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다쯔(敏達)천황 (30대)은 킨메이(欽明)천황의 두째 아들로 어머니는 센카(宣化)천황의 딸 이시히메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572년 4월 3일 천황에 즉위하여 그 달 쿠다라노 오오이 (百濟 大井)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비다쯔(敏達)천황은 백제 성왕의 왕자임을 이미 전회에서 거론했다. 쿠다라노 오오이노미야 (百濟大井宮) 터는 현재의 나라현 코오료우쬬(廣陵町) 쿠다라(百濟)로 비정한다. 이곳에 쿠다라데라(百濟寺) 삼중탑이 남아있고 그 지역이 쿠다라(百濟)로 불리고 있으나 궁궐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서기575년 1월 오키나가 마테왕의 딸 히로히메(廣姬)를 황후로 세웠다. 황후는 1남 2녀를 낳았다. 첫째가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 (押坂彦人大兄)황자, 두째가 사카노보리 황녀, 세째가 우지노 시즈카이 황녀라 한다. 그 해 11월 황후 히로히메가 죽었다. 서기576년 3월 누카타베(額田部)황녀를 황후로 맞아 2남 5녀를 보았다. 이 시대 불교수용여부를 두고 논란이 심했으나 비다쯔(敏達)는 불교를 공인하지 않고 두창으로 585년 사망했다.
서기 576년 두번째 황후가 된 누카타베 황녀가 서기 592년 12월 33대 스이코(推古) 여왕이 되는데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조에 그녀는 18세 때 황후가 되었고 34세에 남편을 여이었으며 39세에 천황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스이코천황은 서기 554년 출생한 것으로 되며 누카타베 황녀가 18세 때 시집왔다면 서기 571년 결혼한 것으로 된다. 이는비다쯔(敏達)가 즉위 전에 누카타베 황녀와 혼인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첫째 황후가 575년 죽어서 576년 두번째 황후로 누카타베(額田部)황녀를 들였다는 것은 거짓이 된다.
왜 일본서기에 이런 모순된 기록이 생겼을까?
본업이 역사학자가 아닌 아마츄어 역사학도에게 드는 느낌은 29장에서 나온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 기사가 누군가 다른 백제 주요인물의 기록을 여기 갖다 붙였기 때문에 생긴 모순이라고 생각된다. 킨메이(欽明)조의 이시히메(石姬)와 같은 방법으로 백제 위덕왕의 황후 히로히메(廣姬)를 비다쯔(敏達)의 황후로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다음에 등장할 34대 죠메이(敍明) 천황 때문이다. 죠메이천황은 이후의 일본황실을 열어 갈 38대 텐찌(天智)천황과 40대 텐무(天武)천황의 부친이다.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백제 위덕왕의 왕자 아좌태자 (일본의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의 아들이다.
그러니 죠메이 천황 (훗날의 의자왕)과 그의 아버지 아좌태자 (일본명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족보가 필요하다. 아좌태자의 족보를 만들기 위하여 그의 어머니 히로히메를 어딘가 꼭 끼워 넣어야 되는데 가장 적당한 곳이 위덕왕의 친동생 비다쯔 (敏達)이다. 따라서 히로히메를 비다쯔의 족보에 올리고 히로히메를 첫 황후로 만들어 아좌태자 (일본명 押坂彦人 大兄皇子)가 비다쯔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뒤 첫 황후가 죽어서 다음 황후를 뽑았다는 등의 거짓말을 하게되는 것이다. 위덕왕은 서기 530년생, 비다쯔 천황은 538년으로 본다.
누카타베 황녀는 명실상부한 비다쯔(敏達)의 정비(正妃)로 비다쯔(敏達)의 즉위전에 결혼하여 즉위후에 황후가 된 것이다. 백제와 일본의 황실을 혈연적으로 분리하기 위하여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고민하여 내 놓은 결과물이 일본서기의 혈연기록이다.
