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8일 토요일

49. 신화에서 역사로

神武東征이나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이 어느 때의 일인지 초미의 관심사이지만 명백한 역사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명백한 역사기록이 없으면 역사학자들은 말 하지 않는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 (塩野七生, 1937 -)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 크다. “확실한 사료의 뒷받침이 없으면 다룰 수 없는 학자나 연구자와 달리 우리는 아마추어다. 아마추어는 자유롭게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이 허용된다.”

일본에서 “曲學의 徒”라고 자처하는 아마추어 역사가가 연구하여 발표한 결과를 인용한다. 우리의 관심인 일본의 초기천황들의 몰년기록을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뽑아서 그라프화 한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총체적인 초기천황들의 시대가 드러난다. 그라프를 보면 고사기의 몰년기사의 신뢰성이 증명되며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얼마나 무리하게 초대천황 神武의 기년을 기원전 660년으로 끌어 올리고자 했는지 스스로 드러난다. 다음은 “曲學의 徒”의 글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마지막 글자 記紀를 두 역사서의 호칭으로 쓴다

< 記紀에 보이는天皇崩御年(没年)의 차이>

일본서기는 神武부터 시작하여 天皇 崩御年과 사망시의 연령을 기록하였다. 고사기는 사망시 연령기록 없이 일부 천황에게 붕어년의 간지를 기록하였다. 이 간지로 추측되는 연차와 일본서기의 연차를 비교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천황 붕어년을 그라프에 표시하면 위와 같다. 27대 安閑부근 이후의 붕어년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거의 일치한다. 고사기가 완성된 것이 712년, 일본서기는 720년이라 하므로 그로부터 200여년 전의 安閑부근의 연대는 믿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19대 允恭부근을 경계로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술에 괴리가 나타난다. 적어도 15대 應神이전의 연대는 양쪽 모두 틀렸거나 어느 한쪽이 틀렸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일본서기는 초대 神武이전을 神代, 神武이후를 人代로 하여 人代이후 年次를 기록한다. 神武가 카시하라(橿原)에서 즉위하였다는 辛酉년을 현재의 서력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660년이 된다. 그러나 이 연차를 史實로서 믿을 수 는 없다. 그 이유는 神武이후의 천황의 수명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장수한 것으로 된다. 사실이 확인된 천황으로 부터 세대수를 헤아려 봐도 도저히 神武의 즉위연대를 기원전 660년까지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의 초기연차는 神武의 즉위연차를 의도적으로 옛날로 설정함으로서 전체적으로 연대가 올라갔다고 본다. 메이지의 역사학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에 의하면 이것은 1260년마다의 辛酉의 해에 대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는 중국의 참위(讖緯)사상에 의해 神武의 즉위연대를 짜 맞춘 것이다. 지금은 이 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라프는 19대 允恭부근에서 초대神武의 즉위년이 660년이 되도록 시대를 古代로 끌어 올렸다는 모양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가 기록한 연차로 神武시대의 실재연대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서기도 4세기말이 되면 부분적으로 조선사서의 삼국사기와의 대응을 시도 할 수 있다. 일본서기의 다음 기술은 神功무렵의 실연대와 120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神功五十五年(乙亥255年)百済 肖古王死す(日本書紀)
百済近肖古王死す(三国史記・乙亥375年)

神功六十四年(甲申264年)百済 貴須王死す(日本書紀)              
百済近仇首王死す(三国史記・甲申384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간지는 같으나 일본서기는 간지를 2회 즉 120년 올려 기록했다. 그러므로 이 무렵의 일본서기 연차에 120년 더 하면 실연대가 복원된다. 그러나 고사기의 붕어간지로 재현되는 연대에는 명백한 作爲의 경향을 발견할 수 없다. 아무 기록도 없이 빠져있는 천황이 많은 것이 작위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고사기의 경우 간지만으로 연차를 확정할 수 는 없다. 예를 들면 崇神붕어의 간지, 戊寅을 서력 318년으로 볼 수 도 있고, 258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라프의 경향을 보면 崇神붕어년은 258년보다는 318년쪽이 타당하다고 보인다.

10대 崇神천황의 몰년 서기 318년은 역사적인 사실로 본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12대 景行천황 아들 成務의 몰년 355년과 야마토 타케루의 아들 仲哀의 몰년 362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야마토 타케루가 어느 때 사람이며 그의 東征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야마토 타케루도 경행천황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일단 야마토 타케루가 이 무렵의 인간이란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서기 318년 景行천황의 아들로 기록된 이호키노이리히코노 미코토 (五百木入日子命, 273 – 318), 오호우스노미코토 (大碓命, 295 – 318)와 위의 崇神天皇이 사망한다. 大碓命의 쌍둥이 동생이라는小碓命 (오우스노미코토, 295 – 375) 만 이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318년 崇神과 景行간에 명운을 건 전쟁에서 잃어버린 왕국 백제는 다시 일본열도를 장악한다.야마토 타케루의 동정은 318년 이후 (아마 320년에서 330년 사이) 열도를 확실하게 백제의 관리하에 두기 위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야마토 타케루는 이 작전을 완수한 뒤 백제로 나간다.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그의 아버지는 백제의 비류왕 (304 – 344재위) 이었고 근초고는 346 – 375까지 왕위에 있었다. 야마토란 나라의 성립은 야마토 타케루와 그의 아들 호무다와케 (應神, 320 – 394)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이들 부자의 역사상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여 이를 희석시키기 위하여 등장시킨 것이 神功皇后 (336 – 390)라는 小說이며 이를 통하여 백제의 영향이 없었던 것처럼 역사가 기록된다.

2009년 3월 21일 토요일

48. 倭建命의 東征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신화로 기록된 야마토 타케루의 행적을 찾아 신화의 내용을 살펴 본다. 앞에서 소개 된 (2. 야마토 타케루) 의 신화편에 해당된다. 야마토 타케루는 천황으로 기록되지 않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12대 景行天皇( Emperor Keiko) 기사에 景行천황의 아들이라면서 야마토 타케루의 기록을 함께 취급하였는데 주로 야마토 타케루에게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분량이 방대하여 이번에는 신화의 내용만을 발췌하고 역사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은 다음 기회에 다룰 것이다.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神話는 야마토 조정 (大和朝廷)의 東國에의 세력확대를 상징하는 4세기경의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이야기이다. 고사기가 和銅5년 (712), 일본서기가 養老4년 (720) 편찬될 때 야마토 타케루 전승은 그 때보다 400년전 옛날의 이야기로, 야마토(大和)측의 視野로 씌여져, 모두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를 보고 당시의 정세를 추측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야마토 타케루는 12대 景行天皇(Emperor Keiko)의 아들로 천황의 명에 의하여 南九州의 구마소 타케루(熊曾建)와 이즈모(出雲)의 이즈모 타케루(出雲建)를 정벌하는 西征을 완수한 뒤, 아즈마노쿠니 (東國)의 에미시(蝦夷)정복의 東征을 떠난다. 야마토 타케루는 고사기에서 倭建命(야마토 타케루노미코토), 일본서기는 日本武尊(야마토 타케루노미코토) 라는 서로 다른 한자를 쓰고있다.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路는 고사시와 일본서기가 약간 다르며, 일본서기 쪽이 미치노쿠(陸奧), 히타카미(日高見)등 보다 북쪽까지 진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東征路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 야마토(倭) – 이세(伊勢) – 오와리(尾張) – 스루가(駿河) – 사가미 하시리미즈(相模 走水) – 카미쯔후사 (上總) – 히타치 니이바리 (常陸新治) – 쯔쿠바(筑波) – 사가미 아시가라 (相模足柄) – 가이(甲斐) – 시나노(科野) – 오와리(尾張) – 오미 이부키야마(近江 伊吹山) – 이세 노보노 (伊勢 能煩野)


