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일 금요일

92. 벽골제(碧骨堤)는 어떤 모습이었나?


김제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의 학예연구사 정윤숙이 쓴 “김제 벽골제의 문화적 생산력과 규모” 가 2009년 11월 한국농업사학회가 발행하는 “농업사연구”에 실렸다. 정윤숙은 서기 1415년 중수된 벽골제는 저수시설이며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까지의 약 3 km의 제방이 원평천과 두월천 유역을 수몰시켜 거대한 저수지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벽골제를 포함한 광역단위의 항공사진과 표고점, 등고선, 수계 등의 지리정보와 1975년 벽골제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실측 제방고 등의 자료를 지리정보시스템(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으로 분석하여 제방의 수심에 따른 수몰지역을 모니터링하고 저수지의 총둘레와 총면적을 추정하였다. 

1975년 발굴시 장생거(長生渠)의 제방고는 4.3m로 실측되었다. 제방의 지면은 대략 해발 4 m 정도이며 제내(堤內)의 최대수심을 3m (해발 7m) 로 볼 때 저수지의 수몰 총둘레는 68.6 km, 총면적 34.5 km2 로 결론지었다. 이 정도라면 저수량이 약 1억톤이다.

정윤숙이 내린 결론은 역사서에 씌여져 있다고 일반인들이 믿고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서의 기록 또는 해석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벽골제를 방조제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믿고 싶은대로 역사를 우상화하기보다 과거와 현재의 사실관계을 밝히려는 노력이 바람직하다.    

벽골제의 실제 모습을 탐구하려면 지난 날 사람들이 겪어온 자연환경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당시의 인력과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궁리해야 된다. 이를 위하여 몇 가지 의문에 대하여 검토한다. 

첫째 벽골제가 처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4세기 벽골제 부근은 육지였나, 바다였나? 바다였다면 김제평야는 만조시 어디까지 해수에 잠겼나?

두째 저수량 1억톤의 물을 필요로 하는 농경지가 그 시대 김제, 만경, 정읍, 부안 지역에 있었나?  

셋째 옛 사람들이 간척한 농경지에 설치한 배수 및 방조(防潮)시설은 어떤 모습일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은3세기 이곳에 벽비리국(辟卑離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백제 때 벽골군(碧骨郡)이 되었고 삼국사기는 서기 330년 벽골제를 축조했다고 하였다. 벽골제는 그후 신라, 고려, 조선대에 걸쳐 몇 차례의 중수를 하였으나 서기 1420년 제방이 붕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서기 663년 백강(白江)의 전투의 현장, 현 동진강 하구는 조석간만의 차가 최대 7.4m, 최소 4.0m이다. 조선말1872년 발행된 김제군 지도는 동진강 하구 남안이 만조시 수심1장(3m), 간조시 연륙(連陸) 된다고 기록했다. 부안 쪽으로 가면 만조시 수심 3장(9m), 간조시 연륙된다. 신평천 하구 북안은 만조시 1장, 간조시 연륙, 만경강 하구 북안 만조시 3장, 간조시 연륙된다. 연륙(連陸) 된다는 말은 간조시 갯벌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지금은 김제만경평야의 일부를 이루는 동진강 하구, 원평천 하구, 신평천 하구 , 만경강 하구가 1872년까지도 바다였다.

이 지역의 동진강, 고부천, 원평천, 두월천, 신평천은 감조하천(感潮河川)이다. 1920년대 이후 강의 하구에 제수문(制水門)이 설치되어 해수의 유입을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제수문이 설치되기 전까지 동진강의 해수는 태인까지, 원평천은 봉남면 신응리 - 종덕리까지, 신평천은 백산면 석교리까지 들어왔으므로 강물을 농업용수로 쓸 수 없었다. 

이 말은 3 - 4 세기 김제평야의 대부분이 간석지(干潟地) 즉 갯벌이었다는 뜻이다. 동진강, 원평천, 신평천은 강이 아니라 바다의 갯골(갯고랑) 이었다. 이 갯골의 상류까지 만조시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상상하면 된다. 자연 속의 김제는 온통 바다의 뻘벌(辟卑離)이었고 표고 4 – 5미터에 불과한 뻘벌(갯벌)은 만조시 물에 잠기고 간조시 드러났다. 








1872년 지도에 동진강 하구 남안이 만조시 1장이라 하였으므로 하구 북안 즉 벽골제 측 갯벌도 만조시 수심 3m의 바다였다.  그러면 정윤숙 학예연구사가 예측한 벽골제 제내수위 3m의 수몰지는 정확히 만조시 수몰지역과 일치한다. 제내수위 3m시 수몰되었다고 전해 온다면서 인용된 지명(김제시 봉남면 대송리, 김제시 황산면 강정마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 은 만조시 해수로 수몰된 지역의 와전이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은 백제의 개화현(皆火縣)이다. 개화(皆火)란 갯벌이란 우리말의 한자표기이다. 계화도(界火島)의 계화(界火)도 같은 말이다. 벽골군(碧骨郡)의 벽골이란 뻘골(뻘고랑)에서, 벽비리국(辟卑離國)의 벽(辟)은 뻘(펄)에서 온 말이 아닐까 ? 왜냐하면 김제 만경 부안 고부 태인지역은 온통 갯벌(뻘,펄) 투성이의 지형이었으니까. 일본서기의 헤치우(辟中, 김제) 란 “뻘 가운데” 라는 의미가 아닌가?




