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4일 금요일

65. 한인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

한일 고대사는 4세기 초에서 7세기 말까지의 약 400여년 동안 세 차례의 격변기를 겪었다. 격변기에는 백제와의 교류가 더욱 심화되므로 이를 감추기 위하여 작위적으로 역사가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첫째 4 세기 초 만주대륙 부여(扶餘)출신의 스진천황(崇神天皇, Emperor Sujin))을 타도하고 백제세력이 열도를 장악해 간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열도의 倭建命과 應神天皇) 의 시대, 징구황후(神功皇后) 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역사를 신화로 만들었다. 둘째 5 세기 고구려의 열도정복과 백제의 재탈환 부분도 그러하다. 인교천황(允恭天皇), 곤지(昆支, 淸寧천황) 의 등장과 왜무왕(倭武王 = 백제 무령왕) 치세를 포함한다. 셋째 7세기 모국 백제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백제의 뱃속에 들어 있던 일본열도가 스스로의 운명을 열어가는 코우교쿠(皇極), 코우토쿠(孝德),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 시대의 기록 또한 애매모호하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시작된 정변은 킨키(近畿)의 천황가(天皇家)를 탈취하고 백제의 계획과 의지를 벗어나 일본열도는 자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백제 본국의 국력은 한성백제 이후 정체상태에 빠져 있었던 반면 일본열도는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여 7세기 중순경에는 인구나 경제력에서 모국과 엇비슷한 상황이 되었다고 본다. 백제가 멸망한 서기 660년 백제는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호(萬戶)가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한편 이 무렵 일본열도의 인구는 약 500만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38.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참조). 끊임없는 전란과 원칙없는 이민정책으로 백제는 점차 일본열도를 관리할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이 부임하고 1년이 지난 서기 642년 구주백제에서 괴이한 변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은 의미의 단락이 심하여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해하는데 많은 상상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일본서기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월 29일 백제에 갔던 사인(使人) 다이닌(大仁)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히라후 (阿曇山背連 比羅夫) 가 역마를 타고 달려 와 “백제국은 천황이 죽었다고 듣고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쯔쿠지(筑紫)까지 우리와 함께 왔는데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혼자 오는 길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금 혼란속에 빠져 있다.”

百済使人大仁阿曇連比羅夫。従筑紫国乗騨馬来言。百済国聞天皇崩、奉遣弔使。臣随弔使。共到筑紫。而臣望仕於葬。故先独来也。然其国者今大乱矣。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일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히라후 (阿曇山背連比羅夫), 쿠사카베노 키시 이와카네 (草壁吉士磐金), 야마토노 아야노 후미노 아타히 아가타 (倭漢書直県)를 백제의 조사(弔使)에게 보내, 그 나라의 근황을 물었다. 조사(弔使)는 “백제국왕은 나에게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 귀국하는 사신에 딸려 귀국시켜 달라고 하거든 천황은 허락하지 말라』고 말했다” 고 한다. 백제의 조사(弔使)의 종자( 従者)들은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 (大佐平 智積)이 죽었다. 또 백제의 사인이 곤륜(昆倫)의 사자를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금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누이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들 40여명이 섬에 버려졌다.』고 한다.

二月,丁亥朔戊子,遣阿曇山背連-比羅夫、草壁吉士-磐金、倭漢書直-縣,遣百濟弔使所 問彼消息 弔使報言 「百濟國主謂臣言 『塞上恒作惡之 請付還使 天朝不許』」 百濟弔使傔人等言 「去年十一月, 大佐平智積卒 又百濟使人擲崑倫使於海裏 今年正月 國主母薨 又弟王子兒翹岐及其母妹女子四人 內佐平岐味 有高名之人四十余 被放於島」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1일 대신들을 나나와(難波)에 보내 고구려 사신이 가져 온 공물을 검사했다. 고구려에서는 작년 6월 제왕자(弟王子)가 죽고, 9월 대신(大臣) 연개소문(伊梨柯須彌)이 대왕을 죽이고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등 180여명을 살해한 뒤 왕의 동생을 왕으로, 동성(同姓)의 도스류김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았다 한다.

