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8일 일요일

35. 백제 왕흥사와 일본의 法興寺



2007년 10월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왕흥사적의 목탑기초(심초석)부분에서 서기 577년 (위덕왕 24년) 제작되어 수납된 사리장엄구와 각종의 장식품등을 발굴하였으며, 완전한 모습으로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발표하였다. 왕흥사적목탑은 실재하지않으나 조사결과 가로세로 1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었다. 사리용기에 백제왕의 이름이 각인된 명문이 발견되어 당시 역사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577년 2월 15일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위덕왕의 실명)이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 이 명문에 의하여 왕흥사적의 사리장엄구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 창건되었다는 것,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년경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제시대 왕흥사는 사비성이 있는 부소산에서 봐서 금강 건너편 대안의 울성산(131미터) 산록에 건축되었다. 삼국사기는 왕훙사 창건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왕 2년 (600) 정월 왕흥사 창건착수하여 무왕 35년 (634) 2월 낙성되다. 절은 강변에 붙었고 채색장려하다. 왕은 항상 배에 타고 절에 들어가 분향한다.

현재의 일본 아스까데라(飛鳥寺)는 아스까촌 (明日香村)의 넓지않은 경내에 安居院이라는 조그만 전당과 상처투성이 大佛의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스까데라의 전신인 호꼬지(法興寺)는 당시의 숭불파였던 소가노 우마꼬 (蘇我馬子)가 用明천황 2년 (587)의 발원에 의하여 세워진 소가씨의 사원이다. 소가씨는 587년 배불파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와의 전쟁에 앞서 싸움에 이기면 불사를 건립하겠다고 서원한 바 있어 승전후 아스까의 마가미노 하라 (眞神原)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崇峻天皇 원년 (588) 백제왕에게 法師와 工匠의 파견을 부탁한 바, 백제에서 승려, 사리, 목수, 주물기술자, 기와기술자, 화공이 헌상되었다. 또 여승을 백제에 보내 법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592년 法興寺의 불당과 보곽공사를 시작하다. 593년 推古天皇 원년 탑의 심초에 사리가 안치되고 심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596년 8년만에 아스까데라의 낙성식이 있었다. 아스까데라는 탑을 세개의 금당으로 둘러 싼 일탑삼금당 양식의 가람배치였다. 이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는 四天王寺식이나 法隆寺식과 다른, 유례가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그보다 약 1세기 먼저 조성된 고구려의 금강사(金剛寺) 사지인 청암리 사지와 같은 양식으로 알려져 왔다.

을사의 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나까노 오호애황자와 나까토미 가마타리의 초대면이 이 절에서 이루어졌고, 645년 소가노 이루까를 암살한 혁명군은 이 절에 군영을 설치하고 甘樫丘 (아마까시노 오까)에 웅거하고 있던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까의 부친)를 압박하였다.

2008년 4월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절로 알려진 나라의 아스까데라의 원형은 부여 왕흥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를 내 보냈다. 신문은 와세다 대학의 오호하시 가츠아끼 (大橋一章)교수등 일본연구팀이 금월 초 부여 왕흥사유적지를 조사한 결과 거기서 출토된 기와의 문양과 탑의 구조등이 아스까데라의 유물과 거의 일치함을 밝혔다. 오호하시교수는 두 절이 동일한 기술자에 의해 창건되었다는데 이견이 없다고 말했다. 아스카데라는 일본유일의 1탑3금당식이다. 왕흥사는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연결된 사천왕사식으로 보이나 회랑의 동서에 있는 부속건물이 후일, 아스카데라를 지을 때 금당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함께 연구에 참가한 국학원대학의 鈴木靖民 (스즈끼 야스타미 ) 교수는 아스카데라 창건은 백제왕과 왜왕간의 활발한 교류를 의미하며 역사서에 당시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꼬가 낙성식에서 백제의 의복을 입고 참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이 연재기사를 읽어 온 독자들은 이때 백제와 야마토가 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소가노 우마꼬가 백제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 저자 주)

2008년 11월 중순 동경 국학원대학에서 백제 왕흥사유적 관련 심포지움이 열렸다. 2007년의 발굴조사 결과 일본最古의 사원 아스카데라와 왕흥사의 가람배치에 유사점이 눈에 띄어 연구자를 크게 자극하였다. 지난 반세기동안 아스카데라의 원류는 고구려 평양의 청암리(淸岩里) 사지 (寺址)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움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표되었다. 한국 문화재청의 김용민 발굴조사과장의 보고에 의하면 왕흥사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정림사(定林寺)와 능산리사 (陵山里寺) 두개의 사원에서 금당의 동서로 긴 건물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제까지 탑과 금당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사천왕사식으로 보아왔으나 이로써 왕흥사와 닮은 구조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병호학예원은 “왕흥사만이 특별한 구조를 가진게 아니라 백제에는 사천왕사식과 다른 독자의 가람배치가 있었다”고 한다. 능산리사는 강당의 양 옆구리에도 건물이 부속되는 등 세부는 다르나 백제식이라는 호칭명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2008년 12월 4일 아사히신문 문화면 기사)

여기에서 1탑3금당이니 하는 가람배치 용어가 나오는데 설명이 필요하다. 사찰하면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떠 올리게 되지만 사찰의 기본은 대웅전이 아니라 탑이다. 원래 사찰의 가장 본질적인 경배의 중심은 대웅전 밖에 호젓이 서 있는 탑 구조물이다. 탑(Stupa)이란 인도의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의 무덤을 의미하며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수납했던 곳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 탑(Stupa) 중심구조였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불상중심구조로 변화하므로 탑과 금당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초기 불교에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의 근본취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아이콘적인 구체형상으로서 부처를 기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의도로 불교에서는 우상숭배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대웅전에 안치된 금빛찬란한 오늘날의 부처님의 형상은 훨신 후대에 대승불교운동과 함께 출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대에 따라 탑과 금당의 배치관계에 변화를 수반하므로 불교사학자들에게 가람의 배치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정림사는 왕궁에서 연장된 대로에 면한 부여의 상징, 능산리사는 왕가의 능묘를 수호하는 절이었다 하며 왕흥사보다 앞 서 서기 567년 지어졌다. 성왕이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한 뒤 성왕의 아들 위덕왕 시절 사비성은 사찰건립의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리라. 요새 말로 하면 백제에서 사비성 천도와 함께 시작된 건설붐이 推古天皇 시대 아스카(飛鳥)의 건설붐으로 이어진다. 이 시대의 백제와 일본관계를 근대국가의 외교관계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 백제 성왕의 장자가 위덕왕 (일본에서 야타노 다마까스노 오호애황자)으로 사비성 사찰건립의 주체였고, 일본의 敏達, 用明, 崇峻, 推古天皇이 위덕왕의 동생들이다. 위덕왕은 부왕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았고 부처님에 의지하여 부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그는 일본의 동생들에게도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도록 독려하고 사찰건립을 지원하였다. 그의 뜻을 받들어 그의 동생들 , 조카들(聖德太子), 손주(敍明天皇)들이 불법을 일으키고(法興), 불법을 융성하게 하고 (法隆), 불법을 널리 퍼뜨린(廣隆) 결과가 호꼬지(法興寺), 호류지(法隆寺), 고류지 (廣隆寺)등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백제 사비성에서 터득한 대형사찰 건축및 불상제작의 노하우는 당시 일본의 사찰을 건립하는데 그데로 전해 졌다. 백제의 첨단 건축기술이 채용된 첫 번째 사례가 아스카데라였다. 아스카데라는 일본에 처음 등장한 기와지붕이었으며 그 기둥이 주춧돌위에 세워진 첫번째 건물이었다. 백제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은 아예 가족을 데리고 거기서 살게 되었으니 일본의 아스까 문화란 백제의 문화인 셈이다.






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34. 부여풍장은 누구일까

서기 665년 9월 23일 당은 백제진장 유덕고(劉德高)와 곽무종(郭務悰)을 일본에 파견했다. 파견원 254명, 7월 24일 쓰시마 도착, 9월 20일 쓰쿠지를 거쳐 9월 22일 표함을 진상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663년 백강의 전투에서 백제-왜의 동맹군을 격파한 뒤 승전의 여세를 몰아 일본에 들어 온 점령군이었다. 이들의 최대의 관심은 백제의 마지막 항전의 구심점이었던 풍장왕의 행방이었다. 백강의 전투중 홀연히 사라져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인물, 부여풍장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범(戰犯)이었다.

敍明 3년 3월 (631년)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 서기의 이 기사는 분명히 엉터리이다. 왜냐하면 631년 백제왕은 무왕이며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므로 631년 백제 의자왕이 야마토의 敍明天皇에게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낼 수는 없다. 왜 이런 기사가 필요하였을까. 이는 역사를 하루하루 일기처럼 기록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100년 후에 역사를 한꺼번에 기록한다면, 기록자는 후일의 일을 미리 알고 현재의 일을 기록하므로 후일을 알기 때문에 일으킬 수 있는 실수이다. 풍장이 백제왕자로 일본에 인질로 있어야만 훗날 어떤 역할을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敍明 7년 (635) 쯔루기 연못 (劍池)에 기이한 연꽃이 피었는데 한 줄기에 두 송이의 꽃이더라 (一莖二花). 한 줄기에 두송이의 꽃이란, 원래는 한 사람인데 두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일인이역의 배우같은 것일까.

