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가 타라시히 히로누카 천황 (息長足日廣額天皇)은 敏達天皇의 손자이고,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 (彦人大兄皇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누카테히메황녀 (糠手姬皇女)이다. 推古29년 (621) 황태자 토요토미미 (豊聰耳, 성덕태자)가 죽은 뒤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推古36년 (628) 천황이 죽었다”. 일본서기 敍明紀는 이렇게 시작된다.
위의 시호가운데 足日廣이 脩書에 기록된 왜왕 多利思北孤에 해당한다. 敏達(30대 천황), 用明(31), 崇峻(32), 推古(33)로 이어진 형제자매가 60여년간 황위를 즐기는 바람에 한 세대를 건너뛰어 그들의 장손자 敍明天皇이 629년 (당시 36세) 34대 천황이 된다. 백제의 위덕왕이 이들 형제자매 가운데 적장자이며 崇峻을 제외한 모두가 백제 성왕의 아들 딸이다 (崇峻은 欽明의 아들).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 – 敍明天皇 (多利思北孤 훗날의 의자왕) –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로 이어지는 것이 백제왕실 적장자의 명단인데 아좌태자가 598년 부왕 위덕왕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 때문에 백제왕위는 598년 위덕왕 사후 다시 혜왕 –법왕으로 위덕왕의 늙은 형제들이 채웠다. 리스트의 마지막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 615 – 645)는 이런 혈통을 가졌기 때문에 방계황자들의 타겟이 되어 645년 을사의 변 (Isshi Incident)으로 희생된 비운의 황태자였다.
이들의 혈통이 황위에 오르는데 필요한 조건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루히토노 오호에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나카노 오호에황자도 나중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의 딸, 야마토히메를 황후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위에 오르려면 그만큼 혈통이 중요했던 것이다. 야마토히메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황후가 되어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명목상의 부부였을 것이다.
치세 2년 (630) 정월 타카라 황녀 (寶皇女)를 황후로 세워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 가츠라기황자 (葛城皇子)
두째 하시히토 황녀 (間人皇女)
셋째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
다음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딸 호테이노 이라츠메 (法提郞女)부인에게서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를 낳았다.
다음 敏達天皇의 딸 타메황녀 (田眼皇女)를 비로 세웠으나 자식의 기록이 없다.
641년 10월 敍明天皇 쿠다라노 미야 (百濟宮)에서 서거. 그때 동궁 히라카스와케 황자(開別皇子)가 16세였다.
위에 인용된 몇줄의 기록은 이 시대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하다.
630년 타카라 황녀를 황후로 세워 2남1녀의 역사상의 인물들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발언은 皇極과 齊明이 처음부터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타카라황녀는 敏達의 딸 타메황녀의 다른 이름이며 齊明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630년 황후가 된 것은 皇極이지 齊明이 아니며 皇極은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齊明의 무덤은 奈良市 高市郡 高取町 오찌노 오카노에노 미사사기 (越智崗上陵)이며 황극은 奈良縣 橿原市 고타니고분 (小谷古墳)으로 알려져 있다.
皇極/齊明의 68세 사망설은 皇極의 생년 594년 기준이며 齊明은 601년생으로 61세 사망이 타당하다. 帝王編年記는 齊明의 출생을 601년으로 기록하고있다. 두 사람 다 661년 사망했는데 皇極 594년생, 齊明 601년생이다.
가츠라기황자, 히라카스와케황자, 나카노 오호에황자, 天智天皇은 동일인의 명칭이다. 641년 히라카스와케황자가 16세였다는 기록은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나이를 속이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삽입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를 敍明천황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속이려면 626년생이라는 꼬리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敍明천황의 친아들이라면 이러한 사족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그 시점 동궁(東宮)이었다는 기록도 믿기 어렵다. 지금 공식적인 역사서 모두가 그의 나이를 이 일본서기기록을 근거로 626년생으로 못 박고 있으나 (641-15 = 626)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齊明이 시집올 때 데려 온 아야황자 (漢皇子) 및 교기(翹岐)로 보는 이 글에서는 그의 생년을 619년으로 한다. 天智天皇의 619년 출생설은 一代要記에 적혀있다. 齊明은 619년 天智를 낳고 620년 시집와서 나카즈의 나카즈노미야 (中津宮)에 살면서 622년 오호아마황자를 낳았다. 天武天皇은 65세를 살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622년생이 합당하다. 一代要記, 興福寺略年代記, 神皇正統錄, 本朝皇胤紹運錄이 천무의 622년 출생을 기록하고 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615년생으로 본다. 615년으로 보는 이유는 641년 敍明이 떠날 때 후루히토가 즉위하지 않고 皇極이 즉위한 이유를 그 때 후루히토가 30세가 되지 않아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641년 후루히토가 27세이므로 皇極이 3년 정도 황위에 있다가 후루히토가 30세를 넘으면 황위를 넘겨 줄 계산이었다. 그 시절 백제왕은 대강 40세, 야마토 천황은 30세 정도의 연령 가이드 라인이 있었다고 보인다. 백제 무령왕, 의자왕 모두 40세이후에 즉위하였다. 645년 후루히토가 31세가 되므로 천황으로 즉위할 연령이 되었으나 그 때에 맞춰 을사의 변이 일어난 것이다.
