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8일 일요일

68.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1)

금년 1월 17일부터 2월 27일까지 일본의 독쿄(獨協)의과대학교 독일어 문법교수, 테라카도 신(寺門 伸)교수가 쓴 “조선반도에서 일본을 바라본다 –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2)회에서 (5)회까지의 4회분이 연재되었다. 논문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1)회분의 존재에 대하여 문의 해 온 독자가 많아 선후가 바뀌었지만 이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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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서기 2002년)은 일한공동 주최로 월드 컵 축구가 예정되어 있는 관계도 있어 일본과 한국간에 여러 레벨의 교류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또 최근은 한국식(韓國食) 붐으로, 일본인의 한국관은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느껴지나 일반의 일본인의 지식과 의식으로부터 생각할 때 한국은 변함없이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처럼 생각된다.

일한관계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상대방의 나라에 관한 이해에 갭이 있다는 점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흥미를 갖고 의외로 일본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데 반해 일본인은 한국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또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의 수에 비해 한국어를 공부하거나 말 하는 일본인은 별로 없지 않을 까.

일본인이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탐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본인이란 무얼까?”를 생각할 때 옆의 나라인 한국(과 북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아는 것이 필요 불가결하다고 생각되므로 현재와 같은 상태는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교과서 문제나 야쓰쿠니 신사 (靖国神社) 참배문제로 한국과 중국으로 부터 일본의 역사인식을 문제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경우 역사인식이란 전쟁책임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되나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쟁책임과 관련하여, 원래 일본이란 나라의 성립에 관하여, 우리들은 그릇된 관념을 심어오지 않았나라고 생각된다.

먼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 실마리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나의 전문분야는 독일어학(독어문법)이며 “언어의 구조”에 관심이 있다. 처음에는 영어나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등을 공부하다가 중국어와 한국어도 손 대게 되었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뭐야! 일본어와 똑 같지 않은가!” 하고 놀라고 말았다.

문장의 조립방식 (구문)과 단어 배열방식 (어순), 그리고 발상의 패턴이 일본어와 한국어는 동일하다. 예를 들면 “나는 내일 토오쿄오에 간다 .( 私-は-明日-東京-へ-行く)라는 문장이 있으면 “와타쿠시(私)”를 거기에 상당하는 한국어 “나”와 바꿔넣고 “와(は)는 “는”으로 버꿔넣는 식으로 축어역조(逐語訳調)로 마지막까지 한 단어 한 단어를 바꿔넣으면 그것만으로 훌륭한 한국어가 된다. “나-는-내일-토오쿄오-에-간다”.

놀랍게도 일본어의 조사, “와(は)” (“은” 또는 “는”)와 “가(が)” (“이” 또는 “가”)의 쓰임새가 다른 점도 똑 같이 한국어에 적용된다. 결국 “저 사람은 선생이다 ( あの人は先生です)”와 “저 사람이 선생이다 (あの人が先生です)”라는 문장은 영어나 독일어로는 이 차이를 표현할 수 없으나 한국어로는 정확히 표현된다. 그리하여 이 2개의 조사의 사용방식은 – 약간 다른 점도 있지만 – 기본적으로 일본어와 동일하다.

이 밖에도 “테러-와-의-전쟁(テロ・と・の・戦い)”이나 나고야-까지-는-신칸센-으로-갈수있다 (名古屋・まで・は・新幹線で行ける)” 의 “と・の”나 “まで・は”를 한국어에서도 2개의 조사를 겹쳐 표현하는 (“と・の”는 “와-의”, “まで・は”는 “까지-는”으로) 것이나, “해 보다 (やってみる)나 열어 두다 (開けておく)”의 “みる”와 “おく”는 한국어에서도 그대로 “보다 (=見る)와 두다 (=置く)라는 동사를 써서 표현하는 것, 또 체계적인 경어(敬語)가 존재하는 것등, 하여튼 이 2개의 언어의 문법의 골격은 쏙 빼 닮았다 해도 무리가 없다.

“이웃 나라에서 생각한 것 (隣の国で考えたこと)” 라는 책에서 저자인 오카자키 히사히코 (岡崎久彦, 1930 - ) 는 일본어와 한국어는 “기분 나쁠 정도 닮아 있다”, “이 닮은 방식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이다”등의 감상을 말 하고 있으나 나도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똑 같은 감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한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의 시대 양국의 밀접한 교류및 20세기전반의 병합시대의 영향을 받아 일한 양국간에는,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에 없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그것을 전부 배제하고 더욱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그래도 기분 나쁠 정도로 닮은 점이 있다. (p. 104 – 105).

