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73. 신대(神代)의 역사

서기 245 1 1일 진무천황(神武天皇)은 나라현(奈良県) 카시하라시(橿原市)의 우네비산(畝傍山) 기슭 카시하라궁(橿原宮)에서 즉위했다.

신유(辛酉)년 춘정월 초하룻날이었다 하며 이 해를 천황의 원년으로 하고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딸 이스즈히메 (五十鈴媛命)를 정비로 세웠다. 당시의 신유(辛酉) 1 1일을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하면 BC 660 2 11일이라면서 서기 1967년부터 일본은 이 날을 건국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서기 245(을축년)에 가장 가까운 신유년은 서기 241년이다. 일본사람들은 오랜 세월 신화에 세뇌되어 자국의 역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전 시작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호호데미 (火火出見命)는 “우리가 동정(東征)에 나선지 6년이 흘렀다. 황천(皇天)의 위광에 힘 입어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땅은 아직도 완전히 평정되지 않아 할 일이 많지만 야마토 주변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없어졌다. 이제 여기서 황도(皇都)를 열어 새 나라를 건설하자.”라고 선언한다.

 自我東征於茲六年矣 以皇天之威 凶徒就戮 雖土未 余妖梗 而中洲之地無復風塵 誠宜恢廓皇都 

큐우슈우(九州)의 천손(天孫)세력이 킨키(近畿)에 원정하여 야마토를 정복하고 나온 첫번째 성명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언사는 황천(皇天)이란 말이다. 황천이란 호호데미가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의미로 쓰고 있으며 두 사람의 조상을 의미한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역사가들은 신화의 형식을 빌어 역사를 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일본서기의 신화란 신화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로 기록된 것이다. 호호데미가 신화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전쟁을 했겠는가? 우리는 신화를 통하여 당시 인간들의 구체적인 욕망과 역사의 필연성을 읽어야 된다

서기 239년 전쟁을 시작하면서 큐우슈우(九州)의 출정식에서 나온 성명서가 있다. 호호데미 (火火出見命) 45세가 되었을 때 형제와 자식들을 모아 놓고 “우리 일족의 신화에는 타카미무스히(高皇靈尊)와 아마테라스(天照大神)가 지상세계를 평정한 뒤 이를 니니기(瓊瓊杵尊)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다. 니니기는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내려 와 이 서쪽 변경의 땅을 다스렸다. 그로부터 179 2470여 년이 흘렀으나 …. (45. 神武東征 참조)

及年四十五歲,謂諸兄弟及子等曰:「昔我天神,高皇靈尊、大日霎尊,葦原瑞穗國而授我祖-火瓊瓊杵尊. 於是 火瓊瓊杵尊,闢天關,披雲路,驅仙蹕,以戾止.是時運屬鴻荒,時鐘草昧.,蒙以養正,治此西偏.皇祖皇考,乃神乃聖,積慶重暉,多歷年所.自天祖降跡以逮,於今一百七十九萬二千四百七十餘歲.

한글로 쓰면 신들의 이름이 너무 번쇄하여 신들의 존칭을 생략한다. 존칭을 포함하면 타카미무스히노 미코토와 아마테라스 오호카미가 되어 너무 긴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황천(皇天)이란 타카미무스히(高皇靈尊)와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남녀 2명의 신을 뜻한다. 니니기는 호호데미의 아버지로 천손강림의 주인공이다. 아마테라스, 오시호미미(忍穗耳命), 니니기(瓊瓊杵命), 호호데미 (火火出見命)로 혈통이 이어졌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이 혈통을 2세대 더 늘려 놓았다. 천손(天孫)이란 아마테라스를 정점으로 한 이 혈통을 말하며 천손족이라 하면 그 주변인물까지 포함한다.

