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7일 금요일

44. 일본.일본문화의 뿌리(5)

데라카도 신 (寺門 伸) 교수의 “조선반도에서 일본을 바라본다”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5)의 연재를 계속합니다.

조선반도와 일본과의 관계는 영국과 아메리카 합중국의 관계와 닮았다고 말하는사람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 생각에 찬성이다. 반도에서의 이민이 열도에 건너와 만든 것이 일본이다. 한편 신대륙 (아메리카)에는 유럽에서의 이민이 몰려와, 유럽내의 역학관계에 의하여 북아메리카의 태반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나, 결국 독립을 쟁취, 본국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양국 (일본과 아메리카)의 역사에 공통점이 있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국민은, 자국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현재 아메리카 합중국이라 불리는 지역에 유럽인이 대거 밀려 오기 전, 거기는 인디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독자의 문화를 갖고 생활하고 있었으나, 합중국의 역사에는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도달 이전의 인디언들의 생활과 문화가 등장할 일은 없다. 왜냐하면, 합중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문화적 뿌리가 유럽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사”라면, 인디언의 문화나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의 존재를 무시할 리가 없게 된다.) 인디언 문화가 현재의 합중국 문화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다. 인디언의 자손들도 합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존재하고 있다 (약 200만명, 총 인구의 약 0.8%). 그러나 인디언의 문화가 합중국 문화의 뿌리라고는 아무도 말 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인디안의 문화와 繩文문화를 동일시하는 것은 난폭한 논의라고 할 지 모르지만 문화의 아이덴티티란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 유비가 결코 틀리지 않다고 본다.

<주1> 식민지란 말은 제국주의시대이후의 개념이므로 고대의 열도 (현재의 일본)과 반도 (현재의 한국.북조선 지역)의 국가간의 관계를 식민지나 지배 피지배란 용어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2> 고대의 조선반도에는, 복수의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상세불명). 그들은 좁은 반도에 오랫동안 공존하는 동안, 동일한 (또는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게 되었으리라. 이 문화가 열도에 전파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야요이문화 (彌生文化)라 부른다. 이 지역을 가칭 “고대동아시아문화권”이라 명명하자 (“코리아-저팬문화권”이란 명칭도 생각해 보았음). 중국문화의 임팩트를 받아 생긴 이 문화는, 드디어 독자의 발전을 보여, 이 지역에 고도한 문화의 꽃을 피운다. 왜국과 야마타이국과 초기의 야마토조정은 반도의 가야, 고구려, 신라, 백제등과 함께, 이 문화권에 있는 나라로 이해해야 된다. 이 지역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보는 것은, 이것이 알타이어족에 의한 문화권이기 때문이다.

<주3> 현재의 한국, 북조선의 표준어 (한국어 = 조선어) 는 신라어가 발전한 것으로, 신라의 언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데, 가야, 고구려, 백제라는 나라에서 어떤 언어가 사용되었는지 보여 주는 문헌이 없어 유감스럽지만 알 수 없다. (비문과 銘등은 있으나, 공문서는 모두 한문으로 기재되었으므로, 일상의 언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민족이 다양했다면 언어도 다양했을 터.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중국어를 빼면) 알타이어 족에 속하는 언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어의 祖語도 그 가운데 하나로 반도 가운데 일본어의 조어를 말하는 사람들 (아마도 왜인들) 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쨋든 문헌이 없으므로 현재로서는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고대의 일본이 왜국으로 불렸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 잘 아는 일인데, 왜국이란 왜인들의 나라라는 것으로, 왜인이란 원래 일정의 인종 그룹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고 생각된다. (“허리가 앞으로 구부러지고 키가 작은 사람” 이라는 의미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하여, 이 왜인들은, 열도 (현재의 일본) 뿐 아니라, 반도 (현재의 조선) 에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는 “왜” 나 “야마타이국”이, 훗날의 대화조정과 어떤 관계였을까는 밝혀진 바 없다. 어느 쪽도 彌生人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간 나라이므로, 왜인의 祖先은 도래인이라 생각해야 된다. 그러면 왜인은 가야인, 고구려인, 신라인, 백제인과 나란히 반도에 살고있던 한 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 단, 당시 반도의 인종구성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신라인과는 인종적으로 다른 가야인과 백제인, 고구려인이 있었을지 어떨지는 불명이다. 고구려의 왕과 백제의 왕은 동족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 양국은 인종적으로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 가야는 일본에서 미마나(任那)로 불렸고 이 지역은 고대일본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가야 = 왜”라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일본열도에 정착한 도래인의 전부가 반도에서 왔을 리는 없고, 중국대륙에서 오거나 남방의 섬에서 들어 온 루트도 생각할 수 있으나 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도래인의 주류를 차지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양자강 유역에 있던 水稻米作민족이 조선반도와 일본열도에 동시기에 도래하여, 그들이 彌生문화를 가져 온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 경우라도, 일본문화와 조선문화는 동일한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반도의 각 지역으로 부터 일본에 들어 온 도래인들은 정착한 지역마다 소규모의 나라를 형성하였다. (이 나라를 만든다는 생각 자체가 야요이인이 열도에 가져 온 생각이다). 열도에서 도래인의 다수파였다고 생각되는 왜인의 그룹이 강대하게 되고, 이것이 다른 그룹을 복속시켜서 (다른 말로 하면 규합하여), 드디어 통일 국가로 향해 갔다고 생각된다. “倭”란 후에 열도의 통일국가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어, 왜가 국명으로 불리게 되고, 이민족 (彌生人, 繩文人을 불문하고) 지배지역으로 확대하여 감에 따라 새로운 倭국이 되고 그 지역에 살던 사람도 또한 왜인으로 불리데 되었다. 또 왜인이라 불린 사람들은 제주도, 조선반도 남부등에도 있었다고 보이나, 신라왕국 형성후 조선반도의 “왜인”은 신라인이 되었다. 이렇게 왜인과 일본인이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미노 요시히꼬 (網野善彦, 1928 – 2004) 씨의 “일본의 역사제 00권: 일본이란 무었인가” (講談社)의 일절 (P87)인데, 여기에 아이덴티티라고 하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같은 아이덴티티라도 <민족적 ( =인종적) 아이덴티티>와 <문화적 아이덴티티>, 그리고 <국가적 아이덴티티>의 3가지는 분명이 구별할 필요가 있으나 우리들은 이 구별이 애매하므로, “같은 일본인 (=국가적 아이덴티티가 동일) 이면 문화도 민족도 같을 터 (문화적, 민족적 아이덴티티가 동일)”라고 생각해 버린다.