660년 당 – 신라군이 백제를 멸하자 백제의 잔존세력이 일본에 구원군을 요청하면서 체일중인 왕자풍장을 국주로 맞을 의향을 전해 왔다. 齊明天皇은 661년 (齊明 7년) 1월 6일 九州에 가서 백제부흥군을 진두지휘코자 나니와(難波)를 출항하여 九州를 향하여 서진한다. 1월 8일 오까야마(岡山)시 동남부에 위치한 오호쿠(大伯)에 닿자 오호다황녀 (大田皇女)가 딸을 출산하였으므로 이름을 오호쿠황녀 (大伯皇女)라 지었다. 오호다황녀는 齊明天皇의 손녀이며 황태자 나까노 오호애황자 (中大兄皇子)의 딸이다. 출항한지 이틀만에 출산할 만큼 산월이 가까운 임산부까지 백제원정단에 포함시킨 걸 보면 황실의 구성원은 남녀불문 총 출동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쟁준비로 난리통인 九州의 쓰쿠지(筑紫)에서 오호다황녀 (644 – 667)는 663년 두째, 오호즈황자 (大津皇子)를 출산한다. 오호즈(大津)는 오미(近江)의 오호즈가 아니라 쓰쿠지의 나노 오호즈 (娜大津)이다. 661년 첫째 오호쿠황녀, 663년 두째 오호즈황자를 낳은 것이다. 또 우노노 사라라 황녀 (645 – 703, 훗날의 持統天皇)도 662년 쿠사가베황자를 출산한다. 두 여인이 모두 天智天皇의 딸로 형제간인데 동일한 남편,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의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오호아마황자는 훗날의 天武天皇 (622 – 686)이며 天智天皇 (619 – 671)의 동생이다.

나까노 오호애황자 (훗날의 天智天皇)의 동생 오호아마황자 (훗날의 天武天皇)가 이 아이들의 아버지인데 그 무렵 전혀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백제왕자로 적힌 풍장만 쓰쿠지의 전진기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왕족은 齊明天皇, 나까노 오호애황자, 백제왕자 풍장, 풍장의 숙부 새성 충승 (塞城 忠勝)뿐이다. 새성 충승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새성이란 아명이며 충승이란 어른이 된 뒤 품위를 갖춰 붙인 이름일까? 역사가 명백한 기록을 하고 있지 않지만 충승은 충지(忠志)란 동생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백제 부흥군으로 주유성에 있다가 패전후 항복했다고 당 나라 기록이 전한다. 일본서기에 야마토의 敍明天皇밑으로 기록된 두명의 동생, 中津王 - 多良王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그러면 오호아마황자는 일본서기 어디에 등장할까? 敍明 2년 (630) 敍明의 가족소개에서 大海皇子 (오호아마황자, 훗날의 天武天皇)로 등장한다. 다음은 天武 원년 (672)의 자기소개에서 어릴 적 大海人皇子 (오호아마황자)라 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전부이다. 그것도 첫번에는 大海, 두번째는 大海人이다. 敍明紀, 皇極紀, 孝德紀, 齊明紀의 629년부터 661년까지 형인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대활약을 보인 반면 동생 오호아마황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661년 오호다황녀가 백제원정단의 뱃길에서 오호쿠황녀를 출산했다. 아이 아빠라는 오호아마황자는 어디에도 보이지않고 왕자풍장과 동행한 백제 구원군의 선상에서 생긴 일이다. 662년 우노노 사라라황녀가 다시 오호아마황자의 아들을 낳고, 663년 오호다황녀가 두째 오호즈황자를 출산한다. 주변에 황실의 남자라고는 풍장뿐이다. 오호아마와 풍장 즉 天武와 豊璋은 한 줄기에 핀 두 송이의 연꽃이었다.

631년 백제의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 이 때 풍장뿐 아니라 풍장의 동생 선광 (善光 후일 禪廣, ? – 692)이 함께 야마토의 아버지, 敍明天皇 옆으로 왔다. 둘 다 敍明과 齊明간에 九州의 나까즈에서 태어 난 아들이다. 풍장이 10세, 선광이 6세정도의 나이였으리라. 선광은 정치보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지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백제왕자 신분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당의 유덕고는 그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天智天皇이 완강히 저항하여 선광은 승려로 일생을 보냈다.

당과 일본의 전후처리 협의 과정에 오호아마황자는 그 아이덴티티에 의심을 받지 않았다. 인질이었던 백제왕자 풍장은 자국의 전쟁에 가서 행방불명으로 일본은 그 이상은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왕자 풍장과 관련된 사람들은 당의 관리와 대질심문 전에 살해되었으리라. 665년 하시히토 황녀가 죽었는데 667년 2월 어머니인 齊明과 합장하였다. 이 무렵 오호다황녀의 무덤이 곁에 있었다고 하였다. 오호다황녀는 667년 24세로 죽었다.

그 해 3월 수도를 오미(近江)로 옮긴다. 이 때 야마토 지역은 당의 관할지역으로 양도하고 九州에 당의 쓰쿠지 도독부가 설치된다. 일본도 백제처럼 당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은 죽은 사람의 무덤까지 확인했는지 제명천황과 간인황녀의 합장이 이 무렵 이루어진다. 제명천황은 전쟁을 명령한 당사자이므로 시체까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길고 긴 줄다리기 끝에 당과의 전후책임문제가 매듭지어진 후에야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천황에 즉위하니 668년 정월이었다.

2008년 12월 13일 토요일

33. 百濟觀音 (Kudara Kannon)

백제관음은 나라현 이까루가쵸의 호류지(法隆寺)가 소장하고 있는 아스까시대의 목조관음보살상이다. “목조관음보살입상 (백제관음) 1구”가 국보로 지정된 정식명칭이다. 길이 210.9 센치의 가늘고 늘씬한 이 불상은 아스까시대 7세기 중반경 제작되었다고 보며 제작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1997년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백제관음의 특별전시가 이루어졌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프랑스의 야마토의 해”및 “야마토의 프랑스의 해”란 취지로 양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이때 양국의 국보급 미술품 1점씩을 상대국에서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때 야마토에서 “백제관음”, 프랑스에서 우젠느 드라크로와의 대표작 “민중을 인도하는 자유의 여신”이 선택되었다.

백제관음이 루브르 미술관에서 공개되었을 때 불란서에서는 일본의 비너스로 절찬을 받았으며 1개월간 30만이상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 불상은 세계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백제관음은 옆에서 보는 모습도 매우 아름다워서 法隆寺에서는 측면에서도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일본국내最古급의 부처인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의 혼을 흔드는 최고도의 미를 갖추고있다.

이 녹나무(樟木, 쿠스노끼)로 조각된 불상의 출생은 의문에 쌓여있다. 일본의 대표작으로 뽑혀 루브르 미술관에 보낼 정도로 아름다운 이 불상을 두고 일본사람들이 백제 커넥션을 당연히 거부한다. 이름에 백제가 붙어있긴 하지만 당시의 한반도에는 佛師가 구스노끼를 사용한 예가 없고, 아무래도 일본국내에서 만들어진 듯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스까의 도읍지에는 백제관음과 같은 타잎의 가늘고 긴 부처는 발견된 게 없다. 이 정도의 천재적인 불사라면 많은 부처를 만들었을 테고,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부처일까.

문예평론가 가메이 가쓰이치로 (龜井勝一郞)가 야마토 古寺風物誌에 기록한 감상을 보자.
1937년 나라를 처음 방문하여 여늬 부처의 좌상을 봐도 모두 그렇고 그런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거대하면 거대할 수록 그런 느낌은 더 했다. 그러나 입상의 아름다움은 언어를 단절하는 매력으로 나를 압도하였다. 특히나 法隆寺 금당에 우뚝 선 백제관음은 불상에 대한 본인의 편견을 일거에 부셔버리고 말았다. 이 미불의 인도에 의해 나는 일보일보 많은 고불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슴프레한 어둠속에 그 희미한 체구가 불꽃처럼 똑바로 서있는 모습을 본 순간, 관찰보다는 먼저 합장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대지에서 피어오른 영원의 불꽃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상이라기 보다 인간의 탑 – 생명의 불꽃이 생동하고있는 탑이었다. 가슴에도 동체에도 사지에도 사실적인 노출같은 것은 없다. 근육도 물론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달한 피안의 체구(體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라고나 할까.

40여년전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화상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일본을 보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한다면 나는 한점의 미술품을 가지고 나가겠다. 그것은 호류지(法隆寺)의 백제관음보살상이다.” 목조로 된 이 백제관음은 천의(天衣)자락 휘날리는 몸매와 은은한 미소로 세계최고의 걸작조각품으로 꼽힌다.

이 불상이 언제부터 백제관음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옛 기록이 별로 없다. 백제관음은 그 명칭때문에 종전직후 한국정부가 반환요구한 첫번째 문화재였다. 이에 대해 백제관음의 재질인 구스노끼 (樟木, 녹나무, Campho tree)는 일본특산종으로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으므로 백제관음은 한국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 진 불상이라는 주장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녹 나무로 불상을 조각하는 일은 아스까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대부분의 아스카 불상이 녹 나무로 밝혀져 녹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왔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 하게 들리지만 한 반도에 녹 나무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녹 나무는 녹 나무과의 대표적인 수종으로 한 반도의 난대림 즉 상록활엽수림대의 대표적 구성종의 하나이다. 나무전체가 향기를 내며 나무껍질과 뿌리에서 나온 향이 계피향과 비슷하여 옛부터 음식물의 향신료로 쓰였고 고대 이집트 인들은 이 나무의 살균력을 잘 알고 미이라의 방부제로 썼다. 이 나무는 벌레가 생기지 않으므로 가장 이상적인 건축재, 가구, 조각재료로 쓰인다.

호류지 창건당시인 750년 기록에 이 백제관음에 해당하는 불사의 기록이 없고 11세기 후반에 작성된 금당일기에도 백제관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 호류지의 기록에서 백제관음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 훨신 훗날인 겐로쿠(元祿) 11년 (1698) “겐로쿠 호류지 諸堂佛體數量記” 이다. 여기에 “허공장입상, 길이 7척5분”이란 불상높이 기록때문에 백제관음에 해당한다고 추정되고 이것이 백제관음의 존재를 기록한 최고의 문헌으로 본다. 호류지 제당불체수량기는 이 허공장보살을 “백제로부터 도래”라는 글이 보이고 백제관음 대좌 아래에도 허공장 대륜 (虛空藏 臺輪)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로써 백제로부터 도래했다는 기록과 함께 백제관음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 한국측 학자들의 주장이다. 메이지 19년 (1886년) 일본정부가 최초로 호류지의 보물조사를 실시한 조사보고서는 이 불상을 반도에서 온 관음으로 판단하여 "조선풍 관음"으로 기록하였다. 최초의 학자들은 국가적인 편견 없이 학자적인 양심으로 보았으나 후일 국수주의적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호류지 측은 허공장 보살이란 명칭을 원 하였으나 보살상의 보관(寶冠)에 아미타여래의 화불이 조각되어있어 관음보살로 확인되었다.

