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일 금요일

70. 발해의 길 일본도(日本道)

발해군왕의 사자(使者), 수령(首領) 고제덕(高斉徳)등 8인이 데와노쿠니(出羽国), 현 아키다현(秋田県)북부에 도착한 것은 서기 727년 9월 21일의 일이다. 이 소식을 접한 쇼우무천황(聖武天皇, 701 - 756)은 사자를 파견하여 의복을 제공하고 정중히 먼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 해 12월 29일 사신을 보내 고제덕등에게 의복, 관과 신발을 내렸다. 발해군이란 옛 고구려국을 말한다. 서기 668년 10월 당장(唐將)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쳐서 멸하고 그후 조공이 끊어졌는데 지금 발해군왕이 요원장군 고인의(高仁義)등 24인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러나 에미시(蝦夷) 경계에서 인의(仁義)이하 16인이 모두 살해되고 수령 제덕(斉徳)등 8인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왔다. 서기 728년 정월 3일 천황은 타이코쿠텐(大極殿)에서 왕신(王臣) 백료(百寮)및 발해사등의 조하를 받았다.(속일본기)

열도 역사상 최초로 외국의 사신이 조하에 참석한 장면이다. 동년 정월 17일 고제덕등이 천황에게 발해국 국서와 방물을 바쳤다. 발해국의 대무예(大武藝)왕이 보낸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武藝啓。山河異域、國土不同。延聽風猷、但増傾仰。伏惟大王天朝受命、日本開基、奕葉重光、本枝百世。武藝忝當列國濫惣諸蕃、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但以天涯路阻、海漢悠悠、音耗未通、吉凶絶問、親仁結援。庶叶前經、通使聘隣、始乎今日。謹遣寧遠將軍郎將高仁義・游將軍果毅都尉將徳周・別將舍那婁等廿四人、賚状、并附貂皮三百張、奉送。土宜雖賤用表獻芹之誠、皮幣非珍、還慚掩口之誚、主理有限、披膳未期。時嗣音徽、永敦隣好。

무예 아뢰옵니다. 산하가 다르고 국토 또한 같지 않사오나 귀국의 소문을 근근히 들으며 오직 우러러 볼 따름입니다. 대왕의 천조, 하늘의 명을 받아 일본의 개국을 열었으니 본가(本家)와 분가(分家)가 다 같이 영원히 번영토록 삼가 엎드려 기원하나이다. 무예는 황공하옵게도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여 많은 번국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를 되 찾아 부여의 습속을 지키고 있읍니다. 그러나 머나 먼 하늘 끝에 있어 길은 멀고 바다는 광활하기 그지없으니 소식을 듣기 힘들고 길흉을 묻는 것도 끊어진 바 되었나이다. 인(仁)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서로 돕기를 약속하며 원하옵건데 전경(前經)의 가르침에 따라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는 일을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삼가 영원장군낭장 고인의(高仁義), 유장군과의도위 장덕주(將徳周), 별장 사나루(舍那婁)등 24인을 보내 국서와 함께 담비가죽 300장을 보냅니다. (후략)

천황은 고제덕등 8인에게 정6위상(正六位上)의 벼슬을 내리고 연회를 열어 아악(雅楽)을 연주하고 활쏘기 대회를 열어 발해 사신들을 극진히 환대하였다.

위의 국서가운데 키워드는 본지백세(本枝百世)라는 단어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지십(文王之什) 문왕편에 본지백세 (本支百世)로 나오는 말이다. 무왕이 주 나라를 세운 뒤 무왕의 아버지 문왕을 우상화시킨 노래이다. 주나라 황실이여 영원하라는 의미로 본지백세가 등장하는데 문왕의 본가는 물론 곁가지들도 영원하라는 뜻이다.

