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8일 일요일

85. 파형동기이야기(巴形銅器物語)


파형동기는 야요이시대(弥生時代) 후기(2 - 3 세기)부터 고분시대(古墳時代) 전기(4세기)에 걸쳐 나타나는 청동기로 바람개비(巴)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토모에가타 동기(巴形銅器)라 불렀으나 그 용도를 확인할 수 없었다. 마귀를 쫒기 위한 주술적 심볼이다,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권위와 위엄의 상징이다는 등 여러가지 해석이 나왔다. 


오키나와(沖縄)등 남서제도에서 6개의 뿔이 달린 스이지가이(水字貝)를 불의 재난을 막아주는 부적으로 집의 입구에 걸어 둔다는 풍습을 인용하여 스이지가이를 본 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쿠마모토시(熊本市) 유적발굴속보전 “2010 – 시즈메유적(沈目遺跡)과 신미도우유적(新御堂遺跡)”에서는 파형동기 옆에 스이지가이를 함께 진열하여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암시하였다. 소설가 최인호는 “제4의 제국”에서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스이지가이를 취재하고 스이지가이 설을 인용하여 논리를 전개하였다.  

서기 1882년 사미타 타카라즈카 고분(佐味田宝塚古墳, 奈良県北葛城郡河合町)에서 약 36면의 동경(銅鏡)을 비롯하여 14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유물 가운데 신기한 물건이 하나 끼어 있었다. 청동으로 만든 원추형의 중심에 4개의 날개가 달린, 요새 선풍기 프로펠라와 비슷한 물건이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처음 발견된 토모에가타 동기(巴形銅器)이며 한국과 중국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유물이었다. 일본에서 토모에가타 동기(巴形銅器)라 명명했으므로 한국에서도 파형동기라 부르게 되었고 일본에서만 나오는 유물로 알려져 왜계유물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유물에 관한 기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에도(江戸)시대 후기의 텐메이(天明)연간(1781 – 1788) 찌쿠젠국(筑前国) 이토군(怡土郡) 이바라무라(井原村)의 야리미조(鑓溝, 現福岡県前原市井原)라는 곳에서 동경(銅鏡)을 다수 부장한 옹관이 발견되었다. 이곳을 이바라 야리미조 유적(井原鑓溝遺跡)이라 한다. 이 때 발견된 출토품은 현존하지 않고 당시의 스케치가 유원고기약고(柳園古器略考, 柳園은 青柳種信의 호)에 남아 있다. 이 서물은 주로 분세이(文政) 5년(1822) 미쿠모무라(三雲村)에서 발견된 미쿠모 미나미쇼우지유적 (三雲南小路遺跡, 福岡県糸島市) 1호 옹관묘(甕棺墓)의 조사보고서지만 아오야기 타네노부(青柳種信, 1766 – 1836)는 부근에서 1788년 발견된 이바라 야리미조(井原鑓溝)유적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농민이 보관하고 있던 동경조각 27점과 파형동기 2점의 스케치를 남겼다. 1788년 이바라 야리미조 (井原鑓溝)에서 21면의 동경과 파형동기 3점이 출토되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파형동기는 8개의 날개가 달린 것이었다.

서기 1911년 5월 카가와현(香川県) 사누키시(さぬき市) 산가와마찌(寒川町)에서 개간작업을 하던 중 지하 약 30 센티 깊이에서 파형동기 8점이 한꺼번에 발견되었고 이곳을 모리히로유적(香川市森広遺跡)이라 부른다. 파형동기 이외의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형태는 전부 7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으나 정부(頂部)의 지름이 크고 높이가 낮은 것이 3개, 정부의 지름이 작고 높이가 높은 것이 5개였다. 이들은 지금 토우쿄우(東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기 1944년 11월 제2차대전 말기 사가현(佐賀県) 카라쯔시(唐津市) 사쿠라노바바(桜馬場)에서 방공호 공사를 하던 중 지하 1미터 정도의 깊이에서 옹관(甕棺)이 출토되었다. 옹관 속에서 후한경 2면, 동팔찌 26개, 파형동기 3개, 철도(鐵刀) 토막,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桜馬場遺跡). 3개의 파형동기는 날개가 6개이며 중심부에 갈고리가 달린 것이 2개, 없는 것이 1개였다. 




서기 1961년 나라현 텐리시(奈良県天理市檪本町)에 있는 토우다이지야마 고분(東大寺山古墳)의 발굴조사에서 파형동기 7점이 출토되었다. 모두 4개의 날개를 가지고 지름이 8.8 – 10.1 센티미터였다. 이들은 지금 토우쿄우(東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고분은 고분시대 전기 중엽에 해당하는 4세기 후반경 축조된 전방후원분이다. 