정치가들이 “일본은 단일민족이다”라고 발언하여 항의를 받아 사죄하고, 철회하는 것을, 끓임없이 반복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 (의 대다수)가 繩文人을 일본인의 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繩文문화가 자기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라고 보고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은 이미 말 했지만, 일본인이 옳바른 자기인식과 역사인식 (양자는 결국 동일한 것이다) 을 갖고 있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그릇된 아이덴티티는 일본인의 유니크 신앙으로 부터 온 것이며 또 그 근본에는 “천황제”가 있다.

앞에 말한 網野善彦씨는 같은 “일본이란 무었인가” 에서, 1999년 8월 9일 성립한 “國旗國歌法법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법안의 제안자, 찬성자에게 이것은 1945년 8월 15일 패전이래 오랜 “현안”의 해결인 것이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일본인이 갖게 하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의도로, 법안성립이 강행되었을 것이다…. (중략) ….

이 법률은 2월 11일이라는 戰前의 紀元節, 즉 神武천황의 즉위일이라는 전적으로 架空의 날을 “건국기념일”이라고 정하여 국가의 국기국가를 법제화한 것으로, 어떤 식으로 해석을 바꾸더라도, 이것이 戰前의 히노마루(日丸), 기미가요(君代)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p19 – 20). 여기 계속되는 부분에서, 綱野씨는 “이렇게 허위에 입각하여 국가를 상징하고 칭송할 것을 법의 이름하에 정한 것이 이 “국기, 국가법”이라고 근엄한 어조로 일본정부의 역사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일본의 건국기념일이 신화에 근거한 것이며 아무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확히 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근대국가로서 아주 수치스런 일이다.

신화를 국가의 틀의 기본 (=상징으로서의 천황제) 으로 하는 나라에 옳바른 역사인식이 있을 리가 없다. 천황제가 그 근거를 (헌법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에 바탕을 둔다”고 명기되어 있듯) 국민총의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정부의 정통성이 천황제에 바탕을 둔다고 생각하는 한 (자민당보수파의 정치가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명백하다), 역사의 신화화는 피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부분은 어려운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 논점을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으나, 길어지게 되므로 이 정도로 마치고 금회의 내용을 간추린다.

일본과 한국 (및 북조선)은 공통의 문화적 뿌리를 갖는다. 따라서 한국 (및 북조선) 의 언어, 문화, 역사를 살펴서 일본과 비교 대조하는 것이, 우리들이 “일본이란 무었인가”를 생각할 때 극히 중요한 힌트를 줄 것이다. 일본과 한국 (및 북조선)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종적으로도 공통의 뿌리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보족>여기서 기술한 내용을 보고 日朝同祖論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리라고 본다. 일조동조론이란 1921년 키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 – 1939) 씨에 의해 발표되었던, 일본과 朝鮮이 祖先을 같이 하는 동족, 결국 형제민족이라고 하는 설이다. (단 이때 일본이 형에 해당한다). 이 생각은 일본의 조선반도 식민지 경영에 이용되었으므로, 日朝同祖論이란 말만 들으면, 일본인이고 한국인이고 간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부분적으로 동일 인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 하기도 하나, 실은 이것은 거의 의미가 없는 말이다.