2008년 12월 6일 토요일

32. 敍明天皇 ( Emperor Jomei)

“오키나가 타라시히 히로누카 천황 (息長足日廣額天皇)은 敏達天皇의 손자이고,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 (彦人大兄皇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누카테히메황녀 (糠手姬皇女)이다. 推古29년 (621) 황태자 토요토미미 (豊聰耳, 성덕태자)가 죽은 뒤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推古36년 (628) 천황이 죽었다”. 일본서기 敍明紀는 이렇게 시작된다.

위의 시호가운데 足日廣이 脩書에 기록된 왜왕 多利思北孤에 해당한다. 敏達(30대 천황), 用明(31), 崇峻(32), 推古(33)로 이어진 형제자매가 60여년간 황위를 즐기는 바람에 한 세대를 건너뛰어 그들의 장손자 敍明天皇이 629년 (당시 36세) 34대 천황이 된다. 백제의 위덕왕이 이들 형제자매 가운데 적장자이며 崇峻을 제외한 모두가 백제 성왕의 아들 딸이다 (崇峻은 欽明의 아들).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 – 敍明天皇 (多利思北孤 훗날의 의자왕) –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로 이어지는 것이 백제왕실 적장자의 명단인데 아좌태자가 598년 부왕 위덕왕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 때문에 백제왕위는 598년 위덕왕 사후 다시 혜왕 –법왕으로 위덕왕의 늙은 형제들이 채웠다. 리스트의 마지막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 615 – 645)는 이런 혈통을 가졌기 때문에 방계황자들의 타겟이 되어 645년 을사의 변 (Isshi Incident)으로 희생된 비운의 황태자였다.

이들의 혈통이 황위에 오르는데 필요한 조건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루히토노 오호에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나카노 오호에황자도 나중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의 딸, 야마토히메를 황후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위에 오르려면 그만큼 혈통이 중요했던 것이다. 야마토히메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황후가 되어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명목상의 부부였을 것이다.

치세 2년 (630) 정월 타카라 황녀 (寶皇女)를 황후로 세워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 가츠라기황자 (葛城皇子)
두째 하시히토 황녀 (間人皇女)
셋째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

다음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딸 호테이노 이라츠메 (法提郞女)부인에게서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를 낳았다.

다음 敏達天皇의 딸 타메황녀 (田眼皇女)를 비로 세웠으나 자식의 기록이 없다.

641년 10월 敍明天皇 쿠다라노 미야 (百濟宮)에서 서거. 그때 동궁 히라카스와케 황자(開別皇子)가 16세였다.

위에 인용된 몇줄의 기록은 이 시대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하다.

630년 타카라 황녀를 황후로 세워 2남1녀의 역사상의 인물들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발언은 皇極과 齊明이 처음부터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타카라황녀는 敏達의 딸 타메황녀의 다른 이름이며 齊明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630년 황후가 된 것은 皇極이지 齊明이 아니며 皇極은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齊明의 무덤은 奈良市 高市郡 高取町 오찌노 오카노에노 미사사기 (越智崗上陵)이며 황극은 奈良縣 橿原市 고타니고분 (小谷古墳)으로 알려져 있다.

皇極/齊明의 68세 사망설은 皇極의 생년 594년 기준이며 齊明은 601년생으로 61세 사망이 타당하다. 帝王編年記는 齊明의 출생을 601년으로 기록하고있다. 두 사람 다 661년 사망했는데 皇極 594년생, 齊明 601년생이다.

가츠라기황자, 히라카스와케황자, 나카노 오호에황자, 天智天皇은 동일인의 명칭이다. 641년 히라카스와케황자가 16세였다는 기록은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나이를 속이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삽입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를 敍明천황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속이려면 626년생이라는 꼬리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敍明천황의 친아들이라면 이러한 사족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그 시점 동궁(東宮)이었다는 기록도 믿기 어렵다. 지금 공식적인 역사서 모두가 그의 나이를 이 일본서기기록을 근거로 626년생으로 못 박고 있으나 (641-15 = 626)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齊明이 시집올 때 데려 온 아야황자 (漢皇子) 및 교기(翹岐)로 보는 이 글에서는 그의 생년을 619년으로 한다. 天智天皇의 619년 출생설은 一代要記에 적혀있다. 齊明은 619년 天智를 낳고 620년 시집와서 나카즈의 나카즈노미야 (中津宮)에 살면서 622년 오호아마황자를 낳았다. 天武天皇은 65세를 살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622년생이 합당하다. 一代要記, 興福寺略年代記, 神皇正統錄, 本朝皇胤紹運錄이 천무의 622년 출생을 기록하고 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615년생으로 본다. 615년으로 보는 이유는 641년 敍明이 떠날 때 후루히토가 즉위하지 않고 皇極이 즉위한 이유를 그 때 후루히토가 30세가 되지 않아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641년 후루히토가 27세이므로 皇極이 3년 정도 황위에 있다가 후루히토가 30세를 넘으면 황위를 넘겨 줄 계산이었다. 그 시절 백제왕은 대강 40세, 야마토 천황은 30세 정도의 연령 가이드 라인이 있었다고 보인다. 백제 무령왕, 의자왕 모두 40세이후에 즉위하였다. 645년 후루히토가 31세가 되므로 천황으로 즉위할 연령이 되었으나 그 때에 맞춰 을사의 변이 일어난 것이다.

후루히토황자는 敍明天皇의 아들가운데 최연장자이며 어머니가 소가노 우마코의 딸이다. 소가집안은 당시 최고의 실세이며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자였다. 후루히토가 차기 천황이 되리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기 618년 백제 무왕의 딸 齊明이 시집왔을 때 호테이노 이라츠메 히메와 타메황녀는 시집와서 이미 여러 해를 지냈을 것이다. 호테이노 이라츠메와 타메황녀는 박힌 돌, 齊明은 그 당시 굴러 온 돌이 아니었을까. 헌데 서기 619년 齊明이 갑자기 출산하는 일이 발생한다. 갑자기라는 의미는 敍明천황에게 시집온지 열 달이 채 되기 전이라는 뜻이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일본서기에 아야(漢)황자라고 기록되었다. 일본서기는 아이의 아버지를 타카무쿠(高向)왕이라 하였으나 아이덴티티가 파악되지 않는 인물이다.

이렇게 의문속에 태어난 아야황자는 자기보다 4살 많은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 보면서 자랐으리라. 일본서기는 아야황자와의 연관성을 밝히지 않은 채 교기(翹岐)라는 이름을 등장시킨다. 교기(翹岐)라는 이름은 많은 것을 함축하는 의미로 선택된 용어이다. 서기 629년 敍明천황이 야마토의 천황으로 옮길 때 타메황녀(타카라황녀 즉 皇極)와 16세의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함께 아스카노 오카모토노미야 (飛鳥岡本宮)로 따라갔고 齊明과 그 아들들은 九州 오오이다현의 나카즈노미야에 남았다. 큐우슈우에 남아 구주백제왕으로 봉해진 齊明이 야마토의 황후가 되었다는 것은 후대의 창작이다. 敍明이 붕어했다는 641년 27세의 동궁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이미 어엿한 어른이었다. 16세의 동궁 히라카스와케 운운 할 처지가 아니었다. 실제 오오이다현의 나카즈에서 성장한 교기는 641년 23세의 청년이었다.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626년생으로 만들기 위하여 16세의 동궁 히라카스와케 운운하는 해괴한 기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622년생인 天武가 동생이 아닌 형이 되고 만다.

645년 6월 12일 皇極天皇은 아스카노 이타부키노미야 (飛鳥板蓋宮)의 다이고쿠덴 (大極殿)에 좌정하고 있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가 곁에 시립하고 있었다. 쿠데타의 주모자들은 三韓의 사자들의 조공을 받는 자리에 출석할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의 무장해제를 확인했다. 소가노 이루카가 참석하고 쿠라야마타노 마로가 조서를 낭독하는 사이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명에 의하여 궁중의 통행문이 차단되었다. 소가노 이루카가 공격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쓰러지면서 천황을 향해 말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였읍니까?”. 이 광경을 보면서 천황이 나카노 오호에를 향해 “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소리쳤다. “쿠라쯔쿠리 (鞍作, 이루카의 실명)가 황실을 빼앗으려 하였읍니다” 나카노 오호에의 대답이다. 쿠라쯔쿠리가 쓰러지자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가 정신없이 밖에 나와 외쳤다. “카라히토(韓人)들이 쿠라쯔쿠리를 헤쳤다. 억장이 무너진다.” 하고는 내전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당시 구주백제는 백제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야마토 사람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말의 억양만 들어도 구주사람인지 야마토 사람인지 구별할 수 있었으리라. 카라(韓)란 원래 한반도의 마한 진한 변한의 한이므로 반도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 사람을 카라히토 라고 했을 것이다. 카라히토들이 쿠라쯔쿠리를 죽였다는 증언은 구주백제에서 온 교기, 카루황자, 나카토미노 카마코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로부터 3개월 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도 모반죄로 처형된다.

2남1녀중의 하시히토황녀 (間人皇女)는 나중 孝德天皇(위의 카루황자)의 황비가 되는데 나카노 오호에황자와 연인사이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근친상간의 시대라 하더라도 동부동모형제간의 치정관계는 좀 심하다. 敍明天皇이 나카노 오호에의 친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부동모간의 치정관계).

1997년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 기비이케 (吉備池)제방에서 7세기중반의 거대한 사원 금당터로 보이는 기단이 출토되었다. 금당터는 동서 약 37미터. 남북 약 27미터의 면적이며 서쪽으로 86미터 떨어진 곳에 일변 약 30미터의 탑기단과 회랑, 중문, 승방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기단의 규모로 보아 아쓰카 시대 최고층의 높이 90미터 정도의 탑으로 추정한다. 기비이케 하이지 (吉備池廢寺)로 불리는 이 유적이 敍明天皇 11년 (639년) 조영이 시작된 쿠다라 오호데라 (百濟大寺)가 아닐까하고 단연 주목을 받고있다.

