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0일 금요일

40.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3)

데라카도 신 (寺門 伸) 교수의 “조선반도에서 일본을 바라본다”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3)의 연재를 계속합니다.

큰 틀의 결론은 이미 나왔으나 결론을 서두르기 전에, 역사의 바이어스(Bias, 偏向)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생각할 때, 어김없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바이어스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것은 최초에 이야기한 일본인의 역사인식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나라인 일본에 대하여, 거의 예외없이, “독특한 나라’, “다른 나라와 다른 나라”, “달리 유래를 찾을 수 없이 별 난 나라”, “세계가운데서도 아주 유니크한 나라”등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을 “유니크 신앙”이라고 하자. 일본은 어떤 점에서 유니크한가라는 질문에, “일본에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있다”라던가 “일본은 화(和)를 중요시 하는 나라이다”등의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결국 유니크, 천황, 和 라는 3개의 키 워드가 일본문화의 근본적 특징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나라가 제 각각 유니크한 존재인 것이지, 일본만이 새삼스레 유니크하다는 주장은 의미없는 주장이다. “일본인은 和를 중요시한다”는 말도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말이다. 和가 평화의 의미라면, 현대에 있어서 평화를 바라지 않는 나라 따위 (극소수의 독재국가를 빼고)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모든 나라가 和를 중시한다고 말 할 수 있고, 또 和를 순종이란 뜻이라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정부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결코 국가의 명예라 할 수없다. “어떤 것이 유니크이다”라고 믿는 것은 제 멋데로인 셈인데, 때로 그것이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띄게되고, 유해한 작용을 할 수 있다. “유니크”는 “유래가 없다”와 같은 의미이므로 유니크라 믿어진 것은 극히 보통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다르므로 서양식의 민주주의는 일본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라는 등 태연히 주장하는 정치가도 있다. 일본의 대부분의 정치가는 입 밖에 내지 않지만 많든 적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며 이것이 전형적인 유니크 신앙이다.

그리하여 “일본에는 통상의 법칙은 통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릇되게 인푸트되어 버린 생각이 냉정한 상황판단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 위험성이 충분 예지된 거품경제를 장기간 방치하여 현재의 일본의 위기적 경제상황을 초래한 원흉이 아닐까. 일본인이 옳바른 역사인식을 갖지 못하는 이유도 필경 이 유니크신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충1>우리는 우리자신을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그냥 믿고있는 듯하나 한국이나 북조선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본인만큼 호전적인 민족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갭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민족과 국가의 “자기 이미지”만큼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없다.

우리들은 당면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바이어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유구성: “일본민족은 유구한 옛적부터 일본열도에서 살고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것은 아마 “뭐든 오래 계속되면 오래 될 수록 좋은 것이다” 라는 사고방식 (거꾸로 말하면, 뭐든 오래 이어진 것은 정통성을 주며, 오래 된 것이라는 그것만의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마는 멘탈리티) 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다음의 “만세일계의 천황”과 관련된다.

만세일계의 천황: “일본문화는 유니크하며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여기에서부터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가져와 이를 일본문화와 동일시하고자 한다.

단일 민족설: “일본은 和를 중시하는 나라”라는 주장의 근거로, “일본인은 단일민족이다”라는 전혀 의미없는 說이 자주 주창되곤 한다. 이것은 물론 우익 사상가들에게 있어, “야마토민족의 순수성”이란 관념으로 이어진다.

조선문화에 대한 우월성:”일본문화가 유니크하며 남보다 뛰어나다”라는 신앙을 휘두를 위험이 있는 것은 조선문화란 존재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반도의 식민지 지배에 기인한다고 생각되며, 메이지 시대 이후 형성된 조선인 멸시의 감정 (다행스런 것은, 젊은이들에게서 거의 보이지않는다) 이 덧붙여져, 일본문화 성립에 조선문화가 이룩한 업적을 극히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코자 하는 뿌리깊은 경향이 있다.

<보충1>극히 최근 (2001년 7월 2일), 고이즈미 내각의 히라누마 다케오 (平沼赳夫, 1939 - ) 경제산업상이 “일본정도 레벨이 높은 단일민족으로 꽉 막힌 나라는 없다”고 삿뽀로 시내의 호텔 강연에서 한 발언 때문에 혹카이도 우타리협회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아이누민족으로 조직된 단체)로 부터 항의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또 이와 거의 같은 시기, 스즈키 무네오 (鈴木宗男, 1948 - ) 衆院議員은 “아이누 민족은 전적으로 동화되었다”고 강연도중 발언하여 또한 문제가 되었다.

<보충2>조선반도의 문화가 일본에 준 영향을 고의로 무시하거나, 가능하면 과소평가하려고 하는 경향은, 고대의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거의 전부가 중국문화로 부터 왔다는 해석을 낳았다. 결국 조선반도의 역할은, 중국문화를 받아 그것을 일본에 건내준 단순한 중개역 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고대 일본의 외교관계를 말할 때, “견수사” (3회, 단 6회라는 설도 있음)와 “견당사” (16회)를 강조하면서도, “견신라사” (571 – 882년에 한하여 기록에 남은 것만 46회)와 “견발해사” (13회)에 관해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신라의 조선반도 통일 (676)후, 야마토조정은 반도와는 독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국가체제를 정비해 가는데, 신라와 발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절의 횟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야마토조정은 수나 당보다 훨신 많이 신라와 발해와 교섭을 갖고있었다. (발해는 현재 중국령이 되었으나, 고구려의 유민들이 만든 나라였으며, 한국과 북조선은 자국사의 일부로 보고있다).

마음속에 존재하는 바이어스를 우리는 평소 의식하지 못한다. 바이어스를 의식한다면 극복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이 바이어스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생각할 때, “當然의 前提”나 “사고의 기본적 틀”로 작용하므로, 일본사의 여러 사실을 “이 방향에서” 해석하고자 하게된다. 이 방향에서 해석되지 않는 일은 과소평가하거나, 또는 완전히 무시되고 만다.

내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때 배운 “繩文人 자연진화설” (지금도 이 설을 따르는 교과서가 적지않다)은, 이 바이어스에 따른 해석을 일본사에 적용한 사례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태고적부터 일본열도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일본열도에 옛날부터 살고있던 사람들이, 결국 자발적으로 국가를 형성하고, 황실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싶다” “일본의 문화는 옛부터, 조선반도의 문화보다 우월하였고, 조선반도에서 배운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라고 하는 거의 무의식적인 방향성에 따라 고대사를 해석하고 있다.