만주대륙에 위치한 발해국의 대무예(大武藝)는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대무예는 서기 727년 발해가 처한 대당 대신라등의 국제 정치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본을 우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전 예고없이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국서에 기록된 본지백세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국서에서 대무예왕은 발해와 일본을 형제의 나라로 보았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계승한다고 선언하면서 일본은 발해의 형제의 나라라고 암시한다. 이 말은 일본황실 또한 부여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인들은 이 표현을 그냥 외교상의 수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금 진지한 사람들은 “69. 부여의 엑소더스”에서 거론되었듯 제 10대 스진천황(崇神天皇)이 부여왕 의라(依羅)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현 천황가는 모두 백제왕실의 후손으로 본다. 그러면 부여 – 백제 – 일본의 계통과 부여 – 고구려 – 발해의 계통으로 나뉘고 발해와 일본이 본지(本枝)의 관계라는 것이 대무예의 견해이다.

서기 2001년 12월 18일 일본의 헤이세이(平成)천황이 황거 이시바시노마(石橋間)에서 기자회견중 “저 자신으로서는 칸무(桓武)천황 (737 – 806)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씌여있으므로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읍니다. 무령왕 (461 – 523)은 일본과 관계가 깊고 그 때 이래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청되게 되었읍니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칸무천황의 생모란 타카노(高野)황후 (? – 790) 로 코오닌(光仁) 천황후이며 이름이 니이가사(新笠), 본성은 야마토우지(和氏), 오토쯔구(乙繼)의 딸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야마토우지(和氏)의 조선(祖先)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純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일본서기는 서기 513년 백제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는 기사를 싣고있다.

서기 2002년 세계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일본천황이 백제와의 인연을 겨우 타카노 니이카사 황후가 백제 순타태자의 후손인데서 찾고 있을 뿐으로 천황의 남계가 바로 무령왕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사실데로 거기까지 말 했다면 일본국민들은 패닉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백제 도래인인 황후의 피 한 방울이 섞인 게 아니라 현 천황가의 조상이 백제 무령왕이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60. 케이타이 천황” 편 참조)

발해국은 현재의 북한, 중국, 러시아의 영토를 망라하므로 발해국의 역사를 둘러싸고 관련국이 많으며 또 그들의 입장이 다르다. 발해국을 건국한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 발해국민의 주류가 고구려인지 말갈인지를 두고 나라마다 자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말한다. 중국의 변방에 위치하고 당으로 부터 발해군왕의 책봉을 받은 대조영의 발해는 당연히 중국의 일부이며 발해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와 신당서도 발해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애매한 기술을 남겼다. 구당서는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며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풍속은 고구려 걸안과 같다 (風俗與高麗及 契丹同) 고 하여 고구려에서 갈려나온 종족으로 치고 있다. 구당서보다 후대에 씌여진 신당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 (粟末靺鞨)이나, 고구려에 붙었고 성은 대씨(大氏)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라 하여 고구려와의 종족적 관계를 애매하게 하고 있다.

한국과 북한은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이며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는 당연히 한(韓)민족의 나라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와 일본은 중국과 한국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중국사서에 기록된 것을 제외하고 발해인 또는 고려인의 기록으로 남은 발해의 역사기록은 전무하다. 따라서 발해에 대하여 알려진 역사는 극히 단편적이다.

발해는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현 중국의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리룽쟝(黒龍江)의 삼성(三省), 북한, 러시아의 연해주에 걸쳐 영토를 갖고 있던 나라로 5경(五京), 15부(十五府), 62주(六二州)의 지방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구국(旧国)은 지린성 돈화현(吉林省 敦化県)의 육정산 (六頂山), 영승유적(永勝遺跡), 성산자산성일대 (城山子山城一帯)이며, 문왕(文王)대에 천도한 중경현덕부 (中京顕徳府)는 현재의 지린성허룽현 (吉林省和龍県) 서고성자(西古城子)로 추정된다. 또 상경용천부 (上京龍泉府)는 헤이룽쟝성 영안현 (黒龍江省寧安県) 동경성진(東京城鎮)에 위치한 유적, 그리고 동경용원부 (東京龍原府)는 지린성 훈춘현 (吉林省琿春県) 팔련성(八連城)의 유적, 서경압록부 (西京鴨緑府) 는 지린성 통화(通化)부근의 임강(臨江), 남경남해부 (南京南海府) 는 함경북도 북청(北青)이 유력시 된다.