百濟大寺는 최초의 칙원사 (勅願寺) – 國營寺院으로 敍明紀 11년 7월 쿠다라 강(百濟川) 양쪽에 오호미야 (大宮) 및 오호데라 (大寺) 를 건설한다. 구다라 강의 서쪽 주민은 百濟大宮을 짓고 동쪽주민은 百濟大寺를 지었다. 639년 12월 百濟川邊에 구중탑을 세웠다. 640년 10월 百濟宮으로 옮겼다. 641년 10월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일본서기에서 이렇게 붕어한 그는 현해탄을 건너 백제 사비성의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吉備池 廢寺의 발견은 百濟大寺의 소재지를 놓고 논쟁중인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조영시기는 백제대사의 시기와 일치한다. 동시대의 다른 사원을 압도하는 기단의 규모는 국가가 총력을 경주하여 착수한 칙원사에 어울린다. 吉備池 廢寺가 있는 곳은 이와레(磐余)라 불리는 지역이며 5 – 6 세기 야마토 왕권이 궁을 집중적으로 지었던 지역이다. 推古天皇의 豊浦宮 (토요우라노 미야) 부터 飛鳥 (아스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궁을 옮겨가는데, 서명천황이 백제대사와 백제궁을 다시 磐余 (이와레)에 조영하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31. 乙巳의 變 (Isshi Incident, 645)

백제 무왕 42년 (641) 봄 3 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 하였다. 무왕의 원자 의자왕은 무왕 재위 33년(632) 태자로 정해졌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야마토의 34대 敍明천황 (Emperor Jomei)은 서기 641년 10월 붕어하여 대궐북쪽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를 백제대빈이라 하였다. 敍明天皇에 이어서 서기 642년 2월 그의 황후가 35대 皇極天皇 (Empress Kogyoku)으로 즉위한다. 을사의 변이란 서기 645년 6월 14일 궁중의 皇極天皇의 면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을 탈취한 사건을 이른다.

우리가 보고있는 황실의 역사기록 (일본서기)은 이긴 자의 후손들이 손 본 내용이다.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천황가는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천황가에 배반하는 나쁜 놈,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를 처단한 것으로 기록하고 이왕 나선 김에 개혁 (大化의 改新)을 내세워 무늬만 개혁을 하는척 한다. 개혁이란 예나 지금이나 혁명뒤에 따라다니는 법이다.

이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일본서기 皇極天皇 조에 나와있는데 그 기술이 하도 불친절하여 일류 탐정소설을 읽는 것 같다. 현재까지 어떤 역사학자도 이 무렵의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백인 백색, 오직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맛이나 보고 넘어가자.

서기641년 11월 백제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다. 서기 642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및 같은 어머니가 낳은 누이 - 여자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거기에 유명인 40여명이 섬에 유배되었다. 백제국왕은 “새성 (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저지르니 사자들 편에 귀국하겠다고 하거든 천황이 허락하지 말라”고 전했다. 2월 천황은 교기를 불러 아즈미의 야마시로노 무라지의 집에 살도록 해 주었다. 4월 교기가 종자를 데리고 천황을 배알했다. 소가노 에미시가 우네비의 집으로 교기등을 초대하여 담소한 뒤 많은 선물까지 주었다. 그러나 이 때 새성 (塞城 또는 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5월 교기등을 불러 말타고 하는 활쏘기를 구경시켰다.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5월 24일 교기가 처자를 데리고 쿠다라의 오호이 (지명, 百濟大井)의 집으로 옮겼다. 7월 22일 대좌평 지적등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교기앞에서 씨름을 시켰다. 지적등은 연회가 끝나고 교기의 집까지 가서 문전에서 배웅했다.

죽었다던 지적이 조정의 연회장에 살아 나타나는데 대한 설명이 없다. 백제왕자 교기(翹岐)를 翹企로 쓰면 “긴 줄 후미에서 발 돋움을 하면서 제 차례를 기다린다”는 뜻이 되므로 교기라는 명칭은 많은 함축을 가진 말일 것이다. 그러나 훗날 역사의 전개에 이 이름은 다시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이름들만 나오므로 교기가 훗날의 누구에 해당하는지 알수 없다.

서기 644년 봄 1월,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는 신관(神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임하지 않았다. 그때 카루황자 (輕皇子)도 다리가 아파서 조정에 출사할 수 없었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는 가루황자와 친한 사이였으므로 병 문안을 갔다. 카루황자는 자기의 사랑하는 황비 아헤노 우지를 보내 카마코가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봐 주었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는 공명정대하고 충성심이 강 한 사람이었다 (쿠데타 주체세력이 혁명에 성공한 뒤 기록한 내용임). 그는 황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전횡을 일 삼는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를 제거하고 황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지도력을 가진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차차 나카노 오호에 황자 (中大兄皇子)에게 기울었다. 나카노 오호에황자가 어느 날 法興寺에서 축구를 하다가 신발이 벗겨져 날아갔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카마코가 신발을 줏어와 무릎을 꿇고 나카노 오호에황자 에게 신겨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미나부치 쇼안 (南淵請安)의 학당(學堂)에 함께 다니면서 공자와 주공의 가르침을 강의 받았는데 오고 가는 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소가씨를 섬멸할 방도를 모의하였다. 카마코는 소가씨 일족이면서 소가노 에미시 (蘇我蝦夷, 이루카의 부친), 소가노 이루카에게 비판적인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 (蘇我倉山田石川麻呂)를 한편으로 끌어들여 이시카와마로의 딸과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혼인시켜 결속을 다진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자들이 공물을 바치는 날을 소가노 이루카 암살의 날로 정했다.

혁명 주체세력은 나카노 오호에황자 (中大兄皇子), 카루황자(輕皇子), 나카토미노 카마코 (일명 나카토미 카마타리, 훗날 후지와라 카마타리),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의 4명이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이 일본서기의 이 시점에서 처음 등장하므로 과거에 이들의 아이덴티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쿠데타의 결과로 당시의 권력자 소가노 이루카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皇極天皇은 퇴위되어 현 시코쿠 (四國) 高知市 아사쿠라 (朝倉)신궁에 유폐된다. 그러나 쿠데타의 실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皇極天皇곁에 시립하고 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 615 – 645)였다. 이 사람은 백제 의자왕의 장자로 皇極天皇 다음 천황이 될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사건후 승려가 되어 목숨을 보전코자 간청하였으나 3개월 뒤 모반죄로 처형된다. 모반자가 누구인지 정말 헷 갈리는 것이 역사이다. 황위 정통 승계권자를 젖히고 방계의 황자가 천황의 자리를 도둑질한 것이 을사의 변의 진상이다.

쿠데타 이후 카루황자가 36대 孝德天皇 (Emperor Kotoku)으로 즉위하고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황태자로 봉한다. 카루황자는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외삼촌이다. 카루황자와,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 齊明은 일본서기에 찌누왕 (茅渟王) 소생으로 되어 있으나 찌누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백제 무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가 훗날의 37대 齊明天皇 (Empress Saimei, 601 – 661)인데 孝德天皇(? – 654)이 죽은 뒤 655년 천황으로 즉위하여 661년 죽었다.

 따라서 나카노 오호에황자는 17년간 황태자 신분이면서 실제로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왜 그는 17년간 권력의 실세였으면서도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의 출생의 약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의 역사의 전개는 그가 즉위하지 않은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나카토미노 카마코가 간언하여 즉위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가 일찍 즉위하였다면 백제멸망 이후 당나라에 의해 전쟁범죄자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齊明天皇을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이메이와 코오교쿠를 동일인으로 일본서기를 기록함으로써 시호이외의 이름, 타카라황녀, 타무라황녀, 타메황녀등을 누구로 봐야 하는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름들이 皇極천황의 이름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皇極天皇(Empress Kogyoku, 594 – 661, 비타쯔 천황과 스이코 천황의 딸)과 齊明天皇 (Empress Saimei, 601 – 661, 백제 무왕의 딸 또는 찌누왕의 딸)이 동일인이라고 일본서기는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렇게 되면 황실의 위협이었던 소가노 이루카를 처치하여 황실의 권위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것이 을사의 변이다. 을사의 변으로 천황이 폐위되어 유폐된 일은 없었다고 일본서기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하여 일본황실은 을사의 변을 일으킨 쿠데타 주체세력의 후손들이 맡게 되었고 조상들이 저지른 권력탈취의 수치스련 기록을 황실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서기1948년 부여읍에서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가 발견되었다. 여기 나오는 대좌평 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서기654년 세운 석비로 “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게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옥을 파 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그 높고 자애스런 모습은 신령으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라는 내용이 해독 가능하다. 지적이 나카토미 카마코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교기가 나카토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천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나카토미 카마코 (中臣鎌子)의 이름이 출세함에 따라 나카토미 카마타리 (中臣鎌足)로 또 후지와라 카마타리 (藤原鎌足)로 바뀐다. 후지와라씨(藤原氏)는 일본역사상 최고의 명문명가이면서도 어디서 왔는지 의문에 쌓여있고 후지와라씨의 원조로 알려진 카마타리(鎌足)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게 없다. 그가 백제에서 온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위에서 이미 언급된 누군가일 수 도 있다. 들어갈 수록 미로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일본역사의 재미이다.

야마토의 33대 스이코 천황 (推古天皇, 593 – 628재위)시절 서기 600 – 629년 구주백제왕으로 야마토를 지배하였던 多利思北孤는 백제 아좌태자의 장자였다. 아좌태자는 일본에서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彦人大兄皇子)로 불렸고 敏達天皇의 황자로 기록했다. 스이코 천황은 넷째 딸 타메황녀 (眼田皇女)를 多利思北孤의 황후로 주었다. 수나라 기록에 나온 왕비 계미(鷄彌)이며 훗날의 皇極天皇이다. 그런데 618년 백제의 무왕은 齊明공주를 多利思北孤에게 시집보냈다. 多利思北孤는 무왕의 조카이다. 이 여인이 훗날의 齊明天皇 (601 – 661)이다.