호호데미란 바로 삼국지위서 왜인전의 경초 2 (서기 238) 기사에 나오는 난승미(難升米)이다. 경초 2  6월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등을 파견하여 대방군에 와 천자를 뵙기를 청하였다. 대방태수 유하(劉夏)가 관리를 파견하여 사신들을 인솔하고 낙양에 들어왔다.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送詣京都

난승미의 난은 일곱을 뜻하는 부여 말이다. 한자로 쓰기 전의 난승미는 칠뜨기, 칠되미 또는 칠데미란 이름이었으며 소위 칠삭동이를 의미한다. 되를 되승()으로 하고 미는 소리나는 데로 쌀미()로 하여 승미가 되었고 데미는 데() ()로 훈독한 한자를 쓴 것이다. 심지어 되승 대신 말두()를 써서 난두미(難斗米)로 쓴 기록도 있다. 고귀한 신분이 되자 난을 호호(火火)로 바꾸어 호호데미 (火火出見)가 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기사가 나온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더니 (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왜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 찾아 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처럼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사라졌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아마테라스(天照大神) 12 ()를 거느렸다고 하는데 12후 가운데 세오리쯔히메(織津) 있다. 세오리쯔는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아라미타마(荒御魂)로 여겨지고 있다. 세오리쯔가 바로 아마테라스라는 뜻이다삼국유사의 세오녀(細烏女)와 일본신화의 세오리쯔는 동일인의 이름이며 비단을 짜는 여자라는 뜻이다. 이 여인이 훗날의 왜여왕 히미코(卑彌呼)이다. 일본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天照大御神)의 모습은 서기 157 10대의 소녀였다.   

구야국(狗邪國) 2대 거등왕(居登王)이 서기 199년부터 253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구야국의 건국은 서기 42년이며 초대 수로왕(首露王) 15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하나 이는 초기 기록이 누락된 결과이므로 거등왕은 수로의 아들이 아니라 몇 세대 이후의 인물일 것이다. 거등왕이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고 가정하더라도 서기 157 10대의 세오녀(細烏女)가 거등왕보다 2세대 정도 앞 선 세대이며 그녀는 신라인이 아니라 구야국의 공주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카미무스히 (高皇靈尊)는 구야국의 수로왕으로 그려지는 인물로 아마테라스와 함께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오히려 아마테라스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기 245년 야마토를 점령한 호호데미가 제일성으로 “황천(皇天)의 위광에 힘 입어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 고 한 것은 자기 자신을 구야국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구메(來目)의 군사를 동원하여 야마토를 정복하였다. 구메(來目)란 당시의 구야국 수도의 이름이다. 구메(來目)를 김해(金海)로 바꾼 것은 통일신라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흉도란 누구일까? 아마테라스에서 호호데미까지의 혈통 속에는 부성(父性)이 탈락되어 있다. 증조 할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성장한 후손들이 증조 할아버지의 후손들을 흉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부계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아마테라스의 분노가 후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부계 타도로 이어진다. 호호데미의 야마토 정복은 아마테라스의 평생의 한을 풀어 주었고 이 소식을 듣고 히미코는 서기 247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본신화 속에 그려진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이 스사노오(고사기 須佐之男命, 일본서기 素戔鳴尊)이다. 일본신화는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가 마치 형제간인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태어났다는 것은 숨기지 않았다.

일본신화는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와 국토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본열도의 여러 섬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신의 이름이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로 남녀의 신이다. 이름이 아름답고 귀에 낯 설지 않는 이 신들이 사실은 가야의 정견모주의 아들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 2010 MBC에서 방송된 연속극 김수로(극본 김미숙, 연출 최종수 장수봉)에서 가야산 정견모주의 두째 아들로 나온 이진아시(伊珍阿豉)가 바로 일본신화의 정점에 등장한다그는 죽을 때까지 열도에서 살았고 그의 부인 이자나미는 열도보다 고향 땅이 좋았던지 일찍 황천에 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 가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 그리고 마한출신으로 알려진 쯔쿠요미이다. 쯔쿠요미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신이므로 무시해도 좋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스사노오이다. 이자나미(伊邪那美)가 떠난 뒤 이자나기의 왼쪽 눈에서 아마테라스가, 오른쪽 눈에서 쯔쿠요미(月讀尊), 이자나기의 코에서 스사노오(素戔鳴尊)가 태어났다.

