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73. 신대(神代)의 역사

서기 245 1 1일 진무천황(神武天皇)은 나라현(奈良県) 카시하라시(橿原市)의 우네비산(畝傍山) 기슭 카시하라궁(橿原宮)에서 즉위했다.

신유(辛酉)년 춘정월 초하룻날이었다 하며 이 해를 천황의 원년으로 하고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딸 이스즈히메 (五十鈴媛命)를 정비로 세웠다. 당시의 신유(辛酉) 1 1일을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하면 BC 660 2 11일이라면서 서기 1967년부터 일본은 이 날을 건국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서기 245(을축년)에 가장 가까운 신유년은 서기 241년이다. 일본사람들은 오랜 세월 신화에 세뇌되어 자국의 역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전 시작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호호데미 (火火出見命)는 “우리가 동정(東征)에 나선지 6년이 흘렀다. 황천(皇天)의 위광에 힘 입어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땅은 아직도 완전히 평정되지 않아 할 일이 많지만 야마토 주변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없어졌다. 이제 여기서 황도(皇都)를 열어 새 나라를 건설하자.”라고 선언한다.

 自我東征於茲六年矣 以皇天之威 凶徒就戮 雖土未 余妖梗 而中洲之地無復風塵 誠宜恢廓皇都 

큐우슈우(九州)의 천손(天孫)세력이 킨키(近畿)에 원정하여 야마토를 정복하고 나온 첫번째 성명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언사는 황천(皇天)이란 말이다. 황천이란 호호데미가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의미로 쓰고 있으며 두 사람의 조상을 의미한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역사가들은 신화의 형식을 빌어 역사를 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일본서기의 신화란 신화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로 기록된 것이다. 호호데미가 신화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전쟁을 했겠는가? 우리는 신화를 통하여 당시 인간들의 구체적인 욕망과 역사의 필연성을 읽어야 된다

서기 239년 전쟁을 시작하면서 큐우슈우(九州)의 출정식에서 나온 성명서가 있다. 호호데미 (火火出見命) 45세가 되었을 때 형제와 자식들을 모아 놓고 “우리 일족의 신화에는 타카미무스히(高皇靈尊)와 아마테라스(天照大神)가 지상세계를 평정한 뒤 이를 니니기(瓊瓊杵尊)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다. 니니기는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내려 와 이 서쪽 변경의 땅을 다스렸다. 그로부터 179 2470여 년이 흘렀으나 …. (45. 神武東征 참조)

及年四十五歲,謂諸兄弟及子等曰:「昔我天神,高皇靈尊、大日霎尊,葦原瑞穗國而授我祖-火瓊瓊杵尊. 於是 火瓊瓊杵尊,闢天關,披雲路,驅仙蹕,以戾止.是時運屬鴻荒,時鐘草昧.,蒙以養正,治此西偏.皇祖皇考,乃神乃聖,積慶重暉,多歷年所.自天祖降跡以逮,於今一百七十九萬二千四百七十餘歲.

한글로 쓰면 신들의 이름이 너무 번쇄하여 신들의 존칭을 생략한다. 존칭을 포함하면 타카미무스히노 미코토와 아마테라스 오호카미가 되어 너무 긴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황천(皇天)이란 타카미무스히(高皇靈尊)와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남녀 2명의 신을 뜻한다. 니니기는 호호데미의 아버지로 천손강림의 주인공이다. 아마테라스, 오시호미미(忍穗耳命), 니니기(瓊瓊杵命), 호호데미 (火火出見命)로 혈통이 이어졌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이 혈통을 2세대 더 늘려 놓았다. 천손(天孫)이란 아마테라스를 정점으로 한 이 혈통을 말하며 천손족이라 하면 그 주변인물까지 포함한다.

호호데미란 바로 삼국지위서 왜인전의 경초 2 (서기 238) 기사에 나오는 난승미(難升米)이다. 경초 2  6월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등을 파견하여 대방군에 와 천자를 뵙기를 청하였다. 대방태수 유하(劉夏)가 관리를 파견하여 사신들을 인솔하고 낙양에 들어왔다.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送詣京都

난승미의 난은 일곱을 뜻하는 부여 말이다. 한자로 쓰기 전의 난승미는 칠뜨기, 칠되미 또는 칠데미란 이름이었으며 소위 칠삭동이를 의미한다. 되를 되승()으로 하고 미는 소리나는 데로 쌀미()로 하여 승미가 되었고 데미는 데() ()로 훈독한 한자를 쓴 것이다. 심지어 되승 대신 말두()를 써서 난두미(難斗米)로 쓴 기록도 있다. 고귀한 신분이 되자 난을 호호(火火)로 바꾸어 호호데미 (火火出見)가 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기사가 나온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더니 (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왜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 찾아 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처럼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사라졌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아마테라스(天照大神) 12 ()를 거느렸다고 하는데 12후 가운데 세오리쯔히메(織津) 있다. 세오리쯔는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아라미타마(荒御魂)로 여겨지고 있다. 세오리쯔가 바로 아마테라스라는 뜻이다삼국유사의 세오녀(細烏女)와 일본신화의 세오리쯔는 동일인의 이름이며 비단을 짜는 여자라는 뜻이다. 이 여인이 훗날의 왜여왕 히미코(卑彌呼)이다. 일본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天照大御神)의 모습은 서기 157 10대의 소녀였다.   

구야국(狗邪國) 2대 거등왕(居登王)이 서기 199년부터 253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구야국의 건국은 서기 42년이며 초대 수로왕(首露王) 15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하나 이는 초기 기록이 누락된 결과이므로 거등왕은 수로의 아들이 아니라 몇 세대 이후의 인물일 것이다. 거등왕이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고 가정하더라도 서기 157 10대의 세오녀(細烏女)가 거등왕보다 2세대 정도 앞 선 세대이며 그녀는 신라인이 아니라 구야국의 공주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카미무스히 (高皇靈尊)는 구야국의 수로왕으로 그려지는 인물로 아마테라스와 함께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오히려 아마테라스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기 245년 야마토를 점령한 호호데미가 제일성으로 “황천(皇天)의 위광에 힘 입어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 고 한 것은 자기 자신을 구야국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구메(來目)의 군사를 동원하여 야마토를 정복하였다. 구메(來目)란 당시의 구야국 수도의 이름이다. 구메(來目)를 김해(金海)로 바꾼 것은 통일신라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흉도란 누구일까? 아마테라스에서 호호데미까지의 혈통 속에는 부성(父性)이 탈락되어 있다. 증조 할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성장한 후손들이 증조 할아버지의 후손들을 흉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부계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아마테라스의 분노가 후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부계 타도로 이어진다. 호호데미의 야마토 정복은 아마테라스의 평생의 한을 풀어 주었고 이 소식을 듣고 히미코는 서기 247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본신화 속에 그려진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이 스사노오(고사기 須佐之男命, 일본서기 素戔鳴尊)이다. 일본신화는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가 마치 형제간인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태어났다는 것은 숨기지 않았다.

일본신화는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와 국토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본열도의 여러 섬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신의 이름이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로 남녀의 신이다. 이름이 아름답고 귀에 낯 설지 않는 이 신들이 사실은 가야의 정견모주의 아들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 2010 MBC에서 방송된 연속극 김수로(극본 김미숙, 연출 최종수 장수봉)에서 가야산 정견모주의 두째 아들로 나온 이진아시(伊珍阿豉)가 바로 일본신화의 정점에 등장한다그는 죽을 때까지 열도에서 살았고 그의 부인 이자나미는 열도보다 고향 땅이 좋았던지 일찍 황천에 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 가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 그리고 마한출신으로 알려진 쯔쿠요미이다. 쯔쿠요미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신이므로 무시해도 좋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스사노오이다. 이자나미(伊邪那美)가 떠난 뒤 이자나기의 왼쪽 눈에서 아마테라스가, 오른쪽 눈에서 쯔쿠요미(月讀尊), 이자나기의 코에서 스사노오(素戔鳴尊)가 태어났다.

백제 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166 - 214),  6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 234)을 이어 7대 사반왕(沙伴王)이 서기 234년 즉위하였으나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 - 286)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이즈모(出雲, 현 시마네현)에 돌아온다.  이들 3명이 살았던 시대가 열도의 스사노오, 아마테라스,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그리고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살았던 시대와 겹친다.

스사노오의 이야기는 이즈모(出雲, 현 시마네현)에서 시작되며 그는 아마테라스와 동시대인이다. 가야의 아마테라스와 백제의 스사노오가 열도의 역사를 연다.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신녀, 스사노오는 백제의 왕자이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 사이에서 타코리히메(田心), 타기쯔히메(湍津), 이찌키시마히메(市杵嶋)의 세 딸이 태어났다.이들은 무나카타 삼신(宗像三神)이라 불리며 지금도 추앙받는 신이다또 오시호미미(天忍耳尊), 아마노호히(日命), 아마쯔히코네(天津彦根命), 이쿠쯔히코네(活津彦根命), 쿠마노노쿠스비(熊野橡樟日命) 5명의 아들을 낳았다. 여기 나온 오시호미미가 바로 아마테라스가 직접 낳은 아들이며 진무천황 호호데미의 할아버지가 된다.