壬辰 高麗使人泊難波津 丁未 遣諸大夫於郡,檢高麗國所貢金銀等並其獻物 使人貢獻既訖 而諮云 「去年六月 弟王子薨 秋九月 大臣-伊梨柯須彌殺大王 并殺伊梨渠世斯等百八十余人 仍以弟王子兒為王 以同姓都須流金流為大臣」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4일 천황은 교기(翹岐)를 불러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4월 8일 태사 교기 (太使翹岐)가 수행원들을 데리고 천황을 알현하였다 (太使翹岐将其従者拝朝).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4월 10일 소가노 오호오미(蘇我大臣)가 우네비(畝傍)에 있는 자택으로 백제의 교기등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좋은 말 한필과 20정의 쇠붙이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蘇我大臣 於畝傍家 喚百済翹岐等 親対語話 仍賜良馬一疋 鉄二十[金+廷]唯不喚塞上)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5일 교기일행을 불러 카와치국에 있는 요사미의 미야케앞에서 말을 달리며 하는 활쏘기를 관람시켰다. (於河内国依網屯倉前 召翹岐等 令観射猟)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翹岐従者一人死去).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翹岐児死去).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4일 교기와 그의 처가 쿠다라의 오오이(大井)에 있는 집으로 옮기고 사람을 시켜 이시카와에 그의 아이를 매장하였다. (翹岐将其妻子 移於百済大井家 乃遣人葬児於石川).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7월 22일 조정에서 백제의 사인 대좌평 지적(智積)등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어떤 책에는 “백제사인이란 대좌평 지적 및 그 아들 달솔 (이름은 모름) 그리고 은솔 군선(軍善)”이라 한다. 교기앞에서 스모를 공연하였다. 향연이 끝나고 지적등이 교기를 배웅하였다. ( 饗百済使人 大佐平智積等 於朝 或本云 百済使人 大佐平智積 及児達率 闕名 恩率軍善乃命健児相撲於翹岐前 智積等宴畢 而退 拝翹岐門).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8월 13일 백제의 인질 달솔 장복(長福)에게 소덕(小徳)의 벼슬을 내리고 중객이하 (中客以下)에게 위일급(位一級)을 내리고 직책에 따라 상을 내렸다. (以小徳授百済質 達率長福 中客以下 授位一級 賜物各有差).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4월 21일 백제국주의 아들 교기 제왕자가 사자들과 함께 왔다고 쯔쿠지에서 급보가 있었다. (筑紫大宰 馳驛奏曰 百濟國主兒-翹岐弟王子 共調使來).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7월 3일 나나와에 와 있는 백제의 조공이 평소에 미치지 못 하였다. 이유를 따져 묻자 대사 달솔 자사(自斯), 부사 은솔 군선(軍善)이 곧 바로 시정하겠다고 하였다. 자사(自斯)는 인질 달솔 무자(武子)의 아들이다.

秋七月 已酉朔辛亥 遣數大夫 於難波郡 檢百濟國調與獻物 於是 大夫問調使曰 「所進國調 欠少前例 送大臣物 不改去年所還之色 送群卿物 亦不全將來 背違前例 其狀何也?」大使-達率自斯 副使-恩率軍善 俱答諮曰「即今可備.」自斯 質-達率武子之子.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1일 키비노 시마 황조모가 죽었다 (吉備嶋皇祖母命薨).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7일 하지노 사바노 무라지 이테 (土師娑婆連猪手)에게 황조모의 장의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황조모의 병 수발을 드느라 천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조모의 곁을 지켰다. (詔土師娑婆連猪手視皇祖母命喪 天皇自皇祖母命臥病 及至発喪 不避床側 視養無倦).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9일 황조모를 마유미노 오카 (檀弓岡)에 장사지냈다 (葬皇祖母命于檀弓岡).