백제 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166 - 214),  6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 234)을 이어 7대 사반왕(沙伴王)이 서기 234년 즉위하였으나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 - 286)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이즈모(出雲, 현 시마네현)에 돌아온다.  이들 3명이 살았던 시대가 열도의 스사노오, 아마테라스,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그리고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살았던 시대와 겹친다.

스사노오의 이야기는 이즈모(出雲, 현 시마네현)에서 시작되며 그는 아마테라스와 동시대인이다. 가야의 아마테라스와 백제의 스사노오가 열도의 역사를 연다.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신녀, 스사노오는 백제의 왕자이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 사이에서 타코리히메(田心), 타기쯔히메(湍津), 이찌키시마히메(市杵嶋)의 세 딸이 태어났다.이들은 무나카타 삼신(宗像三神)이라 불리며 지금도 추앙받는 신이다또 오시호미미(天忍耳尊), 아마노호히(日命), 아마쯔히코네(天津彦根命), 이쿠쯔히코네(活津彦根命), 쿠마노노쿠스비(熊野橡樟日命) 5명의 아들을 낳았다. 여기 나온 오시호미미가 바로 아마테라스가 직접 낳은 아들이며 진무천황 호호데미의 할아버지가 된다.

스사노오(素戔鳴尊)난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타카아마노 하라(高天原, 신들의 나라)에 와도 좋다는 아마테라스의 허락을 받았으나 그의 행동은 막무가네였다. 아마테라스는 밭을 가꾸고 있었는데 스사노오는 봄에 도랑을 메꾸는가 하면 논두렁을 부수고 모종을 마구 옮겨 심곤 하였다. 가을이면 말을 풀어 밭을 망쳐놓았다. 또 아마테라스가  니이나메노 마쯔리(新嘗祭)를 할 때 그 방에 똥을 쌌다또 아마테라스가 신의(神衣)를 짜기 위하여 신성한 하타도노 (機殿)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건물의 지붕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하여 얼룩말의 가죽을 벗기고 시체를 떨어 뜨렸다이때 아마테라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베틀의 북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아마테라스는 하늘의 바위굴에 들어가 바위문을 닫아 잠그고 숨어버렸다태양의 신 아마테라스가 바위문을 안에서 잠그고 숨어버렸으므로 온 나라 ()  빛을 잃고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신라에서 태양 빛이 사라져 암흑의 세상이 되었었는데 이제 일본에서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으니 신기할 뿐이다. 우리의 짐작데로라면 양쪽이 동일한 태양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스사노오는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梨, 牛頭山)에서 배를 타고 이즈모에 들어왔다 하며 야마타노 오로치(八岐 大蛇)를 퇴치하고 근거를 마련한다. 야마타노 오로치(八岐大蛇)란 이들의 정벌에 대항한 토착세력으로 본다. 신라의 소시모리는 기록시점에 따라 신라도 될 수 있고 고구려도 될 수 있고 백제도 될 수 있다. 소시모리는 삼국의 사이에 낀 지방이다. 한반도 동해안의 춘천에서 함흥까지의 어디 쯤이라고 비정된다. 그는 현 시마네현 (島根県) 스가(須賀)에 스가궁(須賀宮)를 짓고 도읍한다. 헌데 심상치 않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전해 오는 당시 스사노오의 야쿠모 타쯔(八雲立)라는 노래가 있다.

구름일렁이는 이즈모(出雲)
겹겹의 구름 울타리 둘러
아내가 편히 살 여러겹 울타리
아아 여러겹 울타리

호쯔마쯔다에(秀眞傳)는 환단고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서물인데 아마테라스에게 12명의 신녀가 있었다고 한다그 가운데 8명의 신녀들을 압송하여 이즈모의 스가궁에 가두고 그녀들은 스사노오의 후비가 되었다. 8명의 후비에서 태어난 것이 앞의 신화에서 언급한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다스사노오에게서 태어난 배 다른 형제들이다.  아마테라스도 여기 끌려 와 스사노오의 아이를 낳았다그 아들 이름이 오시호미미(天忍耳尊)이다. 아마테라스는 오시호미미를 나중 구야국에 보내  타카미무스히 (高皇靈尊)의 딸과 혼인시켜 니니기(瓊瓊杵)가 태어났다