<주>고교의 역사교과서 채용문제로 몇번이고 매스컴을 장식한 “새로운 역사교과서” (扶桑社)는, 너무나 이 바이어스에 따른 역사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神話” (神武天皇의 東征傳承 P-36과 日本武尊 (야마토 다케루노 미고토)와 오또다치바나 히메 (弟橘媛) p-42-43)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제시하는 등, (그렇지 않으면, 신화의 핵은 무언가의 사실이 있을 터이다라는 예견을 주는 것 같다.) 확신범적이고, (반무의식적인) 바이어스라기보다, 저자들의 “신앙”이 거기 표명되고 있다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정치적인 교과서이며, 지적 성실성이 추호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저자들의 의도는 “사실을 알린다”는데 있지않고, “애국자를 기른다”는데 있다. 이 양자가 모순될 때 “애국자를 기른다”가 우선된다.

2009년 1월 23일 금요일

39. 일본의 불교전래

북미대륙의 원주민 대신 오늘날의 미국을 차지한 유럽의 이주민들은 원주민과 시종 갈등과 긴장관계였다. 2세기 무렵의 백제와 일본열도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이주민이 월등한 문명과 무력을 가지고 토착민을 제압했으리라. 백제인이 말(馬)을 들여오기 전 일본에는 말이란 동물이 없었다고 한다. 장창을 흔들며 말을 타고 달리는 백제왕자 스사노오 (Susanoo, ? – 214)나 오호쿠니 누시 (Ohokuninushi, 大國主神, ? – 234)를 본 원주민들은 아마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일본열도의 원주민은 이때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을 처음 보았으리라. 2세기의 인물 스사노오, 2 - 3세기의 오호쿠니누시, 4세기의 야마토 다케루 (Yamato Takeru,日本武尊, 295 – 374)), 이들 모두가 신화속에 잠 들어있으나 백제왕실에서 파견된 왕자들이다.

대강 2세기부터 백제는 국가정책으로 대대적으로 일본을 개척해 나갔다. 강원도 소시모리(牛頭州)를 떠나 일본 이즈모(出雲)에 정착한 스사노오(백제 초고왕, ? – 214)) – 오호쿠니 누시 (백제 귀수왕, ? – 234) – 야마토 다케루 (백제 근초고왕, 295 - 375) – 호무다 천황 (백제 근구수왕, 320 - 394)으로 이어지는 백제왕실의 정복전쟁은 2세기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백제인은 국지적인 토착세력을 하나하나 굴복시켜 4세기 말경 야마토라는 강력한 정권을 수립하였다.

국가의 조직화 능력이 없는 자연상태의 일본열도를 조직화의 노하우를 먼저 터득한 백제왕실이 규합해 나간 것이 이 시대의 역사이며, 일본사서에 많이 나오는 용어로 쿠니쓰쿠리(國作)에 전념하여 倭를 세우고 군림한 사람들이 백제인이었다. 일본의 고대역사 기록에서 백제인에게 귀화인이나 도래인이란 말은 적당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래인의 숫자가 원주민보다 훨신 더 많았다고 하며, 백제인은 일본역사에서 타자(他自)가 아니라 즉자(卽自)적 존재이며 지배계급이었다. 이 시대 백제사람과 倭人간에 통역없이 말이 통하였다고 전한다.

근래 형질인류학이나 분자인류학등이 발전함에 따라 골격이나 두개골의 형상과 치형, 또 DNA등의 엄밀한 검사가 가능해졌는데, 비교검사결과 일본의 원주민과 도래인은 같은 인종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이 분석결과 일본인의 원주민과 도래인의 비율은 3 : 7 또는 2 : 8정도로 추산한다. 한반도의 신라, 또는 고구려사람들도 일본으로 이주했지만 국가가 개입했다는 흔적은 없다. 가야사람들은 지정학적 근접성 때문에 옛부터 많은 왕래가 있었고 많은 이주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백제는 왕실의 정책으로 일본을 경영코자 계획적으로 대량의 인력을 일본으로 이주시켰다.

한반도에 가까운 九州와 긴끼(近畿)지방에서 시작하여 소수의 원주민과 다수의 백제인이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섞여 살았다고 봐야한다. 일본인은 백제인인 것이다. 서기 663년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의 일본역사는 독립된 역사가 아니라 백제역사의 일부로 봐야하지 않을까? 일본서기는 백제의 기존역사서를 기본으로 하여 일본측 기록을 짜 집기해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이해해야만 한일 양국의 고대사를 있는그데로 볼 수 있다. 백제인이 조직적으로 들어오기 전의 일본은 문자 그대로 순박한 원시의 평화로운 섬 나라였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자존심 상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백제가 착취를 목적으로 열도를 지배하려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백제는 군림하되 합병하지는 않았다. 수 많은 가야의 작은 나라들이 독립을 유지하면서 백제와는 공존의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열도의 각 지방에 흩어진 토착호족 세력과의 관계 역시 가야의 관계와 비슷했으리라. 백제의 담로제란 그렇게 느슨한 공동체같은 것이었다.

단지 조직화되지 못 한 원주민들을 백제의 인력, 선진기술과 문물로 조직화 해 나간 역사, 그것이 백제의 야마토 경영이었고 아스카문화였다고 본다. 야마토(倭), 아스까 (飛鳥)또는 나라(奈良)라는 명칭보다 요새말로 New Kudara(新百濟)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그런 관계가 백제와 일본의 관계였다. 이주한 백제인들은 일본의 여러 곳에 구다라 (百濟)란 이름을 붙였다. 百濟宮, 百濟寺, 百濟川, 百濟郡, 百濟觀音, 百濟大井 하는 식으로….
이 시대의 이민정책, 문화정책, 율령제도에서 불교의 전래까지 모든 것이 백제왕의 정책이었다. 서기 587년 불교의 전래를 둘러싸고 소가씨등의 숭불파와 모노노베노 모리야등의 배불파의 암투가 있었던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식으로 당시의 역사를 보는 것은 국지적인 안목에 불과하다.