1. 皇后(前):広姫(ひろひめ、息長真手王の女) 敏達4年(575年)薨去
押坂彦人大兄皇子(おしさかのひこひとのおおえのみこ、麻呂子皇子)
逆登皇女(さかのぼりのひめみこ、坂騰王)
菟道皇女(うじのひめみこ、宇遅王) 伊勢斎宮
2. 皇后(後):額田部皇女(ぬかたべのひめみこ、後の33대 推古天皇)2남 5녀(일본서기)
菟道貝鮹皇女(うじのかいたこのひめみこ、菟道磯津貝皇女・静貝王) 聖徳太子の妃
竹田皇子(たけだのみこ)
小墾田皇女(おはりたのひめみこ)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
鸕鶿守皇女(うもりのひめみこ、軽守皇女・宇毛理王)
葛城王(かずらきのみこ、古事記のみ)
尾張皇子(おわりのみこ)
田眼皇女(ためのひめみこ、多米王) 舒明天皇の妃
桜井弓張皇女(さくらいのゆみはりのひめみこ、桜井玄王・由波利王) 押坂彦人大兄皇子の 妃・来目皇子の妃
3. 夫人:老女子(おみなご、春日臣仲君の女)
難波皇子(なにわのみこ) 橘朝臣・路真人・甘南備真人・大宅真人などの祖
春日皇子(かすがのみこ) 春日真人などの祖
桑田皇女(くわたのひめみこ)
大派皇子(おおまたのみこ、大俣王)
4. 采女:菟名子(うなこ、伊勢大鹿首小熊の女)
太姫皇女(ふとひめのみこ、桜井皇女・布斗比売命)
糠手姫皇女(ぬかでひめのみこ、田村皇女・宝王・島皇祖母命)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舒明天皇の母
누카타베 황녀가 낳은 5녀 가운데 오하리다 황녀와 사쿠라이노 유미하리 황녀의 두 딸이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에게 시집갔다. 놀라운 것은 타메(田眼 또는 多米)황녀로 기록된 넷째 딸이 죠메이(敍明)천황 (위의 히코히토 황자의 아들)에게 시집간 사실이다. 결국 5녀 가운데 딸 둘을 히코히토 황자(아좌태자)에게 보내고 한명의 딸을 그의 아들 죠메이(敍明) 천황에게 시집보냈으니 아좌태자 부자가 백제와 왜의 왕위 계승권의 중심인물임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 – 의자왕(죠메이천황) –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황자로 이어지는 백제의 적장자들의 명단이다. 소위 백제왕실의 장손들의 리스트인 것이다. 부부가 모두 천황을 지낸 비다쯔(敏達) – 스이코(推古)천황의 커플조차 자기 아들을 황위에 세우지 못 하였다. 왕위 계승권은 적장자가 0 순위였던 것이다. 왜의 죠메이(敍明)천황이 서기641년 백제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물론 일본측 기록은 641년 죠메이(敍明)천황이 죽었다고 되어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상기 가계에서 네번째에 있는 우네메(采女) 우나코의 기사이다. 우네메(采女)란 천황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궁에 들어 온 여자이다. 따라서 천황의 비로 들어 온 여자보다 신분이 낮은데 천황의 눈에 들어 자식을 갖게 되면 비가 된다. 우네메(采女) 우나코가 낳은 누카데 히메 (일명 타무라 황녀 또는 타카라 왕) 황녀와 히코히토 황자 사이에서 죠메이(敍明)천황 (593 – 660)이 태어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 때부터 타무라(田村), 타카라(寶), 타메(田眼), 타미(多米), 계미(鷄彌)등의 비슷한 이름이 남녀불문하고 죠메이(敍明)천황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붙여진다. 우리 말의 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죠메이(敍明)천황, 코우교쿠(皇極)천황, 사이메이(齊明)천황 그리고 죠메이(敍明)천황의 어머니 이름이 모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죠메이(敍明)천황에게 스이코(推古)천황의 딸 타메(田眼 또는 多米)황녀가 시집가는데 죠메이(敍明)천황은 593년생, 타메황녀 594년생이다. 서기594년이라면 스이코(推古)천황 40세때이므로 자식을 낳을 수도 있는 나이지만 비다쯔(敏達)천황이 서기585년 사망했다 하므로 부친이 누구일지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비다쯔(敏達)천황은 왕위를 물러나 더 살아 있었을 수도 있다. 타메황녀는 죠메이(敍明)천황의 황후였고 천황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을 낳지 못 하였다. 이 여인이 죠메이(敍明)천황 다음의 35대 코우교쿠 천황 (皇極 天皇, Empress Kogyoku, 594 – 661)이 되나 서기 645년 을사의 변으로 쿠테타의 제물이 되어 추방된다.
이때 죠메이(敍明)천황의 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의 나이가 천황이 될 나이에 미치지 못하여 그가 30세가 될 때까지 코우교쿠(皇極)천황이 한시적으로 천황자리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는 대략 615년생이며 30세가 되는 서기 645년 그가 천황이 될 해에 맞춰 쿠테타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 코우교쿠천황을 폐위시킨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테타 그룹은 자기들의 반역의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훗날의 사이메이천황 (齊明, Empress Saimei, 601 – 661)과 코우교쿠 천황이 동인인물이라고 역사를 조작하여 자기들이 천황을 폐위시킨 사실을 은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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