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89. 야마토(大和)와 큐우슈우(九州)간의 전쟁



일본서기는 야마토의 천황이 열도 전체를 까마득한 옛날부터 통치해 왔으며 천황은 진무(神武)이래 만세일계로 내려온 천손족으로 묘사하였다. 일본서기가 그리고자 하는 천황가는 열도를 지배할 배타적 권위을 가지며  누구로부터도 도전받지 않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러나 역사란 변화무쌍하여 때로는 큐우슈우(九州)가 야마토(大和)를 능가하는 권능을 갖거나 야마토를 무시하는 큐우슈우의 지배자가 등장하거나 또는 야마토를 공격하는 외국의 침략군이 큐우슈우를 정복하거나 하였다. 그리고 야마토와 큐우슈우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런 경우 사실대로 역사를 기록하면 천황가도 도전을 받았고 몇번이고 열도의 지배자가 바뀌어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황가의 만세일계의 존엄을 지키고자 일본서기는 어떤 식으로 야마토와 큐우슈우간의 전쟁의 역사를 기록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부레쯔(武烈) 6년(서기 504) 10월 쿠다라(百済)가 마나키시(麻那君)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천황은 쿠다라가 얼마 동안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이 수상하여 사자를 붙잡아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부레쯔(武烈) 7년(서기 505) 4월 쿠다라의 왕이 시가키시(斯我君)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그리고 특별한 문서를 제출하였는데 “이전에 파견한 마나키시(麻那君)는 백제국의 왕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새로 시가키시(斯我君)를 파견하여 삼가 봉사하도록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케이타이(繼體) 21년(서기 527) 6월 오우미(近江)의 케나노오미(毛野臣)가 6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임나(任那)에 가서 신라에게 패망한 남가라(南加羅), 토쿠코톤(喙己呑)을 탈환하여 다시 임나와 병합하려고 하였다. 이때 쯔쿠지(筑紫) 쿠니노 미야스코(国造) 이와이(磐井)가 은밀하게 반역을 도모하고 꾸물꾸물 세월을 보내며 일의 어려움을 겁내 틈을 엿보고 있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이와이에게 뇌물을 보내 케나노오미의 군대를 방해하도록 권하였다.

그에 편승한 이와이는 히젠(肥前), 히고(肥後), 부젠(豊前), 붕고(豊後)등을 억눌러 직무를 하지 않도록 하고 밖으로 해로를 차단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등의 나라에서 공물을 운반하는 배를 속여 빼앗고 안으로 임나에 파견된 케나노오미의 군대를 차단하고 케나노오미에게 항의하였다. “지금 너는 조정의 사자인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동료로 살을 비비며 같은 솥의 밥을 먹던 사이다. 사자가 되었다고 하여 네가 나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복종하지 않고 교전을 마다하지 않은 채 기세 등등하였다.

서기 527년 8월 천황의 조칙이 내렸다.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는 가서 이와이(磐井)를 토벌하라. 나가토(長門, 関門海峡) 동쪽은 내가 다스리지만 찌쿠지 서쪽은 네가 통치하고 상벌도 네 맘데로 해도 좋다. 일일히 보고하지 않아도 좋다.”

서기 528년 11월 대장군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는 적의 수령 이와이(磐井)와 찌쿠지(筑紫)의 미이노코오리 (三井群)에서 교전하였다. 양군의 깃발과 북이 상대하고 군세가 일으키는 먼지가 뒤섞여 서로 승기를 잡으려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드디어 아라카히(麁鹿火)가 이와이(磐井)를 베고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12월 찌쿠지노 키미(筑紫君) 쿠즈코(葛子)는 부친 이와이(磐井)의 죄에 연좌되어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카스야(糟屋)의 미야케(屯倉)를 헌상하고 죽음을 면해 주도록 청원하였다.

일본서기가 기록한 역사의 단편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서기 504년, 505년의 기사는 그 후의 역사기록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 밝히지 않았다. 서기 527년 오우미(近江)의 케나노오미(毛野臣)의 기사도 당대의 전체적 역사의 전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지 않고 단일 기사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528년 이와이(磐井)를 토벌하는 기사도 역사의 전개와 관련없이 단일 기사로 취급된다. 일본서기만 보면 이와이(磐井)라는 인물의 아이덴티티가 파악되지 않는다.

당시 실재로 있었던 역사를 복원하면 서기 504년 백제에서 파견된 쿠다라(百済)의 마나키시(麻那君)가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야마토와 대치하였고 505년의 백제의 왕족 시가키시(斯我君)가 마나키시와 합류하였다. 일본서기는 마나키시를 이와이(磐井)라는 위명(僞名)으로 기록하고 백제의 침략자라는 사실은 감추었다. 그들은 백제 무령왕의 명령을 받고 큐우슈우에 들어와 먼저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열도를 되찾을 사명을 띄고 있었다. 왜냐하면 서기 479년까지 시마왕(斯麻王)이 야마토의 주인이었으나 케이타이 시대의 야마토는 백제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서기 523년 백제의 무령왕이 사망한다. 524년 백제의 태자 명(明)이 즉위하여 성명왕(聖明王)이 되었다. 무령왕이 사망하자 야마토는 서두르기 시작한다. 526년 케이타이(繼體)는 20년간 도읍의 주변을 전전하던 유랑을 끝내고 이하레(磐余)의 타마호노 미야(玉穗宮)에 들어온다. 그리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큐우슈우 정벌을 단행한다. 527년의 오우미(近江)의 케나노오미(毛野臣)의 기사가 “남가라(南加羅), 토쿠코톤(喙己呑)을 탈환하여 다시 임나와 병합하려고 하였다”고 하는 것은 야마토의 큐우슈우 정벌시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일본서기의 변명이다. 천황치하의 큐우슈우가 천황의 적이 되었다는 것은 천황의 명예를 손상시키게 됨으로 큐우슈우에 출동하는 군대는 항상 신라나 임나를 목표로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신라가 이와이에게 뇌물을 보냈느니 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소설일 뿐이다.

실제로 이 전쟁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서기 527년 케나노오미(毛野臣)가 6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큐우슈우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528년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가 2차 정벌군을 지휘하여 큐우슈우를 공격하였다. 2차 정벌시 이와이 즉 백제의 마나키시는 전사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의 일부는 시가키시(斯我君)의 지휘하에 야마토를 공격하여 천황을 체포하였다. 서기 479년 시마왕(斯麻王)이 열도를 떠난 뒤 백제의 통제를 벗어난 야마토가 531년 성명왕 대에 다시 백제의 수중에 들어 온 것이다.