일본서기는 카미()의 역사(神代)와 인간의 역사(人代)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는 호호데미가 야마토 정벌에 나서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역사감각으로 서기 239년부터 사람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연히 카미의 역사는 서기 239년에서 끝난다. 인간이 서기 239년을 경계로 카미와 인간으로 분리될 수 없으므로 카미의 역사의 마지막에 기록된 카미들은 인간의 역사에 참여해야 된다

그런데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신의 역사의 아무개가 인간의 역사의 누구에 해당하는지 눈치로 맞출 수 밖에 없다. 눈치로 해야 되는 역사는 정통파 역사학자의 영역이 아니다. 심증을 역사적 증거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사노오 계보 (출처)

고사기에 스사노오의 계보(系譜)가 나와 있다.
  1. 쿠시나다 히메(櫛名田比賣)가 야지마지누미(八嶋士奴美神)를 낳았다.
  2. 카무오호이찌 히메(神大市比賣)가 오호토시(大年神)와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를 낳았다.
야지마지누미가 오호야마쯔미(大山津見)의 딸 코노하나찌루 히메(木花知流比賣)와 후하노모지쿠누스누 (布波能母 久奴須奴)를 낳고 다시 5세대 후에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오호쿠니누시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면서 오호나무지(大穴牟), 아시하라시코오(葦原色許男神), 야치호코(八千矛神), 우쯔시쿠니타마 (宇都志國玉神)를 나열한다. 그런데 이 복잡한 계보는 곧 엉터리로 판명되고 처음 나온 야지마지누미와 오호쿠니누시 이하 5개의 이름이 동일인이다. 왜냐하면 6대손이라는 오호쿠니누시가 바로 스사노오의 딸 스세리히메(須勢理姬命)와 혼인하기 때문이다.

오호쿠니누시는 스사노오의 후계자이다. 백제 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166 - 214)이 서기 166년 왕위에 올랐다는 역사기록이 도움이 된다. 스사노오는 한자로 표기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발음이며 초고(肖古) 또는 속고(速古)란 스사노오의 한자표기일 것이다. 서기 166년 스사노오는 백제의 초고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아들 오호쿠니누시가 이즈모에 남아 부친의 과업을 이어간 것으로 본다.

스사노오의 후손중 오호쿠니누시 계열과 오호토시 계열은 이즈모 경영을 완성하고 야마토로 진출하였고 우카노미타마 (宇迦之御魂神)는 쯔시마와 큐우슈우 그리고 구야국을 잇는 해상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히미코의 천손족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진무동정(神武東征)에 참여하여 야마토로 진출한다. 따라서 야마토을 선점하고 있던 오호쿠니누시 후손과 진무동정 이후 새로 온 우카노미타마 후손들이 함께 야마토에 살게 되고 이들을 모두 가모씨(賀茂氏)로 칭한다. 결국 스사노오의 후손들이 가모씨(賀茂氏)인 것이다. 오호쿠니누시와 우카노미타마는 배 다른 형제간이다. 우카노미타마의 후손들은 진무동정의 포상으로 카즈노현주(葛野縣主)가 되어 현 쿄오토오(京都)지역에 뿌리를 내린다.

서기 166년 스사노오가 백제의 초고왕으로 나갈 때 이즈모의 스가궁 여러 겹의 구름 울타리에 갇혀 있던 신녀들 8명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머지 신녀들은 아마테라스를 따랐다고 본다. 훗날의 기록에 이들이 낳은 아들들이 아마테라스를 위하여 일하기 때문이다. 다섯 살이 된 어린 아들 오시호미미를 안고 아마테라스(당시의 이름 아마테루)가 간 곳은 친정인 구야국일 것이다. 아마테루히메 즉 세오녀의 나이 스물 두 세살 무렵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 20(서기 173왜여왕 히미코(卑彌呼)가 사자를 보냈다. 아마테라스가 다시 열도에 돌아와 가야왕실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우니 야마타이국이다.