발해가 수도를 옮긴 순서는 동모산(東牟山), 중경현덕부, 상경용천부, 동경용원부, 상경용천부의 순이다.

당서에는 “용원의 동남에 바다에 면하여 일본도(日本道)가 있다”라고 씌여있다. 용원이란 동경용원부 (東京龍原府)를 말하며 현 지린성 훈춘시 (吉林省琿春市)로 밝혀졌다. 훈춘시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엔벤조선족 자치주 동단에 위치한 현급시(県級市)로 인구의 40% 이상이 조선족이다. 남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나선특급시(羅先特級市)가 있으며, 동은 러시아의 연해지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동해바다까지 15키로미터 떨어진 곳이며 러시아의 포시에트(Posyet)항과 화물철도로 연결된다.

훈춘에 팔련성(八連城)의 유적이 남아있고 이곳이 동경용원부이다. 이곳에서 장령자(長嶺子)라는 산을 넘으면 러시아 영토이며 크라스키노(Kraskino)란 국경마을이 되고 이곳의 항구 이름이 포시에트 항(Port of Posyet)이다. 해안에 가까운 곳에 평성(平城)의 거대한 유적이 있는데 이를 크라스키노 토성(土城)이라 부른다. 이 유적은 블라지보스토크 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가 서기 1998년부터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해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반영하여 한국과 북한, 일본의 학자들도 발굴조사에 참여하였다. 발굴조사후 이 유적이 발해의 항만이었을 가능성이 커졌고 이곳에서 출발한 선박이 동해를 횡단하여 일본열도의 서해안에 닿았다고 생각된다. 발해국은 처음 사자를 보낸 서기 727년부터 서기 919년 까지 34회에 걸쳐 이 길을 통하여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발해의 선박이 일본에 올 때 항상 같은 곳에 도착하지 못 하고, 북으로 혹카이도, 서(西)로는 야마쿠치 현에서 쯔시마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에 걸쳐 제 멋데로 들어왔다. 이는 당시의 항해가 주로 자연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노도(能登)에 발해선이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노도반도(能登半島)가 100 킬로미터 정도 동해(=일본해)로 돌출된 관계로 발해선이 표류중 육지에 걸린 것으로 생각된다. 표류하면서 이곳에 걸리지 못하면 아키다현이나 혹카이도까지 밀려 갈 수 밖에 없다. 서기 727년 처음 온 발해선이 아키다현에 닿아 고인의 (高仁義)등 16명이 에미시에게 살해되었다.

8세기와 9세기에 발해선의 일본 도착지가 확연히 구분되는데 8세기 중에는 모든 발해선이 이시카와현 (石川縣) 카나자와(金澤) 이북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9세기 이후 모든 발해선박이 서일본 쪽에 입항하였다. 이는 인위적으로도 선박의 도착지를 콘트롤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100 프로 자연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일본 후쿠이현의 자료에 의하면 발해사는 주로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일본에 도착했으나 약간의 예외를 빼고 일본도착 시기를 크게 나누면 서기 814년을 경계로 전반은 음력 10월 중순에서 11월 중순, 후반은 12월 중순에서 3월 상순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포시에트를 출항하여 어떤 항로를 따라 일본에 왔고 또 어떤 항로를 따라 모항으로 귀항하였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적국이었으므로 신라의 연안을 따라 동해를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발해사의 항로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나 오호쯔크 해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남하하는 리만한류와 쯔시마에서 일본열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쯔시마난류 그리고 겨울철의 북서 계절풍이 발해선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조건일 것이다.

그러면 발해에서 일본에 올 때 신라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리만한류를 타고 동해를 남하하고 일본에서 돌아 갈 때는 일본열도를 따라 북상하여 사하린을 거친뒤 대륙으로 방향을 바꿔 리만해류를 따라 블라지보스토크 경유 포시에트로 돌아간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일본의 학계는 대체로 이 설을 받아들인다. 포시에트는 겨울에 항구가 얼어 함경남도 신창항(新昌港)을 대체항으로 이용한 경우가 있었다.

