯也)는 사라지고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노루”가 사용되었다. 그러면 장항현(임강현)은 노루목, 안산시의 장구군도 노루목으로 된다.

지금 우리 말 사전을 찾으면 노루목을 “노루가 다니는 길”이라고 풀고 있으나 이는 불충분한 해설이다. 전국의 지명 가운데 노루목이란 지명이 많이 존재한다. 노루목이라고 불리는 장소를 살펴보면 노루가 다니는 길과 상관없는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과 같은 지형이 있으면 강을 따라 구부러진 길보다 돌출부 양측을 가로지르는 것이 편리한 상황이 있다. 그런 경우 반도를 가로 지르는 지름길이 생기게 되는데 이 지름길 노루목이라 불렀다. 이는 육지의 경우지만 물을 건너는 경우도 같다. 강을 건너거나 바다가 육지 깊숙히 들어 온 만(灣)을 건너갈 때 건너기 가장 편한 곳의 이름이 노루목이다. 물을 건너는 경우는 노루목에 도랑(돌)을
붙여 (노루목 + 도랑)이 되고 줄여서 노돌이 된 것이다. 노돌을 한자로 쓴 것이 노량이다. 강화도의 손돌목(窄梁)은 좁다는 뜻을 가진 솔다(窄)와 돌(도랑)이 합쳐져 착량(窄梁)이 되었다. 

 
노루목은 노루의 목에 해당하는 지형의 최단거리라는 의미이다. 노루목은 산행에도 많이 등장한다. 지리산에도 있고 설악산에도 있고 어느 곳이든 있을 수 있다.  등정하거나 하산할 때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시작되는 곳의 명칭이 노루목이다. 전국 곳곳의 강이나 내를 건너기 좋은 곳은 모두 노루목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왜 제1, 제2, 제3의 노량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노량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서 물을 건너는 곳이면 어디나 붙일 수 있는 말이다. 노량의 우리말은 “노루목 + 도랑(돌)”이었다. 그것이 놀돌을 거쳐 노돌이 되었다. 백로나 이슬이 낄 틈이 없다.     




                                                - 끝 -

2008년 5월 19일 월요일

7. 신화속의 야마토(倭, 大和)

-->

()의 최초 역사기록이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것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이다. 한반도의 한강 이남에 마한, 변한, 진한이 있으며 총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위지동이전 한전(韓傳)과 같은 서물이다.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9 – 297) 3세기 말 저술하였으며 한반도와 왜의 관련기록은 대강 3세기 중엽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면 된다. 야마다이국 (邪馬台)의 여왕 히미꼬 (卑彌呼)가 서기 238년 사신을 보내 위() 명제(明帝) 조예(曹叡, 205 – 239, 조조의 손자)를 배알하였다는 내용이다. 일본측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히미꼬의 기록이 없다. 다만 일본서기는 왜 여왕이 239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그들이 240년 돌아 왔다는 기록은 남겼다. 일본서기의 저자가 중국측 기록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위나라와 시작된 이러한 야마타이국(邪馬台)의 외교관계는 다음의 진()으로 이어지다가 266년 사신을 보낸 것을 끝으로 이후 147년간 중국역사에 왜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가들은 서기 266년부터 413년까지의 147년 간 일본열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히미꼬의 야마다이국은 부족연맹 수준의 작은 나라였는데 147년 간의  역사가 없는 신비한 세월이 흐른 뒤 ( 이 기간 일본은 역사는 없고 신화만 무성하다) 갑자기 왜()의 왕들이 유송(劉宋)
사자를 보내 관직을 받는다.

서기 413년 동진(東晉)에 왜의 사신이 등장한 이래 유송에 5명의 왜국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그러나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왜왕들의 이름은 일본의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떠한 연관성도 암시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8세기의 역사가들이 역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일본서기를 쓴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 역사를 남기고자 하였다면 중국측 기록과 일치하는 인명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역사서는 의도적으로 중국사서에 나오는 이름을 피했다.   

그런데 고고학상 일본역사 발전단계의 한 획을 긋는 거대한 분묘가 이 무렵 나라 – 오오사카 지역에서 생기기 시작하더니 차차 일본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 분묘의 규모가 거대해서 길이 420미터를 넘는 것도 있으며 이를 만들려면 이집트 피라밋 건립과 맞 먹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략 서기 250년부터 552년 불교공인이후 매장문화가 변화할 때까지의 기간을 일본에서 고분시기(古墳時期)라고 한다.

이 새로운 문화가 일본내의 자생적인 문화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일본인이 인정하지만 어디서 누가  왜 일본에 왔나?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인된 결론이 없다. 역사를 밝히기 위해서 이 무렵의 천황묘의 발굴을 역사학계에서 주장하지만 황실은 고인의 권위와 평안을 지켜야 한다면서 반대한다.

