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서에 나타나는데 정작 일본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일본역사는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이 자기역사를 기록할 때 그보다 앞 서 기록된 중국의 기록을 참고로 하기 때문에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다. 앞에서 이미 거론된 3세기의 히미코(卑彌呼)여왕의 중국교류 기사가 묘하게 가공되어 히미코의 이름이 일본역사에서 제외되었다. 서기 266년부터 147년간 일본역사 기록이 중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후 413년부터 502년까지 왜의 5왕 (The Five Kings of Wa) 기사가 나타난다. 이 또한 일본기록에 없는 부분이다. 일본은 지금도 이 기사를 확인되지 않은 역사로 간주한다. 일본의 역사를 기록할 때 자국의 방침에 맞지않는 부분은 고의적으로 제외한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데로 그것이 일본황실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그들의 역사를 보면 된다.
백제 27대 위덕왕( 554 – 598재위)시절 중국에서는 400여년간 계속된 대륙의 이합집산을 끝내고 581년 수(隋) 양제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내의 혼란이 계속된 400여년간 중국주변의 소국들은 작은 규모의 분쟁을 하면서 살았으나 강력한 정권이 대륙을 차지한 이 시대는 분열에서 통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절이었다.
이 시절 隋書 동이 왜국전에 서기 600년과 607년 왜국왕이 隋에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왕의 姓은 아매(阿每), 이름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號를 아배계미(阿輩鷄彌)라 한다. 왕비의 이름도 계미(鷄彌). 이 나라 사람들은 거리를 재는 리(里)의 개념을 모르고 왕래하는데 걸리는 날짜로 거리를 말한다. 국경은 동서로 5개월, 남북으로 3개월 걸리며 각각 바다에 이르게 된다. 야마타이(邪摩堆)가 수도이며 魏志에서 말한 야마타이이다. 아소산이 있고 이유없이 하늘에 닿을듯 불길이 솟구쳐 제사를 지낸다. 관리의 등급을 12개로 나누어 관리하는 관위 12계의 제도를 운영하고있다.
607년 多利思北孤는 다시 수 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라고 기록하여 수양제를 격노하게 한다. 일본인들은 그 시절 이만한 기개를 가진 천황이 있었다고, 일본이 수나라와 맞 먹는 강력한 나라였다고 좋아하면서도 이 천황의 아이덴티티를 밝히지 못한다. 일본역사를 기록할 때 부끄러운 역사든 자랑스런 역사든 있는 그데로 기록하고자 했다면 중국사서에 있는 역사가 일본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불행하게도 일본은 자랑스런 역사만을 고집하였다. 앞 장에서 논의된 구주백제와 관련된 역사는 일본황실에서 없었던 일로 결정하여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 때 없어진 역사를 살려 낼 기개와 양심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608년 수양제는 배세청(裵世淸)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배세청은 백제의 진도, 남해도를 거쳐 쓰시마, 잇끼도를 지나 九州의 筑紫, 다시 동쪽으로 진왕국 기타 10여국을 거쳐 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筑紫에서 동쪽은 모두 왜라고 한다. 이때 배세청이 왜의 수도 야마다이를 방문하고 왜왕 多利思北孤를 만나고 돌아갔다. 그가 방문했던 왜의 수도는 현 오오이타 현 나가즈(中津)였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9년(608) 수나라 배세청이 우리나라 남로를 거쳐 왜에 사자로 갔다고 보인다.
헌데 이 부분이 후대에 교묘하게 요리되어 일본서기에 기록된다. 推古치세 15년(607년) 7월 오노 이모꼬(小野妹子)가 견수사(遣隋使)로 파견된다. 608년 4월 이모꼬는 백제경유로 배세청과 함께 귀국했다. 수나라 황제의 친서를 이모꼬는 제출하지 않고 오는 길에 백제에서 빼앗겼다고 변명한다. 구주백제 왜왕 다리시히꼬의 외교기사를 마치 야마토의 推古천황이 한 일처럼 황실의 역사로 미화한다. 수나라 황제의 친서를 수나라 사자 배청과 함께 오는 길에 백제에서 강탈 당 했다고 거짓말까지 역사에 나열한다. 이런 짓까지 해야만 황실의 역사가 고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였을까. 일본서기는 배세청이 야마토의 천황을 만나고 간 것으로 역사를 도둑질한다.
아배계미, 593년 백제 아좌태자의 장자로 태어났다. 백제쪽에는 아좌태자의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5년 (597년)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하였다고 나와있다. 아좌태자는 이 해 야마토에 가서 사촌동생 성덕태자의 초상화를 그려 준 것으로 되어있고 이 그림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초상화로 궁내청에 보관되어있다. 아좌태자는 백제 27대 위덕왕의 장자로 일본에서는 오시사까 히꼬히도노 오호애 (押坂彦人大兄)황자 (생몰년 미상이나 570 – 598로 추측한다) 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593년부터 구주백제왕이었으며 위덕왕 다음의 백제왕이 될 신분이었으나 위덕왕보다 1개월 먼저 죽었다. 이 사람이 요절하므로서 백제왕위는 위덕왕과 동 세대의 늙은 동생들이 즉위하여 혜왕, 법왕 모두 1년만에 죽고 법왕의 아들 무왕(일본호칭 지누(茅渟)왕 – 서동요의 마동, 무강왕)이 젊은 나이로 그 뒤를 이었다. 이 바람에 아배계미는 600년부터 8세의 나이로 구주백제왕이 되었고 수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이 때 야마토의 천황 스이꼬(推古)나 섭정 성덕태자와 관계없는 구주백제의 외교기록이며 야마토는 구주백제의 우산아래 존재하고 외교권이 없었다.
아배계미는 촌수로 따지면 성덕태자의 조카이다. 당시 섭정 성덕태자는 어린 조카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여 구주백제 정벌전쟁을 시작한다. 이 전쟁을 일본역사는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으로 기록하여 역사를 제 멋데로 가공한다. 일본서기가 그렇게 되어있으니 요즘도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성덕태자의 친동생)를 격신라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츠쿠지(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과 히로꼬의 첫 아들)가 다시 정신라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히메왕 (舍人姬王, 흠명과 기타시히메의 제 13자)이 아까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602년과 603년 아마토의 구주백제 정복전쟁에서 야마토가 오히려 구주백제의 반격을 받아 정복된 것을 이런 식으로 기록하였다. 602년 야마토 군은 치쿠지에서 격파되고 총사령관마져 전사하였다. 603년 야마토 군은 구주백제군의 반격으로 오오사까의 바로 코 밑에 해당하는 아까시(현재 고베시) 에서 총사령관의 아내가 전사할 정도로 패배한다. 당시의 야마토의 실력자들, 推古천황, 성덕태자, 그리고 소가노 우마꼬는 구주백제의 多利思北孤 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구주백제의 관위제도를 도입하고 헌법 17조를 반포하여 구주백제의 개혁요구에 따른다. 훗날 구주백제를 역사에서 삭제한 야마토의 천황가는 이 모든 개혁이 성덕태자의 작품으로 포장하여 성덕태자를 일본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 지금도 일본의 지폐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덕태자는 이때 구주백제 정벌에 실패하여 정치에서 손을 떼고 불교에 전념하는 조건으로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다. 역사는 실제보다 성덕태자(574 – 622)의 모습을 과장되게 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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