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부여의 부여씨(扶餘氏)가 백제왕실뿐 아니라 일본황실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제와 일본은 동일한 세력집단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서로 외국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백제 무령왕이 구주백제를 설립한 후로 구주백제왕을 거친 왕자가 백제왕 또는 야마토천황으로 부임한다. 백제왕과 혈연적으로 약간 소원하거나 야망이 있던 야마토의 천황들은 가끔 백제나 구주백제로 부터 독립하고자 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서기 645년 야마토의 궁중에서 황실내부 사람들에 의해 쿠테타가 발생하고 이 쿠테타에 의해 백제 의자왕이 낙점한 후계세력이 제거된다. 일본역사에서 乙巳의 變으로 불리는 이 정변은 황실내부 방계세력이 중심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며 역사의 정당성을 얻고자 꾸며 낸 것이 타이카노 카이신(大化 改新, Taika no Kaishin)이라는 캐치프레이스였다. 쿠테타의 주모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황자 ( 38대 天智천황)는 서기645년부터 661년까지 천황자리에 외삼촌과 어머니를 앉히고 본인은 황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치밀하고 냉혈한 사람이었다.
이 정변으로 백제 의자왕의 아내 코우교쿠(皇極)천황 (Empress Kogyoku, 594 – 661)이 유배되고 의자왕의 적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615 – 645)황자도 반란죄로 처형된다. 의자왕의 황실을 떠 받히고 있던 당시 정계의 실력자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가 궁궐안의 천황면전에서 도륙된다.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바쁜 백제 의자왕은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란사건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훗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 황자의 후손들이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이 정변과 관련하여 조상들의 무자비한 행적을 감추고자 이 무렵의 역사가 제 멋데로 재단되어 미화된다. 일본서기가 완성된 서기 720년 텐찌(天智)천황의 자식들이 천황자리에 있었다.
백제왕실과 일본황실은 동일한 집안세력이라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하여 약간은 소설같은 이야기를 엮어가야 된다. 소설같은 이야기라 하였으나 일본서기 기록 자체가 모호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혈연과 나이등에 정설이 없는 것이 정설이므로 사실 일본서기 자체가 소설인 것이다.
일본서기 킨메이(欽明)천황 (Emperor Kimmei) 치세 13년 여름 4월 (서기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 (箭田珠勝大兄) 황자가 죽었다는 기사가 다짜고짜 등장한다. 킨메이(欽明)천황이 즉위하고 황후를 세울 때 540년 1월 15일 센카(宣化)천황의 황녀 이시히메(石姬)를 세워 황후로 세웠다. 이시히메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자를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라 한다. 다음을 오사다노 누나쿠라노 후토타마시키 (譯語田渟中倉太珠敷 = 후의 비다쯔천황) 이다. 가장 밑을 카사누이 (笠縫)황녀라 한다. 이렇게 킨메이(欽明)천황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그가 일본서기에 딱 두번 나오고는 서기 552년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 대신 백제왕자 여창이 일본서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시적인 언급을 피하고 일본서기 저자들은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역사를 기록하였다. 킨메이(欽明)치세 14년 (서기553) 백제의 왕자 여창은 전군을 몰아 고구려에 들어가 백합벌에 성채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서기 554년 왕자 여창은 나이많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이 해 그의 아버지 성왕이 전사한다. 555년 백제왕자 여창은 동생 혜(惠, 후일의 백제 혜왕)를 킨메이(欽明)왕에게 보내 성왕사망을 보고한다. 그 해 8월 왕자 여창은 출가하여 수도하면서 부왕에 대한 불효를 참회하겠다고 신하들에게 선포한다. 557년 백제 왕자 여창이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552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죽었다는 기사가 왜 실렸을까? 서기 552년 이후 이 사람은 일본을 떠나 백제에서 생애를 보낸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왕자 여창은 위덕왕으로 598년까지 무려 44년간 왕위에 있었다. 일본의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백제에 오면 왕자 여창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성왕이라면 킨메이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백제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떼어내서 독자적인 일본황실 계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왕자 여창이 성왕의 아들인 이상 킨메이천황의 황후로 기록된 이시히메(石姬)도 성왕의 황후로 보아야 된다. 성왕이 무령왕의 적장자이므로 성왕 다음의 백제와 일본의 왕위계승권은 성왕의 아들들이 0 순위였다.