서기 532년 왕위에 오른 안칸(安閑, 466 – 535)은 즉위시 66세의 고령이었고 4년 후 사망하였다. 그가 바로 백제의 시가키시(斯我君)이다. 4년 동안 그가 한 일은 열도에 전무후무할 정도의 방대한 미야케(官家,屯倉, 屯家, 御宅>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서기 536년 안칸의 뒤를 이은 센카(宣化, 467 – 539) 또한 70세의 고령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서기 536년 5월 1일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린다.

“먹거리가 천하의 기본이다(食者天下之本), 황금 만 관(貫)이 있어도 배 고픔을 달랠 수 없고 진주 만 상자를 가진들 어찌 추위를 막겠는가? 쯔쿠지국(筑紫国)은 원근의 나라에서 조공하러 오는 곳으로 왕래의 관문이 되는 곳이다. 그래서 해외의 나라들이 조류와 천후를 관측하고 조공을 바치러 온다. 호무다천황(誉田天皇, 応神) 때부터 지금까지 곡식을 수확하여 비축하여 왔다. 흉년에 미리 대비하여 빈객을 환대하고 나라를 평안케 하느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그래서 아소노 키미(阿蘇君)를 보내 카와찌국(河内国) 만다군(茨田郡)의 미야케(屯倉)에 저장된 곡물을 운반토록 할 것이다. 소가노 이나메 대신(蘇我大臣稲目宿禰)은 오와리노 무라지(尾張連)를 보내 오와리국 미야케의 곡물을 가져오라.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大臣麁鹿火)는 니이노미노 무라지(新家連)를 보내 니이노미(新家) 미야케의 곡물을, 아베노 오미(阿部臣)는 이부키노 오미(伊吹臣)를 보내 이가국(伊賀国) 미야케의 곡물을 운반해 오도록 하라.

미야케(官家)를 나노쯔(那津, 博多大津)에 건설하라. 또 쯔쿠시(筑紫), 히노쿠니(肥国), 토요쿠니(豊国)의 3개의 미야케는 서로 멀리 떨어져 필요시 수송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모든 군(諸郡)에 명하여 나누어 운반하여 나노쯔(那津) 한 곳에 모아 비축하여 비상시 인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라. 시급히 군현(郡県)에 나의 명을 하달하라.”

안칸은 구신들이 소유하던 토지를 빼앗아 미야케를 전국적인 스케일로 설치하고 세무서를 독려하였다. 그리고 국가에서 소를 대량으로 방목하도록 하였다.  66세에 왕위에 올라 70세에 사망한 그가 무엇 때문에 기득권층의 저항을 무릅쓰면서 쫒기듯 그와 같은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을까?

센카(宣化)는 안칸이 전국에 설치한 미야케(屯倉)에서 생산된 곡물을 큐우슈우의 하카타(博多)로 집결시키는 물류 시스템의 긴급한 가동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전국에 산재한 미야케에서 곡물을 수송하여 쯔쿠시(筑紫)의 나노쯔(那津)로 집결시키고 있다. 일본열도의 미야케에서 생산된 곡물을 큐우슈우의 하카다 항에 집결시키는 것은 이 곡물들이 향할 목적지가 바다 건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본서기는 <서기 529년 3월 백제왕이 일본에 가는 사자가 바다 한 가운데 곶(海中岬)을 떠날 때 풍파에 시달리고 화물은 물에 젖어 손상이 심하니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津, 하동군 고전면)을 조공용 항로로 달라 하여 그렇게 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열도에서 생산된 곡물은 큐우슈우의 하카타에 집결시키고 섬진강 하구의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津)을 백제는 중간 터미널로 결정하였다. 가라 다사진의 곡물은 다른 선박에 옮겨 져 남해안을 돌아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 소부리(所夫里)의 구드레 포구(大王浦)에서 하역될 것이다.

성왕 16년 ( 538년)  백제는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 所夫里)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가 충청도까지 진출하고 신라는 국력이 신장되어 한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상황에서  전란이 계속되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백제는 도읍을 보다 안전한 남쪽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전란의 와중에 막대한 물자와 인력이 소요되는 수도이전 비용을 안칸과 센카가 열도에서 마련하기 위하여 전력투구 하고 있는 모습을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사비천도와 관련된 사업이라는 언질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센카시대의 하카타 항의 창고건설과 일본 전국에 걸친 운송 시스템의 확립은 안칸의 미야케 설치와 병행하여 동시에 추진되었을 것이다. 곡물의 수송과 적절한 관리를 위하여 큐우슈우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이 때부터 백제는 큐우슈우에 백제의 총독을 두었다. 총독이란 근세의 명칭이므로 큐우슈우의 백제왕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후 큐우슈우의 총독이 대부분 야마토의 천황으로 옮겨 갔다. 따라서 안칸에서 쿄오교쿠(皇極)까지의 100년 동안 선왕의 장자가 왕위를 잇는 전통은 열도에 없었다. 센카와 킨메이(欽明)도 야마토의 왕위에 오르기 전 큐우슈우의 총독이었으며 이 시스템은 서기 645년의 을사의 변(乙巳之變)까지 약 1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열도의 미야케에서 생산된 곡물은 백제왕실 소유이므로 서기 645년 까지 후쿠오카에서 열도의 곡물이 가라의 다사진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서기 528년 이와이의 난(磐井の亂)을 계기로 야마토와 큐우슈우는 백제가 통합하였다. 일본서기가 기록한 천황은 야마토의 왕이지만 새로이 백제의 총독이 큐우슈우에 주재하며 야마토가 생산한 곡물을 수집하여 백제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백제로서는 큐우슈우 총독이 백제의 곳간을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였다. 일본서기는 큐우슈우 총독에 관한 기사는 일체 다루지 않았다. 이와이의 난 이후 안칸(安閑, 531-535 재위), 센카(宣化, 536 – 539), 킨메이(欽明, 540 – 571), 비타쯔(敏達, 572 – 587), 요우메이(用明, 587 – 591)가 야마토의 왕이었던 약 60년 동안 야마토의 왕 – 큐우슈우의 총독 – 백제의 관계는 순조롭게 굴러갔다. 그러나 60년의 세월이 지나자 야마토의 왕과 큐우슈우의 총독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야마토는 531년부터 백제가 되었지만 그로부터 60여년의 세월이 지나자 원래의 백제인들은 사망하였고 야마토에서 태어난 백제인 2세, 3세들은 세월이 갈수록 백제인이라기 보다는 야마토 인이라는 감정을 갖게 되었다.  백제왕실 직계의 야마토 왕실 사람들과 백제인 3세였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 – 626)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야마토의 왕은 큐우슈우의 총독과 백제가 낙점하며 야마토에서 피땀 흘려 생산된 곡물은 큐우슈우의 총독에게 빼앗기는 처지였으므로 야마토의 불만이 쌓여갔다.

