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8일 토요일

27. 백제성왕(523 - 554재위)의 전사와 역사의 급반전

백제 성왕(성명왕)치세 일본서기 기록은 성왕이 백제의 동맹국들에게 가야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에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서기 539 – 571년간 재위에 있던 일본 29대 킨메이(欽明) 천황 ( 백제 성명왕의 동생)기록의 80%는 백제 성명왕의 언사로 장식되어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본기 성왕 원년 (523)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렀다. 좌장 지충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백제본기 성왕 7년 (529년) 겨울 10월 고구려 왕 흥안(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을 함락하였다.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 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명이었다

백제본기 성왕 16년 (538년) 서울을 사비(泗沘, 다른 이름은 所夫里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백제기록보다 상대편인 신라의 기록이 더 참고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 (서기 528년)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18년 (531) 상대등의 관직을 처음 설치하였다. 19년 (532) 금관국의 왕 김구해 (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奴宗, 武德, 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신라본기 진흥왕 원년 (서기 540년) 진흥왕이 일곱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려 황태후가 섭정하였다. 2년 (541)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고,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9년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과 함께 백제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에서 구원을 청하였다.

11년(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빼았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쳐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을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2년 (551)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침입케 하여 10개 군을 빼았았다.

14년 (553) 가을 7월 백제의 동북부 변두리를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軍主로 삼았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로 삼았다.

15년(554)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이 가야와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新州軍主 김무력이 州의 군사 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4명과 군사 2만 9천 6백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554년 백제본기 성왕 32년 (554) 가을 7월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서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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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을 믿고 550년 백제 성왕은 신라, 가야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 공격에 나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을 수복하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오히려 금현성을 빼았겼는데, 신라장군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군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고 군사 1 천을 머물러 지키게하였다.
이후 백제, 신라, 가야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도 6개의 군을 회복하였다. 신라는 이때 비로소 죽령이북의 땅을 확보하여 한강유역에 접근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를 물밑에서 접촉하여 나제동맹을 무력화시키고 신라와 동맹을 성립시킨다. 고구려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고 신라는 마음을 바꿔 고구려와 손 잡고 백제를 공격한다. 신라의 배반으로 백제는 당혹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라군은 한강이북의 갓 수복한 백제땅을 차지하고 한성까지 장악해버렸다. 성왕은 궁지에 몰려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굴욕을 감수하며 가까스로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린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을 확보하고 그곳을 新州로 삼았다. 그 신주의 軍主로 임명된 자가 바로 김무력이다.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뿐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현 충북 증평)과 금현성(현 충북 진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곳의 軍主 김무력은 532년 신라에 투항한 가락국 마지막 왕 김구해의 3남이며 뒷 날 태어날 김유신의 조부이다. 이런 연고로 김유신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배신에 이를 갈던 성왕은 이후 일본과 가야를 질타하여 연합군을 편성하고 554년 5월 왜의 수군이 도착하자 신라 정벌을 시작하여 신라의 함산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고들어 갔으나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굴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퇴각하여 환산성 (고리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성왕이 이끄는 백제연합군도 충북 영동군의 핏골전투에서 패하여 성치산성으로 지휘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반격에 나선 신라군은 현재의 옥천분지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금산지역의 백제군과 대치하였다. 성치산성에서 환산성까지는 약 20킬로메터, 말을 타면 두 시간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삼성산성 (관산성, 충북 옥천)이 위치하고 이곳은 신라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백제성왕의 움직임을 이들은 포착하고 있었다.