그럼 킨메이천황 다음에 즉위한 30대 비다쯔(敏達, Emperor Bidatsu)천황을 보자. 그는 위의 이시히메 소생의 두째 황자이다. 바로 위덕왕의 동모형제이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 무령왕의 두째 아들이었던 흠명의 소생이 아니라 사실은 성왕 ( 일본서기는 성명왕으로 호칭하여 흠명과 같은 명(明)을 붙였다) 의 아들이었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에게 백제의 무령왕, 성왕, 그리고 의자왕은 골치아픈 존재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아들들이 일본황실 역사에 나오게 되는데 그들의 족보를 비슷한 시기의 일본역사에만 나오는 천황에게 갖다 붙여야 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들을 낳은 어미들까지 다른 천황의 황후로 기록되는 우스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29대 킨메이(欽明)천황의 가족을 모두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모두 15남 8녀의 자식을 기록했는데 4명이 후일 천황으로 등극한다. 여기서 황후로 기록된 이시히메가 성왕의 황후인데 시동생 킨메이의 황후로 역사에 기록된 이유는 이미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2명의 천황을 배출한 키타시히메는 누구의 아내였을까? 우선 13명의 자녀가 기록된 것부터 좀 구린내가 난다. 그러나 2명의 천황은 역시 성왕의 자식이라 봐야 되지 않을까.
오아네노 키미가 출산한 4남 1녀가운데 하츠세베 황자가 32대 스슌(崇峻)천황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킨메이(欽明)의 자식인 것이 확실하다. 자식의 숫자로 보더라도 한 사람의 자식으로 15남8녀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皇后:石姫皇女(いしひめのひめみこ。宣化天皇の皇女)2남 1녀
箭田珠勝大兄皇子(やたのたまかつのおおえのみこ、八田王) : 백제왕자 여창 (530 – 598)
渟中倉太珠敷尊(ぬなくらのふとたましきのみこと、30대 敏達天皇)
笠縫皇女(かさぬいのひめみこ、狭田毛皇女)
妃:稚綾姫皇女(わかやひめのひめみこ、『古事記』に小石比賣命。宣化天皇の皇女。) 1 남
石上皇子(いそのかみのみこ、上王)
妃:日影皇女(ひかげのひめみこ、『古事記』になし。宣化天皇の皇女?)1 남
倉皇子(くらのみこ。『古事記』に宗賀之倉王として、母は糠子郎女)
妃:堅塩媛(きたしひめ。蘇我稲目宿禰の女) 7남 6녀
大兄皇子(おおえのみこ、31대 用明天皇)
磐隈皇女(いわくまのひめみこ、夢皇女) 伊勢斎宮
臘嘴鳥皇子(あとりのみこ、足取王)
額田部皇女(ぬかたべのひめみこ、33대 推古天皇)
椀子皇子(まろこのみこ、麻呂古王)
大宅皇女(おおやけのひめみこ)
石上部皇子(いそのかみべのみこ、伊美賀古王)
山背皇子(やましろのみこ、山代王)
大伴皇女(おおとものひめみこ)
桜井皇子(さくらいのみこ、桜井之玄王)
肩野皇女(かたののひめみこ、麻奴王)
橘本稚皇子(たちばなのもとのわかみこ)
舎人皇女(とねりのひめみこ、泥杼王) 当麻皇子の妃
妃:小姉君(おあねのきみ。蘇我稲目宿禰の女)4 남 1녀
茨城皇子(うまらきのみこ、馬木王)
葛城皇子(かずらきのみこ)
穴穂部間人皇女(あなほべのはしひとのひめみこ) 用明天皇の皇后、聖徳太子の母
穴穂部皇子(あなほべのみこ、須賣伊呂杼・天香子皇子・住迹皇子)
泊瀬部皇子(はつせべのみこ、長谷部若雀命・32대 崇峻天皇)
妃:糠子(ぬかこ。春日日抓臣の女)1남 1녀
春日山田皇女(かすがのやまだのひめみこ)
橘麻呂皇子(たちばなのまろのみこ、麻呂古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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