서기 553년 백제의 강력한 군주 성명왕이 전사하고 위덕왕이 즉위하였다. 위덕왕의 동생 세대의 비타쯔, 요우메이, 아나호베(穴穗部)황자, 스슌(崇峻), 스이코(推古)가 야마토에 있던 591년 큐우슈우 총독은 위덕왕의 장자 아좌(阿佐)태자였고 그는 차기 백제왕이 될 신분이었다. 아좌태자(570 – 598)의 또 다른 이름을 일본서기는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押坂彦人大兄)황자라고 기록하고 야마토의 계보에 맞추기 위하여 비타쯔(敏達)의 아들로 처리하였다. 큐우슈우의 우사시(大分県宇佐市)에 있는 우사신궁이 그가 주재하던 곳이다. 야마토의 요우메이 왕이 물러나고 다음 왕을 결정하는 591년 야마토와 큐우슈우간의 갈등이 표면화하고 야마토가 독립을 추구하였다.

비타쯔 사후 요우메이가 왕위를 잇는 586년부터 야마토는 소요사태가 계속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아나호베황자 (穴穗部皇子)가 비타쯔의 빈궁(殯宮)을 지키던 황후를 범하고자 하였다면서 무례(無禮)를 강조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소가노 우마코는 황후의 승인을 받아 아나호베 황자와 그와 가까운 친구 야카베(宅部)황자를 처단하였다. 또 모노모베노 모리야(物部守屋)를 토벌한다. 이 토벌은 불교 도입을 둘러 싼 투쟁인 것처럼 치부되었으나 불교와 관계없는 정치적 사건이다. 그리고 스슌(崇峻)이 왕으로 옹립된다.

위의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일본서기의 작전에 말려드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일관된 목표하에 역사를 해석코자 하므로 단편적인 사건을 천황가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데 유리하게 전개한다. 왕권을 두고 벌이는 암투, 큐우슈우의 총독과 백제를 향한 독립의 몸부림등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도록 적당한 구실을 붙여 역사를 썼다.

일본서기의 행간을 읽으면 위의 기록은 큐우슈우가 결정한 아나호베황자 (穴穗部皇子)가 차기의 왕이 되도록 되어 있고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큐우슈우의 결정에 따르고자 하였다. 그를 제외한 소가노 우마코, 비타쯔의 황후, 그리고 여러 황자들은 야마토 독립을 위하여 백제에 항거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아나호베와 모리야를 죽이고 야마토가 선택한 스슌(崇峻)을 왕으로 옹립한다. 큐우슈우 총독의 반격을 예상하면서 진행된 정변일 터이다.

드디어 야마토가 본색을 드러낸다. 서기 591년 4월 스슌(崇峻)천황은 “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된 임나를 재건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하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해 11월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각 씨족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부장( 副将), 대장(隊長)으로 하여 2만여의 군(軍)을 딸려  쯔쿠시(筑紫)에 출병하였다.  키시노 카네(吉士金)를  신라에 보내 미마나(任那)의 건을 물었다.

여기서 또 임나나 신라를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큐우슈우의 백제 총독을 공격하는 야마토의 선전포고를 일본서기는 이런 식으로 기록하였다.

스슌(崇峻) 5년 (서기 592)  10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스슌(崇峻)천황을 살해한 뒤 당일 매장하였고 11월 5일 큐우슈우 정벌군의 철수가 시작된다.  이 시역사건에 대하여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는 아무 문책도 받지 않았고 계속하여  권좌에 있었다.

야마토의 큐우슈우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소가노 우마코가 살아 남기 위하여 큐우슈우 총독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본서기는 서기 597년 4월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하였다는 기사를 남겼으니 큐우슈우의 백제 총독이 야마토를 순시했다는 뜻이다.

서기 592년의 전쟁은 야마토의 패배로 끝나고 스이코(推古)가 왕이 되었다. 큐우슈우의 동의를 얻어 그녀가 왕이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백제는 이 무렵 야마토에 대형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사찰의 건립은 백제왕과 큐우슈우 총독의 관할하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라(奈良)현 이카루가(斑鳩)에 현존하는 호류지(法隆寺), 오오사카의 시텐노오지(四天王寺)가 이때 큐우슈우 총독의 관리하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건설의 공로가 엉뚱하게 쇼토쿠(聖德)태자에게 넘어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후의 역사는 비극적으로 전개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서는 아좌태자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백제와 야마토의 역사의 전개를 보면 백제의 위덕왕이 598년 사망하고 아좌태자도 거의 비슷한 무렵 사망했다고 생각된다. 아좌태자의 나이 28세였고 그가 남긴 아들(훗날의 의자왕)은 5세였다. 후사가 없는 백제는 부랴부랴 위덕왕의 늙은 동생 혜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고 큐우슈우는 5세의 어린애가 총독이 되었다.

서기 592년 큐우슈우 정벌에 실패하여 식민지와 같은 대접을 받던 야마토는 위덕왕과 아좌태자의 사망이후 다시 저항을 시작한다. 서기 601년 11월 야마토는 신라를 침공할 것을 논의하였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였다. 매번 등장하는 것이 임나와 신라공격이다.

스이코(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聖德太子의 친동생)를 격신라(擊新羅)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쯔쿠시(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의 아들)가 다시 정신라(征新羅)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 히메왕 (舍人姬王)이 아카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591년 스슌(崇峻)의 큐우슈우 정벌의 실패에 이어 602년 스이코(推古)의 1차 정벌 실패 그리고 603년의 2차 정벌도 실패하였다. 오오사카에 인접한 아카시에서 정신라 장군의 아내가 전사했다는 것은 큐우슈우 군이 반격하여 야마토가 정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세부 묘사를 생략한 채 일본서기는 야마토가 큐우슈우에게 정복되었다는 것은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603년 49세였던 스이코(推古)천황은 손주 뻘인 큐우슈우 총독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고 계속 왕위에 있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았다. 수서(隋書)에 기록된 다리시북고의 나이 10세였다. 서기 628년 스이코(推古)가 사망하자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야마토의 왕이 되니 그가 죠메이(敍明, 593 – 660)천황이다. 큐우슈우 총독이 직접 야마토를 통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에 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글은 케이타이(繼體)에서 스이코(推古)까지의 약 75년 동안 야마토가 큐우슈우를 공격했던 기록을 발췌하여 일본서기가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살펴 본 것이다. 일본서기는 천황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야마토의 왕이 열도 내에서 벌인 전쟁을 은폐하면서 군대의 동원이 임나나 신라를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끝-





2014년 8월 29일 금요일

88. 磐井の乱のコペルニクス的転回



日本書紀は西紀536年宣化(467 – 539)が卽位したと記錄した. 宣化は繼體天皇の第二子であり安閑天皇(466 – 536)の同母弟である. 繼體天皇(450 – 531)は16歲で安閑, 17歲で 宣化, そして59歲で欽明(509 – 571)を産んだことになるが いろいろ疑問がのこる. その年二月もとのごとし大伴金村大連を大連物部麤鹿火大連を大連, 又蘇我稻目宿禰を大臣と 任命した.

