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일 월요일

64. 阿佐太子


야마토타케루(倭建命, 295 – 375)와 應神天皇(320 – 394) 父子가 구축한 야마토 왕조는 6세기말 불교를 수용하면서 아스카(飛鳥)시대를 연다. 飛鳥時代란 6세기말부터 8세기초에 걸쳐 아스카(飛鳥)에 궁궐과 도읍을 두던 시대를 말한다. 예전에는 古墳時代와 한데 묶어 大和時代라 하던 때도 있었으나 요새는 古墳時代와 飛鳥時代로 나누어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飛鳥文化, 白鳳文化가 꽃 핀 시대이며, 이 시대에 倭国(倭)에서 日本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古代律令国家의 기초를 닦은 第38代 天智天皇(Emperor Tenji)과 第40代 天武天皇(Emperor Temmu)의 이름은 너무나 유명하다. 天智天皇(619 – 671)은 “大化의 改新”의 시발점이 된 “乙巳의 變”의 中心人物로서, 또 天武天皇(622 – 686)은 “壬申의 亂”의 주역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天智와 天武 兩帝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第34代 舒明天皇 (Emperor Jomei, 593 – 660)은 아들들보다 덜 유명하다. 그럼 天智와 天武의 할아버지는 누구일까? 일본서기에 의하면 第30代 敏達天皇(Emperor Bidatsu, 538 – 585)과 그의 황후 히로히메(広姫) 사이에서 출생한 嫡子 오시사카노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 (押坂彦人大兄皇子, 570 – 598)가 天智와 天武 両帝의 祖父라고 한다.

記紀는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생물년에 관해 아무 기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연령과 관련된 정보는 어머니가 서기 575년 사망했다는 것, 그의 장남 타무라황자(田村皇子, 敍明天皇)가 서기 593년 출생했다는 정도이다. 그와 관련된 역사기록도 극히 제한적이다. 그의 이름은 敏達天皇의 오호에황자(大兄皇子)로 기록되어 있다. 大兄皇子란 제1황자로 황위계승서열에서 최우선권을 가진 신분이다. 大化2년 (서기 646) 3월의 詔에 “皇祖大兄”이라 나오고 거기에 “彦人大兄”를 뜻한다고 주(註)까지 달려있다. 彦人大兄은 皇祖大兄으로도 불렸다는 것이다.

用明2년 (서기 587) 4월, 나카토미노 카쯔미(中臣勝海)가 皇太子의 像과 타케다황자(竹田皇子)의 상을 만들어 그들을 저주하였다. 위의 皇太子란 押坂彦人大兄皇子를 의미하며 用明천황 이후의 천황을 결정하는데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의 권력다툼이 한창일 때이다. 中臣勝海는 物部守屋의 사람이었고 그들은 아나호베황자 (穴穗部皇子)를 밀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던 中臣勝海가 히코히토 (彦人) 황자가 살고 있는 미타마노미야 (水派宮)를 찾아갔다. 中臣는 水派宮에서 나오는 길에 彦人皇子의 부하에게 살해된다.

서기 587년 6월 7일 카시키야히메(炊屋姬, 敏達천황비 후일의 推古천황)의 명을 받들어 蘇我馬子는 穴穗部皇子를 죽이고 8일 야카베황자(宅部皇子, 539 - 587)도 토벌한다. 宅部皇子는 宣化천황의 황자이나 穴穗部皇子(543 – 587)와 가까운 친구였으므로 죽였다 한다. 두 사람 모두 40대의 나이였다.

동년 추 7월 蘇我馬子가 諸皇子와 群臣들을 모아놓고 物部守屋 토벌을 논의한다. 泊瀬部皇子, 竹田皇子, 厩戸皇子, 難波皇子, 春日皇子, 蘇我馬子宿禰大臣, 紀男麻呂宿禰, 巨勢臣比良夫, 카시와데노 오미 카타부 (膳臣賀陀夫), 카쯔라기노 오미 오나라 (葛城臣烏那羅)등이 함께 軍勢를 이끌고 大連를 토벌하였다.

竹田皇子는 敏達과 推古사이의 황자 , 難波皇子와 春日皇子는 동모형제로 敏達의 황자, 우마야도황자(厩戸皇子)는 당시 14살로 聖德태자로 알려진 인물, 하쯔세베황자 (泊瀬部皇子, 530 – 592)는 곧 등장할 崇峻천황이다. 이렇게 당시의 황자들이 총출동하는 物部守屋의 토벌전에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彦人大兄皇子 570년 생, 타케다황자(竹田皇子) 573년, 우마야도황자(厩戸皇子, 聖德太子) 574년, 에쿠리황자(殖栗皇子) 578년, 오하리황자(尾張皇子) 580년으로 수 많은 사촌형제들이 있었다.