서기 776년 겨울 발해국사 사도몽(史都蒙)등 187명은 코오닌천황(光仁天皇) 즉위의 축하및 발해국왕(文王欽茂)의 왕비의 상(喪)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발해의 남해부 토호포(南海府吐号浦)를 출항하였다. 남해부는 발해의 오경의 하나인 남경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北靑郡 荷湖里)로 확인되었다. 서기 773년 일본정부는 발해사도 큐우슈우의 다자이후(大宰府)에 내항(来航)하도록 의무화시켰으므로 이번 발해사는 쯔시마의 다케무로노즈 (竹室之津)를 목표로 항해하였으나 도중의 악천후로 항로를 잃고 에찌젠국(越前国)의 연안에 이르러 착안(着岸)하려 하였으나 돛대가 부러져 표류하여 12월 22일 가가군(加賀郡)에 표착하였다. 이 조난에 의하여 생존자 46명은 가가군에 거치되어 보호를 받았다. 해가 바뀌어 서기 777년 2월 20일 대사 사도몽등 30명의 입경이 허락되었으나 사도몽의 요구에 의하여 46명 전원의 입경으로 변경되었다. 이 때 141명의 발해인이 해난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익사하여 표착한 발해사인 30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에찌젠국에 매장하였다고 하나 그 위치가 어딘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위의 기록에 의해 발해사의 출발지가 남경남해부 토호포임을 알게 되었으며 토호포는 현 함경남도 신창항(新昌港) 으로 밝혀졌다.

서기 841년 내항한 발해사의 구성인원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행은 총 105명으로 사두(使頭) 1명, 부사 1명, 판관 2명, 녹사(録事) 3명, 역어 2명, 사생(史生) 2명, 천문생(天文生) 1명, 대수령(大首領) 65명, 초공(梢工) 28명으로 구성되었다. 발해사의 초기에는 23 - 24명의 소규모였으나 나중 300명을 넘는 일행이 내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코우닌(弘仁) 연간(서기 810 – 824)에 들어와 100명에서 105명으로 정착되었다. 천문생 1명은 천문의 지식을 가지고 항로을 파악하고 기상예측을 담당한 직책이었고 대수령이란 교역을 목적으로 온 말갈 제 부족의 수장으로 자기 부족의 생산품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사람이다. 초공이란 순수한 선원이다.

서기 2009년 12월 18일 조선일보에 유석재의 신역사속의 Why라는 역사 칼럼으로 “당나라 벌벌 떨게 한 발해수군 장문휴”라는 여기 꼭 필요한 기사가 있었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서기 732년 9월 당(唐)나라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은 갑작스런 급보에 혼비백산했다. 산동(山東) 반도 북단 현 봉래(蓬萊)시에 치소가 있던 등주는 지금의 연대(煙臺)와 위해(威海)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해상 교통과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등주를 급습한 병력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발해의 장군 장문휴(張文休)가 이끄는 해군은 순식간에 상륙하여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자사 위준을 죽였다.

武藝遣其將張文休率海賊攻登州刺史韋俊。詔遣門藝往幽州徴兵以討之,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屬山阻塞凍,雪深丈餘,兵士死者過半,竟無功而還。武藝懷怨不已,密遣使至東都,假刺客刺門藝於天津橋南,門藝格之,不死。詔河南府捕獲其賊,盡殺之 (구당서 관련기록)