蘇我稻目(506 – 570)という人物が歷史に始めて登場する. それも舊時代の巨物政治人大伴金村と物部麤鹿火と共に 蘇我稻目という政治新人が大臣と任命された. 蘇我氏はそれから 110年間大和の政治の實權を掌握した.

蘇我稻目は 欽明天皇と同年輩で同時代を生きたから彼が大臣と電擊拔擢されたのは彼の歲30位いである. しかし彼が誰 の子で, なにをしたか, どうして無名の人がいきなり大臣になったかについて日本書紀はなにも明かにしなかった.

蘇我稻目の系譜についていろいろと假說が出ているがそれを證明する根據はない. 4世紀の武内宿禰の子の中に 蘇我石川宿禰という人物があるから武内宿禰の後孫と見る假說もあるが信じ難くい.

西紀536年蘇我稻目(506 -570)の登場以來 蘇我氏は大和の政治的實權を握って大臣として天皇に奉仕しつづけた. 蘇我馬子(551– 626), 蘇我蝦夷(586– 645), 蘇我入鹿(610 – 645)まで4代110年の間倭の國政を左之右之したが645年 中大兄皇子が政變を起こして宮中で 蘇我入鹿を殺害し政權を奪取するに至って 蘇我4代の時代は終焉を告げた.

西紀536年 宣化の登極と共にその時まで無名であった 蘇我稻目がどうして大臣になって國政を主導する權力を持つ ようになったのか. その疑問は未だ答えられていない. この解說はその疑問に答えようと書かれた.

日本書紀が記錄した歷史の破片はあるほど信憑性が認められる. しかし前後左右の相關關係を明かにしないまま天皇制のイデオロギを確保する目標で歷史を恣意的に解釋したのが 日本書紀の本質である. 蘇我稻目と言う人名自體が當代の實名でなく後代の史家たちが作くった名前である. 蘇我という氏は勿論稻目, 馬子, 蝦夷, 入鹿の名も史家たちの創作と見た方がいい.

繼體(450 – 531)時代磐井の乱が起こった. 磐井という名も前後左右の說明なしに但一回の事件に出るばかりである. そして 磐井の Identityが把握できない. 磐井も史家たちが選擇した僞名であり日本書紀が記錄した事件の脈絡は創作にすぎなく 眞實でない. その時代登場する又一人近江毛野臣も僞名で實名ではない.

日本書紀は正史の記錄でなく天皇制という宗敎の爲に書かれた經典である. 經典に登場する人物たちが 前後左右 脈絡を 失なって別別の歷史の破片として存在するから文字資料に絡まれて歷史を見ようとしたら 歷史は見えない.

歷史の斷片的破片をパズルのように合わせるためにはもっと多い破片が要る.

雄略五年(461) そして加須利君は弟の軍君:コニキシ<昆支>に、「お前は倭に行って天皇に仕えよ」と告げた。軍君は、「国王の御命令であれば、断る理由はありません。願わくば、国王の夫人の一人を私に下賜していただき、同行させたいと思います」と答えた。加須利君は妊娠していた夫人を軍君に預け、「この夫人はすでに臨月に入っている。もし道中で出産したら、船に乗せてどこからでも帰国させよ」と告げた。そして日本に派遣した。六月。加須利君の言葉通り、夫人は筑紫の各羅嶋で出産した。それでその子を嶋君と名づけた。軍君は船で母子を帰国させた。これが後の武寧王である。

日本書紀の “倭に行って天皇に仕えよとが軍君は船で母子を帰国させた”という記錄は噓である. 日本書紀は武寧王母の名前を明からかにしなかった. しかし日本書紀どこかに 武寧王母の名前を殘したろうと思われる - 想像をも超越する方式で. それが飯豊皇女である.  嶋君を産んだ後彼女は昆支の愛を受け入れなく男と關係を持ってなかったと日本書紀は 證言する. 昆支も又純愛の片思いを一生貫いたとする. 昆支の又一つの名は日本書紀に淸寧天皇となっている.

日本古代史の中で子供の時から王位の正統性が認られる人物は二人しかない. 西紀369年の菟道稚郎子(後の百濟枕流王)と 477年の 宋書の倭王武がそれである. 嶋君, 倭王武そして百濟武寧王は同一人で日本書紀の雄略紀はすべてが創作である.

古事記の雄略紀に出る子供天皇の逸話と萬葉集卷一の一番先に登場する御製歌(おほみうた)は飯豊皇女の子嶋君の逸話で ある. 嶋君16歲の頃と思われる. その頃本物の雄略は生きていたならば59歲で飯事(ままごと)遊びする年ではない.


日本書紀武烈四年(502) 百済の末多王が横暴な振る舞いをし人民を苦しめた。国人はついに王を廃し嶋王を擁立し武寧王(在位502 - 523)とした。

西紀479年嶋君は叔父昆支と共に日本を離れた. 國を母飯豊皇女に任せて. 古事記雄略紀の赤猪子(あかいこ)はその時懷妊中であったと思われる. 嶋君がそれから502年まで何處でなにをしてたが分からない.

西紀504年(武烈6年)百済国が麻那君(マナキシ)を派遣して貢納した。天皇は百済国がしばらく貢納しなかったことに不審を覚え、使者を留めて帰さなかった。

西紀505年(武烈7年)百済の王が斯我君(シガキシ)を派遣して貢納した。特別な書状を添え、「以前に派遣した麻那君は百済国の王族ではありません。そこで、新たに斯我君を派遣し、謹んでお仕えさせます」と申し開きをした。その後、この者に子が生まれた。法師君といい、倭君(やまとのきみ)の祖先である。

日本書紀が無邪氣に504年, 505年記事を殘したとは思われない. この記錄たけではなんの意味もない記事である. 麻那君を留めて帰さなかったというのは彼が日本で一生を過したと讀める. 百濟の武寧王は麻那君と斯我君を派遣して列島奪還を始めた. 列島は彼が生まれた地である. 百濟軍は九州へ上陸し漸進的に影響力を擴大して行った. 九州全體を百濟軍が掌握するのに20年位かかったと思われる. と言うのは百濟は當時大軍を遣わす程に國力の餘力がなかった. 武寧王の念願は子聖明代に成就された. こんな巨大なる歷史の變轉を日本書紀は磐井の亂という小題目の中に隱してしまった.