스사노오(素戔鳴尊)난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타카아마노 하라(高天原, 신들의 나라)에 와도 좋다는 아마테라스의 허락을 받았으나 그의 행동은 막무가네였다. 아마테라스는 밭을 가꾸고 있었는데 스사노오는 봄에 도랑을 메꾸는가 하면 논두렁을 부수고 모종을 마구 옮겨 심곤 하였다. 가을이면 말을 풀어 밭을 망쳐놓았다. 또 아마테라스가  니이나메노 마쯔리(新嘗祭)를 할 때 그 방에 똥을 쌌다또 아마테라스가 신의(神衣)를 짜기 위하여 신성한 하타도노 (機殿)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건물의 지붕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하여 얼룩말의 가죽을 벗기고 시체를 떨어 뜨렸다이때 아마테라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베틀의 북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아마테라스는 하늘의 바위굴에 들어가 바위문을 닫아 잠그고 숨어버렸다태양의 신 아마테라스가 바위문을 안에서 잠그고 숨어버렸으므로 온 나라 ()  빛을 잃고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신라에서 태양 빛이 사라져 암흑의 세상이 되었었는데 이제 일본에서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으니 신기할 뿐이다. 우리의 짐작데로라면 양쪽이 동일한 태양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스사노오는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梨, 牛頭山)에서 배를 타고 이즈모에 들어왔다 하며 야마타노 오로치(八岐 大蛇)를 퇴치하고 근거를 마련한다. 야마타노 오로치(八岐大蛇)란 이들의 정벌에 대항한 토착세력으로 본다. 신라의 소시모리는 기록시점에 따라 신라도 될 수 있고 고구려도 될 수 있고 백제도 될 수 있다. 소시모리는 삼국의 사이에 낀 지방이다. 한반도 동해안의 춘천에서 함흥까지의 어디 쯤이라고 비정된다. 그는 현 시마네현 (島根県) 스가(須賀)에 스가궁(須賀宮)를 짓고 도읍한다. 헌데 심상치 않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전해 오는 당시 스사노오의 야쿠모 타쯔(八雲立)라는 노래가 있다.

구름일렁이는 이즈모(出雲)
겹겹의 구름 울타리 둘러
아내가 편히 살 여러겹 울타리
아아 여러겹 울타리

호쯔마쯔다에(秀眞傳)는 환단고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서물인데 아마테라스에게 12명의 신녀가 있었다고 한다그 가운데 8명의 신녀들을 압송하여 이즈모의 스가궁에 가두고 그녀들은 스사노오의 후비가 되었다. 8명의 후비에서 태어난 것이 앞의 신화에서 언급한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다스사노오에게서 태어난 배 다른 형제들이다.  아마테라스도 여기 끌려 와 스사노오의 아이를 낳았다그 아들 이름이 오시호미미(天忍耳尊)이다. 아마테라스는 오시호미미를 나중 구야국에 보내  타카미무스히 (高皇靈尊)의 딸과 혼인시켜 니니기(瓊瓊杵)가 태어났다

일본서기는 카미()의 역사(神代)와 인간의 역사(人代)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는 호호데미가 야마토 정벌에 나서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역사감각으로 서기 239년부터 사람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연히 카미의 역사는 서기 239년에서 끝난다. 인간이 서기 239년을 경계로 카미와 인간으로 분리될 수 없으므로 카미의 역사의 마지막에 기록된 카미들은 인간의 역사에 참여해야 된다

그런데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신의 역사의 아무개가 인간의 역사의 누구에 해당하는지 눈치로 맞출 수 밖에 없다. 눈치로 해야 되는 역사는 정통파 역사학자의 영역이 아니다. 심증을 역사적 증거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사노오 계보 (출처)

고사기에 스사노오의 계보(系譜)가 나와 있다.
  1. 쿠시나다 히메(櫛名田比賣)가 야지마지누미(八嶋士奴美神)를 낳았다.
  2. 카무오호이찌 히메(神大市比賣)가 오호토시(大年神)와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를 낳았다.
야지마지누미가 오호야마쯔미(大山津見)의 딸 코노하나찌루 히메(木花知流比賣)와 후하노모지쿠누스누 (布波能母 久奴須奴)를 낳고 다시 5세대 후에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오호쿠니누시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면서 오호나무지(大穴牟), 아시하라시코오(葦原色許男神), 야치호코(八千矛神), 우쯔시쿠니타마 (宇都志國玉神)를 나열한다. 그런데 이 복잡한 계보는 곧 엉터리로 판명되고 처음 나온 야지마지누미와 오호쿠니누시 이하 5개의 이름이 동일인이다. 왜냐하면 6대손이라는 오호쿠니누시가 바로 스사노오의 딸 스세리히메(須勢理姬命)와 혼인하기 때문이다.

오호쿠니누시는 스사노오의 후계자이다. 백제 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166 - 214)이 서기 166년 왕위에 올랐다는 역사기록이 도움이 된다. 스사노오는 한자로 표기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발음이며 초고(肖古) 또는 속고(速古)란 스사노오의 한자표기일 것이다. 서기 166년 스사노오는 백제의 초고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아들 오호쿠니누시가 이즈모에 남아 부친의 과업을 이어간 것으로 본다.

스사노오의 후손중 오호쿠니누시 계열과 오호토시 계열은 이즈모 경영을 완성하고 야마토로 진출하였고 우카노미타마 (宇迦之御魂神)는 쯔시마와 큐우슈우 그리고 구야국을 잇는 해상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히미코의 천손족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진무동정(神武東征)에 참여하여 야마토로 진출한다. 따라서 야마토을 선점하고 있던 오호쿠니누시 후손과 진무동정 이후 새로 온 우카노미타마 후손들이 함께 야마토에 살게 되고 이들을 모두 가모씨(賀茂氏)로 칭한다. 결국 스사노오의 후손들이 가모씨(賀茂氏)인 것이다. 오호쿠니누시와 우카노미타마는 배 다른 형제간이다. 우카노미타마의 후손들은 진무동정의 포상으로 카즈노현주(葛野縣主)가 되어 현 쿄오토오(京都)지역에 뿌리를 내린다.

서기 166년 스사노오가 백제의 초고왕으로 나갈 때 이즈모의 스가궁 여러 겹의 구름 울타리에 갇혀 있던 신녀들 8명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머지 신녀들은 아마테라스를 따랐다고 본다. 훗날의 기록에 이들이 낳은 아들들이 아마테라스를 위하여 일하기 때문이다. 다섯 살이 된 어린 아들 오시호미미를 안고 아마테라스(당시의 이름 아마테루)가 간 곳은 친정인 구야국일 것이다. 아마테루히메 즉 세오녀의 나이 스물 두 세살 무렵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 20(서기 173왜여왕 히미코(卑彌呼)가 사자를 보냈다. 아마테라스가 다시 열도에 돌아와 가야왕실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우니 야마타이국이다.

오호쿠니누시 계보 (출처)
오호쿠니누시의 계보중 역사상 중요한 인물만 고르면 다음과 같다.
1)    타키리비메 (多紀理毘賣)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鋤高日子根神)와 타카히메(高比賣) 다른 이름은 시타테루히메 (下光比賣命)를 낳았다. 이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지금 카모대어신(迦毛大御神)으로 불린다.
2)    카무야타테히메 (神屋楯比賣)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을 낳았다.
3)    어머니가 분명하지 않은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

오호토시(오호쿠니누시의 배 다른 동생)의 계보는 많은 인물이 열거되어 있지만 우리가 거론하게 될 사람은 오호쿠니미타마 (大國御魂神)와 오호야마쿠히(大山咋神) 다른 이름은 야마스에노 오호누시(山末之大主神)이다. 오호야마쿠히는 히에이산(日枝山)과 카즈노(葛野)의 마쯔오 (松尾)에서 제신으로 모신다. 

지금 열거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일본열도의 역사를 연다. 오호쿠니누시의 큰 아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를 낳은 타키리히메가 스사노오가 낳은 3명의 딸 가운데 타코리히메 (田心)이다. 고사기는 타키리비메 (多紀理毘賣), 일본서기는 타코리히메(田心)로 표기한다. 배 다른 형제끼리의 결혼이다.

카쯔라기(葛城)에 있는 3개의 카모()신사 가운데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현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타카카모신사 (高鴨神社)의 제신이며 고사기는 그를 카모 오호미카미 (迦毛大御神)라 기록했다. 오호미카미(大御神)로 고사기에 기록된 카미는 일본역사에서 아마테라스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의 두 사람뿐이다. 카쯔라기(葛城)에 카모쯔바(鴨都波)신사가 있고 코토시로누시를 모신다. 신사이름에 카모()가 붙게 된 것은 스사노오의 후손들이 스스로를 카모씨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이들의 후손들이 분리해 가면서 오호미와(大三輪), 와니(), 카쯔라기(葛城)등의 새로운 왕실의 씨성을 열어간다

쿄오토오시(京都市)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는 보통 카미가모신사(上賀茂神社)로 불린다. 짝을 이루는 가모미오야신사(賀茂御祖神社)가 있는데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로 불린다. 불행하게도 가모와케 이카즈찌 (賀茂別雷)라는 인물이 역사상의 누구인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시모가모신사의 제신은 진무동정시 야마토에 진출한 스사노오의 다른 아들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의 아들로 여겨지는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라 하며 일본서기는 그를 야타카라스 (八咫烏)로 기록했다.

이즈모(出雲)의 오호쿠니누시는 점차 세력을 키워 야마토로 진출하였는데 그와 관련된 기사를 일본서기는 이렇게 처리하고 있다.