이상의 퍼즐 게임같은 기사가 나열되고 나서 서기 645년 6월 12일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지축을 흔드는 을사의 변(乙巳의 變)이 일어나므로 위의 기사의 정합성을 살려 역사를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서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예언적 성격일까? 이 무렵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서기 642년 10월 영류왕(榮留王)과 대당(對唐) 온건파 신하들을 참살하고 영류왕의 동생인 고대양(高大陽)의 아들 보장(寶藏)을 옹립하고 대막리지가 되었다. 앞에 나온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1일의 기사는 이를 말한다.

퍼즐게임과 같은 일본서기 기사를 정합성을 살려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으나 시비를 가릴 방법이 없다. 우리는 앞에서 백제본국, 구주백제 및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세개의 권력이 존재하였음을 말 하였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九州百濟)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두 백제본국의 사건으로 기술하므로 혼란이 가중된다. 백제본국, 구주백제 및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세개의 주체를 전제로, 위의 기록 상호간에 모순되는 사건들을 정합성 위주로 정리하자.

서기 642년 1월 백제국왕모가 사망하였다. 백제국왕모란 구주백제의 국왕모를 뜻하며 병상에서부터 천황이 극진히 간호하였다. 국왕모(國王母)는 기비노 시마 황조모 (吉備嶋皇祖母命)이며 사이메이(齊明)의 모후(母后) 기비히메왕(吉備姬王)을 말한다. 기비히메왕(吉備姬王)은 사이메이(齊明)과 카루황자(輕皇子)(을사의 변 이후의 코오토쿠(孝德)천황)의 어머니이며 서기 642년 큐우슈우에서 사망하였을 것이다. 킨키 천황가 (近畿天皇家)와 다른 큐우슈우(九州) 왕조가 있었고 죠메이(敍明)천황이 킨키(近畿)로 나간 서기 629년부터 사이메이(齊明)가 큐우슈우왕(九州王)이었다. 킨키(近畿)에서는 큐우슈우(九州)왕조를 백제본국과 구별하지 않고 쿠다라(百濟)라 부르기도 하였고 큐우슈우 사람을 카라히토(韓人)라 불렀다. 큐우슈우는 백제본국과의 교류가 많아 야마토(大和)보다는 백제본국에 가까운 아이덴티티를 가진 나라였다.

서기 641년 11월 백제의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죽었다고 사자가 말했다고 하나 실제 그는 죽지 않았고 소문만 났던 모양이다. 서기 642년 7 월 22일 지적을 위하여 야마토의 코우교쿠(皇極) 천황이 연회를 베풀고 있다.

1948년 부여읍에서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 가 발견되었다. 여기 나오는 대좌평 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654년 세운 석비로 “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게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옥을 파 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그 높고 자애스런 모습은 신령으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라는 내용이 해독 가능하다 .

서기 2009년 1월 20일 익산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봉안기가 해독되었다. 서기 639년 백제 무왕의 황후,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 돈을 내어 가람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은 무왕 시절 요직에 있었고, 의자왕이 부임한 뒤 관직을 물러났으나 , 야망을 품은 지식인일 것이다. 지적(智積)과 무왕의 황후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만 양쪽 다 사택(沙宅)씨라는 것은 확실하다.

서기 642년 백제에서 조문객들이 와 있는 가운데 사이메이(齊明)의 동생 카루황자(輕皇子)가 쿠데타를 일으켜 큐우슈우왕(九州王)이 되어 교기와 사이메이(齊明), 하시히토황녀(間人皇女)를 위시한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그리고 고명한 인사들 40여인을 시마나가시(嶋流)시켜 쫒아낸다.

