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1일 화요일

69. 부여의 엑소더스

후한 말, 중평(中平) 6년 (서기 189) 공손도 (公孫度, ? – 204)가 동탁(董卓, ? – 192)에게 발탁되어 요동태수가 되었다. 공손도는 요동에서 주변지방을 평정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고구려, 부여, 선비와 대치한다. 이 때 고구려와 선비의 사이에 끼어 생존을 모색하던 부여가 공손도와 손 잡는다. 공손도는 부여왕 위구태에게 딸을 주어 결혼동맹을 맺는다.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公孫康, 172 – 221)이 위(魏)의 태조 조조(曹操, 155 – 220)에 의하여 양평후(襄平侯)로 봉해진 것이 건안(建安) 12년 (서기 207)의 일이다. 후한이 멸망한 것은 건안 25년, 위 문제의 시대, 황초(黃初) 원년 (서기 220)이다. 3대 째의 공손연 (公孫淵, ? – 238)은 위의 명제(明帝)로 부터 태화(太和) 2년(서기 228)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오(吳)의 손권(孫權, 182 – 252)과도 영합하는 등 위나라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며, 경초(景初) 원년(서기 237) 자립하여 연왕(燕王)을 참칭하였다.

위(魏)의 명제는 경초 원년(서기 237)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 ? – 255)을 시켜 공손연을 토벌코자 하였으나 관구검이 패하고 돌아왔다. 경초 2년(서기 238) 봄, 태위 사마선왕(司馬懿, 179 – 251)을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한다. 6월 위군이 요동에 도착하여 양평(襄平, 현 요양시)을 공격하고 8월 연(淵)의 부자가 참수되어 공손 3대는 50년의 막을 내린다.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귀속되어 있었다. 한나라 말년, 공손도(公孫度)가 바다 동쪽 지방에 세력을 넓혀 바깥 오랑캐들을 위엄으로 복종시켰을 때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다시 요동군에 귀속되었다.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공손도는 두 오랑캐 틈에 끼어 있는 부여왕 위구태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왕위에 섰다. 그러나 위거에게는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 마여만이 있었다. 위거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함께 마여를 세워 왕을 삼았다 (후략)… 마여가 죽자 그 아들 의려는 나이 겨우 6세였다. 이 의려를 세워서 왕을 삼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부여전)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 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 尉仇台死 簡位居立 無嫡子 有孽子麻余 位居死 諸加共立麻余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歳 立以爲王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는 북사와 수서를 인용한다.“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 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未知孰是

건안년 중(서기 196 – 219)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이라 하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서 유민들을 수집해서 군사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를 치니 옛날 살던 백성들도 차츰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후로는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소속되었다.

경초년중(서기 237 – 239)에 명제가 비밀리에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바다 건너보내 이군(二郡)을 장악하게 하였다. 여러 한국(韓国)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그 아래에는 읍장(邑長)의 인수를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옷과 두건을 갖춘 정장(正裝)차림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래 백성들까지도 관청에 나갈 때 정장을 빌려 입고 나간다. 이제는 명제가 하사한 옷을 입고 두건을 쓴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韓)의 나라(國)들을 통치했었으므로 진한 8국을 떼어 낙랑군으로 하겠다고 하니 통역이 잘못되어 한의 신지들이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 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군은 드디어 한을 멸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한전)

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餘有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서기 204년 공손강은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거친 땅을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이라 하였다. 이곳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방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구태(仇台)는 백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사람의 하나로 그의 실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요동의 공손씨와 연합하여 부여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만주의 부여인들이 서기 204년 대거 대방으로 이동하였다. 새로운 땅에 이주한 이들은 강력한 세력이 되어 온조왕 이래의 백제의 왕권을 탈취하여 백제왕이 되었다. 그가 8대왕으로 기록된 고이왕(古爾王, 234 – 286)이다. 그는 즉위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강화에 주력하여 백제가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시대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고이왕 3년(서기236)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고이왕 5년(서기238) 봄 정월에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북과 피리를 사용하였다.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5년(서기 169)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고 나오는데 여기 나온 부산(富山)과 백제본기 고이왕 5년(서기 238)의 부산(釜山)의 기사는 동일한 장소의 지명으로 본다. 이 부산은 요동의 부여를 가리키며 순수한 부여어 “불달”을 부산(不山), 부산(釜山), 부산(富山)으로 적었다.