문법이 닮았다고 한 마디로 말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일한양어의 친근성을 논할 때, “문법은 확실히 많이 닮아 있으나” 라고 한 마디로 자르고, “그러나 발음과 어휘는 닮은 점이 거의 없다”라는 말을 하게 되므로 그런 책을 읽어 온 사람들은 문법의 중요성을 인식할 짬도 없으나, 조금이라도 한국어를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이 닮은 방식이 예삿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20년 이상 외국을 돌아 다니고 와서, 처음으로 외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p. 108)

이렇게 되면, 일본어와 한국어는 방언관계일까, 아니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무언가의 유연관계(類緣關係)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나 자신은 양자간에 비교적 가까운 친족관계가 있다고 추정한다), 그것이 그리 간단히 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언어학에서 2개의 언어사이에 친족관계가 성립한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기본언어간의 동일성, 유사성, 구체적으로는 음운의 대응 (=평행관계)이 있음을 밝혀야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음운의 대응이란, 예를 들면, 영어의 “t”를 포함하는 단어가, 거기 대응하는 독일어의 단어에는 “s”로 되어 있다 (영어의 water /독일어의 wasser, better / besser 등) 는 등으로 복수의 기본단어에 관하여 특정의 자음들의 대응관계가 보인다는 따위이다. (독일어와 영어의 친족관계는 증명되었다).

신택스(syntax, 문장의 구조)면에서 보아, 일본어와 한국어간에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명백하지만 숫자나 친족명칭, 신체를 표현하는 명사등의 기본어휘가 두 언어에서 많이 다르다. 이것은 실로 불가사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어의 계통 (日本語の系統) (岩波文庫)속에서 언어학자 핫토리 시로우 (服部四郎, 1908 – 1995) 氏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언어의 가장 확실한 비교연구는 어휘의 전반적 비교로부터 음운의 대응을 밝히고, 음운법칙을 귀납하여, 그에 기초하여 문법적 제 요소의 대응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형태소(形態素)의 대응을 배후에 가진, 음운의 대응과 형태의 대응이 언어간의 친족관계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 (p. 29)

현재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 일본어와 타 언어간의 친족관계는 유구어(琉球語)가 유일하며 그 이외의 어떤 언어도 친족관계가 증명된 것은 없다. (유구어가 일본어와 동계라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러나 일본어와 동계일 개연성이 가장 높은 것이 조선어 – 알타이 제 언어일 것이다”. (p. 34)

라고 하며, 다시 동서(同書)의 다른 부분에서, 언어연대학이라는 방법에 기초하여, 일본어와 한국어 (핫토리씨는 조선어라고 썼으나 같은 말이다) 2개 언어간의 거리를 검토한 다음 “일본어와 조선어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분열연대는 지금부터 4000년 이내로는 볼 수 없다 (p. 364) 고 결론 짓는다.

2개의 언어간에 친족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 언어를 따라 올라가면, 드디어 공통의 조어(祖語)와 만난다고 보통 생각하므로, 그 두 언어가 언제 분화되었는가는 언어의 근친성을 재는 척도가 된다. 거기서 일본어와 한국어간에 친족관계가 있다고 가정하여, 언어연대학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 두 개의 언어는 혹 공통의 한 언어에서 분기하였다 하더라도 그 분기점은 기원 전 2000년 이후는 될 수 없다. 결국 일본어와 한국어는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 관계는 미미하다라는 결론이 나왔다라고 핫토리(服部) 씨는 말 한다.

이 결론은 우리들의 실감을 도저히 납득시키지 못 한다. 까마득한 4000년 전에 분기한 언어가 어떻게 이 정도로 닮아 있는가. 이것은 기본단어의 동일성, 유사성만을 언어비교의 기준으로 보는 현재의 비교언어학의 방법은 완전하지 않고 결함이 있으며, 인도 – 유러피안 제 언어이외의 언어에는 별도의 기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케이스도 존재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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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백제와 일본열도가 같은 나라였다고 보아 왔다. 데라카도 신 교수의 윗 글과 관련하여 우리는 당연히 당시 사람들이 언어문제를 어떻게 소화 해 갔을지 생각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인들이 열도에 들어 갔을 때 현지인들이 원시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백제인들은 현지인의 언어를 백제어와 함께 사용하므로서 의사소통의 질을 높여 나갔을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한 단어 한 단어를 뜯어 놓고 보면 완전히 다른 언어인 것 처럼 보인다. 사람의 신체의 명칭이나 인간의 삶 속에 필요한 가장 원초적인 단어들이 공통점이 없다. 예를 들면, 눈, 코, 입, 얼굴, 손, 발, 밥, 물, 불, 집, 강, 산 따위의 기본어휘들이 어떤 공통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문장의 어순은 동일하다. 백제인은 현지인의 단어를 빌어 백제어의 문장을 만들어 현지인과 대화의 장을 열었을 것이다.

