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0일 토요일

61. 宋書의 왜무왕 상표문

宋書 順帝 昇明1년 (서기 477) 倭에서 사신이 와서 興이 죽고 동생 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武는 스스로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을 칭하였다.

송서 순제 승명2년(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여기서 그는 고구려의 무도함을 규탄하고 부형의 시절부터 고구려를 응징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와 형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나 이제 자신이 그 뜻을 실현코자 한다고 하며 송 황제의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황제는 그를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앞서 “14. 왜의 5왕(The five kings of Wa)” 편에서 다룬 이 기사는 한일 양국의 학자들에게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있고 또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이므로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설명이 되지 아니할까? 중국사서도 사람의 손으로 씌여진 이상 전적으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은 사마천이 확립한 역사 편집의 정신만은 유지하면서 역사를 다루어 왔다. 일본서기는 황실의 정통성을 확보하여, 당시의 황실이 영원히 군림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씌여진 것이므로, 역사기록에 작위의 가능성이 커진다. 진실보다 황실의 이해관계가 우선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은 하나의 왕조가 끝 나고 역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현 왕조의 영원성을 확보하려는 작위를 역사서에 가미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송서에 나온 당시의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많으며, 이 사실이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는 일본서기가 오히려 작위의 냄새를 풍긴다. 서기 478년의 상표문을 살펴보자.

황제의 책봉을 받은 저희 나라는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外臣으로서 그 藩屛이 되는 나라입니다. 옛부터 저희 祖先은, 스스로 갑주를 입은 채, 산과 강을 누비며, 쉬는 날도 없이, 東으로 毛人을 정벌하기를 55국, 西로 衆夷를 굴복시키기를 66국, 바다건너 평정하기 海北 95국에 이르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었읍니다. 王道는 멀리까지 고루 미치고, 영토는 광활하게 펼쳐져, 중국의 위세가 머나 먼 변방까기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고, 저희 나라는 대대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을 빠지지 않았읍니다.

저는 비록 아둔하지만, 황공하옵게도 先代의 뜻을 받들어, 제 밑에 있는 사람들을 독려하여, 천하의 중심인 중국에 歸一하고, 백제를 경유하는 항로를 통하여 조공할 수 있도록 선박을 마련하였읍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게도 백제의 정복을 꾀하여 변경을 침범하고 살륙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조공이 지체되고 순풍이 불더라도 배를 띄울 수 없고, 사신이 길을 나서더라도 순조롭게 조공을 바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읍니다.

저의 亡父 濟王은, 원수의 나라 고구려가 倭가 중국에 가는 길을 가로 막는 것에 분노하였고, 백만의 병사는 이 정의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떨치고 일어나 바다를 건너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때, 돌연히 아버지와 형들을 잃어 모처럼의 기회를 잃고 말았읍니다. 그리하여 상을 치르기 위하여 군을 움직일 수 없어 결국 잠시동안 휴식하느라 고구려 세력을 꺾지 못하고 있읍니다. 이제 때가 되어 武備를 갖추어 父兄의 유지를 다하려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용사로서 떨쳐 일어나, 눈 앞에 번쩍이는 칼날이 들어 와도 물러 설 수 없읍니다.

황제의 은혜를 입어, 이 강적 고구려의 힘을 꺾고 곤란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父祖의 공로에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의 官을 칭하고, 제 밑에 있는 제장에게도 각각 칭호를 내려 충성을 독려하고자 합니다.

封國偏遠, 作藩于外. 自昔祖禰, 躬擐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忝胤先緖.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遙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 道圖欲見呑. 掠抄邊隸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或通或不. 臣亡考濟, 實忿寇讐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堰息未捷, 至今欲鍊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効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仮開府儀同三司 其余咸仮授 以勸忠節

5세기의 왜왕 武는 한 반도의 고구려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니 송 황제도 지원해 달라는 상표문을 올리고 있다. 한반도의 작은 나라들은 그의 눈에 보이지도 않은 것처럼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명칭을 요구하더니 478년에는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의 관직을 요구한다.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는 황제 밑에 있는 최고의 관직이다. 그러나 이 요구에 대하여 송 황제는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까지는 허락한다. 백제를 빼고 6국제군사는 인정한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의 諸國보다 우월한 왜왕의 지위에 만족해 한다.

그런데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기사가 있다. 모인55국, 중이66국이 일본열도라는 것은 일본학자도 인정한다. 문제는 渡平海北 九十五國부분이다. 이 부분이 한반도를 지칭하는 것은 확실하게 보인다. 과연 그 시절 倭武王의 아버지 倭濟王이 한반도에 건너와 95국을 평정한 역사가 있었을까? 또 그가 고구려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 사실일까? 한국 역사가들이 단연 No라 하는 이 부분을 우리는 Yes라고 답한다.

앞에서 거론한 바 있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를 지금 우리의 현재의 가치판단을 가지고 이해하면 안 된다. 임진왜란 한일합방등으로 얼룩 진 굴절된 역사에 의하여 형성된 현재 한국인의 대일 감정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새로운 의식지평에서 이해되고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기분이나 이념성향으로 5세기의 역사를 볼 수는 없다. 그때 일본과 백제는 같은 나라였으므로 백제왕은 아버지가 맡고 왜왕은 아들이 맡고 있었다. 백제왕과 왜왕이 한 집안 식구였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시절 서기 392년부터 백제는 시련을 맞는다. 야마토의 신라공격과 대방공격 및 고구려의 가야정벌 기사가 나오는데, 일본열도는 그 시절 고구려로 부터 자유로웠을까? 일본서기는 이에 대하여 말이 없다. 일본황실은 만세일계를 고집하므로 일본을 정복한 사람도 皇系의 사람으로 위조하여 역사를 기록한다. 한 두번이 아니다. 일본의 19대 允恭천황이 바로 광개토대왕의 왕자로 일본을 정복하고 왕이 되었으나 일본역사는 그가 정복자임을 감추었다.