그 뒤 오호쿠니누시는 여러 지방을 순행하면서 나라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즈모(出雲)에 돌아와 “그런데로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제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없다. 지금 나 이외에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고 말 했더니 신비한 빛으로 바다를 비추며 홀연히 나타난 카미()가 있어 이르기를 “내가 없었으면 너는 이 만큼 해 낼 수 없었다. 내가 있었으므로 이만한 공적을 이룰 수 있었다.” 라 하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호쿠니누시가 물으니 “너는 나의 사키미타마(幸魂쿠시미타마(奇魂).”라 하였다.
“과연. 당신이 나의 사키미타마 쿠시미타마였군. 지금부터 어디서 살 생각입니까?” 하였더니 “나는 야마토노쿠니 (日本國)의 미모로산(三諸山)에 살고자 한다.” 그래서 그 땅에 궁전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것이 오호미와노 카미 (大三輪之神)이다.

이 신의 아들이 카모노키미(甘茂君), 오호미와노키미(大三輪君)등이며 또 히메타타라 이스즈히메 (蹈鞴五十鈴) 이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와니()로 변하여 미시마의 미조쿠히히메 (杙姫) 또는 타마쿠시히메 (玉櫛) 에게 통하여 이스즈히메를 낳았다고 한다. 이 여인이 호호데미천황의 황후이다.

이즈모는 작은 나라이다. 이즈모를 완전히 평정하였지만 오호쿠니누시의 자아(自我)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비전이 좋은 땅으로 야마토를 점 찍고 현 나라현 사쿠라이시(奈良県井市)의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 자리에 궁전을 짓고 옮겨왔다. 비로소 오호쿠니누시의 야마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서기 214년 백제의 초고왕이 죽고 6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 234)이 즉위한다. 구수왕을 우리는 여태까지 추적해 온 오호쿠니누시로 보고 있다. 오호쿠니누시가 야마토를 비우고 그의 장자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鋤高日子根神)가 야마토의 왕이 된다

큐우슈우에 야마타이국을 세운 아마테라스는 서기 170 년경부터 오호쿠니누시에게 로비를 사작한 것 같다. 자기 아들에게 이즈모(出雲)를 양보해 주도록 스사노오의 후계자 오호쿠니누시를 설득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낸다. 첫번째 사자가 아메노호히 (天菩比)로 스사노오와 신녀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그러나 그는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오호쿠니누시에게 봉사하였다.

두번째 사자로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를 보냈는데 그는 오호쿠니누시의 딸 시타테루히메(下照比賣)와 혼인까지 하고 아예 눌러 앉아 8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신화상으로는 하늘나라에서 타카미무스히 (高皇靈尊)와 아마테라스 (天照大御神)가 함께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카미의 초월적인 힘으로 아메노와카히코를 살해한다. 자객을 보내서 배신자를 처단했다는 뜻이다.

세번째 사자로 타케미카즈찌(建御雷之男神)를 보냈다. 이 때 오호쿠니누시는 자기 아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와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의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한다. 코토시로누시는 천신(天神)의 아들(御子)에게 이즈모(出雲)를 바치겠다며 사라져 갔으나  타케미나카타는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타케미카즈찌가 힘으로 제압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이렇게 이즈모를 평정하여 저항세력이 없게 만든 다음 그 유명한 천손강림이라는 이벤트가 연출된다. 천손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려와서 군림하기만 하면 되는 구조이다. 세월이 지나는 바람에 천신(天神)의 아들(御子)이 오시호미미에서 니니기로 한 세대 지나갔지만 아마테라스의 끈질긴 권력욕은 손자를 왕위에 올리려고 집착한다.

이 기록은 7세기 말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직접 자기들의 육안으로 아마테라스의 모델이 된 권력욕에 눈 먼 권력자를 보면서 만든 스토리이다. 40대 텐무(天武)천황의 아내이며 다음 천황이 되는 지토우(持統)가 자기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 위하여 얼마나 집착하였는지 당시의 역사가들은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실제의 역사에서 천손에게 이즈모를 양도한 일은 없었다. 또 진무의 천손족과 오호쿠니누시 의 가모()족과는 계통이 다르다. 천손족은 구야국 계통 스사노오는 백제계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진무이후의 역사가 천손족의 단일혈통인 것처럼 만들어 7세기의 황실도 천손으로 만들었다. 천손족의 호호데미는 이즈모을 양도받아 야마토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실력으로 아마테라스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7세기의 일본황실에게는 진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자기 후손들이 영원히 왕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카미보다 좋은 도구는 없다는 것을 7세기의 일본황실은 알고 있었다

로마에서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며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비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당시까지 로마황제는 선거에 의하여 뽑혔으며 원로원의 승인을 받는 존재였다. 인간보다 우월하고 특별한 권위라는게 없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 콘스탄티누수 대제(275? – 337)이다. 그는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로마황제와 접목시켜 황제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지만 그의 관심은 기독교가 아니라 황제의 자리였다. 황제란 인간이 이렇쿵 저렇쿵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신이 내린 자리이니 인간의 시비를 초월한다는 논리가 그의 생각이다. 그 때부터 아무나 함부로 황제가 되겠다고 나설 수 없었다

7세기의 일본황실이 최선의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것이 4세기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생각이며 이 방법은 21세기의 지금도 유효하다. 천손을 거역하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천황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는 주장만큼 천황가를 즐겁게 할 이데올로기가 있겠는가

그런 연유로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천손을 누누히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일본역사가 씌여지고 있던 7세기 말 지토우천황의 염원이었다. 지토우천황 다음에 집안의 여인들이 여럿 왕위에 오른다. 사내아이들이 어려서 사망하니 다음 사내아이가 자랄 때까지 남에게 왕위를 주지 않고 유지하기 위하여 집안 여인들이 왕위를 꽤 차고 앉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백제가 사라지고 일본이 홀로 섰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백제가 열도를 관리하던 시절에는 누가 다음 왕이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홀로 선 뒤에는 누가 다음 왕이 될지 예측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지토우천황계보 (출처)
지토우는 서기 671년의 임신의 난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텐무의 황후로 백촌강 전쟁의 와중인 서기 662년 쿠사카베 황자를 낳았다. 서기 679년 텐무천황과 황후, 그리고 6명의 황자들이 요시노에서 맹약(吉野盟約)을 교환하였다. 6명의 황자란 쿠사카베(草壁皇子, 662 – 689), 오오즈(大津皇子, 663 – 686), 타케치(高市皇子, 654 – 696), 오사카베(忍壁皇子, ? – 705), 카와시마(川島皇子, 657 – 691), 시키(芝基皇子,668 – 716)로 카와시마와 시키는 텐치천황의 소생, 나머니 4명은 텐무의 아들이다. 텐무는 황자들끼리 싸우지 말고 협력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그들을 하나하나 포옹하였다. 황후도 황자들을 포옹하였다

형제간에 정의로운 맹약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잠재적인 황위 계승권자들에게 다음 천황은 내 아들이니 욕심내지 말라는 경고나 마찬가지이다. 지토우의 아들 쿠사카베황자를 서열 1번으로 공인하고 나이도 연장이며 나라에 공적도 많은 타케치를 서열 3번으로 못 박아 대권욕심을 접게 하는 것이 황후의 의도였을 것이다. 서기 681년 쿠사카베황자를 태자로 결정한다.

서기 686 9 40대 천황 텐무가 사망하고 다음 달 모반의 죄를 씌워 오오즈황자를 처형한다. 오오즈황자는 10 2일 체포되어 10 3일 처형되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사태의 진전이었다. 오오즈의 아내는 맨발로 뛰어나와 남편을 따라 분사했다 하며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사카베황자는 황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서기 689년 나이 27세로 사망하고 모후인 지토우가 41대 황위를 이었다.  

서기 697년 어린 손자가 14세가 되자 지토우는 손자에게 양위하고 섭정으로 남는다. 그가 42몬무천황 (文武天皇, 683 – 707)이다. 서기 703년 지토우가 사망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몬무천황도 서기 707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그가 남긴 것은 6세의 아들이다. 이 아이가 즉위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집안의 여인들이 황위를 꿰어 찬다. 처음에 아이의 할머니가 등장한다. 쿠사카베의 아내이며 몬무의 어머니인 43대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이 등장하여 서기 715년까지 황위에 있었다. 할머니가 노령이 되어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아이의 고모가 나선다. 몬무의 누나인 44겐쇼우천황(元正天皇 )을 세워 715 년부터 – 724 년까지 황위를 붙들고 있다가 아이가 23세가 되자 황통을 물려준다. 그가 45대 쇼우무(聖武)천황이다.
 
단명으로 끝난 쿠사카베 황자의 양친, , 아들과 딸이 모두 황위에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백제가 사라진 뒤 열도에서 발생한다. 어린 사내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집안 여인들이 보위를 차지하고 곁가지 혈통의 황자들은 얼씬 못하게 한다. 일본서기 마지막 등장인물 지토우천황의 금쪽같은 내 새끼를 끼고 도는 모습이 3세기 천손족의 아마테라스에게 투영되어 천손강림 신화가 만들어진다

지토우(持統)란 시호의 의미는 핏줄을 지켰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핏줄에 매달렸다는 의미일까? 그러나 역사의 전개는 지토우천황의 처절한 염원데로 되지 않았다. 쿠사카베황자와 그의 아들 몬무의 단명, 그리고 무자비한 정적제거는 텐무계통의 혈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49대 코오닌(光仁) 천황부터 텐찌의 후손들이 황위에 오른다.