서기 642년 2월 24일 천황은 교기를 불러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阿曇山背連)의 집에 살게 해 주었다. 4월 8일 교기가 종자를 데리고 천황을 배알하였다. 4월 10일 소가노 에미시 (蘇我蝦夷)는 우네비(畝傍)에 있는 집으로 교기를 초대하여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5월 5일 교기등을 불러 기사(騎射)를 구경시켰다.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5월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5월 24일 교기는 처자를 데리고 쿠다라(百濟, 奈良의 地名)의 오호이(大井)의 집으로 옮겼다. 7월 22일 대좌평 지적등에게 조정에서 향연을 베풀었다. 교기앞에서 스모(相撲)를 하도록 하였다. 지적등은 연회가 끝나고 가는 길에 교기의 집까지 배웅하고 문전에서 예배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교기가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취급되며 야마토의 조정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호칭이 꽤 복잡하여 제왕자의 아들 교기 (弟王子兒翹岐), 태사 교기 (太使翹岐), 백제의 교기 (百済翹岐), 백제국주의 아들 교기제왕자 (百濟國主兒-翹岐弟王子)등으로 아이덴티티가 다양하게 표현된다. 우리는 이 사람을 사이메이(齊明)가 왜왕 다리시북고 (倭王 多利思北孤)에게 시집 올 때 데려 온 아들, 아야황자(漢皇子)로 보며, 그는 나카노 오호에황자 (中大兄皇子)란 이름으로 을사의 변을 일으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7월 22일 야마토의 조정에서 향연을 베풀어 대접한 대좌평 지적등은 구주왕이 된 카루황자(輕皇子, 을사의 변 이후의 코우토쿠(孝德)천황)의 사인(使人)이며 카루황자(輕皇子)와 교기(翹岐)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결국 을사의 변은 큐우슈우왕 카루황자(輕皇子)와 야마토에 몸을 의탁한 Boat People인 교기(翹岐)사이를 조정하면서 지적(智積)이 구상한 정변이었을 것이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 645) 6월 8일 나카노오호에(中大兄)가 쿠라야마다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와 은밀하게 합의한다.“삼한(三韓)에서 조공을 바치는 날, 당신이 상표문을 낭독하게 될 것이다. 낭독이 끝나는 시점에 이루카(入鹿)를 살해하겠다.”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란 이름이 일본서기에 처음 나오는데 앞서 기술된 인물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언급하지 않아, 후대 사람들은 제 각각 추측할 뿐이다. 우리는 교기(翹岐)와 나카노 오호에(中大兄)가 같은 사람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6월 12일 코우교쿠(皇極) 천황은 대극전(大極殿)에 좌정하고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가 곁에 시립하였다.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는 소가노 이루카노 오미 (蘇我入鹿臣)가 의심많은 성격이라 밤이고 낮이고 검을 차고 있는 것을 알고 무장해제 한 다음에 입실시켰다. 쿠라야마타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가 앞으로 나가 삼한(三韓)의 상표문(上表文)을 읽어 나가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는 12개의 출입문을 폐쇄토록 한다. 그런 연후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 자신이 장창을 들고 어전곁에 숨는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노 무라지 (中臣鎌子連) 등은 활과 화살을 들고 그를 엄호할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한다. 아마노 이누카이노 무라지 카쯔마로 (海犬養連勝麻呂)가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 (佐伯連子麻呂)와 카쯔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아미다 (葛城稚犬養連網田) 에게 검을 나누어 주고 행동개시를 명한다. 코마로(子麻呂)등은 밥을 물에 말아 먹다가 공포에 질린 나머지 먹었던 것을 토하자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가 이들을 진정시킨다.