당시 백제왕의 의중을 읽고있던 세력과 읽지 못한 세력이 있었을 뿐이라고 본다. 소가씨는 헌신적으로 백제왕을 따르는 그룹이었고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소위 국제감각이 없는 그룹이었다는 것 뿐이다. 불교는 이 시대 이미 백제의 국교이므로 백제의 위덕왕은 불교를 수용하여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도록 동생인 일본천황들을 압박하였을 것이다. 소가씨가 무력으로 모노노베노 모리야을 죽이고 배불파를 제거한 것이 어찌 소가씨 혼자의 결단이겠는가?

백제 위덕왕은 일본의 敏達, 用明, 崇峻천황의 형님이며 推古천황의 오빠이다.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던 위덕왕은 적극적으로 일본에 불사를 일으키는 것을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소부리(所夫里, 부여의 백제시대 이름)의 구드레 포구 (현 부여시 구드레 공원일대, 구다라의 어원이라고 생각되는 한국말) 에서 일본의 나니와 (難波 – 현 오오사까) 에 이르는 뱃길은 백제의 인력과 물자를 실어 나른 하이웨이였다. 불교의 전래란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대규모적인 문물의 전래를 수반하였다.

일본의 불교전래기원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일본서기”는 552년 欽明天皇 13년 (552) 백제 성명왕이 조정에 사자를 보냈는데 그 중 한명이 누리시치게이 (怒唎斯到契)로 금동제 석가불 1체, 번개(幡蓋, 하타키누가사), 경론수권을 헌상하였다. “上宮聖德法王帝說”이라는 서물은 8세기초 성립하였다 하는데 일본서기와 비견되는 서적으로 주로 성덕태자의 전기가 적혀있다. 이 책에 의하면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欽明天皇 시대(538) 백제국의 주명왕 (성명왕)이 처음으로 건너와 불상, 경교(經敎), 僧等을 바쳤다고 나와있다.

577년 일본서기 기술에 의하면 “敏達天皇 6년 (577) 11월 백제국왕은 귀국하는 사신 大別王(오호와께노기미)등에게 경론 약간권, 律師, 禪師. 비구니, 呪禁師(쥬곤노 하까세), 조불공, 造寺工의 6인을 바쳤다. 그리하여 나니와(難波)의 오호와께노 기미의 절에 안치시켰다.

584년 9월 백제에서 鹿深臣(가후카노 오미)가 미륵보살 석상 1체와 佐伯連 (사에끼노 무라지)가 불상 1체를 가져왔다. 소가노 우마꼬가 전국에 수행자를 구하더니 하리마(播磨)에 惠便이라는 고구려 사람을 찾아내 불교의 스승으로 하고 3명의 소녀을 출가시켜 여승으로 하였다. 또 자기 집 동쪽에 불전을 건립하고 미륵보살의 석상을 안치하였다. 또 우마꼬는 石川( 이시가와)의 자택 – 石川精舍에도 불전을 짓고 불상을 안치했다. 585년 오호노노 오까 (大野丘)에 탑을 건립하였다.

587년 소가노 우마꼬 (蘇我馬子)는 무력을 의지하여 배불파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를 죽이고 불법흥륭을 목표로 본격적인 사원건립에 착수한다.

崇峻天皇 원년 (588) 백제가 외교사절이며 승려인 혜총(惠總)등 6인의 승려을 파견하여 불사리를 헌상했다. 이때 6인의 승려와 함께 寺工2인, 爐盤工1인, 瓦博士 4인, 화공 1인도 동시에 보냈다.”는 내용이 보인다.

588년 崇峻원년 최초로 건설된 것이 아스카촌 (明日香村)의 法興寺이다. 불법흥륭에서 두 글자를 따 法興寺라 한 것이다. 백제의 위덕왕은 백제의 정림사 (定林寺), 능산리사 (陵山里寺), 왕흥사 (王興寺)를 건축한 기술자를 보내,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기둥을 초석위에 세우는 백제의 최첨단 건축기술을 과시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사원으로 인하여 기와지붕을 처음 보았고, 주춧돌위에 세워진 기둥을 처음 보았으며 (이전에는 땅을 파고 기둥을 땅 속에 묻었다), 백제의 선진문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593년 推古원년 탑의 심초에 불사리을 안치하고 심주를 건립, 596년 推古 4년 주요가람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거행한다. 이때 백제에서 들어온 기술자들이 그데로 일본에 살게 되니 인력, 기술과 문명의 도입이 동시에 진행된다.

593년 推古 원년 나니와의 아라하까(荒陵)에 시덴노지(四天王寺)건립에 착수한다. 594년 推古2년 “불법흥륭의 조(詔, 미고토노리)”가 발표되어 각지에서 사원건설이 경쟁적으로 시작된다. 생명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받은 은혜가운데 가장 큰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고, 불상을 가까이 모시고 명복을 빌것을 장려하였다. 일본의 불교신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603년 추고 11년 야마시로(山城, 京都 南部)에 고류지(廣隆寺), 이까루가(斑鳩)에 호류지 (法隆寺) 건립에 착수한다. 고류지는 京都市 太秦(우즈마사) 에 있는 秦(하타)氏의 氏寺로 京都最古의 사원이며 국보인 미륵보살반가상을 가진 사원으로 유명하다. 추고천황 11년 (603) 황태자가 “내게 존귀한 불상이 있는데 누가 이것을 예배하겠느냐고 묻자 귀화인계의 호족 秦河勝 (하다노 가와까쓰)가 이 불상을 받아 蜂岡寺 (하치오까데라)를 세웠다한다.

推古천황 31년 (623) 신라와 임나의 사자가 내일(來日)하여 미래불의 불상을 葛野秦寺 (가도노하다데라)에 안치했다. 하치오까데라와 가도노 하다데라는 고류지의 다름 이름이다. 또 무로마치(室町)시대 편찬된 廣隆寺由來記에 백제의 불상이 황태자에게 바쳐졌다는 기록이 있어 廣隆寺 불상이 백제에서 왔다는 학설의 근거가 되었다. 황실의 대대적인 장려에 힘입어 불교는 비약적으로 신장되었고 推古 32년 (624) 사찰 46개, 승려 816인, 여승 569인으로 집계되었다.

