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27일 금요일

13.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일본서기 권제1 신대상 8 1(6)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기사이다. 그는 오호아나무찌(大己貴命)라고도 하였고 밖에도 많은 이름이 나열되어 있으며 181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고대사에서 자식이 많다는 것은 많은 지방호족들과 혼인관계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협조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오호쿠니누시는 스사노오의 아들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매진하였다.

그의 치세 스쿠나비코나(少彦名命)라는 구야국(狗邪國) 출신으로 추정되는 현인(賢人) 나타나 오호쿠니누시를 보필하였다. 일본서기는 스쿠나비코나가 타카미무스히(高皇産霊尊) 아들이라고 기록하였다.  타카미무스히는 일본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으로 구야국의 왕으로 추정된다. 나라의 기틀이 어느 정도 갖춰진 스쿠나비코나는 스스로 오호쿠니누시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즈모(出雲) 오호쿠니누시는 점차 세력을 키워 야마토로 진출하였는데 그와 관련된 기사를 일본서기는 이렇게 처리하고 있다.

오호쿠니누시는 여러 지방을 순행하면서 나라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즈모(出雲) 돌아와그런데로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제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없다. 지금 이외에 누가 나라를 다스릴 있겠는가?하고 했더니 신비한 빛으로 바다를 비추며 홀연히 나타난 카미() 있어 이르기를내가 없었으면 너는 만큼 없었다. 내가 있었으므로 이만한 공적을 이룰 있었다. 하였다.당신은 누구십니까?오호쿠니누시가 물으니너는 나의 사키미타마(幸魂) 쿠시미타마(奇魂). 하였다.
과연. 당신이 나의 사키미타마 쿠시미타마였군. 지금부터 어디서 생각입니까?하였더니나는 야마토노쿠니 (日本國) 미모로산(三諸山) 살고자 한다.그래서 땅에 궁전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것이 오호미와노 카미 (大三輪之神)이다.

신의 아들이 카모노키미(甘茂君), 오호미와노키미(大三輪君)등이며 히메타타라 이스즈히메 (姫蹈鞴五十鈴姫) 이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 와니() 변하여 미시마의 미조쿠히히메 (溝杙姫) 또는 타마쿠시히메 (玉櫛姫) 에게 통하여 이스즈히메를 낳았다고 한다. 여인이 호호데미천황(彦火火出見尊, 神武天皇) 황후이다.

일본서기는 위의 기사에서 오호쿠니누시의 후손인 이스즈히메와 나중 전개되는 진무천황의 등장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권2 신대하에서 큐우슈우에서의 천손강림과 호호데미(彦火火出見尊)의 출현을 기록한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는 오호쿠니누시의 아들이며 이스즈히메의 아버지이다.

이즈모는 작은 나라이다. 이즈모를 완전히 평정하였지만 오호쿠니누시의 자아(自我)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비전이 좋은 땅으로 야마토를 찍고 나라현 사쿠라이시(奈良県桜井市)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 자리에 궁전을 짓고 옮겨왔다. 비로소 오호쿠니누시의 야마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서기 220년 경으로 추정한다.        - 끝 -

2008년 6월 21일 토요일

12. 눈물젖은 역사를 가르치라

서울에서는 촛불집회가 한창이다.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세상을 끌고 가고있다. 신문과 방송은 시류에 영합하여 덩달아 소란만 떨고 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사람을 이성의 동물이라 했는가? 사람이란 결코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아집과 이기심과 무지의 덩어리일 뿐이다.

세상은 변한다. 사람의 욕구와 가치도 시대의 산물이다. 변화 자체가 무엇인가의 결과라면 변화를 나무랄 수는 없다. 5년전 발표된 조선일보 논설이지만 지금 이 싯점에서 시사하는 바 있어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

눈물 젖은 역사를 가르치라

통곡으로 대신한 애국가... 역사 비트는 비국민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 순간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 목멘소리로 변해갔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다. 대통령 부부, 300 여명의 우리 광부와 50여명의 우리 간호사 모두가 고개를 박고 어깨를 들먹였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가지 못 했다. 이 구석 저 구석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연설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사여러분, 가족이나 고향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비록 우리생전에는 이룩하지 못 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광부들에게 파고다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돌아갈 차에 올랐다. 차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박정희를 보고, 곁에 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과 40년 전의 이 '사건'을 지금 이 나라에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쥐고 흔드는 단병호 민노총 위원장이 그때 열네 살, 이남순 한국노총위원장은 열한 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배우 문성근과 명계남이 각각 열 살, 열한 살 무렵이다. 그러니 386들이야 이 '눈물 젖은 역사'를 알 턱이 없다. 역사를 모르니, 그 역사를 숨 쉬던 사람의 모습이 보일 리도 없다.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던 광부들도 사실은 100대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사람들이다. 63년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명이 몰려들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명에 정부공식 통계에 나타난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명이 넘었다. 이런시절이니 매월 600마르크 (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000m와 3000m 사이 막장에서 1m 파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66년 12월,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광부 제1진이 귀국했을 때 거의 전원이 1회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사망자도 있었고, 실명한 사람도 있었다. 간호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66년 1월 128명이 독일로 떠날 때의 고용조건은 월 보수 440마르크 (110달러)였다.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콜 묻힌 거즈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닦는 작업이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르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000명이 넘었다. 66년~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 30명, 광부들은 63~78년까지 7800여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라로 한때 GNP의 2%대에 달했다.