현재의 일본인과 한국인은 민족적으로 다르다 (민족이란 개념은 공동환상이며, 생물학적으로 정의 되는 인종과는 관계없다) 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므로, 그 위에 서서, 이 두 민족이 공통의 문화적 뿌리를 갖는다는 것, 이것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 일본인에게나 한국인에게나 중요하지 않겠는가. 日朝同祖論이란 용어에 빗대 말하면, 日韓(朝)文化同源論 정도로 하면 되지 않을까. ( 끝)

2009년 2월 20일 금요일

43. 구세관음(救世觀音)


국보 관음보살입상 (구세관음)은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 八角圓堂으로 알려진 유메도노(夢殿)의 본존비불로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던 불상이다. 이 불상은 높이 178.8센티미터. 하나의 구스노끼 (樟木) 통나무로 만든 것이다. 밑에 칠을 하고 금박을 입혔다. 장기간에 걸쳐 백포로 싸 두어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내력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호류지 동원가람의 본존으로서 천년이상 모셔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옛 기록에는 이 불상이,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일절 기술하고 있지않다. 天平寶字5년 (761) 호류지 사료에 “上宮王 (성덕태자)等身관세음보살상”이라 나와있어, 성덕태자의 등신상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왜 비불화되었는지 그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호류지는 서원가람과 동원가람의 두개의 브록으로 되어있다. 유메도노 (夢殿)는 동원가람의 중심적인 건물인데 天平11년 (739) 성덕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팔각원당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덕태자는 推古천황 9년 (601) 2월 이까루가노 미야 (斑鳩宮) 의 조영에 착수하여 4년반 후 推古13년 (605) 10월 궁이 완성되자, 20여년간 살던 가미쓰노미야 (上宮)를 떠나 이까루가궁으로 이사했다. 성덕태자는 推古30년 (622) 49세로 서거할 때까지 17년간 이 궁에서 살았다. 그의 사후 장남 야마시로노 오호애 (山背大兄) 황자가 이곳에서 살았는데 皇極천황2년 (643) 권력투쟁으로 보이는 정변으로 야마시로노 오호애황자의 일족이 몰락하고 이까루가 궁은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 天平11년 (739) 이까루가 궁을 방문한 行信僧都는 너무나 황폐한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황태자인 阿倍內親王 (훗날의 孝謙천황)에게 진상하여 上宮王院를 부흥하였다. 그것이 동원이다. 이 때 行信이 유메도노의 본존(本尊)으로 안치한 것이 구세관음이다. 그러나 본존으로 새로 彫像한 것이 아니고 성덕태자와 연고를 가진 다른 사원에서 양도받아 안치했다 한다. 이 관음상은 페놀로사(Fenollosa, 1853 – 1908)가 동양의 모나리자에 비유한 신비한 미소를 띄고있으며, 당시의 도리(止利) 양식의 특징을 답습하고 있다. 일본의 미술사가는 7세기초의 彫像으로 추측하며, 태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작되었거나, 아니면 태자 자신의 모습이라 말하여 진다.

아스까(飛鳥) 彫刻의 巨星, 구라쓰쿠리노 토리 (鞍作止利)는 아스까시대를 대표하는 불사(佛師)로서,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상을 위시하여 소위 도리양식(止利樣式)이라 불리는 많은 불상을 남겼다. 도리란 이름이 정사에 처음 보이는 것은, 일본서기 아스까 元興寺의 彫像에 관한 기술이다. 이에 의하면 推古13년 (605), 아스까 元興寺 丈六금동불과 繡佛(천에 수를 놓은 것)의 제작을 구라쓰쿠리노 도리에게 명하여 다음 해 금동상이 완성되었으나, 상이 너무 커서 문을 부수지 않으면 안치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도리가 궁리하여 堂內에 안치할 수 있었다. 도리의 아버지는 다스나(多須奈), 할아버지는 시바 다쓰도 (司馬達等)라 하며 蘇我氏와 관계깊은 백제의 기술자들이다.

호류지에는 석가삼존상과 구세관음상, 百濟관음상과 같은 아스까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불상들이 있다. 석가삼존상은 금당에, 구세관음은 유메도노(夢殿)에 안치되어 있었지만 百濟관음상은 금당과 강당등을 전전하는 “유랑하는 불상”이었고, 1900년 무렵에는 奈良의 帝室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그후 1998년 호류지안에 새로 百濟觀音堂을 지어 현재의 모습으로 안치되었다. 석가삼존상과 구세관음상은 아스까 전기, 百濟관음상은 아스까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삼존상은 광배에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이 불상을 도래인인 도리(止利)가 서기 623년 제작했음을 알수 있다. 구세관음상은 도리가 만든 건 아니지만 “도리(止利)양식의 보살상의 계보에 속한다고 하며, 중국 남조, 양(梁)나라 양식을 원류로 삼은 백제양식으로 부터 받은 영향을 지적할 수 있는 彫像이라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일본측의 견해이다.

현재는 1년 2회 봄과 가을에 일반에 공개된다. 이 불상 역시 한일간에 제작주체를 둘러싸고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세관음을 말 하려면 꼭 거론해야 될 사람이 있는데 미국인 어네스트 페놀로사 (Ernest Fenollosa, 1853 – 1908) 이다. 하바드 대학을 나오고 1878년 일본동경대학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는 繪畵에 특별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일본의 역사적인 고미술품의 발굴, 등록 및 문화재보호법 제정등의 탁월한 업적을 일본에 남긴다.