다만 그의 이름을 해괴하게 기록하였다. 고사기에 允恭天皇 (393 - 453 )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라 하였다. 宿禰는 천황의 신하의 姓인데 宿禰天皇이라고 야유했으며, 間稚子란 이름을 썼는데 이는 高安(광개토왕의 이름)의 어린새끼라는 뜻이 된다. 일본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만세일계를 믿는다. 신용할만 한 동시대의 문자자료가 없으면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기록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서기 432년 允恭은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즉위한다. 일본열도도 마침내 고구려 세력이 된 것이다.

백제의 반격은 개로왕자에 의하여 서기 440년경부터 시작된다. 近畿지방의 允恭의 예봉을 피하여 모인55국, 중이 66국의 關東, 東北지역과 九州의 남부지역이 이에 포함된다. 고구려군에게 초토화된 한반도의 가야지역 역시 민심을 수습하고 백제를 중심으로 다시 결속하도록 독려한다.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95국이라는 숫자는 얼마나 의미를 갖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國이란 신라나 백제같은 國이 아니라 훨신 작은 단위의 인간집단을 가리킨다.

서기 453년 允恭이 친 아들에 의하여 독살되고 456년 安康이 살해되는 혼란을 틈 타 雄略이 정권을 잡았으나 백제세력은 때를 놓치지 않고 458년 雄略을 제거하고 야마토를 탈환한다. 서기 455년 개로왕자가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461년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내 일본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한다. 이 해 시마왕이 태어난다.

바로 그 무렵,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51 년 (서기 463) : 송나라 세조(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장수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책봉하였다.

일본열도는 백제가 다시 장악하였으나 백제 위례성에 들어 온 개로왕은 자나깨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당한 치욕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중국의 북위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개로왕 18년(서기 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렸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서기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四道]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危懼] 혹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일본서기 雄略 20년(서기 475)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 와 7일간 밤 낮으로 왕성을 공격했다. 왕성은 함락되고 본거를 잃었다. 국왕과 황후, 황자들은 적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 년 (서기 476) : 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漢北)의 백성(民戶) 들을 이주시켰다. 3월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여름 4월에 탐라국(耽羅國)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가을 8월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서기 476년 문주왕 2년 송나라에 가던 사신이 고구려에 막혀 되돌아 왔다. 이 시대 왜나 백제에서 송나라에 가는 항로는 九州 후쿠오카, 잇키 섬, 쯔시마, 거제도, 한산도, 남해도, 돌산도, 완도, 해남, 진도, 압해도, 지도, 변산반도, 선유도, 태안반도, 덕적도, 영종도, 강화도를 경유하여 백령도에서 중국의 산동반도에 이르고 거기서 양자강 하류까지 육지를 따라 내려간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의 남진이후 황해도 전역이 고구려 영토가 된다. 당연히 상기 항로의 요충 백령도와 황해도 장연, 옹진지역이 고구려 수중에 들어가 고구려의 Coast Guard가 관할한다면 백제와 왜의 대중국 항로는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3 년 (서기 477) :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重修]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 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封)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서기 477년 야마토의 淸寧천황 곤지가 백제에 나왔다. 야마토를 떠날 때 시마왕을 倭武王으로 봉하여 왕권을 넘겼다고 본다. 왜무왕은 일본서기에 천황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락되었다. 8세기의 일본에 있던 백제의 역사가들은 왜무왕의 정체가 1971년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에서 백일하에 드러 날 것을 알고 누락시킨 것처럼 절묘하다.

宋書 順帝 昇明1년 (서기 477) 倭에서 사신이 와서 興이 죽고 동생 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武는 스스로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을 칭하였다. 전사한 개로왕의 장자가 백제를 포함한 7국제군사를 자칭하는 것이니 별로 모순되는 요구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송서 순제 승명2년(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거기서 백제에 대한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송 황제는 그를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한 것은 서기 463년 장수왕이 송으로 부터 이 관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무왕의 상표문에 의하면 亡父 濟는 475년 이전 고구려를 응징하려고 하였으나 475년 고구려가 먼저 침입하여 아버지와 형들이 죽었다고 한다. 472년 북위를 끌어들인 일이 성사되었다면 고구려 응징이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북위도 고구려를 두려워 하고 있었으므로 개로왕의 상표문은 장수왕에게 그대로 알려진다. 그리하여 장수왕의 백제 섬멸 계획은 3년간 치밀하게 이루어 졌다.