554년 가을 7월 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만 데리고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태자 여창의 군영, 환산성으로 출발했다. 백제는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신라는 백제진영의 이동을 훤히 파악하고 태자 여창의 군대와 성왕의 교통로를 관산성에서 차단하여 양군을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관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실개천이 있는데 현재 서화천이라 불린다. 역사기록은 이곳을 구천(狗川) 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 말 개천을 한자표기로 개 狗로 바꾼것이다. 성왕은 현지 방언인 구진베루(벼랑)밑에 흐르는 개천가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라복병에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이후 관산성의 신라군은 환산성과 성치산성의 백제군을 각개격파한다. 성왕이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치산성의 백제군이 필사적으로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신라조정은 이때 도살성과 금현성의 김무력에게 관산성으로 이동하여 백제군을 섬멸할 것을 명령한다. 김무력의 기병대는 진천 – 청주 – 신탄진 – 대전 – 백골산성으로 진격하여 백제태자 여창군의 배후로 달려든다. 백골산에서 신라군을 방어하던 백제군은 현재의 대청호를 등지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김무력의 기병이 무방비 상태인 배후를 공격하여 일방적인 공격을 퍼붙는다. 학살과 다름없는 신라기병의 맹공으로 백제의 여창군은 좌평 4명과 사졸 2만 9천6백여명을 잃었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 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츠쿠지국조(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 사이에 여창은 겨우 도망쳤다.


전쟁기록과 설명사진은 고성혁의 역사추적에서 옮긴 것이다. 기록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재 현지를 답사하고 사진까지 곁들인 선배 연구가들의 도움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성혁 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554년 7월 신라와 백제의 대회전은 역사에 관산성 전투라고 기록되지만 실재는 백골산성에서 대회전이 치러졌고 신라는 이때부터 한반도의 주도권을 확보해 가는 반면 백제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이 전쟁에 참전하여 백제를 도왔던 경북 고령의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되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몇 백년간 백제와 동맹관계를 유지해 왔던 가야제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진흥왕은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관경비와 단양에 적성비를 세워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다. 창녕비는 561년, 함남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수 있으나 북한산비는 훼손이 심하여 건립연대의 해독이 불가하다. 북한산 문수봉 아랫쪽의 비봉에 세워져있던 진흥왕 순수비는 조선 순조 16년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백제는 가야를 합병하지 않고 몇 백년간 동맹국으로 대우해 왔는데 6세기의 신라는 상대국을 정복하면 바로 신라의 땅으로 편입하여 직접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확립은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으나, 고구려나 백제보다 150년후에야 불교를 수용하면서 신라는 늦은만큼 확실하게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진흥왕은 재위 37년만인 576년 43세로 죽었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그의 치세하에 마련된 것이다. 이 시절의 신라 군부를 움직인 이사부와 거칠부 두 사람은 시대가 낳은 탁월한 전략가로서 삼국중 가장 후진적이던 나라가 100년후 삼국통일의 주역을 맡을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6세기 중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에 10개의 가야 소국들이 남아 있었는데  고령의 대가야 (加羅國) 가 마지막으로 562년 신라에게 멸망하자 일본의 欽明천황( 539 – 571재위)이 남긴 피맺인 절규가 일본서기 흠명치세 23년 (562년) 여름 6월기사로 실려있다.

신라는 서쪽 구석에 치우친 보잘것 없고 야비한 나라이다. 하늘을 거역하는 무도을 저지르고 우리의 은의를 배반하고 우리의 직할지를 쳐부셨다. 우리 인민을 해치고 군현에 해를 입혔다. 옛적에 신령스럽고 총명하였던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노 미코토 (氣長足姬尊, 神功황후, Empress Jingu) 는 천하를 주행하며 힘 써 인민을 보살폈다. 신라가 곤란한 일을 당하자 불쌍히 여겨 신라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으며, 요해지의 땅을 주어 신라가 번영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노 미코토가 신라를 언제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느냐. 우리국민도 신라에 원한 같은 것은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장창과 강궁을 들고 임나(가야)를 공격하여 거대한 이빨과 날카로운 손톱으로 인민을 학살하였다. 간을 찢어 발기고, 사지를 도려냈으며, 뼈를 부시고 , 시신을 불태우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임나사람을, 관리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칼 도마에 올려놓고 마음데로 난도질을 하고있다. 왕의 땅에 살면서 왕의 신하로서 그 땅의 곡식을 먹고 그 땅의 물을 마시고 산 사람으로서 이러한 말을 듣고 애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태자, 대신들은 서로 도와서, 대지위에 피눈물을 흘릴 망정 원한은 드러나지 않게 가슴 속에 감추고 가야 할 사람들이다.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 그 몸을 수고하여 봉사하는 자일진데, 선왕의 은혜를 입고, 후세에 선왕의 뜻을 이어 가려면 단장의 아픔을 이겨낼 생각으로 반역자를 응징하여, 천지의 아픔을 달래고,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 죽어서도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 한 한(恨)을 남길 것이다.