현재 오오사까에 본사를 두고 사원건축 설계 시공 문화재건조물의 복원 수리등을 특기로 하는 金剛組 (Kongo Gumi)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143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회사이다. 아스까(飛鳥)시대 敏達천황 6년 ( 578) 창업된 회사라고 팜프렛에 기록하고 있으며 호꼬지(法興寺)를 건축하고 일본에 남아 시덴노지(四天王寺), 호류지(法隆寺)등의 사원을 건축한 백제의 기술자들이다. 현 오오사카 성 ( Osaka Castle, 大坂城)도 그들의 작품이다. 그로부터 40대 후손이 지금 회사를 맡고 있다 하니 백제 위덕왕의 시대와 21세기의 오늘은 면면히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아스까 문화를 두고 그 문화의 주역이 일본인지 백제인지 지금와서 다투는 건 今으로 古를 보는데서 생긴 오해이다. 古에서는 이들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2009년 1월 17일 토요일

38.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2)

일본은 역사의 시대구분을 繩文時代 (Jomon Period, 14000 – 400 BC), 彌生時代 (Yayoi Period, 400 BC – AD 250), 古墳時代 (Kofun Period, 250 - 538), 飛鳥時代 (Asuka Period, 538 - 710), 奈良時代(Nara Period, 710 – 794), 平安時代(Heian Period, 794 – 1185), 鎌倉時代(Kamakura Period, 1185 – 1333)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연재에서 彌生時代, 古墳時代를 지나 지금 아스까 시대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야마토조정(倭 또는 大和朝廷)이라고 하면 위의 古墳시대와 아스까시대가 포함된다. 백제의 인물들을 이 시대에 대입하면, 스사노오(肖古 또는 建速古, 素盞鳴尊, Susanoo) 150년경, 구수(仇首 또는 貴須) = 오호쿠니누시 (大國主神) 170- 200년경이 된다. 일본서기는 이 시대를 가미요(神代)의 신화로 처리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사람의 역사로 처리되는 첫번째 인물, 神武天皇(Emperor Jimmu)을 BC 660년경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으나 우리는 194 – 256년대의 실제 존재했던 인물로 본다.

이 보다 후대의 백제 근초고왕은 346 – 375년간, 50세에서 79세까지 왕위에 있었다. 20대에서 50세때까지 그는 일본에 있었는데 그의 활약상이 야마토 다케루(日本武尊)의 신화형식을 빌어 일본서기에 남겨져 있다. 이 사람의 아들이 그 유명한 근구수왕이며 백제왕은 375 – 384년간, 54세에서 63세까지 10년밖에 하지않았다. 나머지 세월은 일본의 應神天皇(Emperor Ojin)과 호무다천황(譽田天皇)으로 사실상 야마토의 건국시조이다. 근초고와 근구수의 부자가 백제와 야마토의 정상에 있던 이 시절부터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백제사람이 일본으로 이주되었다고 믿어진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 백제와 일본열도의 인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궁금하였는데 일본의 獨協의과대학교 독일어 문법교수, 테라카도 신(寺門 伸)교수가 2001년 쓴 “조선반도에서 일본을 바라본다 –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를 발견하였다. 이 글은 우리의 주제와 너무 어울려서 몇 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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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는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언어학의 입장에서, 그 친족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어를 공부해 보고, 나는 “일본에게 한국이란 무엇일까”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므로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주> 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란 정확히 말하면 “조선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의미한다. 현재의 한국과 북조선, 결국 조선반도 전체를 일괄하는 명칭으로 조선과 코리아가 생각되나 , 여기서는 - 문제가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 한국으로 대표하는 것으로 한다.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뿌리, 그리하여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립에 관련하여 여러 가설이 세워졌으나, (예를 들면 고교 교과서에 기록되어있는) 종래의 정설은 대강 다음과 같다. 태고적부터 일본열도에 살고있던 우리들의 祖先은 繩文文化라고 불리는 문화를 개화시켰으나 前 4세기무렵부터 대륙 또는 조선반도로부터 선진의 문화(彌生文化)를 받아들여 다시 발전하고 드디어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그 국가를 통치한 왕이 현재의 황실의 祖이다. 繩文문화의 담당자를 繩文人, 彌生문화의 담당자를 彌生인이라고 하면, 繩文人 = 彌生人이라는 것이 이 설의 주장하는 바이다. 繩文문화의 담당자였던 일본인의 선조들이, 대륙과 조선반도의 진보된 문화를 받아들여 彌生문화라고 하는 새로운 문명단계로 진입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년, 형질인류학과 분자인류학, 바이러스학등의 발달과 더불어 골격이나 두개골의 형상과 치형, 그리고 바이러스와 DNA등에 의하여 엄밀한 비교가 가능하여졌고, 그 결과 繩文人과 彌生人은 도저히 동일인종이라 볼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학자의 하니하라 가즈로오(埴原和郞, 1927 – 2004)씨는 “이중구조모델”이란 가설을 제출하고있다. 좀 지루하나 “일본인의 뼈와 뿌리”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이 가운데 埴原씨는 繩文系와 渡來系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도래계란 彌生人을 뜻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일본인에게 북동아시이적 특징이 많은 것은, 도래집단으로 부터 받은 강한 영향 때문이리라. 다시 말하면, 도래인의 수는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했다고 생각하지않으면 설명되지 않는다. 현재 일본인집단의 형성사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지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단지 인류학적 연구성과에 의한 것 뿐아니라, 잇달은 고고학의 새로운 발견과 여러 유전자연구등에 힘 입은 바 크다. 이런 성과를 포함시켜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델이 적합할까. 일본의 구석기시대인과 繩文人은 원래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던 옛날옛적의 아시아인 집단 – 原아사아인 – 을 뿌리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 된다. 繩文人은 일만년이상의 장기간에 걸쳐 일본열도에서 생활하며, 온난한 기후에서 자란 독특한 문화를 성숙시켰다. 기후가 서늘해 짐에 따라 북동아시아 집단이 도래해 왔으나 , 아마 그들도 원래는 繩文人과 동일한 뿌리을 가진 집단이었으리라. 다른 점은 장기간에 걸쳐 극단의 한냉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냉적응을 이루어 그 祖先집단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륙에서 일본열도에의 도래는, 대략 繩文말기때 시작되었을까. 彌生시대가 되자 급히 증가하여 이후 7세기까지 거의 1,000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도래집단은 먼저 북부九州나 本州 일본해연안부에 도착하여, 도래인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조그만 나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그들은 동진하여 近畿지방에 이르고, 작은 나라끼리 항쟁을 거쳐 드디어 통일 정부, 결과적으로 朝廷을 수립하였다. 그후 조정은 적극적으로 대륙으로부터 학자, 기술자등을 받아들여, 近畿지방은 도래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토착의 繩文계집단을 동화하기위하여 북으로 남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여 일부지방에 정부의 출장소도 설치되었다. 도래계의 유전자는 이와같이 서서히 확산되었으나 繩文系와 渡來系의 혼혈은 近畿로 부터 멀어질 수록 희박해진다. 현대에 보이는 일본인의 지역성은 양 집단의 혼혈의 농담에 의해 설명된다. 혼혈이 거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北海島과 남서제도에 繩文系의 특징이 농후하게 남겨 진 집단이 살고 있는 것도 같은 원리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일본인의 뼈와 뿌리에서)