일본서기 雄略 23년 (서기 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하고 있는 곤지왕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찌쿠지국(筑紫國)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24대 동성왕이다. 雄略 23년이라 하나 淸寧천황 즉 곤지의 치세이며 그에게는 이 때가 가장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될 시기였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同年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거기서 찌쿠지국(筑紫國)의 아치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 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이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는 유일한 관련기록이다. 이때, 479년, 淸寧천황과 왜무왕이 위의 선단과 함께 일본에서 사라진다. 그들이 어디서 무었을 하였는지 모른다. 야마토는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이 두 사람이 일본을 비운 사이 顯宗천황 武烈천황을 거치면서 大伴金村이 권력을 장악하고 백제에 저항하였던 이야기는 앞에서 나왔다. 서기 479년부터 501년 왜무왕이 백제 무령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나 478년 송에 보낸 상표문과 관련하여 고구려에 대한 적대행위를 했을 것으로 본다.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실적이 미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기 484년 삼국사기 동성왕 6년 대 중국 항로가 고구려에 의하여 제지 당하는 모습이 또 나온다. 봄 2월에 왕은 남제(南齊)의 태조[祖]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을 책봉(冊封)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복속[內附]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가을 7월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약사(若思)는 서해 바다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하였다.

2009년 6월 13일 토요일

60. 繼體天皇

서기 2007년11월4일 福井縣 후쿠이시(福井市) 아스와야마(足羽山)의 아스와신사(足羽神社)에서 繼體天皇 즉위 1500년 봉축기념대제가 열렸다. 서기 2007년은 제26대 繼體天皇 (450 – 531)이 서기 507년 즉위한 이후 꼭 1500년이 되는 해이다. 야마토의 중심지 나라분지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의 바닷가에 위치한 변방이었던 코시노쿠니 (越國)에서 배출된 유일한 천황이니 지금도 그 곳 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자랑거리로 봉축기념대제를 열어 향토애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제외하면, 까마득한 그 옛날, 변방에 살던 사람이 어떻게 제왕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기사는 없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506년 武烈천황 (489 – 506)이 후사없이 붕어하였으므로, 오호무라지(大連) 오호토모노 카나무라(大伴金村)등이 에치젠(越前)에 가서 應神천황의 5세손, 오오도왕(男大迹王)을 추대하였다. 이를 승낙한 왕은 다음 해 58세때 가와치국(河內國) 쿠스바노 미야(樟葉宮)에서 즉위하고 仁賢천황의 황녀 타시라카노 히메미코 (手白香皇女)를 황후로 하여 사내아이를 낳으니 그가 아메쿠니 오시 하라키 히로니와노 미코토 (天國排開廣庭尊, 欽明 510 – 571)이다. 이 사람이 본처소생으로 嫡子이나 나이 어린 관계로 2명의 형들이 먼저 국정을 잡은 후 천하를 다스렸다.

즉위 前의 妃였던 오와리노 무라지 쿠사카(尾張連草香) 의 딸 메노코히메(目子媛)는 시코부(色部)라고도 하며 2인의 아들을 낳았다. 첫째를 마가리노 오오에 황자 (勾大兄皇子)라 하며, 그가 훗날의 히로쿠니 오시타케 카나히 천황 (広国排武金日天皇, 安閑 466 – 535)이다. 두째를 히노쿠마노 타카다 황자(桧隈高田皇子)라 하며, 훗날의 타케오히로쿠니 오시타테 천황 (武小広国排盾天皇, 宣化 467 – 539)이다.

일본서기는 오오도왕(男大迹王)이 應神천황5世의 孫으로, 父는 히코우시왕(彦主人王), 母는 垂仁천황7世의 孫, 후리히메(振媛, 434 – 485)라 하고 있으나, 應神에서 繼體에 이르는 중간4대의 계보는 생략되어 있다. 중간4대의 계보는 카마쿠라(鎌倉) 시대의 “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逸文에 의하여 밝혀졌다. 이에 의하면 應神天皇 –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 오오호도왕(意富富杼王 또는 大郞子) – 오이왕(乎非王) –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 彦主人王) – 乎富等大公王 (=繼體天皇)으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나 上宮記에 의하면 오오도왕(男大迹王)의 父는 近江의 高嶋郡三尾 (滋賀縣高島郡) 나리도코로(別業)에 있던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이다. 코시노쿠니 미쿠니(越國三國) 사카나이(坂中井)의 타카무쿠(高向)에서 절세의 미인으로 알려진 후리히메(振媛)가 近江의 高嶋郡三尾의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을 모신 것은 서기 449년 경의 일이다. 다음 해 출생한 오오도왕(男大迹王)이 어려서 부친을 잃고 후리히메(振媛)의 친정, 사카나이(坂中井)의 타카무쿠(高向) 에서 성장하였다.

그 시절 5세기의 에치젠(越前)은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변경의 땅으로 알기 쉬우나 福井평야에서 고분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중앙의 정치세력에 뒤지지 않는 선진성과 강대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 졌다. 쿠즈류가와(九頭竜川)가 福井平野로 흘러드는 마쯔오카쵸우(松岡町)와 마루오카쵸우(丸岡町)의 산에 거대한 古墳群이 있다. 松岡町의 테구리가죠우야마 고분(手繰ケ城山古墳), 니혼마쯔야마 고분(二本松山古墳), 카스가야마 고분 (春日山古墳), 丸岡町의 로쿠로세야마 고분 (六呂瀬山古墳)등 百 미터를 넘는 前方後円墳이 계속된다. 古墳에는 九頭竜川에서 운반해 온 후키이시(葺き石)가 있고, 하니와(埴輪)가 나란히 서 있다. 福井市 아스와야마(足羽山)의 샤쿠다니이시(笏谷石)로 만든 巨大한 石棺을 古代人은 山頂까지 운반해 왔다.