2009년 11월 1일 일요일

67. 간고지 가람연기의 암시

불교가 백제에서 일본에 전해진 내력을 기록한 문서로 간고지 가람연기와 유기자재장 (元興寺伽藍縁起并 流記資財帳) 이 전해온다. 서기 710년 아스카 후지와라쿄 (飛鳥藤原京) 에서 헤이죠쿄(平城京)로 천도할 때 아스카의 호코지(法興寺)를 새로운 수도 헤이죠교(平城京)로 옮겨 간고지(元興寺)라 하였다 하며 현재 나라시 쥬엔쵸 (奈良市中院町)에 이 사찰의 일부가 남아, 간고지 극락보 (元興寺極楽坊)등이 국사적(国史跡)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람연기는 텐뵤(天平) 19년 (서기745년) 성립되었으며 간고지 가람연기 (元興寺伽藍縁起), 탑로반명 (塔露盤銘), 장륙광명 (丈六光銘), 그리고 자재장 (資財帳)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로반명과 장륙광명은 본래 금석문이었으나 현물은 없고 이 서사문(書写文)만 전 해 온다.

간고지 가람연기는 불교공전(仏教公伝) 이래의 불교보급의 역사를 전한다. 그러나 백제멸망후 야마토(大和) 정권에 의한 율령국가 성립 이후 성립한 문서이므로 야마토 황실의 역사관의 영향을 받아 씌여졌다. 황실의 역사관이란 황실의 만세일계, 킨키 야마토 (近畿 大和)의 유일 정통성, 그리고 백제의 부정과 열도의 자생적인 진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뿐 아니라 독립적인 문서인 간고지 가람연기까지도 황실의 역사관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문서는 야마토에 선행하여 큐우슈우에서 진행된 불교 초전의 역사를 마치 야마토의 일처럼 기록한다. 초기 예배를 드리던 사찰의 이름과 지명, 거기 관련된 황실 구성원의 이름등이 중복모순되어 전체적으로 애매모호하다. 이 내용을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여태까지 보아 왔듯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려고 하니까 난해한 내용이 된다. 야마토의 유일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구주백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구주백제에서 생긴 일을 야마토에서 있었던 일로 기록하려 하니 시대기록을 애매하게 하거나 사찰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바꾸었다고 주장하게 된다.

가장 먼저 문제되는 부분이 불교공전의 연대가 일본서기와 다른 점이다. 일본서기의 불교초전 기사는 킨메이(欽明) 13년 (서기 552) 10월 성명왕(聖明王)은 서부희씨 (西部姫氏) 달솔 누리시치케이 (達率怒唎斯致契) 등을 보내, 석가불의 금동상 일체(金銅像一体) 와 하타키누가사 (幡蓋) 약간, 경론(経論) 약간권(若干巻)을 바치고 따로 상표하여 부처를 널리 예배하는 공덕을 기록하였다고 되어 있다.

한편 간고지 가람연기는 불교초전 기사를 이렇게 기술한다. 야마토(大倭)의 불법은 시키시마궁 (斯帰嶋宮)에서 천하를 다스린 아메쿠니 오시 하루키 히로니와 천황 (天国案春岐広庭天皇(欽明天皇)) 시대, 소가노 오호오미 이나메노 쓰쿠네 (蘇我大臣稲目宿禰) 가 봉사하던 킨메이(欽明) 7년 무오(戊午) 12월 바다 건너 온 것으로 시작된다. 백제국의 성명왕 시대에 태자상(太子像)과 관불의 용기 일식(灌仏器之一式) 및 불기를 쓴 서적 한 상자 (説佛起書卷一筐)를 보내서 말 하였다.“듣기에, 불법이 세상 최고의 법이니 귀국(貴國) 또한 수행하기 바랍니다.”

大倭國佛法 創自斯歸嶋宮治天下天國案春岐廣庭天皇御世 蘇我大臣稻目宿禰仕奉時 治天下七年歳次戊午十二月度來 百濟國聖明王時 (悉達)太子像并灌佛之器一具 及説佛起書卷一筐度而言 當聞 佛法既是世間無上之法 其國亦應修行也

시작부터 헷갈리는게 킨메이(欽明) 7년 무오(戊午)년이라는 불교초전 싯점이다. 킨메이(欽明) 7년은 서기 546년 이나 야마토의 킨메이(欽明) 시대에 무오(戊午)년은 없다. 킨메이(欽明) 7년과 무오(戊午)년이 모순되는 것이다. 무오년은 서기 538년이며 야마토의 宣化천황 시대이다.

킨메이(欽明)는 서기 539년부터 571년까지 야마토의 왕이었고 그의 출생을 일본은 서기 510년으로 보나 우리는 513년으로 본다.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 7년 8월 26일 백제의 태자 순타 (百済太子淳陀)가 죽었다는 기사를 킨메이(欽明)의 미래와 연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백제에서 무령왕의 왕자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그가 일생을 야마토에서 보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일본서기 저자들의 상투적인 버릇이다. 케이타이(繼體) 7년은 서기 513년이며 킨메이(欽明)왕의 백제에서의 이름이 순타(淳陀)였다고 본다.