서기 1989년과 1992년 사가현(佐賀県) 칸자키군(神埼郡) 요시노가리유적(吉野ヶ里遺跡)에서 14기의 옹관묘(甕棺墓)가 확인되었고 부장품 가운데서 파형동기 주형(鋳型)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발견된 최초의 파형동기 주형으로 날개가 7개였다. 

요시노가리유적(吉野ヶ里遺跡)을 발굴하면서 일본 최초의 파형동기 주형이 발견되어 신문들이 대서특필하던 무렵 한국에서 김해 대성동고분을 발굴조사하고 있었다. 부산 경성대학교 박물관이 서기 1990년 6월 12일부터 8월 1일까지 1차 발굴조사, 1990년 9월 3일부터 1991년 4월 14일까지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차 발굴조사중 13호 고분에서 4개의 날개가 달린 파형동기 6점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파형동기가 부착되어 있던 목재의 방패 흔적이 확인되었다. 파형동기는 방패 장식이었던 것이다.  대성동고분 2, 13, 23, 39호분에서 11점의 파형동기가 출토되고 그 후 2012년 7차 발굴조사중 88호분에서 13점이 출토되었다. 13호분은 4세기 2/4분기, 88호분은 4세기 3/4 분기에 축조되었고 모든 파형동기의 날개는 4개였다. 2차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파형동기가 한국에서 처음 출토된 것이며 2013년 현재까지 한국에서의 파형동기 출토는 대성동고분 뿐이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발굴된 파형동기 가운데 대성동고분의 파형동기와 사이즈와 디자인이 가장 가까운 것은 서기 1961년 나라현 텐리시(奈良県天理市檪本町)의  토우다이지야마 고분(東大寺山古墳)에서 출토된 7점의 파형동기이다. 

서기 1998년 후쿠오카현(福岡県) 카스가시(春日市) 큐우슈우(九州)대학 쯔쿠지지구(筑紫地区) 지구대기동태(地球大気動態) 시뮬레이션장치 건설현장 (春日市, 大野城市)에서  파형동기 주형이 발견되었다. 7개의 날개가 달린 주형이었다. 

서기 2008년 4월 17일 큐우슈우대학 홍보실은 1911년 카가와현 사누키시에서 발견된 파형동기 3점이 1998년 큐우슈우(九州) 대학 쯔쿠지지구(筑紫地区)에서 발견된 파형동기 주형과 일치한다고 발표하였다. 

서기 2009년 후쿠오카시 교육위원회(福岡市教委)는 나가유적군(那珂遺跡群, 博多区竹下5丁目)에서 야요이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파형동기 주형(石英長石斑岩製)이 출토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일본에서 출토된 3번 째 주형이다. 주형의 일부가 출토되었으나 전체를 복원하면 8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세로 18.5 센티, 가로 17 센티, 높이 6.5 센티로 추정되는 대형이다. 

카토우다 히가시바루 유적(方保田東原遺跡, 熊本縣山鹿市方保田)은 쿠마모토현(熊本縣) 최대급의 집락유적으로 1985년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거기서 7개의 날개가 있는 파형동기 1점이 수습되었다. 


신미도우 유적(新御堂遺跡, 熊本市城南町)에서 8개의 날개가 있는 파형동기 1점이 발견되었다. 




히로시마시(広島市) 니시야마즈카(西山貝塚)에서 7개의 날개가 있는 파형동기 1점이 발견되어 히로시마대학 고고학 연구실에 보관하고 있는데 직경 10.6 센티, 높이 1.3 센티, 무게 99.7 그램이다. 




큐우슈우와 긴끼(近畿)지역에서 주로 발굴되는 파형동기가 이바라기현(茨城県) 이시오카시(石岡市) 미야타이라 유적(宮平遺跡)에서  1점 발굴되었다. 5개의 날개에 전경 5 센티, 무게 14 그램의 소형이었다. 







서기 2002년 11월 27일 아이찌현(愛知県) 키요스쬬우(清洲町)의 아사히 유적(朝日遺跡)에서 5개의 날개를 가진 파형동기 1점이 출토되었다. 직경 5.6 센티, 높이 1.1 센티의 소형이었다. 