북한 학계에선 장문휴가 인근 내주(萊州)까지 산동반도 전역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에서 이 소식을 들은 황제 현종(玄宗)은 기겁했다. 황제는 좌령장군 개복순(蓋福順)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발해군을 치도록 했다. 이것은 이미 산동 일대의 당나라 주둔군이 장문휴 군대에 의해 거의 궤멸된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등주에 도착한 개복순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문휴 군대가 이미 모두 철수해 버렸던 것이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기동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육지 쪽에서 또다시 급보가 전해졌다. 발해군이 요하를 건너 만리장성 아래까지 진격한 것이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수륙(水陸) 양 방면의 전격전이었다. "대문예(大門藝)를 내놓아라!" 발해와 당이 전쟁을 벌이게 된 경위는 발해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죽고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 으로 즉위한 7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왕은 인안(仁安)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옛 고구려 영역 수복에도 힘썼다. 이를 곱게 볼 리 없던 당은 북쪽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자칫 협공당할 수 있는 형국에서 무왕은 726년 동생 대문예를 장군으로 삼아 흑수말갈 정복전을 벌였다. 그러나 친당파였던 대문예는 도중에 군사를 버리고 당나라로 망명했다. 현종은 대문예에게 벼슬을 내리고 보호했는데 무왕은 거듭 사신을 보내 대문예 송환을 요청했다. 서기 727년 일본에 보낸 최초의 발해사는 이런 국제정세하에서 일본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려는 포석이었다.

732년 7 월 현종은 발해에 칙서를 보냈다. 도망자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형제애에 흠이 갈까 우려하는 것이라고 변명한 뒤 은근한 협박까지 했다. 이 칙서를 쓴 공으로 승진한 사람이 저 유명한 시인 장구령(張九齡)이었다.

무왕은 당과의 전면전을 택했다. 칙서 두 달 만에 등주를 공격한 것은 이미 훨씬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장문휴의 해군은 압록강 - 요동반도 남단 -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거쳐 등주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당이 미처 손을 써볼 틈이 없이 초토화됐던 전격전이었다.

거의 동시에 무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당의 영토로 진격해 요서(遼西)의 마도산(馬都山·지금의 승덕 부근)에까지 이르렀다. 신당서가 400리에 걸쳐 큰 돌을 쌓아 방어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군세였다.

당은 유주(幽州·지금의 하북성) 일대에서 군대를 징발했는데 그 해 세금을 감면해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위기를 느낀 당은 신라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733 년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金允中) 등이 신라군을 이끌고 발해로 진군했지만 때마침 폭설이 내려 군사의 반을 잃고 돌아섰다. 이제 발해는 당과 신라 모두에 새로운 강국(强國)으로 떠올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서기 733) 가을 7월에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쳐들어 갔으므로, 당나라 현종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왕에게 관작을 더해 주어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한 길 남짓 되었으므로 산길이 막히고 군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 없이 돌아왔다.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遣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南鄙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功而還

서기 1998년은 발해건국 1300년이 되는 해로 일본에서는 발해국 교류연구센터가 설립되고 토오쿄오에서 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9월, 한국에서 9월, 북한에서 10월 심포지움이 열렸다. 이러한 각국의 발해에 대한 관심에 앞 서 서기 1997년 12월 31일 오후 2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한 뗏목 탐사선이 있었다.

탐사대장 장철수(1960 – 1998), 선장 이덕영(1949년생), 사진담당 이용호(1963년생), 통신담당 임현규(1971년생) 의 4명이 승선한 이 뗏목 탐사선은 발해1300호로 명명되었고 1300년전 발해인들의 항해를 재현하고자 제주도 성산포를 목표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하였다. 탐사대의 발해항로 학술대탐사 항해계획서와 항해일기를 “balhae1300ho.org” 홈페이지에서 발췌한다. 이 홈페이지는 고인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뜻을 이어 발해 1300호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1. 발해 그 감동의 역사를 찾아서 (도입부 생략)

1998년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발해가 건국된지 1300 년이 되었다. 우리는 그 역사를 밝혀야 할 엄숙한 싯점에 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바다를 통하여 국가경영을 이룩한 해양국가의 모습이었다.