일본서기: 야마토(倭) -이세(伊勢) -스루가(駿河) -사가미 하시리미즈(相模 走水) -카미쯔후사 (上總) – 미치노쿠(陸奧) – 히타카미(日高見) -히타치 니이바리 (常陸新治) -쯔쿠바(筑波) -가이(甲斐) – 무사시(武藏) – 카미쯔케노(上野) – 우스이사카 (碓日坂) – 시나노(信濃) -오와리(尾張) -오미 이부키야마(近江 伊吹山) – 이세 노보노 (伊勢 能煩野)

한반도의 문명의 빛은 한반도에 가까운 큐우슈유와 이즈모에 먼저 들어와 2 – 3세기 현재의 킨키(近畿)지방에 야마토라는 정권이 형성된다. 그러나 일본의 혼슈우(本州)는 지리적으로 문명의 소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을 가지고 있으니, 혼슈우의 한 가운데 동서를 가로 막고 있는 쥬우부(中部) 지방의 산악지대이다.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히타(飛驒)산맥, 키소(木曾)산맥, 아까이시(赤石)산맥이 모두 이곳에 있다. 중국의 정사 구당서의 일본전에 “일본의 북과 동의 끝에 大山 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大山이란 일본의 알프스를 뜻하는 것이다.

일본의 알프스는 토오쿄오 지역과 오오사까 지역을 가로막는 니이카타 현, 나가노 현, 기후 현, 시즈오까 현 등을 포함하는 산악지대이다. 이 산악을 중심으로 하여 토오쿄오 지역을 칸토오(關東), 오오사까 지역을 칸사이(關西) 또는 킨키(近畿) 지방이라 한다. 쥬우부지방의 거대한 산악지대는 천연적인 장벽이 되어 킨키와 칸토오지방의 문명의 교류를 차단하여 일본의 동북부 지역은 역사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이란 이 장벽을 넘어 칸토오 지방과, 보다 북부의 토오호쿠(東北) 지방에 문명을 소통시키고자 하는 야마토 조정의 의지의 산물이다. 문명의 소통을 다른 말로 하면 야마토의 권위의 인정 아니면 정벌이 되는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씌여지고 있던 8세기 초에도 야마토의 동정은 계속되고 있었고 712년과 720년의 동정진출에 출입이 있는 것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720년에는 712년 때보다 더 북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마토 타케루의 동정진출 기사는 먼저 씌여진 고사기가 더 사실에 가깝다.

이세(伊勢), 오와리(尾張), 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가이(甲斐), 이즈(伊豆), 사가미(相模), 무사시(武藏), 후사(總), 히타치(常陸), 미치노쿠(陸奧) 의 아즈마노쿠니 (東國) 12개국이 야마토 大王의 명에 따르도록 정벌하는 것이 야마토 타케루의 임무였다. 출발 전 그는 이세의 대신궁을 참배하고 숙모 야마토히메(倭比賣)에게 인사를 드린다. 숙모는 떠나는 그에게 스사노오노미코토 (須佐之男命)가 이즈모에서 처치한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의 꼬리에서 나온 것을 아마테라스오호미카미 (天照大神)에게 헌상하였던 아메노무라쿠모(天叢雲)의 劍과 필요할 때 열어 보라면서 주머니를 한개 주었다.

오와리(尾張)에 들러 호족의 딸 미야즈히메(美夜受比賣, 宮簀媛)를 만나 東國을 평정한 뒤 혼인하자는 약속을 한다. 미야스히메의 오빠 타케이나다네노미코토 (建稻種命)가 오와리의 수군을 이끌고 副將軍으로 동국평정에 합류한다. 고사기에 미스키토모미미타케히코 (御鋤友耳建日子), 일본서기에 기비노타케히코(吉備武彦)로 나오는데 이 전쟁에서 귀로상의 바다에서 사망하였다. 나고야의 아쯔타(熱田) 신궁에서 모시는 신 가운데 하나이다.

오와리의 카야쯔(萱津) 神社에 들른 뒤 오토타치바나히메(弟橘比賣) 가 합류하여 함께 사가미(相模)국에 이른다. 야마토 타케루는 사가미국의 쿠니노미야쯔코(國造)로부터 “이 곳에는 커다란 못(沼)이 있는데 그 곳에 너무나 다루기 힘 든 자가 살고 있읍니다” 라는 말을 듣고 그 자를 보기 위하여 들판으로 나갔다. 기회를 보던 사가미의 쿠니노미야쯔코는 들판에 불을 붙이니 삽시간에 야마토 타케루 일행은 火攻의 불길에 쌓인다. 속은 것을 안 야마토 타케루가 야마토히메가 준 주머니를 열어보니 부싯돌이 들어 있었다. 아메노무라쿠모의 보검으로 주위의 풀을 제거하고 접근해 오는 화염 쪽으로 맞불을 놓자 천우신조로 바람의 방향까지 우호적으로 바뀐다. 위험에서 빠져나온 야마토 타케루는 배신자를 처단하고 불 속에 던져버린다. 현 시즈오까 현의 야키즈시(燒津市)는 여기서 연유하는 도시이다. 이 일이 있고부터 아메노무라쿠모노 쯔루기(劍)는 쿠사나기(草薙)노 쯔루기라고도 불리게 된다. 풀을 벤 칼이라는 뜻이다. 이 보검은 현재 아쯔타 신궁 (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다.

