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6일 금요일

80. 열도의 인맥으로 본 임나일본부


일본서기 권19 제2화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란 기사가 있다. 서기 541년 4월  아라(安羅)의 시칸키(次早岐), 이톤케이(夷呑奚), 다이후손(大不孫), 쿠스누리(久取柔利),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코덴케이(古殿奚), 소쯔마(率麻)의 칸키(旱岐), 산한게(散半奚)의 칸키(旱岐)의 아들, 다라(多羅)의 하칸키(下旱岐) 이타(夷他), 시니키(斯二岐)의 칸키(旱岐)의 아들, 시타(子他)의 칸키(旱岐)와 임나(任那)의 일본정부의 키비노 오미(吉備臣)가 백제에 가서 함께 조서(詔書, 야마토의 킨메이 천황의 조서)를 받았다. 그리고 성명왕이 참석자들에게 하는 스피치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옛적에 나의 선조이신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대 아라(安羅), 가라(加羅), 토쿠쥰(卓淳)의 칸키(旱岐)들이 처음으로 사자를 보내 두터운 친교를 맺었다. 형제와 같이 함께 번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라에게 속아 천황의 노여움을 사고 임나(任那)로 부터 원망을 듣게 된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스스로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하부중좌평(下部中佐平) 마로(麻鹵), 성방갑배(城方甲背) 마나(眛奴)를 가라(加羅)에 보내 <임나일본부(任那の日本府)>와 만나 맹약을 교환하였다.>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란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백제 성명왕이 주로 등장하는 킨메이(欽明)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란 실체가 실제 존재하였는지, 누가, 왜 만들었으며 역할이 무었인지 밝혀진 바 없다.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를 조선총독부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싶어한다. 서기 541년 임나를 다스리는 일본의 총독부가 아라(安羅, 현 함안군)에 있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옛부터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받은 적이 있으므로 1910년 다시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은 역사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이슈와 만나면 양국 국민들은 예외없이 네셔널리즘에 빠져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국 삿대질로 끝난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 무렵 일본서기가 기록한 내용을 면밀히 살펴 역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5세기 열도에 살던 인간들도 현대의 한국과 일본이라는 개념으로 살았을거라는 믿음이다.  일본인들이 열도를 단일국가로 인식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5세기의 인간들은 가문과 부족을 위해 살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임나일본부를 누가 왜 언제 만들었을까? 과연 그 시대 일본정부라고 불릴 만한 주체가 있기나 하였을까? 혹시 열도에 있던 어떤 가문이 만든 사적인 조직같은 건 아닐까?

고사기의 세이네이(淸寧)천황 편은 단 2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두 왕자 발견 (二王子発見)” 그리고 2장 “우타가키의 결투(歌垣の決闘)”이다. 우타가키(歌垣)란 젊은 남녀가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며 (歌舞飲食) 짝을 찾아 구혼하던 옛 습속이라고 한다.

두 왕자 발견의 두 왕자란 닌켄(仁賢)과 켄죠우(顯宗)를 말한다. 서기 456년 유우랴쿠(雄略)가 등장하여 백제계 왕위 계승권자 이찌노베노 오시하(市辺之忍歯) 황자를 살해하였다. 그 때 오시하 황자의 장녀와 두 아들이 도망하여 신분을 감추고 초야에 숨어 살았다. 이 장녀가 나중 백제의 개로에게 발견되어 한성으로 갔다. 그녀의 이름이 이히토요(飯豊) 황녀이다. 이히토요 황녀는 시마왕(무령왕)을 임신하고 일본에 돌아왔다. 서기 461년 곤지가 이히토요 황녀와 함께 일본에 들어와 세이네이(淸寧) 천황이 되었다. 유우랴쿠는 서기 458년 왕위에서 쫒겨나 유폐되었다. (여기 거론되는 역사는 일본서기 기록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읍니다. 일본서기 내용이 왜곡되었을 경우 이를  재해석하여 바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히토요 황녀가 열도에 돌아와 숨어 살던 두 형제를 찾아낸 것을 두 왕자 발견이라 하며 이들이 왕실에서 성장하여 백제와 열도의 역사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형 닌켄(仁賢)은 온순하고 착실한 성격이었으나 동생 켄죠우(顯宗)는 어둡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서기 477년 곤지는 시마왕(나중 백제의 무령왕)을 왜왕(왜왕 무)으로 세우고 백제에 나가 공주 천도를 돕는다. 왜왕 무는 나이 17세로 야마토의 왕이 되었고 고사기의 유우랴쿠기에 소꼽장난하는 사춘기 천황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고사기 유우랴쿠기의 4개의 장(章)이 17세의 왜왕 무의 모습이라는 것은 “77. 어모니모세(於慕尼慕是)”에서 나왔다.  