이 “이중구조모델”가설은 현재 거의 학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것 같다. 이 설에 새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繩文문화의 담당자와 彌生문화의 담당자는 인종적으로 다르며, 현재의 일본인은 繩文인과 彌生인의 혼혈이다. (관서와 관동과 같은) 일본의 지역에 따른 문화적 차이는 양 집단의 혼혈의 비률의 차이로 설명된다.>
<彌生문화의 담당자는 渡來人들이며 近畿지방에 최초의 통일정부(조정)을 만든 것이 이들이다.>

현재는, 전에 말 했듯이, 인골(특히 두개골과 치형)과 DNA의 해석, 체내의 바이러스의 조사등으로 인종의 차이를 엄밀히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성과에 의하면 현재 일본인중 繩文人과 彌生人의 비율의 평균치는 “3대7”정도라 한다. ( “2대8”이라는 설도 있다.) 彌生人을 도래계라 부른다면 繩文系는 토착계라 할 수 있으므로 도래계의 비율이 토착계의 2배이상이라 할 수 있다.

<주>繩文人과 彌生人이라 하여도, 인류학적으로 말하여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이 그러 하듯) 대개 단일민족일 리는 없으므로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繩文문화과 彌生문화를 담당한 母 集團 (=동일한 문화를 담당한 인종적으로 동일한 다수파집단)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은 존재하므로 그것을 繩文人이나 彌生人으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해연안에서 발굴된 많은 유적으로 볼 때, 도래계인 彌生人들이, 주로 조선반도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어와 한국어 (=조선어)가 “기분나쁠 정도의 유사성”과, 일본인과 한국인의 멘탈리티의 친근성으로 봐서, 繩文문화가 일본문화에 준영향 (또는 남긴 영향이라 말하는 쪽이 정확할 지도 모름)은 종래 생각하여오듯 그렇게 크지않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주>국립민족학박물관교수의 고야마 슈우조(小山修三, 1939 - )씨는, 고대 일본인구의 추이를 통계학적 처리에 의해 추측하였는데, 일본의 인구는 繩文시대 말기에 한번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彌生시대에 들어와 폭발적인 증가를 보인다고 한다. 이 점도 일본문화와 일본인의 뿌리를 탐구할 때 참고가 될 것이다.

<주>”선사시대의 인구와 인구밀도”와 “선사시대의 인구추이”를 보면, 繩文시대의 초기 (8천년전, 20,100명)로 부터 전기 (6천년전, 105,500명)에 걸쳐 인구가 급증, 중기 (4천 3백년전, 261,300명)에 피크를 맞는다. 그후 감소하여, 웬지 만기 (3천년전, 75,800명)에 들어서는 중기의 3분의 1이하에 해당하는 7만5천인대까지 떨어진다. 이것은 괴멸상태로고도 할 수있는 인구붕괴이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彌生시대 (2천년전, 594,900명)에는 8배가까운 59만인대로 격증하고있다. 다시 그로부터 700년이 경과한 奈良(土師期, 5,399,800명)시대가 되자 열배 가까이 불어난다. (쿠마모토 히로히코( 隈元浩彦, 1961 - ) “우리들은 어디서 왔는가”매일신문사 P.139)

정직히 말하면, 계산할 당시, 내 자신, 외부에서의 인구유입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벼 농사를 시작한 영향 때문일거라고 생각하였다. 하니하라 (埴原)씨가 이 숫자를 보더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 증가률은 너무 높다고 지적하였다. 역시 거대한 무리의 도래인이 열도에 들어왔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하니하라씨란 일본인의 “이중구조모델”론을 제기한 東大명예교수의 하니하라 가즈로오(埴原和郞, 1927 – 2004)씨를 말한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네, 그래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인구가 彌生시대가 되어 급격히 늘어나고 있어요. 한번 인구가 줄어들면 좀처럼 회복되기 힘 든 법이지요. 빠찡꼬나 경마를 할 때 계속 지면, 돈을 꾸어오더라도 본전 찾기 힘들거든. 그와 같은 이치지요. 지금 외부로 부터의 인구유입이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한번 인구가 감소경향에 진입하면 본래의 수준으로 회복하기 힘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彌生시대에 들어 인구가 급증한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小山씨는 埴原씨와 마찬가지로 바다건너 도래한 사람들에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同書 P.141)

2009년 1월 9일 금요일

37. 聖德太子 ( Shotoku Taishi )



백제 위덕왕의 장자 아좌태자 (일본명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의 기록이 일본서기 597년 기사로 나와있고, 일본에 성덕태자의 초상화가 전해 오는데, 아좌태자가 그려 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일본의 만원권 지폐에 이 초상화의 성덕태자상이 인쇄되어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위작이라는 논란에 쌓여있다. 혈연상 아좌태자는 성덕태자의 사촌형이며 당시 장손집안의 장손이었으므로 왕위계승 서열상 차세대의 리더로 추앙받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598년 아좌태자는 부왕보다 한달 먼저 사망하였다. 2007년 부여 왕흥사사지에서 발굴된 사리함 기록으로 위덕왕은 577년경 아들을 잃었다 하므로 위덕왕은 생전에 아들 둘을 잃은 것이다.


2008년 2월 10일 “다시 쓰는 聖德太子像”이라는 東京新聞 사설에 주목한다.

