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9일 금요일

77. 어모니모세 (於慕尼慕是)

일본서기는 21대 유랴쿠(雄略) 천황이 서기 457년 즉위하여 479년 사망했다고 하였다. 백제의 개로왕과 겹치는 그의 재위기간 중 서기 461년 백제의 곤지가 열도에 들어왔고 시마왕(후일의 백제 무령왕)의 탄생기사가 있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대형사건이 그의 임기 중에 일어 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의 유랴쿠 천황 기록은 놀랄 만큼 간단하다. 그의 기록은 “1) 가족사항, 2) 하얀 바둑이 헌상, 3) 미와강의 소녀, 4) 요시노강의 소녀, 5) 카즈라기산의 신(), 6)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 의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사기는 가족사항에서 단 2명의 자식을 기록하였다. 자식의 숫자가 적다는 것은 그의 재위기간이 의외로 짧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위의 6개의 기사 가운데 ”5) 카즈라기산의 신()” 은 “63. 유랴쿠시대의 진상”에서 다루었다. 표면적으로 신화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기사에서 역사를 읽어 내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 기사를 쓴 사람들이 아닌 척 하면서 후인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남겨 둔 표지를 찾아 온 몸으로 더듬어야 된다. 카즈라기산의 신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또 어느 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거대한 맷돼지가 나타났다. 천황이 활을 쏘자 맷돼지가 성을 내고 굉음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천황은 겁에 질려 개암나무 위로 뺑소니쳤다.
 
또 어느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모든 수행원들이 빨간 허리띠를 매고 파란 옷을 입었다. 그 때 건너 산에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복이나 모양이나 사람들이 천황의 행렬과 꼭 같았다. 거기서 천황이 “야마토에 나 말고 왕이 없는데 거기 가고 있는 것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는 모양도 천황과 똑 같았다. 그래서 천황은 크게 노하여 모두 활을 겨누자 저 쪽에서도 똑 같이 활을 겨누었다.

거기서 천황이 “이름을 대라. 이름이나 알고 싸우자”하니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알려주마. 나는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한 마디로 분별하여 말하는 카쯔라기(葛城)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 다” 라 하였다. 천황이 겁에 질려 “알아 모시겠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신령님께서 현세(現世)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읍니다.”라고 말 하며 대어도(大御刀)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 그러자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는 손을 치며 모든 물건을 받았다.

위의 신화가 역사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해석은 어떨까요? 대어도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는 말은 유랴쿠가 왕위에서 쫒겨 났다는 의미를 고사기의 저자가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백제에서 서기 455 21대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유랴쿠 2년 추7월 백제가 천황을 위하여 이케쯔히메 (池津媛)라는 여성을 보냈으나 이 여성이 천황을 싫어하고 이시카하노 타테 (石川楯)라는 자와 눈이 맞아 천황이 격노하여 그 남녀를 불태워 죽였다.

 백제신찬 (新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해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은 아레나코(阿禮奴跪)를 파견하여 여자를 구 하였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 챠쿠케이에하시토 (適稽女)을 착식(着飾)하여 제출(提出)하였다. 유랴쿠(雄略)는 백제의 개로왕이 보낸 여자를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한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데리고 일본 쿄우토우(京都) 북부해안 미야즈 (宮津)에 상륙하여 질풍노도처럼 나라분지의 카쯔라기산 (葛城山)까지 밀고 들어 와 유랴쿠(雄略)를 제압하였다. 서기 458년 일어난 일로 본다.

서기 458년 유랴쿠는 퇴위되어 연금상태에 놓인다. 서기 461년 곤지의 열도행을 일본서기는 천황을 모시기 위해서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열도를 통치하기 위하여 들어 온 것이다. 그와 함께 큐우슈우에서 갓 태어 난 시마왕과 그의 어머니 이히토요히메 (飯豊皇女)가 동행하였다.   

오오노 야스마로(太安万侶, 660 723)가 고사기를 편찬하여 겐메이(元明) 천황에게 바친 것은 서기 712년 정월이었다. 고사기를 편찬한 오오노 야스마로가 고사기의 유랴쿠기에 남긴 카즈라기산의 신은 후세 사람들이 이해할 것을  기대하며  쓴 역사가 아니었을까?

6개 가운데 남은 4개의 설화의 성격 또한 카즈라키산의 신에 못지 않게 난해하다. 하얀 바둑이 헌상, 미와강의 소녀, 요시노강의 소녀,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의 4개의 기사는 모두 사춘기 젊은이들의 연정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사춘기의 천황(?)이 미모의 소녀를 보고 풋풋한 사랑을 전하는 내용인데 그 가운데 미와강의 소녀를 소개한다.