1884년 31세때 그는 일본정부의 보물조사단에 임명되어, 문부성직원이며 그의 제자인 오까쿠라 텐신 (岡倉天心)과 함께 나라와 쿄오토의 고대 신사와 사찰을 역방한다. 이 조사의 최대의 목적은 호류지 유메도노의 개비(開扉). 내부에는 천년전 창건시부터 “구세관음상 (등신대의 성덕태자상)”이 보관되어 있지만, 주지마져도 봐서는 안 되는 “절대비불” 로 되어있었다. 절대비불이란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되는 것으로 전 해 오는 비밀의 부처로 일본에 가끔 눈에 띄는 전통이다. 호류지의 승려들은 “개비하면 지진이 일어나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저항하였으나 페놀로사는 정부의 허가증을 내밀고 자물통을 열도록 압박하였다. 밀고 당기는 기나 긴 실랑이를 거쳐 유메도노에 들어가자, 승려들은 겁에 질려 모두 도망쳤다. 관음상은 천으로 돌돌 감겨 있었다.


페놀로사는 감격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오랜세월 동안 사용한 적이 없는 열쇄가 자물통속에서 금속음을 내었을 때의 감격은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다. 불상이 안치된 전각의 문을 열자, 목면의 천으로 붕대처럼 몇 겹이고 둘둘 감아진 사람 키 높이 정도의 물건이 있었다. 천은 약 450미터나 되었고, 그것을 푸는 것도 쉽지 않았다. 드디어 감겨있던 마지막의 천이 풀려 나가자, 이 경탄할 만한, 세계에 둘도 없는 彫像은 수세기를 지나 우리의 면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세관음은 보일 듯 말 듯, 미소짓고 있다. 이 장면을 바라 본 사람 모두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할 말을 잃었다. 호류지의 승려들이 믿고 있던 개비하면 세상이 멸망한다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세관음과 만나고 난 다음 해 1886년 32세때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도로 개종한다. 시가현 미쓰이데라 (三井寺 = 園城寺) 에서 수계(受戒), 체신(諦信)이란 법명을 받았다. 2008년은 그의 사후 100년이 되는 해라서 일본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많은 행사가 열렸다.

이상의 기록은 일본측 자료에서 찾은 내용인데 한국측의 홍윤기교수는 “성덕태자전력”과 “부상략기”속에 <백제 위덕왕이 부왕 성왕을 추모하여 왜 왕실에 보냈고, 호꼬지(法興寺) 금당에 서기 593년 안치시켰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불상은 백제에서 만들었으며, 왜 나라에 보내왔을 당시에는 호꼬지에 모셨던 것을 뒷날 호류지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덕왕이 구세관음을 倭 나라로 보낸 발자취를 상세하게 기술한 것은 호류지 고문서 “성예초(聖譽抄)이다. 지난 날 필자 (홍윤기 교수)가 발굴한 성예초의 구세관음 기술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위덕왕은 서거한 부왕인 성왕을 그리워하여 그 존상을 만들었다. 즉 그것이 구세관음상으로서 백제에 있었던 것이다. 성왕이 죽은 뒤 환생한 분이 일본의 가미쓰노미야(上宮) 성덕태자이다.( 저자 주: 성덕태자는 성왕의 손자). 가미쓰노 미야태자의 전신(前身)은 백제 성왕이다.> 성예초는 지금부터 약 600년전인 오에이(應永)연간 (1394 –1427) 호류지에서 저술된 귀중한 고문서를 1786년 호류지의 학승 센한(千範)이 다시 필사한 고문헌이다. 성예초보다 약 200년전인 13세기 사서인 부상략기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금당에 안치된 금동 구세관음은 백제국왕이 서거한 뒤에 국왕을 몹시 그리워 하면서 만든 불상이다 (故威德王 戀慕父王 狀所造顯之尊像 卽救世觀音像是也).이 불상이 백제국에 있을 때 백제로 부터 불상과 함께 율론(律論), 법복, 여승등이 왜 왕실로 건너왔다. (推古 원년조)>. 이 당시 6세기 말 경 벌써 백제로 부터 여승도 왜 왕실로 건너왔다고 한다. 또 여기서 금동불상으로 기술한 것은 녹나무에 금박한 것을 당시에는 나무가 아닌 청동에 도금한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것 같다.

홍윤기 교수는 동아미술사강 (有賀長雄 譯, 1912)에서 발췌한 것이라며, 페넬로사가 구세관음을 발견했던 장면묘사를 덧 붙히고 있다. < 마지막으로 감싼 천이 떨어지면서 이 경탄 해 마지 않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조상(彫像)은 대뜸 본인의 눈 앞에 나타났다. 모습은 인체보다 조금 컸고, 어떤 단단한 나무로 매우 면밀하게 조각했으며 금박을 입혔다. 머리에는 경탄스러운 조선식 금동조각으로 된 관(冠)과 보석을 흩뿌린 것 같은 여러 줄의 긴 영락이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일견 이 불상이 조선에서 만든 최상의 걸작이며 推古시대의 예술가, 특히 성덕태자에게 있어서 강력한 모델이 된 것이 틀림없다고 인식했다.> 이상이 홍윤기 교수가 쓴 구세관음 기사이다.