학문연구에 있어 지나친 확대해석이나 추측을 배제하고 사실과 근거에 입각하여 연구하여야 한다면, 육지에는 유적이나 고고학적 유물을 통하여 그 자료들을 구할 수도 있지만, 바다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단지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화를 통하여 어느 곳으로 이동했을 거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우리가 하려는 발해의 뱃길항로탐사는 발해인들이 어떤 항로를 따라 일본열도에 왕래하며 해상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밝혀 발해사를 복원하는데 조그만 기여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의 현실은 우리의 탐사시도의 장애 요인이었고 불필요한 오해를 받는 수도 있었다. (이하 생략)

2. 발해 항로 학술탐사개요 (생략)

2-1. 가상의 이동경로 (생략)
2-2. 선박의 구조 (생략)
2-3. 항해거리와 항해속력

가. 항해거리 : 러시아 크라스키노 – 제주도 성산포간 672 해리 (1245 킬로미터)
나. 항속 : 북서풍의 속도 감안 3 - 7노트 (평균 3.5노트) 로 추정
다. 항해기간
- 1일 3.5노트 ×24 = 84해리
- 672해리 ÷84해리 = 8일
- 편차 3 ∼ 7일

2-4. 항해방법과 항해장비: 돛 2개, 노 4개, 키(예비) 1개, 물돛 1개

2-7. 뗏목의 제원

가. 길이 11 x 폭 5 미터
나. 돛대 10 미터와 8 미터 길이로 2개 설치
다. 돛폭 1) 5 ×4 ×7 M (예비1개), 2) 5 ×4 ×6 M (예비1개)
라. 노

3. 항해개요

3-1. 대상지: 러시아 크라스키노 - 울릉도 중간 기착 - 제주도 성산포 (총 672해리)

다음은 장철수 대장의 항해일기와 육상 지원팀의 지원기록을 짜집기 하여 순차적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서기 1998년 1월 8일(9일째) 탐사팀은 제주 성산포로 가려던 처음 계획을 이날 부산으로 변경한다. 중간 기착지인 독도 울릉도는 예정대로 들르기로 하였다. 자연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가혹하여 뗏목의 돛과 키의 손상이 심하고 해수의 범람때문에 생리를 처리하는데 곤욕을 치른다. 바닷물의 비말이 얼음이 되어 뗏목은 온통 얼음으로 덮인다. 1월 11일 (12일째) 38 선을 지나다. 1월 12 일 (13일째) 울릉도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1월 13 일 대원들이 지쳐있다. 나의 지도력도 이제 힘을 잃어 가는 것 같다. 22 시 동쪽해류가 강해진다.

뗏목이 울릉도 근처에 도착한 것은 14일 오후 2시쯤. 이 곳의 한 해군기지 레이더에 몇 분동안 뗏목이 포착됐다. 이에 앞서 12시쯤 탐사팀은 울릉도 지원팀과 교신을 통해 저동항에 입항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교신하는 그 시간에 동해 전 해상에 또 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려졌다. 해경경비정도 출항하지 못 할 만큼 기상상태가 나빴다. 뗏목도 끝내 접안에 실패했다.

1월 16 일 (17일째) 이 날 폭풍주의보가 해제됐다. 뗏목은 육지쪽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경에 문의한 결과 그대로 순항하면 17 – 18일께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답변을 들었다. 이에 맞춰 부산의 지원팀과 해양대에서는 인양선을 준비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뗏목은 무풍지대에서 맴돌았다. 18 일 낮까지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1월 17 일 (18일째) 빵이 상했다. 소시지도 상했다. 여전히 무풍지대다. 1월 18 일 새벽 2시 지원팀이 해경경비정을 동원하여 경북 후포앞 41마일 지점에서 식량과 편지를 전하고 돌아갔다. 이날 밤 8시 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리고 만 하루가 지나서 해제되었다. 그러나 쯔시마해류의 영향을 받은 뗏목은 동쪽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1월 19 일 (20일째)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 지고 뗏목은 걷잡을 수 없이 동쪽으로 밀린다. 이제는 한국방송이 아닌 일본 방송만 들린다. 뗏목은 계속 동쪽으로 밀려 독도주변을 지나게 된다. 탐사대는 1월 20일 부터 부산입항을 포기하고 독도접안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21일 아침 울릉도 독도 해상에 다시 폭풍주의보가 발효되어 이 시도마져 무산되었다.