쿠라야마타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 는 낭독이 거의 끝나 가는데 코마로(子麻呂)등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땀을 뻘뻘 흘리며, 목소리는 떨리고 양손이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쿠라쯔쿠리노 오미(鞍作臣)가 괴이하게 여겨 “왜 그렇게 떨고 있느냐?” 물었다. 야마타노 마로 (山田麻呂)는 “천황을 가까이 뵈오니 나도 모르게 그만…”라고 얼버무렸다. 코마로(子麻呂)등이 이루카(入鹿)의 위세에 눌려 무서워 하는 것을 보고 당장 헤치우라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이 일갈한다. 그 때서야 코마로(子麻呂)등이 함께 뛰어나가 이루카(入鹿)의 머리와 어깨를 가격한다. 이루카(入鹿)가 놀라 일어서려 하자 코마로(子麻呂)가 검을 휘둘러 이루카(入鹿)의 다리를 절단한다. 이루카(入鹿) 가 넘어져 천황쪽으로 기어가며 고개를 숙이고 “황실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 황위를 이어야 됩니다. 저는 죄가 없읍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천황이 대경실색하여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에게 고함친다.“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이 바닥에 엎드려 아뢴다.“쿠라쯔쿠리(鞍作)는 황실을 빼앗고자 하였읍니다. 천손(天孫)의 자리를 감히 쿠라쯔쿠리(鞍作)가 넘보게 해서 되겠읍니까?”. 소가노오미 이루카 (蘇我臣入鹿) 의 이름이 쿠라쯔쿠리 (鞍作)이다. 천황이 일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 (佐伯連子麻呂)와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이미타 (稚犬養連網田)가 이루카노 오미(入鹿臣)를 죽였다. 그 날은 장대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황궁의 정원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깔린 융단과 병풍등으로 쿠라쯔쿠리(鞍作)의 시체를 덮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가 이를 보고 사저로 도망가면서 사람들에게 외쳤다.“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 (鞍作臣) 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그는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는 즉시 호코지(法興寺)로 옮겨 그곳을 요새화하고 다음 단계의 준비에 들어간다. 모든 황자(凡諸皇子), 모든 왕들(諸王), 모든 공경대부(諸卿大夫), 오미(臣), 무라지(連), 토모노 미야쯔코(伴造), 쿠니노 미야쯔코(国造) 를 호코지(法興寺)로 소집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쿠라쯔쿠리노 오미(鞍作臣)의 시신을 그의 부친 오호오미 에미시(大臣蝦夷)에게 보냈다. 아야노 아타히(漢直)등이 권속을 모아 무장하고 오호오미(大臣) 편에 서서 싸우려고 군진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가 장군 코세노 토쿠다노 오미 (巨勢徳陀臣)를 시켜 천지개벽(天地開闢)이래 군신(君臣)의 구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적당(賊党)을 설득하였다. 타카무카노 오미 쿠니오시 (高向臣国押) 가 아야노 아타히(漢直)등에게 말한다.“우리들은 타이로우 사마 (君大郎 = 入鹿) 때문에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오호오미(大臣(蝦夷)) 또한 오늘이나 내일 중 주살되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헛 된 싸움을 하여 권속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고 하느냐?”말을 마치자 검을 풀어 놓고 활을 내 던지고 가 버렸다. 적도(賊徒) 역시 이를 따라 도망쳤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645) 6월 13일 소가노 오미 에미시(蘇我臣蝦夷)등은 죽음이 임박해 오자 천황기(天皇記), 국기(国記), 진보(珍宝)를 모두 불 태웠다. 후네노 후비토 에사카(船史恵尺)가 잽싸게 불에 타려하는 국기(国記)를 집어내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에게 바쳤다. 그날 소가노 오미 에미시 (蘇我臣蝦夷)와 쿠라쯔쿠리(鞍作)의 시신을 묘(墓)에 장사지내고 곡읍(哭泣)도 인정한다는 허가가 내렸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 645) 6월 14일 카루황자(軽皇子)에게 황위를 넘기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를 황태자로 세웠다.

을사의 변으로 불리는 서기 645년 6월 12일 이타부키노미야(板蓋宮)에서 벌어진 정변은 계획데로 진행되어 소가씨 종가(宗家)를 멸망시키고, 반대세력을 진압한 뒤 코우교쿠(皇極)천황을 퇴위시킨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1월 16일 천황이 니이나메노 마쯔리(新嘗祭)를 지냈는데 황태자와 오호오미 (大臣)가 참석하였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2월 13일 오키나가 타라시히 히로누카 천황 (息長足日広額天皇, 敍明)의 장례가 시작되었다. 그날 소덕 코세노 오미 토쿠다 (小徳巨勢臣徳太)가 오호마타황자 (大派皇子, 敏達의 황자)를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 = 弔辭)을 읽고, 다음 소덕 쿠라타노 오미 호소메 (小徳粟田臣細目)가 카루황자(軽皇子 = 孝德천황)를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소덕 오호토모노 무라지 우마카이 (小徳大伴連馬飼)가 오호오미(大臣)을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읽었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2월 14일 오키나가노 야마다노 키미 (息長山田公)가 히쯔기(日嗣 = 황태자)를 위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읽었다.

