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본기 성왕 원년 (523)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렀다. 좌장 지충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백제본기 성왕 7년 (529년) 겨울 10월 고구려 왕 흥안(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을 함락하였다.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 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명이었다
백제본기 성왕 16년 (538년) 서울을 사비(泗沘, 다른 이름은 所夫里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백제기록보다 상대편인 신라의 기록이 더 참고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 (서기 528년)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18년 (531) 상대등의 관직을 처음 설치하였다. 19년 (532) 금관국의 왕 김구해 (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奴宗, 武德, 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신라본기 진흥왕 원년 (서기 540년) 진흥왕이 일곱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려 황태후가 섭정하였다. 2년 (541)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고,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9년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과 함께 백제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에서 구원을 청하였다.
11년(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빼았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쳐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을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2년 (551)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침입케 하여 10개 군을 빼았았다.
14년 (553) 가을 7월 백제의 동북부 변두리를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軍主로 삼았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로 삼았다.
15년(554)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이 가야와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新州軍主 김무력이 州의 군사 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4명과 군사 2만 9천 6백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554년 백제본기 성왕 32년 (554) 가을 7월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서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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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을 믿고 550년 백제 성왕은 신라, 가야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 공격에 나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을 수복하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오히려 금현성을 빼았겼는데, 신라장군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군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고 군사 1 천을 머물러 지키게하였다.
이후 백제, 신라, 가야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도 6개의 군을 회복하였다. 신라는 이때 비로소 죽령이북의 땅을 확보하여 한강유역에 접근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를 물밑에서 접촉하여 나제동맹을 무력화시키고 신라와 동맹을 성립시킨다. 고구려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고 신라는 마음을 바꿔 고구려와 손 잡고 백제를 공격한다. 신라의 배반으로 백제는 당혹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라군은 한강이북의 갓 수복한 백제땅을 차지하고 한성까지 장악해버렸다. 성왕은 궁지에 몰려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굴욕을 감수하며 가까스로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린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을 확보하고 그곳을 新州로 삼았다. 그 신주의 軍主로 임명된 자가 바로 김무력이다.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뿐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현 충북 증평)과 금현성(현 충북 진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곳의 軍主 김무력은 532년 신라에 투항한 가락국 마지막 왕 김구해의 3남이며 뒷 날 태어날 김유신의 조부이다. 이런 연고로 김유신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배신에 이를 갈던 성왕은 이후 일본과 가야를 질타하여 연합군을 편성하고 554년 5월 왜의 수군이 도착하자 신라 정벌을 시작하여 신라의 함산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고들어 갔으나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굴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퇴각하여 환산성 (고리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성왕이 이끄는 백제연합군도 충북 영동군의 핏골전투에서 패하여 성치산성으로 지휘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반격에 나선 신라군은 현재의 옥천분지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금산지역의 백제군과 대치하였다. 성치산성에서 환산성까지는 약 20킬로메터, 말을 타면 두 시간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삼성산성 (관산성, 충북 옥천)이 위치하고 이곳은 신라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백제성왕의 움직임을 이들은 포착하고 있었다.
554년 가을 7월 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만 데리고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태자 여창의 군영, 환산성으로 출발했다. 백제는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신라는 백제진영의 이동을 훤히 파악하고 태자 여창의 군대와 성왕의 교통로를 관산성에서 차단하여 양군을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관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실개천이 있는데 현재 서화천이라 불린다. 역사기록은 이곳을 구천(狗川) 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 말 개천을 한자표기로 개 狗로 바꾼것이다. 성왕은 현지 방언인 구진베루(벼랑)밑에 흐르는 개천가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라복병에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이후 관산성의 신라군은 환산성과 성치산성의 백제군을 각개격파한다. 성왕이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치산성의 백제군이 필사적으로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신라조정은 이때 도살성과 금현성의 김무력에게 관산성으로 이동하여 백제군을 섬멸할 것을 명령한다. 김무력의 기병대는 진천 – 청주 – 신탄진 – 대전 – 백골산성으로 진격하여 백제태자 여창군의 배후로 달려든다. 백골산에서 신라군을 방어하던 백제군은 현재의 대청호를 등지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김무력의 기병이 무방비 상태인 배후를 공격하여 일방적인 공격을 퍼붙는다. 학살과 다름없는 신라기병의 맹공으로 백제의 여창군은 좌평 4명과 사졸 2만 9천6백여명을 잃었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 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츠쿠지국조(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 사이에 여창은 겨우 도망쳤다.