백제 위덕왕이 부왕의 모습데로 불상을 제작하여 외국의 왕 (당시의 推古천황) 에게 보내서 예배하도록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백제와 일본이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단순한 국가간의 외교관계라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 백제 왕을 포함하여 아스카의 왕들도 성왕의 아들과 딸이라고 알고 있다. 아버지 성왕의 모습으로 불상을 만들어 일본의 동생들에게 예배하도록 했다면 이야기는 쉽게 이해된다.

2009년 2월 13일 금요일

42.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4)

데라카도 신 (寺門 伸) 교수의 “조선반도에서 일본을 바라본다”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4)의 연재를 계속합니다.

그러면 “이중구조모델”설은 이러한 바이어스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을까. “이중구조모델” 가설이 종래의 설보다 우수한 점은, 渡來人과 歸化人이라는 2개의 개념을 확실히 구별하고, 도래인이 일본의 국가형성에서 달성한 역할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이라는 불변의 주체가 있고, 그것이 외래의 문화를 받아들여, 繩文시대가 彌生시대로 되었다고 하지않고, 彌生문화를 가진 도래인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일본열도에 이주함으로서 이 열도지역이 새로운 문화단계로 진입하였다는 것, 그리하여 일본의 최초의 국가는 그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니하라(埴原)씨는 인정하고 있다.

하니하라씨는 이렇게 도래인의 역할을 바르게 평가하고는 있으나, 거기서 당연히 따라 나올 결론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중구조모델”이란 명칭 자체가 종래의 설 (繩文人자연진화설)에 대한 배려가 느껴져, 이 새로운 가설도, 우리들 마음속에 숨어있는 바이어스를 완전히 극복하는데 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중구조모델”이란 “繩文文化”와 “彌生文化”가 각각 일정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현재의 일본문화의 주요한 구성요소로 되어있다는 뜻이다. 여기 繩文문화와 彌生문화가 等價値로 놓여있는 셈이다.

彌生문화를 갖고 온 도래인들이 이 열도에 왔을 때 (에가미 나미오 (江上波夫)씨의 기마민족정복설의 주장처럼 단숨이 아니라, 아마 소그룹 단위로, 수백년 걸쳐 서서히 이주해 왔다고 생각된다). 거기 토착의 繩文人들 (繩文人들이 어디서 일본열도에 들어왔는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이 살고있었던 셈인데, 繩文문화보다 彌生문화쪽이 문명단계로서 앞 서 있었고, 도래인들은 선진의 무기를 갖고 있었으니까, (최초에는 도래인의 수가 적어서 繩文人과 공존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도래계의 彌生人들은 토착의 繩文人을 압도하였다라고 생각하는것이 자연스럽다.

이때 일본열도의 선주민인 繩文人들이 고를만한 선택은 2가지밖에 없다. 彌生人의 지배를 받을까 아니면 자기들도 彌生人의 뛰어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스스로 彌生人 (彌生문화를 가진 사람)이 될까이다. 결국 피정복자로 되거나 나아가 동화의 길을 걸을까의 양자택일이다. 피정복자로 되면, 살해되든지 강제적으로 동화되든지 어느 쪽이다. 어찌되었든 살아남은 繩文人들은 거의 모두가 彌生문화로 동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보충> 彌生人을 (인종적.민족적이 아니라) 문화적 개념으로 치면, “彌生문화를 가져 온 사람들” (渡來人) “彌生문화를 받아들인 사람들” (토착의 繩文인) 도, 모두 “彌生人”이므로, 소수민족인 繩文人에만 스폿라이트를 대면, “(대다수의) 繩文人은 자연히 彌生人으로 변화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繩文人이 자연히 彌生人으로 변화하였다”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동화된 繩文인의 수가 많다면, 그들이 갖고있던 문화와 생활습관의 일부가, 거꾸로 彌生人들에 의하여 채택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彌生人들이, 자기들의 기본적인 생활 스타일 (문화)를 버린다는 것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일본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繩文문화와 彌生문화의 두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이 2개는 “繩文人 자연진화설”이 주장하듯, 단계적 발전, 또는 점차적 이행으로 직접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 “이중구조모델”설과 같이, 이 두개의 문화를 현재 일본문화를 성립시킨 2개의 대등한 요소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日本列島史”라는 것이 있다면, 일본열도에는, 彌生문화 이전에 繩文문화가 번성하였다고 기술하여도,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 그 경우, 일본열도에 살고있는 사람 이쿠얼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가장 알고싶은 것은, 현재 일본인의 민족적 뿌리이며, 일본문화의 뿌리이다. 결국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이다. “일본열도의 역사”가 아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일본사”에서, 일본열도의 역사가 그데로 일본의 역사로 되었다는 것, 그 점에 먼저 의문을 갖는 것으로 시작하자.