또 어느 때 천황이 놀러 나가 미와강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빨래하던 소녀를 만났다. 소녀의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다. “이름을 아카이코(赤猪子)라 하나이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그리고 천황은 궁에 돌아왔다. 그러나 아카이코가 천황의 명령을 받들어 기다리는 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마르고 늙어 젊은 날의 미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생 동안 기다렸다는 내 마음은 전하고 죽어야  . 그녀는 천황에게서 받은 정표를 챙겨 천황을 찾아갔다. 천황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는 어디서 온 할멈이냐?” 하고 물었다. “모년 모월 천황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받들어 오늘에 이르렀나이다늙어 볼 품 없는 모습이 되었으나 제 마음만은 전해 드리고자 오게 되었나이다.” “잊고 있었다. 헌데 너는 명령을 기다리며 좋은 시절을 다 보내 버리고 말았구나.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 놀라고 미안하여 마음 속으로 이제라도 받아 들여 혼인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늙은 모습에 주저하였다.

대강 위와 같은 내용이다이런 비슷한 4개의 설화가 유랴쿠기에 들어 있다. 오오노 야스마로(太安万侶)라는 역사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기사를 역사서에 남겼을까?

일본서기 닌켄(仁賢) 천황기에 해괴한 이야기가 나온다. 서기 493 9월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를 사자로 고구려에 파견하여 기술자를 구하였다. 이 사절단이 출발한 뒤 나니하(難波)의 미쯔항(御津港)에서 아쿠타메(飽田女)라는 여자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에게도 세(), 나에게도 세()였는데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 떠나고 말았네!” 라면서 기구한 사연을 털어 놓았다. 그 당시의 “세”는 여자의 남자 형제를 뜻하나 남편도 “세” 불렀다 한다. 오늘 날의 형을 성”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가 카라마(韓白水)의 하타케()에게 시집가서 나쿠메(哭女)를 낳았다. 나쿠메(哭女) 스미찌(住道)의 야마키(山杵)와 혼인하여 아쿠타메(飽田女)를 낳았다. 하타케()와 나쿠메(哭女)는 이미 죽고 없으나 야마키(山杵)는 처의 어머니인 후나메(鮒魚女)와 관계하여 아라키()를 낳았다. 이 아라키()가 아쿠타메(飽田女)와 부부가 되었는데 이번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구려에 갔기 때문에 아쿠타메(飽田女)가 그렇게 섭게 울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가족관계는 그냥 들어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쪽이 빠르다. 일본의 역사 애호가들이 작성한 가족관계 도표를 빌려 왔다.

유라쿠기에 들어 있는 미와강의 소녀나 닌켄 6(서기 493)의 일화는 당시 천황가와 연관되는 설화임에 틀림 없으나 설화는 일회성으로 그치고 관련되는 역사적 정보는 전무하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편자들이 퍼즐 게임처럼 기록한 역사를 모색하여 본래의 모습을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은익한 내용을 누군가 찾아 낼 수 있도록 약간의 접근로를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후인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분방자재한 가설을 세우고 따져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後勘校者 知之也). 후감교자 지지야란 문구는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 편 마지막에 기록된 말이다.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라 불리는 이 설화의 탁월한 해석이 눈에 띄었다.  "www.daangoon.pe.kr" 이란 사이트의 인현천황 편에 있다. Daangoon이란 필명으로 통하는 이 분이 최초 해석자인지 또는 다른 원조가 있는지는 모른다. 한글 웹 사이트는 복사본이 너무 많아 어느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있. Daangoon 가설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서기 485년 정월 켄조우(顯宗) 천황이 즉위하고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을 황후로 세웠다. 오노왕은 인교우(允恭)천황의 증손이다.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은 위에 나온 설화의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와 동일 인물이다. 켄조우천황은 스미찌(住道)의 야마키(山杵)에 대응한다. 그러면 카라마(韓白水)의 하타케()란 누구인가?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당시의 실제 역사에 접근해야 된다. 실제 역사란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기록된 역사와 다르기 때문이다.

서기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남하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 신라를 공격하던 가야와 왜의 군대를 무찔렀다. 김해의 가락국은 재기불능의 피해를 입었다. 그 시절 일본 열도는 과연 고구려로 부터 자유로웠을까?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이와 관련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광개토대왕비는 중요한 부분이 너무 훼손되어 애매하다.