흠명치세 32년 (571년) 여름 4월 15일 천황이 병으로 누웠다. 황태자가 타지에 있어 부재중이므로 역마를 달려 대전으로 불러들여 그 손을 잡고 천황이 말했다.

나는 병이 무거워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뒤를 부탁한다. 너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전과 같이 임나와 사이좋은 사이로 회복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이 달 천황은 62세로 붕어하였다. 위와 같은 언사를 보고 欽明천황이 가야의 후손일꺼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야를 빌어 백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欽明천황의 유지를 받들어 30대 敏達천황(Emperor Bidatsu, 538 – 585)이 등극하며 그는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欽明의 아들이 아니라 백제 성명왕의 둘째 아들로 위덕왕의 동생이다. 이 때 왕위 계승권은 철저하게 장자에게 있었으며 흠명천황은 성명왕의 동생이므로 그 아들 중 천황이 된 사람은 32대 崇峻천황 (530 –592) 한 사람 뿐이다. 나머지 백제 27대위덕왕, 일본 30대 敏達천황, 일본 31대 用明천황 (540 – 599, 백제 28대 혜왕), 백제 29대 법왕 ( ? – 600)은 모두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일본 33대 推古천황 ( Empress Suiko, 554 – 628) 도 성명왕의 딸이다.

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26. 순타태자(淳陀太子)





서기 513 6 백제는 다시 "하헤국 (伴跛国, 伴路國 오기)  우리나라의 코몬(己汶) 땅을 빼앗았읍니다천황의 은혜를 입어 돌려 받을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주청하였다

8 26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 죽었다(百済太子淳陀薨)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조에 기록된 위의 백제태자 사망기사(513) 그냥 흘러 넘길 없는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일본서기가 백제태자의 사망기사를 다룬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5 (서기 597) 4 백제왕이 왕자 아좌(阿佐) 보내 조공하였다(百濟王 遣王子 阿佐 朝貢) 기사는 있지만 다음 그가 야마토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2007 부여 왕흥사적의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577 2 15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 위덕왕의 이름)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刹本舍 / 二枚葬時 / 神化爲三).” 명문이 발견되었다. 명문에 의하여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 이전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도 일본서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순타태자의 사망기사를 실었을 아니라 ()이란 글자를 사용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는 약간의 힌트를 남겨 두었다킨메이(欽明) 치세 13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오에 (箭田珠勝大兄) 황자가 죽었다 (箭田珠勝大兄皇子薨去) 기사를 짝으로 이해하면 양쪽 모두 (薨) 사용하고 있다. 킨메이 천황의 장자가 죽었다는 기사이다

킨메이(欽明)천황이 즉위하고 황후를 세울 540 1 15 센카(宣化)천황의 황녀 이시히메(石姬) 세워 황후로 세웠다이시히메는 2 1녀를 낳았다. 장자를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라 한다. 다음이 오사다노 누나쿠라노 후토타마시키 (譯語田渟中倉太珠敷 = 후의 비다쯔천황) 이다이렇게 킨메이(欽明)천황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그가 서기 552 죽었다고 기록했다.