物部守屋를 토벌하고 동년 8월 2일 하쯔세베황자 (泊瀬部皇子)가 등극하니 그가 崇峻천황이다. 物部守屋라는 장애물이 제거되자 蘇我馬子의 독주가 시작되고 불교의 도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崇峻4년 (서기 591) 11월 4日,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大将軍에 임명하고 各氏族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副将, 隊長으로 하여 二万余의 軍을 딸려 筑紫에 出兵하였다. 키시노 카네(吉士金)를 新羅에 보내 任那의 건을 물었다.

崇峻 5년 (서기 592) 11월 3일 蘇我馬子는崇峻천황을 살해하고 당일 쿠라하시노 오카노 미사사기 (倉梯岡陵)에 매장하였다. 이 弑逆사건에 대하여 蘇我馬子는 아무 문책도 받지 않았고 계속하여 권좌에 있었다. 이는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의 의지에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다.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란 누구일까?

우리는 일본열도의 역사가 만세일계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거론되고 있는 시대에 세개의 권력주체가 존재하였다. 하나는 백제본국의 위덕왕, 또 하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의 천황, 세번째 주체는 열도의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九州百濟의 존재이다. 이 시대 야마토의 천황은 九州를 지배하지 못 하였다.

서기 591년 崇峻4년의 거병은 任那를 거론하고 있으나 이 시대 삼국사기는 2만의 왜인침입을 전하지 않는다. 구주백제는 백제의 무령왕 이후부터 백제의 직할지로 야마토의 상위에 있는 또 하나의 권력주체였다. 崇峻의 거병은 九州를 통합하고자 하는 목적이며 이는 백제본국에 대한 도전이다. 蘇我馬子가 崇峻천황을 살해하고도 끄떡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야마토의 상위권력이 九州百濟이며 구주백제의 상위권력이 백제본국이다.

이 전쟁은 야마토의 패배로 끝나지만 推古천황은 서기 602년과 603년 2회에 걸쳐 九州침공을 재차 시도하였으나 패배하여 九州백제의 정치제도를 수용한다. 遣隋使, 12관위제, 17조 헌법이니 하는 것들은 九州百濟의 제도였다. 이 정도면 推古 다음의 천황이 누가 될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견수사, 12관위제, 17조 헌법은 天智와 天武 兩帝의 아버지 多利思北孤 (훗날의 敍明天皇, Emperor Jomei)가 九州百濟에서 실시한 정책이었다.“야마토의 만세일계”라고 하는 하나의 권력주체로 역사가 설명되지 않으니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나조(謎,수수께끼)라는 말을 연발한다.

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聖德太子의 친동생)를 擊新羅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츠쿠지(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과 히로꼬의 첫 아들)가 다시 征新羅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히메왕 (舍人姬王, 흠명과 기타시히메의 제 13자)이 아까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서기 629년 推古死後 多利思北孤가 敍明天皇으로 즉위한다. 多利思北孤의 아버지 押坂彦人大兄皇子의 가계를 보자.

A. 妃:누카데히메 (糠手姫)皇女( 宝王 , 田村皇女, 敏達天皇의 皇女)
田村王(たむらのみこ、舒明天皇)
中津王(なかつみこ)
多良王(たらのみこ)

B. 妃:오호마타왕 (大俣王, 漢王の妹)
茅渟王(ちぬのみこ、智奴王) 皇極天皇=斉明天皇과 孝徳天皇의 父
桑田王(くわたのみこ、女性)

C. 妃:사쿠라이 유미하리 (桜井弓張)皇女( 桜井玄王, 敏達天皇의 皇女)
山代王(やましろのみこ)
笠縫王(かさぬいのみこ)

D. 妃:오하리타 (小墾田)皇女(敏達天皇의 皇女)

彦人大兄皇子는 4명의 비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3명이 敏達의 황녀이다. 彦人역시 敏達의 大兄皇子로 되어 있으면서 3명의 동부자매와 결혼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彦人는 敏達의 아들이 아니라 敏達의 다른 형제 누구인가의 혈통일 것이다. 敏達에겐 형이 있었다. 欽明과 石姫皇女 (宣化天皇의 皇女)사이에 태어난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 (箭田珠勝大兄)皇子가 敏達의 同母兄이다. 箭田珠勝大兄皇子는 서기 530년경 출생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흠명 13년 (서기 552) 여름 4월 箭田珠勝大兄皇子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 이유는 일본열도의 箭田珠勝大兄皇子는 죽었지만 백제의 왕자 餘昌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백제의 위덕왕이다. 우리는 위덕왕을 백제 성명왕의 長子로 알고 있다. 일본서기에 聖明王을 넣을 수는 없으니 성명왕의 왕자들은 모두 欽明의 족보에 올랐다. 欽明은 聖明의 동생이다. 그러다 보니 欽明의 자식과 부인이 일본서기에 꽤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왕자 餘昌이 箭田珠勝大兄皇子란 이름으로 欽明의 큰 아들로 일본서기에 올라있다.

