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89. 야마토(大和)와 큐우슈우(九州)간의 전쟁



일본서기는 야마토의 천황이 열도 전체를 까마득한 옛날부터 통치해 왔으며 천황은 진무(神武)이래 만세일계로 내려온 천손족으로 묘사하였다. 일본서기가 그리고자 하는 천황가는 열도를 지배할 배타적 권위을 가지며  누구로부터도 도전받지 않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러나 역사란 변화무쌍하여 때로는 큐우슈우(九州)가 야마토(大和)를 능가하는 권능을 갖거나 야마토를 무시하는 큐우슈우의 지배자가 등장하거나 또는 야마토를 공격하는 외국의 침략군이 큐우슈우를 정복하거나 하였다. 그리고 야마토와 큐우슈우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런 경우 사실대로 역사를 기록하면 천황가도 도전을 받았고 몇번이고 열도의 지배자가 바뀌어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황가의 만세일계의 존엄을 지키고자 일본서기는 어떤 식으로 야마토와 큐우슈우간의 전쟁의 역사를 기록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부레쯔(武烈) 6년(서기 504) 10월 쿠다라(百済)가 마나키시(麻那君)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천황은 쿠다라가 얼마 동안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이 수상하여 사자를 붙잡아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부레쯔(武烈) 7년(서기 505) 4월 쿠다라의 왕이 시가키시(斯我君)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그리고 특별한 문서를 제출하였는데 “이전에 파견한 마나키시(麻那君)는 백제국의 왕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새로 시가키시(斯我君)를 파견하여 삼가 봉사하도록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케이타이(繼體) 21년(서기 527) 6월 오우미(近江)의 케나노오미(毛野臣)가 6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임나(任那)에 가서 신라에게 패망한 남가라(南加羅), 토쿠코톤(喙己呑)을 탈환하여 다시 임나와 병합하려고 하였다. 이때 쯔쿠지(筑紫) 쿠니노 미야스코(国造) 이와이(磐井)가 은밀하게 반역을 도모하고 꾸물꾸물 세월을 보내며 일의 어려움을 겁내 틈을 엿보고 있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이와이에게 뇌물을 보내 케나노오미의 군대를 방해하도록 권하였다.

그에 편승한 이와이는 히젠(肥前), 히고(肥後), 부젠(豊前), 붕고(豊後)등을 억눌러 직무를 하지 않도록 하고 밖으로 해로를 차단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등의 나라에서 공물을 운반하는 배를 속여 빼앗고 안으로 임나에 파견된 케나노오미의 군대를 차단하고 케나노오미에게 항의하였다. “지금 너는 조정의 사자인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동료로 살을 비비며 같은 솥의 밥을 먹던 사이다. 사자가 되었다고 하여 네가 나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복종하지 않고 교전을 마다하지 않은 채 기세 등등하였다.

서기 527년 8월 천황의 조칙이 내렸다.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는 가서 이와이(磐井)를 토벌하라. 나가토(長門, 関門海峡) 동쪽은 내가 다스리지만 찌쿠지 서쪽은 네가 통치하고 상벌도 네 맘데로 해도 좋다. 일일히 보고하지 않아도 좋다.”

서기 528년 11월 대장군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는 적의 수령 이와이(磐井)와 찌쿠지(筑紫)의 미이노코오리 (三井群)에서 교전하였다. 양군의 깃발과 북이 상대하고 군세가 일으키는 먼지가 뒤섞여 서로 승기를 잡으려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드디어 아라카히(麁鹿火)가 이와이(磐井)를 베고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12월 찌쿠지노 키미(筑紫君) 쿠즈코(葛子)는 부친 이와이(磐井)의 죄에 연좌되어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카스야(糟屋)의 미야케(屯倉)를 헌상하고 죽음을 면해 주도록 청원하였다.