간고지 가람연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카이이 토유라궁 (楷井等由羅宮)에서 천하를 다스리던 토요미케 카시키야 히메노 미코토 (等與彌氣賀斯岐夜比賣命)가 100 세가 된 계유(癸酉) 정월 9일, 우마야토노 토요토미미노 미코 (馬屋戸豐聰耳皇子, 성덕태자)가 왕명에 의하여 간고지등의 본연(元興寺等之本縁) 및 토요미케 카시키야 히메노 미코토 (等與彌氣賀斯岐夜比賣命) 의 발원과 제신(諸臣)등의 발원을 기록하였다.

楷井等由羅宮治天下等與彌氣賀斯岐夜比賣命生年一百 歳次癸酉正月九日 馬屋戸豐聰耳皇子受勅 記元興寺等之本縁及 等與彌氣命之發願 并諸臣等發願也

토요미케 카시키야 히메노 미코토 (等與彌氣賀斯岐夜比賣命)란 스이코(推古)여왕의 일본식 시호(和風諡號)이며 계유(癸酉)년은 서기 613년이다. 서기 554년생인 스이코여왕은 계유년 59세였으나 위에서는 100세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명백한 모순이 부지기수로 발견되는 것이 이 기사이다. 우리는 스이코왕이 100세라는 이야기는 스이코가 아니라 위에 나온 킨메이(欽明)왕의 생탄 100년이 되는 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카이이 토유라궁 (楷井等由羅宮)도 문제가 된다. 야마토에는 카이이(楷井)는 없고 사쿠라이(櫻井)가 있어서 카이이(楷井)를 사쿠라이(櫻井)라고 일본은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믿도록 야마토의 역사가들이 만든 함정이다. 카이이(楷井)는 큐우슈우의 불교초전과 관계되는 지명이다. 우리는 “26. 구주백제의 성립”에서 백제의 무령왕이 일본열도를 다시 백제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하여 큐우슈우를 먼저 정복하고 백제의 직할령으로 하였으며 구주백제왕으로 하여금 야마토를 관리하였다고 보았다. 야마토는 백제 무령왕의 동생 안칸(安閑)왕이 접수한 서기 531년부터 백제의 관리아래 돌아왔다. 안칸(安閑), 센카(宣化), 킨메이(欽明), 비다쯔(敏達), 요메이(用明)가 모두 구주백제왕을 지낸 다음 야마토의 왕이 되었다.

서기 538년 킨메이(欽明)는 구주백제왕이었고 그 때 불교초전은 큐우슈우를 말한다. 그리고 서기 552년 킨메이(欽明) 는 야마토의 왕이었고 서기 552년 야마토의 불교초전은 일본서기 기록데로이다. 큐우슈우든 야마토든 킨메이 시대에 불교가 들어 온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내막을 감추고 역사의 파편들이 야마토 황실의 의지에 따라 가공되어 여기저기 모순이 드러난다. 간고지 가람연기를 잘 들여다 보면 큐우슈우 역시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많은 갈등을 겪었으나 서기 580년대 후반 국민총화를 이루어 불국정토를 구현하려는 기운이 충만한 시대를 맞는다.

서기 587년 4월 2일 요메이(用明)왕이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놓고 불법승 (仏法僧)의 삼보(三宝)에 귀의(帰依)하겠다고 선언한다. 천연두가 창궐하던 시대였던 것 같다. 천연두에 걸린 왕이 절에 들어가 부처님께 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데리고 왕이 누워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토요국(豊国)의 법사는 고승대덕의 이름 높은 승려일 터이다. 토요국(豊国)은 현 큐우슈우의 오이타 현(大分縣) 이며, 이 때 토요국(豊国) 수도, 우사시 (宇佐市)는 불교흥륭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고 본다.

서기 587년 4월 야마토의 요메이(用明)왕이 불문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6월 카시키야 히메 (炊屋姫尊, 후일의 스이코 여왕) 의 명에 의하여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와 야카베황자 (宅部皇子)가 토벌된다. ( 64. 아좌태자 참조). 그 해 7월 요메이(用明)왕이 죽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가 토벌되고, 8월 스슌(崇峻, 530 – 592)이 등극한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을 일본서기는 불교도입을 둘러 싸고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일으킨 전란쯤으로 기술하였으나 간고지 가람연기에는 이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다. 이는 이 사건이 불교와 관계없는 순수한 정치적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서기는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카시키야 히메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린 것으로 기록하여 주살된 것 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아나호베황자는 당시 구주백제왕이었고 요메이(用明)왕이 불문에 들어가면 야마토왕이 될 사람이었다.