2010년 7월 21일 수요일

72. 미야누시야카히메 (宮主宅媛)

중국의 사서에 일본열도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 신비의 4 세기에 열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다건너 백제에서 서기 346년 즉위한 근초고왕은 백제역사상 최초로 중국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왕이다. 서기 372년 백제가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동진(東晋)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동진은 백제왕 여구(근초고왕)를 진동장군영낙랑태수로 제수한다는 기사가 진서 간문제기(晉書 簡文帝紀)에 나온다. (咸安二年 春正月 百濟 林邑王 各遣使貢方物 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 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 ). 그후 백제의 동진에 대한 조공은 몇 차례나 계속되었고 침류왕(枕流王) 원년에 동진에서 불교가 들어왔다. 서기 1984년 서울대 박물관의 석촌동 3호분 발굴조사에서 중국동진(中國東晉)시대의 청자 반구호 구연부편(盤口壺口緣部片)이 출토되어 석촌동 3호분이 근초고왕(346 – 375 재위) 의 무덤으로 비정되기도 하였다.

4세기의 백제는 비류왕 (서기 304 – 344 재위), 계왕 (344 – 346), 근초고왕 (346 – 375), 근구수왕(375 – 384), 침류왕(384 – 385), 진사왕(385 – 392), 아신왕(392 – 405), 전지왕(405 – 420)의 순서로 왕위를 잇는다. 이 기간 일본열도는 스진(崇神) – 케이코(景行) – 세이무(成務) – 쥬아이(仲哀) – 진구우(神功) – 오우진(應神) – 닌토쿠(仁德)의 순이다. 일본서기는 스이닌(垂仁)을 스진(崇神) 다음 세대로 배치하였으나 스이닌은 스진보다 앞 선 세대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기년(紀年)의 개념이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주변국과의 외교기사를 보고 단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밖에 없다.
이 무렵 케이코(景行) – 세이무(成務) – 쥬아이(仲哀) – 진구우(神功) – 오우진(應神) – 닌토쿠(仁德)의 6대의 천황을 모신 것으로 기록된 타케시우찌노 스쿠네(武内宿禰)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서기 케이코(景行) 3년조에 그의 탄생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고 마지막 기사가 닌토쿠(仁德) 50년에 나온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케이코(景行) 3년과 닌토쿠(仁德) 50년이 서력으로 몇년에 해당하는지 보증할 권위를 갖는자료가 부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정사(正史)라고 믿고 있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현 주소이다.

일본서기는 각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에 의거하여 타케시우찌(武内)의 수명을 계산하면 287년이 된다. 닌토쿠(仁德) 50년의 기사는 “야마토에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는데 집안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대 생각은 어떤가?” 하고 천황이 묻는 내용이므로 타케시우치는 그 보다 더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타케시우찌는 287년 이상 살았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타케시우찌는 가공된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시간을 재는 기년(紀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타케시우찌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무렵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합산하면 스진(崇神) 68년, 케이코(景行) 60년, 세이무(成務) 60년, 쥬아이(仲哀) 9년, 진구우(神功) 69년, 오우진(應神) 41년, 닌토쿠(仁德) 87년 등으로 총394년이 된다. 1 세기 정도의 시간이 4 배로 부풀려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69. 부여의 엑소더스” 편에서 부여의 의라왕(依羅王)이 일본열도을 장악하고 스진(崇神) 천황으로 기록된 것을 서기 300년, 그가 다시 케이코(景行)에게 패하여 사망한 것을 서기 318년(무인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케이코(景行) 원년을 서기 319년으로 친다.

일본서기는 타케시우찌를 코우겐(孝元)천황의 증손으로 고사기는 손자로 기술하여 1 세대의 편차를 보인다. 타케시우찌는 세이무(成務)와 같은 날 태어나서 세이무와 특별한 관계였다 하니 세이무와 동갑내기라고 볼 수 있다. 타케시우찌의 4명의 아들들은 서기 392년 야마토의 장군의 반열에 올라 백제의 아신왕을 즉위시키고 진사왕을 야마토로 압송하였다. 4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을 이 때 45세 정도로 보면 서기 347년 경 출생한 셈이 된다. 타케시우찌가 장남을 20세에 보았다면 타케시우치의 출생은 서기 327년 경이다. 세이무(成務)천황 또한 이 무렵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고사기는 세이무(成務)와 쥬아이(仲哀)가 사망한 간지를 각각 을묘와 임술년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서기 355년과 362년에 해당하며 사실과 부합되는 정보로 보인다. 다만 붕어년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우리는 그들이 권좌에서 물러난 해로 이해한다.

진무(神武)에서 겐쇼(元正)천황까지 일본천황의 한풍시호는 일본서기가 완성된 이후에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 – 785)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슬픈 이름을 받은 쥬아이(仲哀)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 대부분의 천황에게 60여년의 넉넉한 재위기간을 할해한 일본서기가 그에게 부여한 재위기간은 겨우 9년이다. 또 모든 천황들의 궁이 야마토나 카와치(河內)에 있었는데 쥬아이는 재위 9년 가운데 6년을 야마쿠치현(山口縣) 아나토(穴門)의 토유라(豊浦)궁에서 보냈다. 일본서기는 왜 그가 서울을 떠나 궁벽한 한촌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 시대 열도의 명실상부한 주역은 일본서기가 기록한 야마토 타케루노 미코토 (日本武尊)와 오우진(應神)천황 그리고 그의 비(妃)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이며 백제의 주역은 근초고왕과 귀수(貴須 또는 貴首)왕자였다. 우리는 근초고왕의 생몰년을 서기 295 – 374년으로 귀수왕자를 서기 320 – 394년으로 본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이 시대의 인물로 세이무(成務), 쥬아이(仲哀), 진구우(神功)황후가 등장한다. 일본열도의 세이무(成務), 쥬아이(仲哀), 진구우(神功)가 근초고왕과 귀수왕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세이무는 케이코천황의 아들이며 쥬아이는 야마토 타케루의 아들이다. 세이무와 쥬아이는 동년배의 비슷한 나이이며 진구우로 그려진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氣長足姬)는 이들보다 10여 년 젊은 나이일 것이다.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는 쥬아이(仲哀)의 황후이며 오우진(應神)의 어머니라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녀는 서기 363년 12월 쯔쿠지(筑紫)의 우미신궁(宇美 神宮)에서 오우진(應神)천황을 출산하였다. 그 때 그녀의 나이를 26세 정도로 보면 그녀는 서기 337년 출생한 셈이다. 이 기사를 근거로 오우진(應神)천황의 즉위연대를 4세기 말로 비정하는 역사가들이 많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사는 황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가공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오우진(應神)천황의 비(妃)가운데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가 있다. 고사기는 와니(丸邇)의 히후레노 오호미 (比布礼能意富美)의 딸 미야누시 야카하에히메 (宮主矢河枝比売)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宇遅能和紀郎子)를 낳았다고 했다. 일본서기는 와니노오미(和珥臣)의 조선(祖先),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의 딸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 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황자를 낳았다고 기록했다. 고사기는 오우진(應神)천황이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어느 때 천황이 찌카쯔 아후미노 쿠니 (近淡海国)에 넘어 가려고 우지노(宇遅野) 주변에 서서 카즈노(葛野)를 바라보며 “카즈노를 바라보니 넉넉하게 사는 민가의 정원이 보이네. 풍요로운 나라의 모습이 보이네.”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코하타노 무라 (木幡村)에 왔을 때 십자로에서 빼어난 미모의 처자와 마주쳤다. 천황이 처자에게 누구의 딸이냐고 물으니 “와니(丸邇)의 히후레노 오호미 (比布礼能意富美)의 딸로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하에 히메 (宮主矢河枝比売)라 하나이다.” 라 하였다. 천황이 “내일 돌아 오는 길에 너의 집에 들리겠다.”하고 길을 떠났다. 야카하에 히메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전하자 “천황에 틀림없다. 받들어 모셔야 한다.”하며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고 기다리니 이튿 날 천황이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큰 잔치가 벌어지고 야카하에히메의 큰 술잔을 받은 천황이 흥에 겨워 노래하였다.

“이 이쁜 게(蟹)야! 어디서 온 게(蟹)냐? 머나 먼 쯔누가(角鹿)에서 온게(蟹)다. 옆으로 기어서 어디로 가느냐? 이찌지시마 (伊知遅島)나 미시마(美島)에 닿는다. 거기 사는 물새가 잠수하거나 밖에 나와 숨을 쉬듯 기복이 있는 사사나미(佐佐那美) 의 길을 가다 코하타(木幡)의 길에서 마주친 처자여. 뒷 모습은 방패와 같이 날렵하고 치열은 잣나무 씨알처럼 고르고 희구나. 이찌히이(櫟井)의 와니사(丸邇坂)의 흙을, 표면의 흙은 너무 연하고 깊은 곳의 흙은 너무 진하여 가운데 흙을 골라 불에 직접 닿지않게 만든 물감으로 이마를 그리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비너스같은 여인이여! 이렇게 하고 싶다 또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여인을 마주하고 있다. 가까이 하고 있다.”