서기 2008년 4월 17일 큐유슈우대학(九州大学) 홍보실은 지금까지 일본 전역에서 총 36점의 파형동기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한국에서는 김해 대성동고분에서만 13점이 출토되었다. 파형동기와 함께 용도를 몰랐던 청동제 유물로 통형동기(筒型銅器)가 있다. 한국에서 통형동기는 김해 대성동고분, 김해 양동리고분, 부산 복천동고분에서만 출토되었다. 일본의 타나카 신사쿠(田中晋作, 池田市立歴史民俗資料館 館長) 씨의 “고고학으로 본 4 – 5 세기의 야마토정권과 가야 (考古学からみた4・5世紀のヤマト政権と伽耶)에 의하면 2012년 현재 한국은 출토지 미상을 포함 72본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일본은 출토지 미상 포함 74본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므로 통형동기 또한 왜계유물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통형동기가 출토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며 창의 손잡이에 끼우는 장식으로 확인되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 순장인골, 오르도스(Ordos)형 청동솥, 호형대구(虎形帶鉤), 마형대구(馬形帶鉤)등 북방계 유물이 출토되어 김수로왕으로부터 시작되는 가야의 500년 역사를 재검토해야 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에서 시작되어 서기 532년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될 때까지 동일한 왕계로 내려왔다는 논리는 일본의 역사에서 황실이 만세일계였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로 픽션이다. 만주대륙의 풍운이 변한의 한 귀퉁이에 있던 구야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였음을 김해 대성동고분은 증언하였다. 

어디 구야국 뿐이겠는가? 만주대륙의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세력들은 자기들의 삶의 근거지를 빼앗기고 살 길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필사적 탈출을 감행하여 비교적 저항이 약한 지역에 발을 붙였을 것이다. 난세의 파도는 구야국 뿐만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까지 소용돌이 속에 몰아 넣지 않았겠는가?   - 끝 - 


2013년 4월 28일 일요일

84. 아메노 미카게 카미(天之御影神)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계보를 기록하면서 고의적으로 익명을 쓴 사례가 발견된다. 역사서 저자들이 즐겨 사용한 것이 서로 다른 이름을 써서 여러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계보에서 실명을 사용하지 않고 익명으로 기록한 경우이다.  이 글에서는 고사기에 등장하는 아메노 미카게 카미(天之御影神)라는 인물이 실제 누구를 뜻하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고사기의 카이카 천황(開化天皇)조에 천황의 가계를 열거한 다음 카이카의 장자 히코이마스 왕(日子坐王)의 가계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찌카쯔 아후미(近淡海)의 미카미노 하후리(御上祝)가 제사지내는 아메노 미카게 카미(天之御影神)의 딸 오키나가 미즈요리 히메(息長水依比賣)와 혼인하여 타니하(丹波)의 미찌노우시왕(美知能宇斯王)과 미즈호노 마와카왕 (水穂之真若)을 낳았다. 미즈호노 마와카왕(水穂之真若王)의 자손이 찌카쯔 아후미노 야스노 아타이(近淡海之安直, 야스의 지방관)의 조상이다.

카이카 천황(開化天皇)의 아들 히코이마스(日子坐)가 오키나가 미즈요리 히메와 혼인하여 미찌노우시(美知能宇斯王, 丹波道主王)를 낳았다. 카이카의 대(代)를 이을 혈통이 히코이마스 – 미찌노우시 라인인데 미찌노우시를 낳은 어머니가 오키나가 미즈요리 히메(息長水依比賣)이다. 오키나가 씨(息長氏)가 고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훗날 등장하는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帯比売, 神功皇后)도 이 혈통에 연결된다. 그런데 오키나가 미즈요리의 아버지의 본명을 대지 않고 아메노 미카게카미(天之御影神)라고 기록하였다.

이미 카미(神)의 시대는 가고 인간의 시대가 도래하여 왕(王)이나 미코토(命)라 표현되던 시대에 히코이마스의 장인되는 사람의 이름을 감추고 미카게 카미(御影神)라는 익명을 쓴 것이다.  8세기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찬자들의 의도대로 후세 사람들은 “아메노 미카게 카미”란 이름의 함정에 빠져 역사를 엉뚱하게 해석하게 된다.

9세기 성립한 역사서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는 니기하야히(饒速日命)의 후손들이 자기들의 가문을 미화하여 기록한 것인데  니기하야히가 강림할 때 동행한 32명의 경호원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거기 13번 째로 아메노 미카게노 미코토(天御陰命)란 이름이 나온다.