당시 야마토는 비다쯔(敏達)의 비(妃) 카시키야 히메 (炊屋姫尊, 후의 스이코여왕),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 스슌(崇峻)등을 중심으로 야마토의 자결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가 지금까지의 관례데로 백제와 큐우슈우가 지정한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를 제거한 것이 서기 587년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이었다고 본다. 불교도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라는 일본서기 설명은 큐우슈우의 존재를 감추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때 주살된 아나호베황자가 킨메이(欽明)왕과 그의 비 소가노 오아네(蘇我小姉) 사이에서 태어 난 아나호베황자(穴穂部皇子)로 본다. 그러나 구주백제왕 아나호베황자 (? – 587)는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요메이(用明)왕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나호베황자 (? – 587)와 관련된 일본서기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아나호베황자의 주살은 백제와 구주백제에 대한 야마토의 반역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백제의 의지에 없던 스슌(崇峻)이 출현한다. 일본서기는 요메이(用明) 왕이 587년 7월 9일 죽었다고 기록했으나 그는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따라 우사시 (宇佐市)의 불문에 귀의했을 것이다.

서기 587년의 야마토의 반란은 591년 큐우슈우 정벌로 이어진다. 스슌(崇峻) 4년 (서기 591) 11월 4日,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각 씨족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부장(副将), 대장( 隊長)으로 하여 2만여의 군사를 딸려 쯔쿠지(筑紫)에 출병하였다

서기 591년 야마토의 큐우슈우 정벌의 결과를 알리는 기사는 없지만 591년 큐우슈우의 법흥년호(法興年號) 선포, 592년 야마토의 스슌(崇峻) 암살은 큐우슈우 세력이 그 후의 사태를 주도하였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관심은 당시 큐우슈우의 왕이 누구일까 하는 점이다. 이 글은 그 사람의 그림자나마 밝혀 보고자 하는 의도로 씌여진다.

난해한 간고지 가람연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 읽어 내려가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는데 이부분을 따라가 보자.

또, 오호키미천황 (大大王天皇, 스이코 여왕으로 봄)이 천하를 다스릴 때, 천황생탄 100년이 되는 계유(癸酉)년 (서기 613), 춘정월 원단, 하례의 말씀이 있었고 토요토미미노 미코 (聰耳皇子, 성덕태자)가 말 하기를 “지금, 우리가 천조(天朝)의 생년을 헤아리니 100년이 되고 도속의 법 (道俗の法)을 펴 세간에서 건흥 건통 (建興建通)의 연간(年間)이라 칭하니 이 어찌 우리 조상 (킨메이왕을 말함) 의 덕이 아니라 하겠는가?

불법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후궁을 파괴하지 않고, 카이이(楷井)로 옮겨 도량(道場)을 마련했다. 그 때 3명의 여인이 출가하였다. 그 때 크게 기뻐하여 그 도량(道場)에 살게 하여 불법의 싻이 텃다. 그래서 간고지(元興寺)라 불렀다. 그 세명의 여승등은 경(經)에 나온 “비구의 몸으로 득도하고자 하는 것은 비구의 몸을 드러 내 설법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말 함이다.

지금 다시 불법을 일으켜 세상에 널리 펴 간고지(元興寺) 를 세웠다. 그래서 본래의 이름을 따라 켄코지(建興寺)라 칭한다. 그 뒤, 법사사(法師寺)는 고구려 백제에서 법사들이 줄지어 들어 와 불법을 밝히고 절을 지어 켄쯔우지 (建通寺)라 칭하였다. 황후제(皇后帝, 스이코 여왕을 뜻한다고 봄)의 시대, 도속의 법(道俗の法)을 펴 켄코 켄쯔우 (建興 建通)의 시대를 여니 성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안다. 경(經)에 이르기를 “왕의 후궁에서 여인의 몸으로 변하여 설법을 한다”함은 이를 말 함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이 나라의 현실에 부합되었음을 알리라. 이 덕의(德義)에 따라 이름을 법흥황(法興皇)이라 칭한다. 켄코 켄쯔우 법흥황(建興 建通 法興皇)의 세개의 이름을 영원히 유포하여 받들어 모실 것을 제신(諸臣)들과 약속한다.”고 한 뒤, 발원하여 말 하기를 “원 하옵건데,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황제폐하, 하늘과 땅, 사해가 함께 평안하며 정법(正法)이 구현되고 불법의 영향을 받아 성스러운 세계가 끝 없이 펼쳐지기를…”라고 기원하였다.