공손도와 결혼동맹을 맺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부여의 위구태와 대방고지의 대방을 근거로 백제왕이 된 고이왕이 어떤 관계인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학자도 있으나 활동했던 시대를 계산하면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의 연령 차이를 고려해야 된다.

공손연을 괴멸시킨 위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발빠르게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을 손에 넣는다. 공손연 토벌시 고구려는 군사를 파견하여 위를 도왔으나 동천왕 16년(서기242)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서안평은 현 단둥시 근방으로 요동에서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이다. 이 사건은 서기 244년의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의 원인이 된다.

정시(正始)년간 (서기 240 – 249)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칠 때 현도태수의 왕기(王頎)를 부여에 파견하자 위거는 대가를 교외에 보내 군량을 제공하고 왕기를 환영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부여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에서 서기 246년 관구검이 1회 침공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중국사서를 보면 서기 244년과 245년 2회에 걸쳐 침공하였음이 확인된다.

서기244년 8월 관구검은 보기 1만의 군사로 현도성에서 출진하여 비류수(압록강)로 진격한다. 고구려는 관구검 군을 막기 위해 동천왕이 직접 보기 2만을 거느리고 출전한다. 양군은 양맥곡(梁貊谷)에서 충돌했다. 초전에서 작은 승리를 거둔 동천왕은 관구검을 얕보고 철기 5천으로 관구검 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관구검은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이번에는 고구려 군의 대패였다. 고구려 2만 병력은 이 한번의 싸움에서 1만 8천 명을 잃고 말았다. 동천왕은 기병 1천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서기 244년 10월 관구검은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환도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수천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관구검은 전쟁포로를 현도군에 넘긴 뒤 서기 245년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때 위나라의 작전은 고구려의 남북에서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현도 태수 왕기가 관구검과 같이 고구려 공격전에 참가하였고,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이 동원되어 고구려 남쪽에서 작전을 전개한다. 낙랑과 대방 군은 고구려의 속국인 동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동천왕은 수도의 함락, 남부의 동예 함락으로 옥저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관구검은 현도 태수 왕기에게 동천왕의 추격을 명했다. 왕기는 옥저를 지나 북쪽 길로 올라가 읍루와의 경계지역까지 수색하였지만 동천왕은 남옥저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왕기는 8천여 명의 포로를 잡는 등 전공은 세웠지만 동천왕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동천왕은 추격해온 위나라 장수를 암살하고 소수의 추격군을 무찌른 뒤 겨우 사직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쑥밭이 된 환도성에 다시 도읍할 수 없었던 동천왕은 평양성을 쌓고 그곳으로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정시(正始) 6년 (서기 245)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예(嶺東濊)가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다. 불내후(不耐侯) 등이 온 고을을 들어 여기에 항복했다. 정시 8년 (서기 247) 이들이 궁에 들어와 공물을 바치자 다시 조서를 내려 불내예왕으로 봉하였다.(삼국지 위지 동이예전). 불내(不耐)는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였으며 현재 강원도 안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서기 246) 가을 8월에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궁준(弓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

서기 238년 이후 공손연이 토벌된 뒤, 위구태가 죽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부여를 위하여 간위거를 즉위시켜 왕통을 잇게 하는데 백제의 고이왕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이왕 5년(서기238)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는 기사가 이와 관련되지 않을까? 고이왕 계열의 부여인들은 서기 204년경 조국을 떠나 왔으므로 이 시대까지 부여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보다 훨신 후대인 서기 286년 책계왕 시대에도 백제가 대방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 (서기 286) 책계왕이 왕위에 올랐다.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하였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품이 웅장하고 뛰어났다. 고이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부여는 진(晉) 무제(武帝)때 자주 와서 조공하였으나 태강(太康) 6년 (서기 285) 모용외(慕容廆)에 의하여 부여의 전군이 격파되고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자제(子弟)들은 옥저(沃沮)지역에 몸을 숨겼다. 황제가 조를 내려 “부여왕은 대대로 충효를 지켰는데 오랑캐에게 망한 것은 심히 유감이다. 혹시 남은 백성을 모아 나라를 부흥하려 하거든 좋은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 주라”고 명하였다. 호동이교위 (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의 구원에 나서지 않고 기략의 호기를 놓쳐 그리 되었으므로 그를 파면하고 하감(何龕)을 임명하였다.