오호쿠니누시 계보 (출처)
오호쿠니누시의 계보중 역사상 중요한 인물만 고르면 다음과 같다.
1)    타키리비메 (多紀理毘賣)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鋤高日子根神)와 타카히메(高比賣) 다른 이름은 시타테루히메 (下光比賣命)를 낳았다. 이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지금 카모대어신(迦毛大御神)으로 불린다.
2)    카무야타테히메 (神屋楯比賣)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을 낳았다.
3)    어머니가 분명하지 않은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

오호토시(오호쿠니누시의 배 다른 동생)의 계보는 많은 인물이 열거되어 있지만 우리가 거론하게 될 사람은 오호쿠니미타마 (大國御魂神)와 오호야마쿠히(大山咋神) 다른 이름은 야마스에노 오호누시(山末之大主神)이다. 오호야마쿠히는 히에이산(日枝山)과 카즈노(葛野)의 마쯔오 (松尾)에서 제신으로 모신다. 

지금 열거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일본열도의 역사를 연다. 오호쿠니누시의 큰 아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를 낳은 타키리히메가 스사노오가 낳은 3명의 딸 가운데 타코리히메 (田心)이다. 고사기는 타키리비메 (多紀理毘賣), 일본서기는 타코리히메(田心)로 표기한다. 배 다른 형제끼리의 결혼이다.

카쯔라기(葛城)에 있는 3개의 카모()신사 가운데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현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타카카모신사 (高鴨神社)의 제신이며 고사기는 그를 카모 오호미카미 (迦毛大御神)라 기록했다. 오호미카미(大御神)로 고사기에 기록된 카미는 일본역사에서 아마테라스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의 두 사람뿐이다. 카쯔라기(葛城)에 카모쯔바(鴨都波)신사가 있고 코토시로누시를 모신다. 신사이름에 카모()가 붙게 된 것은 스사노오의 후손들이 스스로를 카모씨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이들의 후손들이 분리해 가면서 오호미와(大三輪), 와니(), 카쯔라기(葛城)등의 새로운 왕실의 씨성을 열어간다

쿄오토오시(京都市)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는 보통 카미가모신사(上賀茂神社)로 불린다. 짝을 이루는 가모미오야신사(賀茂御祖神社)가 있는데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로 불린다. 불행하게도 가모와케 이카즈찌 (賀茂別雷)라는 인물이 역사상의 누구인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시모가모신사의 제신은 진무동정시 야마토에 진출한 스사노오의 다른 아들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의 아들로 여겨지는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라 하며 일본서기는 그를 야타카라스 (八咫烏)로 기록했다.

이즈모(出雲)의 오호쿠니누시는 점차 세력을 키워 야마토로 진출하였는데 그와 관련된 기사를 일본서기는 이렇게 처리하고 있다.

그 뒤 오호쿠니누시는 여러 지방을 순행하면서 나라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즈모(出雲)에 돌아와 “그런데로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제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없다. 지금 나 이외에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고 말 했더니 신비한 빛으로 바다를 비추며 홀연히 나타난 카미()가 있어 이르기를 “내가 없었으면 너는 이 만큼 해 낼 수 없었다. 내가 있었으므로 이만한 공적을 이룰 수 있었다.” 라 하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호쿠니누시가 물으니 “너는 나의 사키미타마(幸魂쿠시미타마(奇魂).”라 하였다.
“과연. 당신이 나의 사키미타마 쿠시미타마였군. 지금부터 어디서 살 생각입니까?” 하였더니 “나는 야마토노쿠니 (日本國)의 미모로산(三諸山)에 살고자 한다.” 그래서 그 땅에 궁전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것이 오호미와노 카미 (大三輪之神)이다.

이 신의 아들이 카모노키미(甘茂君), 오호미와노키미(大三輪君)등이며 또 히메타타라 이스즈히메 (蹈鞴五十鈴) 이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와니()로 변하여 미시마의 미조쿠히히메 (杙姫) 또는 타마쿠시히메 (玉櫛) 에게 통하여 이스즈히메를 낳았다고 한다. 이 여인이 호호데미천황의 황후이다.