사이메이는 조숙한 편이었던지 시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서기 619년 아야(漢)황자를 출산하였다. 多利思北孤의 자식으로 보기에는 너무 빠른 출산이었다. 일본서기는 타카무쿠왕( 高向王)과의 사이에 아야황자 (漢皇子)을 두었다고 하였으나 타카무쿠왕( 高向王)이 누구인지 파악되지 않는다. 아야황자 (漢皇子)는 多利思北孤 즉 敍命천황의 소생으로 입적되나 왕위계승 서열에서 밀려난다. 이 글에서는 아야황자를 위에 나온 백제왕자 교기로 본다. 혈통상 황위를 넘볼 수 없는 왕자이므로 翹企 (긴 줄 후미에서 발돋움하며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림)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쿠데타에 의지하여 권력을 탈취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多利思北孤의 구주백제 수도는 오오이다 현(大分縣) 나카즈시 (中津市)였으며 수 나라의 사신 배세청이 서기608년 방문했던 왜의 수도란 이 곳을 말한다. 齊明는 서기 618년경 구주백제 수도였던 나카즈시로 시집와서 629년 多利思北孤가 야마토의 敍明天皇으로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이 기간에 齊明은 하시히토황녀 (間人皇女),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 百濟王 善光을 낳았다.

서기 629년 敍明天皇은 왕비 계미(鷄彌) 즉 타메(田眼)황녀 또는 타카라황녀(寶皇女)와 함께 야마토로 떠나고 구주백제는 서기642년까지 齊明이 맡았다. 641년 敍明天皇이 백제 의자왕으로 떠나자 타카라 황후가 皇極天皇으로 즉위한다. 敍明천황의 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와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가 천황의 최측근이었다.

서기642년 구주백제에서 齊明의 모후가 사망한다. 일본서기 皇極조에서 1월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나온 것이 이것이다. 헌데 그때 齊明의 남동생 카루황자 (輕皇子, 훗날의 孝德天皇)가 정변을 일으켜 구주백제왕이 되고 齊明, 교기를 비롯한 가족 측근 모두를 추방한다. 거기서 쫒겨난 사람들이 야마토로 몰려들어 3년후 을사의 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그때 구주백제왕이었던 카루황자도 정변에 참여하므로서 자동적으로 구주백제가 야마토에 흡수된다.

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30. 敏達天皇(Emperor Bidatsu)의 家系

비다쯔(敏達)천황 (30대)은 킨메이(欽明)천황의 두째 아들로 어머니는 센카(宣化)천황의 딸 이시히메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572년 4월 3일 천황에 즉위하여 그 달 쿠다라노 오오이 (百濟 大井)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비다쯔(敏達)천황은 백제 성왕의 왕자임을 이미 전회에서 거론했다. 쿠다라노 오오이노미야 (百濟大井宮) 터는 현재의 나라현 코오료우쬬(廣陵町) 쿠다라(百濟)로 비정한다. 이곳에 쿠다라데라(百濟寺) 삼중탑이 남아있고 그 지역이 쿠다라(百濟)로 불리고 있으나 궁궐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서기575년 1월 오키나가 마테왕의 딸 히로히메(廣姬)를 황후로 세웠다. 황후는 1남 2녀를 낳았다. 첫째가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 (押坂彦人大兄)황자, 두째가 사카노보리 황녀, 세째가 우지노 시즈카이 황녀라 한다. 그 해 11월 황후 히로히메가 죽었다. 서기576년 3월 누카타베(額田部)황녀를 황후로 맞아 2남 5녀를 보았다. 이 시대 불교수용여부를 두고 논란이 심했으나 비다쯔(敏達)는 불교를 공인하지 않고 두창으로 585년 사망했다.

서기 576년 두번째 황후가 된 누카타베 황녀가 서기 592년 12월 33대 스이코(推古) 여왕이 되는데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조에 그녀는 18세 때 황후가 되었고 34세에 남편을 여이었으며 39세에 천황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스이코천황은 서기 554년 출생한 것으로 되며 누카타베 황녀가 18세 때 시집왔다면 서기 571년 결혼한 것으로 된다. 이는비다쯔(敏達)가 즉위 전에 누카타베 황녀와 혼인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첫째 황후가 575년 죽어서 576년 두번째 황후로 누카타베(額田部)황녀를 들였다는 것은 거짓이 된다.

왜 일본서기에 이런 모순된 기록이 생겼을까?

본업이 역사학자가 아닌 아마츄어 역사학도에게 드는 느낌은 29장에서 나온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 기사가 누군가 다른 백제 주요인물의 기록을 여기 갖다 붙였기 때문에 생긴 모순이라고 생각된다. 킨메이(欽明)조의 이시히메(石姬)와 같은 방법으로 백제 위덕왕의 황후 히로히메(廣姬)를 비다쯔(敏達)의 황후로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다음에 등장할 34대 죠메이(敍明) 천황 때문이다. 죠메이천황은 이후의 일본황실을 열어 갈 38대 텐찌(天智)천황과 40대 텐무(天武)천황의 부친이다.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백제 위덕왕의 왕자 아좌태자 (일본의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의 아들이다.

그러니 죠메이 천황 (훗날의 의자왕)과 그의 아버지 아좌태자 (일본명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족보가 필요하다. 아좌태자의 족보를 만들기 위하여 그의 어머니 히로히메를 어딘가 꼭 끼워 넣어야 되는데 가장 적당한 곳이 위덕왕의 친동생 비다쯔 (敏達)이다. 따라서 히로히메를 비다쯔의 족보에 올리고 히로히메를 첫 황후로 만들어 아좌태자 (일본명 押坂彦人 大兄皇子)가 비다쯔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뒤 첫 황후가 죽어서 다음 황후를 뽑았다는 등의 거짓말을 하게되는 것이다. 위덕왕은 서기 530년생, 비다쯔 천황은 538년으로 본다.

누카타베 황녀는 명실상부한 비다쯔(敏達)의 정비(正妃)로 비다쯔(敏達)의 즉위전에 결혼하여 즉위후에 황후가 된 것이다. 백제와 일본의 황실을 혈연적으로 분리하기 위하여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고민하여 내 놓은 결과물이 일본서기의 혈연기록이다.

1. 皇后(前):広姫(ひろひめ、息長真手王の女) 敏達4年(575年)薨去

押坂彦人大兄皇子(おしさかのひこひとのおおえのみこ、麻呂子皇子)
逆登皇女(さかのぼりのひめみこ、坂騰王)
菟道皇女(うじのひめみこ、宇遅王) 伊勢斎宮

2. 皇后(後):額田部皇女(ぬかたべのひめみこ、後の33대 推古天皇)2남 5녀(일본서기)

菟道貝鮹皇女(うじのかいたこのひめみこ、菟道磯津貝皇女・静貝王) 聖徳太子の妃
竹田皇子(たけだのみこ)
小墾田皇女(おはりたのひめみこ)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
鸕鶿守皇女(うもりのひめみこ、軽守皇女・宇毛理王)
葛城王(かずらきのみこ、古事記のみ)
尾張皇子(おわりのみこ)
田眼皇女(ためのひめみこ、多米王) 舒明天皇の妃
桜井弓張皇女(さくらいのゆみはりのひめみこ、桜井玄王・由波利王) 押坂彦人大兄皇子の 妃・来目皇子の妃
 
3. 夫人:老女子(おみなご、春日臣仲君の女)

難波皇子(なにわのみこ) 橘朝臣・路真人・甘南備真人・大宅真人などの祖
春日皇子(かすがのみこ) 春日真人などの祖
桑田皇女(くわたのひめみこ)
大派皇子(おおまたのみこ、大俣王)

4. 采女:菟名子(うなこ、伊勢大鹿首小熊の女)

太姫皇女(ふとひめのみこ、桜井皇女・布斗比売命)
糠手姫皇女(ぬかでひめのみこ、田村皇女・宝王・島皇祖母命) 押坂彦人大兄皇子の妃・舒明天皇の母

누카타베 황녀가 낳은 5녀 가운데 오하리다 황녀와 사쿠라이노 유미하리 황녀의 두 딸이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에게 시집갔다. 놀라운 것은 타메(田眼 또는 多米)황녀로 기록된 넷째 딸이 죠메이(敍明)천황 (위의 히코히토 황자의 아들)에게 시집간 사실이다. 결국 5녀 가운데 딸 둘을 히코히토 황자(아좌태자)에게 보내고 한명의 딸을 그의 아들 죠메이(敍明) 천황에게 시집보냈으니 아좌태자 부자가 백제와 왜의 왕위 계승권의 중심인물임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 – 의자왕(죠메이천황) –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황자로 이어지는 백제의 적장자들의 명단이다. 소위 백제왕실의 장손들의 리스트인 것이다. 부부가 모두 천황을 지낸 비다쯔(敏達) – 스이코(推古)천황의 커플조차 자기 아들을 황위에 세우지 못 하였다. 왕위 계승권은 적장자가 0 순위였던 것이다. 왜의 죠메이(敍明)천황이 서기641년 백제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물론 일본측 기록은 641년 죠메이(敍明)천황이 죽었다고 되어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상기 가계에서 네번째에 있는 우네메(采女) 우나코의 기사이다. 우네메(采女)란 천황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궁에 들어 온 여자이다. 따라서 천황의 비로 들어 온 여자보다 신분이 낮은데 천황의 눈에 들어 자식을 갖게 되면 비가 된다. 우네메(采女) 우나코가 낳은 누카데 히메 (일명 타무라 황녀 또는 타카라 왕) 황녀와 히코히토 황자 사이에서 죠메이(敍明)천황 (593 – 660)이 태어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 때부터 타무라(田村), 타카라(寶), 타메(田眼), 타미(多米), 계미(鷄彌)등의 비슷한 이름이 남녀불문하고 죠메이(敍明)천황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붙여진다. 우리 말의 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죠메이(敍明)천황, 코우교쿠(皇極)천황, 사이메이(齊明)천황 그리고 죠메이(敍明)천황의 어머니 이름이 모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죠메이(敍明)천황에게 스이코(推古)천황의 딸 타메(田眼 또는 多米)황녀가 시집가는데 죠메이(敍明)천황은 593년생, 타메황녀 594년생이다. 서기594년이라면 스이코(推古)천황 40세때이므로 자식을 낳을 수도 있는 나이지만 비다쯔(敏達)천황이 서기585년 사망했다 하므로 부친이 누구일지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비다쯔(敏達)천황은 왕위를 물러나 더 살아 있었을 수도 있다. 타메황녀는 죠메이(敍明)천황의 황후였고 천황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을 낳지 못 하였다. 이 여인이 죠메이(敍明)천황 다음의 35대 코우교쿠 천황 (皇極 天皇, Empress Kogyoku, 594 – 661)이 되나 서기 645년 을사의 변으로 쿠테타의 제물이 되어 추방된다.