헌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은 그가 아마쯔히코네(天津彦根命)의 아들이며 오우시코우찌(凡河内)의 지방관(直)들의 조상이라 하였다. 아마쯔히코네도 “73. 신대(神代)의 역사”에서 나온 신의 이름이다. 신찬성씨록의 이 기록에 나오는 아메노 미카게(天御陰)와 오키나가 미즈요리 히메의 아버지 아메노 미카게는 동일인일 수 없다. 아메노 미카게 카미(天之御影神)란 익명 때문에 오해가 생겨 지금 일본의 여러 신사(神社)에서 엉뚱한 귀신을 제사지내고 있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 사이에서 타코리히메(田心姫), 타기쯔히메(湍津姫), 이찌키시마히메(市杵嶋姫)의 세 딸이 태어났다. 또 오시호미미(天忍穂耳尊), 아마노호히(天穂日命), 아마쯔히코네(天津彦根命), 이쿠쯔히코네(活津彦根命), 쿠마노노쿠스비(熊野橡樟日命)의 5명의 아들을 낳았다.

위에 기록된 것은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3녀 5남의 이름이다. 고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아마테라스가 먼저 스사노오가 메고있는 장검을 받아 세 토막을 내서  하늘의 샘물로 깨끗히 씻은 다음 꼭꼭 씹더니 뿜어 낸 안개속에서 태어 난 것이 타키리비메(多紀理毘賣), 이쯔키시마히메(市寸嶋比賣), 타키쯔히메(多岐都比賣)이다.

스사노오가 아마테라스의 왼쪽 머리채에 감고 있던 구슬을 받아 하늘의 샘물로 씻은 뒤 꼭꼭 씹다 뱉어 뿜어 낸 안개에서 태어난 것이 아메노 오시호미미(天忍穂耳尊),  또 오른 쪽 머리채에 감고 있던 구슬을 받아 씹어 뱉은 안개속에서 아메노호히(天之菩卑命), 또 머리에 쓴 장식에 감겨 있던 구슬을 씹어 뱉어 낸 안개에서아마쯔히코네(天津日子根命), 또 왼 손에 감긴 구슬에서 이쿠쯔히코네(活津日子根命), 또 오른 손에 감겨있던 구슬에서 쿠마노쿠스비(熊野久須毘命)의 다섯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신화는 현상계의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자들은 신화의 형식을 애용하였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를 형제 간이라 기록하였으나 서로 상대방의 물건을 이용하여 3명의 딸과 5명의 아들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신대(神代)의 역사에 나오는 이 카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인간의 역사에 연결되고 있으므로 사실은 카미가 아니라 인간인 것이다.

백제 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166 - 214)은 왕자 시절 열도의 이즈모(出雲)에 들어 와 이즈모(出雲), 이나바(因幡), 타지마(但馬), 타니하(丹波), 와카사(若峽), 에찌젠(越前)등을 거쳐 야마토(大和)까지 손을 뻗쳤다. 일본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스사노오(須佐之男命, 素戔嗚尊)라고 기록되었다.  스사노오가 초고(肖古)의 원래 발음인 것이다.

구야국의 신녀들도 그 무렵 열도에 들어 와 있었는데 12명의 신녀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신녀의 근거지가 스사노오에게 유린되고 일부의 신녀가 살해되고 일부는 도주하였다. 나머지 8명의 신녀가 이즈모(出雲)로 끌려가 야에카키(八重垣)궁에 갇힌 채 스사노오의 후비가 되었다. 이 8명의 신녀들의 중심인물이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이다.

6명의 신녀들이 스사노오의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3명의 딸과 5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8명의 아이들이 아마테라스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아마테라스는 그 가운데 아메노 오시호미미(天忍穂耳尊)를 낳았을 뿐이다. 후비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자식들은 후계자가 될 수 없으나 아마테라스는 자기가 낳은 아들 오시호미미(天忍穂耳尊)를 왕으로 만들고자 스사노오의 후계자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에게 사람을 보내 교섭했던 내용이 고사기의 “이즈모국(出雲国)의 양도(讓渡)”라는 기사이다.

고사기에 기록된 일본신화는 타카아마하라계(高天原系)와 이즈모계(出雲系) 그리고 와다쯔미계(海神系)로 분류할 수 있는데 타카아마하라계(高天原系)는 구야국 출신의 아마테라스를 정점으로 하는 천손족(天孫族)이며 이즈모계(出雲系)는 백제의 스사노오의 후손들이다. 와다쯔미계는 짝섬(對島 현 對馬島)을 장악하고 있던 구야국 계열과 스사노오의 아들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가 혼인을 통하여 연합한 세력이다. 와다쯔미(海神)의 와다(海)는 지금 한국어의 바다(海)로 정착했다.

위에서 셋째 아들로 기록된 아마쯔히코네(天津彦根命)는 신녀 하야아키쯔 히메(速開津姫)와 스사노오 사이에 태어났다.   신찬성씨록은 그의 아들이 아메노 미카게 카미(天之御影神, 天御陰命)라고 기록하여 역사해석을 오도하였다.