다음 해, 부여왕을 계승한 의라(依羅)가 하감(何龕)에게 사자를 보내 나라를 수복하기 위하여 귀국하고자 하니 도와 달라고 하였다. 감(龕)이 군대를 소집하고 독호(督護) 고심(賈沈)으로 병을 인솔하여 의라를 호송하였는데 모용외 (慕容廆)가 그 길목을 지켜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외(廆)가 퇴각하고 의라는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모용외(慕容廆)는 매번 부여인을 납치하여 중국에 팔았다. 황제는 이를 측은히 여겨 또 조칙을 내려 국가예산으로 부여인을 사서 돌려 보내고, 하사(下司), 기(冀)의 두 주(州)에서 부여인 노예거래를 금지시켰다. (진서 동이부여전)

武帝時、頻來朝貢、至太康六年、為慕容廆所襲破、其王依慮自殺、子弟走保沃沮。帝為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為惡虜所滅、甚愍念之。若其遺類足以復國者、當為之方計、使得存立。」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失於機略。詔免嬰、以何龕代之。明年、夫餘後王依羅遣詣龕、求率見人還復舊國、仍請援。龕上列、遣督護賈沈以兵送之。廆又要之於路、沈與戰、大敗之、廆衆退、羅得復國。爾後毎為廆掠其種人、賣於中國。帝愍之、又發詔以官物贖還、下司、冀二州、禁市夫餘之口。

한(漢), 위(魏)이래 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맺어 국가안보를 도모하던 부여는 서기 265년 사마염의 진(晉)이 건국되자 진에 의지하게 된다. 서기 285년 선비족의 모용외가 강성하여 부여를 공격하였는데 진의 호동이교위 (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부여가 정복된다.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남은 자제(子弟)들은 옥저(沃沮)지역에 몸을 숨겼다. 다음 해, 서기 286년 부여왕을 계승한 의라(依羅)가 진의 도움을 받아 부여를 재건하였다. 나라를 재건하였지만 모용선비는 부여인을 제 멋데로 붙잡아서 중국에 노예로 내다 팔았다는 것이 진서 부여전의 내용이다.

진서는 의려(依慮)는 자살했고 의라(依羅)가 나라를 수복했으나 백성을 지킬 힘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구세주를 갈망할 말세중의 말세였다. 의라(依羅)가 나라를 수복한 곳은 현 철령현(鐵嶺縣) 서남 60리에 있는 의로(懿路)라고 본다. 신당서에서 읍루고지(挹婁故地)라로 불렸던 이 곳이 지금 철령현 남쪽의 의로성(懿路城) 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상식적인 역사를 넘어 논리를 비약(?)시켜야 된다. 서기 285년 의려(依慮)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부여를 탈출하였고 서기 297년경 의라(依羅) 또한 모용선비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망망대해의 피난길에 오른다. 이들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먼저 정착한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으면서 반도를 남하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13년(서기 298) 가을 9월에 한(漢)과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한(漢)과 맥인(貊人)으로 표현된 이 사람들이 사실은 부여를 탈출한 보우트 피플들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외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불현듯 생각하니“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뒤를 맡기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넜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三神)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에게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북옥저로 도망쳐 몸을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였으나, 이 때부터 모용외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었다.'라고.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正州依慮國所都。爲鮮卑慕溶廆所敗、憂迫欲自裁忽念、我魂尚未泯、則何往不成乎。密囑于子扶羅、踰白狼山夜渡海口。從者數千、遂渡定倭人爲王。自以爲應三神符命、使羣臣獻賀儀。或云、依慮王爲鮮卑所敗、逃入海而不還。子弟走保北沃沮。明年子依羅立。自後、慕溶廆又復侵掠國人。依羅率數千、越海、遂定倭人爲王。