실재에서 비실재로, 성덕태자상을 대부분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戰後 역사학이 도달한 성과임과 동시에 진실추구의 학문이 갖는 비정함이라고나 할까. 성덕태자를 모르는 일본인은 없다. 교과서풍으로 말하면, 6세기말부터 7세기전반의 아스까시대, 일본의 전통정신위에 불교와 유교의 외래사상을 터득하여 일본의 국력과 문화를 비약적으로 높여 세계의 선진국으로 진입시킨 것이 황태자였다. “융화가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라는 가르침,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그윽한 사랑의 눈길, 태자의 말씀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世間虛假 唯佛是眞” (인간세 허망하고 부처만이 진리이다)라는 무상관(無常觀)등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데……

그러나 근래의 실증적 역사학이 도달한 결론은 성덕태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결말이 날 것같다.

일본서기에 聖德太子 (574 – 622)라는 이상적인 성인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아왔는데 최근 성덕태자의 실재성을 의문시하는 새로운 연구성과가 나와,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오오야마 세이이치 ( 大山誠一, 1944 - )가 저술한 “성덕태자의 진실”은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성덕태자 관련자료에 역사적사실은 전무하며 모두 후대의 창작임이 명료해졌다. 성덕태자는 가공의 인물이다. 성덕태자란 가공의 인물을 처음 창조한 것은 일본서기의 편자이다. 일본서기의 편찬은 681년 시작되어 720년까지 꼭 40년이 걸렸다. 면밀이 관찰하면 推古시대의 긴요한 부분에 성덕태자는 등장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의 관련은 신중히 배제되어 있으나 일본인은 “황태자 섭정”이라는 명칭에 현혹되어 당시의 정치전반에 성덕태자가 연관되어 있다고 착각하여왔다.

성덕태자 연구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서기에 태자의 작품으로 내용을 기록한 “십칠조헌법”과 삼경의소 (三經義疏). 수 많은 전승과 자료 가운데 태자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업적을 든다면 이 두 가지로 한정될 수 있다. 이 중 십칠조헌법은 이미 에도(江戶)후기의 고증학자가 태자작이 아니라고 단정하였고, 戰前 쓰다 소우키치 ( 津田 左右吉, 1873 – 1961)박사가 내용, 문체, 사용언어로 봐서 서기편집자들의 창작이라 결론을 내린 일로 와세다 대학에서 쫒겨난 것으로 유명하다.

삼경의소는 불교의 주석서로 태자자필로 알려진 법화의소도 현존하지만, 이것도 돈황학 (敦煌學) 권위의 후지에다 아끼라 ( 藤枝 晃, 1911 – 1998) 京都大 교수에 의해 6세기 중국에서 저작된 것으로 논증되었다. 세상에 알려진 법륭사 금당의 석가삼존상과 약사여래상, 中宮寺의 천수국수장 ( 天壽國繡帳 )도 그 광배의 명문연구나 사용된 달력의 검증으로 태자시대보다 후대의 작품임이 확실시 되었다. 국어국문학, 미술건축사, 종교사분야에서도 실재성이 점차 부정되어, 史實로 인정되는 것은 用明天皇의 實子 또는 친족으로 우마야도 (廐戶)王이 실재하였고 이까루가궁 (斑鳩宮)에 살았으며 이까루가 데라 (斑鳩寺), 일명 호류지(法隆寺)를 세웠다는 정도이며, 성덕태자는 일본서기에 의해 창작되고 후세에 날조가 더해졌다는 결론이 학계의 대세이다.

태자상이 창작, 날조되었다면, 누가 무었때문에, 또 그 근원에 있는 일본서기란 무었일까가, 고대사회 해명의 촛점이 되는 것은 필연. 이 모든 의문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이 持統天皇 (645 – 703) 측근의 후지와라 후히토 (藤原不比等, 659 – 720)라는 것이 오호야먀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서기는 養老4년 (720) 완성된 最古의 正史로 그 편찬과정에 율령체제의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었다. 수, 당의 통일과 동 아시아의 대동란, 그에 따른 大化의 改新과 壬申의 亂을 거쳐 고대사회의 倭의 大王(오호기미)은 일본의 천황으로 바뀌었다. 대 변혁의 시대 일본서기의 임무는 새로 탄생한 천황의 역사적 정통성과 권위의 구축이었다. 그것이 다까마노하라(高天原) – 천손강림 – 神武天皇 (Emperor Jimmu) – 현 천황으로 연결되는 만세일계의 사상과 논리, 중국황제에 견줄수 있는 聖天子 聖德太子의 권위의 창작, 이렇게 일본서기는 정치적 의도가 삽입된 역사서였다.

일본서기가 전개한 사상과 논리는 천삼백년의 현실을 그 모습 그데로 현대로 잇고 있다. 헌법과 황실전범은 “황위는 세습”되며 “황통에 속하는 남계의 남자가 이를 계승한다”고 정해져 있다. 그러나 만세일계는 자기자손을 황위로 세우려는 持統天皇 (Empress Jito)의 지칠줄 모르는 집념과 후지와라 후히토 (Fujiwara Fuhito)의 구상에 의해 생겼고 父系原理도 일본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건국기념일에 영원할 듯 보이는 일본의 원리의 유래와 미래를 따져 보는 것도….

건국기념일, 2월 11일은 昭和 41년 (1966) 국민의 축일로 지정되어 1967년 2월 11일부터 적용되었다. 이 날은 일본서기에 神武天皇 ( Emperor Jimmu)이 즉위했다는 辛酉年春正月, 庚辰朔을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한 기원전 660년(660BC) 2월 11일에서 연유한다.

오호야마 세이이치 (大山誠一)교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성덕태자의 업적중에서 다음항목의 진실성을 부정한다.

관위 12계를 정하여 문벌주의를 배제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17조 헌법을 제정하여 천황중심의 국가이념과 도덕을 제시하였다.
오노 이모꼬(小野妹子)를 수나라에 파견하여 수나라와 동등한 외교관계를 열었다.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짓고, 소가노 우마꼬(蘇我馬子)와 함께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 가운데 1, 2, 3항은 이미 전회의 연재 “28. 왜왕 多利思北孤의 견수사” 에서 거론한 바 있다. 성덕태자 전설과 관련된 最古의 사료는, 法隆寺金堂의 약사상광배명, 석가상광배명, 中宮寺천수국수장의 명문등의 法隆寺관련사료와 일본서기에 국한된다. 통설로는 약사상 607년, 석가삼존상 623년, 천수국수장은 622년이후의 7세기전반에 제작되었다고 되어있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720년 완성된 일본서기보다 앞 선다. 따라서 일본서기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으나 실재로 그럴까?