일본서기가 기록한 역사의 단편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서기 504년, 505년의 기사는 그 후의 역사기록과 어떤 관련을 갖는지 밝히지 않았다. 서기 527년 오우미(近江)의 케나노오미(毛野臣)의 기사도 당대의 전체적 역사의 전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지 않고 단일 기사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528년 이와이(磐井)를 토벌하는 기사도 역사의 전개와 관련없이 단일 기사로 취급된다. 일본서기만 보면 이와이(磐井)라는 인물의 아이덴티티가 파악되지 않는다.

당시 실재로 있었던 역사를 복원하면 서기 504년 백제에서 파견된 쿠다라(百済)의 마나키시(麻那君)가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야마토와 대치하였고 505년의 백제의 왕족 시가키시(斯我君)가 마나키시와 합류하였다. 일본서기는 마나키시를 이와이(磐井)라는 위명(僞名)으로 기록하고 백제의 침략자라는 사실은 감추었다. 그들은 백제 무령왕의 명령을 받고 큐우슈우에 들어와 먼저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열도를 되찾을 사명을 띄고 있었다. 왜냐하면 서기 479년까지 시마왕(斯麻王)이 야마토의 주인이었으나 케이타이 시대의 야마토는 백제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서기 523년 백제의 무령왕이 사망한다. 524년 백제의 태자 명(明)이 즉위하여 성명왕(聖明王)이 되었다. 무령왕이 사망하자 야마토는 서두르기 시작한다. 526년 케이타이(繼體)는 20년간 도읍의 주변을 전전하던 유랑을 끝내고 이하레(磐余)의 타마호노 미야(玉穗宮)에 들어온다. 그리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큐우슈우 정벌을 단행한다. 527년의 오우미(近江)의 케나노오미(毛野臣)의 기사가 “남가라(南加羅), 토쿠코톤(喙己呑)을 탈환하여 다시 임나와 병합하려고 하였다”고 하는 것은 야마토의 큐우슈우 정벌시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일본서기의 변명이다. 천황치하의 큐우슈우가 천황의 적이 되었다는 것은 천황의 명예를 손상시키게 됨으로 큐우슈우에 출동하는 군대는 항상 신라나 임나를 목표로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신라가 이와이에게 뇌물을 보냈느니 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소설일 뿐이다.

실제로 이 전쟁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서기 527년 케나노오미(毛野臣)가 6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큐우슈우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528년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가 2차 정벌군을 지휘하여 큐우슈우를 공격하였다. 2차 정벌시 이와이 즉 백제의 마나키시는 전사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의 일부는 시가키시(斯我君)의 지휘하에 야마토를 공격하여 천황을 체포하였다. 서기 479년 시마왕(斯麻王)이 열도를 떠난 뒤 백제의 통제를 벗어난 야마토가 531년 성명왕 대에 다시 백제의 수중에 들어 온 것이다.

서기 532년 왕위에 오른 안칸(安閑, 466 – 535)은 즉위시 66세의 고령이었고 4년 후 사망하였다. 그가 바로 백제의 시가키시(斯我君)이다. 4년 동안 그가 한 일은 열도에 전무후무할 정도의 방대한 미야케(官家,屯倉, 屯家, 御宅>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서기 536년 안칸의 뒤를 이은 센카(宣化, 467 – 539) 또한 70세의 고령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서기 536년 5월 1일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린다.

“먹거리가 천하의 기본이다(食者天下之本), 황금 만 관(貫)이 있어도 배 고픔을 달랠 수 없고 진주 만 상자를 가진들 어찌 추위를 막겠는가? 쯔쿠지국(筑紫国)은 원근의 나라에서 조공하러 오는 곳으로 왕래의 관문이 되는 곳이다. 그래서 해외의 나라들이 조류와 천후를 관측하고 조공을 바치러 온다. 호무다천황(誉田天皇, 応神) 때부터 지금까지 곡식을 수확하여 비축하여 왔다. 흉년에 미리 대비하여 빈객을 환대하고 나라를 평안케 하느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그래서 아소노 키미(阿蘇君)를 보내 카와찌국(河内国) 만다군(茨田郡)의 미야케(屯倉)에 저장된 곡물을 운반토록 할 것이다. 소가노 이나메 대신(蘇我大臣稲目宿禰)은 오와리노 무라지(尾張連)를 보내 오와리국 미야케의 곡물을 가져오라.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大臣麁鹿火)는 니이노미노 무라지(新家連)를 보내 니이노미(新家) 미야케의 곡물을, 아베노 오미(阿部臣)는 이부키노 오미(伊吹臣)를 보내 이가국(伊賀国) 미야케의 곡물을 운반해 오도록 하라.