이렇게 되면 彦人大兄皇子란 敏達의 황자가 아니라 백제 위덕왕의 왕자의 신분이다. 이제 야마토위에 九州百濟, 구주백제 위에 백제본국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彦人大兄皇子는 백제 본국의 위덕왕 사후 왕위에 오를 사람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위덕왕이 서기 598년 12월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서기 597년 4월 야마토에 들어 온 백제의 아좌태자는 法興寺의 완공을 축하하고, 불법을 일으키는데 더욱 매진하도록 독려 했을 것이다. 서기 598년 12월 백제 위덕왕이 사망하기 직전 아좌태자는 야마토에서 사망했다고 본다. 전도유망한 28세의 젊은이였다. 그런 연유로 위덕왕 사후 위덕왕의 한 물 간 늙은 동생들, 혜왕과 법왕이 자리를 메꾸었다.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다.

위의 彦人의 가계에서 “B. 妃:오호마타왕 (大俣王, 漢王の妹)” 부분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 기록 때문에 彦人大兄皇子의 출생을 서기 556년경으로 본 학자가 많았다. 齊明天皇이 601년생이므로 그 아버지 智奴王은 575년대, 또 智奴王의 아버지라는 彦人大兄은 550년경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舒明天皇이 彦人大兄의 嫡長子라 하였고 그는 서기 593년생이 확실하다. 그러면 彦人大兄皇子는 대강 서기 570년경 출생한 것으로 된다. 570년경 출생한 彦人가 601년에 齊明을 손자로 둘 수는 없다. 첫 아들을 593년에 본 사람이 어떻게 601년에 손녀를 보겠는가? 斉明天皇과 孝徳天皇의 아버지 지누왕 ( 茅渟王 또는 智奴王)은 彦人大兄皇子와 동연배의 백제의 또 다른 최고 권력자로 봐야 된다. 가장 적합한 후보자가 武王이다.

2007년 10월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왕흥사적의 목탑기초(심초석)부분에서 서기 577년 (위덕왕 24년) 제작되어 수납된 사리장엄구와 각종의 장식품등을 발굴하였으며, 완전한 모습으로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발표하였다. 왕흥사적 목탑은 실재하지 않으나 조사결과 가로 세로 1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었다.

사리용기에 백제왕의 이름이 각인된 명문이 발견되어 당시 역사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577년 2월 15일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 (위덕왕의 이름) 이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

이 명문에 의하여 왕흥사적의 사리장엄구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 창건되었다는 것,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년 이전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서기 推古 5년 (서기 597) 4월 백제왕이 왕자 阿佐를 보내 조공하였다. 일체의 군더더기의 기사도 없이 “百濟王 遣王子 阿佐 朝貢”의 10자의 기사뿐이다. 이 때 아좌태자가 聖德태자를 그렸다고 생각되는 당본어영( 唐本御影)이라고 불리는 “聖德太子와 二王子像”은 일본의 最古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고 法隆寺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1878년 호류지 헌납보물의 하나로 황실에 헌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阿佐太子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 기록이 있어서 아좌태자의 이름이 역사에 남았다.

“延喜式”諸陵寮에 彦人大兄皇子는 나라이노하카 (成相墓) 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으나 그 묘역의 넓이는 동서 15町, 남북 20町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광대한 면적이다. 敏達천황의 묘역이 동서 3정, 남북 3정이며, 천황으로서 가장 큰 묘역을 자랑하는 天智천황도 동서 14정, 남북 14정에 불과하다. 즉위도 하지 않은 황자에게 왜 그렇게 큰 묘역을 할당하였을까? 나라이노하카(成相墓)가 奈良県 広陵町의 바쿠야고분(牧野古墳)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한다.

바쿠야고분(牧野古墳)은 6세기 말경 축조된 것으로 보며,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고분으로 서기592년 암살된 崇峻천황의 능묘일 가능성이 높은 櫻井市의 天王山古墳, 서기587년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가 카시키야 히메(炊屋姬)의 명을 받아 주살한 아나호베황자(穴穗部皇子, 543 - 587)와 야카베황자(宅部皇子, 539 - 587)를 매장했다는 설이 있는 藤木古墳이 있다.

牧野古墳은 서기 1983년11월부터 1984년 2월까지 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가 発掘調査를 実施했다. 그 결과 직경 38 – 60m, 높이 약 13m의 3단 築成으로 건설된 원분으로 판명되었다. 석실의 규모는 아스카무라 (明日香村)의 이시부타이고분(石舞臺古墳)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石舞臺古墳은 蘇我馬子의 묘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할 근거는 없으며 牧野古墳을 蘇我馬子의 묘로 보는 견해도 있다.