후루히토황자는 敍明天皇의 아들가운데 최연장자이며 어머니가 소가노 우마코의 딸이다. 소가집안은 당시 최고의 실세이며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자였다. 후루히토가 차기 천황이 되리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기 618년 백제 무왕의 딸 齊明이 시집왔을 때 호테이노 이라츠메 히메와 타메황녀는 시집와서 이미 여러 해를 지냈을 것이다. 호테이노 이라츠메와 타메황녀는 박힌 돌, 齊明은 그 당시 굴러 온 돌이 아니었을까. 헌데 서기 619년 齊明이 갑자기 출산하는 일이 발생한다. 갑자기라는 의미는 敍明천황에게 시집온지 열 달이 채 되기 전이라는 뜻이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일본서기에 아야(漢)황자라고 기록되었다. 일본서기는 아이의 아버지를 타카무쿠(高向)왕이라 하였으나 아이덴티티가 파악되지 않는 인물이다.
이렇게 의문속에 태어난 아야황자는 자기보다 4살 많은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 보면서 자랐으리라. 일본서기는 아야황자와의 연관성을 밝히지 않은 채 교기(翹岐)라는 이름을 등장시킨다. 교기(翹岐)라는 이름은 많은 것을 함축하는 의미로 선택된 용어이다. 서기 629년 敍明천황이 야마토의 천황으로 옮길 때 타메황녀(타카라황녀 즉 皇極)와 16세의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함께 아스카노 오카모토노미야 (飛鳥岡本宮)로 따라갔고 齊明과 그 아들들은 九州 오오이다현의 나카즈노미야에 남았다. 큐우슈우에 남아 구주백제왕으로 봉해진 齊明이 야마토의 황후가 되었다는 것은 후대의 창작이다. 敍明이 붕어했다는 641년 27세의 동궁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이미 어엿한 어른이었다. 16세의 동궁 히라카스와케 운운 할 처지가 아니었다. 실제 오오이다현의 나카즈에서 성장한 교기는 641년 23세의 청년이었다.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626년생으로 만들기 위하여 16세의 동궁 히라카스와케 운운하는 해괴한 기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622년생인 天武가 동생이 아닌 형이 되고 만다.
645년 6월 12일 皇極天皇은 아스카노 이타부키노미야 (飛鳥板蓋宮)의 다이고쿠덴 (大極殿)에 좌정하고 있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가 곁에 시립하고 있었다. 쿠데타의 주모자들은 三韓의 사자들의 조공을 받는 자리에 출석할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의 무장해제를 확인했다. 소가노 이루카가 참석하고 쿠라야마타노 마로가 조서를 낭독하는 사이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명에 의하여 궁중의 통행문이 차단되었다. 소가노 이루카가 공격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쓰러지면서 천황을 향해 말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였읍니까?”. 이 광경을 보면서 천황이 나카노 오호에를 향해 “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소리쳤다. “쿠라쯔쿠리 (鞍作, 이루카의 실명)가 황실을 빼앗으려 하였읍니다” 나카노 오호에의 대답이다. 쿠라쯔쿠리가 쓰러지자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가 정신없이 밖에 나와 외쳤다. “카라히토(韓人)들이 쿠라쯔쿠리를 헤쳤다. 억장이 무너진다.” 하고는 내전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당시 구주백제는 백제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야마토 사람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말의 억양만 들어도 구주사람인지 야마토 사람인지 구별할 수 있었으리라. 카라(韓)란 원래 한반도의 마한 진한 변한의 한이므로 반도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 사람을 카라히토 라고 했을 것이다. 카라히토들이 쿠라쯔쿠리를 죽였다는 증언은 구주백제에서 온 교기, 카루황자, 나카토미노 카마코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로부터 3개월 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도 모반죄로 처형된다.
2남1녀중의 하시히토황녀 (間人皇女)는 나중 孝德天皇(위의 카루황자)의 황비가 되는데 나카노 오호에황자와 연인사이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근친상간의 시대라 하더라도 동부동모형제간의 치정관계는 좀 심하다. 敍明天皇이 나카노 오호에의 친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부동모간의 치정관계).
1997년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 기비이케 (吉備池)제방에서 7세기중반의 거대한 사원 금당터로 보이는 기단이 출토되었다. 금당터는 동서 약 37미터. 남북 약 27미터의 면적이며 서쪽으로 86미터 떨어진 곳에 일변 약 30미터의 탑기단과 회랑, 중문, 승방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기단의 규모로 보아 아쓰카 시대 최고층의 높이 90미터 정도의 탑으로 추정한다. 기비이케 하이지 (吉備池廢寺)로 불리는 이 유적이 敍明天皇 11년 (639년) 조영이 시작된 쿠다라 오호데라 (百濟大寺)가 아닐까하고 단연 주목을 받고있다.
百濟大寺는 최초의 칙원사 (勅願寺) – 國營寺院으로 敍明紀 11년 7월 쿠다라 강(百濟川) 양쪽에 오호미야 (大宮) 및 오호데라 (大寺) 를 건설한다. 구다라 강의 서쪽 주민은 百濟大宮을 짓고 동쪽주민은 百濟大寺를 지었다. 639년 12월 百濟川邊에 구중탑을 세웠다. 640년 10월 百濟宮으로 옮겼다. 641년 10월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일본서기에서 이렇게 붕어한 그는 현해탄을 건너 백제 사비성의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吉備池 廢寺의 발견은 百濟大寺의 소재지를 놓고 논쟁중인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조영시기는 백제대사의 시기와 일치한다. 동시대의 다른 사원을 압도하는 기단의 규모는 국가가 총력을 경주하여 착수한 칙원사에 어울린다. 吉備池 廢寺가 있는 곳은 이와레(磐余)라 불리는 지역이며 5 – 6 세기 야마토 왕권이 궁을 집중적으로 지었던 지역이다. 推古天皇의 豊浦宮 (토요우라노 미야) 부터 飛鳥 (아스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궁을 옮겨가는데, 서명천황이 백제대사와 백제궁을 다시 磐余 (이와레)에 조영하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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