미야케(官家)를 나노쯔(那津, 博多大津)에 건설하라. 또 쯔쿠시(筑紫), 히노쿠니(肥国), 토요쿠니(豊国)의 3개의 미야케는 서로 멀리 떨어져 필요시 수송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모든 군(諸郡)에 명하여 나누어 운반하여 나노쯔(那津) 한 곳에 모아 비축하여 비상시 인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라. 시급히 군현(郡県)에 나의 명을 하달하라.”

안칸은 구신들이 소유하던 토지를 빼앗아 미야케를 전국적인 스케일로 설치하고 세무서를 독려하였다. 그리고 국가에서 소를 대량으로 방목하도록 하였다.  66세에 왕위에 올라 70세에 사망한 그가 무엇 때문에 기득권층의 저항을 무릅쓰면서 쫒기듯 그와 같은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을까?

센카(宣化)는 안칸이 전국에 설치한 미야케(屯倉)에서 생산된 곡물을 큐우슈우의 하카타(博多)로 집결시키는 물류 시스템의 긴급한 가동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전국에 산재한 미야케에서 곡물을 수송하여 쯔쿠시(筑紫)의 나노쯔(那津)로 집결시키고 있다. 일본열도의 미야케에서 생산된 곡물을 큐우슈우의 하카다 항에 집결시키는 것은 이 곡물들이 향할 목적지가 바다 건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본서기는 <서기 529년 3월 백제왕이 일본에 가는 사자가 바다 한 가운데 곶(海中岬)을 떠날 때 풍파에 시달리고 화물은 물에 젖어 손상이 심하니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津, 하동군 고전면)을 조공용 항로로 달라 하여 그렇게 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열도에서 생산된 곡물은 큐우슈우의 하카타에 집결시키고 섬진강 하구의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津)을 백제는 중간 터미널로 결정하였다. 가라 다사진의 곡물은 다른 선박에 옮겨 져 남해안을 돌아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 소부리(所夫里)의 구드레 포구(大王浦)에서 하역될 것이다.

성왕 16년 ( 538년)  백제는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 所夫里)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가 충청도까지 진출하고 신라는 국력이 신장되어 한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상황에서  전란이 계속되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백제는 도읍을 보다 안전한 남쪽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전란의 와중에 막대한 물자와 인력이 소요되는 수도이전 비용을 안칸과 센카가 열도에서 마련하기 위하여 전력투구 하고 있는 모습을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사비천도와 관련된 사업이라는 언질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센카시대의 하카타 항의 창고건설과 일본 전국에 걸친 운송 시스템의 확립은 안칸의 미야케 설치와 병행하여 동시에 추진되었을 것이다. 곡물의 수송과 적절한 관리를 위하여 큐우슈우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이 때부터 백제는 큐우슈우에 백제의 총독을 두었다. 총독이란 근세의 명칭이므로 큐우슈우의 백제왕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후 큐우슈우의 총독이 대부분 야마토의 천황으로 옮겨 갔다. 따라서 안칸에서 쿄오교쿠(皇極)까지의 100년 동안 선왕의 장자가 왕위를 잇는 전통은 열도에 없었다. 센카와 킨메이(欽明)도 야마토의 왕위에 오르기 전 큐우슈우의 총독이었으며 이 시스템은 서기 645년의 을사의 변(乙巳之變)까지 약 1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열도의 미야케에서 생산된 곡물은 백제왕실 소유이므로 서기 645년 까지 후쿠오카에서 열도의 곡물이 가라의 다사진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서기 528년 이와이의 난(磐井の亂)을 계기로 야마토와 큐우슈우는 백제가 통합하였다. 일본서기가 기록한 천황은 야마토의 왕이지만 새로이 백제의 총독이 큐우슈우에 주재하며 야마토가 생산한 곡물을 수집하여 백제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백제로서는 큐우슈우 총독이 백제의 곳간을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였다. 일본서기는 큐우슈우 총독에 관한 기사는 일체 다루지 않았다. 이와이의 난 이후 안칸(安閑, 531-535 재위), 센카(宣化, 536 – 539), 킨메이(欽明, 540 – 571), 비타쯔(敏達, 572 – 587), 요우메이(用明, 587 – 591)가 야마토의 왕이었던 약 60년 동안 야마토의 왕 – 큐우슈우의 총독 – 백제의 관계는 순조롭게 굴러갔다. 그러나 60년의 세월이 지나자 야마토의 왕과 큐우슈우의 총독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야마토는 531년부터 백제가 되었지만 그로부터 60여년의 세월이 지나자 원래의 백제인들은 사망하였고 야마토에서 태어난 백제인 2세, 3세들은 세월이 갈수록 백제인이라기 보다는 야마토 인이라는 감정을 갖게 되었다.  백제왕실 직계의 야마토 왕실 사람들과 백제인 3세였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 – 626)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야마토의 왕은 큐우슈우의 총독과 백제가 낙점하며 야마토에서 피땀 흘려 생산된 곡물은 큐우슈우의 총독에게 빼앗기는 처지였으므로 야마토의 불만이 쌓여갔다.