지금까지의 추리를 뒷바침할 수 있는 국가기록원의 사진이 있다. 1964년의 제2방조제공사 중인 동진강의 모습은 간석지의 갯골이다. 옛 원평천과 벽골제 주변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벽골제가 축조된 330년에서 1600여년이 지난 1964년까지도 동진강 하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1960년대 동진강 종합개발 수리간척사업이 시행되었다. 전북 임실군 섬진강 상류에 다목적댐을 건설하고 산를 관통하는 도수터널을 통하여 옥정호의 물을 김제, 만경, 정읍, 부안으로 끌어오는 대공사였다. 더불어 부안에 4000 ha의 계화도 간척지를 만들고 동진강제방이 건설되었다. 

간척지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농업용수 부족으로 목마른 김제, 만경, 정읍, 부안지역의 용수문제는 1960년대 동진강유역 종합개발사업을 통하여 비로소 해결될 수 있었다. 옥정호의 저수용량은 4억 3천만톤이다.

벽골제가 마지막으로 중수된 서기 1415년대 저수량 1억톤의 물을 필요로 하는 농경지가 김제, 만경, 정읍, 부안 지역에 있었을까? 위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벼를 심는 김제평야, 만경평야, 고부평야, 정읍평야가 모두 바다였다면 이 지역에 1억톤의 물을 필요로 하는 농경지가 있었을 리 없다. 더우기 물이 흘러갈 수로가 필요한데 지금 거미줄처럼 설치된 수로는 모두 20세기의 작품이며 김제만경평야가 지평선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말도 20세기에야 가능한 말이다. 김제만경평야의 대단원을 장식한 방조제가 완성된 싯점은 다음과 같다.


방조제 이름위치방조제 길이 km개발면적 ha완공연도
광활방조제김제시광활면9.519651924
진봉방조제김제시진봉면7.610761927
화포방조제김제시만경읍5.73921927
대창방조제김제시죽산면3.74101927
서포방조제김제시죽산면5.37461929
도선장방조제부안군동진면6.55031932
계화도방조제부안군계화면12.839681979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50년 대 김제군의 인구 2,065명, 간전(墾田)이 7,281결이었다. 지금 지평선이 보인다는 만경현은 그 때 인구 727명, 전답 3,508결(結)이었다.  1750년 경의 해동지도는 김제군 인구 24,679명, 전답 10,473결, 만경현 인구 14,217명, 전답 4,143결이라고 하였다. 김제군의 전답이 300년 동안에 3,192결 증가하였음에 주목한다. 

결(結)은 면적의 단위가 아니라 소출을 기준으로 하는 면적 (100짐을 생산하는 토지가 1결) 이므로 토지의 등급에 따라 시대에 따라 결(結)에 해당하는 면적은 가변적이다.  대충 결(結),  ha (100m x 100m),  정보(町步 = 3,000평) 가 비슷한 면적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르다. 

벽골제가 저수지였다면 면적이 약 3,450 ha 이다. 현 여의도 면적의 12배이다. 이 곳을 간척하여 농사짓는 것이 시급한 삼국 – 고려 –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할 곳도 없는1 억톤의 저수지를 먼저 만든다는 것은 모순이다. 지금 바라보이는 김제만경평야가 그 시대에도 존재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거대한 착각이다.  

벽골제 바깥 쪽은 바다, 안 쪽은 저수지라면 원평천을 물막이하고 김제시 신덕동 수월마을까지 제방으로 연결해야 된다. 이때 벽골제 제방 3.3km는 김제에서 태인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가 된다. 그러면 원평천을 건너 다니는 갯다리(浦橋)가 필요없게 되지만 조선시대 발행된 모든 지도에 갯다리가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원평천을 물막이 한 제방은 없었다는 뜻이다. 1억톤의 물을 필요로 하는 농경지도 없었고 원평천을 가로막은 제방도 없었다. 