현재 일본인에게 “繩文人”과 “彌生人”의 혼혈의 비율은 “3대7”이라는 설을 들어도, 일본 최초의 국가는 彌生人이 건국하였다고 들어도, 변함없이 많은
일본인은 자신들의 祖先을 繩文人이라 믿는 것은 무었 때문일까. 여기서도 역시, 일본인의 끈질긴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 같다.

<보충1> 繩文人과 彌生人의 혼혈의 비율이 3대7이라는 것은, 繩文人과 彌生人의 인종적 특징에 의해 추계하였으므로, 여기서 彌生人이라 말해진 사람들이 모두 도래계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 3대 7이란 숫자 자체도 당연 오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繩文人도 (열도에 도래한) 彌生人도, 각각 단일 인종은 아닐 터이다. 도래계의 彌生人 가운데 繩文人의 인종적 특징을 갖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토착의 繩文人 가운데 彌生人의 인종적 특징을 갖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단언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보충2> 전회의 바이어스 가운데 “繩文문화의 과대평가”라는 항목을 첨가하고 싶다. 일본인은 자기들의 祖先이 繩文人이라는 그릇된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으므로 繩文人과 그 이전의 구석기시대의 原일본인이 아주 고도의 문명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일본인은 최초부터 뛰어난 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므로서, 외래의 彌生人들의 문화에 압도된 굴욕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藤村新一 동북구석기문화 연구소 前副이사장에 의한 구석기발굴훼조사건에서, 연구자들이 너무 간단하게 속아 넘어간 것도, 이러한 점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현재 일본인의 (문화적) 뿌리는 彌生人이라는 것을 옳바르게 인식하면, 이런 문제는 일거에 해결되지 않을까.

<보충3> “(자기의) 아이덴티티”란, 알기 쉽게 말하면,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이다. “아이덴티티의 확립”은 인간이 세계를 질서화하는 수단의 하나이며, 객관적 사실과는 전혀 관계 없다. 先祖나 가계도라는 것도 인간의 아이덴티티의 하나이다. 가계도는 男系만을 거슬러 오르는 것으로 되어있어, 가계도에 여성은 무시된다. 또 장남만이 직계, 그 이외의 차남이나 3남은 방계로 보는데, 이 남성중시, 장남중시에 생물학적 근거는 전혀 없고, 결국 인간의 약속인 것이다. 이러한 약속이 없다면 세계는 혼돈으로 나타나 보여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家系圖는 樹木에 많이 비교되곤 하는데 (Family Tree) 강(川)의 이미지와도 닮아있다. 강도 본류와 지류가 있다. 독일의 라인강에는 모젤강, 마인강, 넷카강이라는 지류가 있는데 나무로 치면 가지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래도 강의 경우는, 어째서 (나무의 가지에 해당하는) 하나 하나의 지류에 다른 이름이 붙어 있을까. 모젤강, 마인강, 넷카강은 왜 라인강이 아닐까. 본류와 지류를 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강을 하구에서부터 수원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 2개의 강의 합류점과 만나면, 그 중의 하나가 본류이며, 다른 하나가 지류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마 합류점에서부터 원류까지의 거리에 따를 거라고 생각되는데, 이 거리가 거의 비슷하다면 곤란하게 되고만다. 어느것이 본류히고 어느것이 지류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인강 자신은 그런 재미없는 사람들의 생각에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단지 흘러 갈 뿐이다.

아이덴티티에 관하여 나중 더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덴티티를 결코 객관적 사실이라고 혼동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아이덴티티란 “문화”속에만, 결국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소슈우르 (Ferdinand de Saussure, 1857 – 1913)의 용어를 빌리면 아이덴티티란 자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뭐든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봐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의 아이덴티티의 선택 (인간은 보통 이것을 선택이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은 때로는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적으로 바꿔 버릴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2009년 2월 6일 금요일

41. 선광사 연기 (善光寺緣起)

2008년 (平成 20년), 선광사는 같은 불교도로서 중국의 티벳 탄압을 반대하는 동시에 이와 관련하여 참배객에 대한 위해가 미칠 것을 피하기 위하여 당초 예정되어 있던 북경 올림픽 성화 봉송 출발식 회장으로 선광사 경내를 사용하지 않도록 나가노시(長野市)에 요구하였다. 2008년 4월 18일 선광사는 출발식 회장(會場)으로 부터 사퇴한다고 발표하였다. 성화 봉송 시간에 맞춰 티벳사태 희생자 (중국인 및 티벳 쌍방의 희생자)를 위한 추도 법요를 실시하였다. 성화 봉송 출발지 사퇴에 대하여 2008년 11월 달라이 라마 (Dalai Lama)가 감사의 표시로 석가상을 보냈다.


현재의 나가노시 (長野市)는 선광사의 문전마을로 발전한 도시로서 선광사라는 사찰 때문에 생긴 도시이다. 원래 선광사 참배로 부근에서 현재의 信州대학 교육학부 부근에 걸쳐있는 완만한 경사지를 나가노로 불러왔다. 중세말 水內郡 長野村 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선광사 경내와 문전마을을 포함 대강 현재의 長野市大字長野에 상당하는 구역을 영역으로 하였다. 平成10년 (1998) 2월 개최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선광사의 범종이 세계평화를 염원하여 전 세계로 울려 퍼졌다.