사가미에서 더욱 동진하여 하시리미즈노우미(走水海)에 이르렀는데 현재의 우라가 수도(浦賀水道)이다. 현 요꼬스카에서 바다를 건너 지바현의 보오소오 반도(房總半島)로 갈 때 그 해협의 신이 노하여 큰 파도를 일으켜 배가 추풍낙엽처럼 딩굴며 나아 갈 수 없었다. 이때 오토타치바나 히메가 “내가 제물이 되어 신의 노여움을 풀겠읍니다. 황자께서는 東征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천황에게 보고해야 되는 존귀하신 분입니다. 사네사시 사가미 벌판의 불 속에서 나를 구해 주신 은혜를 어찌 갚겠나이까 ”. 오토타치바나히메가 바다에 빠지자 해신의 노여움이 풀려 야마토 타케루 일행은 바다를 건너 카즈사 (上總, 千葉縣)에 상륙한다. 그로부터 7일 후 오토타치바나히메의 머리 빗이 해안에 흘러 왔으므로 빗을 수습하여 오토타치바나히메의 미하카 (御陵)를 만들고 그 안에 매장했다.


야마토 타케루는 카즈사(上總)에서부터 奧地에 이르기까지 멋 모르고 날뛰는 에미시(蝦夷)들을 복종시키고, 이곳 저곳의 거친 귀신들을 평정한 후 귀로에 오른다. 아시가라 도우게 고개 (足柄峙) 에 이르러 乾飯을 먹는 중 그 고개의 귀신이 하얀 사슴으로 변하여 공격해 왔다. 얼떨결에 먹고 있던 노비루(野蒜) 로 후려쳐 사슴의 눈을 맞추어 사슴을 죽였다. 아마토 타케루는 이 고개에 올라 오토타치바나히메를 목 메어 부른다. “아즈마(吾妻)하야”, “아즈마(吾妻)하야”, “아즈마(吾妻)하야” 하고 세번이나 절규하니 이를 따라 東國을 아즈마노쿠니(東國)라 하게 된 것이다. 이 “아즈마하야”라는 말은 한국어 “아줌마야”로 본다. 한국어 아줌마는 옛날 고귀한 신분의 여인네를 칭 하는 말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말을 와가 쯔마 (= 나의 처)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방에 따라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없는 내용도 전해 오므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 귀로에 가이(甲斐), 시나노나가노(信濃長野), 미노노오오이(美濃大井), 가마토(釜戶), 이케타(池田)에서 오와리의 국경, 우쯔쯔토우게(內津峙) 에 왔다. 거기에 종자의 구메노야하라(久米八腹) 가 급히 말을 달려 와 가이(甲斐)에서의 전투이후 토오카이도(東海道)를 통과하고 있을 터인 타케이나타네노미코토(建稻種命)가 스루가(駿河)의 바다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야마토 타케루의 손 윗 처남인 동시에 東征의 부사령관이다. 야마토 타케루는 “우쯔쯔가나” “우쯔쯔가나” 하고 탄식하며 타케이나타네노미코토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이곳에 우쯔쯔신사 (內內神社) 가 세워지게 되었다. 우쯔쯔 토우게 (內津峙) 고개는 아이치현 가스카이시(春日井市)와 기후현(岐阜縣) 다지미시(多治見市)를 잇는 표고 320m의 고개이다. 이 “우쯔쯔가나”라는 탄식의 언사는 한국어 “어찌할까나” 또는 “어이할까”가 아닐까.

우스이토우게(碓氷峙)는 군마현(群馬縣) 安中市와 나가노현(長野縣) 北佐久郡의 경계에 있는 험준한 고개이다. 표고 약 960m. 일본 알프스의 험준한 산맥이 이 곳 중부지방에 끝 없이 펼쳐져 있다. 시나노카와(信濃川) 수계와 토네카와(利根川) 수계를 가르는 중앙분수령이다. 이 고개의 나가노현 쪽에 내린 비는 일본해에, 군마 현 쪽에 내린 비는 태평양으로 흘러간다. 옛부터 坂東과 信濃國을 잇는 길로 사용되었으나 길이 험하기로 유명하였다. 日本書紀 景行紀에 야마토 타케루가 坂東平定에서 돌아오다 우스이사카(碓氷坂)에서 아와오키 (安房沖)에서 물에 빠져 죽은 아내 오토타치바나히메가 그리워 “아즈마하야” 라고 세 차례나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고사기에는 이 일이 아시가라사카(足柄坂)에서 일어난 일로 되어있다.

아시가라도우게(足柄峙)는 스루가국(駿河國)과 사가미국(相模國) 국경이 되는 고개이며 시즈오카(靜岡)현과 카나카와 (神奈川)현 아시가라市 사이에 있는 고개로 표고 759m이다. 이 고개를 넘어, 가이(甲斐)로 가서 사카오리노미야(酒折宮)에 머물 때 “니이하리(新治) 쯔쿠바(筑波)를 지나 몇 밤이나 잤을까” 라고 감회를 노래하자, 夜警의 불을 지피던 노인이 “날짜를 겹쳐서 밤으로 아홉밤, 낮으로 열흘” 하고 곧장 노래를 이었으므로 그 노인을 칭찬하고 아즈마노쿠니노 미야스코의 칭호를 내렸다. 이후로 가이(甲斐)의 사가오리노미야(酒折宮) 는 연가(連歌)의 발상지로 불리게 된다.

그후 오와리(尾張)에 도착한 야마토 타케루는 약속데로 미야스히메(美夜受媛)와 결혼한다. 그리고는 이세의 신검 쿠사나기노 쯔루기를 미야스히메에거 맡긴 채 이부키야마(伊吹山)의 귀신을 맨 손으로 처치하겠다고 나선다. 이부키야마는 표고 1,377m로 시가현(滋賀縣)과 기후현(岐阜縣)의 경계에 있는 산이며 옛부터 영봉(靈峰)으로 알려져 왔다. 맨 손으로 이부키야마의 귀신과 대결하러 가는 야마토 타케루 앞에 하얀 멧돼지가 나타난다. 야마토 타케루는 귀신이 보낸 심부름꾼이라 생각하고 무시하였으나 실재 귀신 자신의 화신이었다. 귀신이 눈 사태를 일으키며 공격하자 야마토 타케루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로 하산하나 깊은 병에 들고 말았다.


독기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야마토 타케루는 타마쿠라베(玉倉部)의 시미즈(淸水)를 마시고 몸을 추스렸다. 거기 淸水는 효과가 있어 고열이 내렸다고 전해 온다. 야마토 타케루가 상처를 치료했다 하여 이자메노 시미즈(居醒 淸水)로 불리며 사메가이(醒井)란 지명이 여기서 생겼다 한다.

이부키야마의 전투이후 피로에 지친 야마토 타케루는 岐阜縣 養老町 부근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다리는 부어올라 “내 다리는 걸을 수도 없고 무언가 끌어 당기는 것 같다”고 하여 후에 이곳을 타기노(當藝野)라 부르게 되었다.