振媛의 実家는 이런 巨大한 古墳을 건설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豪族이었다. 近江에서 母에 이끌려 온 男大迹王은 그러한 환경의 외갓집에서 자랐다. 백제왕가의 후손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으리라. 그들은 당시 最新의 文化圏이었던 朝鮮半島와 密接한 関係를 갖고 있었다. 男大迹王이 살아 있었을 五世紀末 축조된 標高273미터의 山頂에 있는 二本松山古墳의 石棺에서 金과 銀을 칠 한 冠, 甲冑나 鏡등 豪華한 副葬品이 出土되었다. 以前 話題가 되었던 奈良県의 후지노키 고분(藤ノ木古墳)에서 出土된 有名한 冠보다도 一世紀 빠른 時代의 것으로 畿内보다도 越前 쪽이 오히려 文化의 先進地였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출토된 유물과 산 꼭데기에 축조된 고분은 가야와의 관련성을 강력히 암시한다.

男大迹天皇의 治世元年春1月4日、大伴金村가 회합의 참석자들에게 말한다. “男大迹王은 性情이 너그럽고, 효심도 깊다하니, 皇位를잇기에 적합한 분인 것 같소. 우리 모두 나서서 그 분에게 권하여 황위를 번영토록 해야 하오”. 物部麁鹿火가 응대한다. “황손들을 골라 살펴보니, 賢者는 확실히 男大迹王이라 할 수 있읍니다”. 許勢男人도 맞장구를 친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男大迹王에게 天下를 다스리도록 합시다” 이렇게 세 사람이 합의한 뒤 6日、무라지(連)들이 君命을 받든 황제의 깃발과 가마를 준비하여, 미쿠니( 三国)로 향했다. 보무도 당당히 호위무사들이 도착하자 男大迹王은 평상시의 넉넉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侍臣을 整列시키고 이미 天子의 風格이 있었다.

서기 507년 2월 男大迹王은 大阪府 히라카타시(枚方市) 쿠스바노미야(樟葉宮)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오호토모노 카나무라(大伴金村)를 오호무라지(大連)로, 코세노 오히토(許勢男人)를 오호오미(大臣)로, 모노노베노 아라카이 (物部麁鹿火)를 오호무라지(大連)로 옛 職位를 그대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코시노쿠니(越國)에서 야마토에 왔는데 전임의 천황들이 있었던 카시하라(橿原) 또는 사쿠라이(櫻井) 지역이 아닌 쿠스바노미야(樟葉宮)가 繼體천황에게 처음 주어진 皇居이다. 현 메트로 오오사카의 최북단으로 나라분지의 카시하라(橿原) 또는 사쿠라이(櫻井)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4년후 서기 511년10월 현 京都府 京田邊市의 쯔즈키노미야(筒城宮)로 황거를 옮긴다. 7년후 서기 518년3월 현 京都府 長岡京市의 오토쿠니노미야 (弟國宮)로 황거를 옮긴다. 8년후 서기526년9월 드디어 奈良縣 사쿠라이시(櫻井市) 이와레노 타마호노미야 (磐余玉穗宮)로 옮긴다.

야마토의 변두리를 전전하기 무려 20년, 왜 繼體천황이 곧 바로 야마토의 수도에 들어오지 않고 변두리에서 20년을 보내야 되었는지 알려주는 역사서는 없다. 쿠스바노미야(樟葉宮)는 요도강(淀川)가에 위치한 현재 오오사카府 히라카타시(枚方市) 쿠스바(樟葉), 쯔즈키노미야(筒城宮)는 키즈강(木津川)가로 현 京都府 京田邊市, 오토쿠니노미야(弟國宮)는 카쯔라강 (桂川) 을 끼고 있는 곳으로 현 京都府 長岡京市에 해당한다.

継体天皇의 墓는 古事記등에 미시마노 아이노노 미사사기(三嶋藍野陵)라고 적혀있다. 이 능을 궁내청은 大阪府 이바라기시 (茨木市)의 오오다챠우스야마 고분 (太田茶臼山古墳)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축조시기가 5세기 중엽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最新의 研究결과 이웃한 타카쯔키시(高槻市)에 있는 이마시로쯔카 고분 (今城塚古墳)이 継体陵이라고 거의 断定되어, 市教委에 의하여 発掘調査가 행해지고 있다. 2006년12월1일 10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사적공원 정비공사가 진행중이다. 궁내청의 관할이 아닌 高槻市敎委소관이므로 발굴조사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궁내청은 고대 천황가와 그 친척들의 무덤으로 740개의 고분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으나 지정된 고분의 신분이 확실한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고분들의 학문적인 조사를 청원하고 있으나 고고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천황가의 고분들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今城塚古墳은 요도가와(淀川) 北岸에 위치한 거대한 전방후원분으로 전장 약 350미터, 분구장 190미터, 전방부의 폭 148미터, 높이 12미터, 후원부직경 약 100미터이다. 고분이 축조된 것은 6세기전반으로 상정되며 고분에서 높이 약 1.7미터로 일본최대급의 家形하니와(埴輪), 갑옷을 입은 武人하니와외 여러가지 모양의 하나와가 출토되었다.

고분발굴시 石棺의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3종류의 석재가 확인되었다. 熊本縣, 大阪府의 二上山, 兵庫県 播磨의 세 地方에서 나온 것으로 3개의 석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継体천황의 석관이라면 나머지 두개는 누구의 관일까? 3가지 석재 가운데 熊本의 阿蘇山의 噴火로 만들어 진 핑크色의 석재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이것이 継体의 石棺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出土되는 하니와(埴輪)나 石棺의 破片은 요도강(淀川)을 사용한 水上交通은 물론 九州와의 交流를 암시한다.