이때 죠메이(敍明)천황의 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의 나이가 천황이 될 나이에 미치지 못하여 그가 30세가 될 때까지 코우교쿠(皇極)천황이 한시적으로 천황자리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는 대략 615년생이며 30세가 되는 서기 645년 그가 천황이 될 해에 맞춰 쿠테타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 코우교쿠천황을 폐위시킨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테타 그룹은 자기들의 반역의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훗날의 사이메이천황 (齊明, Empress Saimei, 601 – 661)과 코우교쿠 천황이 동인인물이라고 역사를 조작하여 자기들이 천황을 폐위시킨 사실을 은폐한다.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29. 백제와 일본황실의 혈연관계

지금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부여의 부여씨(扶餘氏)가 백제왕실뿐 아니라 일본황실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제와 일본은 동일한 세력집단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서로 외국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백제 무령왕이 구주백제를 설립한 후로 구주백제왕을 거친 왕자가 백제왕 또는 야마토천황으로 부임한다. 백제왕과 혈연적으로 약간 소원하거나 야망이 있던 야마토의 천황들은 가끔 백제나 구주백제로 부터 독립하고자 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서기 645년 야마토의 궁중에서 황실내부 사람들에 의해 쿠테타가 발생하고 이 쿠테타에 의해 백제 의자왕이 낙점한 후계세력이 제거된다. 일본역사에서 乙巳의 變으로 불리는 이 정변은 황실내부 방계세력이 중심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며 역사의 정당성을 얻고자 꾸며 낸 것이 타이카노 카이신(大化 改新, Taika no Kaishin)이라는 캐치프레이스였다. 쿠테타의 주모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황자 ( 38대 天智천황)는 서기645년부터 661년까지 천황자리에 외삼촌과 어머니를 앉히고 본인은 황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치밀하고 냉혈한 사람이었다.

이 정변으로 백제 의자왕의 아내 코우교쿠(皇極)천황 (Empress Kogyoku, 594 – 661)이 유배되고 의자왕의 적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615 – 645)황자도 반란죄로 처형된다. 의자왕의 황실을 떠 받히고 있던 당시 정계의 실력자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가 궁궐안의 천황면전에서 도륙된다.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 바쁜 백제 의자왕은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란사건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훗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 황자의 후손들이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이 정변과 관련하여 조상들의 무자비한 행적을 감추고자 이 무렵의 역사가 제 멋데로 재단되어 미화된다. 일본서기가 완성된 서기 720년 텐찌(天智)천황의 자식들이 천황자리에 있었다.

백제왕실과 일본황실은 동일한 집안세력이라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하여 약간은 소설같은 이야기를 엮어가야 된다. 소설같은 이야기라 하였으나 일본서기 기록 자체가 모호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혈연과 나이등에 정설이 없는 것이 정설이므로 사실 일본서기 자체가 소설인 것이다.

일본서기 킨메이(欽明)천황 (Emperor Kimmei) 치세 13년 여름 4월 (서기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 (箭田珠勝大兄) 황자가 죽었다는 기사가 다짜고짜 등장한다. 킨메이(欽明)천황이 즉위하고 황후를 세울 때 540년 1월 15일 센카(宣化)천황의 황녀 이시히메(石姬)를 세워 황후로 세웠다. 이시히메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자를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라 한다. 다음을 오사다노 누나쿠라노 후토타마시키 (譯語田渟中倉太珠敷 = 후의 비다쯔천황) 이다. 가장 밑을 카사누이 (笠縫)황녀라 한다. 이렇게 킨메이(欽明)천황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그가 일본서기에 딱 두번 나오고는 서기 552년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 대신 백제왕자 여창이 일본서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시적인 언급을 피하고 일본서기 저자들은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역사를 기록하였다. 킨메이(欽明)치세 14년 (서기553) 백제의 왕자 여창은 전군을 몰아 고구려에 들어가 백합벌에 성채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서기 554년 왕자 여창은 나이많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이 해 그의 아버지 성왕이 전사한다. 555년 백제왕자 여창은 동생 혜(惠, 후일의 백제 혜왕)를 킨메이(欽明)왕에게 보내 성왕사망을 보고한다. 그 해 8월 왕자 여창은 출가하여 수도하면서 부왕에 대한 불효를 참회하겠다고 신하들에게 선포한다. 557년 백제 왕자 여창이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552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죽었다는 기사가 왜 실렸을까? 서기 552년 이후 이 사람은 일본을 떠나 백제에서 생애를 보낸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왕자 여창은 위덕왕으로 598년까지 무려 44년간 왕위에 있었다. 일본의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백제에 오면 왕자 여창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성왕이라면 킨메이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백제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떼어내서 독자적인 일본황실 계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왕자 여창이 성왕의 아들인 이상 킨메이천황의 황후로 기록된 이시히메(石姬)도 성왕의 황후로 보아야 된다. 성왕이 무령왕의 적장자이므로 성왕 다음의 백제와 일본의 왕위계승권은 성왕의 아들들이 0 순위였다.

그럼 킨메이천황 다음에 즉위한 30대 비다쯔(敏達, Emperor Bidatsu)천황을 보자. 그는 위의 이시히메 소생의 두째 황자이다. 바로 위덕왕의 동모형제이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 무령왕의 두째 아들이었던 흠명의 소생이 아니라 사실은 성왕 ( 일본서기는 성명왕으로 호칭하여 흠명과 같은 명(明)을 붙였다) 의 아들이었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에게 백제의 무령왕, 성왕, 그리고 의자왕은 골치아픈 존재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아들들이 일본황실 역사에 나오게 되는데 그들의 족보를 비슷한 시기의 일본역사에만 나오는 천황에게 갖다 붙여야 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들을 낳은 어미들까지 다른 천황의 황후로 기록되는 우스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나오는 29대 킨메이(欽明)천황의 가족을 모두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모두 15남 8녀의 자식을 기록했는데 4명이 후일 천황으로 등극한다. 여기서 황후로 기록된 이시히메가 성왕의 황후인데 시동생 킨메이의 황후로 역사에 기록된 이유는 이미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2명의 천황을 배출한 키타시히메는 누구의 아내였을까? 우선 13명의 자녀가 기록된 것부터 좀 구린내가 난다. 그러나 2명의 천황은 역시 성왕의 자식이라 봐야 되지 않을까.

오아네노 키미가 출산한 4남 1녀가운데 하츠세베 황자가 32대 스슌(崇峻)천황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킨메이(欽明)의 자식인 것이 확실하다. 자식의 숫자로 보더라도 한 사람의 자식으로 15남8녀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皇后:石姫皇女(いしひめのひめみこ。宣化天皇の皇女)2남 1녀

箭田珠勝大兄皇子(やたのたまかつのおおえのみこ、八田王) : 백제왕자 여창 (530 – 598)
渟中倉太珠敷尊(ぬなくらのふとたましきのみこと、30대 敏達天皇)
笠縫皇女(かさぬいのひめみこ、狭田毛皇女)

妃:稚綾姫皇女(わかやひめのひめみこ、『古事記』に小石比賣命。宣化天皇の皇女。) 1 남

石上皇子(いそのかみのみこ、上王)

妃:日影皇女(ひかげのひめみこ、『古事記』になし。宣化天皇の皇女?)1 남

倉皇子(くらのみこ。『古事記』に宗賀之倉王として、母は糠子郎女)

妃:堅塩媛(きたしひめ。蘇我稲目宿禰の女) 7남 6녀

大兄皇子(おおえのみこ、31대 用明天皇)
磐隈皇女(いわくまのひめみこ、夢皇女) 伊勢斎宮
臘嘴鳥皇子(あとりのみこ、足取王)
額田部皇女(ぬかたべのひめみこ、33대 推古天皇)
椀子皇子(まろこのみこ、麻呂古王)
大宅皇女(おおやけのひめみこ)
石上部皇子(いそのかみべのみこ、伊美賀古王)
山背皇子(やましろのみこ、山代王)
大伴皇女(おおとものひめみこ)
桜井皇子(さくらいのみこ、桜井之玄王)
肩野皇女(かたののひめみこ、麻奴王)
橘本稚皇子(たちばなのもとのわかみこ)
舎人皇女(とねりのひめみこ、泥杼王) 当麻皇子の妃

妃:小姉君(おあねのきみ。蘇我稲目宿禰の女)4 남 1녀

茨城皇子(うまらきのみこ、馬木王)
葛城皇子(かずらきのみこ)
穴穂部間人皇女(あなほべのはしひとのひめみこ) 用明天皇の皇后、聖徳太子の母
穴穂部皇子(あなほべのみこ、須賣伊呂杼・天香子皇子・住迹皇子)
泊瀬部皇子(はつせべのみこ、長谷部若雀命・32대 崇峻天皇)

妃:糠子(ぬかこ。春日日抓臣の女)1남 1녀

春日山田皇女(かすがのやまだのひめみこ)
橘麻呂皇子(たちばなのまろのみこ、麻呂古王)

2008년 11월 9일 일요일

28. 왜왕 多利思北孤의 遣隋使

중국사서에 나타나는데 정작 일본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일본역사는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자기역사를 기록할 때 그보다 앞 서 기록된 중국의 기록을 참고로 하기 때문에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다. 앞에서 이미 거론된 3세기의 히미코(卑彌呼)여왕의 중국교류 기사가 묘하게 가공되어 히미코의 이름이 일본역사에서 제외되었다. 서기 266년부터 147년간 일본역사 기록이 중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후 413년부터 502년까지 왜의 5왕 (The Five Kings of Wa) 기사가 나타난다. 이 또한 일본기록에 없는 부분이다. 일본은 지금도 이 기사를 확인되지 않은 역사로 간주한다. 일본의 역사를 기록할 때 자국의 방침에 맞지않는 부분은 고의적으로 제외한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데로 그것이 일본황실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그들의 역사를 보면 된다.