스즈카 야마(鈴鹿山)을 바라보며 현재의 미에현(三重縣) 요카이치시(四日市市)에서 스즈카시(鈴鹿市)에 들어 온 야마토 타케루는 너무 피로하여 지팡이에 의지하고 고개에 올랐다하여 이 고개를 쯔에쯔키자카 (杖衝坂, 杖突坂) 라 부르며 舊東海道에 이 이름이 남아있다.

야마토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으나 체력이 바닥나 “내 다리가 세겹으로 굽은 듯 너무 힘들어” 라고 말 했다하여 이 곳을 미에(三重)라 부르는 것이다.

<야마토는 아름다운 땅, 청산으로 푸른 담장을 두른 아름다운 야마토여!> 야마토 타케루의 종언의 땅이 되는 노보노(能褒野, 能煩野) 에 이르러 마지막 감회를 읊으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소식이 궁에 전해지자 妃와 皇子들이 도착하여 노보노에 陵을 만들었다. 조문하는 사람들이 슬픔에 젖어 탄식하는데 능에서 한 마리의 백조가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야마토를 향해 날아갔다. 고사기에 의하면 야마토 타케루는 죽기 전 야마토를 그리워하며 <야마토는 아름다운 땅, 청산으로 푸른 담장을 두른 아름다운 야마토여!>라고 쿠니시노비우타(思國歌)를 불렀다하며 이 노래는 태평양 전쟁 중 동 아시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병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었다 한다.

야마토 타케루의 능이라 주장하는 고분은 白鳥塚 (鈴鹿市加佐登), 武備塚 (鈴鹿市長澤), 雙兒塚 (鈴鹿市長澤), 王塚 (鈴鹿市國府), 丁字塚 (龜山市田村町) 등 여럿이다. 메이지(明治) 12년 내무성은 龜山市의 노보노(能褒野)신사 서쪽에 있는 丁字塚이라 불리는 전방후원분을 야마토 타케루의 능으로 지정했다. 미에현(三重縣) 가메야마시(龜山市)에 있는 能褒野 御墓는 전장 90m, 후원부의 직경 54m, 높이 9m로 三重北部最大의 前方後圓墳이다. 能褒野神社는 야마토 타케루와 오토타치바나히메 (弟橘媛)를 제사드린다.

能褒野에서 야마토(大和)를 향해 한 마리의 백조가 날아갔다. 이 백조가 최초로 내려 와 앉았다는 전설지의 하나가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코토히키하라(琴彈原)로 이곳에 白鳥陵이 있다. 내려와 앉았던 백조는 기운을 차려 다시 하늘로 솟아 오르더니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 현 大阪府 羽曳野市)에 머문다. 이 일을 기념하여 이곳에도 시라토리노 미사사기 (白鳥陵)을 만들었다. 그후 백조는 다시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를 떠나 먼 서쪽 하늘로 날아 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그 간 곳을 모른다.

2009년 3월 14일 토요일

47. 寶冠弥勒 - 木造 弥勒菩薩 半跏思惟像

京都의 우즈마사(太秦)에 있는 고류지(廣隆寺) 영보전에 미륵보살반가상 (弥勒菩薩半跏思惟像) 이라 불리는 赤松으로 만든 불상이 있다. 일본의 미륵보살 가운데 가장 오래 된 7세기초의 작품으로 보나 제작자와 제작과정에 관한 기록은 없다. 상은 높이 84.2 센티, 총 높이 123.3 센티로 한 개의 적송 통나무로 만든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그 스타일은 중국의 북위의 불상에 보이는 양식을 답습한 것이며, 의자에 앉아, 어떻게 중생을 구제할까를 보살님이 사유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표정은 한 없이 부드럽고 아늑하다." 라고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1833 – 1969)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격조 높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 불상은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그러니 한일 양국간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 하였다. "나는 고대 그리스 제신들의 彫像도 보았고, 로마시대 만든 유명한 조각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 십년에 걸친 철학자의 생애에서 이 만큼 인간실존의 진실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갖는 마음 속의 평화의 이상을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서기 推古11년과 31년 성덕태자가 하다노 가와까쓰(秦河勝)에게 불상을 하사하여 하치오까데라 (蜂岡寺)를 건립하고, 그 후 신라에서 보내 온 불상을 고류지에 안치했다는 기사가 있어서 이 불상이 신라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무로마치(室町)시대 편찬된 고류지유래기에 백제의 불상이 성덕태자에게 헌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류지 불상이 백제에서 만든 것이라는 학설의 근거가 되었다. 이를 종합하여 한국측 주장은 7세기 신라에서 불상이 제작되어 일본에 건너갔다. 그 근거는 재목의 종류와 제작방법, 관련기록등이다. 일본의 목조불상의 대부분이 구스노끼인데 반하여 이 반가상은 당시 신라에 많이 자생하고 있던 적송이라는 점. 일본의 목조불상 대부분이 몇개의 토막으로 만들어 조립한 것인데 이 불상은 한 개의 통나무를 깎이 만들어 일본양식과 다르다는 점등이 한국측 주장의 요지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적송은 한국에만 있는게 아니고 일본에도 있음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목조불상이 한국 국내에 남은 게 전무한 상황에서, 즉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서, 재질과 제작방법이 일본의 방식과 다르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신라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적송으로 만든 불상은 일본에 다른 예가 없다. 그러나 조선반도에는 적송제를 포함, 882년 이전의 목제불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비교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일본의 일반적 양식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조선반도제라고 결론지을 수 는 없다. 일본서기에 신라인이 7세기에 불상일체를 고류지에 모시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나 증거로 되지 않은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불상이 곧 이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 고류지는 창건이래 무수한 불상을 보유해 왔으며, 또한 여러 번의 화재와 전란으로 불상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신라의 금동미륵보살상과 닮았다고 하는 것도 증거로 볼 수 없다. 불상은 양식을 답습하여 만드는 것으로,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고류지 영보전에 또 하나의 일본국보인 머리에 상투를 튼 모습의 “보계반가상”이 있다. 보계반가상은 높이 66.4 센티로 한개의 통짜베기 녹 나무로 제작한 것인데 신라에서 헌상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의 추고 31년(623) 신라에서 보내 온 불상이라고 생각된다. 상투를 높이 틀어 올려서 보관을 쓰지 못하여 “보계미륵” 또는 “우는 미륵”으로 불린다. “미륵보살반가상”은 한사코 일본에서 만든 것으로 우기면서도 보계미륵은 녹 나무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신라에서 온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한편으로 기특하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2층 불교조각실에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안치되어 있다. 6세기말에서 7세기초 작품으로 보는데, 신라의 작품인지 백제의 것인지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웬 일인지 한국의 이 금동미륵상이 일본의 목조미륵상과 너무 유사하여 양국 국민들을 놀라게 한다. 1976년 한국미술오천년전이 일본에서 열려 이 불상이 일본국민에게 소개되었을 때 자기들의 국보와 너무 흡사한 모습을 보고 충격적으로 받아 들였다. 고류지의 반가사유상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은 그 크기와 양식과 표현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일하다.