大和は西紀485年頃から大伴金村が掌握しており繼體天皇は彼の傀儡に過ぎなかった. 法師君は百済の太子淳陀と同一人で後の欽明天皇をさす. 聖明と欽明の諡號の中の明は偶然の産物ではない. 斯我君は繼體から大和を接受した安閑天皇で旣存權力層の財産沒收を斷行, 全國的規模の屯倉を設置した.

523年百済の武寧王が薨じた. 524年百済の太子明が即位し聖明王となった. 武寧王歿後大和は急ぎ始める. 526年繼體天皇は都を遷して大和の磐余の玉穗に置いた. そして事態收拾のイニシアティブを握る. やがて九州征伐の戰爭の幕が開く.

527年6月近江の毛野臣(けなのおみ)が、兵六万を率いて任那に行き、新羅に破られた南加羅、喙己呑を奪還し、再び任那と併合しようとした。このとき筑紫国造磐井が、ひそかに反逆を企ていたが、ぐずぐずと年を過ごし、事の困難さを恐れて隙を窺っていた。新羅がこれを知ってこっそり磐井に賄賂を送り、毛野臣の軍を妨害するよう勧めた。これに乗った磐井は、肥前、肥後、豊前、豊後などをおさえ、職務を果たせぬようにし、外は海路を遮断し、高麗、百済、新羅、任那などの国が貢物を運ぶ船を欺き奪い、内は任那の遣わされた毛野臣の軍を遮り毛野臣に揚言した。

磐井> 今、お前は朝廷の使者になっているが、昔は仲間として肩や肘をすりあわせ、同じ釜の飯を食った仲だ。使者になったからといって、お前に俺を従わせることなどできるものか。

そして交戦して従わず、気勢盛んであった。毛野臣は前進を阻まれ、途中で停滞してしまった.

西紀527年 近江の毛野臣が兵六万を率いて任那に行き新羅に破られた南加羅と喙己呑を奪還し再び任那と併合しようとしたというのは建前で, 本音は九州征伐である. 527年の第一次九州征伐は百濟軍の勝利で終わった. この戰爭は527年6月から528年夏まで少くとも一年の間續いた. 新羅が磐井に賄賂を送ったとは日本書紀の創作である.

そして528年物部大連麁鹿火が二次九州征伐軍を引率し九州を攻擊する. 勝ったら筑紫より西は麁鹿火にやるとの繼體天皇の約束と共に.

天皇は大伴大連金村、物部大連麁鹿火、許勢大臣男人らに詔して言った。

天皇> 筑紫の磐井が反乱して、西の国を我が物としている。誰か将軍の適任者はあるか。
大伴金村> 正直で勇に富み、兵事に精通しているのは、いま麁鹿火の右に出る者はありません。
天皇> それが良い。
秋8月1日、詔して言った。
天皇> 物部麁鹿火よ。磐井が叛いている。お前が行って討てまいれ。
物部麁鹿火> 磐井は西の果ての狡賢な奴です。山河の険阻なのを頼りに、恭順を忘れ乱を起こしたものです。道徳に背き、驕慢で自惚れています。私の家系は先祖から今日まで、帝のために戦いました。人民を苦しみから救うことは、昔も今も変わりません。ただ天の助けを得ることは、私が常に重んずるところです。よく慎んで討ちましょう。
天皇> 良将は出陣にあたっては将士をめぐみ、思いやりをかける。そして、攻める勢いは怒濤や疾風のようである。大将は兵士の死命を制し、国家の存亡を支配する。つつしんで天誅を加えよ。
そして天皇は将軍の印綬を麁鹿火に授け、最後に詔して言った。
天皇> 長門より東は私が治めよう。筑紫より西はお前が統治し、賞罰も思いのままに行え。一々報告せずともよい。

528年冬11月11日、大将軍物部麁鹿火は、敵の首領磐井と、筑紫の三井群(みいのこおり)で交戦した。両軍の旗や鼓が相対し、軍勢のあげる塵埃は入り乱れ、互いに勝機をつかもうと必死に戦って譲らなかった。そしてついに麁鹿火は磐井を斬り、反乱を完全に鎮圧した.

12月、筑紫君葛子は、父である磐井の罪に連座して誅せられることを恐れて、糟屋の屯倉を献上して死罪を免れることを請うた。

戰爭は終ったが 物部麁鹿火が九州を取った證據はない. 磐井は戰死したと思われる. しかし磐井の子筑紫君葛子は生き殘ったと日本書紀は記錄した. 戰爭の後大和では天皇および皇太子、皇子皆死んでしまったとの百済本記を引用する.

日本書紀はこの時期の歷史を有りのまま記錄しなかった. 物部麁鹿火の勝利としながら大和の天皇は殺害され新しい王朝が出現する. 日本書紀は安閑(466 – 536)が繼體(450 – 531)の子と宣言したがそれはうそである.

二次九州征伐軍は當時大和が動員できる最大の兵力であろう. しかし 斯我君の百濟軍は二分して一部が空になっていた大和を攻擊, 手早く繼體天皇と大伴金村を逮捕して九州戰況を逆轉させ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磐井(百濟の麻那君)の百濟軍は物部麁鹿火の二次九州征伐軍を九州へ足止め, 斯我君の大和攻擊の轉機を生み出した. その中で 百濟の麻那君が戰死した.

西紀532年斯我君(安閑)が大和の王となった. 西紀536年宣化(467 – 539)が王となった. そして蘇我稻目が大臣と登場した.日本書紀は磐井の子筑紫君葛子が生き殘こったとした. 西紀504年九州に入った磐井が筑紫君葛子を産んたのは506年頃と見て差しつがえない. 日本書紀は 筑紫君葛子を蘇我稻目という僞名で記錄した. たから系圖なんか確かめるために日本書紀を見るのは無駄である. 蘇我稻目は磐井の子であり開國功臣として大和の實權を掌握した.

福岡県筑後市, 八女郡広川町, 八女市にまたがる東西約10数kmにわたる八女丘陵上に分布する八女古墳群がある. 八女古墳群を代表する岩戸山古墳は福岡県八女市にある九州地方北部では最大の 前方後円墳で6世紀前半に造られた 筑紫君磐井の墓と推定される. 文献から被葬者と築造時期を推定できる日本で数少ない古墳の1つである.

古墳は東西を主軸にして後円部が東に向けられている。2段造成で北東隅に「別区(べっく)」と呼ばれる一辺43メートルの方形状区画を有するという特徴を持つ.