후지노키고분 (藤ノ木古墳) 은 奈良県 이코마군(生駒郡) 이카루가쬬( 斑鳩町) 法隆寺西2丁目에 있다. 直径約48m 높이 約9m의 円墳으로 서기 1985년 第1次와 1988년 第2-3次, 3回의 発掘調査를 実施하였다. 法隆寺 西院伽藍에서 서쪽으로 약 350미터 떨어진 곳이다. 축조연대는 고분시대 후기, 6세기 말 (서기 576 – 600), 발굴조사 결과 직경 48m, 높이 약 9m의 원분으로 판명되었다.

석실과 석관이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횡혈식석실이며 가형석관(家形石棺)에 성인2명이 합장되어 있었다. 석관은 석실 안쪽에 있었고 석재는 아스카마을 서쪽의 니죠산(二上山)의 백색응회암으로 만들었다. 남과 북에 남은 유골을 보면 北人 신장 165센티 혈액형 B형의 남자가 확실하며 연령 17 – 25세 쯤, 南人은 유골의 보존상태가 나빠 남녀의 구분이 어렵다. 혈액형은 역시 B형, 연령 20 – 40세 정도, 뼈을 보면 남자처럼 보이나 발목에 발찌를 끼고 있어서 여자로 봐야 된다는 견해도 있다.

석관에서 유골과 함께 다량의 식물의 꽃가루가 발견되었다. 꽃가루를 분석하여 베니바나(紅花)의 花粉임을 알았다. 베니바나의 화분은 옛부터 염료로 씌였다 하며 방부제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꽃은 6월에서 7월에 걸쳐 피고 처음에는 선명한 노란색을 띄나 서서히 붉은 색으로 변한다.

石室内에서 갑옷(鎧) 철촉(鉄鏃)등의 武器, 武具, 金銅装의 馬具, 하지키(土師器) 스에키(須恵器)등의 土器類가 出土되었다. 그 가운데 装飾性 이 뛰어난 馬具類는 말안장(鞍金具)에 팔메트(Palmette), 鳳凰, 코키리(象), 鬼面등을 透彫한 類例없는 예술품이다. 石棺内의 副葬品도 豊富하여, 各種의 金属製의 玉類와 1万数千点을 넘는 유리구슬(玉) 등의 装身具, 冠, 신발(履) 허리띠(大帯)등의 金属製品, 四面의 銅鏡, 타마마키대도(玉纏大刀), 검(剣)등이 있다.

후지노키고분은 法隆寺 가까이 축조되어 오랫동안 法隆寺의 寺領으로 관리 유지되었다. 中世에는 미사사기야마 (陵山)로 불렸고, 江戸時代에는 法隆寺가 崇峻天皇陵으로 보았던 것 같고, 옛부터 천황릉으로 취급되어 도굴을 면하고 원래의 모습데로 남게 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를 부연하자면 서기 592년 11월 3일 崇峻천황 암살, 동년 12월 推古천황 豊浦宮에서 즉위, 593년 4월 나이 20세의 우마야토 토요토미미황자 (厩戸豊聡耳皇子) 를 皇太子및 섭정으로 지정, 596년 11 월 法興寺(飛鳥寺) 완공, 597년 4월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 ( 百済王遣王子阿佐朝貢), 599년 4월 심한 지진으로 건물이 파괴되어 신에게 제사 (地動 舎屋悉破 則令四方 俾祭地震神), 601년 2월 皇太子 이카루가궁(斑鳩宮) 건설착수, 605년 10월 皇太子 4년 8개월만에 斑鳩宮 완공. 607년 法隆寺 착공등으로 이어진다.

서기 598년 아좌태자가 이곳에서 사망했다면 당시의 섭정 聖德태자의 나이 25세이다. 아좌태자는 聖德과 사촌형제간이며 동년배의 가까운 사이일 것이다. 아좌태자의 장의행사는 聖德의 주관하에 진행되었을 것이며 후지노키고분은 聖德태자가 건축하게 되는 이카루가궁(斑鳩宮)과 같은 장소이다. 이는 聖德태자가 자기 땅에 아좌태자의 묘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天智天皇(619 – 671)과 天武天皇(622 – 686)이 일본황실의 주인이 된 이래 자기들의 할아버지의 무덤을 어떤 식으로든 관리되도록 조치하였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사연이 있어 후지노키고분은 도굴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일본에서는 후지노키고분의 피장자가 서기 587년 6월 처형된 아나호베황자(穴穗部皇子, 543 – 587)와 야카베황자 (宅部皇子, 539 - 587)로 추정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당시 두 사람은 40대의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