이 때 천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하늘을 우러러 공손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며 “ 우리의 부모육친권속은 우치(愚癡, 어리석다는 의미의 불교용어)와 사견(邪見)에 빠진 사람의 말에 따라 삼보(三寳)를 파괴하고 불 태웠으며 사찰의 물건들을 도리어 들어내어 없애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토유라(等由良) 의 후궁을 아마데라(尼寺)로 쓰고, 산림, 원전(園田), 연못(池), 봉호(封戸), 노비등을 다시 거두어 부처님을 받든다.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법사사(法師寺)를 짓고 전원, 봉호, 노비등을 거두어 부처님을 받든다.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를 만들고, 또한 그 밖의 여러 선근(善根)을 닦았다. 이런 공덕으로 우리 부모육친권속등의 불법을 불태워 없앤 죄및 사찰의 물건을 도리어 들어내어 없앤 죄를 모두 용서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미륵과 마주하여 정법을 듣고, 무생인(無生忍)을 깨닫고, 정각(正覺)을 속히 이루어, 십방(十方) 의 제불(諸佛)및 사천(四天)등에, 지성의 마음으로 서원하는 것은, 만들어 바친 이사(二寺)및 이구(二軀)의 장륙을 다시 부수지 않고, 흘려 보내지 않고, 칼로 자르지 않고, 불 태우지 않고, 이사(二寺)에 봉납된 모든 물건들을 다시는 취하지 않고, 멸하지 않고, 범하지 않고,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함이다.

가장 평이한 언어로 번역한 것이 위와 같다. 그런데 갑자기 카이이 도량 (楷井道場), 토유라(等由良)의 후궁, 간고지(元興寺), 켄코지(建興寺), 켄쯔우지 (建通寺), 아마데라(尼寺), 법사사(法師寺),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가 나와 이들의 흐름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데라(尼寺)는 비구니의 사찰, 법사사(法師寺)는 비구의 사찰로 이 둘이 있어야 계율을 내릴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간고지(元興寺)라고 하던 것을 켄코지(建興寺)라 칭했다는 것은 무슨 소린지 아리송하다.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는 토요국 우사(豊國 宇佐)에서 이 시대 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가 아스카 호코지(飛鳥 法興寺)의 불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거기에 더하여 스이코(推古)여왕과 토요토미미 황자(성덕태자)의 이름으로 내용이 전개되어 야마토의 역사적 사실처럼 씌여져 있다.(우리는 “37. 성덕태자” 편에서 성덕태자는 픽션이었다고 알고 있다). 거기에 하나의 단서, 법흥황(法興皇)이란 말이 나온다. 당시 불법을 일으켜 켄코지(建興寺), 켄쯔우지 (建通寺)를 세우고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를 만들어 공양한 당사자가 이 법흥황(法興皇)으로 기록된 사람일 것이다.

야마토의 역사가들은 토요토미미 황자(성덕태자)가 이 법흥황(法興皇)에 해당되는 것처럼 역사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법흥황은 큐우슈우에서 나타난 왕(천황)이며 불교흥륭의 시대를 연 것이다. 건흥 건통 (建興建通)의 연간(年間)이란 켄코지(建興寺), 켄쯔우지(建通寺)를 건립하여 불교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간고지(元興寺)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서기 606년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606년 (推古 14년 4월 8일) 동수장륙불상 (銅繍丈六仏像) 제작이 완료되어 간고지 금당 (元興寺 金堂)에 모시었다고 나온다. 호코지(法興寺)의 이름이 어느 사이엔가 간고지(元興寺)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간고지 가람연기와 유기자재장에 포함된 장륙광명이란 바로 위의 장륙불상의 광배명을 말한다. 서기 596년 호코지(法興寺)건설을 완료하였으나 그로부터 10년 후, 서기 606년 장륙불상을 만들어 모시었고, 그 때는 절의 이름이 간고지(元興寺)로 개명되어 있었다는 것이 일본서기 기록이다.

동일한 장륙불상을 일본서기는 서기 606년 제작, 간고지 가람연기의 장륙광명은 서기 609년 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은 호코지(法興寺)건설이 서기 596년인데 10년후에야 본존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서기 710년 아스카 후지와라쿄 (飛鳥藤原京) 에서 헤이죠쿄 (平城京)로 천도할 때 아스카의 호코지 (法興寺)를 새로운 수도 헤이죠쿄(平城京)로 옮겨 간고지(元興寺)라 하였다고 하는데 이미 서기 606년 국가의 상징적인 사찰의 이름이 바뀌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애매하게 기록된 위의 기록을 가지고 역사의 실체에 접근할 방법은 없다. 단지 위에 기록된 법흥황과 관련된다고 여겨지는 법흥(法興)이란 연호(年號)를 따라가 보자. 야마토 조정 (大和朝廷)의 공식적인 연호는 서기 701년 몬무(文武) 5년의 타이호(大寶)가 처음이다. 그러나 야마토 조정 (大和朝廷)이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사용된 연호가 발견된다. 연호는 모두 큐우슈우에서 선행하여 사용되었다고 밝혀지고 있으며, 불교초전의 역사와 함께 야마토 황실의 역사관과 맞 물려 있는 이슈들이다. 연호 가운데 법흥(法興)이란 연호(年號)가 있는데 서기 591년이 법흥(法興) 원년이 된다. 바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점에 큐우슈우에서 누군가가 법흥이란 연호를 선포하였다.