우리는  23. 19代 允恭天皇(393 453) 그 역사기록의 허상,  62. 고구려 산성 코우라산 코우고이시 (高句麗山城 高良山神籠石), 63. 雄略時代의 眞相" 에서 고구려와 일본 열도의 관련을 살펴 보았다. 고구려는 대군으로 일시에 열도를 장악하는 대신 광개토대왕의 왕자를 한명 선정하여 일본열도를 장악하는 임무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왕자의 이름이 남송의 송서에 나오는 왜왕 진()이다. 고진(高珍)이라 이름하는 고구려의 왕자가 일본열도 공략의 임무를 띄고 큐우슈우에 들어 와 코우라산에 고구려식 산성을 쌓았다.
()이란 글자는 열도에서 “우즈”라고 읽는데 이 “우즈”를 한자로 옥수(玉垂)라 표기하게 되고 옥수(玉垂)를 다시 일본식으로 “타마타레”로 읽어 고진은 열도에서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라 불렸다. 후쿠오카 현(福岡県) 쿠루메시(久留米市)에 코우라대사(高良大社)에서 모시는 신이다옛날에는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신사(高良 玉垂命神社) 또는 코우라 타마타레궁 (高良玉垂宮)으로 불렸다.  

당시의 야마토는 닌토쿠(仁德)천황의 시대였다. 닌토쿠와 타마타레노 미코토간의 전쟁은 장기간 계속되었다. 서기 419년 닌토쿠 천황이 아와지시마 전투에서 전사하고 야마토가 패배하였으나 타마타레는 야마토로 진군하지 않고 큐우슈우로 퇴각하여 10여년 동안 휴전상태가 된다. 타마타레노 미코토가 전쟁중 입은 상처때문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고 보인다. 10년 간 고구려는 큐우슈우와 세토나이의 곳곳에 고구려식 산성을 쌓고 방어하였다. 그 때 남겨진 고구려의 산성들을 지금 코우고이시(神籠石)라 부른다. 그가 신라에서 온 의원의 치료를 받고 몸을 일으켜 다시 야마토를 장악하고 인교우(允恭) 천황이 된 것이 서기 432년이다.

서기 453년 인교우(允恭)천황이 장남 카루()에 의해 독살된다. 카루황자는 아버지의 후궁과의 정분이 발각되자 선수를 쳐서 아버지를 살해하였다.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군대도 큐우슈우에 주둔하고 있었다. 후쿠오카의 아나호(穴穗)국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장군 김무(金武)가 문상차 궁에 들어 와 카루황자를 처단하고 천황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안코우는 어린애가 딸린 황녀와 혼인하였는데 3년 후 이 남자 아이가 잠자고 있는 안코우천황을 칼로 찔러 죽고 말았다. 여기서 유라쿠(雄略)천황이 등장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황위에 오른다. 유라쿠는 인교우(允恭)의 친 아들이다. 서기 457년의 일이다.
 
한편 야마토의 사정은 서기 419년 야마토의 닌토쿠(仁德)천황이 전사하고 닌토쿠의 아들 리쮸우(履中)가 즉위하였다. 서기 432년 리쮸우도 인교우와의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닌토쿠는 오우진(應神)천황의 아들이니 야마토 황실은 백제의 혈통이다. 야마토가 패배하자 리쮸우의 아들 이찌노헤노 오시하황자 (押磐皇子)는 오미(近江)의 카야노(蚊屋野, 현 滋賀県蒲生郡)로 도망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피를 이은 유라쿠는 서기 456 10월 오시하황자의 거처를 찾아 살해하였다. 백제계 왕위 계승권자를 제거한 것이다.

이 때 제거된 오시하 황자의 어린 자식들이 고난에 찬 도피생활을 헤치고 백제의 개로와 곤지에 의하여 역사에 모습을 드러 내게 된다. 무령왕의 어머니 이히토요 황녀(飯豊皇女)와 두 남 동생 닌켄(仁賢)과 켄조우()천황이다

서기 458년 카쯔라기산의 신()으로 그려 진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 혈통의 유랴쿠를 제거하고 도피 중이던 이히토요 황녀(飯豊皇女)를 찾아 백제로 데려 갔다. 개로와 이히토요는 모두 근구수왕의 4대 손으로 같은 항렬이다.