서기 479년 백제의 삼근왕이 암살된 뒤 열도에 있던 닌켄(仁賢)이 백제에 나가 동성왕이 되었다. 그 해 곤지는 왜왕 무를 대동하고 어디론지 떠났다. 그리고 열도는 왜왕 무의 어머니 이히토요 황녀가 통치하였다. 서기 484년 이히토요 황녀가 죽고 켄죠우(顯宗)가 누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고사기는 우타가키(歌垣)의 결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히토요 황녀을 이을 켄죠우(顯宗)가 아직 즉위하기 전 헤구리노 오미(平群臣)의 조상(祖), 시비노오미(志毘臣)가 우타가키 무대에 나와 켄죠우가 혼인하려 하던 미인의 손을 잡았다. 그 낭자는 우다노오비토(菟田首)의 딸 오후오(大魚)였다. 그러자 켄죠우도 우타가키 무대로 나갔다.

거기서 시비노오미가  “그대의 궁전 한 구석이 기울었네”라고 노래를 시작하고 켄죠우에게 다음을 이을 것을 요구하였다. 켄죠우가 “목수의 솜씨 탓에 그리 된거다.”

다시 시비노오미가 “대왕의 마음이 우유부단하니 신하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왕자가 다시 “얕은 바다의 파도가 부서지는 것을 보면 헤엄쳐오던 시비(鮪) 곁에 아내(妻) 서 있는 것 보이네”

시비노오미가 화가 나서 “왕자의 울타리는 튼튼할 것 같지만 칼에 잘리고 불에 탄다.” 왕자가 다시 “ 시비(鮪, 오후오)를 노리는 어부여, 그걸 놓치면 슬퍼질거야. 시비(鮪, 오후오)를 노리는 시비(志毘)여.” 이와같이 노래하며 밤 새 싸우다 각자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닌켄과 켄죠우 형제는“조정의 대신들은 아침은 조정에 출석하나 낮이 되면 시비(志毘)의 문전에 모이곤 해. 그러나 지금 시비(志毘)는 틀림없이 자고 있을거야. 지금은 문전에 사람이 없어. 지금 거사하지 않으면 실행하기 힘들어.” 그리고 군사를 모아 시비노오미(志毘臣)의 집을 포위하고 잡아 죽였다.

일본서기에도 이와 비슷한 우타가키(歌垣) 기사가 있다. 고사기는 22대  세이네이(淸寧) 천황기, 일본서기는 25대 부레쯔(武烈) 천황기에 나온다.

닌켄(仁賢) 치세 11년 8월 천황이 붕어했다. 헤구리노 마토리노 오미 (平群真鳥臣)가 국정을 제멋데로 하고 일본의 왕이 되려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황태자를 위해 궁을 짓는다고 하면서 완성되면 자기가 들어가 살았다. 매사 교만하기 짝이 없고 신하로서의 절도를 지키지 못하였다. (승자의 논리로 정변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기록된 역사이므로 사실과 다르다. 헤구리(平群) 부자(父子)는 백제 측 황실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이 때 황태자는 모노노베노 아라카이(物部麁鹿火)의 딸 카게히메(影媛)에게 마음을 두고 사람을 보내 길에서 지나는 척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카게히메는 이전 마토리(真鳥) 대신의 아들 시비(鮪)에게 몸을 더럽혔다. 카게히메는 황태자의 기대를 저버린 것을 두려워하며 “나는 쯔바키찌의 교차로에서 기다리겠나이다.” 라고 대답을 주었다.

황태자가 그곳에 가서 카게히메와 데이트하고 있는데 시비노오미(鮪臣)가 나타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어 고사기에서와 비슷한 우타가키가 된다. 한참동안 우타가키의 수작이 진행되는 동안 황태자는 시비(鮪)가 이미 카게히메와 통정한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매사 무례한 그들 부자(父子)의 행태에 격노하였다. 그날 밤 오호토모 카나무라 (大伴金村) 무라지(連)의 집에 가서 병사를 모아 시비(鮪)를 칠 군사를 일으켰다. 오호토모 군은 나라산에서 시비를 죽였다.