감주계도(勘注系図)라는 아마베씨(海部氏)의 계보에 3세 손 야마토노 스쿠네(倭宿禰命)가 나오고 그의 다른 이름을 미카게노 미코토(御蔭命)라 하였으며 진무천황에게 봉사했다고 하였다.

한편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의 장남 타니하노 미찌누시왕(丹波道主王)이 미카게신사(彌加宜神社)에서 아마노 미카게(天御蔭命)를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여기 기록된 아마노 미카게가 야마토노 스쿠네를 말한다면 미찌누시왕은 엉뚱한 귀신을 자기 조상으로 착각하고 제사지내는 셈이 된다. 당연히 미찌누시왕은 자기의 외할아버지인 아메노 미카게를 제사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야마토노 스쿠네를 제사지낸다는 당착에 빠진다.

야마토노 스쿠네(倭宿禰命)는 일본서기의 진무동정에 나오는 사람으로 오오이타현(大分県) 붕고수도(豊後水道)에서 호호데미(火火出米)의 군사와 합류한 우즈히코(珍彦)란 자(者)이며 서기 245년 큐우슈우 군이 야마토를 점령하고 논공행상을 할 때 야마토노 스쿠네(倭宿禰命)가 되었다. 호호데미는 그에게 시이네쯔히코(椎根津彦)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렸다.

고사기 신대(神代)의 역사에 아마노 이하야토(天石屋戸)라는 제목이 나온다.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의 행동에 격분하여 숨어버린 바위굴을 말한다. 그 때 세상에 태양 빛이 사라져 암흑천지가 되었다. 아마테라스를 다시 밖으로 나오도록 유인하기 위하여 여러 카미(神)들이 업무를 분담하여 연극을 꾸민다. 거기에 “단야(鍛冶)의 아마쯔마라(天津麻羅)를 찾아 쇠(鐵)를 만들게 하여”라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 쇠는 거울(鏡)이나 무기를 만들 재료이다. 아마쯔마라(天津麻羅)와  아마노 마히토쯔(天目一箇命)는 동일인이라고 한다.

바로 이 표현 때문에 아마쯔마라(天津麻羅)는 단야의 신(鍛冶神)으로 개념화된다. 단야의 신이라고 하면 무조건 아마쯔마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화가 신화를 불러 한반도의 제철기술을 열도에 가져와 전문생산한 단야집단 (鍛冶集団)이 존재했고 아마쯔마라(天津麻羅)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역사를 비약하게 되었다.

미에현(三重県) 쿠와나시(桑名市)에 타도대사(多度大社)라는 신사가 있다. 아마쯔히코네를 제신으로 모신다.  타도대사 경내에 아마쯔히코네의 아들 아마노 마히토쯔(天目一箇命)를 모시는 별궁 이찌모쿠렌 신사(一目連神社)가 있다.

여기서 제사지내는 아마노 마히토쯔(天目一箇命)는 아마쯔히코네의 아들이며 이세의 아마테라스 대어신(天照大御神)의 손자에 해당된다. 고어습유(古語拾遺)란 고서에는 아마테라스가 천국(天國)의 바위굴에 숨었을 때 칼과 도키등을 만들어 활약한  신(神)으로 전해오며 그 때문에 철공 주물등을 시작한 일본 금속공업의 조신(祖神), 수호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열도의 사람들은 실로 다양한 신을 상상해 내 경건하게 모신다. 그들은 신을 창조하는데 천재적이다.

이 글이 씌여지던 시점에 동일본대진재(東日本大震災)가 발생하고 열도의 사람들은 미증유의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폭발로 방사능 누출의 위기를 겪는다. 서기 2011년 3월 11일의 일이다. 이와테현(岩手縣), 미야기현(宮城縣), 후쿠시마현(福島縣), 이바라기현(茨城縣)의 해안선이 10미터를 넘는 쓰나미의 가공할 위력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고 5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원자력발전소의 노심이 녹아 방사능이 유출되었다.

일본 경찰청이 발표한 18일 오후 5시 현재 사망자는 6548명, 행방 불명자는 1만354명이다. 이는 가족이나 친지 등을 통해 사망 행방불명 신고가 이뤄진 경우만 집계한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 한꺼번에 지진·쓰나미 피해로 사망 또는 행방불명됐을 경우에는 이 집계에서 빠진다.