이즈모는 작은 나라이다. 이즈모를 완전히 평정하였지만 오호쿠니누시의 자아(自我)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비전이 좋은 땅으로 야마토를 점 찍고 현 나라현 사쿠라이시(奈良県井市)의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 자리에 궁전을 짓고 옮겨왔다. 비로소 오호쿠니누시의 야마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서기 214년 백제의 초고왕이 죽고 6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 234)이 즉위한다. 구수왕을 우리는 여태까지 추적해 온 오호쿠니누시로 보고 있다. 오호쿠니누시가 야마토를 비우고 그의 장자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鋤高日子根神)가 야마토의 왕이 된다

큐우슈우에 야마타이국을 세운 아마테라스는 서기 170 년경부터 오호쿠니누시에게 로비를 사작한 것 같다. 자기 아들에게 이즈모(出雲)를 양보해 주도록 스사노오의 후계자 오호쿠니누시를 설득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낸다. 첫번째 사자가 아메노호히 (天菩比)로 스사노오와 신녀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그러나 그는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오호쿠니누시에게 봉사하였다.

두번째 사자로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를 보냈는데 그는 오호쿠니누시의 딸 시타테루히메(下照比賣)와 혼인까지 하고 아예 눌러 앉아 8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신화상으로는 하늘나라에서 타카미무스히 (高皇靈尊)와 아마테라스 (天照大御神)가 함께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카미의 초월적인 힘으로 아메노와카히코를 살해한다. 자객을 보내서 배신자를 처단했다는 뜻이다.

세번째 사자로 타케미카즈찌(建御雷之男神)를 보냈다. 이 때 오호쿠니누시는 자기 아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와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의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한다. 코토시로누시는 천신(天神)의 아들(御子)에게 이즈모(出雲)를 바치겠다며 사라져 갔으나  타케미나카타는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타케미카즈찌가 힘으로 제압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이렇게 이즈모를 평정하여 저항세력이 없게 만든 다음 그 유명한 천손강림이라는 이벤트가 연출된다. 천손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려와서 군림하기만 하면 되는 구조이다. 세월이 지나는 바람에 천신(天神)의 아들(御子)이 오시호미미에서 니니기로 한 세대 지나갔지만 아마테라스의 끈질긴 권력욕은 손자를 왕위에 올리려고 집착한다.

이 기록은 7세기 말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직접 자기들의 육안으로 아마테라스의 모델이 된 권력욕에 눈 먼 권력자를 보면서 만든 스토리이다. 40대 텐무(天武)천황의 아내이며 다음 천황이 되는 지토우(持統)가 자기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 위하여 얼마나 집착하였는지 당시의 역사가들은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실제의 역사에서 천손에게 이즈모를 양도한 일은 없었다. 또 진무의 천손족과 오호쿠니누시 의 가모()족과는 계통이 다르다. 천손족은 구야국 계통 스사노오는 백제계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진무이후의 역사가 천손족의 단일혈통인 것처럼 만들어 7세기의 황실도 천손으로 만들었다. 천손족의 호호데미는 이즈모을 양도받아 야마토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실력으로 아마테라스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7세기의 일본황실에게는 진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자기 후손들이 영원히 왕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카미보다 좋은 도구는 없다는 것을 7세기의 일본황실은 알고 있었다

로마에서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며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비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당시까지 로마황제는 선거에 의하여 뽑혔으며 원로원의 승인을 받는 존재였다. 인간보다 우월하고 특별한 권위라는게 없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 콘스탄티누수 대제(275? – 337)이다. 그는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로마황제와 접목시켜 황제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지만 그의 관심은 기독교가 아니라 황제의 자리였다. 황제란 인간이 이렇쿵 저렇쿵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신이 내린 자리이니 인간의 시비를 초월한다는 논리가 그의 생각이다. 그 때부터 아무나 함부로 황제가 되겠다고 나설 수 없었다

7세기의 일본황실이 최선의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것이 4세기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생각이며 이 방법은 21세기의 지금도 유효하다. 천손을 거역하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천황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는 주장만큼 천황가를 즐겁게 할 이데올로기가 있겠는가