2008년 10월 10일 연합뉴스 "한국 문화예술을 유럽지역에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한국페스티벌이 9일 오후 (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보자르예술센터(CFA)에서 개막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올리버 샤스텔 벨기에 외무담당 국무상,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 비스카운트 에티엔느 다비뇽 CFA회장등 양국관계자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을 가진 한국 페스티벌은 부처의 미소 (Smile of Buddha, 1600 Years of Buddhist Art in Korea)라는 주제로 국보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비롯한 국보 4점등을 전시하는 한국불교미술 특별전시회를 시작으로 하여 내년 2월까지 진행된다."


국보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金銅弥勒菩薩半跏像) 은 국보제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함께 국내 최대의 금동반가상이다.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서 삼산관반가사유상 (三山冠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미술품으로 이번이 7번째 “해외 나들이”라 한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도 하고, 일제 때 밀반출 되었다고도 하여 출토지가 불분명하여 제작지를 알 수 없으나 국보제 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함께 삼국시대 불상중에서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으로서 높이가 93.5센티로 제일 크고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 코, 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기술을 보여준다.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반가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 해 준다.

2009년 3월 7일 토요일

46. 河南慰禮城

백제를 지칭하여 “잃어버린 왕국”(최인호의 소설명) 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백제의 역사와 함께 초기 500년간의 수도 또한 사라져,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조에 나오기를….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는데, …하남 땅이 북으로는 한강을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고, 西로는 큰 바다로 막혀있으니 이 같은 천험지리는 얻기 어려운지세라,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慰禮란 말을 두고 여러 설명이 많은데 고구려 백제계의 부여인들이 왕을 우라 또는 우루로 불렀으며 위례란 이 우루 또는 우라의 한문표기이다. 즉 위례성이란 王의 城이란 의미가 된다.

또 일본서기 웅략천황 20년의 기록은 “百濟記”라는 역사서를 인용하고 있는데…. 개로왕 을묘년 겨울에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을 7일낮 7일밤 공격하니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慰禮)를 잃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통해 하남 위례성은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백제의 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남위례성”이 어디인가를 놓고 학계에서는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어느 역사서에서도 신빙성있는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7년 풍납토성(風納土城)이 발굴되면서 백제연구는 단연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풍납토성의 발굴은 오랫동안 한성백제 (BC18 – AD475)의 왕성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따른 논란을 잠 재울 유력한 후보로 떠 올랐다. 하남위례성의 후보군으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그리고 범위를 더 넓힌 남한산성과 경기하남시 이성산성이 거론된다. 그러나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은 삼국사기에서 설명하는 하남위례성의 특징인 북쪽으로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라는 대목에 위배된다. 또 백제 석촌동 고분유적과 멀리 떨어져 있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중 하나가 하남위례성일 것으로 본다.

이 중 몽촌토성은 풍납토성이 발굴되기 전까지 강력한 하남위례성 후보로 대두되었다. 몽촌토성은 높이 6-7m, 둘레 약 2285m, 전체면적 13만 1634평의 토성으로 한강이 근처에 흐르고 있다. 위치상으로 풍납토성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방사선탄소 측정결과 3세기 중후반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한성백제 멸망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 3만대군에게 7일낮 7일밤만에 북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남성이 무너지면서 그곳에 있던 개로왕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현재의 풍납동과 올림픽 공원으로 겨우 700m 떨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성이 국내성과 환도성처럼, 平時城과 非常城으로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백제의 경우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짝을 이룬 성이다. 백제의 첫 수도의 위치가 산성이었다면 이 처럼 완벽하게 1천 5백년동안 사람의 시야를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토성이었으므로 백제가 웅진으로 옮겨간 후 한강변의 위례는 곧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 1500년 동안 사람의 눈에 띄지않고 황무지로 남게 되었다.

국립문회재연구소는 2000년 4월 풍납토성의 유적에서 나온 시료를 통해 방사성탄소 연대측정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풍납토성의 축성시기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일 것이라는 추정연대가 나왔다. 이형구(선문대 고고학과) 교수의 측정결과에 따르면, 풍납토성은 둘레가 약 3.5km, 밑변이 30 – 40m, 높이가 15m, 넓이 약 26만평이다. 이는 현존하는 토성중 국내 최대규모다. 9.9m이상의 토성 성벽으로 둘러싸인 9평방키로 면적의 중국 은나라 수도 유적은 1만여명이 일년에 330일씩 18년이상을 작업해 축조했다. 이를 참고했을 때 풍납토성 정도 규모의 성을 짓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과 안정된 국가체제가 필요하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데로 기원전을 전후해 백제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는 증거가 된다.

1925년 한반도 중부를 강타한 대홍수로 인해 삼국시대 백제의 고도 하남 위례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풍납토성 남쪽 성벽 가까운 곳에서 한개의 항아리가 모양을 드러냈는데 그 속에는 주전자 비슷한 청동초두 2개가 들어 있었다. 주로 신성한 제사 때 쓰인 것으로 고대 귀족 계층에서 사용한 물건이다. 이후 1964년 10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발굴단이 참여해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은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이 토성의 성벽은 版築 (돌을 판판하게 깔고 위에 흙을 다지는 것) 방법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며 한강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현재의 지명을 따라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현재 남아있는 토성은 북벽이 300미터, 동벽이 1500미터, 남벽이 200미터 정도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 197번지 일대 이른바 미래마을은 풍납토성내 서쪽 한강변 쪽으로 서벽에 임한 약 1,652평방미터에 이르는 지역에 2-3층 연립주택이 가득 들어찬 주거지역이다. 재건축 붐이 한창이던 1997년 풍납동 일대 현대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백제왕궁 유적이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풍납토성 내에서 행해지는 건축행위는 문화재 관리법의 적용으로 선발굴 후개발이 적용되고있다. 2000년 5월 16일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을 보존하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훈령이 있은 다음 사적으로 지정 공고되고 미래마을은 이 조치에 따라 발굴하게 되었다. 2006년 미래마을 발굴에서 바닥을 여러 겹으로 다지고, 그 위에 자갈을 깔고, 복판에는 납작한 판석을 깐 도로가 발견되었다. 공방이나 창고 저장 구덩이 등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지역에서 이렇게 정교하고 노폭이 큰 도로가 부설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궁성안의 도로계획의 일단을 알아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시설물이다.