오우진(應神)천황이 소년처럼 즐겨워 하던 때는 서기 362년 경이며 오우진(應神)이 42세, 야카하에히메 26세 정도였다고 본다. 이렇게 혼인하여 생긴 황자(御子) 우지노 와키 이라쯔코(宇遅能和紀郎子)가 서기 363년 12월 쯔쿠지(筑紫)의 우미신궁 (宇美 神宮)에서 태어났다.

신비의 4세기에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오우진(應神)천황을 기쁘게 한 미모의 후궁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의 아버지를 와니(和珥)씨의 조(祖),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라 기록했다. 히후레노 오미는 이 기록뿐이며 모계에 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사기의 쥬아이(仲哀)조에 카고사카왕 (香坂王)과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역을 진압하는 기사가 있다. 거기서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息長帯日売)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 장군이 와니노 오미(丸邇臣)의 조(祖)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이다. 타케후루쿠마 (建振熊)장군과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는 동일인물이다.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는 장군의 딸이었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 추 7월 천황은 사도장군(四道将軍)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사도장군의 한 사람인 오호히코(大彦)의 군세가 와니고개(和珥坂, 天理市和珥)를 넘을 때 일족의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황은 오호히코(大彦)와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를 야마시로(山背)에 파견하여 하니야스비코(埴安彦)를 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와니고개(和珥坂)를 넘어 정예군을 이끌고 나라산(那羅山, 奈良市北部 丘陵)에 올라 싸웠다. 그리고 와카라강(輪韓河, 木津川)까지 진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하니야스비코 (埴安彦) 군과 대치한다. 양군이 키즈강 (木津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하니야스비코(埴安彦)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의 군세를 바라보며 “왜 너는 군세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느냐?”하고 물었다.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너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자(者)다. 너는 제사권(祭祀権)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관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온 것이다. 이는 천황의 명령이다.”라 대답했다. 그래서 신(神)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활을 쏘았는데 맞지 않았다. 다음에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활을 쏘자 가슴에 명중하여 하니야스비코 (埴安彦)가 죽었다. 이것을 본 적군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관군은 강을 건너 북쪽의 적을 쳐부수고 반 이상의 목을 베었다.

여기 등장하는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는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의 할아버지이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의 윗 기사는 사실은 스진시대의 일이 아니라 스진의 아버지 부여의 의려왕(依慮王)이 열도에 들어 와 기존의 왕조와 싸우는 전쟁이다. 의려(依慮)의 공격을 받은 기존왕조는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쪽과 항복하자는 쪽으로 갈라져 형제간의 골육상쟁에 돌입한다. 서기 287년 의려(依慮)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야마토의 코우레이 (孝靈) 천황이 되었다.

하니야스비코(埴安彦)와 오호히코(大彦)는 둘 다 코오겐(孝元)천황의 아들이다. 오호히코(大彦)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는 부여의 의려왕(依慮王)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였고 하니야스비코(埴安彦)는 외적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서기 354년경 쥬아이(仲哀)조의 카고사카왕 (香坂王)과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역을 진압하는 전쟁터와 서기 287년 타케하니야스비코의 반역을 토벌하는 전쟁터가 와니고개, 야마시로(山背), 키즈강(木津川), 우지노(宇遅野) 등으로 현재의 야마시로(山城, 京都府 南部)지역에 해당된다. 서기 287년 전쟁은 할아버지가, 쥬아이조의 반역을 평정하는 전쟁은 그 손자가 맡았다. 여기 등장하는 우지(宇遅)지역은 야카히메의 조상들이 웅거하고 있던 땅이며 오우진과 야카히메사이에서 태어난 우지노 와키 이라쯔코(宇遅能和紀郎子)의 이름에 붙은 우지(宇遅)가 바로 이곳이다.

일본서기 케이코(景行) 58년 봄 2월 천황이 아후미노 쿠니(近江國, 현 滋賀縣)에 가서 아나호(穴穗, 현 오오즈(大津)시 아노오 (穴太))의 저택에 잠시 머물렀다. 그로부터 2년 후 케이코천황은 그 저택에서 사망했고 이어서 그의 아들 세이무(成務)가 아후미(近江)의 타카아나호노 미야(高穴穗宮)에서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建內宿禰)를 대신(大臣)으로 하고 크고 작은 나라의 경계와 쿠니노 미야스코(國造)을 정하고, 지방의 현(縣)과 현주(縣主)도 정하였다.

고사기는 케이코(景行)천황이 기록에 남은 아들만 해도 21명, 기록되지 않은 아들이 59명 도합 8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했다. 스진천황에게 빼앗긴 열도를 탈환하기 위하여 백제에서 파견된 왕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의 말년 일본열도에 그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분할하여 후세들에게 나누어 통치하도록 한 것 같다. 소위 분봉정책이다. 그 자신의 후계자인 세이무(成務)는 아후미노 쿠니(近江國) 즉 현 시가현 (滋賀縣)을 맡고 야마토 타케루의 아들 쥬아이(仲哀)는 야마토를 분봉받았다. 그런데 야마토 타케루가 역사기록과 달리 케이코(景行) 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당시 백제 비류왕의 아들이다. 케이코(景行) 말년 쥬아이(仲哀)가 야마토를 맡았다는 것은 야마토 타케루의 영향력이 케이코천황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서기 344년 케이코(景行)천황이 사망한다. 세이무(成務)와 쥬아이(仲哀)는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경쟁관계이다. 세이무는 오호미의 왕, 쥬아이는 야마토의 왕이다. 야마시로(山城)라는 땅은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낀 땅이다.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氣長足姬)의 조상들의 근거지가 이 지방이며 아후미(近江)의 타카아나호노 미야 (高穴穗宮)에서 멀지 않는 곳이다. 역사는 그녀를 쥬아이(仲哀)의 황후라고 기록했으나 우리는 그녀가 세이무 (成務)의 아내였다고 믿는다. 역사를 기록할 때 진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세이무와 쥬아이를 바꿔 기록했다고 본다. 가장 강력한 근거가 이들의 무덤의 위치이다. 진구우와 세이무는 지하에 나란히 누워 있다. 여러 번 결혼한 여인이 죽으면 첫 남자의 무덤 옆에 묻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

그러면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란 무었이었을까? 그만큼 은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의 진구우 – 오우진 시대에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왕래는 눈 부신 데가 있다. 우리는 그 눈 부신 교류의 기록을 일관된 권력의지의 산물로 이해한다. 권력의지의 주체는 백제의 귀수왕자와 열도의 미야누시 야카히메이다. 귀수왕자의 또 다른 얼굴이 오우진(應神)이며 그는 쥬아이의 형이다. 일본서기가 그토록 감추고자 한 것이 그의 진면목인 것이다. 열도의 야마토 타케루는 서기 34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되었고 귀수왕자는 바로 그의 아들이다.
 
경쟁관계인 세이무와 쥬아이간의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 일본서기 쥬아이조에 적혀있다. 코시노쿠니(越國, 현 후쿠이현)에서 쥬아이에게 헌상하는 백조(白鳥)가 야마시로(山城) 우지강(菟道河)에 왔을 때 훼방꾼이 나타나 헌상품인 백조를 훼손한다. 쥬아이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쥬아이는 군사를 보내 범인을 찾아 처형한다. 자기의 영토에서 벌어진 쥬아이의 군사행동에 대해서 세이무가 항의한다. 이렇게 시작되어 서기 354년경 전면전으로 발전한다. 이 전쟁을 지휘했던 장군이 다름아닌 와니노 오미(丸邇臣)의 조(祖)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이며 그가 이 장의 주인공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부친이다.

일본서기 진구우 섭정 1년 3월 쥬아이의 왕자 카고사카왕(鹿坂王)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란기사가 이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 전쟁이 바로 야마시로(山城)의 우지강(菟道河)에서 벌어지고 반란의 주모자 오시쿠마왕 (忍熊王)은 아후미(淡海)의 세타목(瀬田済)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수일 후 그의 시체가 우지강( 菟道河)에서 발견되었다.

쥬아이의 주력부대를 야마시로에서 궤멸시킨 뒤 세이무의 군대는 야마토를 접수한다. 서기 355년 쥬아이는 오오사카를 버리고 야마쿠치현의 토유라즈(豊浦津)로 도망간다. 거기서 그는 아나토노 토유라궁 (穴門豊浦宮)을 짓고 6년을 보낸다. 이것이 쥬아이천황이 아나토(穴門, 현 시모노세키 근방)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낸 이유이다.

고사기가 세이무와 쥬아이의 사망연대를 서기 355년과 362년으로 기록하였다. 서기 355년(을묘) 쥬아이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을 세이무가 사망한 것으로 또 세이무가 서기 362년(임술) 권좌에서 물러난 것을 쥬아이가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더 나아가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의 남편 또한 세이무에서 쥬아이로 바꿔버렸다.

쥬아이가 시모노세키를 피난처로 선택한 것은 백제의 도움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백제로 탈출하기 쉽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제왕이 누구인가? 바로 쥬아이의 아버지가 아닌가? 쥬아이는 아나토의 피난처에서 세이무에게 저항하였으므로 세이무는 그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움직인 것이 서기 360년경이다. 이 전쟁에 세이무와 동행한 것이 그의 비(妃)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였다. 그녀는 당시의 전쟁영웅 타케후루쿠마 (建振熊)의 딸이다.