겨울 11월 11일 오호토모 카나무라는 마토리(真鳥)도 토벌할 것을 진언하였고 스스로 병을 이끌고 대신(大臣)의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마토리는 살해되었다. 12월 오호토모 카나무라는 적당(賊黨)을 평정하고 정권을 황태자에게 돌려 주었다. 부레쯔(武烈)천황의 시대가 열리고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가 오호무라지(大連)가 되었다.

고사기는 헤구리노 오미(平群臣) 시비(志毘), 일본서기는 시비(鮪)라고 표기하였고 그는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의 아들이다. 고사기의 세이네이(淸寧)기는 시비(志毘)를 죽이고 켄죠우(顯宗)천황이 즉위하였고 일본서기는 시비(鮪)와 그의 부친 마토리(真鳥)를 죽이고 부레쯔(武烈)천황이 등극하였다고 기록했다.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는 일본서기 유우랴쿠 즉위 기사에 등장한다. 유우랴쿠 즉위시 헤구리노 마토리를 대신(大臣), 오호토모 무로야(大伴室屋)와 모노노베 메(物部目)를 오호무라지(大連)로 임명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유우랴쿠 즉위가 아니라 곤지가 세이네이(淸寧) 천황으로 즉위한 서기 461년의 대신들의 면면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서로 다른 기사에서 헤구리(平群) 씨와 오호토모(大伴) 씨의 정쟁과 등극하는 천황들과의 관계를 짚고 갈 필요가 있다. “59. 大伴大連金村”, “ 77. 어모니모세(於慕尼慕是)”에서 대강 나온 이야기이다. “59. 大伴大連金村에서 우리는 그가 고구려 출신이라 하였다. 카나무라의 할아버지 무로야(室屋)는 고구려 왕자 고진(高珍)과 함께 열도에 온 사람이다. 고진(高珍)이 열도를 장악하고 인교우(允恭)천황이 되었다. 무로야(室屋)란 인물은 인교우 시대 등장한다. 그리고 유우랴쿠 천황은 인교우의 아들이다.

우리는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를 백제 출신으로 본다. 그는 서기 461년 곤지를 수행하고 열도에 들어온 백제의 장군이다. 마토리(真鳥)는 서기 440년, 그의 아들 시비(志毘,鮪) 460년, 카나무라(金村) 460년 경의 인물들이다. 시비와 카나무라는 시마왕(왜왕 무 = 백제 무령왕)과 동연배이다.

고사기가 기록한 우타가키 기사는 켄죠우(顯宗)가 왕위에 오른 연유를 밝힌 것이다. 우타가키의 내용은 역사가들의 작문에 불과하므로 무시한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하여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보면 된다. 서기 485년 켄죠우가 즉위한 뒤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왕을 황후로 세운다. 그녀는 인교우(允恭) 천황의 증손이다. 그러므로 나니하노 오노는 고구려인이다.

고사기 유우랴쿠기 “미와강의 소녀”에 나온 아카이코(赤猪子)와 일본서기 어모니모세(於慕尼慕是)의 설화에서 나온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 그리고 켄조우 천황기의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이 동일인이라고  하였다.

켄죠우는 정변을 통하여 왕위에 올랐다. 나니하노 오노왕은 시마왕(왜왕 무)의 딸을 낳은 아카이코(赤猪子)이며 헤구리노 시비는 나니하노 오노의 후견인이었다. 헤구리노 시비의 세력을 꺾지 않고 켄죠우는 나니하노 오노를 차지 할 수도, 왕이 될 수도 없었다. 켄죠우는 곤지와 같은 항렬이므로 시마왕의 숙부인데 조카의 여자를 탐하여 고구려 출신인 오호토모 가문을 시켜 시비(志毘,鮪)를 제거하고 오노왕을 황후로 취한 것이다. 고사기의“우타가키의 결투”는 사실과 부합되는 기사이다.

고구려 출신의 오호토모 가문을 통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고구려 출신의 황후를 세운 켄죠우(顯宗) 천황이 친 고구려 정책을 펴고 백제와 적대하는 것이 서기 487년이다. 켄죠우는 백제왕실의 적통을 이을 시마왕의 여자를 취하는 순간 고구려를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렵 열도의 권력이 당시 소백산맥까지 남하한 고구려와 손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열도의 역사는 이 무렵 오호토모 가문이 집요하게 고구려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 485년 열도에서 쿠테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출신의 오호토모(大伴) 가문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충청북도 충주, 괴산, 증평지역으로 진출한 고구려와 접선하여 열도에 친 고구려 정권을 세우려 하였다. 이들이 접촉하기 위하여 선택한 중간거점이 아라(安羅)였고 그 곳에 상주하는 세포조직을 운영하였다. 어쩌면 아라(安羅)는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시 고구려에 항복하여 그 때부터 고구려에 협조하여 왔을 가능성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아라인술병(安羅人戌兵)이란 용어는 이를 뒷바침한다.