선광사의 본존인 선광사식 삼존상 “일광삼존아미타여래 (一光三尊阿彌陀如來)” 는 절대비불로 지금까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전해온다. 선광사 연기에 의하면 선광사 여래는 일본에 온지 약 100년후 信州長野에 왔고, 나가노에 온지 10년정도 지나, 불상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秘佛로 되었다 한다. 그후부터 7년만에 한번 御開帳(고가이쵸, 장막을 걷고 일반에 공개하는 것)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선광사 본당 안 깊이 수납장 안에 안치되어있다. 御開帳에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것은 마에다치 본존 (前立本尊)이라 하며 비불을 모조하여 만든 것이고, 비불은 지금까지 참배객뿐 아니라 선광사의 승려에게도 보인 적이 없다. 삼존상은 아미타여래 (阿彌陀如來)를 중심으로 오른편에 관음보살 (觀音普薩), 왼편에 세지보살 (勢至普薩)의 세 보살이 하나의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서 있다. 선광사의 본존 일광삼존아미타여래는 백치 5년 (654)이래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절대비불이므로, 가마쿠라(鎌倉)시대 이를 모조한 前立本尊(주요문화재)이 제작되고 7년에 한번 선광사 御開帳時에 공개되고 있다. 다음번 고가이쵸는 2009년 4월 5일부터 5월 31일까지의 57일간이다.

信州 善光寺는 일광삼존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창건 이래 약 1400년에 이르고 아미타여래와의 결연의 장소로서 민중의 마음을 어루 만져 주는 의지처로서 넓고 깊은 신앙심을 고취시켜 왔다. “선광사연기”는 다음과 같은 내력을 전한다.

옛날, 인도의 비샤리국에 월개(月蓋)라는 장자가 살았다. 나이 50넘어서야 여시(如是)라는 딸을 두었는데 너무 귀여워 한 나머지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진다. 석가가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본인의 자각이 없다. 귀신이 역병을 돌리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월개는 집안을 단속하였으나 여시도 역병에 걸린다. 인도 최고의 명의를 불렀으나 석가이외에 아무도 병을 낫게 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는다.

월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석가에게 매달리니, 석가는 염불을 권한다. 석가의 지시데로 월개가 실천하자 극락에서 일광삼존아미타여래가 나타나 이마에서 빛을 발하자 여시는 물론 모든 사람들의 병이 나았다. 월개는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그 삼존상을 남겨 주기를 석가에게 간청한다. 이리하여 일광삼존상이 월개에게 하사되어 7대 5백년에 걸쳐 공양하였다.

월개는 다시 태어나 백제의 성명왕(백제 26대 성왕)이 된다. 일광삼존불도 하늘을 건너 백제에 닿아 나라를 구한다. 성명왕은 일본을 구제하려 이 불상을 欽明 13년 (552) 欽明天皇에게 선물한다 (欽明天皇은 백제 성명왕의 친 동생). 천황으로 부터 불상을 부탁받은 蘇我씨는 가람을 만들어 불상을 안치 숭배했다. 그러나 그때 역병이 유행하자 숭불 때문이라고 비난하며 모노노베(物部)씨가 폐불을 주장하며 절을 불 태우고 불상을 나니와의 호리에에 던져버렸다. 다음의 敏達천황이 병으로 쓰러지자 불상을 소홀히 한 것을 후회하고 호리에에서 불상을 찾아내 궁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모노노베씨가 또 호리에에 갖다 버렸다.

후에 信濃國司 (시노노 쿠니노 미야쓰코)의 종자로 수도에 올라온 本田善光 (혼다 요시미쓰)이 나니와(難波)의 호리에(堀江) 를 지나다가 물속에서 빛나는 광선을 보았는데 불상이 물속에서 뛰어나와 善光의 등에 업혀 東國(아즈마노 쿠니, 동쪽의 나라)로 데려갈 것을 명하였다. 월개장자. 성명왕의 환생이라고 들은 선광은 부처와 함께 信濃國에 돌아와 처음에 長野縣 飯田市에서 예배드리다, 황극천황 원년 (642)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황극천황 3년 (644) 칙원(勅願)에 의하여 가람이 조영되고 本田善光의 이름을 따서 선광사라 명명하였다. 창건이래 11회의 화재를 당했으나 여래 부첫님을 흠모하는 민중의 마음이 모여 옛 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광사는 일본에서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절이며, 信州 善光寺 이외에 가이(甲斐) 善光寺, 모토(元) 善光寺, 소부에(祖父江) 善光寺 동해별원, 세끼(關) 善光寺, 기후(岐阜) 善光寺가 있다.