繼體天皇(450 – 531)의 계보는 應神天皇 –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 오오호도왕(意富富杼王 또는 大郞子) – 오이왕(乎非王) –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 彦主人王) – 乎富等大公王 (=繼體天皇)으로 되어 있다.

應神(320 – 394) -稚野毛二派(372 – 424) -意富富杼王(391 – 432) -乎非王(412 – 465) -彦主人王(429 – 475)의 계보를 백제의 계보로 대치하면 근구수왕(320 – 394) – 아신왕(372 – 424) – 전지왕(391 – 432) – 毗有왕(412 – 465) – 개로왕(429 – 475, 倭濟王)이 된다. 繼體(450 – 531)와 무령왕(461 – 523, 倭武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이렇게 백제와 야마토의 왕들은 두 얼굴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우리는 意富富杼王의 富杼를 浮屠와 같은 초기 불교용어 Buddah로 보았다. 따라서 男大迹王의 오도(大迹)는 富等, 浮屠가 되어 오오도는 小浮屠의 의미로 증조부 큰 부처의 이름을 딴 작은 부처라는 뜻이다.

古事記 雄略時代의 기록을 보자. 일본서기는 이 부분을 훨신 완화하여 박진감이 떨어진다. 천황은 葛城山에 올랐는데 거대한 맷돼지가 나타났다. 천황이 활을 쏘자 맷돼지가 성을 내고 굉음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천황은 겁에 질려 개암나무 위로 뺑소니쳤다.

또 어느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모든 수행원들이 빨간 허리띠를 메고 파란 옷을 입었다. 그 때 건너 산에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복이나 모양이나 사람들이 천황의 행렬과 꼭 같았다. 거기서 천황이 “야마토에 나 말고 왕이 없는데 거기 가고 있는 것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는 모양도 천황과 똑 같았다. 그래서 천황은 크게 노하여 모두 활을 겨누자 저 쪽에서도 똑 같이 활을 겨누었다.

거기서 천황이 “이름을 대라. 이름이나 알고 싸우자”하니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알려주마. 나는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한 마디로 분별하여 말하는 葛城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 이다” 라 하니 천황이 겁에 질려 “알아 모시겠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신령님께서 現世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읍니다.”라 하며 大御刀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 그러자 一言主神는 손을 치며 모든 물건을 받았다.

위의 구절을 서기 458년 雄略이 백제의 개로왕과 곤지에게 제압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大御刀는 천황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雄略은 이후 퇴위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된다. 雄略의 재위가 23년간이라고 기록되는 것은 역사의 표면에 백제가 드러나는 것을 덮기 위하여 고안된 장치이다. 신화와 역사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강은 넓고도 깊다.

위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가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이며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이며 백제의 개로왕이 젊을 때 일본에서 불린 이름이다. 후쿠이(福井)는 왜무왕의 상표문에 나오는 毛人55국의 하나이다. 倭濟王은 아주 활동적이고 가는 곳마다 여자를 밝히던 정력적인 사나이였던 것 같다. 倭武王의 아버지 倭濟王이 允恭천황 시절 후쿠이를 근거로 모인55국을 평정하였는데 그 무렵 후쿠이의 호족의 딸 후리히메(振媛)를 만나 男大迹王을 낳았다.

백제왕실은 이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奈良분지와 가와치(河內)는 백제의 조상들의 무덤이 남아 있는 聖地이다. 따라서 백제의 무령왕은 繼體天皇의 奈良進入을 강력히 경고하였을 것이다. 무령왕이 죽은 후 서기 526년에야 繼體는 奈良縣 사쿠라이시(櫻井市) 이와레노 타마호노미야 (磐余玉穗宮)에 들어온다.

継体天皇은 1명의 황후와 8명의 妃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어디까지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신하들이 불러들인 나이 58세의 노인이 결혼동맹을 맺어 왕권을 강화하였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의 관심은 천황을 배출한 皇后 타시라카노 히메미코(手白香皇女)와 妃 메노코히메(目子媛)뿐이다. 황후는 欽明을, 妃는 安閑과 宣化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타시라카노 히메미코(手白香皇女) 즉 欽明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황후로 보고, 메노코히메(目子媛)는 개로왕의 妃로 본다. 安閑과 宣化는 欽明의 형제가 아니라 작은 아버지이다.

백제혈통을 야마토 獨自의 혈통으로 만드는데 필요했던 것이 일본역사의 継体天皇이다. 그가 후쿠이에서 지방의 호족으로 살았다면 행복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의 大伴金村의 정략에 이용되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大伴金村는 백제의 압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던 継体天皇을 중앙으로 불러내 욕보인 셈이다.

일본서기는 繼體천황 마지막 부분을 묘하게 끝맺고 있다. “ 어떤 책에 의하면 천황은 치세 28년 붕어했다고 한다. 그것을 치세 25년붕어로 한 것은 백제본기에 의해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 “치세 25년 3월, 진군하여 安羅에 이르러 걸둔성(乞屯城)을 쌓았다. 이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 들리기를 일본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와 맞춰보면 신해년은 치세 25년에 해당한다. 후세에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백제의 무력 시위 앞에서 야마토의 大伴金村는 繼體천황, 황태자, 황자를 모두 죽이고 구주백제군을 야마토에 무혈 입성시킨다. 이 때부터 구주백제의 斯我王이 야마토의 27대 安閑천황 (466 – 535)으로 기록된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 535년 安閑천황이 야마토에서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며 구주백제왕인 사비왕이 야마토로 가서 28대 宣化천황(467 – 539)으로 즉위하고 구주백제왕으로 무령왕의 두째왕자 사귀왕(斯貴王)이 부임한다. 이 사람이 29대 欽明天皇(510 – 571) 이며 백제 聖明王( - 554)의 친 동생이다. 