敵の首領磐井の墓は九州地方北部では最大の前方後円墳で別区を持つ特異な構造である. 隅には石人石馬が堵列している. どうしても敵の首領の墓とは見えない. 大和朝廷の大臣を輩出しつづけた開國功臣に相應しい墓である. 蘇我氏隆盛期には大和朝廷から每年大勢の權力者たちが參拜したに違いない. 別区とはそんな時使う空間たったと 思われる.

平安時代の天台宗の僧皇円(? - 1169)によって書かれた歴史書『扶桑略記』によれば、法興寺の刹柱を建てた日に蘇我馬子ら百余人は百済の服を着用して参列したという. 推古天皇元年(592)の 出来事である。

「元年正月蘇我大臣馬子宿禰依合戦願 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島大臣並百余人 皆著百済服 観者悉悦 以佛舎利籠置刹柱礎中。」

推古元年正月に蘇我大臣馬子宿祢が合戦願いにより飛鳥の地に法興寺を建てた。 刹柱を立てる日に嶋大臣(馬子)並びに 百余人は、皆「百済服 」を着て現れ 、 それを見た人々は 悉く悦んだ .

蘇我馬子は百済の麻那君の孫である. 嶋大臣(馬子)並びに百余人は皆「百済服 」を着て現れそれを見た人々は 悉く悦ん だ . 信じたくないが當代大和は百済の他國でない. 百濟人が百済服を着てたのはなにも驚くことない. そんな歷史の 否定の上で成立したのが日本國である. 眞實を捨てて天皇制という幻を夢見て.

                                                                   – 終り-



2014년 6월 3일 화요일

87. 일본서기는 무엇을 노렸나?



고사기는 서기 712 5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 ? 723) 3권의 책으로 만들어 천황에게 바친 일본 최초의 역사서이다. 서기 713 겐메이(元明)천황은 관명으로 전국 지방에 지방의 풍토기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명하였다. 마을의 이름, 물산, 토지의 비옥상태, 산천원야의 명칭의 유래, 옛부터 전해 오는 전승등을 살펴 기록하도록 항목을 명백히 하였다. 가운데 이즈모(出雲), 하리마(播磨), 히타찌(常陸), 히젠(肥前), 붕고(豊後)등의 풍토기가 남아 있다.

서기 720 일본서기 30권이 완성되었다. 1 2 카미요(神代) () (), 3권부터 히토요(人代) 진무기(神武紀) 시작된다. 그리고 각권을 1() 또는 수대의 천황씩 묶어 정리하였으며 28권과 29권을 텐무기(天武紀) ,하로 하고 30 지토우기(持統紀) 하였다.

일본은 무렵 자국의 역사서를 내는데 이렇게 심혈을 기울였으며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는 열도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8세기 일본의 지배층이 당면한 과제는 국제적으로 아시아의 패자 당나라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위협을 피해야하는 외교적 문제가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으며 다음은 국내문제로서 열도에서 배타적 왕권을 확립하고 열도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서기 660 쿠다라(百濟) 멸망과 663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백제와 왜가 패배한 당은 열도의 전후책임 문제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왜의 책임을 물었다. 쿠다라와 왜는 당시 동체였고 왜의 지배층은 쿠다라 왕실 사람들이었지만  쿠다라가 사라진 시점에서 열도에서 자신들의 존속을 위해서는 쿠다라와 왜의 관계를 부정할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현안은 쿠다라가 없어진 상태에서 열도의 배타적 지배를 영구화할 방안이었다. 외국이 열도를 침략할 구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열도 지배를 영구적으로 확보할 방안으로 생각된 것이 역사서의 발간이었고 당시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사람을 설득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712 성립된 고사기는 3 가운데 카미요(神代) 1권을 차지하고 있으며 720 성립된 일본서기는 30 가운데 카미요(神代) 2권을 차지한다. 역사서라고 하면서 ()으로 시작하는 것은 열도의 왕권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을 명시하므로서 왕실이외의 사람이 왕권을 탐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들의 꿈은 그로부터 13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유효하다. 그런 연유로 열도에서 황실의 피를 갖지 않은 자가 천황이 되겠다고 나선 자는 없었다역성혁명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서는 열도는 만세일계의 천황가로 내려 왔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한 주장같지만 보다 심오한 의미를 내포한다. 일본서기는 기원전 660 부터 열도에 왕이 존재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열도가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태초부터 스스로 자주권을 행사하며 영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일본서기는 () 주권을 가진 나라였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일본서기의 존재자체로 일본은 기원전 660년부터 주권을 가진 국가였다고 주변국을 세뇌시키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21세기의 한국의 역사학자들까지도 일본열도에는 주권을 가진 왕이 존속해 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열도전체를 대표할 고대의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고 몇백년 존속한 왕국도 없었다. 있었던 것은 국지적이고 단속적인 지배층의 교체였으며 이들 지배층이란 모두가 외부에서 유입된 인간들이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지배층이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백제, 신라, 구야국의 건국은 모두 외부에서 유입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라의 혁거세, 석탈해, 김알지도 외부인이며 백제의 온조, 구야국의 김수로왕이나 허황후가 모두 외부에서 유입된 인간들이다. 그런데 일본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천황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일본서기에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천황이든 지배층이든 일본서기는 열도내의 계보로 둔갑시켰으니 일본서기를 보고 어떤 인물의 계보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세일계라는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역사를 형해화시킨다.     

역사의 진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엄격하고 객관적으로 일본서기가 씌여졌으리라는 믿음은 일본서기를 공부하면 할수록 사라진다. 공부가 부족한 사람들이 일본서기를 정사라고 보는 것이다.
 
당과 신라의 위협으로부터 열도를 지키기 위하여 열도의 만세일계의 논리가 필요하고 국내의 배타적 지배를 위하여 천황가가 하늘의 뜻으로 열도를 다스린다는 프로파겐다는 일본서기를 통하여 확실하게 성취되었다. 역사서를 편찬한 사람들은 영원히 존속할 천황가의 틀을 설계한 것이다. 백제본국은 멸망하였지만 백제인들은 일본서기라는 역사서를 통해 열도에서 영원히 존속할 제국건설을 성취하였다. 그것이 텐무(天武) 지토우(持統) 염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역사의 해석은 제멋대로 이루어질 밖에 없었다. 역사의 단편적 파편들이 진실과 관계없이 목적에 부합되도록 가공되어 역사서가 씌여졌다.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역사의 진실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황실의 존속을 위하여 역사의 진실을 감추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이는 역사서가 아니라 천황가를 유지하기 위한 경전에 다름 아니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일본에서 최초로 나온 역사서라니까 중국의 사기나 한국의 삼국사기 같은 책으로 지래짐작하고 마는데 사실은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책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날조 역사서를 기본으로 일본역사를 논의하고 있다.