법륭사는, 현재의 가람보다 오래 된 와까쿠사(若草)가람적이 발굴되었으므로, 우마야도황자(廐戶皇子)가 건립한 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일본서기 기록데로 우마야도황자 사후, 天智天皇 9년 (670) 法隆寺가 전소했다면, 현 法隆寺내에 있는 석가삼존상이나 약사여래상등도, 推古朝시대의 오리지날이 아닌 셈이다. 물론, 불상이 복제되었다 해도 명문이 당초의 내용을 정확히 전하고 있다면 성덕태자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사상광배명도 석가상광배명도 천수국수장명문도 사용된 언어가 후대의 것으로 우마야도황자시대의 문장이라고 보기 힘들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약사상광배명과 천수국수장명문에 “천황”이란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 천황이란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당의 고종(高宗)으로 서기 674년 때이다. 이 말이 일본에 들어 와 689년 아스까 기요미하라령 (飛鳥 淨御原令)에서 정식으로 채용되어 天武天皇에게 처음으로 天皇號가 붙여졌다. 이 시대보다 앞 서 “천황”이란 말을 기록한 목간도 출토된 적이 없다. 만요슈(萬葉集)에서도 持統帝이전의 노래에는 천황이라 할 때 大王(오호키미)이란 칭호가 사용된다. 수서왜국전에 전해 오듯 推古朝시대의 천황은 대왕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석가광배명에는 법황(法皇)이란 칭호가 보이는데 이는 천황과, 불전에서 석가를 뜻하는 법왕과의 합성어라고 생각되므로 석가광배명도 天皇號의 성립이후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외 이들 法隆寺관련사료에는 “法興元”과 같은 연호나 推古天皇의 화풍시호, 東宮, 佛師등 당시 사용될 리 없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점등을 고려하면 법륭사관련사료는 일본서기이후 성립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재 일본서기는 이들 사료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다.

일본역사상 성인의 반열에 드는 성덕태자를 일본서기에 기록하였는데 편찬자가 고의적으로 내용을 왜곡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서기의 왜곡을 짚어가며 외로운 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 가운데 일본학계에서도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양심적인 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이런 그룹의 학자들도 수나라의 배세청이 만나고 간 多利思北孤가 누구인지, 남송시대 왜의 5왕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만 통쾌한 답을 내 놓지 못한다.

추고 10년 (602) 신라 정벌군 대장 구메황자(來目皇子)가 2만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九州의 쓰쿠지(筑紫)에 상륙한다. 그해 6월 그가 병이 들어 다음 해 2월 사망하였다. 603년 4월 다기마황자(當麻皇子)를 다시 신라정벌군 대장으로 임명하고 7월 나니와(현 오오사까)를 출항하였다. 같은 달 다기마황자가 하리마에 도착하였을 때 종군중이던 사령관의 아내 도네리히메 (舍人姬)왕이 죽어 아까시에 장사지내고 신라정벌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해 10월 推古天皇은 오하리다노 미야 (小墾田宮)로 옮겼다.

추고 10년 기록된 위의 기사는 매우 중요하다. 신라를 정벌하려고 602년 2만 5천의 군사를 九州에 보냈는데 603년 사령관이사망하였다. 신라는 핑계일 뿐이고, 多利思北孤의 구주백제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전쟁에 패배한다. 603년 7월 2차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하리마의 아까시에서 구주백제군의 반격으로 정벌군 사령관의 아내가 사망한다. 구주백제군은 아스카를 점령하고 推古天皇은 거처를 오하리다 궁으로 옮긴다. 推古天皇, 황태자 우마야도황자 (廐戶皇子, 성덕태자의 모델), 소가노 우마꼬(蘇我馬子)등 아스카의 지배자들은 구주백제왕 多利思北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후 推古天皇이 황위에 있었지만 아스카의 실재권력자는 구주백제의 多利思北孤였다. 推古天皇은 多利思北孤의 고모 할머니이므로 상징적인 황위가 허용되었고 그녀의 사망후 多利思北孤가 敍明天皇으로 부임한다. 그는 할아버지 위덕왕처럼 불교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고 불교의 흥륭을 지원한 왕이었다. 일본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아무도 多利思北孤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 多利思北孤, 敍明天皇, 백제 의자왕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일본서기에 603년 12월 구주백제의 관위 12계를 시행하고, 604년 4월 헌법 17조가 반포되고, 오노 이모꼬의 견당사 기사가 이어진다. 이렇게 7세기초 多利思北孤에 의해 세상이 바뀌었는데,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8세기초의 현실인식을 7세기초의 이 무렵에 삽입하여 일본이 관위 12계 – 불교흥륭 - 헌법 17조 – 견당사 파견 - 을사의 변 – 다이까노 가이신 (大化改新) - 중국의 선진문물 도입 – 율령국가의 확립에 자기조상들이 일관된 정책으로 국가에 공헌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을사의 변이라는 쿠데타의 주역, 나까토미 가마타리(中臣 鎌足, 614 - 669)의 아들, 후지와라 후히토(藤原不比等, 659 - 720)와 나까노 오호애황자의 딸 元明天皇(Empress Gemmei, 661 – 721)이 일본서기 편찬당시 권력자로서 자기 아버지들의 을사의 변이 일본의 근대국가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이 무렵 일본서기 기록이다. 거기 덧붙여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당의 고종에 비견될 성덕태자의 Fiction이 삽입되어 후대의 신격화가 이루어진다.

역사책에 씌여 있다 하여도 그것이 사실임을 보장받지 못한다. 진실한 뜻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2009년 1월 3일 토요일

36. 백제의 목간(木簡)


2008년 12월 3일 일본 아시히 신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 보냈다. 율령제도 중국 -> 백제 -> 일본?

