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26일 토요일

4. 광개토대왕비



서기 2007 21세기의 이 시점에도 역사와 신화는 많은 사람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 들였다.  MBC의 태왕사신기 (극본 송지나 박병수, 연출 김종학 윤상호, 주연 배용준 문소리 이지아) 는 전 지구적인 스케일로 한국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관미성(關彌城)삼국사기에만 나오는 성이다. 학자에 따라 많은 후보지가 거론되고 있지만 가장 그럴 듯한 후보지는 파주시 오두산성(烏頭山城)이다. 현 파주시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있는 곳이다.  
 
광개토대왕에 관련된 역사는 삼국사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일 발견된 광개토대왕비 (Gwanggaeto Stele) 때문에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되었다.  만주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통거우(通溝)에서 일본 정보장교 사코 카게노부(酒勾景信) 중위가 1883년 탁본하여 일본학계에 보고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내용을 파악한 일본군은 일본의 조선합병을 합리화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 흥분한다.

높이 7미터 둘레 4 미터인 한 개의 화강암 석주에 1802자의 한자가 음각되어있다. 그런데 거기 기록된 내용중 한국과 일본학자간에 논쟁이 된 부분을 학계에서는 신묘년조라 부른다. 광개토대왕 (391 413)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391 17세때 고구려 19대 왕위에 올라 39세에 병사하므로 22년간 왕위에 있었다.부왕의 위업을 기려 414년 장수왕 2년 건립하였다. 추모왕의 고구려건국과 광개토대왕시절의 전쟁기록이다. 문제가 되는 신묘년조는 다음과 같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XX)新羅以爲臣民

신묘년 (AD 391)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XX)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기록은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데 좋은 구실이 되었다. 한국측 학자들은 원래 “而倭以辛卯年來渡海” 가 아니라  “而後以辛卯年不貢因“ 이었는데 처음 발견한 일본군이 비문을 “而倭以辛卯年來渡海“변조하였다고 음모론을 제기하였다. 그렇게 되면 “ 그후 신묘년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XX)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로 되어 한국측에게 만족스런 내용이 되나 세계사학계의 견해는 음모론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한국 학자들은 “而倭以辛卯年來渡海”에서 끊어서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왔고 고구려는 백제, (XX), 신라를 깨뜨려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한다. 백제, 신라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396 기사 : (영락 6, 병신년) : 백잔(百殘. 백제) 신라는 옛날에 우리의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391) 왜가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을 깨뜨리고 ?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했다. 우리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약모로성, (중략), 종고로성, 구천성, 백제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덧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왕이 그들의 소굴을 포위했다. 그러나 백잔의 군주(아신왕)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 명과 세포 1 필을 바치고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 , 7 촌을 얻었다. 또한 백잔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399 기사(영락 9, 기해년) : 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은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했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충성심을 칭찬하고,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400 기사(영락 10, 경자년) : 10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감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안에 있던 10분의 9 신라인들은 왜를 따라가기 거부했다. 이에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 하였다. 신라성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404 기사(영락 14, 갑진년) : 1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지역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략하였다. (….) 늘어선 (….)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봉에서 적과 만났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끊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궤멸되었고, 죽은 적은 수없이 많았다.

407 기사(영락 17, 정미년) : 17 정미년에 보병,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 왕은 사방 포위작전을 지시했다. 적은 대부분 궤멸되었으며, 개갑(鎧鉀) 1만여 개와 수를 헤아릴 없는 많은 군자기계를 획득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우불성, ?, ????? 격파했다.

삼국사기 백제 진사왕 기록을 보면 386 15세 이상의 국민을 징발하여 국방용의 성을 쌓아 북방의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386년부터 고구려와 소규모의 전쟁이 있었고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삼국사기 진사왕 8(392)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3(서기 385) 백제에서 진사왕(辰斯王)( 16, 재위 385 392)이 즉위했다. 서기 392, 카시코키 쿠니(貴國)의 천황에게 예()를 잃었다. 그리하여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하노 스쿠네(石川宿禰), 쯔쿠노 스쿠네(木兎宿禰)를 파견하여 그 외교자세를 따지자 백제의 국인(國人)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들은 아화(阿花) ( 17대 아신왕, 재위 392 405)를 즉위시키고 귀환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2(393)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진무(眞武)를 좌장(左將)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는 왕의 외삼촌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寡人)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石峴城)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사기 아신왕 4 (서기 395) 가을 8월 좌장 진무(眞武)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이었다. 아신왕 6 (서기397)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6년 백제기(百濟記)에 나오는 기사일까. “ 아화왕 (阿花王, 17代 阿辛王, 재위 392 405)이 카시코키 쿠니(貴國)에 대하여 예()를 잃었다. 그 때문에 영토의 토무타레(枕弥多禮, 해남), 켄난(見南), 시시무(支侵), 코쿠나(谷那)라 하는 동한(東韓)의 땅을 잃었다. 그리하여 왕자의 토키(直支) (후의 제18대 腆支王) 을 조정에 파견하여 관계를 수복했다.   

삼국사기 아신왕 14 (서기 405) 9월 왕이 죽었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6(405) 백제  아화왕(阿花王)(第17代 阿辛王, 在位 392 405)이 죽었다. 천황은 인질로 와 있던 토키왕 (直支王, 18代 腆支王, 在位 405 - 420) 을 귀국시켜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잃어버린 동한(東韓)의 탈환에 협력했다. 여기서 동한(東韓)이란 카무라노 사시(甘羅城), 카우난노 사시(高難城), 니리무노사시 (爾林城)를 말 한다.

이 전쟁을 통하여 신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국력신장의 기회를 잡았고 김해의 가야는 망국을 향해 치닫는다. 나머지 가야 소국들은 야금야금 신라가 통합해 간다. 백제는 서기 475년 또 한번의 위기,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겪는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부자는 백제가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신라로서는 늘 괴롭히던 강적을 남의 손을 이용하여 제거한 셈이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백제를 견제하는 동안 신라는 내물 이사금에서 법흥왕까지의 약 2세기(서기 356년에서 서기 540년 까지)에 걸쳐 백제를 능가하는 국력신장을 이룬다. 서기 486년 신라 소지왕 때 보은의 삼년삼성(三年山城)과 옥천의 굴산성을 쌓는다. 신라를 지리적으로 한정하고 있는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과 경기로 진출할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는 순간 이미 백제는 신라의 적수가 될 수 없을 만큼 신라의 국력이 향상된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남정과 관련하여 야마토(倭)의 전쟁참여를 엿 볼 수 있는 기사가 일본서기 닌토쿠(仁德) 4년에 보인다.
일본서기 닌토쿠(仁德) 4년 봄 2월 천황이 호족들에세 말했다. “높은 곳에 올라 바라 보아도 인가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반도(半島)에서의 계속적인 군사행동 때문에 인민들이 곤궁하겠지. 도시 부근이 이럴진데 시골로 가면 더욱 가혹할거야.” 하고 말 했다. 3월 3년간의 과역()을 면제하였다. 이 날부터 조정에도 검약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3년이 지날 무렵에는 오곡이 순조롭게 여물어 백성들의 생활도 풍족해 졌다.

7년의 여름 4월 천황이 다시 높은 곳에 올라 가 먼 곳을 바라보니 인가에서 많은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나라가 풍요로워졌다.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하자 황후가 “뭐가 풍족하다고 그러십니까? 사는 곳은 너덜너덜하고 내 옷은 누더기나 마찬가진데요.”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은 묵묵히 “인민이 넉넉해지면 우리도 자연 풍족해지지.” 라고 하였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