단병호, 이남순, 문성근, 명계남씨는 이 '숨가쁜 역사'와 '눈물 젖은 빵'을 모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라를 벼랑으로 떠밀고 공영방송을 통한 현대사 비틀기를 계속한다면, 옛시절 용어로 '비국민'이라 불려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요즘 일요일이면 수백명의 필리핀 근로자들이 혜화동 성당 부근에 모여든다. 이국생활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 광부가 서독으로 떠날 무렵 필리핀의 1인당 GNP는 257달러, 한국은 79달러였다.

60년대 한국은 지금 안산공단 부근에서 곧장 마주치는 근로자들의 모국 파키스탄으로 제철소 건설과 운영의 노하우를 물으러 시찰단을 보냈던 나라다. 올라가는 역사만 기억하고 내려갔던 역사는 잊고사는 국가가 있다. 그런 국가는 잊고 싶은 역사의 바로 그 대목을 되풀이하게 돼 있다. 그것이 제멋대로의 선택적 망각에 대해 역사가 내리는 벌이다. 애국가 마지막 구절을 통곡으로 대신 할 수밖에 없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설움을 까맣게 잊고 사는 오늘의 한국이 두렵고 걱정스러운것도 이 때문이다.

2003년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주간

2008년 6월 20일 금요일

11. 사의찬미(死の讃美)

-->

서기 1926 8 4 새벽 4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3600 관부연락선 토쿠쥬 마루(德壽丸) 선미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 내린 청춘 남녀가 있었다. 양장을 여인과 양복 차림의 신사가 함께 이키노시마(壹岐島)와 쯔시마(對馬島) 사이 현해탄의 푸른 바닷물 속으로 뛰어 것이다.

본선에서 사고를 인지하고 사고지역을 수색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4 아침 부산에 입항하였다. 8 5일자 동아일보는 사건을 기사로 게재하였고 관련기사는 이후 한국과 일본 양국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8 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지난 3 일 오후 11 시에 시모노세키(下關)를 떠나 부산(釜山)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 일 오전 4 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그 승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金水山, 30),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1정목 73번지 윤수선(尹水仙, 30)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요남자는 김우진이오 여자는 윤심덕이 였다.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1 40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다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더라”

남자의 소지품을 보낼 주소가 적힌 쪽지가 남겨 있어서 신분이 밝혀 졌다. 남자는 김우진(金祐鎭)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극작가. 전남 목포의 거부의 아들로 이미 혼인하여 아내와 자식이 있는 유부남. 1897 .

여자는 경성여고 사범과를 나와 조선 총독부의 관비생으로 일본 우에노 동경음악학교 갑종 사범과 3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중인 소프라노 성악가로 한국최초의 여성 관비 유학생 출신의 미혼여성, 1897 . 이름 윤심덕(尹心悳). 원래 평양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 홍난파(1898 1941) 선생과 동경음악학교 동기생.

그후 수사과정에서 여객선에 오르기 8 1 윤심덕이 오오사카에서 음반을 취입한 사실이 밝혀졌다. 노래제목이 사의찬미(死美), 루마니아의 이바노비치(Ivanovici, 1845 - 1902) 1880년 발표한 왈쯔곡 다뉴브강의 잔물결(The Waves of the Danube) 곡에 윤심덕이 염세와 허무로 물들인 가사를 붙인 노래이다. 당시 제작된 레코드 판이 500 장이었다 하며 한국어로 최초의 현대 가요로 간주된다

사의 찬미는 단일곡으로 500장의 음반이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윤심덕의 자살 이후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키자 2달 뒤 윤심덕이 생전에 녹음한 한국 최초의 캐럴송을 비롯해 실로 다양한 장르의 24곡이 동시 다발로 쏟아져 나왔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통틀어 한 달 동안 12장의 음반을 발표했던 가수는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나오는 음반마다 화제를 뿌린 윤심덕 덕분에 이 땅에는 비로소 유성기 전성시대가 본격화되었다.