1월 20 일 (21일째) 바다는 참 마음데로 안 된다. 일본의 오키(隱岐)섬 쪽으로 동쪽으로 밀려간다. 1 월 21 일 좌표는 점점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다. 1월 22 일 오전 8시 햇빛이 너무 좋다. 육지의 실루엣이 보인다. 22시 20 분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바람도 해류도 따라 주지 않는다.

1월 23 일 오전 7시 장비고장과 소모가 많다. 눈 앞에 등대가 보이고 항로는 오키(隱岐)섬으로 들어서고 있다. 10 시 뗏목이 종횡무진이다. 16 시 바다가 거칠어지고 있다. 배가 섬으로 밀려가고 있다. 우선 섬으로 피신을 했으면 한다. 16 시 16분 도와달라. 도고(島後)섬 8 km 전방이다. 이대로 가면 섬에 충돌할 것 같다. 20 시 08분 도고섬과의 거리가 2 km 남았다. 20 시56분 일본순시선이 왔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한국해경으로 부터 뗏목구조를 요청하는 팩스를 받은 것은 오후 6시 30분, 해안보안청은 즉시 뗏목 위치 파악에 나서 오키섬 앞 5마일 지점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높은 파도로 사고를 염려한 해상보안청은 일본 도고(島後)섬의 사이고(西鄕)로 예인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해상보안청의 브리핑에 의하면 밤 8시 30분쯤 순시선은 통신교신이 가능할 만큼 뗏목 가까히 접근했다. 순시선의 레이더에 잡힌 뗏목은 점점 섬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시선 사령탑은 대원들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닻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당시 뗏목과 섬과의 거리는 1백50여 미터에 불과했다. 구조에 나선 일본 순시선이 뗏목의 불빛을 발견한 시각은 밤 9시쯤, 순시선에서는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파도속에 묻혀 요동치는 뗏목의 위치는 좀체 확인되지 않았다. 해상보안청에서는 해상자위대에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헬기는 24일 새벽 1시쯤 현지에 도착했다.

1월 24 일 (25일째) 출동한 헬기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현장을 수색했지만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위치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첫번째 두번째 헬기는 연료부족으로 회항하고 말았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시선 레이더에는 뗏목이 포착됐고 쌍안경으로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때 뗏목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부터 헬기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아침 6시쯤 도고(島後)섬 서북쪽 후쿠우라(福浦)항 남쪽 반도 해변에 좌초해 있는 뗏목을 발견했다. 육지에서 1백 미터 떨어진 바다 위에는 2명의 대원이 엎드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또 한명은 뗏목에 몸을 묶은 채 파도를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헬기에서 내려간 다이버는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2명 가운데 이용호 대원을 먼저 구조했지만 숨져 있었다. 그 사이에 또 한명은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육지로 부터 불과 수십미터 거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바로 임현규 대원이었다. 뗏목에 묶여있던 사람은 이덕영 선장, 그러나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흔들리는 뗏목에는 돛대에 묶인 그의 발목만 남아 있었다. 발해항로 재현의 꿈은 이렇게 파도속에 묻히고 말았다.

서기 776년 12월 22일 발해사 187명 가운데 141명이 조난 당해 사망한 바다에서 서기 1998년 1월 24일 4명의 발해탐사대원이 희생되었다. 추진력이 없는 뗏목에 타고 있던 4명의 탐사대원은 겨울의 밤 바다의 험한 파도와 해류 그리고 바닷가의 암초에 노출되어 구조를 기다렸다. 그러나 20세기의 무선통신, 인터넷, 육상자위대 헤리콥터,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가지고도 그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 한 겨울의 추위와 칠흑같은 밤, 거친 바람과 파도 그리고 쯔시마해류는 오늘도 거기에 있다. 옛 발해인들은 그 추위와 파도 그리고 해류를 넘어 일본도를 왕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