1. 일본서기는 진무(神武)에서부터 천황들의 붕어년과 당시의 나이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사실과 부합된다고 생각되는 시점은 서기 535년의 안칸(安閑)부터이며 이전 기록은 진무의 연대를 기원전 660년에 맞추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변경하였다. 고사기는 일부의 천황에만 붕어년을 밝혔는데 정확한 기록으로 판명되었다. 말은 고사기가 편찬된 시점까지는 날조(捏造) 순진한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일본서기의 경우는 철저한 날조가 이루어졌으므로 책을 정사(正史) 보면 된다. 

2. 일본서기의 진구우(神功)기는 가장 날조가 심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진구우 39, 그리고 43 위지왜인전에 기록된 히미코(卑彌呼) 위나라에 보낸 견사기록을 인용하였다. 위지왜인전은 서기 238, 그리고 243 히미코의 사신이 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핏 보면 진구우(神功皇后) 시대의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백제관련 기사는 진구우(神功)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대의 인물로 나타난다.

3. 이소노가미(石上) 신궁의 칠지도는 진구우(神功皇后)의 아들이 백제의 세자이며(근구수왕 다음의) 당시의 신분이 왜왕임을 공표한 근초고왕의 새서(璽書)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구우는 백제 침류왕모이며 근구수왕(귀수왕자) 첩의 신분이었다. 귀수왕자를 일본서기는 오우진(應神)이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진구우와의 관계를 모자간인 것처럼 왜곡하였다. 일본서기가 진구우의 기록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은 그러한 사정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일본학자들이 자기들 형편에 맞게 칠지도의 명문을 해독해 번역해주면 그것을 사실이라 믿고 있다. (“83. 七支刀 璽書である” 참조)

4.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5년의 8 백제의 왕이 아찌키(阿直岐) 파견하여 양마 2(良馬二匹) 헌상했다. 그래서 아찌키 (阿直岐) 하여금 카루노사카(軽坂) 마굿간에서 사육시키고 곳을 우마야사카(厩坂) 하였다. 아찌키(阿直岐) 문헌에 밝았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 스승으로 하였다. 천황이백제에 그대와 같은 후미요미히토 (博士, 글을 아는 ) 있는가?묻자 아찌키가 와니(王仁)라는 () 추천했다. 그래서 아라타와케(荒田別) 카무나키와케(巫別) 백제에 보내 와니(王仁) 데려 오기로 하였다.

16 2 와니(王仁) 왔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스승(師匠)으로 하였다. 여러 문헌을 학습하고 다방면의 지식을 공부했다.

같은 기사를 고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쿠다라(百濟) 근초고왕이 암수의 두필을 아찌키시(阿知吉師)에게 딸려 보내 헌상하였다. 그리고 백제에 현인이 있으면 보내주면 좋겠다 하였더니 명에 좇아 보내 사람의 이름이 와니키시(和邇吉師)이며 논어 10, 천자문 1 합하여 11권의 책을 가져와 헌상하였다.

한국에도 알려진 기사는 역사의 파편으로서 당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본서기가
구체적인 맥락을 생략하였기 때문에 일회성 정보로 이해된다.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 실명이 아니라 대명사에 해당한다. 우지마을의 어린 도련님이란 의미이다. 사람이 바로 칠지도에서 거론된 세자기생(世子奇生)이며 진구우의 아들이다. 그가 근구수왕 다음에 백제의 왕이 되었고 백제왕이 되기 다섯 때부터 왜왕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인 진구우가 섭정하였다는 기사는 진실이다. 백제와 왜는 당시 타국이 아니라 나라였다. 백제왕이 칠지도를 왜왕에게 헌상했느니 하사했느니 하고 떠들지만 진실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서기 1955 소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는 백제가 왕인박사를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쳐 주었다고 배우고 문화적 긍지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아찌키(阿直岐) 와니(王仁) 열도에 보낸 것은 자기 손자의 글공부를 돕기 위한 것이지 열도의 주권을 가진 왜왕에게 외교적으로 학자를 보낸 것이 아니다.  암수의 말을 보낸 것도 손자에게 주는 할아버지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다섯 살된 손자가 왜왕이었으니까. 무렵 백제와 왜가 일체였다 하여 후로 그런 것도 아니다. 시대에 따라 변화무쌍한 지배층의 교체를 겪어 일본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서기 기사를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만세일계란 인간세에 실재하지 않는 사고의 유희일 뿐이다.

5. 만세일계가 사고의 유희일 뿐이라면 일본서기가 기록한 계보는 신뢰할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가 같이 섞여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카미요(神代) 등장하는 스사노오(고사기 須佐之男命, 일본서기 素戔鳴尊) 열도의 이즈모(出雲) 들어와 무력으로 광대한 지역을 정벌하였다. 사실상 그가 열도의 시조이다. 그는 지금의 춘천지방 (曾尸茂梨, 牛頭山) 있던 말갈족의 영명한 지도자였다고 생각된다. 그의 아들이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이며 이즈모(出雲)에서 현재 나라현(奈良縣) 카시하라(橿原) 진출하여 비로소 야마토() 시대를 열었다.일본서기는 오호쿠니누시가 스사노오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어떤 기록에는  7대 손이란 설도 있다고 소개하였다. 고사기는 스사노오의 6대 손이라고 기록하였다. 

6. 5세기 중국의 동진(東晉), 유송(劉宋), 남제(南濟), () 사서는 왜의 5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왜왕의 이름을 (), (), (), (), ()라고 하고 있으나 일본서기는 의도적으로 이와 관련된 내용을 감추었다. 특히 왜왕 () 서기 477(송서), 478(송서), 479(제서), 502(양서) 이름이 보인다. 왜왕무의 정체에 대해서는61. 宋書 倭武王 上表文” 참조.

7. 서기 1873 큐유슈우 쿠마모토(熊本) 타마나(玉名)군의 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 Eta Funayama)고분에서 대도가 발굴되었다. 대도의 칼날에 75자의 글자가 은상감되어 있었다. 와카다케루(獲加多支鹵)대왕 치세에 매장자가 관리로 봉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로부터 95년이 지난 서기 1968 사이타마(埼玉) 교다(行田) 이나리야마(稻荷山, Inariyama)고분에서 전장 73.5 센티미터의 검이 발굴되었는데 115자의 글자가 금상감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거기 와카다케루(獲加多支鹵) 대왕 시대 봉사하던 관리가 8대에 걸친 조상들의 계보를 기록하였다. 검에는 신해(辛亥)년에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서기 471 제작으로 본다. 현재 큐우슈우 쿠마모토(熊本) 현과 혼슈우의 사이타마(埼玉)  천리 떨어진 곳인데 곳에서 발굴된 대도와 검에 같은 대왕(大王)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53. 獲加多支鹵大王참조)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시대는 유우랴쿠(雄略) 치세에 해당한다. 일본서기는 유우랴쿠의 이름을 와카타케(幼武) 하였으므로 일본의 학자들은 유우랴쿠가 와카타케루(獲加多支鹵)라고 결론지으며 쾌재를 부른다. 유우랴쿠의 이름에 우연이 (武)자가 들어 있으므로 일본의 국수주의 학자들은 즐거워한다. 하나는 와카타케루(獲加多支鹵) 타케에 비정할 있으니 좋고 하나는 왜의 5왕의 왜왕 무에 비정할 있어서 즐겁다. 