가옥은 사라지고 전기, 수도, 교통수단이 원시상태로 돌아갔다. 식품과 식수가 없고 추위를 막을 문명이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되어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특유의 인내와 극기, 침착성과 차분함으로 위기를 견디며 어려울수록 돕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국민성을 발휘하고 있다. 열도(列島)는 흔들렸지만 일본인은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AP통신은 "대혼란 속에서도 약탈과 절도가 거의 없고 화내거나 불친절한 일본인을 볼 수 없는 것에 서양 기자들이 놀라고 있다"고 전했다.(조선일보 3월 17일)

3월 14일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칼럼을 통해 대지진 상황에서 보여준 일본의 철저한 대응과 일본 국민들의 침착성에 대해 격찬하는 등 전 세계 언론이 일본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인류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일본이 보여줬다.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일본국민은 비극적인 자연재해 앞에서도 인류가 지향할 수 있는 최상의 절제와 질서를 과시하였다. 인류의 등불임을 자부하는 종교를 신봉하는 선진국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약탈과 강도등의 무질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일본국민은 그런 종교 없이도 세상 사람들의 등불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일본인들은 왜 자신들의 역사에는 정직하지 않을까?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면 지금까지 알아 온 모든 동질성과 일체감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진실을 추구할 의지와 배짱을 가진 후손들이 태어날 때까지 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역사의 진실보다 신화와 전설이 더 무게를 갖는 듯 보인다. 주위에서 아무리 문제를 삼아도 그들의 역사 인식은 그대로이다.

오죽 했으면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점령군 사령관이 요구한 것이 천황의 인간선언이었겠는가?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관보에 조서를 발표했는데 이를 천황의 인간선언이라 한다. “짐과 국민간의 유대는 시종 상호 신뢰와 경애로 이루어진 것이지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천황을 아라히토가미(現人神)라 하거나 또 일본국민이 타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서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갖고 있다는 등의 가공된 관념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선언하고 전쟁범죄의 처벌은 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은 지금도 일본인들의 금기의 영역에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 남아있다. 지토우(持統)천황의 염원은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저술한 역사가들의 심모원려를 통하여 1,3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일본천황은 하늘이 내린 천손족이다라는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 (73. 신대(神代)의 역사 참조)

(朕ト爾等国民トノ間ノ紐帯ハ、終始相互ノ信頼ト敬愛トニ依リテ結バレ、単ナル神話ト伝説トニ依リテ生ゼルモノニ非ズ。天皇ヲ以テ現御神トシ、且日本国民ヲ以テ他ノ民族ニ優越セル民族ニシテ、延テ世界ヲ支配スベキ運命ヲ有ストノ架空ナル観念ニ基クモノニモ非ズ)

우즈히코(珍彦), 시이네쯔히코(椎根津彦), 야마토노 스쿠네(倭宿禰命), 아마쯔마라(天津麻羅), 그리고 아마노 마히토쯔(天目一箇命)가 나왔는데 고기록들이 맞다면 이들은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이다.  스사노오 – 아마쯔히코네 – 아마노 마히토쯔 라인이며 이들은 스사노오의 방계이므로 본계의 신하가 되어 이즈모, 이나바, 탄고, 타니하를 거쳐 미에현(三重県)으로 진출하였다.

스사노오는 서기 140년대, 아마쯔히코네 160년대, 아마노 마히토쯔 190년대의 인물로 본다. 그렇다면 진무동정시 오오이타현(大分県) 붕고수도(豊後水道)에서 우즈히코(珍彦)가 호호데미 군에 합류했을 때 그는 40대 중반 쯤의 나이가 된다. 아마 호호데미(神武天皇)와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다.

시가현(滋賀県) 야즈시(野洲市) 미카미산(三上山) 산록에 미카미신사(御上神社)가 있다. “제신은 아마쯔히코네의 아들이며 국토개척의 조(祖)라고 전해오는 아메노 미카게(天之御影命)라고 한다.” 창건은 코우레이천황(孝霊天皇)시대 아마노 미카게 카미가 미카미산 산정에 나타났으므로 미카미씨(御上氏, 三上氏)의 후손들이 제사지낸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산정의 현재지에 사전(社殿)을 조영(造営)하였다. “옛부터 일본의 단야의 조신(鍛冶の祖神)으로 받들어 모신다.” 고 신사의 유서를 전하고 있다.

고사기 신대(神代) 아마노 이하야토(天石屋戸)라는 부분에 한 줄 기록된  “단야(鍛冶)의 아마쯔마라(天津麻羅)를 찾아 쇠(鐵)를 만들게 하여”라는 내용 때문에  아마쯔마라는 단야의 신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고 시가현의 미카미신사에서 아메노 미카게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이 아메노 미카게가 아마쯔마라라는 것이 곡해의 요지이다.