서기 553년 백제의 강력한 군주 성명왕이 전사하고 위덕왕이 즉위하였다. 위덕왕의 동생 세대의 비타쯔, 요우메이, 아나호베(穴穗部)황자, 스슌(崇峻), 스이코(推古)가 야마토에 있던 591년 큐우슈우 총독은 위덕왕의 장자 아좌(阿佐)태자였고 그는 차기 백제왕이 될 신분이었다. 아좌태자(570 – 598)의 또 다른 이름을 일본서기는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押坂彦人大兄)황자라고 기록하고 야마토의 계보에 맞추기 위하여 비타쯔(敏達)의 아들로 처리하였다. 큐우슈우의 우사시(大分県宇佐市)에 있는 우사신궁이 그가 주재하던 곳이다. 야마토의 요우메이 왕이 물러나고 다음 왕을 결정하는 591년 야마토와 큐우슈우간의 갈등이 표면화하고 야마토가 독립을 추구하였다.

비타쯔 사후 요우메이가 왕위를 잇는 586년부터 야마토는 소요사태가 계속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아나호베황자 (穴穗部皇子)가 비타쯔의 빈궁(殯宮)을 지키던 황후를 범하고자 하였다면서 무례(無禮)를 강조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소가노 우마코는 황후의 승인을 받아 아나호베 황자와 그와 가까운 친구 야카베(宅部)황자를 처단하였다. 또 모노모베노 모리야(物部守屋)를 토벌한다. 이 토벌은 불교 도입을 둘러 싼 투쟁인 것처럼 치부되었으나 불교와 관계없는 정치적 사건이다. 그리고 스슌(崇峻)이 왕으로 옹립된다.

위의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일본서기의 작전에 말려드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일관된 목표하에 역사를 해석코자 하므로 단편적인 사건을 천황가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데 유리하게 전개한다. 왕권을 두고 벌이는 암투, 큐우슈우의 총독과 백제를 향한 독립의 몸부림등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도록 적당한 구실을 붙여 역사를 썼다.

일본서기의 행간을 읽으면 위의 기록은 큐우슈우가 결정한 아나호베황자 (穴穗部皇子)가 차기의 왕이 되도록 되어 있고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큐우슈우의 결정에 따르고자 하였다. 그를 제외한 소가노 우마코, 비타쯔의 황후, 그리고 여러 황자들은 야마토 독립을 위하여 백제에 항거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아나호베와 모리야를 죽이고 야마토가 선택한 스슌(崇峻)을 왕으로 옹립한다. 큐우슈우 총독의 반격을 예상하면서 진행된 정변일 터이다.