부여 왕계는 구태 – 간위거 – 마여 – 의려 – 의라 – 현(玄)으로 이어진다. 모용선비는 더욱 강성해져 전연이 되었고 서기 342년 고구려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346년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현을 포함 주민 5만여구를 이주시켜, 부여의 존재가 만주에서 사라진다. 위의 대진국본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건너 왜인을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부분만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려 또한 바다건너 왜를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이중의 기사로 읽는다.

의려가 탈출하면서 거쳐간 백랑산의 위치는 당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건창현(建昌縣)의 백랑산(白狼山)은 높이 1140 미터로 요서에서 두번 째로 높은 산이며 발해만으로의 접근성이 좋다. 당시 부여의 수도 의로는 현재의 심양시와 철령시 사이에 있었다. 이 당시의 부여는 지금 역사가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후한시대의 요동개척은 해안지역에 한정되었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중국의 힘이 미치지 못 하였다. 당시 부여왕이 이 경로를 따라 탈출하였다면 의로에서 백랑산까지 300 킬로미터, 백랑산에서 발해만까지 80 킬로미터의 거리를 주파한 셈이다.

부여를 탈출하려면 요동의 발해만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야 된다. 백제해안을 전전하면서 남해안, 가라해의 가락국을 거친 뒤 다시 쯔시마, 잇키, 쯔쿠시에 상륙하게 된다. 많은 인원이 먹을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하여 자주 상륙하게 되고 가는 곳마다 토착민과 갈등이 생긴다. 백제정도의 큰 나라와는 전쟁양상의 갈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지방에서는 부여 이주민의 규모가 오히려 토착세력을 능가하여 필요한 것을 약탈하는 일도 있었으리라. 이 대규모의 민족이동은 중간 기착지에 부여의 무덤이나 무기등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선진의 농업과 공업기술등의 소프트웨어를 남기게 된다.

이들의 경유지 가운데 쯔시마는 매우 중요하다. 부여의 민족이동의 규모만으로 쯔시마는 쉽게 장악할 수 있을테니까 오랫만에 외부에 적의 위협이 없는 쯔시마에서 이들은 느긋하게 앞 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미마나(任那)라는 단어가 일본서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스진(崇神) 65년 추 7월 미마나국(任那国)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 미마나는 쯔쿠시국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으로 바다를 끼고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라는 기사이다.

崇神 六十五年秋七月 任那國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미마나의 나(那)는 라(羅)와 마찬가지로 벌판을 뜻하므로 미마나에서 중요한 부분은 미마이다. 미마를 “任”으로 표기하여 마마나(任那)가 되었으나 스진왕의 일본식 시호는 미마키 이리비코 이니에 (御間城入彦五十瓊殖)로 미마를 “御間”로 표기하였다. 고사기는 미마키 이리히코 이니에 (御眞木入日子印惠)로 “御眞”로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는 임나(任那)라는 단어가 열전 강수전에 딱 한번 임나가라(任那加良)라고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미마나(任那)는 219회 나온다고 일본의 야지 잇슌(矢治一俊)씨는 지적한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리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서기 401)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대왕)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任那者本在對馬島西北界。北阻海有治曰國尾城。東西各有墟落、或貢或叛。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故自是任那乃對馬全稱也。自古、仇州對馬乃三韓分治之地也、本非倭人世居地。任那又分爲三加羅。所謂加羅者首邑之稱也。自是三汗相爭、歳久不解、佐護加羅屬新羅、仁位加羅屬高句麗、鷄知加羅屬百濟是也。永樂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轄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

쯔시마가 사고(佐護), 니이(仁位), 케찌(鷄知)의 3 개의 가라(加羅 = 韓)로 나뉘어 있었다는 말은 오직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만 나오는 기사이다. 한단고기의 위서논쟁이 뜨겁지만 이 부분의 기사는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일본서기에도 나오지 않는 사고(佐護), 니이(仁位), 케찌(鷄知)라는 지명은 지금 쯔시마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카미아가타 마찌 사고(上縣町 佐護), 토요타마 마찌 니이(豊玉町 仁位), 미쯔시마 마찌 케찌(美津島町 鷄知)가 그것이다.