법흥(法興)이란 연호가 기록된 대표적 문서가 이요노 유노오카 비문 (伊予湯岡碑文)과 호류지 석가삼존상 광배명 (法隆寺 釈迦三尊像 光背銘)이다. 이요노 유노오카 비 (伊予湯岡碑)는 망실되었고 그 내용이 석일본기(釈日本紀) 권14 소인(所引)의 이요풍토기(伊予風土記) 일문(逸文)에 남아있다. 그 내용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법흥 6년 10월, 서기 596년, 우리의 법왕대왕(法王大王)이 혜자법사(慧慈法師)와 카즈라기노 오미(葛城臣)와 더불어 이요국(伊予國)을 소요하며 이 신비한 온천을 보고 영묘한 효험이 있음을 찬미하며 온천의 현창(顯彰)을 글로 남기고자 하시어 이 비문 일편을 짓게 되었다.(본문 생략)

法興六年十月,歲在丙辰,我法王大王與惠慈法師及葛城臣,逍遙夷與村,正觀神井,歎世妙驗,欲敘意,聊作碑文一首.

서기 596년 우리의 법왕대왕이 고구려의 승려 혜자법사(慧慈法師)와 함께 현 시코쿠(四國) 에히메현(愛媛縣) 마쯔야마시 (松山市) 도고(道後)온천을 방문했다. 혜자법사(慧慈法師)는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스이코(推古) 3년 (서기 595) 고구려 승 혜자(慧慈) 귀화하여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스이코(推古) 4년 (서기 596) 혜자(恵慈) 혜총(恵聡)의 두 스님이 호코지(法興寺)에 입주.
스이코(推古) 23년 (서기 615) 11월 15일 고구려 승 혜자(慧慈) 귀국.

서기 587년 4월 2일 요메이(用明)왕이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놓고 불법승 (仏法僧)의 삼보(三宝)에 귀의(帰依)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데리고 왕이 누워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가 다름 아닌 혜자법사(慧慈法師)일 것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605년 (스이코 13년) 동수장륙불상 (銅繍丈六仏像)을 제작할 때 고구려의 26대 대흥왕 (영양왕)이 일본국 천황에게 황금 3백냥을 헌상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모든 것이 혜자(慧慈)와 관련될 것이다. 혜자(慧慈)는 승려였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이 큰사람으로 고구려의 돈을 열도에 끌어 들여 장륙불상을 건립하는데 간여하였다.

또 스이코(推古) 18년 (서기 610) 3월 고구려왕이 승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보냈다. 담징은 오경(五経)에 통달할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물감과 종이, 묵(墨)을 잘 만들고,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물레방아를 만든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高麗王貢上僧曇徴 法定 曇徴知五経 且能作彩色及紙墨 并造碾磑 蓋造碾磑 始于是時歟)

이 때 담징이 호류지(法隆寺) 금당벽화를 그렸다고 하나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이 때 담징을 일본에 데려 와 사찰건립을 돕게 한 것 또한 혜자(慧慈)가 수배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혜자법사(慧慈法師)가 야마토의 사람이 아니라 법왕대왕의 사람이라고 믿는다. 서기 615년 그의 귀국은 법왕대왕이 타계한 후의 일일 것이다.

일본은 법왕대왕(法王大王)을 아예 토요토미미 황자(성덕태자)라고 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법왕대왕(法王大王)은 간고지 가람연기에서 나온 법흥황(法興皇)과 동일인이며 큐우슈우에서 건흥 건통 (建興 建通)의 연간(年間)을 열어 불교의 꽃을 피운 사람이라고 본다. 법흥(法興)이란 연호는 그와 관련된 연호일 것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595년 혜자(慧慈)가 귀화하여 황태자(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서기 596년 10월 시코쿠 도고온천에 성덕태자가 혜자(慧慈)와 함께 가서 글을 남겼다면 성덕의 나이 23세 때이다. 나이 23세의 젊은이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을 스승 앞에서 감히 한 수 남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 우리는 법왕대왕(法王大王)의 모습을 기상천외한 곳에서 발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서기 598년 혜왕이 왕위에 올랐다. 혜왕(惠王)은 이름이 계(季)이고 명왕(明王)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昌王)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서기 599년 혜왕이 죽었다. 시호를 혜(惠)라고 하였다.