드디어 야마토가 본색을 드러낸다. 서기 591년 4월 스슌(崇峻)천황은 “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된 임나를 재건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하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해 11월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각 씨족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부장( 副将), 대장(隊長)으로 하여 2만여의 군(軍)을 딸려  쯔쿠시(筑紫)에 출병하였다.  키시노 카네(吉士金)를  신라에 보내 미마나(任那)의 건을 물었다.

여기서 또 임나나 신라를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큐우슈우의 백제 총독을 공격하는 야마토의 선전포고를 일본서기는 이런 식으로 기록하였다.

스슌(崇峻) 5년 (서기 592)  10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스슌(崇峻)천황을 살해한 뒤 당일 매장하였고 11월 5일 큐우슈우 정벌군의 철수가 시작된다.  이 시역사건에 대하여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는 아무 문책도 받지 않았고 계속하여  권좌에 있었다.

야마토의 큐우슈우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소가노 우마코가 살아 남기 위하여 큐우슈우 총독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본서기는 서기 597년 4월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하였다는 기사를 남겼으니 큐우슈우의 백제 총독이 야마토를 순시했다는 뜻이다.

서기 592년의 전쟁은 야마토의 패배로 끝나고 스이코(推古)가 왕이 되었다. 큐우슈우의 동의를 얻어 그녀가 왕이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백제는 이 무렵 야마토에 대형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사찰의 건립은 백제왕과 큐우슈우 총독의 관할하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라(奈良)현 이카루가(斑鳩)에 현존하는 호류지(法隆寺), 오오사카의 시텐노오지(四天王寺)가 이때 큐우슈우 총독의 관리하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건설의 공로가 엉뚱하게 쇼토쿠(聖德)태자에게 넘어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후의 역사는 비극적으로 전개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서는 아좌태자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백제와 야마토의 역사의 전개를 보면 백제의 위덕왕이 598년 사망하고 아좌태자도 거의 비슷한 무렵 사망했다고 생각된다. 아좌태자의 나이 28세였고 그가 남긴 아들(훗날의 의자왕)은 5세였다. 후사가 없는 백제는 부랴부랴 위덕왕의 늙은 동생 혜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고 큐우슈우는 5세의 어린애가 총독이 되었다.

서기 592년 큐우슈우 정벌에 실패하여 식민지와 같은 대접을 받던 야마토는 위덕왕과 아좌태자의 사망이후 다시 저항을 시작한다. 서기 601년 11월 야마토는 신라를 침공할 것을 논의하였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였다. 매번 등장하는 것이 임나와 신라공격이다.

스이코(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聖德太子의 친동생)를 격신라(擊新羅)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쯔쿠시(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의 아들)가 다시 정신라(征新羅)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 히메왕 (舍人姬王)이 아카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591년 스슌(崇峻)의 큐우슈우 정벌의 실패에 이어 602년 스이코(推古)의 1차 정벌 실패 그리고 603년의 2차 정벌도 실패하였다. 오오사카에 인접한 아카시에서 정신라 장군의 아내가 전사했다는 것은 큐우슈우 군이 반격하여 야마토가 정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세부 묘사를 생략한 채 일본서기는 야마토가 큐우슈우에게 정복되었다는 것은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603년 49세였던 스이코(推古)천황은 손주 뻘인 큐우슈우 총독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고 계속 왕위에 있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았다. 수서(隋書)에 기록된 다리시북고의 나이 10세였다. 서기 628년 스이코(推古)가 사망하자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야마토의 왕이 되니 그가 죠메이(敍明, 593 – 660)천황이다. 큐우슈우 총독이 직접 야마토를 통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에 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글은 케이타이(繼體)에서 스이코(推古)까지의 약 75년 동안 야마토가 큐우슈우를 공격했던 기록을 발췌하여 일본서기가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살펴 본 것이다. 일본서기는 천황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야마토의 왕이 열도 내에서 벌인 전쟁을 은폐하면서 군대의 동원이 임나나 신라를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