열도의 오호토모(大伴) 가문이 고구려와 접촉하기 위하여 아라에 만든 세포조직을 역사가들은 뭐라고 명명해야 될까? 8세기의 일본서기 작자들이 이것을 임나일본부라고 일본서기에 기록함으로써 지금도 한일간에 역사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모습이 아닌 이름을 가지고 싸우고 있으니 역사의 실타래는 풀릴 길이 없다. 실제와 가까운 이름이라면 “아라에 설치된 오호토모 가문의 고구려 접선거점” 정도가 아닐까? 아라왜신관(安羅倭臣館)도 합당한 이름이 아니다. 당시 열도에는 정통성을 가진 왕도 존재하지 않았고 왜왕이 신하를 아라에 보낸 일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오호토모 가문이 고구려의 힘을 빌려 열도를 장악하려는 움직임만 있었다.

서기 487년 일본서기에 “백제와 임나(任那)의 분쟁”이란 기사가 나온다. 신화적으로 기술되어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의 현 경남 경북 지역에 13개의 가야 소국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령의 대가야, 합천의 다라(多羅), 그리고 함안의 아라(安羅)가 큰 나라였다.

이때 만들어진 고구려 접선거점은 열도의 외교기관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며 킨메이(欽明) 시대까지 존속하였으나 오호토모 가문의 퇴진과 더불어 소멸되었다. 
일본이란 국호가 서기 670년 경 성립되므로 서기 541년 4월 일본서기 킨메이(欽明)기에 처음 등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일본부 또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이것을 김태식 교수는 아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고 불렀다. 

일본서기 서기 487년 키노 오히하노 스쿠네 (紀の生磐宿禰)가 임나(任那)의 임지에서 고구려와 접촉하였다. 서쪽으로 삼한의 왕이 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 일본에서 카미라고 읽느데 왕이라는 의미) 이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임나(任那)의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등과 계략을 써서 백제의 챠쿠마쿠 니게 (適莫爾解)를 니리무(爾林, 고구려의 영내이다)에서 살해하고 시토로 모로노 사시(帯山城)를 쌓아 교통로를 억압하고 항구에서 백제의 군대에 보급하는 식량을 차단하였다.

백제왕은 격노하여 방면장관의 코니게(古爾解)와 관인의 마쿠코게(莫古解)등을 파견하여 시토로 모로(帯山)를 공격케 하였다. 오히하노 스쿠네(生磐宿禰)는 미마나(任那)를 지원하여 맞아 싸웠으나 점점 열세로 몰려 정책실패를 깨닫고 미마나(任那)로 퇴각하였다. 백제국은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등 300인을 살해하였다. (이때 살해된 임나(任那)의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 등의 후손들은 아라(安羅)의 접선거점을 킨메이(欽明) 시대에도 운영하고 있었다.)

열도에서 서기 485년 정권을 장악한 켄조우 천황과 오호토모 가문은 반 백제, 친 고구려, 친 임나(任那)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임나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접촉하였다. 오히하노 스쿠네 (生磐宿禰)는 임나와 짜고 백제의 장군들을 유인하여 살해하였고 임나는 타사강(帶沙江, 현 섬진강) 유역을 철통같이 봉쇄하여 백제의 항로를 차단하였다.

서기 485년 천황이 된 켄죠우는 2년 후 갑자기 사망했다. 갑자기라는 말은 또 다른 정변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는 서기 487년 4월 켄조우(顯宗)천황이 사망하고 488년 정월 닌켄(仁賢) 천황이 즉위했다고 한다. 당시의 켄조우는 40대의 나이일 것이다.  백제의 동성왕(닌켄)은 동생 켄조우의 배반에 경악하였다.  그리고 열도에 들어 와 배신자 켄조우를 처단하고 열도를 다스렸다. 그가 닌켄(仁賢) 천황이다.
 
서기 489년 9월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 황후가 자살하였다. 시마왕(무령왕)에게 마음을 주었던 그녀를 빼앗아 황후로 세웠던 켄조우는 몰락하였다. 일본서기는 자살의 이유를 옹색하게 변명하고 있으나 두 남자를 따라야 했던 여인의 말로였다.
 