우리는 위의 인위(仁位)가 스진(崇神)천황의 시호, 미마키 이리비코 이니에 (御間城入彦五十瓊殖)의 이니에(五十瓊殖)와 대응함에 주목한다. 그러면 미마키는 임나(任那)와 이니에는 인위(仁位)에 대응하여 스진천황의 시호는 임나(任那)와 인위(仁位)를 내포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스진 65년 미마나국(任那國)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는 기사는 의라의 역사기록이다. 서기 299년경 부여왕 의라(依羅)는 인위가라를 근거로 쯔시마 전역을 장악하고 일본열도 공략에 들어간다. 쯔시마가 미마나(任那)로 불린 것은 이 때 부터이며 그가 야마토를 장악하고 스진천황으로 기록된 것은 서기 300년경의 일이다.

오오사카(大阪)시 스미요시(住吉)구에 오오요사미(大依羅)신사가 있다. 주변에 있었던 고대의 인공(人工)저수지 요사미노이케(依網池)는 일본서기 기록을 따르면 스진 62년 12월 만든 것으로 나온다. 스진천황 시절 식량증산을 위하여 부여의 선진기술로 일본열도에 처음 만들어진 대규모의 인공저수지이다. 서기 1704년 야마토강(大和川)의 유로(流路)를 바꾸면서 야마토강이 요사미노이케(依網池)를 관류하게 되었고 일부는 매립되어 현재 사카난(阪南) 고등학교 운동장이 되었다. 의망지(依網池)는 의라지(依羅池)이며 망(網)과 라(羅)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일본어로 양쪽 다 요사미로 읽는다. 오오요사미(大依羅) 신사가 사카난(阪南) 고등학교 운동장 한켠에 남아있다.

의려와 의라 부자(父子)는 부여를 탈출한 뒤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의 장악에 성공하여 일본의 천황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황실의 만세일계의 논리는 이들을 진무(神武)이래의 황계속의 족보에 끼어 맞춘다. 의라는 9대 카이카 (開化)천황의 두째 아들로 족보가 만들어져 10대 천황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열도에 뿌리가 없는 스진(의라)천황은 백제계와 가야계의 호족들을 회유하여 그들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가야의 아마테라스 오호미 카미 (天照大御神)와 백제의 오호모노누시노 카미 (大物主神 = 三輪山神)를 성대하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또 백제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오호모노누시의 황후였으며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야마토 토토히 모모소 (倭迹迹日百襲姫, 235 – 318)를 극진히 예우한다. 현 나라(奈良)현 사쿠라이(桜井)시 북부의 마키무쿠(纒向)에 그녀의 무덤이 남아 하시하카(箸墓)라 불린다. 그녀의 남편 코우안(孝安 = 大物主神)천황은 부여에서 온 의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은둔하였다.

스진천황을 비롯한 정복세력은 물론 백성들도 패망한 전 왕조의 황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바쳤던 것 같다. 역사는 그녀와 관련하여 해괴한 신화를 기록하였지만 “하시하카(箸墓)는 낮이면 사람이 만들고 밤이면 귀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온다”라고 하였다. 낮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무덤을 축조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밤이면 그녀를 기리는 민초들이 돌과 흙을 날라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고사기는 스진천황이 나이 168세로 무인(戊寅)년 12월 죽었다고 기록했다. 무인(戊寅)년은 서기 318년으로 보나 역사를 보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전후로 60년씩 출입이 가능하다.

의라가 열도를 장악한 뒤 열도에 먼저 와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백제왕실의 탈환작전이 전개된다. 이 탈환작전 에서 다음 세대의 리더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 야마토타케루 즉 훗날의 백제 근초고왕(295 – 375)이다. 의라는 스진(崇神, ? - 318) 천황으로 역사에 남았으며 서기 318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열도의 주도권은 다시 백제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