일본 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安閑, 宣化, 欽明이 다음 천황으로 즉위하는 것은 이들이 繼體의 자식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2009년 6월 7일 일요일

59. 大伴大連金村

역사는 제왕을 중심으로 전개되나 때로는 제왕들의 존재감이 별 볼 일 없는 시대가 있다. 서기 484년 飯豊皇女사망 이후부터 서기 531년 안칸(安閑)천황이 즉위하여 제왕의 권위가 회복될 때까지 47년 동안 야마토의 왕권은 안정되지 못하고 쿠데타를 주도한 신하들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 시대 오호토모노 무라지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면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 카나무라 (大伴大連金村)는 언제 어떻게 역사의 별이 되었을까?

4세기 말의 소위 오진(應神)王朝 (河內王朝) 시대까지 오호토모 씨(大伴氏)의 활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50년 후 인교우(允恭)천황 시대 무로야(室屋)가 등장하면서 정계에 大伴氏의 중량감이 느껴진다. 역사상 大伴氏의 실재를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가 처음이다.

인교우(允恭) 11년 (서기 442) 오호토모노 무라지노 무로야 (大伴連室屋), 천황의 명에 의하여 소토오시노 이라쯔메 (衣通郞姬) 를 위하여 후지하라베(藤原部)를 설치하였다. 衣通郞姬 (藤原琴節郞女・弟姬。皇后 忍坂大中姫의 妹) 란 “23. 19대 允恭天皇 그 역사기록의 허상” 에서 거론된 바 있는 마리린 먼로 (Marilyn Monroe, 1926 – 1962)처럼 섹시한 백제의 공주이다. 아신왕의 막내딸로, 서기 427년 전지왕이 反正천황에게 보낸 시세쯔히메(新齊都媛)와 7명의 여성 가운데 衣通郞姬가 끼어 있었다.

일본서기 應神39년 백제의 직지왕 (제18대 전지왕)이 그의 누이 시세쯔히메(新齊都媛)를 파견하였다. 서기 427년 新齊都媛은 7명의 여성을 데리고 왔다. 古事記는 反正천황(380 – 438)의 황후를 쯔노노이라쯔메(都怒郞女)라 하고 일본서기는 쯔노히메(津野媛) 라고 기록했다. 백제의 서울여자라는 뜻이다.

서기 432년 고구려 세력이 야마토를 점령하자 백제계의 反正천황은 북쪽 해안 미야즈(宮津)로 도망가 목숨을 보전하다가 438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衣通郞姬는 윤공천황의 황후 오시사카 오호나카쯔 히메 (忍坂大中姬)의 막내 동생인데 윤공천황이 후비로 들이기를 원 하였다. 忍坂大中姬가 한사코 반대하였으나 천황의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천황은 오우미 국(近江國, 滋賀縣) 사카타(坂田)에서 살고 있던 衣通郞姬을 서울로 불러 들여 궁에 가까운 후지하라(藤原) 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게 하였다.

궁에 가까운 곳에 젊은 애인을 두고 출입이 빈번해 지자 황후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그것도 황후의 친동생이다. 천황은 할 수 없이 궁에서 멀리 떨어진 카와치의 찌누(茅渟, 大阪市남서부)에 새로 집을 지어 衣通郞姬를 살게 하였다. 그 뒤로 천황은 히네노 (日根野, 泉佐野市日根野)에서 사냥을 한다고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천황 9년 춘 2월 찌누방문, 추 8월 찌누 방문, 동 10월 찌누 방문, 10년 춘정월 찌누를 방문했다. 그러자 황후가 “나도 이제 지쳤읍니다. 오토히메 (弟姬)를 질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천황이 자주 찌누를 내왕하면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통촉해 주십시요.” 하고 애원하니 하는 수 없이 출입하는 횟수를 줄일 수 밖에 없었다.

11년 춘 3월 찌누노미야(茅渟宮)에 가니 衣通郞姬가 불평하였다. “언제나 보고 싶지만 당신은 바닷가에 흘러오는 해초처럼 가뭄에 콩 나듯 오십니다.”

이 해(서기 442) 천황은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노 무라지(連)에게 “최근 나는 끝 내주는 여자를 손에 넣었다. 황후의 同母妹 인데 내 가슴을 설레게 해. 후세까지 먹고 살 수 있도록 뭔가 해 주어야 되겠는데….” 그리하여 室屋連가 제안하여 諸國의 미야쯔코(造)들에게 명하여 衣通郞姬를 위하여 후지하라베(藤原部)가 결성되었다. 베(部)란 토지와 노동력을 갖춘 황실의 사유재산을 말한다.