2007년은 1997년 이 일대에서 백제왕궁 유적이 발견된 10주년이 된 해였다. 이 해 6월 8일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국제학술대회을 개최하려던 회의장을 풍납동 주민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태평로 프레스센터로 장소를 옮겨 간신히 보고회 정도로 마치기도 하였다. 2008년 재개된 2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미래마을의 역사적 평가는 크게 높아졌다. 지난 6월에는 미래마을 서쪽의 대형 건물지 안에서 소의 견갑골 (크기 34cm)에 낮은 홈을 파고 불을 지져 점을 쳤던 흔적이 있는 甲骨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 도로와 수십동의 창고 건물지가 발굴되고 창고 안에서는 대형 술독이 발굴되었다. 미래마을 지역은 주거지 창고 공방이 밀집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어서 풍납토성 내 경당유적에서 재개된 발굴에서도 대형 궁궐 건물지와 목조와 석조로 결구한 대형 우물이 발굴됐다.

아직 풍납토성이 완전히 하남위례성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사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을 두고 여전히 많은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발굴된 이후 백제가 기존의 인식보다 더욱 강력한 국력을 가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풍납토성의 규모는 여느 성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역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2009년 3월 1일 일요일

45. 神武東征

진무도오세이(神武東征) 란 천황가의 초대 가무야마토 이와레 비코 (神武天皇, Emperor Jimmu) 가 쓰쿠지(筑紫)의 히무꾸(日向)를 출발, 야마토(大和)를 정복하고 가시하라궁 (橿原宮)에서 즉위할 때까지의 일본신화의 기록이다. 이 신화를 두고, 가공의 전설이라는 설과, 九州에 있던 세력이 야마토로 옮겨와 야마토 왕권을 구축한 사실을 신화화하여 전해진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신용할 만한 동시대의 문자자료가 없는 한 神武東征을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일본 사학계의 입장이다.

神武天皇 (BC 711년 2월13일 – BC 585년 4월9일)은 일본의 전설적인 초대천황으로 BC 660년 2월 11일 – BC 585년 4월9일까지 재위하였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있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없다.

일본서기를 보면 가무야마토 이와레 비코 (神日本磐余彦天皇) 가 45세때 형제와 자식들을 불러놓고 말한다. 天祖 니니기 (瓊瓊杵)가 天降한지 179만2470년이 지났다. 그러나 요원(遼遠)의 지(地)는 아직 왕화(王化)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모두 따로따로 갈라져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시오쓰치노 오지(鹽土老翁)에게 물어보니, 동방에는 아름다운 나라가 있고, 사방이 靑山으로 쌓여 있다더라. 그 속에 아마노이와후네(天磐船)를 타고 강림한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곳은 천국의 계승자로서의 대업을 이루고 천하에 군림하는데 적합한 곳이다. 틀림없이 나라의 중심이 될 땅이니라.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자는 니기하야히 (饒速日, 신무천황 동정보다 먼저 야마토에 강림한 인물) 일 것이다. 거기에 가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지 않겠는가. 황제 스스로 황자들을 대동하고, 수군을 이끌고 東征에 나서니 太歲 甲寅 10월 5일의 일이다.




일본서기는 출발지를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고 출발한 뒤 최초로 쓰쿠지(筑紫)의 우사(宇佐)에 기항한 것으로 되어있다. 고사기는 日向을 출발했다고 되어있어 학자들은 모두 日向를 출발지로 간주하나 日向가 어디인지는 논란에 싸여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록의 선후는 있으나 이들의 항로를 추적하면 다음과 같다.

히무꾸((日向) 출발 – 쓰쿠지의 오까노 미나토 (岡의 水門) – 쓰쿠지의 宇佐 (현 오오이다현 우사시) – 아끼의 에노미야 (安藝의 埃宮, 현 히로시마) – 기비(吉備, 현 오까야마현) 의 다까시마노 미야 (高島宮) – 아까시 가이쿄 (明石海峽) – 나니와노 미사끼 (難波 岬) – 가와치(河內)의 쿠사가무라 (草香邑, 현 오오사카시 日下) 에서 상륙하여 이꼬마산지 (生鉤山地)의 남쪽으로 연결된 信貴山 南麓의 타쓰다(龍田)고개를 넘어 나라분지로 침공을 시도하나 험로를 돌파하지 못하고 철수한다. 다시 이꼬마산 의 북쪽을 넘어 침공하려 하였으나 쿠사까사까 (孔舍衛坂, 東大阪市 日下) 에서 나가스네히코(長髓彦) 의 반격으로 패배한다. 이 싸움에서 神武의 兄(?)으로 기록된 이쓰세(五瀨, 184 - 239)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방비가 견고한 오오사카 만에서의 공격을 포기한 神武軍은 나라분지의 동쪽으로부터 침공하기 위하여 紀伊半島를 우회한다.

이상의 내용이 神武東征의 도입부로 기록되어 있다. 시대개념이 배제된 기록이므로 일본사가들은 일본서기에 적힌데로 기원전 660년경의 신화로 취급한다. 천황제의 뿌리에 해당하는 기사를 신뢰할 수 있는 문자자료의 도움도 없이 의심하면 천황에 대한 불충이 되므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의 주인공 神武天皇이 누구이며 神武東征이 언제 적 일이고, 큐우슈우에 있던 神武천황은 어떤 정치세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나라분지에는 당시 누가 군림하고 있었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古事記에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고토(神倭伊波禮毗古命), 일본서기에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천황 (神日本磐余彦天皇) 으로 기록된 神武天皇(194 – 256)의 이름은 호호데미(火火出見)라 한다. 그런데 중국의 삼국지 위지왜인전의 히미꼬(卑弥呼) 기사 가운데 景初2년6월 (서기 238) 여왕 히미꼬는 大夫 難升米와 次使의 都市牛利를 대방군에 파견하여 천자를 배알하기를 청 하였다. 이때 중국의 황제는 난승미를 率善中郞將에 임명하였고 또 正始6년 (245) 황제가 대방군을 통하여 난승미에게 “황제의 황색 깃발”을 하사하였다라고 보인다.

서기 238년 야마타이국(邪馬臺國) 히미꼬(卑弥呼) 여왕의 使者 大夫 難升米란 누구일까. 升米란 되미 – 데미 - 뜨기라는 우리 말의 차자(借字)가 되고 難이란 일곱 칠을 뜻하는 부여의 언어이다. 이 부여말이 남아 지금 일본에서 일곱을 나나라고 한다. 일곱 달만에 태어난 아이를 칠뜨기라고 부르는건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되미 – 데미 - 뜨기는 다시 出見으로 표시된다. 難升米는 難出見 (난데미) 도 될 수 있고 위대한 사람이 된 훗날 難 대신 더욱 고결한 火火로 바꾸어 火火出見로 쓰고 호호데미로 읽는다. 난승미는 일곱달 만에 태어나 칠뜨기라고 조롱을 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그는 天孫降臨에 기록된 니니기노미고토(瓊瓊杵尊)를 아버지로, 고노하나사쿠야히메(木之花佐久夜姬)를 어머니로 서기194년 태어났다. 일본서기에서 그가 45세때 東征에 나섰다 하므로 서기 239년 10월 5일 쓰쿠지(筑紫)의 히무꾸(日向)에서 출병한 것으로 된다.