일본서기 쥬아이 2년 7월 5일 오키나가 타라시히메가 토유라즈(豊浦津)에 도착했다. 그날 두 사람은 해안을 산보하다 황후가 여의주(如意珠)를 손에 넣었다. 이 문장을 삽입하여 오키나가 타라시히메가 장차 고귀한 운명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일본서기 저자들은 암시한다. (仲哀天皇二年 秋七月辛亥朔乙卯 皇后泊豊浦津 是日 皇后得如意珠於海中)

쥬아이가 6년간 기거하던 아나토노 토유라궁 (穴門豊浦宮)를 버리고 쯔쿠지(筑紫)의 나가아가타(儺県, 博多湾岸)로 도망가서 카시이궁(橿日宮, 福岡市 香椎)에 머물렀다. 세이무의 추격이 계속되고 큐우슈우 전체가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큐우슈우의 각 나라들도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쥬아이 8년 9월 천황은 카시이궁에서 신하들과 쿠마소(熊襲) 토벌에 관해 협의 한다. 그 때 황후가 귀신에 씌어 “쿠마소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그보다 신라(新羅)라는 보물로 가득 찬 땅이 있지 않느냐? 그 곳을 쳐라. 그러면 쿠마소는 저절로 복종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쿠마소 정벌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5일 천황은 신의 저주로 급사했다.

위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쥬아이의 기사로 취급되고 있지만 세이무에 관한 기사로 읽어야 된다. 이 무렵의 역사기록에 신(神)과 신탁(神託)의 출현이 빈번해 진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대의 주인공들의 시호에 신(神)이라는 글자가 붙여진다. 오우진(應神)과 진구우(神功)가 그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귀신을 의미할까? 아니면 지금 일본열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가진 인간 누군가를 의미할까? 서기 360년 귀수 왕자 40세, 세이무 33세, 쥬아이 33세,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24세 무렵으로 본다.

쿠마소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는 신탁은 백제의 귀수왕자가 세이무에게 보내는 경고이다. 열도에서 집안 사람들 끼리 싸울 힘이 있거든 그 힘을 차라리 신라를 치는데 써라. 그러나 세이무는 귀수왕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귀수왕자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귀수는 백제의 군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열도내의 쿠니노미야스코 (國造)들을 동원하여 세이무를 제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귀수왕자를 도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3년 등장하는 모로가타노 키미(諸県君) 우시모로이(牛諸井)이다. 그는 히무카노 쿠니(日向国, 九州南部 현 미야자키현)의 대호족으로 그의 딸 카미나가히메 (髪長媛)가 닌토쿠(仁德)의 비가 되었다. 일설에는 히무카(日向)의 모로가타노 키미(諸県君)는 노령으로 조정에 출사할 수 없게 되어 귀국하였고 대신 카미나가히메 (髪長媛)를 봉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그는 당시 야마토의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의 귀신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과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이다. 귀수(貴須)를 뒤집으면 수귀(須貴)가 되고 이것을 다시 주길(住吉)로 기록하여 귀수왕자를 의미한다. 스미요시 삼신은 소코쯔쯔노오 (底筒男命), 나카쯔쯔노오 (中筒男命), 우와쯔쯔노오 (表筒男命)의 총칭이며 스미요시의 신들은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스미요시대사 신대기 (住吉大社神代記)는 옛부터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에 전래해 온 유래를 기술한 고전적(古典籍)인 데 신대기(神代記)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전승은 진구우황후 (神功皇后)와 관련된 것으로 진구우황후(神功皇后)가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과 밀사(密事)가 있었고, 속된 표현으로 부부관계였다고 적혀있다.

우리는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을 백제에서 귀수와 동행한 용맹한 3명의 장군들로 본다. 귀수왕자는 일거에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야마토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세이무는 서기 362년 항복하였고 귀수왕자(스미요시대신)는 세이무를 비롯한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타케시우찌노 스쿠네등의 거취를 결정하였다. 이 때 귀수왕자는 소문으로만 듣던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를 처음 면담하였다. 고사기는 그녀를 직접 면담한 그가 어떤 결정을 하였는지 자세히 기록하였다. 타케시우찌는 세이무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였으므로 새로운 정권에서 등용하기 거북한 사람이었다. 타케시우찌가 새로운 정권에 충성할 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9년의 타케시우찌의 위기라는 기사는 타케시우찌가 새로운 정부의 검증을 무사히 통과하여 스미요시 대신의 신임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서기 362년 세이무를 퇴위시키고 일본열도는 귀수왕자의 통치 아래 들어가며 이 때부터 그는 오우진(應神)천황으로 기록된다. 이 무렵 전쟁 포로로 잡혀있던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를 방면하여 자기의 비(妃)로 만들고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히메로 바꾸었다. 이 여인을 얻고 기뻐 하는 모습을 고사기가 문학적으로 묘사한 것을 위에서 보았다. 스미요시대사 신대기 (住吉大社神代記)의 기록은 그리하여 역사적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진구우황후 (神功皇后)가 오우진(應神)의 어머니라는 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집자들의 최대의 승부수였다. 이것을 뒤 집을 역사적 자료가 혹시 오우진(應神)이나 진구우황후 (神功皇后)의 무덤 속에서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 황실은 영혼의 평안을 헤치면 안 된다면서 결사적으로 천황들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다.
 
서기 363년 오우진(應神)천황은 최고의 전리품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데리고 백제의 수도 (漢山 또는 漢田)를 방문하여 근초고왕에게 새 며느리를 인사시켰을 것이다. 백제의 수도 한전(漢田)에서 오우진의 또 다른 이름 호무다(譽田)가 나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이 해 12월 백제에서 돌아오던 길에 쯔쿠지(筑紫)의 우미(宇美) 신궁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 아들이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363 – 422)이다. 일본서기는 이 아들이 오우진(應神)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감추고 혈통을 바꾸며 소설을 쓰면서 감추고자 하였던 귀신은 귀수(貴須)였고 오우진(應神)이었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6년부터 백제와의 통교(通交)가 시작되는 외교기사가 모여있다. 가장 먼저 백제의 3명의 장군들의 이름이 나온다. 46년 춘3월 시마노 스쿠네 (斯摩宿禰)를 토쿠준노 쿠니(卓淳国)에 파견했다. 시마노 스쿠네(斯摩宿禰)는 어느 씨족의 사람인지 모른다고 한다. 토쿠쥰(卓淳)의 왕 마키무칸키(末錦旱岐)가 시마노 스쿠네에게 “ 2년 전의 7월 백제의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이 방문하였을 때 동방의 야마토에 강대한 국가가 새로 생겼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고 바다를 건너야 되므로 통교를 요구할 수 없었다.” 이를 들은 시마노 스쿠네는 종자의 니하야(爾波移)와 토쿠준(卓淳)의 와코(過去)의 2인을 백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이를 환영하며 니하야에게 비단과 화살, 40매의 철연(鉄延)을 주며 “이후로 교류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백제의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은 귀수왕자의 휘하장군으로 보이며 이들은 서기 369년부터 시작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서기 360년경 이들은 귀수왕자와 함께 열도의 내란을 평정하고 역사에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으로 신격화되어 기록되었을 것이다. 스미요시 삼신이란 귀수의 3 장군이란 뜻이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7 년 백제의 왕이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을 파견하여 조공했다. 이 때 신라의 사신도 쿠테이(久低)등과 동행했다. 황태후(皇太后)와 호무타와케(誉田別) 황자가 크게 기뻐하며 “쥬아이(仲哀) 천황이 살아 계셨다면 크게 기뻐하셨을 텐데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호족들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헌데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해 보니 신라의 공물이 많고 진기한 반면 백제의 것은 양도 적고 보잘 것 없었다. 쿠테이(久低) 등에게 이유를 묻자 “저희들이 사히노 시라기 (沙比新羅)에 도착했을 때 신라인들은 우리를 체포하고 3개월 간 감금하였읍니다. 저주를 입에 담았으므로 죽이지는 않았으나 우리들의 공물을 몰수하고 신라의 보잘 것 없는 공물과 바꿔치기 하였읍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를 발설하면 귀환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였읍니다.”하고 대답했다.

황태후와 호무타와케 (誉田別)황자는 신라의 사자를 꾸짖고 진위를 판단하기 위하여 천신(天神)에게 점궤를 물었다. 그리하여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内宿禰)와 협의하여 찌쿠마노나가히코 (千熊長彦)를 사자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신라가 백제의 공물을 탈취하였음이 사실로 밝혀져 이를 꾸짖었다.

위의 기사에서 또 다시 천신(天神)에게 점궤를 물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제는 누구의 눈에도 이 천신(天神)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확실하다. 황태후란 진구우(神功)황후, 호무타와케(誉田別) 황자란 오우진(應神)이라고 일본서기는 주장하나 우리는 황태후란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 황자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천신(天神)이란 귀수왕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부분의 역사를 해석한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9년 춘 3월의 기사를 우리는 “50. 영산강 유역의 갈등의 역사”에서 다루었다. 서기 369년 진구우 황후의 군사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백제에 주었다는 내용이다. 그 기사에 이어서 칠지도(七枝刀)가 나온다.

여름 5월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가 쿠테이(久低)들과 함께 백제에서 귀환했다. 황태후가 기뻐하며 “바다 건너의 지반도 안정되어 야마토(日本国)에 볼 일도 별로 없을 터인데 어찌 오셨는가?” 라고 묻자 쿠테이(久低)들이 “저희들의 왕은 야마토의 협력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우호를 더욱 깊게 하고자 왔읍니다.”하고 대답했다. 황태후는 “잘 말 해 주었다. 이 쪽도 원 하던 바다.” 라 하며 야마토측의 세력하에 들어 온 타사성(多沙城)을 주어 왕래의 거점으로 삼도록 하였다.