리고 바로 이어서 553년부터 백제왕자 여창이 일본서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시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한번 보면 금방 눈치 있도록 기록되어 있다. 킨메이(欽明)치세 14 (서기553) 백제의 왕자 여창은 전군을 몰아 고구려에 들어가 백합벌에 성채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서기 554 왕자 여창은 나이많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서기 557 왕자 여창이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27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죽었다는 기사는 서기 552 이후 사람은 야마토를 떠나 백제에서 생애를 보낸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왕자 여창은 위덕왕으로 598년까지 무려 44년간 왕위에 있었다. 야마토의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백제에 오면 왕자 여창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성왕이라면 킨메이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사는 역사가들의 고심의 산물이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백제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떼어내서 독자적인 야마토 황실 계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서기 513 순타태자의 사망기사는 백제 무령왕의 태자가 야마토에 와서 일생을 마쳤다는 뜻이다. 그가 바로 킨메이(欽明)이다. 순타는 서기 509 또는 513 생으로 보면 된다. 일본에서는 킨메이의 생몰년을 “509 – 571”로 보고 있으므로 순타태자가 509년 생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무령왕이 백제왕이 다음 혼인한 백제의 황후 소생은 성명(聖明) 순타(淳陀 = 欽明)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무령왕이 40세를 넘어 백제 왕이 되었으므로 왕이 출생한 후손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기 2001 12 18 일본의 헤이세이(平成)천황이 황거 이시바시노마(石橋間)에서 기자회견중 자신으로서는 칸무(桓武)천황 (737 – 806)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씌여있으므로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읍니다. 무령왕 (461 – 523) 일본과 관계가 깊고 이래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청되게 되었읍니다.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칸무천황의 생모란 타카노(高野)황후 (? – 790) 코오닌(光仁) 천황후이며 이름이 니이가사(新笠), 본성은 야마토우지(和氏), 오토쯔구(乙繼) 딸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야마토우지(和氏) 조선(祖先)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純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순타가 킨메이 천황의 백제 이름이었다면 타카노 황후는 신분이 낮은 도래인 출신이 아니라 원래 황족의 일원이며 칸무(桓武)천황의 부계든 모계든 백제왕실의 후손이다.

일본서기의 서기 513년 순타태자와 552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오에 (箭田珠勝大兄) 황자의 사망기사는 단순히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역사가들은 보다 심오한 비밀을 그런 식으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고 이해한다.




2008년 10월 3일 금요일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왕무의 상표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문주왕 3년(477) 봄 2월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여름 4월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송서 순제 승명(昇明) 1(477) ()에서 사신이 와서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는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였다. 

송서 순제 승명(昇明) 2(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그는 고구려의 무도함을 규탄하고 부형의 시절부터 고구려를 응징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와 형님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나 이제 자신이 그 뜻을 실현코자 한다고 하며 송 황제의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황제는 그를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백제는 진사왕과 아신왕 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략을 받아 국력신장의 기세가 꺾이고 가야와 왜국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난 서기 455년 개로왕이 즉위하고 역내의 영향력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송서 순제 승명 2(478) ()에서 무()가 사신을 보내 장문의 상표문을 올렸다고 하였다. 표문은 무()의 아버지 제()가 동()으로 모인 55, (西)로 중이 66, 바다 건너 해북 95국을 평정하였다고 하였다.