명백하지 않은 역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수 많은 전승을 만들어낸다. 많은 지방에서 역사를 훔쳐 자기지방의 전설로 가공하여 관광객을 부른다. 천손강림이나 신무동정같은 역사적 사실(?)을 이용하여 오늘도 많은 지방이 소위 비지니스를 하고 있으므로 전승이 있다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보증하지 못한다. 일본신화는 신화가 또 신화를 낳아 동일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적용된 경우도 보인다. 神武천황의 출생설화가 대표적인 예로 대마도에서 두 세대가 더 나타나며 이모와 결혼해서 神武를 네째 아들로 낳았다는 것은 전승의 중복적용으로 생긴 오류로 본다. 고노하나하쿠야히메의 네째 아들 호호데미로 끝 난 이야기를 히코나기사다케 우가야 후끼아에즈노미코토 (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尊)를 낳고 후키아에즈가 이와레비코를 네째 아들로 낳았다고 전승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호호데미가 곧 바로 이와레비코이며 이와레란 우리 말의 이파리(잎)이다. 바로 瓊枝玉葉의 葉이 이파리인 것이며 瓊에 해당되는 것이 니니기(瓊瓊杵)로 父子를 합쳐 경지옥엽의 천강손이 된다. 따라서 瓊枝(니니기)가 玉葉(이와레)를 직접 낳은 것이지 그 사이에 불필요한 두 세대가 더 끼어들 필요가 없다.

히무꾸(日向)란 여태까지 일본학자들이 주장해 온 미야사키현(宮崎縣)의 휴가시(日向市) 가 아니라 쓰쿠지의 히무꾸(日向) 이다. 고노하나사쿠야히메 (木之花佐久夜姬)는 전 남편 오호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 의 자식을 셋이나 낳은 여자로서 難升米가 네 번째 아이였다. 그 첫번째 아들이 호데리노미고토(火照命, 187 – 241)로 難升米(194 – 256)와 이부동모형제간이다. 古事記는 호데리를 후하노모지 구노스노가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으로 표기했는데 구노스노가미란 久須男 즉 貴首男으로 백제구수왕을 뜻하며 호데리가 그의 아들이다. 호데리는 대마도의 우미사치(海幸) 였고 난승미는 쿠마소(熊襲)의 야마사치(山幸) 였는데 서기 214년 호데리가 무력으로 쿠마소를 빼앗아 바꿔치기하여 난승미는 대마도로 쫒겨간다. 그후 호데리는 히미코의 야마타이국에 적대적이었으며 위지왜인전에 狗奴國의 男王 卑弥弓呼와 불화하여 전쟁상태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卑弥弓呼가 바로 호데리이며 하야토(隼人)씨의 시조가 되었다. 대마도로 쫒겨간 난승미는 기회를 엿보며 야마타이국의 히미코를 도와 중국을 왕래하였다. 그 때 기록된 이름이 대부 난승미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難升米는 239년 구야한국(狗邪韓國)의 군대(久米軍)를 빌려 야마토 정벌에 나선다. 히미코는 난승미의 증조 할머니이며 구야한국은 그의 아버지의 외가이니 히미코의 야마타이국(邪馬臺國)과 구매(久米, 현 김해라는 지명은 통일신라 이후에 중국식으로 고친 명칭이며 원래 이름은 구매였을 것으로 추측함) 의 구야한국(狗邪韓國)은 그의 강력한 배경이었다. ( 연재기사중 9.히미코와 11.천손강림편 참조)

쿠사까사까에서 패배한 神武軍은 온갖 시련을 겪으며 기이(紀伊)반도를 우회하여 구마노(熊野)와 이세(伊勢)의 경계, 아라사카노즈(荒坂津)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한다. 거기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열병에 걸려 대부분의 군사들이 쓰러진다. 가까스로 천우신조의 도움을 받으며 열병에서 회복되어, 높고 험난한 구마노(熊野)산중을 야타가라스(八咫鳥)의 도움으로 돌파하고 우다(菟田)의 우가치무라 (芽邑) 에 이르러 다시 奈良의 방어군과 대치한다.

나가스네히코(長髓彦)와의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금색의 솔개가 날아와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神日本磐余彦)의 활끝에 앉았다. 솔개가 빛을 발하자 나가스네히코의 군사들은 눈이 부셔 싸울수 없었다. 나가스네히코는 이와레비코(磐余彦)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가 모시는 쿠시타마니기하야히 (櫛玉饒速日命)는 옛적에 아마노이와후네(天磐船)를 타고 天降하였다. 천강신(天降神) 이 둘이 있을 수는 없으므로 너는 가짜일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와레비코와 나가스네히코는 서로의 증표를 확인한 뒤 양쪽 다 천강신의 자손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나가스네히코는 전쟁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니기하야히는 나가스네히코를 죽이고 이와레비코에게 귀순하여 그 신하가 되고 物部氏의 원조가 되었다.

辛酉년 춘정월의 庚辰 朔 (1일) 천황은 가시하라노미야 (橿原宮) 에서 즉위했다. 이 해를 천황의 원년으로 하고 코토시로누시노가미 (事代主神, 202 – 268, 백제 7대 사반왕)의 딸 이스즈히메노미고토 (五十鈴媛命, 219 – 273)를 정비로 세웠다. 辛酉년 춘정월의 庚辰 朔 (1일) 을 그레고리오曆으로 환산하여 BC 660년 2월 11일이 되고 1967년부터 일본은 이 날을 일본의 건국기념일로 지키고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神武天皇은 “ 동방을 정벌한지 6년이 지났다. 위로는 皇天二祖의 다가미무스히노미고토 (高皇産靈尊)와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 (天照大神)가 나라를 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황손 니니기노미고토 (瓊瓊杵尊)가 정의를 실현코자 했던 정신을 이어가자.”라고 선언한다. 서기 245년의 일이며, 狗邪韓國(가야)에서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구한 것이다.



중국의 위지왜인전의 기록 “正始6년 (245) 황제가 대방군을 통하여 난승미에게 황동 (황제의 군사지휘권을 의미하는 군기)을 하사하였다” 라는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히미코가 247년 사망했다 하므로 히미코의 생전에 히미코가 아닌 난승미에게 황제의 군기를 하사한 이유는 무었일까. 난승미가 일본열도의 새로운 왕이 된 것을 중국에서 알고 있었을까?