이상의 선광사와 관련된 많은 정보를 기록한 것은 백제왕자 善光 (또는 禪廣)을 거론하기 위함이다. 일본서기 天智3년 (664) 3월 百濟王 善光(구다라노 고니키시 선광) 등을 나니와에 살게 하였다. 敍明朝(631) 풍장과 함께 입시하였으나 백제가 멸망하자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 되었다. 天武 4년 (675) 1월 1일 대학료의 모든 학생, 음양가, 외약료와 인도여인, 태국여인, 백제왕선광, 신라의 仕丁(쓰가에노 요보로)등이 약과 진귀한 물건들을 진상하였다. 朱鳥원년 天武紀의 최후 (686) 에 백제왕 양우(良虞)가 선광을 대신하여 뢰(誄, 시노비고토, 우리말의 弔辭)를 읽었다. 686년 62세의 선광이 늙어, 손자인 양우가 대신 조사를 읽었다. 持統 5년 (691) 정월 정광사(正廣肆) 선광(禪廣), 동족의 遠寶, 南典등과 함께 왕족우대의 사급을 받다. 持統 7년 (693) 죽은 선광에게 正廣參을 추증하고 부물(賻物)을 하사했다. 이상 보이는 것이 일본서기에 나온 백제왕 선광과 관련된 기록이다.

이보다 앞서 674년 天武 3년 정월 백제왕 창성(昌成)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창성은 선광의 장자이며 674년 부친 선광보다 먼저 죽었다. 1983년 아스카의 키토라(鬼虎)고분이 발굴되었는데 피장자가 창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선광과 창성의 몰년은 확실하나 생년기록이 없어 추측할 뿐인데, 선광 625년, 창성 645년쯤으로 본다. 그러면 창성은 나이 30세로 요절한 셈이다. 추측컨데 창성은 원보(遠寶, ? – 734)), 양우(良虞, ? - 737), 남전(南典, 667 – 758)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양우의 아들 경복(敬福, 697 – 766, 남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이 750년 오오사카 히라까타(枚方)에 百濟寺와 百濟王神社를 남겨 현존한다. 聖武천황때 東大寺大佛을 건립하는데 도금할 황금이 필요하였으나 이를 구할 수 없어 노심초사 하던 중, 749년 무쓰노가미(陸奧守) 敬福이 직할지에서 황금 광산을 개발하여 생산한 황금 900량을 조정에 바쳐 대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경복은 이 공로로 일거에 7계급 특진, 종삼위의 궁내경 가와치 노가미(河內守)에 임명된다.

구다라노 고니끼시 선광 (百濟王 善光, “구다라노 고니끼시” 가 姓 )으로 일본서기에 그려진 인물은 敍明과 齊明사이에서 태어났고 풍장(天武)의 친동생이다. 631년 풍장 10세때 九州의 어머니를 떠나 아스까의 부친 敍明天皇에게로 왔다. 그때 7세의 선광도 함께 아스까의 아버지에게 왔다. 이 사실이 “백제 의자왕의 왕자 풍장이 인질로 왔다”고 서기에 기록되었다. 선광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백강의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686년 天武天皇의 장례식 때, 弔辭를 읽는데 선광이 참석하였으나 선광 대신 손자 양우가 조사를 읽는다. 이때 백제왕 선광이 天武의 장례에서 조사를 읽은 것을 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왜 망해 없어진 백제의 왕자가 일본천황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는 반열에 들었는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인데 백제와 일본이 같은 나라였고 天武와 善光이 형제간 이라면 당연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691년 持統천황에게서 사급을 받고 693년 정광삼을 추증받는 것으로 봐서 선광은 692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왕 선광은 젊어서 昌成이란 아들을 두었고,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로 살았던 것 같다. 위에 나온 혼다 요시미쓰 (本田善光)의 전설이나 선광사 전설이 이 사람과 연관되어 생겨났다. 혼다 요시미쓰의 전설은 현대식 이름으로 봐 훨신 후대에 생긴 전승일 것이다. 우리 추측데로 백제왕자 선광이 625 – 692년간 살았다면 그가 30세인 655년 백제의 의자왕이 그의 부친이니, 지금 선광사의 비불이라는 일광삼존아미타여래상은 의자왕이 아들에게 보낸 비원의 선물이 아닐까? 당시 백제왕의 선물이면 비불의 취급을 받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선광사를 건립하는데 백제와 일본왕실의 도움으로 당시까지 교통이 불편한 멀고 먼 오지의 산악지방, 東國(아즈마노 쿠니)에 그런 거대한 불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644년 皇極天皇 3년 칙원에 의해 가람이 조영되었다는 것은 선광사가 황실의 사찰이라는 뜻이 된다. 백제 위덕왕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비운의 아버지 백제 성왕의 명복을 빌며 그의 신격화를 구상했으리라. 당시의 신격화는 부처화를 뜻하지만 위덕왕의 후손들 또한 성왕의 모습을 부처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절대비불로 예배하지 않았을까? 백제 성왕의 형상이라고 주장되는 또 하나의 비불이 있으니 호류지 유메도노(夢殿)의 구세관음이다. 구세관음에 관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이 자리를 빌어 우리는 먼 옛날 백제와 倭 사이에 얼마나 많은 교류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있다. 오랜 옛날 일이고 기록이 많지 않으므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보인다. 백제멸망 이후 일본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백제를 부정했지만 양식있는 후손들은 알게될 것이다. 일본의 뿌리는 백제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