모인 55국은 열도의 일본해 연안에 위치한 이즈모(出雲), 이나바(因幡), 타지마(但馬) 와카사(若狹), 후쿠이(福井) 지역을 말하며 이 곳에서 쿄우토(京都)를 거쳐 야마토()로 진입할 수 있다. 중이 66국은 큐우슈우의 오오스미(大隅), 사쯔마(薩摩), 히고(肥後), 히젠(肥前) 지역이다. 야마토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전에 확보해야 되는 땅이다. 바다 건너 해북 95국은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에 있는 가야제국을 말하며 고구려의 공격으로 피폐해져 백제와의 결속력이 떨어진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백제는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한성 백제가 멸망하는 변을 당한다. 개로왕과 왕족들은 살해되었고 신라에 구원병을 얻기 위해 떠났던 여기(餘紀)가 살아 남은 사람들을 수습하여 웅진(熊津)으로 피난하였다. 여기(餘紀) 웅진에서 백제의 명맥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서기 477년 야마토()를 장악하고 있던 곤지(昆支)가 웅진에 나온 기록이 백제본기에 보인다. 곤지(昆支)는 송서에 좌현왕 여곤(餘昆)으로 기록되어 있고 경(慶, 개로왕), 기(紀, 문주왕), 곤(昆, 야마토의 세이네이 천황)은 형제간이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송서의 기록을 종합하여 판단하면 곤지가 백제에 나오던 서기 477년 무(武)가 야마토(倭)의 왕이 되었고 그가 송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된다.(구자일 설). 그러면 그는 누구일까? 일본서기는 당연히 유우랴쿠(雄略)라고 말 할 것이다. 서기 477년이면 461년 출생한 시마왕(斯麻王)이 16세가 되었고 그는 백제 개로왕의 장자이다. 나중 그는 백제의 무령왕이 되지만 무(武)라는 이름은 477년 그가 이미 쓰고 있었다고 본다. 송서에 보이는 왜왕무(倭王武)는 그 때까지 견사(遣使)한 다른 왜왕보다 강력한 것을 요구하였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고 고구려의 장수왕과 같은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요구하였다. 이는 백제와 왜의 정통성이 자기에게 있다는 자존심의 발로이다.

남제서 왜국전은 건원(建元) 원년(479) 왜왕무를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에서 진급하여 6국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양(梁) 천감(天監) 1(502) 왕조 수립과 함께 왜왕무를 정동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남제(南齊)와 양()은 나라를 개국하자마자 왜왕무(倭王武)를 진동대장군, 정동대장군으로 깍듯하게 모시는 것은 왜왕무(倭王武)가 백제 개로왕의 장자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3 4(479) 백제 23대 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일본에 체류 중인 곤지의 다섯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쯔쿠지국(筑紫國)의 병사 500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내니 24대 동성왕이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동년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거기서  쯔쿠시국(筑紫國)의 아찌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서기 479년 곤지(昆支)와 왜왕무(倭王武)가 위의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진다. 야마토(倭)는 왜왕무의 어머니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10 (488) ()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서기 488년 뜬금없이 중국 대륙의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백제가 승리하였다는 기사가 동성왕 10년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편이 갈려 있다. 이 기사는 자치통감에서 인용되었다고 보이는데 자치통감 권 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488) 12월 조를 보면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가 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건강실록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북위에게 패전한 때는 484년이었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백제와 북위는 484, 488, 490년 세번에 걸쳐 전쟁을 하여 484년에는 북위가 승전했으나 그 후 488, 490년 두 번의 전쟁에서는 백제가 대승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위 자치통감의 기록은 영명 2(484)의 사실을 영명 6(488)으로 그 연대를 착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서 백제전도 백제국은 본래 고려(高驪)의 무리로,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후에 고려가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가 요서를 다스렸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일컫는다라고 기록했다.

남제서는 양 나라의 소자현(簫子顯)이 편찬한 남제(479-502년)의 정사이다. 이 남제서에 의하면, 백제의 동성왕은 490년 남제 조정에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이번에 파견한 행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長史) 고달(高達)과,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楊茂)와, 행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會邁) 등 3인은 말과 행동이 맑고 밝아서 충성된 마음이 일찍부터 나타나서 지난 태시(泰始) 연간(465-471년), 함께 송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간 일도 있사옵고 이제는 신의 사신을 맡아 먼 바닷길 험한 데를 가서 그 지극한 효험을 나타냈아오니 마땅히 작위를 올려주어 삼가 먼저 예에 의하여 각각 행직을 주시기 바랍니다.  