김우진은 1897년 전남 장성군 관아에서 장성군수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규는 군수였을 뿐만 아니라 대지주였고 슬하에 11남매를 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김우진은 집안의 적장자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어야 할 책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김우진은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쿠마모토(熊本) 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16년에는 경학원 이사 정운남의 딸 정점효(鄭點孝)와 혼인했고 그 사이에 자녀 둘을 두었다.   

김우진은 쿠마모토에서 비로소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지 자각하기 시작한다. 쿠마모토 시절 김우진은 본격적으로 시 습작을 시작했고 영어 우등생으로 영어 교사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문학에의 꿈을 꺾을 수 없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9년 와세다 대학 예과를 거쳐 1920년 영문과에 들어간다.

대학시절 김우진은 서양철학과 사회개혁사상에 탐닉하였다. 이 때 영국의 사회개혁 사상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 - 1950) 스웨덴의 표현주의 극작가 스트린드버그(J.A. Strindberg, 1849 1912)의 희곡에 심취했고 니체 마르크스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졸업논문으로 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 A Critical Study of its Philosophy) 을 썼다.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 다눈치오와 스트린드버그, 버나드 쇼의 저작을 읽으며 새로운 시대를 호흡하던 대지주의 후계자는 자신이 몸 담은 가정과 사회체제를 봉건시대의 질곡으로 여겼고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부친과 갈등을 겪는다.    

김우진은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연극에 빠져들었다. 1920년에는 한국 문학사 연극사 초기의 인물들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해 조선의 대도시를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또 이 시기 희곡과 시의 창작 그리고 평론에도 몰두하였다. 1924년 졸업 후 목포로 귀향해서 상성합명회사의 사장에 취임하여 가업에 종사하였다.

윤심덕은 1918년 경성여고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1919년 조선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1920년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동우회순회연극단에 참여하면서 김우진과 일행이 되었다. 김우진은 순회연극단의 자금을 댄 스폰서였고 공연극의 연출자였다. 1923년 음악학교 3년 과정의 갑종 사범과를 졸업한 윤심덕은 6월 귀국하여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짐으로서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로 데뷰하였다. 당시 서양음악을 전공한 성악가가 없었던 서울에서 윤심덕은 모든 음악회 프로에 초대되는 스타가 되었고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가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김우진이 윤심덕을 처음 만난 것은 와세다 대학 2학년 때라고 한다. 이 때 김우진에게는 일본인 애인이 있었다. 그 일본인 애인이 1923년 병사하자 낙심한 김우진이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1923년 김우진은 윤심덕을 목포의 자택으로 초대하였다. 윤심덕은 3 1남의 형제 가운데 2녀였으며 그들 형제들은 모두 음악가가 되었다. 윤심덕 3형제가 목포에 내려와 조촐한 음악회를 개최하고 김우진을 위로하였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점차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 듯 하다.

1923년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나서지 않는 음악회가 없을 정도로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독창자로 나선다고 수입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관비유학생이 귀국하면 관립학교 교사로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았다. 윤심덕은 조선 최고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정작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처지로 내 몰리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

1925년 한양의 갑부 이용문과의 스켄들에 휘말린다. 남동생의 미국유학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던 차 이용문이 거금을 일거에 내주었다고 한다. 이용문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고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윤심덕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만주 하얼빈으로 도피하여 교회 목사의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1925 6월 귀국하였다.

이 때 김우진의 권유로 극단 토월회의 배우로 무대에 서게 된다. 윤심덕이 극단의 배우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조선 사회는 극단의 여배우를 기생처럼 천한 직업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윤심덕은 집안의 만류를 피하기 위하여 대구 일갓집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 여관에서 기거했다. 윤심덕이 여배우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모친은 매일 공연장에 나와 딸을 무대에서 끌어내려고 하였다. 그 때마다 윤심덕은 뒷문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1925년 동아일보는 연극계에 입문한 윤심덕을 인터뷰한 기사에서 그녀의 각오를 밝히고 있다.

"금번 내 생활의 전환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일찍부터 생각해오던 바가 이번에 실현되었을 뿐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여자란 배워서 가정으로 돌아가 현모양처가 되거나 교사가 되고 간호부, 사무원 같은 것이 되어 말썽 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특히 배우라는 것은 부량무식한 타락자나 하는 일로 알아 온 이상 나의 이번 길은 갈 곳까지 다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나섰습니다. 오로지 힘을 다하여 새로워지려는 당돌한 발걸음이 이에 이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윤심덕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소식에 관객은 구름처럼 몰려 들었으나 윤심덕의 공연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연기는 부자연스럽고 발음이 어눌하여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그녀는 낙담에 빠졌고 이 때부터 김우진의 위로와 후원에 매달리게 된것 같다.

1926년은 일본 다이쇼(大正) 시대의 마지막 해이며 조선의 순종이 4 25일 승하하였다. 순종의 인산(因山) 날이 6 10일이었고 이날 6.10만세 사건이 발생한다. 1926 6월 김우진은 2년 동안의 목포 생활을 청산하고 예술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하고 일본으로 간다. 가업을 잇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는 결단이었다.