여기 나온 황태자 또는 히쯔기(日嗣)란 표현은 코우교쿠(皇極) 원년부터 이미 다음 천황이 될 사람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며 645년 6월 12일 대극전(大極殿)에 좌정한 천황곁에 시립하고 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황자가 히쯔기 (日嗣 = 황태자) 였다.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후계자를 처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세상이 바뀐 서기 645 년 6월 14일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는 “나는 출가하여 요시노(吉野)에 들어가 불도(佛道)에 정진하겠다”며 스스로 호코지(法興寺)에 들어가 삭발하고 가사을 입은 채 요시노(吉野)의 깊은 산중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였지만 같은 해 9월 3일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는 모반죄의 명목으로 처형되니 백제왕실의 의도와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왜냐하면 백제 위덕왕(530 – 598)에서 아좌태자 (彦人大兄와 동일인, 570 - 598), 의자왕 (多利思北孤 = 敍明천황과 동일인, 593 – 660),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615 – 645)로 이어지는 백제왕실의 본류가 역사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시마나가시로 쫒겨난 사람들이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로 흘러 들어왔다. 킨키 천황가는 죠메이(敍明)천황의 명실상부한 황후 코우교쿠(皇極) 천황과 후계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 가 있었고 소가노이루카 (蘇我入鹿)가 후견인으로 버티고 있었다.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는 불행한 난민들을 보살펴 주었으나 그들은 킨키 천황가를 탈취한다. 그 사건이 을사의 변이다. 이 때 “다이카(大化)의 가이신(改新)(Taika Reforms)”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후인들이 미화하여 붙인 타이틀에 불과하다.

혁명주체 세력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정변을 미화하여 을사의 변 (乙巳의 變)이 마치 의거(義擧)인냥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는 이 의로운 거사를 통하여 일본은 율령국가로 진입하고 근대국가로 진보해 가는 옳바른 역사발전 단계에 들어선 것처럼 보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역사인식과 달리, 코우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가 별개의 인간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을사의 변을 모델로 황실 탈취의 정변이 되풀이 될까 두려워 천황가는 코우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를 동일인으로 만들어 정권탈취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를 조작한다.

백제 의자왕은 서기 593년생으로 큐우슈우(九州)에서 태어났고 수서(隋書)에 나오는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가 이 사람이다. 서기 629년 야마토의 죠메이(敍明)천황으로 즉위했고, 641년 백제의 의자왕이 되면서 야마토를 황후 코우교쿠(皇極)천황이 맡고 큐우슈우왕은 629년부터 사이메이(齊明)가 맡고 있었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카루황자(輕皇子)가 큐우슈우왕인 누나 사이메이(齊明), 교기와 하시히토 황녀(間人皇女)등을 추방하고 큐우슈우 왕이 되었는데, 이 카루황자(輕皇子)와 교기(中大兄)가 다시 연합하여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를 장악하고, 구주 백제왕 카루황자(輕皇子)가 킨키(近畿)의 천황이 됨으로서, 저절로 일본열도가 통일된 결과가 된다

실로 거대한 음모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셈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모두가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 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나카토미 카마코 (中臣鎌子)라는 이름이 여기서 처음 등장하므로 그가 이전에 누구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백제의 사택지적(沙宅智積)을 나카토미 카마코(中臣鎌子)의 전신(前身)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나카토미 카마코(中臣鎌子)는 이름을 나카토미 카마타리(中臣鎌足)로 바꾸었고 죽기 하루 전 텐지(天智)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받아 후지와라 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되었다.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암살된 직후 현장에 있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의 “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 (鞍作臣)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는 절규는 큐우슈우(九州)에서 온 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를 죽였다는 뜻이다. 사이메이(齊明), 교기(翹岐), 카루황자(輕皇子), 하시히토황녀(間人皇女), 대좌평 지적(大佐平 智積) 등이 모두 큐우슈우(九州)의 카라히토(韓人)들인 것이다. 서기 645년 을사의 변을 일으켜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를 탈취한 한인(韓人)들의 후예가 지금도 일본황실의 주인이니 백제는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