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백제관음의 특별전시가 이루어졌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프랑스의 야마토의 해”및 “야마토의 프랑스의 해”란 취지로 양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이때 양국의 국보급 미술품 1점씩을 상대국에서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때 야마토에서 “백제관음”, 프랑스에서 우젠느 드라크로와의 대표작 “민중을 인도하는 자유의 여신”이 선택되었다.
백제관음이 루브르 미술관에서 공개되었을 때 불란서에서는 일본의 비너스로 절찬을 받았으며 1개월간 30만이상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 불상은 세계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백제관음은 옆에서 보는 모습도 매우 아름다워서 法隆寺에서는 측면에서도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일본국내最古급의 부처인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의 혼을 흔드는 최고도의 미를 갖추고있다.
이 녹나무(樟木, 쿠스노끼)로 조각된 불상의 출생은 의문에 쌓여있다. 일본의 대표작으로 뽑혀 루브르 미술관에 보낼 정도로 아름다운 이 불상을 두고 일본사람들이 백제 커넥션을 당연히 거부한다. 이름에 백제가 붙어있긴 하지만 당시의 한반도에는 佛師가 구스노끼를 사용한 예가 없고, 아무래도 일본국내에서 만들어진 듯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스까의 도읍지에는 백제관음과 같은 타잎의 가늘고 긴 부처는 발견된 게 없다. 이 정도의 천재적인 불사라면 많은 부처를 만들었을 테고,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부처일까.
문예평론가 가메이 가쓰이치로 (龜井勝一郞)가 야마토 古寺風物誌에 기록한 감상을 보자.
1937년 나라를 처음 방문하여 여늬 부처의 좌상을 봐도 모두 그렇고 그런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거대하면 거대할 수록 그런 느낌은 더 했다. 그러나 입상의 아름다움은 언어를 단절하는 매력으로 나를 압도하였다. 특히나 法隆寺 금당에 우뚝 선 백제관음은 불상에 대한 본인의 편견을 일거에 부셔버리고 말았다. 이 미불의 인도에 의해 나는 일보일보 많은 고불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슴프레한 어둠속에 그 희미한 체구가 불꽃처럼 똑바로 서있는 모습을 본 순간, 관찰보다는 먼저 합장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대지에서 피어오른 영원의 불꽃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상이라기 보다 인간의 탑 – 생명의 불꽃이 생동하고있는 탑이었다. 가슴에도 동체에도 사지에도 사실적인 노출같은 것은 없다. 근육도 물론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달한 피안의 체구(體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라고나 할까.
40여년전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화상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일본을 보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한다면 나는 한점의 미술품을 가지고 나가겠다. 그것은 호류지(法隆寺)의 백제관음보살상이다.” 목조로 된 이 백제관음은 천의(天衣)자락 휘날리는 몸매와 은은한 미소로 세계최고의 걸작조각품으로 꼽힌다.
이 불상이 언제부터 백제관음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옛 기록이 별로 없다. 백제관음은 그 명칭때문에 종전직후 한국정부가 반환요구한 첫번째 문화재였다. 이에 대해 백제관음의 재질인 구스노끼 (樟木, 녹나무, Campho tree)는 일본특산종으로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으므로 백제관음은 한국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 진 불상이라는 주장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녹 나무로 불상을 조각하는 일은 아스까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대부분의 아스카 불상이 녹 나무로 밝혀져 녹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왔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 하게 들리지만 한 반도에 녹 나무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녹 나무는 녹 나무과의 대표적인 수종으로 한 반도의 난대림 즉 상록활엽수림대의 대표적 구성종의 하나이다. 나무전체가 향기를 내며 나무껍질과 뿌리에서 나온 향이 계피향과 비슷하여 옛부터 음식물의 향신료로 쓰였고 고대 이집트 인들은 이 나무의 살균력을 잘 알고 미이라의 방부제로 썼다. 이 나무는 벌레가 생기지 않으므로 가장 이상적인 건축재, 가구, 조각재료로 쓰인다.