윤심덕은 7 16일 동생 윤성덕과 함께 서울을 떠나 7 18일 오오사카에 도착한다. 26곡을 녹음하기로 레코드 사와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즉석에서 노래 한곡을 더 녹음하자고 요구하여 사의찬미 한 곡을 수록한 레코드가 탄생되었다. 녹음은 1926 8 1일 이루어졌다. 사의 찬미를 녹음할 때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윤성덕은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 김우진이 토오쿄오에서 오오사카로 내려와 윤심덕과 합류하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8 3일 저녁 시모노세키(下關) 에서 관부연락선 토쿠쥬마루에 승선하였고 동선은 동일 밤 11시 부산으로 출항하였다

윤심덕은 1923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1926 8월 사의 찬미 속에 자신의 심경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의 활동기간은 3년이지만 1925년의 6개월 간의  하얼빈 도피기간을 빼면 2 6개월이다. 그 기간에 윤심덕은 동생 둘을 미국에 유학보냈다. 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갔겠지만 개인적으로 돈이 필요할 것이며 이 돈을 윤심덕이 마련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윤심덕의  언니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3년간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혼인하였다. 윤심덕이 일본에서 돌아 왔을 때 부모는 경제력이 없었으므로 윤심덕이 성덕()과 기성() 두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1925년 이용문과의 스켄들은 동생 윤기성이 미국 오하이오대 음대에 유학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존심을 버리고 이용문에게 매달린 결과였다. 돈을 주는 사람은 하늘에 빛나던 별이라 하여 돈을 거저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심덕이 온갖 수모와 굴욕을 견디고 구한 돈으로 윤기성은 미국 오하이오대 음대에 가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의 아픔을 가족들도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잠적생활 6개월후 서울에 돌아 왔을 때 김우진이 나타나 극단 토월회에서 극단활동을 하도록 권한다. 김우진은 극작가이므로 여배우가 되는 것이 그렇게 천한 일이 아니며 훌륭한 예술행위임을 설명했을 것이다. 윤심덕은 또 한명의 동생 윤성덕을 미국에 유학보내야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각오였을 것이다. 그러나 흥행의 실패는 배우의 길이 그녀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1926 8월 동생 윤성덕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그 유학비용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것이 오오사카의 닛토 레코드 회사 (후의 콜럼비아 레코드) 26곡을 녹음하기로 한 계약이었다.

윤심덕은 그녀의 좌절과 허무 그리고 염세를 노랫말로 만들어 레코드 판 위에 유언처럼 남기고 갔다. 이 노래를 함께 녹음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친동생 윤성덕도 당시 언니의 심경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윤심덕은 가족에게도 마음을 털어 놓지 않았다. 시대를 앞서 간다는 것은 칼 위에서 춤추는 것 같은 아픔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눈물과 설움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었을까? 윤심덕은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였다고 썼다.

세간에서는 두 사람의 자살을 정사로 몰고 가서 세인들의 호기심을 증폭시켰지만 정사일 가능성은 없다. 정사보다는 염세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은 1925년 토월회 이후 가깝게 지냈지만 상대가 아니면 못 산다고 아우성 칠 나이도 아니었고 피차 너무 많은 과거를 알고 있는 사이였다. 가까이 지낼수록 두 사람은 속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또는 인생의 반려로서 가족에게 말하지 못한 자기들의 아픔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윤심덕은 어머니의 지나친 기대가 부담이었고 김우진은 아버지가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었다. 두사람이 공유한 것은 동병상린이었다.

두 사람이 실종된 뒤 두 집안이 보인 반응은 비슷하였다. 김우진의 집안에서는 김우진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증언하였고 윤심덕의 집안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두 집안 모두 당사자들이 자살해야 될 이유가 없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김우진의 집안에서는 1930년에도 현상금을 걸고 김우진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들은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잃고 있는데 정작 가족들은 아무도 그들의 아픔을 모르고 있었다. 가족 간에 마음을 열고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윤심덕은 두 동생의 유학을 보내는 것까지가 자기가 짊어지고 갈 몫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심덕은 김우진이 오오사카에 내려 온 날 자기 심경을 털어 놓았고 김우진이 동행을 제안하였을 것이다. 정사가 아니라 살아야 될 의미를 잃은 자들의 길 동무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 시절은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의 염세자살이 유행하던 때였다.

死의 讚美 (1926) 윤심덕 작사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에 가는 어데 있느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눈물로 세상에 나 죽으면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찾는 설움

웃는 꽃과 우는 새들이 운명이 모두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허영에 빠져 뛰는 인생아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죽은 후는 모두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