진구우(神功) 51년 춘 3월 백제의 왕이 다시 쿠테이(久低)를 보내 조공했다. 황태후는 태자와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内宿禰)에게 “백제와의 친교는 기쁜 일이다. 진기한 공물을 차례로 보내주어 나도 잘 쓰고 있다. 내가 죽더라도 우호를 지켜 나가도록…” 하고 말했다. 동년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를 백제국에 파견하여 쿠테이(久低)들을 보냄과 동시 영원의 친교의 뜻을 전했다. 백제의 왕과 왕자는 황송하여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맹세하였다.

진구우(神功) 52년의 가을 9월 쿠테이(久低)들이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와 함께 왔다. 그리고 칠지도(七枝刀), 칠자경 (七子鏡)등 여러가지 보물을 헌상하고 “우리나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일 주일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수원이 나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수원이 있는 코쿠나(谷那)의 철산(鉄山)의 철을 채굴하여 영원히 헌상할 것입니다.” 라는 왕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또 왕은 손자인 토무루왕(枕流王)에게 “내가 교류를 계속해 온 동방의 야마토 (日本国)는 우리나라의 세력확대에 협력하였고 그에 의거하여 지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너도 우호를 중시하고 공물이 끊기지 않도록 하면 내가 죽은 뒤에도 나라는 평안하리라.”라 하였다 한다. 그 뒤로 매년 조공이 이어졌다.

진구우(神功) 55년 백제의 초고왕(肖古王, 근초고, 재위346 –375)이 죽었다.

진구우(神功) 56년 백제의 왕자 귀수(貴須, 近仇首, 재위 375 – 384)가 즉위하였다.

진구우(神功) 64년 백제의 귀수왕이 죽었다. 왕자의 토무루왕(枕流王, 재위 384 – 385)이 즉위하였다.

진구우(神功) 65년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이 죽었다. 왕자의 아화(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의 진사(辰斯, 재위 385 – 392)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고사기의 오진(應神)조에 주목할 만한 기사들이 모여 있다. 이 시대 아마베(海部), 야마베(山部), 야마모리베(山守部), 이세베(伊勢部)를 정했다. 또 쯔루기노 이케(剣池)를 만들었다. 또 신라 사람들이 건너 왔다. 그래서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建内宿禰)가 이들을 인솔하고 쯔쯔미노 이케(堤池)에 사역하여 쿠다라노 이케(百済池)를 만들었다. 또 백제의 국왕 초고왕 (照古王, 근초고)이 암수 한쌍의 말을 아찌키시(阿知吉師)에 딸려 헌상했다. 이 아찌키시(阿知吉師)는 아찌키노 후비토 (阿直史)등의 조(祖), 또 타찌(横刀)와 대경(大鏡)을 헌상했다.

또 백제국에 “ 학문이 높은 분이 있으면 보내라” 하였더니 와니키시(和邇吉師)라는 사람이 백제국에서 왔다. 그가 논어 10권, 천자문 1 권, 총 11권을 가져왔다. 이 와니키시(和爾吉師)는 후미노 오비토(文首)등의 조(祖), 또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 이름은 타쿠소(卓素)와 쿠레하토리(呉服)의 사이소(西素)의 두 사람을 보내왔다.

또 하타노 미야스코(秦造)의 조(祖), 아야노 아타히(漢直)의 조(祖)와 술(酒)을 빚는 전문가(専門の人), 이름이 니호(仁番) 또 다른 이름은 스스코리(須須許理)등이 바다 건너 왔다. 이 스스코리(須須許理)가 오호미키(大御酒)를 빚어 헌상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천황은 즐거워 하였다.

고사기는 기사만을 나열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서기는 몇년 몇월 며칠의 시간개념을 도입하고 있지만 진실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 연기(年紀)나 선후가 제 멋데로 바뀌어 있으므로 해석은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는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4년 춘 2월 백제의 왕이 하타오리(機織)의 마케쯔(真毛津)를 보내왔다. 현 쿠메노 키누누히 (久目衣縫)의 시조이다.

동년 유즈키노 키미(弓月君, 하타(秦)씨의 시조)가 백제에서 건너와, “ 내가 다스리는 120현(百二十県)의 인민을 데려 오고자 하나 신라의 방해로 가라국(加羅国)에 머물러 있읍니다” 라 하였다. 그래서 카쯔라기노 소쯔히코 (葛城襲津彦)를 파견하여 유즈키(弓月)의 인민을 가라(加羅)에 대기시켰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소쯔히코(襲津彦)가 귀환하지 않았다.

오우진(應神) 15년의 추 8월 백제의 왕이 아찌키(阿直岐)를 파견하여 양마 2필(良馬二匹)을 헌상했다. 그래서 아찌키 (阿直岐)로 하여금 카루노사카(軽坂, 橿原市大軽町)의 마굿간에서 사육시키고 그 곳을 우마야사카(厩坂)라 하였다. 아찌키(阿直岐)는 또 문헌에 밝았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의 스승으로 하였다. 천황이 “백제에 그대와 같은 후미요미히토(博士, 글을 아는 자)가 있는가?” 묻자 아찌키가 와니(王仁)라는 자(者)를 추천했다. 그래서 카미쯔케노노 키미(上毛野君)의 조선(祖先)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무나키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 와니(王仁)를 데려 오기로 하였다. 아찌키(阿直岐)는 아찌키노 후비토(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년 춘 2월 와니(王仁)가 왔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의 스승(師匠)으로 하였다. 여러 문헌을 학습하고 다방면의 지식을 공부했다. 와니(王仁)는 후미노 오비토(書首)등의 시조이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조에 오우진이 오호토모와케 (大鞆和気)라고 불린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천황이 태어나기 전 천신지지 (天神地祇)의 보호를 받아 신라원정에 성공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출생했을 때부터 팔의 근육이 토모(鞆)의 형상으로 솟아 있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오호토모와케(大鞆和気)로 불리게 되었다. 토모(鞆)란 일본에서 만든 글자((國字)이며 활을 쏘는 사람의 왼 팔을 보호하도록 가죽으로 만들어 끼는 보호대라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52년과 64년의 기사에 토무루왕(枕流王)이 나온다. 그는 근구수 다음의 15대 침류왕을 뜻하는데 왜 일본서기가 침류(枕流)를 토무루로 읽었는지 설명이 없다. 우리는 이 토무루라는 말이 위의 토모(鞆)에서 온 말이라고 보며 오토모와케란 오우진이 아니라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의 별명이었다고 본다. 서기 384년 근구수왕이 죽고 385년 토무루왕(枕流王)이 즉위했는데 이 토무루왕이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였다.

미야누시 야카히메(宮主宅媛)는 장군의 딸이라 하였다. 그녀 또한 활을 들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여 토모(鞆)를 팔뚝에 끼고 사는 일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왼 팔뚝에 굳은 살이 박히고 그것이 전설이 되어 그녀가 낳은 아들의 팔에 태어 날 때부터 토모(鞆)처럼 굳은 살이 박혀 있어서 오호토모와케로 불렸다 한다. 와니노 오미(和珥臣)의 조선(祖先)의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의 딸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를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서기 384년 침류왕 즉위 기사에서 아이부인 (阿尒夫人)이라 기록했다. 와니부인(和珥夫人, 또는 丸邇夫人)이란 뜻이리라.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6년부터 52년까지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귀수와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잇는 최 측근 참모들이다. 서기 365년부터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백제 출입이 잦아졌을 것이다. 시아버지 근초고왕은 백제의 최고 권력자이다. 오우진(應神)천황에게는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보다 나이 많은 아들들이 즐비하다. 손 위의 형제들을 젖히고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다. 가장 중요한 거점이 근초고왕이었다. 할아버지의 인증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을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모를 리 없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40년 춘정월 천황은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를 불러, “너희들도 자식 이쁜 줄 알게다”라고 말 하니 둘이 함께 대답했다. “예. 알고 있읍니다”. 그러자 천황은 “다 큰 자식과 어린 자식이 있으면 어느 쪽이 더 귀여우냐?” 하고 물었다. 오호야마모리 (大山守)는 “나이 많은 쪽입니다.”하고 답 하였다. 오호사자키 (훗날의 仁德천황)는 천황의 안색을 보고 그 마음 속을 헤아려, “다 큰 자식에게 불안이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러나 어린 자식에게는 여러가지로 신경쓰게 되므로 애정도 더 깊을 것입니다.”라 하니, 천황이 매우 기뻐하며 “그 말이 맞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를 태자로 세우고 싶어서 나이 많은 아들들의 의향을 물어 본 것이다. 같은 달,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를 태자로 정하고, 오호야마모리 (大山守命)에게 산천임야등 국토관리를 맡겼다. 오호사자키(大鷦鷯尊)는 태자의 보좌역을 맡겼다.