서기 442년 允恭천황이 마음에 꼭 드는 젊은 애인에게 준 선물이 후지하라베(藤原部)였고 오호토모노 무로야 (大伴室屋)에게 이 일을 맡겼다. 은밀하게 이런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황후와는 관련이 전혀 없는 천황쪽 사람일 것이다. 추측컨데 이 사람은 백제계가 아니라 순수한 고구려계의 사람이리라. 추후 야마토 정국의 추이는 백제보다 고구려쪽으로 선회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雄略紀 천황 즉위시(서기 456) 大伴室屋는 物部目과 함께 大連로 임명된다. 또 이 무렵 무로야(室屋)와 그 아들 카타리(談)는 유게이( 靫負) 三千人을 인솔하여 左右衛士府를 맡았다고 한다. 천황의 신변을 경호하는 최측근의 무장집단이다. 雄略 9년、카타리(談)는 키노 오유미(紀小弓)와 함께 신라에 파견되어 전사하고, 小弓은 陣中에서 病死하였다. 이때 천황의 詔에, 大伴卿 (室屋)과 紀卿(小弓)이 같은 나라에 사는 이웃으로 예부터 가까운 사이라고 하였다. 이 언급은 무로야와 오유미가 당시 이웃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만 같은 고구려 출신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雄略二十三年(서기 479), 天皇은 임종 무렵, 室屋등에게 명하여 星川皇子의 反逆을 막고, 皇太子를 도와 천하를 다스리도록 한다. 이때 室屋의 民部 広大하여 나라에 가득하였다한다.

淸寧即位 前紀 (서기 461) 室屋는 야마토노 아야노 쯔카노 아타이(東漢掬直)에게 命하여 호시카와(星川)皇子의 난을 진압한다. 일본서기의 유랴쿠(雄略)와 세이네이(淸寧)천황 재위 기간은 조작되었다. 

雄略은 서기 458년 퇴위되어 감금되었고 461년 백제의 곤지가 야마토를 장악한다. 백제 개로왕의 서자 호시카와 (星川)皇子가 곤지의 입성을 거부하였으나 大伴室屋가 곤지를 도와 호시카와(星川)皇子를 불 태워 죽이고 곤지가  淸寧천황으로 즉위하였다. 고구려 세력의 회복을 꿈꾸던 大伴室屋로서는 불가피한 일보 후퇴의 선택이었다.

서기 485년 飯豊皇女에 이어 顯宗천황이 즉위한다. 顯宗천황의 이름은 弘計로 백제 동성왕의 친동생이다. 顯宗천황은 雄略의 손자 나니와노 오노왕(難波小野王)을 황후로 세우고 백제를 등지고 친고구려 정책을 편다.

顯宗 치세 3년,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 (紀生磐宿禰)가 任那와 고구려을 왕래하면서 三韓의 王이 되고자, 官府를 정돈하고 스스로 神聖이라 칭하였다. 任那의 사루(佐魯), 나카타 코우하이( 那奇他甲背) 등이 계략을 써서 백제의 챠쿠마쿠니게 (適莫爾解)를 니린성(爾林城)에서 죽였다. 시토로모로노 사시(帶山城)를 쌓고 東道를 막아 지켰다. 食料를 운반하는 항구를 장악하고 , 軍을 굶주리게 하였다.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 (紀生磐宿禰)는 雄略 9년 병사한 키노 오유미(紀小弓)의 아들이다.

百濟王이 크게 노하여 , 古爾解、나이토우노 마쿠코게(內頭莫古解)등을 보내、兵을 인솔하여 帶山을 공격하였다.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裲)는 軍을 보내 맞아 싸웠다. 위세등등하게 맞서는 적을 추풍낙엽처럼 넘어 뜨렸다. 일당백의 기세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힘이 소진된 듯 任那에서 철수했다. 그리하여 百濟는 佐魯、那奇他甲背등 三百人을 죽였다.

백제의 동성왕과 야마토의 켄죠우(顯宗)천황은 친 형제간이다. 그러나 켄죠우는 백제를 배반하고 친 고구려 정책을 편 것을 보고 동성왕은 격노하였다.

서기 488년 백제의 동성왕은 일본에 돌아 와 배신자 顯宗천황을 응징하고 왕위에 오르니 제 24대 仁賢천황(447 – 498)이다. 그가 왕위에 있던 10 년간 소강상태에 빠졌던 정국은 그의 사망과 더불어 다시 고구려계의 반격이 시작된다. 允恭에서 시작되어 雄略, 顯宗으로 이어진 고구려 인맥은 仁賢천황이 사망하자 서기 4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쿠데타의 주역은 大伴室屋의 손자 大伴金村였다.

武烈即位 前紀(서기 499) 카타리(談)의 아들 카나무라(金村)가 헤구리노 오미노 마토리(平群臣 眞鳥)와 시비(鮪, 志毗) 父子의 乱을 平定하고, 皇太子를 即位시켜, 스스로 大連가 된다. 以後 金村는 半世紀에 걸쳐서 政治的 指導權을 掌握한다. 일본서기는 승자의 편에 서서 헤구리노 마토리(平群臣 眞鳥)가 난을 일으켜 이를 진압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실상은 고구려 세력이 백제세력을 몰아내고 야마토를 장악하고 백제에 대항하였다. 이 쿠데타로 백제는 야마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武烈천황은 이때 나이 10세의 어린이였으며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 카나무라 (大伴大連金村)가 전권을 잡았다.

백제 쪽은 모대왕(牟大王)이 서기 501년 백가에게 살해되고 502년 무령왕이 등장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곧 이어 무령왕의 야마토 탈환작전이 전개된다. 야마토의 탈환작전은 “26. 구주백제의 성립”에 나온 데로이다. 서기 504년부터 백제의 九州공격이 시작되자 서기 506년 大伴大連金村는 武烈천황을 살해하고 무령왕의 이복형 오오도왕(男大迹王, 450 – 531)을 繼體천황으로 옹립하여 무늬만 백제계로 바꿔 백제의 공격을 무마코자 하였다. 코시노쿠니(越國) 후쿠이(福井)에 살고 있던 백제 개로왕의 서자 男大迹王은 이때 이미 58세의 노인이었다.

