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13년 6월 백제는 다시 "하헤국 (伴跛国, 伴路國의 오기)은 우리나라의 코몬(己汶)의 땅을 빼앗았읍니다. 천황의 은혜를 입어 돌려 받을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주청하였다.
그 해 8월 26일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 (百済太子淳陀薨)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조에 기록된 위의 백제태자 사망기사(513)는 그냥 흘러 넘길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일본서기가 백제태자의 사망기사를 다룬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5년 (서기 597) 4월 백제왕이 왕자 아좌(阿佐)를 보내 조공하였다(百濟王 遣王子 阿佐 朝貢)는 기사는 있지만 다음 해 그가 야마토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또 2007년 부여 왕흥사적의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577년 2월 15일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창(昌, 위덕왕의 이름) 이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이 명문에 의하여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년 이전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도 일본서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일본서기는 순타태자의 사망기사를 실었을 뿐 아니라 훙(薨)이란 글자를 사용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는 약간의 힌트를 남겨 두었다. 킨메이(欽明) 치세 13년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오에 (箭田珠勝大兄) 황자가 죽었다 (箭田珠勝大兄皇子薨去)는 기사를 짝으로 이해하면 양쪽 모두 훙(薨)을 사용하고 있다. 킨메이 천황의 장자가 죽었다는 기사이다.
킨메이(欽明)천황이 즉위하고 황후를 세울 때 540년 1월 15일 센카(宣化)천황의 황녀 이시히메(石姬)를 세워 황후로 세웠다 . 이시히메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자를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라 한다. 다음이 오사다노 누나쿠라노 후토타마시키 (譯語田渟中倉太珠敷 = 후의 비다쯔천황) 이다. 이렇게 킨메이(欽明)천황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그가 서기 552년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553년부터 백제왕자 여창이 일본서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시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한번 보면 금방 눈치 챌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다. 킨메이(欽明)치세 14년 (서기553) 백제의 왕자 여창은 전군을 몰아 고구려에 들어가 백합벌에 성채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서기 554년 왕자 여창은 나이많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서기 557년 왕자 여창이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552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죽었다는 기사는 서기 552년 이후 이 사람은 야마토를 떠나 백제에서 생애를 보낸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왕자 여창은 위덕왕으로 598년까지 무려 44년간 왕위에 있었다. 야마토의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백제에 오면 왕자 여창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성왕이라면 킨메이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사는 역사가들의 고심의 산물이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백제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떼어내서 독자적인 야마토 황실 계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서기 513년 순타태자의 사망기사는 백제 무령왕의 태자가 야마토에 와서 일생을 마쳤다는 뜻이다. 그가 바로 킨메이(欽明)이다. 순타는 서기 509년 또는 513년 생으로 보면 된다. 일본에서는 킨메이의 생몰년을 “509 – 571”로 보고 있으므로 순타태자가 509년 생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무령왕이 백제왕이 된 다음 혼인한 백제의 황후 소생은 성명(聖明)과 순타(淳陀 = 欽明)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무령왕이 40세를 넘어 백제 왕이 되었으므로 왕이 된 뒤 출생한 후손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기 2001년 12월 18일 일본의 헤이세이(平成)천황이 황거 이시바시노마(石橋間)에서 기자회견중 “저 자신으로서는 칸무(桓武)천황 (737 – 806)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씌여있으므로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읍니다. 무령왕 (461 – 523)은 일본과 관계가 깊고 그 때 이래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청되게 되었읍니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칸무천황의 생모란 타카노(高野)황후 (? – 790) 로 코오닌(光仁) 천황후이며 이름이 니이가사(新笠), 본성은 야마토우지(和氏), 오토쯔구(乙繼)의 딸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야마토우지(和氏)의 조선(祖先)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純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순타가 킨메이 천황의 백제 이름이었다면 타카노 황후는 신분이 낮은 도래인 출신이 아니라 원래 황족의 일원이며 칸무(桓武)천황의 부계든 모계든 백제왕실의 후손이다.
일본서기의 서기 513년 순타태자와 552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오에 (箭田珠勝大兄) 황자의 사망기사는 단순히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역사가들은 보다 심오한 비밀을 그런 식으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고 이해한다.
댓글 1개:
제가 머리가 멍청한 것인지 몇번을 읽어도 계보가 잡히지 않네요.
간단하게, 당시 백제의 왕계보와 일본의 왕계보가 어찌 되나요?
순타태자와 성왕이 무령왕의 아들인데 한명은 백제의 성왕이 되고 한명은 일본의 킨메이 천황이 되었다는 건가요?
그런데 순타태자가 왜 죽었다고 했던거죠?
그리고 지금 방영하는 수백향은 무령왕의 딸로 나오는데, 그녀는 일본에 가서 천황비가 되었다는데 자기 오빠의 부인이 된건가요?
마구 헷갈리기만 하네요.
자세한 설명에 앞서 간단한 계보를 먼저 전달해 주시면 이해가 쉬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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