저수지의 제방도 홍수시 방류할 수문이 필요하다. 이 수문은 범람을 막기 위한 비상용이기 때문에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물을 방류해야 된다. 존재가 기록된 폭 4미터의 수문 5개로는 1억톤 용량 저수지의 범람을 단시간에 처리할 수 없다. 이 수문 5개는 관개용 용수로의 수문이라고 한다면 저수지의 범람에 대비한 거대한 방류시설의 흔적이 어딘가에 있아야 되는데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저수지가 없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1892년 만들어진 정읍시의 만석보(萬石洑)의 예를 보면 하천의 물막이 공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동진강과 정읍천이 합류하는 곳에 만석보를 쌓고 농민들에게 농업용수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19세기 말 경이 되어서야 인력과 기술수준이 정읍시 이평면(梨坪面)에서 동진강 최상류의 물막이 공사를 할 만큼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보다 477년 전인 1415년 중수된 벽골제가 원평천을 막아 물막이 공사를 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면 역사에 기록된 벽골제는 실제 어떤 모습이었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벽비리국(辟卑離國), 삼국사기의 백제 벽골군(碧骨郡), 일본서기의 헤치우(辟中)는 전국에서 가장 넓은 간석지(干潟地)가 펼쳐진 곳이다. 갯벌은 넓고 경사는 완만하여 옛부터 간척사업이 많았을 것이다. 서기 851년 신라의 문성왕은 청해진을 폐지하고 그 곳의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간척초기에는 소수의 인력으로 표고가 높고 제방축조가 용이한 곳을 골라 소규모의 제방을 만든다. 원평천이나 두월천의 상류에서는 제방을 2m 정도만 쌓더라도 바닷물을 막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점점 수심이 깊은 곳으로 간척범위가 넓어진다. 현 김제시 봉남면에서 원평천의 북안을 제방으로 막을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약 1,200 ha의 간척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자연은 강을 만들고 인간은 뚝(제방)을 만든다. 벽골제 주변을 간척하려면 신털미산에서 엄지산까지 제방을 쌓고 원평천의 뚝을 만들면 된다. 원평천을 물막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현 벽골제의 약 3km를 제방으로 막고 원평천의 남안을 따라 뚝을 만들어 김제시 봉남면에 이르면 약 15 km2 (1,500 ha) 의 간척지가 확보된다. 이것이 서기 1415년 중수했다는 벽골제의 모습일 것이다. 

김제평야에 제방이 벽골제 하나 뿐이었다면 1420년 중수한 벽골제 제방이 붕괴되었을 때 원평천과 두월천 주변 경작지 전체가 해수로 수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추리가 맞다면 원평천과 두월천 주변의 간척지는 상류로부터 시차를 두고 축조되었으므로 독립적인 제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1415년 축조한 제방이 붕괴되더라도 제방 내의 토지만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1420년 전라도 관찰사는 큰 풍우로 벽골제가 터져서 둑 아래에 있는 전답 2,098결이 피해를 입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피해을 입은 전답 2,098결은 벽골제 북단에서 원평천 남안을 따라 봉남면까지 쌓은 제방의 제내면적인 듯 하다 

엄지산(嚴之山)에서 벽골제가 시작된 것은 제방길이를 최소로 하기 위한 선택이다. 벽골제 부근에서는 제방을 쌓을 돌을 구할 수 없으므로 흙으로 제방을 쌓을 수 밖에 없다. 소요되는 흙은 현장에서 조달된다. 벽골제의 제방이 하면 20m, 상면 10m, 높이 4m라면 (20+10)/2 x 4 x 3000 = 180,000m3의 흙을 제방 안쪽에서 파내게 되고 제방 안쪽에 18만톤의 저수지가  생긴다. 

원평천 남안의 뚝을 같은 규모로 쌓고 봉남면까지 길이를 10km로 가정하면 (20+10)/2 x 4 x 10,000 = 600,000m3 의 저수지가 제방 안쪽에 생긴다. 원평천 제방 안쪽에 60만톤 규모의 저수기가 생긴 셈이다.

조선시대 지도에 벽골제와 더불어 용보, 용추, 용연 (龍洑, 龍湫, 龍淵) 등으로 표기된 것이 이렇게 생긴 제내 저수지이다. 

 


간척지의 농경지도 배수시설이 필수적이다. 홍수시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또 가을철 농사가 끝나면 물을 빼내야 되기 때문이다. 벽골제 내부 농경지의 배수는 원평천으로 할 수 밖에 없다. 원평천에는 해수가 드나들기 때문에 수문이 필요하다. 수문은 해수의 유입을 막기 위해 항상 닫혀 있다. 배수가 필요할 경우 간조시에만 개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5개의 수문이 바로 이 방조배수문이며 언젠가 다른 장소로 옮겨졌을 것이다.

배수시설은 제내에 배수용저류지를 필요로 한다.  만조시 수문을 누설해 들어오는 해수가 있으므로 해수가 농업용수와 섞이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서다. 

참고로 일본에서 서기 1710년 설치했다는 농업용수용 수문을 보면 벽골제 수문의 모습과 흡사하다. 쿠마모토(熊本)현 쿠마(球磨)군 타라기(多良木)마을의 햐쿠타로우(百太郎) 용수로 수문으로 최근까지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관광용으로 전시되고 있다.  

역사를 정직하게 보자면 서기 330년의 벽골제 축조, 790년의 중수, 1143년의 중수, 1415년 중수했다고 나오는 기록은 반드시 동일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서기330년 원평천의 상류에서 간척사업을 시작하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하류로 확대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리이다.  현 벽골제지(碧骨堤址)는 1415년 중수했다는 벽골제를 말하지만 그 이전의 벽골제는 상류의 간척사업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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