달(達)은 변경을 잘 다스린 효험이 일찍부터 나타났고 공무에 부지런하고 수고로왔으니 이제 행용양장군 대방태수를 시키시옵시고 무(茂)는 뜻과 행동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조금도 폐하지 않았으니 이제 행건위장군 광릉태수를 시키시옵시고 매(邁)는 뜻을 주밀히 갖고 여러 번 부지런한 효험을 나타냈사오니 이제 행광무장군 청하태수를 시키시옵소서라고 말하니, 남제 조정은 이를 모두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리면서, 각각 장군 등의 호(號)를 하사해 주고, 태수 등의 관직을 제수하며 또 사지절도독 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삼았다.

또 사신이며 배알자인 복사 손부(僕射孫副)로 하여금 모대(牟大)에게 명하여 그의 죽은 조부 모도(牟都)를 이어서 백제 왕을 삼도록 했다. 또 조서를 내려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牟大)로 하니 이제 (大)는 죽은 조부 모도를 계승하여 백제왕을 삼는다. “라고 하였다.

이 해(490)에 위노(魏虜)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牟大)가 장수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幹那)를 보내어 노군(虜軍)을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건무(建武) 2(495)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예로부터 책봉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부절과 부월을 받아 들고 오랑캐들을 물리쳤습니다. 지난번 저근(姐瑾)등이 나란히 관작을 제수받는 은총을 입은 것으로 신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읍니다. 지난 경오(庚午)(490)에 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력을 일으켜 깊숙히 핍박하여 들어 왔읍니다. 신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매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처럼 들이치니 오랑캐들이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읍니다. 적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수급을 베니 들판은 엎어진 주검으로 붉게 물들었읍니다. 이로 인해서 그 예기가 꺾여 고래같이 사납던 것이 흉한 모습을 감추어 이제는 나라 안이 조용해 졌읍니다.

그러하오니 그들의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沙法名)으로 행정로장군 매라왕(邁羅王)을 삼고 찬수류(贊首流)로 행안국장군 벽중왕(辟中王)을 삼고 해례곤(解禮昆)으로 행무위장군 불중후(弗中侯)를 삼고 목간나(木幹那)는 전에 군공이 있었으니 이를 올려 행광위장군 면중후(面中侯)를 삼으시옵소서.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제수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모견(慕遺), 행정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왕무(王茂),참군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張塞)과 행양무장군 진명(陳明)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 쓰며 국가가 위급한 것을 보면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어려운 일을 행해서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읍니다. 이제 신의 사신의 책임을 맡겼사온 바 바다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가서 그 지극한 정성을 다 했사오니 실상 마땅히 작호를 올려 주어 각각 칭호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성조에서는 특별히 제수해 주시옵소서” 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모두 각각 군호를 주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북위와 백제간의 전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학자가 많다. 북위가 한반도 서해안의 백제를 침략했다는 것이 지정학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가 대륙에도 진출해 있었다면 전혀 무리없는 기록이 된다. 그럼 과연 이 시대 중국대륙에 영토를 확보하여 운영할 만한 국력을 백제가 가지고 있었을까?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백제는 동성왕 대에도 자국의 영토 밖에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국력을 회복하지 못 하였다.

무령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20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서기 479년 곤지(昆支)와 왜왕무(倭王武)가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은 열도에도 없었고 백제에도 없었다. 이 때부터 서기 501년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장할 때까지 그의 흔적이 모호하다.

상대적으로 5세기의 신라는 백제의 몰락을 즐기며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3 년 (481) 봄 2월 비열성(比列城)에 거동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솜을 넣어 만든 군복을 내려주었다. 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쫓아가 이하(尼河)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천여 명을 목베었다.

소지왕 8 년(486) 봄 정월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았다. 일선군 땅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굴산성(屈山城) 두 성을 고쳐 쌓았다. 2월 내숙(乃宿)을 이벌찬으로 삼아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게 했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 낭산(狼山) 남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이 무렵 신라의 국력은 소백산맥의 추풍령을 넘어 중원을 넘보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 때 쌓은 삼년산성과 굴산성은 서기 554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이 전사하는 곳이며 이 곳에서 대전지역을 돌파하면 바로 백제의 수도 부여를 칠 수 있는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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