그러나 시가현 미카미 신사에서 모시는 아메노 미카게는 아마쯔히코네의 아들 아마쯔마라일 수 없다. 고사기에 의하면 아마쯔히코네는 많은 씨족(河内国造, 額田部湯坐連, 茨城国造, 大和田中直, 山城国造, 馬来田国造, 道尻岐閇国造, 周防国造, 大和淹知造, 高市県主, 蒲生稲寸, 三枝部造)의 조신(祖神)이 되었으나 미카미씨(御上氏, 三上氏)는 그의 후손이 아니다. 스사노오 - 아마쯔히코네 - 아마노 마히토쯔 라인은 스사노오의 후비의 혈통이다.  스사노오 -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 -  카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 - 하니야스 히메(埴安姬) - 타케하니야스히코((建埴安彦命) - 오키나가 미즈요리히메 - 미즈호노 마와카 라인이 미카미씨(御上氏, 三上氏)의 혈통이다.

시가현의 미카미 신사의 제신은 “단야(鍛冶)의 아마쯔마라(天津麻羅)”가 아니라 스진천황 10년의 기사 타케하니야스히코 (建波邇夜須毘古)의 반란과 관련된 타케하니야스히코이다. 그러므로 미카미 신사의  코우레이 천황(孝霊天皇)시대 아메노 미카게 카미가 미카미산 산정에 나타났으므로 미카미씨(御上氏, 三上氏)의 후손들이 제사지낸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기록은 사실과 부합된다. 일본서기 스진천황 10년의 기사를 우리는 스진 시대가 아니라 부여의 의려가 열도에 들어 와 열도의 저항세력과 최후의 결전을 치른 서기 287년 일어난 일이라고 하였다.

카이카천황(開化天皇)의 후계자 히코이마스가 혼인한 미즈요리히메의 아버지를 아메노 미카게 카미라고 기록하여 오해를 불러 일으켜 아마쯔히코네의 아들이 미카미 신사의 제신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카미 신사의 제신은 타케하니야스히코 (建波邇夜須毘古)이며 그가 미즈요리히메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고사기는 타케하니야스히코의 혈통을 영웅시 하는 것보다 만세일계의 천황가의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길을 택하였다. 진실보다 이해가 우선하는 역사를 선택한 것이다.

서기 245년 경  사호히코(沙本毘古王, 狭穂彦王, 孝元天皇)와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의 딸 하니야스히메 (波邇夜須毘賣)가  혼인하여 서기 250년 경 타케 하니야스히코(建波邇夜須毘古命, 武埴安彦命)를 낳았다. 고사기는 그녀를 코우찌(河内)의 아오타마(青玉)의 딸이라고 기술하여 하니야스히메가 가모타케쯔누미의 딸이라는 사실도 감추었다. 타케하니야스히코의 어머니와 딸의 출신을 감춰 모계 혈통의 연결고리가 드러 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코우찌(河内)의 아오타마(青玉)의 딸이라고 기술된 하니야스히메와 아메노 미카게 카미(天之御影神)의 딸로 기록된 오키나가 미즈요리 히메(息長水依比賣)의 가계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고사기는 타케하니야스히코를 역적이라고 규정하고 만세일계의 천황계보를 작성하였으므로 타케하니야스의 어머니와 딸의 연결고리를 감춘 것이다.

스사노오 – 우카노 미타마 – 가모타케 쯔누미 – 하니야스히메 – 타케하니야스히코 – 오키나가 미즈요리히메 – 타니하노 미찌누시와 미즈호노 마와카의 혈통이 아마베씨와 와니씨의 혼혈이다. 타케하니야스히코의 아버지는 코오겐천황(孝元天皇)이므로 하니야스히코는 가모씨(鴨氏)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미즈요리히메의 남편, 히코이마스는 히코쿠니오케쯔(日子国意祁都命)의 아들이므로 와니씨로 분류된다. 따라서 타니하노 미찌우시와 미즈호노 마와카 형제는 와니씨이다.

위의 미즈호노 마와카왕((水穂之真若)의 자손이 야스노 아타이(安直, 야스의 지방관)의 조상이며 그들이 미카미신사를 창건하고 마와카왕의 외할아버지 타케하니야스를 제사지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미카미씨(御上氏, 三上氏)이다.

우리는 쿄오토(京都)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의 제신이 타케하니야스히코(武埴安彦命)라 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검토한 바에 의하면 그는 또 시가현(滋賀県) 야즈시(野洲市)의 미카미 신사(御上神社)의 제신인 것이다.