서기 461 6월 이히토요 황녀가 열도에 들어 오는 길에 후쿠오카에서 무령왕을 낳았다. 이히토요 황녀(飯豊皇女)의 열도행은 왕명 때문이 아니라 그 녀 자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그 녀는 소식을 모르는 두 남 동생을 공권력을 이용하여 탐문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아직도 도망자의 신분으로 세상 눈을 피해 살고 있을 어린 동생들을  하루라도 빨리 찾을 일념으로 만삭의 몸을 이끌고 곤지와 함께 열도행의 배에 올랐다. 곤지는 7월 서울에 도착했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일본서기는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이때 곤지의 나이 스무 살 정도로 독신이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52. 飯豊皇女 참조). 그에게는 자식이 없다. 무령왕을 출산한 이히토요 황녀와 곤지의 나이는 거의 같다. 왜 일본서기는 위의 기사에 곤지가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했을까이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린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를 공격하여 왕과 왕후 왕자들을 몰살하였다. 그 후 공주로 옮겨 백제의 명맥을 이어 가던 문주왕과 삼근왕이 살해되어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다. 열도에 있던 곤지와 새로 태어 난 무령왕 그리고 이히토요 황녀가 찾고 있는 두 남 동생이 백제왕실 혈통의 전부였다.

서기 479 4월 백제의 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중인 곤지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말다왕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이 되도록 하였다. 무기를 주고 쯔쿠시국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동성왕(24)이다. 바로 동성왕이 열도와 관련없는 백제 출신이라고 강조하기 위하여 곤지가 열도에 올 때 아들 5명을 데려 왔다고 뻥을 쳤던 것이다. 곤지가 동성왕으로 내 보낸 것은 이히토요의 동생 닌켄(仁賢)이었다. 그는 열도의 닌켄 천황이 되기 전 이미 백제의 동성왕으로 근무한 것이다. 닌켄(仁賢)과 켄조우()라는 천황의 시호를 사용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오케”로 읽히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다

일본서기는 유라쿠 457 479, 세이네이(靑寧) 480 484 1 16, 켄조우 485 1 1일 – 487 4 25일로 재위기간을 기록하고 이히토요 황녀가 세이네이와 켄조우 사이의 484 1 16일 – 485 1 1일 재위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유라쿠 457-458, 세이네이(곤지) 461 476, 왜무왕(무령왕) 477 - 479, 이히토요 황녀 480 484년이며 그 후 켄조우로 이어진다고 본다. 왜무왕은 서기 477 11월 남송에 조공을 보내고 스스로 使持節都督 倭百新羅任那加羅 秦韓慕韓 七諸軍事 安東大軍 倭王라 칭하였다.

서기 461년 출생한 무령왕이 왜무왕이 되었던 서기 477 17세가 되었다. 백제 개로왕의 피를 받은 유일한 왕자이다이 무렵 그가 미와강에서 아카이코(赤猪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미와강의 아카이코(赤猪子)는 인교우천황의 4대 손으로 고구려의 피를 이은 공주이다. 사춘기를 맞은 백제왕자와 고구려의 공주가 나라현의 미와강 가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카라마(韓白水)의 하타케()란 바로 왜무왕 즉 훗날의 무령왕이었다. 켄조우 천황기는 아카이코(赤猪子)를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이라 하고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의 설화는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라 하였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라는 말을 남기고 무령왕이 열도를 떠난 것은 서기 479년이다 (61. 宋書의 倭武王 上表文 참조). 그들의 나이 열 아홉 살 때 일이다. 그 때 이미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는 임신 중이었다떠나면서 무령왕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 헤구리노 시비(平群鮪臣)에게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의 신변을 부탁하였다.

서기 479년 이후 곤지와 무령왕의 행적은 묘연하다. 서기 485년 이히토요 황녀의 동생 켄조우가 즉위한다. 이히토요 황녀가 사망하고 켄조우가 즉위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쿠데타의 가능성이 많다. 켄조우는 오호토모노 카나무라 (大伴金村連)를 시켜 헤구리노 시비를 죽이고 나니하노 오노왕을 자기 여자로 만든다. 조카의 여자를 빼앗은 것이다. 아카이코(赤猪子)는 무령왕과의 언약을 지킬 힘이 없었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하고 떠난 무령왕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오호토모노 카나무라 (大伴金村連)는 “ 59. 大伴大連金村”에서 다루었다. 카나무라는 인교우천황 시절의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의 손자이다. 무로야는 인교우와 함께 고구려에서 온 사람일 것이다.

일본서기 서기 485년 정월 켄조우(顯宗) 천황이 즉위하고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을 황후로 세웠다. 오노왕은 인교우(允恭)천황의 증손이다.