그러나 일본서기가 기록한 유우랴쿠(雄略)기가 몽땅 픽션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사기의 유우랴쿠 기록은 단순하고 순진하다. 일본서기는 서기 456년부터 479년까지 유우랴쿠의 역사를 정교하게 기록하였다. 지나치게 정교한 고대사는 작위의 가능성이 크다. (“63. 유우랴쿠(雄略) 시대의 진상참조)

8. 코우겐(孝元)천황이 카후찌노 아오타마(河内青玉) 하니야스 비메(波邇夜須毘賣) 혼인하여 타케하니야스 비코(建波邇夜須毘古, 248 - 287) 낳았다. 후일 스진(崇神)천황 시대 타케하니야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서기는 기록하였다. 반란을 진압하는 관군 사령관은 코우겐 천황 정실 소생의 아들 오호히코(大彦) 였다. 따라서 배다른 형제끼리의 전쟁이다. 오호히코의 부관으로 나이 20세도 히코쿠니부쿠 (彦國葺) 참여하였다. 히코쿠니부쿠가 활을 쏘아 타케하니야스를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 등장하는 히코쿠니부쿠가 카이카(開化)천황의 아들 히코이마스(彦坐) 동일인이다.

고사기에 나오는 히코이마스(日子坐) 계보에 아메노미카게 (天之影) 카미의 오키나가 미즈요리(息長水依) 히메와 혼인하여 미찌노우시(美知能宇斯) 미즈호노 마와카(水穂之真若) 낳았다고 되어있다. 히코이마스는 천황의 아들이므로 천황이 있는 혈통인데 정실부인으로 미즈요리 히메가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미즈요리 히메의 아버지의 본명이 빠지고 아메노미카게라고 기록되어 있다. 살펴보니 미즈요리 히메의 부친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타케하니야스였다. 그러므로 전쟁터에서 사위가 장인을 활로 쏘아 죽인 것으로 된다. 사실대로 기록하면 진상을 설명하기 구차하므로 미즈요리 히메의 아버지의 이름을 가명으로 처리했다고 생각된다. (84. 아메노 미카게 카미(天之御影神)참조)

타케하니야스의 어머니, 하니야스 비메의 아버지라고 기록된 카후찌노 아오타마(河内青玉) 가명이며 실제로는 카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이다. 세월이 흘러 그들에 대한 평가가 변하여 카모타케쯔누미와 그의 하니야스 비메(波邇夜須毘賣) 쿄우토의 시모가모(下賀茂) 신사의 제신이, 타케하니야스 비코(建波邇夜須毘古) 쿄우토의 카미가모(上賀茂) 신사의 제신이 되었다. 그러나 본명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사용한다.

이와같이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만세일계의 가계를 만드는데 진상이 밝혀지면 곤란한 부분을 가명으로 처리하여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궁리하였다. 이런 책을 정사라고 믿으며 거기 나오는 계보를 역사의 레퍼런스로 삼을 수는 없다.

9. 서기 1898 찌쿠고국(筑後) 코우라산 코우고이시(高良山神) 학계에 소개되면서 코우고이시()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코우라산(高良山)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 있다. 코우라산(高良山) 남측 1,500미터에 걸쳐 1,300개의 열석() 확인되었다. 북측에도 열석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확인된 없다. 코우라산(高良山) 코우고이시() 알려진 북부 큐우슈우에서 10개소, 세토나이(瀨戶內) 연안 6개소에 걸쳐 코우고이시() 존재가 확인되었다.  

코우고이시() 표고 200 400미터의 허리에 킬로미터에 걸쳐 한변이 대략 70 cm 정도의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배열한 것을 말한다. 골짜기에는 성벽을 쌓고 수문을 설치하였다. 코우라산 코우고이시(高良山神) 발견되고 나서 처음에는 신성한 영역() 표시한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후 발굴성과가 쌓여 가면서 산성(山城)으로 밝혀지고 있다. 

대략 70 cm x 70 cm x 100 cm 규격으로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표고 200 400 미터의 산허리을 감싸, 산정(山頂)쪽으로 판축(板築) 토루(土壘) 설치하고 열석() 바깥에 목책을 두른 것이 산성의 본래 모습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민간인과 군인이 모두 정상에 피신하여 적과 대치할 있도록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텐찌(天智)천황 산성(山城) 관한 기록은 많이 나와 있다. 백제 멸망 큐우슈우(九州) 비롯한 여러 곳에 조선식산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코우고이시() 관해서는 역사 기록이 없다. 코우고이시 조선식산성보다 시대적으로 선다고 보나 누가, 언제, 축조하였는지 모른다.  (62. 高句麗山城 高良山神참조)

코우고이시() 관한 기사가 일본서기에 없는 것은 고의적인 누락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가 코우고이시를 쌓고 나중에 천황이 되었다고 밝힐 없기 때문이다. 

10.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기에 나오는 이와이의 (磐井) 정확한 진상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진상을 없도록 단편적인 정보를 나열하고 상관관계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이의 아니라 시대의 기사는 온통 수수께끼()이다. 이와이의 이후에 케이타이 천황이 죽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 그리고 서기 536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등장한다. (86. 이와이의 (磐井) 보는 새로운 시각참조).

일본서기는 역사를 이렇게 구렁이 넘어가는 식으로 기록하였을까?
대답은 일본서기 스스로 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케이타이(繼體)기를 끝내면서 의미심장한 마디를 남겼다.

백제본기의 기사에 의하면 서기 531 진군하여 아라(安羅) 이르러 걸둔성(乞屯城) 쌓았다. 고구려 (安) 시해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일본의 천황과 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 신해년은 케이타이(繼體) 25년에 해당한다. 훗날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後勘校者知之也).

기사의 마지막後勘校者知之也 일구(一句) 황실의 검열에 움추려든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남긴 처절한 절규이다. 

그리고 서기 531 안칸(安閑)천황이 새로운 시대를 연다. 일본서기는 안칸이 케이타이의 아들이라고 속임수를 써서 만세일계의 역사를 만들었다. 역사가들이 있는 것은 훗날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문구를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고충을 헤아려 달라고 호소하는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