繼體라는 이름 때문에 역사는 이 사람이 이후의 천황들에게 왕통의 피를 이어주는 천황쯤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철저한 일본서기의 위장이다. 천황의 혈통은 繼體가 아니라 무령왕에서 欽明천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繼體 치세 7년(서기 513) 추 8월 26일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 이 기록은 이 보다 100년 또는 200년후에 기록되었을 것인데 왜 백제 무령왕의 태자 순타의 죽음이 일본서기에 기록될 필요가 있었을까?

순타(淳陀)태자는 성명왕의 동생인데, 이때 죽었다는 기록은 이 사람이 야마토에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바로 欽明천황이다. 백제 무령왕의 아들로 성왕의 동생이다. 서기 513년 순타는 3살이었다. 순타는 3세에 백제에서 죽었으니, 아메쿠니 오시하루키 히로니와 (天国押波流岐広庭)天皇, 즉 欽明은 백제와 관련없는 일본출신의 천황이라는 것이 일본서기의 의도이다.

일본에서 혈통을 찾아야 하니 繼體천황 후손으로 호적이 위조된다. 繼體를 이어 즉위하는 安閑, 宣化도 繼體의 자식이 아니라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시 어린 아이였으므로 살아 남은 백제 개로왕의 아들로 무령왕의 동생들이다. 繼體는 大伴大連金村의 괴뢰로 이용되었던 노인이었다. 欽明, 安閑, 宣化를 繼體의 아들로 출산했다는 황후 기록도 모두 위조된 역사의 편린들이다.

継体六年(512年) 金村는 任那四県을 百済에게 割譲하고 代償으로 다음 해  百済가 五経博士를 日本에 보낸다. 任那四県이란 오코시타리(上哆唎), 아로시타리(下哆唎), 사다(娑陀), 무로(牟婁) 의 4현을 말하며 전남 여수, 돌산, 순천, 광양이 다시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513년 백제는 기문(己汶, 전북 남원)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이 해 야마토는 백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구주의 공격자 斯我王을 繼體천황의 황태자로 선언한다. 514년 繼體천황은 기문(남원)과 타사(滯沙, 하동군 고전면)를 백제에게 내 주었다

 서기 523년 5월 백제의 무령왕이 사망하고 524년 1월 태자 明이 즉위하여 聖明王이 되었다. 무령왕의 힘에 억눌려있던 야마토는 527년 6월 오미의 게나노 오미(毛野臣)에게  6만의 군사를 주어 남가라(김해)와 훼기탄(김해시 진영읍)을 탈환하여 임나와 합병하려 하였다. 일본역사는 이때 이와이 (磐井)의 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찌쿠지의 이와이(磐井, 475 – 528)는 肥前, 肥後, 豊前, 豊後등과 연합하여 케누노 오미의 작전을 방해하였다. 繼體천황이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麁鹿火)에게 토벌군을 보내면서 “나카도(현 야마구치 현)에서 동쪽은 내가 다스릴테니 찌쿠지국의 서쪽은 임자가 가져도 좋아. 상벌도 임자 마음데로 해. 일일히 보고하지 않아도 돼”라고 하였다.

継体二十一年(527年)筑紫에서 磐井가 反乱을 일으키자 金村는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麁鹿火)를 장군으로 파견하여 다음 해 진압에 성공한다. 磐井는 이 사건 때문에 잠깐 역사에 등장할 뿐으로 그의 내력은 의문에 쌓인 채 남아있다. 전쟁터가 되었던 미이군(三井郡)과 磐井의 무덤이 남아있는 야메시(八女市)는 원래 고구려의 왕자 고진이 九州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땅이다. 

528년 11월 11일 치쿠지의 미이노고오리(三井群)에서 처절한 전투끝에 이와이가 참수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백제의 요구가 계속된다.

529년 백제는 가라 다사진(韓多沙津, 하동군 고전면)을 내 놓으라고 요구한다. 

일본서기는 繼體천황 마지막 부분을 묘하게 끝맺고 있다. “ 어떤 책에 의하면 천황은 치세 28년 붕어했다고 한다. 그것을 치세 25년붕어로 한 것은 백제본기에 의해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 “치세 25년 3월, 진군하여 안라에 이르러 걸둔성(乞屯城)을 쌓았다. 이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 들리기를 일본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와 맞춰보면 신해년은 치세 25년에 해당한다. 후세에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백제의 무력 시위 앞에서 야마토의 大伴金村는 繼體천황, 황태자, 황자를 모두 죽이고 구주백제군을 야마토에 무혈 입성시킨다. 이 때부터 구주백제의 斯我王이 야마토의 27대 安閑천황 (466 – 535)으로 기록된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 535년 安閑천황이 야마토에서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며 구주백제왕인 사비왕이 야마토로 가서 28대 宣化천황(467 – 539)으로 즉위하고 구주백제왕으로 무령왕의 두째왕자 사귀왕(斯貴王)이 부임한다. 이 사람이 29대 欽明天皇(510 – 571) 이며 백제 聖明王( - 554)의 친 동생이다. 

大伴金村는 安閑, 宣化의 시대까지 大連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欽明 一年(540年)金村는 三韓政策의 失敗를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등에게 추궁받아 스미요시(住吉)의 自宅에서 稱病하고 은거한다. 大伴氏의 퇴장과 더불어 역사의 무대에  蘇我氏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