그리고 열도의 대외정책이 급변한다.

일본서기 서기 487년 키노 오히하노 스쿠네 (生磐宿禰)가 미마나(任那)의 임지에서 고구려와 접촉하였다. 서쪽으로 삼한의 왕이 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 일본에서 카미라고 읽는데 왕이라는 의미) 이라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마나(任那)의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등과 계략을 써서 백제의 챠쿠마쿠 니게 (適莫爾解)를 니리무(爾林, 고구려의 영내이다)에서 살해하고 시토로 모로노 사시(山城)를 쌓아 교통로를 억압하고 항구에서 백제의 군대에 보급하는 식량을 차단하였다

是歲,紀生磐宿禰跨據任那,交通高麗.將西王三韓,整脩宮府,自稱神聖.用任那左魯、那奇他甲背等計,殺百濟適莫爾於爾林.爾林,高麗地也.築帶山城,拒守東道,斷運糧津,令軍飢困.

백제왕은 격노하여 방면장관의 코니게(古爾解)와 관인의 마쿠코게(莫古解)등을 파견하여 시토로 모로()를 공격케 하였다. 오히하노 스쿠네(生磐宿禰)는 미마나(任那)를 지원하여 맞아 싸웠으나 점점 열세로 몰려 정책실패를 깨닫고 미마나(任那)로 퇴각하였다. 백제국은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 300인을 살해하였다.

百濟王大怒,遣領軍古爾解、內頭莫古解等,率眾趣于帶山攻. 於是,生磐宿禰進軍逆擊,膽氣益狀,所向皆破,以一當百. 俄而兵盡力竭,知事不濟,自任那歸.由是百濟國殺佐魯、那奇他甲背等三百餘人.

서기 487년의 일본서기 기사는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비상한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관심이 많은 만큼 다양한 해석이 나와 있다. 니리무(爾林)의 후보지는 한반도는 물론 대마도, 큐우슈우까지 거론된다. 그 가운데  홍익대학교의 김태식 교수는 니리무(爾林)를 충북 음성으로, 시토로 모로 성(山城)을 충북 증평군 도안면의 이성산성(도살성)에 비정하였다. 괴산군 청천면에 대산(大山)이라는 산이 있으나 대산과 도살성은 가까운 곳이지만 같은 장소는 아니다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서기 1979년 고구려의 석비가 확인되었다. 충주 중원 고구려 비라 부른다. 이 석비가 발견되므로서 서기 475년 한성 백제를 멸망시킨 장수왕이 충북지역까지 진출하였음이 확인되었다그리고 서기 487년 충북의 진천, 증평, 괴산, 음성 충주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열도에서 서기 485년 정권을 장악한 켄조우 천황과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는 반 백제, 친 고구려, 임나(任那)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임나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접촉하였다. 오히하노 스쿠네 (生磐宿禰)는 임나와 짜고 백제의 장군들을 유인하여 살해하였고 임나는 타사강(帶沙江, 현 섬진강) 유역을 철통같이 봉쇄하여 백제의 항로를 차단하였다.

켄조우 천황은 무령왕의 여자를 빼앗고 백제에 도전하였으며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피를 이은 카나무라의 무력에 의존하므로서 카나무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부터 서기 530년 경까지 카나무라를 중심으로 열도의 정치가 움직였다.  

일본서기는 서기 487 4월 켄조우(顯宗)천황이 사망하고 488년 정월 닌켄(仁賢) 천황이 즉위했다고 한다. 당시의 켄조우는 40대의 나이일 것이다백제의 동성왕은 동생 켄조우의 배반에 경악하였다. 그리고 손자 모대(牟大)를 백제왕위에 세우고 열도에 들어 와 배신자 켄조우를 처단하고 열도를 다스렸다. 그가 닌켄(仁賢) 천황이다.

닌켄과 켄조우 형제에게 백제의 개로와 곤지는 은인중의 은인이다. 아버지가 유랴쿠에게 살해되자  그들은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고 있었다. 개로와 곤지가 유랴쿠를 제거하고 이히토요 황녀를  발견함으로서 그들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원래의 신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닌켄은 곤지의 말을 듣고 백제의 동성왕으로 부임하여 신명을 바쳐 봉사하였다그런데 열도에 남았던 동생 켄조우는 은혜를 저버리고 조카의 여자를 가로채고 백제를 배반하였다. 백제의 동성왕은 자기 손으로 동생의 패륜을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기 489 9월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 황후가 자살하였다. 무령왕에게 마음을 주었던 녀를 빼앗아 황후로 세웠던 켄조우는 몰락하였다. 일본서기는 자살의 이유를 옹색하게 변명하고 있으나 사랑의 언약을 관철할 없었던 여인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미와강의 아카이코(赤猪子),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 그리고 나니하노 오노왕 (難波小野) 동일 인물이다. 무령왕이 떠난 녀는 나쿠메(哭女) 출산하였다.