전쟁기록과 설명사진은 고성혁의 역사추적에서 옮긴 것이다. 기록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재 현지를 답사하고 사진까지 곁들인 선배 연구가들의 도움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성혁 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554년 7월 신라와 백제의 대회전은 역사에 관산성 전투라고 기록되지만 실재는 백골산성에서 대회전이 치러졌고 신라는 이때부터 한반도의 주도권을 확보해 가는 반면 백제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이 전쟁에 참전하여 백제를 도왔던 경북 고령의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되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몇 백년간 백제와 동맹관계를 유지해 왔던 가야제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진흥왕은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관경비와 단양에 적성비를 세워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다. 창녕비는 561년, 함남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수 있으나 북한산비는 훼손이 심하여 건립연대의 해독이 불가하다. 북한산 문수봉 아랫쪽의 비봉에 세워져있던 진흥왕 순수비는 조선 순조 16년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백제는 가야를 합병하지 않고 몇 백년간 동맹국으로 대우해 왔는데 6세기의 신라는 상대국을 정복하면 바로 신라의 땅으로 편입하여 직접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확립은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으나, 고구려나 백제보다 150년후에야 불교를 수용하면서 신라는 늦은만큼 확실하게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진흥왕은 재위 37년만인 576년 43세로 죽었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그의 치세하에 마련된 것이다. 이 시절의 신라 군부를 움직인 이사부와 거칠부 두 사람은 시대가 낳은 탁월한 전략가로서 삼국중 가장 후진적이던 나라가 100년후 삼국통일의 주역을 맡을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6세기 중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에 10개의 가야 소국들이 남아 있었는데 고령의 대가야 (加羅國) 가 마지막으로 562년 신라에게 멸망하자 일본의 欽明천황( 539 – 571재위)이 남긴 피맺인 절규가 일본서기 흠명치세 23년 (562년) 여름 6월기사로 실려있다.
신라는 서쪽 구석에 치우친 보잘것 없고 야비한 나라이다. 하늘을 거역하는 무도을 저지르고 우리의 은의를 배반하고 우리의 직할지를 쳐부셨다. 우리 인민을 해치고 군현에 해를 입혔다. 옛적에 신령스럽고 총명하였던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노 미코토 (氣長足姬尊, 神功황후, Empress Jingu) 는 천하를 주행하며 힘 써 인민을 보살폈다. 신라가 곤란한 일을 당하자 불쌍히 여겨 신라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으며, 요해지의 땅을 주어 신라가 번영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노 미코토가 신라를 언제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느냐. 우리국민도 신라에 원한 같은 것은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장창과 강궁을 들고 임나(가야)를 공격하여 거대한 이빨과 날카로운 손톱으로 인민을 학살하였다. 간을 찢어 발기고, 사지를 도려냈으며, 뼈를 부시고 , 시신을 불태우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임나사람을, 관리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칼 도마에 올려놓고 마음데로 난도질을 하고있다. 왕의 땅에 살면서 왕의 신하로서 그 땅의 곡식을 먹고 그 땅의 물을 마시고 산 사람으로서 이러한 말을 듣고 애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태자, 대신들은 서로 도와서, 대지위에 피눈물을 흘릴 망정 원한은 드러나지 않게 가슴 속에 감추고 가야 할 사람들이다.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 그 몸을 수고하여 봉사하는 자일진데, 선왕의 은혜를 입고, 후세에 선왕의 뜻을 이어 가려면 단장의 아픔을 이겨낼 생각으로 반역자를 응징하여, 천지의 아픔을 달래고,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 죽어서도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 한 한(恨)을 남길 것이다.
흠명치세 32년 (571년) 여름 4월 15일 천황이 병으로 누웠다. 황태자가 타지에 있어 부재중이므로 역마를 달려 대전으로 불러들여 그 손을 잡고 천황이 말했다.
나는 병이 무거워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뒤를 부탁한다. 너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전과 같이 임나와 사이좋은 사이로 회복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이 달 천황은 62세로 붕어하였다. 위와 같은 언사를 보고 欽明천황이 가야의 후손일꺼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야를 빌어 백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欽明천황의 유지를 받들어 30대 敏達천황(Emperor Bidatsu, 538 – 585)이 등극하며 그는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欽明의 아들이 아니라 백제 성명왕의 둘째 아들로 위덕왕의 동생이다. 이 때 왕위 계승권은 철저하게 장자에게 있었으며 흠명천황은 성명왕의 동생이므로 그 아들 중 천황이 된 사람은 32대 崇峻천황 (530 –592) 한 사람 뿐이다. 나머지 백제 27대위덕왕, 일본 30대 敏達천황, 일본 31대 用明천황 (540 – 599, 백제 28대 혜왕), 백제 29대 법왕 ( ? – 600)은 모두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일본 33대 推古천황 ( Empress Suiko, 554 – 628) 도 성명왕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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