백제 27대 위덕왕( 554 – 598재위)시절 중국에서는 400여년간 계속된 대륙의 이합집산을 끝내고 581년 수(隋) 양제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내의 혼란이 계속된 400여년간 중국주변의 소국들은 작은 규모의 분쟁을 하면서 살았으나 강력한 정권이 대륙을 차지한 이 시대는 분열에서 통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절이었다.

이 시절 隋書 동이 왜국전에 서기 600년과 607년 왜국왕이 隋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왕의 姓은 아매(阿每), 이름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號를 아배계미(阿輩鷄彌)라 한다. 왕비의 이름도 계미(鷄彌). 이 나라 사람들은 거리를 재는 리(里)의 개념을 모르고 왕래하는데 걸리는 날짜로 거리를 말한다. 국경은 동서로 5개월, 남북으로 3개월 걸리며 각각 바다에 이르게 된다. 야마타이(邪摩堆)가 수도이며 魏志에서 말한 야마타이이다. 아소산이 있고 이유없이 하늘에 닿을듯 불길이 솟구쳐 제사를 지낸다. 관리의 등급을 12개로 나누어 관리하는 관위 12계의 제도를 운영하고있다.

607년 多利思北孤는 다시 수 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라고 기록하여 수양제를 격노하게 한다. 일본인들은 그 시절 이만한 기개를 가진 천황이 있었다고, 일본이 수나라와 맞 먹는 강력한 나라였다고 좋아하면서도 이 천황의 아이덴티티를 밝히지 못한다. 일본역사를 기록할 때 부끄러운 역사든 자랑스런 역사든 있는 그데로 기록하고자 했다면 중국사서에 있는 역사가 일본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불행하게도 일본은 자랑스런 역사만을 고집하였다. 앞 장에서 논의된 구주백제와 관련된 역사는 일본황실에서 없었던 일로 결정하여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 때 없어진 역사를 살려 낼 기개와 양심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608년 수양제는 배세청(裵世淸)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배세청은 백제의 진도, 남해도를 거쳐 쓰시마, 잇끼도를 지나 九州의 筑紫, 다시 동쪽으로 진왕국 기타 10여국을 거쳐 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筑紫에서 동쪽은 모두 왜라고 한다. 이때 배세청이 왜의 수도 야마다이를 방문하고 왜왕 多利思北孤를 만나고 돌아갔다. 그가 방문했던 왜의 수도는 현 오오이타 현 나가즈(中津)였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9년(608) 수나라 배세청이 우리나라 남로를 거쳐 왜에 사자로 갔다고 보인다.

헌데 이 부분이 후대에 교묘하게 요리되어 일본서기에 기록된다. 推古치세 15년(607년) 7월 오노 이모꼬(小野妹子)가 견수사(遣隋使)로 파견된다. 608년 4월 이모꼬는 백제경유로 배세청과 함께 귀국했다. 수나라 황제의 친서를 이모꼬는 제출하지 않고 오는 길에 백제에서 빼앗겼다고 변명한다. 구주백제 왜왕 다리시히꼬의 외교기사를 마치 야마토의 推古천황이 한 일처럼 황실의 역사로 미화한다. 수나라 황제의 친서를 수나라 사자 배청과 함께 오는 길에 백제에서 강탈 당 했다고 거짓말까지 역사에 나열한다. 이런 짓까지 해야만 황실의 역사가 고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였을까. 일본서기는 배세청이 야마토의 천황을 만나고 간 것으로 역사를 도둑질한다.

아배계미, 593년 백제 아좌태자의 장자로 태어났다. 백제쪽에는 아좌태자의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5년 (597년)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하였다고 나와있다. 아좌태자는 이 해 야마토에 가서 사촌동생 성덕태자의 초상화를 그려 준 것으로 되어있고 이 그림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초상화로 궁내청에 보관되어있다. 아좌태자는 백제 27대 위덕왕의 장자로 일본에서는 오시사까 히꼬히도노 오호애 (押坂彦人大兄)황자 (생몰년 미상이나 570 – 598로 추측한다) 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593년부터 구주백제왕이었으며 위덕왕 다음의 백제왕이 될 신분이었으나 위덕왕보다 1개월 먼저 죽었다. 이 사람이 요절하므로서 백제왕위는 위덕왕과 동 세대의 늙은 동생들이 즉위하여 혜왕, 법왕 모두 1년만에 죽고 법왕의 아들 무왕(일본호칭 지누(茅渟)왕 – 서동요의 마동, 무강왕)이 젊은 나이로 그 뒤를 이었다. 이 바람에 아배계미는 600년부터 8세의 나이로 구주백제왕이 되었고 수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이 때 야마토의 천황 스이꼬(推古)나 섭정 성덕태자와 관계없는 구주백제의 외교기록이며 야마토는 구주백제의 우산아래 존재하고 외교권이 없었다.

아배계미는 촌수로 따지면 성덕태자의 조카이다. 당시 섭정 성덕태자는 어린 조카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여 구주백제 정벌전쟁을 시작한다. 이 전쟁을 일본역사는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으로 기록하여 역사를 제 멋데로 가공한다. 일본서기가 그렇게 되어있으니 요즘도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성덕태자의 친동생)를 격신라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츠쿠지(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과 히로꼬의 첫 아들)가 다시 정신라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히메왕 (舍人姬王, 흠명과 기타시히메의 제 13자)이 아까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602년과 603년 아마토의 구주백제 정복전쟁에서 야마토가 오히려 구주백제의 반격을 받아 정복된 것을 이런 식으로 기록하였다. 602년 야마토 군은 치쿠지에서 격파되고 총사령관마져 전사하였다. 603년 야마토 군은 구주백제군의 반격으로 오오사까의 바로 코 밑에 해당하는 아까시(현재 고베시) 에서 총사령관의 아내가 전사할 정도로 패배한다. 당시의 야마토의 실력자들, 推古천황, 성덕태자, 그리고 소가노 우마꼬는 구주백제의 多利思北孤 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구주백제의 관위제도를 도입하고 헌법 17조를 반포하여 구주백제의 개혁요구에 따른다. 훗날 구주백제를 역사에서 삭제한 야마토의 천황가는 이 모든 개혁이 성덕태자의 작품으로 포장하여 성덕태자를 일본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 지금도 일본의 지폐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덕태자는 이때 구주백제 정벌에 실패하여 정치에서 손을 떼고 불교에 전념하는 조건으로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다. 역사는 실제보다 성덕태자(574 – 622)의 모습을 과장되게 전 하였다.

2008년 10월 18일 토요일

27. 백제성왕(523 - 554재위)의 전사와 역사의 급반전

백제 성왕(성명왕)치세 일본서기 기록은 성왕이 백제의 동맹국들에게 가야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에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서기 539 – 571년간 재위에 있던 일본 29대 킨메이(欽明) 천황 ( 백제 성명왕의 동생)기록의 80%는 백제 성명왕의 언사로 장식되어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백제본기 성왕 원년 (523)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렀다. 좌장 지충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백제본기 성왕 7년 (529년) 겨울 10월 고구려 왕 흥안(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을 함락하였다.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 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명이었다

백제본기 성왕 16년 (538년) 서울을 사비(泗沘, 다른 이름은 所夫里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백제기록보다 상대편인 신라의 기록이 더 참고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 (서기 528년)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18년 (531) 상대등의 관직을 처음 설치하였다. 19년 (532) 금관국의 왕 김구해 (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奴宗, 武德, 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신라본기 진흥왕 원년 (서기 540년) 진흥왕이 일곱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려 황태후가 섭정하였다. 2년 (541)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고,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9년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과 함께 백제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에서 구원을 청하였다.

11년(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빼았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쳐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을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2년 (551)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침입케 하여 10개 군을 빼았았다.

14년 (553) 가을 7월 백제의 동북부 변두리를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軍主로 삼았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로 삼았다.

15년(554)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이 가야와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新州軍主 김무력이 州의 군사 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4명과 군사 2만 9천 6백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554년 백제본기 성왕 32년 (554) 가을 7월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서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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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을 믿고 550년 백제 성왕은 신라, 가야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 공격에 나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을 수복하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오히려 금현성을 빼았겼는데, 신라장군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군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고 군사 1 천을 머물러 지키게하였다.
이후 백제, 신라, 가야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도 6개의 군을 회복하였다. 신라는 이때 비로소 죽령이북의 땅을 확보하여 한강유역에 접근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를 물밑에서 접촉하여 나제동맹을 무력화시키고 신라와 동맹을 성립시킨다. 고구려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고 신라는 마음을 바꿔 고구려와 손 잡고 백제를 공격한다. 신라의 배반으로 백제는 당혹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라군은 한강이북의 갓 수복한 백제땅을 차지하고 한성까지 장악해버렸다. 성왕은 궁지에 몰려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굴욕을 감수하며 가까스로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린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을 확보하고 그곳을 新州로 삼았다. 그 신주의 軍主로 임명된 자가 바로 김무력이다.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뿐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현 충북 증평)과 금현성(현 충북 진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곳의 軍主 김무력은 532년 신라에 투항한 가락국 마지막 왕 김구해의 3남이며 뒷 날 태어날 김유신의 조부이다. 이런 연고로 김유신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배신에 이를 갈던 성왕은 이후 일본과 가야를 질타하여 연합군을 편성하고 554년 5월 왜의 수군이 도착하자 신라 정벌을 시작하여 신라의 함산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고들어 갔으나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굴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퇴각하여 환산성 (고리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성왕이 이끄는 백제연합군도 충북 영동군의 핏골전투에서 패하여 성치산성으로 지휘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반격에 나선 신라군은 현재의 옥천분지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금산지역의 백제군과 대치하였다. 성치산성에서 환산성까지는 약 20킬로메터, 말을 타면 두 시간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삼성산성 (관산성, 충북 옥천)이 위치하고 이곳은 신라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백제성왕의 움직임을 이들은 포착하고 있었다.