그런 다음 서기 493년 기사로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가 나온다.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가 카라마(韓白水)의 하타케()에게 시집가서 나쿠메(哭女)를 낳았다. 나쿠메(哭女) 스미찌(住道)의 야마키(山杵)와 혼인하여 아쿠타메(飽田女)를 낳았다. 하타케()와 나쿠메(哭女)는 이미 죽고 없으나 야마키(山杵)는 처의 어머니인 후나메(鮒魚女)와 관계하여 아라키()를 낳았다. 이 아라키()가 아쿠타메(飽田女)와 부부가 되었는데 이번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구려에 갔기 때문에 아쿠타메(飽田女)가 그렇게 섭게 울고 있다고 한다.

서기 498년 카나무라가 닌켄(仁賢) 천황과 그의 측근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眞鳥, 眞鳥는 의 부친)를 제거하고 켄조우(顯宗)의 어린 아들 아라키()를 부레쯔(武烈)천황으로 옹립하였다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 나쿠메(哭女), 아쿠타메(飽田女), 아라키()에게는 고구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구려에  파견되는 사신과 함께  고구려의 피를 이은 아라키()가 고구려를 방문하였다. 열도의 외교정책은 이 무렵 친 고구려, 반 백제가 되었다.

서기 501년 백제의 말다왕(末多王) 포악한 짓을 하여 인민을 괴롭혔다. 국인이 왕을 폐하고 시마왕을 옹립하여 무령왕(武寧王)이라 하였다. 백제 24 동성왕이 모대(牟大) 세우고 열도에 들어 동생 켄조우를 응징하였다. 여기서 백제의 말다왕이란 모대를 뜻하며 백제 24 동성왕과 다른 인물이다.

서기 479 미와강의 아카이코(赤猪子)에게 기다려 달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난 무령왕은 서기 501 나이 41 되어서야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열도의 왜무왕이 아니라 열도의 어버이의 나라 쿠다라(百濟) 오호키미(大王) 것이다. 미와강의 아카이코는 서기 489 9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와강의 소녀”에서 고사기의 저자 오오노 야스마로는 “잊고 있었다. 헌데 너는 명령을 기다리며 좋은 시절을 다 보내 버리고 말았구나.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라고 무령왕이 아카이코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서기 504 10 백제국이 마나키시(麻那君) 파견하여 공납하였다. 천황은 백제국이 얼마동안 공납하지 않았던 것을 수상하게 생각하여 사자를 붙잡아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서기 505 백제의 왕이 시가키시(斯我君) 파견하여 공납하였다. 특별한 문서를 첨부하여이전 파견한 마나키시(麻那君) 백제의 왕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새로 시가키시(斯我君) 파견하여 삼가 봉사하도록 하겠읍니다.라고 제안하였다. 호우시키시(法師君) 태어났는데 그가 야마토노 키미(倭君) 조선이다.

무령왕이 열도에 보낸 마나키시(麻那君) 시가키시(斯我君) 현대적 표현으로 대통령 특사에 해당되는데 여기서 부터 열도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무령왕의 의지가 나타난다. 백제의 무령왕은 당시 열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오호토모노 카나무라(大伴金村)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특사는 원래 열도의 주인은 왜무왕이니 열도를 내 놓으라고 주장하였다서기 505년 기사는 당시의 특사들이 열도에 눌러 앉아 훗 날 야마토의 왕(倭君)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케이타이 이후 야마토를 접수하였다. 호우시키시(法師君)란 킨메이(欽明) 천황의 이름이다.

카나무라(大伴金村)는 케이타이(繼體) 등장시켜 무령왕에게  대항한다. 왜냐하면 케이타이도 개로왕의 아들(서자)이기 때문에 열도의 주인으로 손색이 없다는 논리이다. 그리하여 부레쯔() 천황을 폐위시키고 서기 507 후쿠이현 (福井縣) 시골에 살던  58세의 노인을 끌어내 야마토 왕위에 앉히니 그가 케이타이(繼體) 천황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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