일본서기 스진 10년의  타케하니야스히코의 반란으로 기록된 전쟁은  키즈강(木津川)을 최후무대로 하고 있지만 전쟁은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진행되었다. 야마토를 방어하기 위하여 타케하니야스히코 군은 야마시로, 시가현 야스지역을 전전하면서 한 때 미카미산에 진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타케하니야스히코 군은 패배하였고 야마토는 부여군에게 장악되어 서기 287년 부터 318년까지 부여에서 온 의려(依慮, 孝靈)와 의라(依羅, 崇神)가 야마토를 통치하였다.

쿄우토부(京都府) 키즈카와시(木津川市山城町) 에 쯔바이 오오쯔카야마 고분 (椿井大塚山古墳)이 있다. 3 세기 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야마시로(山城)지방의 최대 전방후원분이다. 키즈강(木津川) 북안 자연구릉지의 끝자락에 축조되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분묘의 흔적이 없어지고 자연구릉지로 인식되었다. 1896년 일본국철 나라선(JR 奈良線)을 부설할 때 분묘인줄 모르고 중간을 잘라 철로가 부설되었다. 1953년 국철 나라선의 관통부에서 토사의 붕괴가 심하여 확장공사를 하던 중 수혈식석실(竪穴式石室)이 우연히 발견되었고 무려 32면의 삼각연신수경(三角縁神獣鏡)이 출토되었다. 거울의 파편도 발견되었고 도굴 가능성도 있어 총 36면 이상의 동경(銅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울 이외에도 다량의 무기 무구 갑주 농기구등이 출토되었다.

1953년 쿄우토대학(京都大学)의 발굴조사가 끝나고 석실은 철도공사 인부들에 의하여 매꾸어졌는데 이 때 석실의 천정석(天井石) 4개가 반출되어 현재 야마시로 중학교(山城中学校) 교정에 뉘어져 있다. 이 천정석에 기록된 묘비명은 “建波邇夜須毘古命棺、丁未年四月九日薨、御年四十歳” 라고 해독되었다. 일본에서는 정미년을 서기 167년으로 보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서기 287년으로 보고 타케하니야스히코의 생년을 이 묘비명에 근거하여 248년 출생, 287년 사망으로 고정한다.

쿄오토시(京都市) 사쿄우구(左京区)에 미카게 신사(御蔭神社)가 있다. 제신으로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身命)와 그의 딸 타마요리히메(玉依日売命)를 모시므로 쿄오토의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와 동일한 신을 모시는 것이다. 타마요리히메가 바로 타케하니야스히코((建波邇夜須毘古命, 武埴安彦命)의 어머니 하니야스히메(波邇夜須毘賣)이다.

쿄오토의 시모가모신사에서 아오이 마쯔리(葵祭)를 시작하기 3일 전 신관과 신자들이 미코시(神輿, 카미를 태울 가마)를 매고 히에이산(比叡山)의 미카게 신사(御蔭神社)에 가서 신령(神霊)을 영접하여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로 모셔온다. 이것은 히에이산의 미카게 신사에 카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 - 타마요리히메(玉依日売命)가 진좌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이쯔루시(舞鶴市) 모리-유쿠나가지구(森 - 行永地区)의 주택지 한 가운데 울창한 숲이 있는데 이 곳이 미카게 신사
(彌伽宜神社)이다. 넒은 숲 속에 있으므로 보통 오오모리신사(大森神社)라고 불린다. 타니와 미찌누시(丹波道主命)가 개창하였으며 제신은 그의 어머니 오키나가 미즈요리히메(息長水依比賣)의 선조인 아메노 미카게(天御影命)이다. “이 신은 고대제철의 신으로 미카미 신사(御上神社, 滋賀県野洲町)의 신과 동일하다. 타니와 미찌누시의 모계의 오키나가씨(息長氏) 는 금속가공의 기술을 가진 집단이었다. “

위의 기록은 마이쯔루시(舞鶴市)에서 만든 홍보물의 일부인데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아메노 미카게란 명칭때문에  어떻게 그 의미가 왜곡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이쯔루 시에서 만든 홍보물은 오류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아메노 미카게 카미(天之御影神 )는 고대제철의 신 또는 아마노 마히토쯔와 관련이 없으며  스사노오 – 우카노미타마 – 가모 타케쯔누미 - 하니야스 히메 – 타케하니야스히코 – 오키나가 미즈요리 히메 – 타니와 미쯔누시(丹波道主命) 혈통을 의미한다. 야즈시(野洲市) 미카미산(三上山)의 미카미 신사(御上神社)와  마이쯔루시(舞鶴市) 미카게 신사(彌伽宜神社)는 아마베씨(海部氏), 와니씨(和珥,和邇,丸邇), 그리고 오키나가 씨(息長氏)의 조상신을 모시는 것이 맞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