554년 가을 7월 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만 데리고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태자 여창의 군영, 환산성으로 출발했다. 백제는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신라는 백제진영의 이동을 훤히 파악하고 태자 여창의 군대와 성왕의 교통로를 관산성에서 차단하여 양군을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관산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실개천이 있는데 현재 서화천이라 불린다. 역사기록은 이곳을 구천(狗川) 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 말 개천을 한자표기로 개 狗로 바꾼것이다. 성왕은 현지 방언인 구진베루(벼랑)밑에 흐르는 개천가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라복병에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이후 관산성의 신라군은 환산성과 성치산성의 백제군을 각개격파한다. 성왕이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치산성의 백제군이 필사적으로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신라조정은 이때 도살성과 금현성의 김무력에게 관산성으로 이동하여 백제군을 섬멸할 것을 명령한다. 김무력의 기병대는 진천 – 청주 – 신탄진 – 대전 – 백골산성으로 진격하여 백제태자 여창군의 배후로 달려든다. 백골산에서 신라군을 방어하던 백제군은 현재의 대청호를 등지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김무력의 기병이 무방비 상태인 배후를 공격하여 일방적인 공격을 퍼붙는다. 학살과 다름없는 신라기병의 맹공으로 백제의 여창군은 좌평 4명과 사졸 2만 9천6백여명을 잃었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 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츠쿠지국조(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 사이에 여창은 겨우 도망쳤다.


전쟁기록과 설명사진은 고성혁의 역사추적에서 옮긴 것이다. 기록을 확인하기 위하여 실재 현지를 답사하고 사진까지 곁들인 선배 연구가들의 도움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고성혁 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554년 7월 신라와 백제의 대회전은 역사에 관산성 전투라고 기록되지만 실재는 백골산성에서 대회전이 치러졌고 신라는 이때부터 한반도의 주도권을 확보해 가는 반면 백제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이 전쟁에 참전하여 백제를 도왔던 경북 고령의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되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몇 백년간 백제와 동맹관계를 유지해 왔던 가야제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진흥왕은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관경비와 단양에 적성비를 세워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다. 창녕비는 561년, 함남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수 있으나 북한산비는 훼손이 심하여 건립연대의 해독이 불가하다. 북한산 문수봉 아랫쪽의 비봉에 세워져있던 진흥왕 순수비는 조선 순조 16년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백제는 가야를 합병하지 않고 몇 백년간 동맹국으로 대우해 왔는데 6세기의 신라는 상대국을 정복하면 바로 신라의 땅으로 편입하여 직접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확립은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으나, 고구려나 백제보다 150년후에야 불교를 수용하면서 신라는 늦은만큼 확실하게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진흥왕은 재위 37년만인 576년 43세로 죽었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그의 치세하에 마련된 것이다. 이 시절의 신라 군부를 움직인 이사부와 거칠부 두 사람은 시대가 낳은 탁월한 전략가로서 삼국중 가장 후진적이던 나라가 100년후 삼국통일의 주역을 맡을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6세기 중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에 10개의 가야 소국들이 남아 있었는데  고령의 대가야 (加羅國) 가 마지막으로 562년 신라에게 멸망하자 일본의 欽明천황( 539 – 571재위)이 남긴 피맺인 절규가 일본서기 흠명치세 23년 (562년) 여름 6월기사로 실려있다.

신라는 서쪽 구석에 치우친 보잘것 없고 야비한 나라이다. 하늘을 거역하는 무도을 저지르고 우리의 은의를 배반하고 우리의 직할지를 쳐부셨다. 우리 인민을 해치고 군현에 해를 입혔다. 옛적에 신령스럽고 총명하였던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노 미코토 (氣長足姬尊, 神功황후, Empress Jingu) 는 천하를 주행하며 힘 써 인민을 보살폈다. 신라가 곤란한 일을 당하자 불쌍히 여겨 신라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으며, 요해지의 땅을 주어 신라가 번영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끼나까 타라시히메노 미코토가 신라를 언제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느냐. 우리국민도 신라에 원한 같은 것은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장창과 강궁을 들고 임나(가야)를 공격하여 거대한 이빨과 날카로운 손톱으로 인민을 학살하였다. 간을 찢어 발기고, 사지를 도려냈으며, 뼈를 부시고 , 시신을 불태우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임나사람을, 관리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칼 도마에 올려놓고 마음데로 난도질을 하고있다. 왕의 땅에 살면서 왕의 신하로서 그 땅의 곡식을 먹고 그 땅의 물을 마시고 산 사람으로서 이러한 말을 듣고 애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태자, 대신들은 서로 도와서, 대지위에 피눈물을 흘릴 망정 원한은 드러나지 않게 가슴 속에 감추고 가야 할 사람들이다.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 그 몸을 수고하여 봉사하는 자일진데, 선왕의 은혜를 입고, 후세에 선왕의 뜻을 이어 가려면 단장의 아픔을 이겨낼 생각으로 반역자를 응징하여, 천지의 아픔을 달래고,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 죽어서도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 한 한(恨)을 남길 것이다.

흠명치세 32년 (571년) 여름 4월 15일 천황이 병으로 누웠다. 황태자가 타지에 있어 부재중이므로 역마를 달려 대전으로 불러들여 그 손을 잡고 천황이 말했다.

나는 병이 무거워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뒤를 부탁한다. 너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전과 같이 임나와 사이좋은 사이로 회복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이 달 천황은 62세로 붕어하였다. 위와 같은 언사를 보고 欽明천황이 가야의 후손일꺼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야를 빌어 백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欽明천황의 유지를 받들어 30대 敏達천황(Emperor Bidatsu, 538 – 585)이 등극하며 그는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欽明의 아들이 아니라 백제 성명왕의 둘째 아들로 위덕왕의 동생이다. 이 때 왕위 계승권은 철저하게 장자에게 있었으며 흠명천황은 성명왕의 동생이므로 그 아들 중 천황이 된 사람은 32대 崇峻천황 (530 –592) 한 사람 뿐이다. 나머지 백제 27대위덕왕, 일본 30대 敏達천황, 일본 31대 用明천황 (540 – 599, 백제 28대 혜왕), 백제 29대 법왕 ( ? – 600)은 모두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일본 33대 推古천황 ( Empress Suiko, 554 – 628) 도 성명왕의 딸이다.

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26. 순타태자(淳陀太子)





서기 513 6 백제는 다시 "하헤국 (伴跛国, 伴路國 오기)  우리나라의 코몬(己汶) 땅을 빼앗았읍니다천황의 은혜를 입어 돌려 받을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주청하였다

8 26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 죽었다(百済太子淳陀薨)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조에 기록된 위의 백제태자 사망기사(513) 그냥 흘러 넘길 없는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일본서기가 백제태자의 사망기사를 다룬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5 (서기 597) 4 백제왕이 왕자 아좌(阿佐) 보내 조공하였다(百濟王 遣王子 阿佐 朝貢) 기사는 있지만 다음 그가 야마토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2007 부여 왕흥사적의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577 2 15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 위덕왕의 이름)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刹本舍 / 二枚葬時 / 神化爲三).” 명문이 발견되었다. 명문에 의하여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 이전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도 일본서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순타태자의 사망기사를 실었을 아니라 ()이란 글자를 사용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기는 약간의 힌트를 남겨 두었다킨메이(欽明) 치세 13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오에 (箭田珠勝大兄) 황자가 죽었다 (箭田珠勝大兄皇子薨去) 기사를 짝으로 이해하면 양쪽 모두 (薨) 사용하고 있다. 킨메이 천황의 장자가 죽었다는 기사이다

킨메이(欽明)천황이 즉위하고 황후를 세울 540 1 15 센카(宣化)천황의 황녀 이시히메(石姬) 세워 황후로 세웠다이시히메는 2 1녀를 낳았다. 장자를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라 한다. 다음이 오사다노 누나쿠라노 후토타마시키 (譯語田渟中倉太珠敷 = 후의 비다쯔천황) 이다이렇게 킨메이(欽明)천황의 적장자로 태어났다는 그가 서기 552 죽었다고 기록했다.

리고 바로 이어서 553년부터 백제왕자 여창이 일본서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시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한번 보면 금방 눈치 있도록 기록되어 있다. 킨메이(欽明)치세 14 (서기553) 백제의 왕자 여창은 전군을 몰아 고구려에 들어가 백합벌에 성채를 쌓고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서기 554 왕자 여창은 나이많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서기 557 왕자 여창이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27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552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죽었다는 기사는 서기 552 이후 사람은 야마토를 떠나 백제에서 생애를 보낸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왕자 여창은 위덕왕으로 598년까지 무려 44년간 왕위에 있었다. 야마토의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황자가 백제에 오면 왕자 여창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성왕이라면 킨메이왕의 아들이라는 일본서기 기사는 역사가들의 고심의 산물이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백제왕실과의 연결고리를 떼어내서 독자적인 야마토 황실 계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서기 513 순타태자의 사망기사는 백제 무령왕의 태자가 야마토에 와서 일생을 마쳤다는 뜻이다. 그가 바로 킨메이(欽明)이다. 순타는 서기 509 또는 513 생으로 보면 된다. 일본에서는 킨메이의 생몰년을 “509 – 571”로 보고 있으므로 순타태자가 509년 생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무령왕이 백제왕이 다음 혼인한 백제의 황후 소생은 성명(聖明) 순타(淳陀 = 欽明)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무령왕이 40세를 넘어 백제 왕이 되었으므로 왕이 출생한 후손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기 2001 12 18 일본의 헤이세이(平成)천황이 황거 이시바시노마(石橋間)에서 기자회견중 자신으로서는 칸무(桓武)천황 (737 – 806)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씌여있으므로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읍니다. 무령왕 (461 – 523) 일본과 관계가 깊고 이래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청되게 되었읍니다.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칸무천황의 생모란 타카노(高野)황후 (? – 790) 코오닌(光仁) 천황후이며 이름이 니이가사(新笠), 본성은 야마토우지(和氏), 오토쯔구(乙繼) 딸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야마토우지(和氏) 조선(祖先)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純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순타가 킨메이 천황의 백제 이름이었다면 타카노 황후는 신분이 낮은 도래인 출신이 아니라 원래 황족의 일원이며 칸무(桓武)천황의 부계든 모계든 백제왕실의 후손이다.

일본서기의 서기 513년 순타태자와 552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오에 (箭田珠勝大兄) 황자의 사망기사는 단순히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역사가들은 보다 심오한 비밀을 그런 식으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고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