그런 연유로 일본 고대사는 사실상 미지의 황무지에 묻혀 있다. 일본서기는 이 시대의 역사를 모두 신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뜻이 아니라 신의 뜻에 따라 하늘에서 강림한 천손을 대대손손 왕으로 받들어야 된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그런 전통 때문에 열도에는 지금도 현재의 합리화를 위하여 역사를 재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 -

2008년 5월 6일 화요일

6. 난중일기의 발음도(發音島)


정유년 10(1597) 11일 정오에 안편발음도(安便發音島)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육지에 내려 산마루로 올라가서 전선을 숨겨 둘 만한 곳을 찾아보니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으로 뚫렸으며 서쪽에는 비금도(飛禽島)까지 통하여 눈앞이 시원하다.  (東有前島 不能遠望, 北通羅州靈巖月出山, 西通飛禽島眼界通豁)

1597 916일 명량해전에서 왜군의 서해진입을 저지시킨 이순신은 서해의 고군산열도까지 물러난다. 명량에서 이겼지만 아군의 기세가 외롭고 위험하여 조선 수군은  916일 당사도(唐笥島, 신안군 암태면), 17일 어외도(於外島, 현신안군 지도읍의 於義島), 19일 칠산 앞바다(영광군 낙월면),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홍농(영광군 홍농읍), 20일 위도(부안군 위도면)를 거쳐 계속 북상하였다. 21일에는 고군산열도(군산시 선유도)에 도착했다. 103일 고군산열도를 출발해 부안 변산, 영광 법성포, 어외도를 거쳐 10 9일 해남 전라우수영에 돌아왔다.

23일만에 다시 찾은 우수영 성 안팎은 인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람의 자취도 보이지 않는 적막이었다. 황폐화된 우수영에서 진지를 구축할 수 없었던 이순신은 1011일 신안의 안편발음도를 찾았다. 이순신은 이 섬에 18일간 머물면서 염전을 개발해 질 좋은 소금을 구워 파는 등으로 모자란 수군 군량과 전비를 마련했다. 10 29일 이순신은 목포의 고하도로 이동한다. 그곳에 108일간 머물며 해상진지를 구축하였다.


--> 난중일기에 기록된 발음도가 어디인가를 놓고 장산도와 팔금도라는 두 가지 설이 대립 중이다. 장산도는 해남 우수영에서 10km, 팔금도는 25km 남짓 떨어진 섬이다.  안편발음도(安便發音島)는 난중일기에만 나오는 지명이다. 장산도와 안창도는 16세기 초 이미 보편화된 지명이므로 충무공이 머물렀다면 장산도나 안창도라고 명시했을 것이다.  또 안편도와 발음도가  인접한 두 개의 섬이라면 이순신은 어느 섬에 올랐을까?





-->
전남 신안군 
고려사지리지
1451
세종실록지리지
1454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해동지도
1750
동여도
1860
장산도(長山島)
長山縣
長山島
長山島
長山島
長山島
팔금도(八禽島)
팔흠도(八欠島)

팔이도(島)
안좌도(安佐島)


안창도(安昌島)
지좌도(只佐島)
안창도(安昌島)
기좌도(其佐島)
안창도(安昌島)
기좌도(其佐島)
암태도(岩泰島)
암타도(墮島)

암타도(巖墮島)
암태도(岩太島)
암타도(岩墮島)
비금도(飛禽島)
비이도()
피금도(被錦島)
비이도()
비금도(飛禽島)
도초도(都草島)
도사도(道沙島)
도사도(道沙島)
도초도(都草島)
都草島
都草島


백제의 居知山縣은 신라에서 安波縣, 940년 고려의 長山縣으로 이름이 바뀐 뒤 長山이란 이름이 바뀐 적이 없다. 충무공이 언급한 발음도(發音島)는 고려사지리지에 보이는 팔흠도(八欠島)일 것이다. 팔흠도(八欠島) ->팔이도(島) 에서 팔금도(八禽島)로 바뀐 것은 근세의 일이다.

비금도(飛禽島)의 경우는  비이도() ->피금도(被錦島) à비이도() ->비금도(飛禽島) 과정을 거쳤으나 1597년의 난중일기에 이미 飛禽島가 등장하므로 16세기부터 飛禽島가 함께 쓰인 듯 하다.

이름은 시간과 더불어 변해 왔으므로 현재 사용되는 한자의 뜻으로 이름을 풀이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비금도가 나는 새의 형상이라던가 도초도가 당나라 수도와 같은 형태라거나 풀이 많다거나 하는 등의 황당한 이야기가 신안군의 지명유래로 나온다. 비금도는 나는 새의 형상이 아니며 도초도는 당 나라나 풀과 아무 상관도 없다. 비금도가 되었든 도초도가 되었든 현재의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름이 있었다. 여러 개의 섬과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벌로 이루어진 것이 원래의 모습이었다.

섬 이름은 우리 말로 이미 통용되고 있던 것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우리 말 이름을 표현할 한자음이  없으면 근사한 한자를 빌릴 수 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본래의 우리 말이 대부분 사라졌다신안군에 소구라 불리는 섬이 있었다. 사투리로 소구였으나 사실은 소의 귀라는 뜻이었던지 우이도(牛耳島)가 되었다. 이렇게 단순한 경우는 본래의 우리 말 이름을 찾아낼 수 있지만  팔금도(八禽島)비금도(飛禽島) 경우는 오리무중이다. 팔흠도(八欠島), 발음도(發音島)의 우리 말 이름은 빠끔이섬이었을까비금도는 삐끔이섬이었을까? 빠끔이섬과 삐끔이섬을 여러 분은 한자로 어떻게 표기하시겠습니까

비금도에 그림산(226m)이 있습니다. 온통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이라 멀리서도 잘 보입니다. 1597 10 11일 이순신이 바라본 비금도는 사실 이 바위산을 말합니다. 한문으로 바뀌지 않고 우리 말로 남아 있는 희귀한 케이스이지요. 그런데 그림산이라는 명칭은 후세의 오류입니다. 원래는 가름산이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가름산의 의미를 모르게 되어 대충 그림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비금도에 방조제가 생기기 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그림산과 선왕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비금도를 두 토막으로 가로막아 양쪽의 통행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산이 가름산(遮斷山?)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가르마를 연상하시면 좋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