성덕태자에 의하여 시작되어, 나라(奈良 )의 도읍에 이르는 고대일본의 현대국가 만들기, 그 프로세스가 한국 부여에서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보이기 시작했다. 부여는 나라시대 일본과 가까운관계에 있던 백제의 수도. 중국에서 탄생한 율령제도가 백제경유로 일본에 전 해졌을 가능성과 아스까 시대 불교의 원류를 밝혀줄 새로운 역사상이 수면에 떠 올랐다.

앞면에 3행60자, 반대편 2행 57자가 해독되었다. 부여에서 4월에 출토된 길이 약 30센티의 목간을, 국립역사민속발물관의 平川南 관장등은 보자마자 出擧(스이꼬)의 기록으로 판단하였다. 618년 일본에서 율령제도가 아직 시작되기 전, 성덕태자의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파종시기에 벼의 종자를 농민에게 빌려 주고 수확기에 이자를 붙여 회수하는 것이 出擧. 이런 종류의 대차(貸借)는 어느 농경사회에도 있었다고 생각되나 나라 – 平安期 일본의 율령제도하에서 국가의 재정의 기둥으로 자리잡았다. 세금으로 걷어들인 벼를 운용하여 지방관아의 운영이나 사원의 운영등 폭 넓은 사회활동이 이 이자에 의존하였다. 중국의 율령에서는 보이지않는 재정운용제도로 일본 독자적인 제도로 이해되어 왔다.

목간에는 다수의 인명과 숫자가 기입되어 있었다. 빌려 준 벼의 회수상황의 기록이었다. 함께 출토된 목간에는 外(木+京)部 라는 글자가 있다. 일본의 大藏省에 해당하는 백제의 관청이다. 발견장소의 바로 윗쪽은 관청지구로 일대에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가 있었을 것이라고 발굴을 맡은 백제문화재연구원의 박태우연구실장은 추측했다. “국고에 수납된 벼를 운용하는 출거의 기록이다”라고 히라가와 씨등은 판단했다. 서식도 일본의 출거목간과 공통이며 이자도 일본과 동일한 5할이었다.

“제도도 기록방법도 일본과 동일하다. 재정제도로서의 출거는 백제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와세다대학의 李成市 교수는 말했다. 이번 목간의 발굴로 출거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출토품 가운데 종이 두루마리를 붙인 타이틀인 제첨축 (題籤軸, 다이센지쿠)가 1점 포함되었다. 기록된 2문자를 히라가와 씨는 “여장(與帳)으로 판독했다. 출거목간에도 “與 (공여하다의 의미)”의 문자가 있고, 전후문맥으로 봐서 “회수할 수 없는 分”의 의미라고 히라가와 씨는 해석했다.

율령체제는 문자에 의한 정치제도이다. 중국에서는 율령행정문서에 종이를 썼는데 일본과 조선에서는 목간과 종이를 병용하였다. 정창원문서와 목간의 연구에 의하여, 개개의 출거의 대부, 회수등이 목간에 기록되나 빌려 간 상대가 사망한 경우에 면제하는 등 감수(減收)의 경우, 인명과 이유를 일람하여 종이문서로 보고하였다.

제첨축은 종이 문서가 존재했던 것을 의미하며 여장은 출거로 빌려 주었으나 회수할 수 없는 상대와 그 이유를 기록한 리스트의 두루마리였을 것으로 히라가와 씨는 본다. 목간과 종이를 어떻게 구분하여 썼을까. 고대일본과 백제는 동일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출거뿐 아니고 행정시스템 전체가 백제에서 들여 온 게 아니겠는가.

중국을 모델로 한 일본의 율령제도라 하나 중국과 다른 것도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행정의 최소단위. 일본에서는 50호이나 중국은 100호. 이 차이는 일본의 독자적인 사정때문일까 아니면 조선제국의 영향일까. 견당사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알려졌으나 도입의 구체적 과정은 알려진 것이 없었다. 백제의 관여를 생각하더라도 백제의 행정제도 자체가 파악되지 않았다. 외경부라는 관청은 중국 북조의 사서에 기록이 있을 뿐으로 이번 그 실재성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한국의 목간연구는 아직 일천하다.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원 이용현 씨의 조사로는 발견된 목간은 전국 통 털어도 500점 정도로 대부분 화물을 보낼 때 붙인 꼬리표. 백제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 발견을 포함해도 60여점. 약 20만점 확인된 일본의 연구에 촉발되어 목간학회가 작년에야 발족되었다.

부여의 고고학 조사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으나 왕궁지역 중심. 일반지역은 개발계획이 있으면 조사한다. 이번 발굴은 창고건설을 위하여 30미터 X 30미터정도의 면적을 발굴한 것 뿐이다. 부여에서 어느 정도나 조사가 이루어졌느냐고 박 실장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0.01퍼센트라 한다.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열쇠가 이 古都의 땅 속에 잠들어 있으리라는 기대가 부풀고있다.

2008년 7월 19일 한국의 연합뉴스는 상기목간 발굴결과를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백제문화제연구원이 백제 마지막 수도인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발굴한 백제시대 목간은 정부가 구황기에 곡물이나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이른바 환곡문서이며 이런 공문서로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공문서를 통해 6 – 7세기무렵 백제조정이 구황기에 곡물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사실도 명확히 드러났다.

문자학 전공인 경기대 연구교수 손환일 박사는 최근 발간된 학술잡지 한국사상과문화 43집에 투고한 “백제목간 좌관대식기 (佐官貸食記)의 분류체계와 서체”라는 논문에서 이 목간은 좌관대식기라는 제목이 적힌 공문서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쌍북리 공장 창고 예정지의 백제시대 저습지에서 발견된 목간은 백제 위덕왕 5년(558)이나 무왕 19년(618)중 하나일 가능성이 큰 무인년 6월에 좌관(佐官)이라는 정부관직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세 각종 곡물을 대여한 기록으로 이보다 훨신 후대이긴 하지만 조선시대 환곡제도의 원류로 간주할 수 있는 자료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환곡제도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백제시대에 곡물을 대여하면서 정부가 이자놀이를 했다는 사실이 이번 쌍북리 목간을 통 해서 드러난 것이다. 이와같은 이자놀이 문서는 삼국시대 이전 자료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일본측 기사에 비해 한국측 기사는 내용이 빈약하고 피상적으로 느껴져 어쩐지 가슴 한켠이 허전한 느낌이다. 한일간의 역사의 진실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학문의 깊이로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