高皇産靈尊 또는 高木神(다까끼노가미)은 구야국(가야)의 김수로왕 또는 가야의 왕, 天照大神은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을 뜻한다. 이 두 사람의 피를 이어받은 호호데미가 東征의 크라이맥스에서 니기하야히와 확인했던 증표란 아마노하하야 (天羽羽矢)라는 화살이었다고 한다. 무기를 증표로서 확인해보니 같은 天降神의 자손임을 피차 인정하였다고 씌여있는데 내용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일본에 가장 먼저 건너온 세력은 1세기의 가야세력이다. 가야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가야에서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라는 남녀가 일본에 들어와 일본신화의 정점을 이룬다. 이들은 祭政일치시대의 제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야에서 쓰시마가 육안으로 보이고, 쓰시마에서 잇끼섬이 보인다. 잇끼섬에서는 큐우슈우가 보이므로 육안으로 보이는 섬을 징검다리처럼 왕래했던 것은 옛적에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보다 약 100년후 백제의 초고왕자가 강원도의 소시모리로부터 일본의 이즈모(出雲)에 들어왔고 이들은 무력을 앞세운 명백한 정복세력이었다. 초고(肖古, 素古, 速古)왕자는 일본신화에서 스사노오( 須佐之男, 素盞鳴) 라고 기록되었고 무력으로 일본의 제사, 점복(占卜), 예언을 담당했던 무녀그룹을 이즈모의 야에가키궁에 가두고 후비로 삼는다. 그 가운데 리더급의 여인이 아마테루히메 (天照姬) 이며 훗날의 히미코이다. 히미코는 가야의 지배계급 출신으로 김수로왕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보인다.

가야인 히미코와 백제의 초고왕자 (일본신화의 스사노오)사이에서 오시호미(忍穗耳)가 태어나니 구야한국(가락국)에 보내 김수로왕의 사위가 된다. 거기서 174년 니니기(瓊瓊杵)가 태어난다. 이 니니기를 쓰쿠지의 히무쿠(日向)로 데려오는 내용이 천손강림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로 기록되어있다. 물론 현재의 김해에서 배를 타고 왔다. 천손강림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는 니니기의 아들이 초대천황이 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에 조상들의 위상이 신격화된 것이다. 高皇産靈尊, 天照大神, 瓊瓊杵 모두 神武天皇의 조상들이며 가야인들이다. 히미코의 남편, 스사노오는 神武의 증조 할아버지이지만 백제인이므로 신화 속에서 방계의 신으로 취급된다. 그러면 저쪽 긴끼(近畿)의 奈良盆地에 있던 니기하야히(饒速日)는 누구일까.

우미사치(海幸) 호데리노미고토(火照命, 187 – 241)가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미 나왔다. 서기 160년경 이즈모(出雲)에 들어와 세력을 넓히던 백제의 초고왕 (Susanoo)은 큐우슈우와 쓰시마를 손에 넣고, 나라(奈良)와 가와치(河內), 기이(紀伊)와 구마노(熊野)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가 초고왕으로 백제로 돌아간 뒤 그의 장자 오호쿠니누시가 일본을 다스렸다 (13. 귀수왕 참조). 오호쿠니누시는 현재의 오오사카에 있었다. 서기 214년 오호쿠니누시가 백제의 구수왕으로 나간 뒤 오오사카와 나라(奈良)는 그의 아들들이 다스렸다. 나가스네히코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懿德천황)는 오호쿠니누시의 아들로 그의 후계자 이다.

神武東征에서 항복한 니기하야히(饒速日, 222 – 270)는 일본서기에 3대 安寧天皇-시키즈히코다마데미 (師木津日子玉手見) 로 기록되고 백제 초고왕의 손자이며 오호토시노가미 (大年神)의 아들이다. 나가스네히코(長髓彦)는 大國主神(백제 구수왕)의 아들이며 4대 懿德천황(180 – 244) –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大倭日子鋤友)로 기록되고 구수왕이 백제로 나간 뒤 오오사카를 맡고 있다가 神武천황 동정시 서기 244년 전사하였고 니기하야히 (安寧天皇)는 이와레비코에게 항복하고 신하가 되었다.

따라서 천손의 증표를 화살을 보고 확인했다는 것은 별 의미없는 이야기이며 백제와 가야의 왕실간의 일이므로 神武나 懿德 또는 安寧은 피차 서로 피를 나눈 사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결국 백제 초고왕의 손자 (니기하야히 및 나가스네히코)와 증손자 (이와레히코) 사이의 싸움이니 양쪽 다 천강손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전사한 나가스네히코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는 지금도 쿄오토오의 가미가모신사 (上鴨神社)의 제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후일 백제세력이 다시 일본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추모한 것이다.

神武천황은 군중의 분위기를 관리하는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전쟁이 끝난 뒤 가야에서 빌려 온 구매군(久米軍)의 군가를 모아서 편집하고 궁중행사 때 구매마이(久米舞)의 춤과 함께 공연토록 하였다. 이 전통은 현재도 지켜지고 있다. 일본서기에 구매노우타(久米歌) 6首가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나가스네히코와 결전을 치르러 가면서 이와레비코가 불렀다고 한다. 번역은 최인호의 ”제4의 제국”에 나온 것을 약간 고친 것이다.

厳々し 久米の子らが 粟生(あはふ)には 香韮一本(かみらひともと) 其(そ)ねが本(もと) 其ね芽認(つな)ぎて 撃ちてし止まむ
(용감무쌍한 구매의 건아 앞에 마늘 한 포기. 마늘의 뿌리에서 싻까지 이어서 뽑아내 듯, 적의 군세를 섬멸하자, 섬멸하자.)

厳々し 久米の子らが 垣本に 植ゑし山椒(はじかみ) 口痒(くちひひ)く 吾は忘れじ  撃ちてし止まむ
(용감무쌍한 구매의 건아에게 담 앞에 심은 산초는 입안에 넣으면 얼얼하지만 그와 같은 적의 공격의 아픔 또한 잊지 않는다. 반드시 쳐 부수자, 쳐 부수자.)
이렇게 하여 “제4의 제국”은 서기 245년 일본을 통일하여 일본역사의 정점에 서게 된다. 여기서부터 神의 역사(神代)에서 사람의 역사(人代)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가야의 건국을 서기 42년으로 치므로 실로 가야건국 200년만의 경사인 셈이다. 초고왕의 후손, 백제의 7대 사반왕은 서기 234년 백제를 고이왕에게 빼앗기고 일본으로 도피하여 神武동정시 일본에 있었다. 神武天皇이 가시하라노미야에서 즉위하며 세운 正妃, 이스즈히메노미고토는 사반왕의 딸이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와 “제4의 제국” 가야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神武天皇은 곧 바로 백제계의 반격에 직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