아라(安羅)에 설치된 고구려 접선거점이란 논의와 관련하여 서기 493년 9월 “고구려와의 접촉”이란 기사가 일본서기에 보인다.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를 사자로 고구려에 파견하여 기술자를 구하였다. 서기 492년 고구려는 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이 즉위하였다. 서기 487년 켄죠우를 응징한 닌켄(仁賢) 천황은 이 무렵 권력을 상실하고 열도의 실권은 오호토모 카나무라가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카나무라는 끈질기게 고구려 커넥션을 추구한다.

“ 77. 어모니모세(於慕尼慕是)” 는 현대 한국어와 발음이나 뉘앙스가 많이 닮았는데 “어머니에게도 남편” 이란 뜻이다. 그 기사에 의하면 서기 493년 고구려에 파견된 사신 가운데 나이 7세의 어린애가 끼어 있었다. 아라키(麁寸)라 기록된 이 아이는 “어모니모세”의 설화에 의하면 켄죠우(顯宗)천황과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 황후 사이에 태어난 왕자이다. 혈통으로 인교우(允恭) 천황의 5대손, 광개토대왕의 6대손이 된다.

당시 고구려의 문자명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손주다. 열도에서 태어난 광개토대왕의 6대손을 문자명왕에게 보내 열도의 주인으로 낙점 받고자 시도한 흔적이다. 사신들은 아라(安羅, 함안), 다라(多羅, 합천), 가라(加羅, 고령의 대가야)를 통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의 전진기지가 있던 충주까지 왕래하였을 것이다.

그해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가 고구려에서 돌아왔다. 기술자의 즈루키(須流枳)와 누루키(奴流枳)를 데리고 왔다.

서기 498년 8월 닌켄(仁賢) 천황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글 첫머리에 나왔던 마토리노 오미(真鳥臣)와 시비노 오미(鮪臣)를 공격하는 오호토모 카나무라의 정변이 발발한다.  이 정변에서 성공한 카나무라는 케이타이(繼體) 천황 시대까지 열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실력자였다.

일본서기는 498년의 쿠데타로 헤구리노 오미의 부자(父子)를 처단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이는 오류이다. 서기 498년의 쿠데타는 헤구리노 마토리(眞鳥)를 제거하였다. 헤구리(平群) 씨는 백제 출신이다. 서기 479년 동성왕을 보좌하여 헤구리노 마토리는 백제로 나갔고 아들 시비는 열도에 남아 나니하노 오노왕과 궁성을 호위하던 중 서기 485년 켄죠우의 정변으로 사망하였다. 아버지 마토리는 닌켄과 함께 487년 열도에 돌아와 켄죠우를 처단하였다.

그는 닌켄(仁賢) 천황의 경호실장이었으므로 오호토모 카나무라에게는 처치해야 될 상대였다. 서기 498년의 정변을 통하여 카나무라는 백제세력을 제거하고 “어모니모세”에 나온 아라키(麁寸)를 옹립하여 부레쯔(武烈) 천황이 탄생한다. 일본서기는 부레쯔가 닌켄을 어어 왕이 되었으므로 닌켄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켄죠우(顯宗)와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 황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일본서기는 두번의 정변에서 승자(大伴金村 大連)를 칭송하고 패자(平群真鳥臣)를 매도하였다.

일본서기를 아무리 살펴도 서기 479년부터 531년까지 임나를 경영할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은 열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의 천황들은 실권이 없었고 오호토모(大伴) 가문이 두 차례의 정변을 거쳐 권력을 장악하고 친 고구려 정책을 폈다. 서기 485년의 정변이후 아라(安羅)에 고구려 접선거점을 마련한 오호토모(大伴)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이를 운영하면서 고구려 커넥션을 추구하였다.

서기 487년 니리무(爾林)에서 전사한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의 후손들이 서기 548년까지 아라(安羅)에서 고구려와 내통하고 있었다. 열도의 오호토모 가문은 아라(安羅)에 주재원을 상주시켜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의 후손들과 협력하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고구려를 접촉하여 백제를 정벌할 것을 요청하였고 서기 548년 정월 고구려가 6천의 군사를 보내 백제의 독산성(마진성, 충남 예산)을 공격하였다.  

서기 720년 저작된 일본서기는 오호토모 가문이 아라에 설치한 고구려 접선거점을  <임나일본부> 라고  기록함으로써 뭔가 거대한 것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를 호도하였고 후세는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 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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