호류지 창건당시인 750년 기록에 이 백제관음에 해당하는 불사의 기록이 없고 11세기 후반에 작성된 금당일기에도 백제관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 호류지의 기록에서 백제관음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 훨신 훗날인 겐로쿠(元祿) 11년 (1698) “겐로쿠 호류지 諸堂佛體數量記” 이다. 여기에 “허공장입상, 길이 7척5분”이란 불상높이 기록때문에 백제관음에 해당한다고 추정되고 이것이 백제관음의 존재를 기록한 최고의 문헌으로 본다. 호류지 제당불체수량기는 이 허공장보살을 “백제로부터 도래”라는 글이 보이고 백제관음 대좌 아래에도 허공장 대륜 (虛空藏 臺輪)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로써 백제로부터 도래했다는 기록과 함께 백제관음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 한국측 학자들의 주장이다. 메이지 19년 (1886년) 일본정부가 최초로 호류지의 보물조사를 실시한 조사보고서는 이 불상을 반도에서 온 관음으로 판단하여 "조선풍 관음"으로 기록하였다. 최초의 학자들은 국가적인 편견 없이 학자적인 양심으로 보았으나 후일 국수주의적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호류지 측은 허공장 보살이란 명칭을 원 하였으나 보살상의 보관(寶冠)에 아미타여래의 화불이 조각되어있어 관음보살로 확인되었다.
40여년전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화상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일본을 보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한다면 나는 한점의 미술품을 가지고 나가겠다. 그것은 호류지(法隆寺)의 백제관음보살상이다.” 목조로 된 이 백제관음은 천의(天衣)자락 휘날리는 몸매와 은은한 미소로 세계최고의 걸작조각품으로 꼽힌다.
이 불상이 언제부터 백제관음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옛 기록이 별로 없다. 백제관음은 그 명칭때문에 종전직후 한국정부가 반환요구한 첫번째 문화재였다. 이에 대해 백제관음의 재질인 구스노끼 (樟木, 녹나무, Campho tree)는 일본특산종으로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으므로 백제관음은 한국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 진 불상이라는 주장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녹 나무로 불상을 조각하는 일은 아스까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대부분의 아스카 불상이 녹 나무로 밝혀져 녹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왔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 하게 들리지만 한 반도에 녹 나무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녹 나무는 녹 나무과의 대표적인 수종으로 한 반도의 난대림 즉 상록활엽수림대의 대표적 구성종의 하나이다. 나무전체가 향기를 내며 나무껍질과 뿌리에서 나온 향이 계피향과 비슷하여 옛부터 음식물의 향신료로 쓰였고 고대 이집트 인들은 이 나무의 살균력을 잘 알고 미이라의 방부제로 썼다. 이 나무는 벌레가 생기지 않으므로 가장 이상적인 건축재, 가구, 조각재료로 쓰인다.
호류지 창건당시인 750년 기록에 이 백제관음에 해당하는 불사의 기록이 없고 11세기 후반에 작성된 금당일기에도 백제관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 호류지의 기록에서 백제관음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 훨신 훗날인 겐로쿠(元祿) 11년 (1698) “겐로쿠 호류지 諸堂佛體數量記” 이다. 여기에 “허공장입상, 길이 7척5분”이란 불상높이 기록때문에 백제관음에 해당한다고 추정되고 이것이 백제관음의 존재를 기록한 최고의 문헌으로 본다. 호류지 제당불체수량기는 이 허공장보살을 “백제로부터 도래”라는 글이 보이고 백제관음 대좌 아래에도 허공장 대륜 (虛空藏 臺輪)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로써 백제로부터 도래했다는 기록과 함께 백제관음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 한국측 학자들의 주장이다. 메이지 19년 (1886년) 일본정부가 최초로 호류지의 보물조사를 실시한 조사보고서는 이 불상을 반도에서 온 관음으로 판단하여 "조선풍 관음"으로 기록하였다. 최초의 학자들은 국가적인 편견 없이 학자적인 양심으로 보았으나 후일 국수주의적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호류지 측은 허공장 보살이란 명칭을 원 하였으나 보살상의 보관(寶冠)에 아미타여래의 화불이 조각되어있어 관음보살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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