그런 연유로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천손을 누누히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일본역사가 씌여지고 있던 7세기 말 지토우천황의 염원이었다. 지토우천황 다음에 집안의 여인들이 여럿 왕위에 오른다. 사내아이들이 어려서 사망하니 다음 사내아이가 자랄 때까지 남에게 왕위를 주지 않고 유지하기 위하여 집안 여인들이 왕위를 꽤 차고 앉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백제가 사라지고 일본이 홀로 섰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백제가 열도를 관리하던 시절에는 누가 다음 왕이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홀로 선 뒤에는 누가 다음 왕이 될지 예측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지토우천황계보 (출처)
지토우는 서기 671년의 임신의 난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텐무의 황후로 백촌강 전쟁의 와중인 서기 662년 쿠사카베 황자를 낳았다. 서기 679년 텐무천황과 황후, 그리고 6명의 황자들이 요시노에서 맹약(吉野盟約)을 교환하였다. 6명의 황자란 쿠사카베(草壁皇子, 662 – 689), 오오즈(大津皇子, 663 – 686), 타케치(高市皇子, 654 – 696), 오사카베(忍壁皇子, ? – 705), 카와시마(川島皇子, 657 – 691), 시키(芝基皇子,668 – 716)로 카와시마와 시키는 텐치천황의 소생, 나머니 4명은 텐무의 아들이다. 텐무는 황자들끼리 싸우지 말고 협력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그들을 하나하나 포옹하였다. 황후도 황자들을 포옹하였다

형제간에 정의로운 맹약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잠재적인 황위 계승권자들에게 다음 천황은 내 아들이니 욕심내지 말라는 경고나 마찬가지이다. 지토우의 아들 쿠사카베황자를 서열 1번으로 공인하고 나이도 연장이며 나라에 공적도 많은 타케치를 서열 3번으로 못 박아 대권욕심을 접게 하는 것이 황후의 의도였을 것이다. 서기 681년 쿠사카베황자를 태자로 결정한다.

서기 686 9 40대 천황 텐무가 사망하고 다음 달 모반의 죄를 씌워 오오즈황자를 처형한다. 오오즈황자는 10 2일 체포되어 10 3일 처형되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사태의 진전이었다. 오오즈의 아내는 맨발로 뛰어나와 남편을 따라 분사했다 하며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사카베황자는 황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서기 689년 나이 27세로 사망하고 모후인 지토우가 41대 황위를 이었다.  

서기 697년 어린 손자가 14세가 되자 지토우는 손자에게 양위하고 섭정으로 남는다. 그가 42몬무천황 (文武天皇, 683 – 707)이다. 서기 703년 지토우가 사망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몬무천황도 서기 707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그가 남긴 것은 6세의 아들이다. 이 아이가 즉위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집안의 여인들이 황위를 꿰어 찬다. 처음에 아이의 할머니가 등장한다. 쿠사카베의 아내이며 몬무의 어머니인 43대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이 등장하여 서기 715년까지 황위에 있었다. 할머니가 노령이 되어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아이의 고모가 나선다. 몬무의 누나인 44겐쇼우천황(元正天皇 )을 세워 715 년부터 – 724 년까지 황위를 붙들고 있다가 아이가 23세가 되자 황통을 물려준다. 그가 45대 쇼우무(聖武)천황이다.
 
단명으로 끝난 쿠사카베 황자의 양친, , 아들과 딸이 모두 황위에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백제가 사라진 뒤 열도에서 발생한다. 어린 사내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집안 여인들이 보위를 차지하고 곁가지 혈통의 황자들은 얼씬 못하게 한다. 일본서기 마지막 등장인물 지토우천황의 금쪽같은 내 새끼를 끼고 도는 모습이 3세기 천손족의 아마테라스에게 투영되어 천손강림 신화가 만들어진다

지토우(持統)란 시호의 의미는 핏줄을 지켰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핏줄에 매달렸다는 의미일까? 그러나 역사의 전개는 지토우천황의 처절한 염원데로 되지 않았다. 쿠사카베황자와 그의 아들 몬무의 단명, 그리고 무자비한 정적제거는 텐무계통의 혈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49대 코오닌(光仁) 천황부터 텐찌의 후손들이 황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