할아버지의 인증이 지금 역사의 유물로 남아있다. 서기 368년 우지노와키 이라쯔코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 근초고왕으로부터 왜왕(倭王)의 칭호를 받았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칠지도이다. 칠지도의 명문 “百濟王世子 奇生璽書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은 근초고왕이 다섯 살 된 손자 기생(奇生, 우지노와키의 백제 이름)을 왜왕으로 명한다는 뜻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서기 368년 근초고왕이 31세의 며느리 미야누시 야카히메에게 준 선물이었다. 칠지도가 열도의 미야누시 야카히메에게 전달된 것은 서기 37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서기 368년 이미 왜왕의 공인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우진(應神) 15년의 추 8월 백제의 왕이 아찌키(阿直岐)를 파견하여 양마 2필(良馬二匹)을 헌상했다는 기사는 서기 368년 근초고왕이 손자 왜왕에게 말을 선물로 보낸 것으로 이해한다. 칠지도는 제작하는데 시간이 걸리므로 뭔가 당장 눈에 띄는 표지가 필요하여 말을 골랐을 것이다. 헌데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말을 가지고 온 아찌키가 글을 읽을 수 있는 것 을 알고 아들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아들을 제왕으로 키우기 위하여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기록한 아찌키(阿直岐)와 와니(王仁)의 기사는 아들을 제왕으로 길러 내고자 하는 어머니의 심모원려에 다름 아니다. 그 시대에 백제 최고의 학자를 야마토로 불러 들여 아들의 스승으로 모신다. 아마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는 당대의 권력자들 가운데 최고의 학문을 수학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서기 368년 왜왕으로 임명된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는 열도의 왕이 된 것이며 이 때부터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섭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무렵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시작되면서 백제의 북쪽 국경에 전운이 감돌고 귀수왕자는 백제를 비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우진(應神)천황은 말만 야마토의 왕이지 아버지를 대신하여 백제 방어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근초고왕 73세, 귀수왕자 48세, 미야누시 야카히메 31세, 왜기왕 5세였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조의 기록 가운데 눈에 띄는 기록이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 이름은 타쿠소(卓素)와 쿠레하토리 (呉服)의 사이소(西素)의 두 사람을 보내왔다. 또 술(酒)을 빚는 전문가(専門の人), 이름이 니호(仁番) 또 다른 이름은 스스코리 (須須許理)등이 바다 건너 왔다. 이 스스코리(須須許理)가 오호미키(大御酒)를 빚어 헌상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천황은 즐거워 하였다.” 이다.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는 쇠를 잘 다루는 사람이며 쿠레하토리 (呉服)는 의상의 전문가이다. 또 이들은 양조(釀造) 전문가도 필요로 한 모양이다.  

쇠를 다루는 사람은 무기의 제작과 관련이 있겠지만 당시 일본열도는 이상할 정도로 동경(銅鏡)에의 집착을 보인다. 중국의 한경(漢鏡)은 손에 넣기 힘 들고 값이 너무 비싸 열도에서 동경(銅鏡)의 제작을 시도했을 것이다. 서기 383년 제작된 스다 하찌만 신사의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은 여기 등장하는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의상(衣裳)은 상식적으로 체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상이란 역사적으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분을 구분하기 위하여 발전하였다. 백제에서 의상 전문가를 데려 올 필요를 느낀 열도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차별화할 의상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4년 춘 2월 백제의 왕이 하타오리(機織)의 마케쯔(真毛津)를 보내왔다. 현 쿠메노 키누누히 (久目衣縫)의 시조이다. 하타오리(機織)란 방직(紡織) 기술자이다.

동경(銅鏡), 의상(衣裳), 방직(紡織), 양조(釀造)등의 문화적 취향에 관심을 가졌던 권력자로 우리는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얼굴을 떠 올린다.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서기 368년부터 일본열도의 섭정이었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구수왕자는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필요로 하는 기술자들을 지체없이 보내 주었을 것이다.
서기 375년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이 백제의 귀수왕이 된다. 그리하여 이와레(磐余)의 와카사쿠라노미야 (若櫻宮) 에서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媛) 12세의 왜왕(倭王)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섭정으로서 정사(政事) 돌본다. 오우진(應神)천황이 정무를 보던 가시하라(橿原) 아키라노 미야 (輕嶋之明宮), 이와레(磐余) 와카사쿠라노 미야 (若櫻宮), 왜왕(倭王)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거처 옷사카(忍坂)궁이 모두 현재의 사쿠라이 (櫻井)시와 카시하라(橿原)시로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13 2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內宿禰)에게 명하여 태자를 쯔누가 (角鹿, 福井縣 쯔루가 (敦賀)) 케히대신(笥飯大神)에게 참배시켰다. 같은 , 태자가 돌아왔다. 황태후는 연회를 베풀어 태자에게 술을 따라 주며 한다. “ 술은 내가 빚은 아니라 술을 전문으로 빚는 스쿠나 미카미 (少御神) 머나 곳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빚어 보낸 술이니라. 들거라옆에 있던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內宿禰) 태자를 대신하여 술을 빚은 분은 절구(臼)대신 (鼓) 둥둥 치면서 빚었을 겁니다. 술의 풍부한 맛을 보면 압니다. ! 드십시요.” 하고 거들고 나섰다.

위의 기사를 일본에서는 오우진(應神)천황의 성인의례(成人儀禮) 때의 일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우진(應神)천황은 백제의 근구수왕이었으며 왜기왕의 성인식에 축하의 술을 보낸 것이다. “스쿠나 미카미 (須久那御神)” 스쿠나란 귀수왕의 수귀(須貴) 뜻하며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 스미요시(住吉) 같은 의미로 썼다. 우리는 위의 기사가 서기 379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16세가 되어 성인식을 치른 일로 본다. 위의 진구우(神功)황후의 언급은 백제 땅에서 아버지가 너의 성인식을 축하해서 보내주신 술이니 들고 기뻐 하여라라는 의미가 된다. (구자일 설). 이 타케시우찌노 스쿠네의 나이 52, 귀수왕 59, 미야누시 야카히메 42, 왜기왕 16세였다.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밑으로 딸을 낳았는데 ( 가운데 야타노 이라쯔메가 훗날 닌토쿠의 황후가 되었다.) 서기 365 이후 귀수왕자는 주욱 백제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백제 나들이가 빈번하였을 것으로 상정할 있다. 쯔쿠시(筑紫)지역에 전해오는 진구우 황후의 많은 전승은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잦은 백제 나들이의 파편들일 것이다.

서기 384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다. 백제의 귀수왕이 죽고 다음 침류왕이 즉위하였다. 우리는 왜왕이 21세가 되자 백제와 야마토를 부자간에 바꾸었다고 본다. 그와 관련된 역사를 해석한 것이 “56.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 이다. 오우진(應神) 64, 미아누시 야카히메 47, 토무루왕 21세였다.

백제에서 돌아 오우진(應神)천황은 일단 수도를 카시하라(橿原)에서 카와치(河內) 옮긴다. 카시하라(橿原) 가루시마노 아키라노 미야 (輕嶋之明宮) 들어 가지 않고 나니와의 오호스미노미야(大隅宮, 大阪市)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진구우(神功) 65 (서기 385)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 죽었다. 왕자의 아화(阿花) 연소하여 숙부의 진사(辰斯, 재위 385 – 392)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숙부 진사(辰斯) 실제 모습이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이다. 오우진 (應神)천황이 서기 368년 후계자로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지명할 때부터 염려하던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보다 16 – 17 나이많은 형이다.

서기 385 중국대륙은 2 전의 비수대전(淝水大戰))으로 전진(前秦) 부견(符堅) 몰락하고 군웅할거의 혼란속에 빠져든다. 침류왕의 중국파병과 관련된 역사적 자료는 알려진게 없다. 아마 근초고왕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동진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파병은 시급하게 이루어졌던 모양으로 당시 14세였던 동생 아화(阿花, 아신왕) 왕으로 남기고 부랴부랴 대륙에 건너 갔다.

대륙에 건너 간 백제인들은 100년이 지난 백제의 동성왕 시절 본국과 협력하여 대륙에 백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서기 488 화북지역의 패자 북위는 대륙의 백제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자치통감은 백제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화북 지역의 패자(覇者)였던 북위(北魏) 침략을 물리친 전쟁을북위(北魏)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배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西), 진평(晉平) 2 (郡) 차지하고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권력의 진공상태를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탈취하여 진사왕(辰斯王) 되었는데 역사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진사왕(辰斯王) “57.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의 왕자의 에서 이미 다루었다.

진구우(神功) 69 (서기 389) 4 황태후가 와카사쿠라노 미야(稚桜宮)에서 죽었다. 서기 389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사망기사는 역사적 진실로 보인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3 (서기 385) 백제의 진사왕(辰斯王) 즉위했다. 서기 392 카시코키쿠니(貴国) 천황(貴須) 에게 실례(失禮) 범했으므로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 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하노 스쿠네(石川宿禰), 쯔쿠노 스쿠네(木菟宿禰) 파견하여 외교자세를 탓하자 백제의 국인(国人)들이 진사왕(辰斯王)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들은 아화왕(阿花王, 17 아신왕, 재위 392 - 405) 즉위시키고 귀환하였다.

서기 392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은 391) 진사왕이 고구려에 패배하자 야마토의 오우진(應神)천황은 야마토의 장군들을 백제에 보내 아들 진사왕(大山守命) 야마토로 귀환시키고 원래데로 아신왕을 복위시킨다. 그로부터 2 서기 394 오우진 천황도 나이 74세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역사의 주역들의 퇴장과 함께 신비의 4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주) 이 글은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을 참조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 내용을 해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