서기 599년 법왕이 왕위에 올랐다. 법왕(法王)은 이름이 선(宣) 혹은 효순(孝順)이라고도 하였다. 혜왕의 맏 아들이다. 혜왕이 죽자 아들 선이 왕위를 이었다. 수서(隋書)에는 선을 창왕(昌王)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서기 600년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 크게 가물자 왕은 칠악사(漆岳寺)에 행차하여 비를 빌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올려 법(法)이라 하였다.

시호란 사망한 뒤에 추증한 이름을 말하는데 시호를 올려 법(法)이라 하였다고 하나 백제의 법왕이 되기 전부터 그는 법흥황이었으며 법왕대왕이었다. 백제 왕위에 있었던 2년간의 행적 또한 제왕이 아니라 승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백제의 29대 법왕은 서기 599년 왕위에 오른다. 서기 2006년 SBS TV 연속극의 서동요(薯童謠)에서 부여선 (扶餘宣)은 악인으로 그려졌는데 실제의 모습은 법왕대왕이었고 서동(薯童)의 아버지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몇 살이며 이전에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기록이 없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이 시대 백제와 일본이 21세기의 요새처럼 여권이 필요한 타국이었다고 믿으므로 법왕대왕 (法王大王)을 열도 안에서만 찾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대의 백제와 일본열도는 동일한 나라였다고 보고 있다. 야마토의 오호기미(大王)는 백제왕을 칭한다. 백제왕실 커넥션이 없는 야마토의 어느 누구도 명시적으로 오호기미(大王)를 칭한 적이 없다. 백제의 멸망 이후에야 열도에서 스스로 천황 또는 오호기미를 자기들 마음데로 칭하게 된다.

삼국사기는 혜왕을 성명왕의 아들이라 하면서 법왕은 혜왕의 아들이라 하였다. 수서는 법왕이 창왕(위덕)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혜왕과 법왕이 모두 위덕왕과 형제간으로 성명왕의 아들이라고 본다. 그들의 형제순으로 위덕(530 – 598), 비다쯔(538 – 585), 요메이(540 – 587), 아나호베(? – 587), 법(흥)왕으로 될 것이다. 모두가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는 킨메이(欽明)의 아들로 기록한다.

간고지 가람연기 (元興寺伽藍縁起)의 내용 가운데 특별한 용어가 하나 등장한다. 관(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오늘 날의 당국(當局, Authority)으로 새겨진다. 아마토의 천황과 성덕태자 이외의 관(官)이 야마토에 주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 당국(當局, Authority)을 백제나 큐우슈우의 불교진흥과 관련된 관청이라고 본다. 어쩌면 초기 불교 사원 건설을 백제와 큐우슈우가 전담했을 수 있다.

불교에 입문한 3명의 비구니가 수계(受戒)와 관련하여 관(官)에게 말 하였다.“듣자 하니, 출가하는 자는 계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엔 계사(戒師)가 없읍니다. 따라서 백제에 가서 계를 받고 싶읍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서기 587년 백제에서 손님이 왔다. 그래서 관(官)이 물었다. “이 3명의 비구니가 백제에 나가 계를 받고 싶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읍니까?”

백제의 사자가 대답하기를 “비구니가 계를 받으려면, 먼저 아마데라(尼寺, 비구니의 절)에서 10명의 비구니승에게 부탁하여 본계를 받고, 법사사에 가서 먼저 비구니승 10명과 합쳐 20명의 스님으로부터 본계를 받읍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아마데라 밖에 없으므로 법사사도 스님도 없읍니다. 비구니들이 법에 따르려면 법사사를 먼저 짓고 백제국의 스님과 비구니를 모셔와 계를 받아야 됩니다.”고 하였다. (이하 생략)

그 때 3인의 비구니가 관(官)에게 어쭈었다. “단 6명의 스님이 오셨을 뿐으로 수계를 위해서는 20명의 법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백제에 나가 계를 받고 싶읍니다.” 이 말을 듣고 관(官)이 법사들에게 물었다. “이 3명의 비구니들이 백제에 나가 계를 받고 싶어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하생략)

그리하여 관(官)은 파견을 승인했다. 그 때 토요토미미황자 (聡耳皇子)가 대후 오호기미 (大后大大王, 스이코 여왕으로 봄)의 어전에서 아뢰었다. “불법을 펴는 것을 관(官)이 허락했읍니다.”(이하 생략)

법흥왕은 서기 545년 경 출생했을 것이다. 아나호베황자가 야마토에 가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주살된 서기 587년 43세 때 그는 큐우슈우왕이 되었으며, 서기 596년 도고온천을 방문했을 때 52세였다. 큐우슈우는 그를 중심으로 켄코지(建興寺), 켄쯔우지 (建通寺)를 세우고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를 만들어 불법을 흥륭시켰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를 법흥황(法興皇)이라 불렀다. 아스카의 호코지(法興寺)도 그의 손으로 건설되지 않았을까? 큐우슈우와 야마토를 왕래하며 불법을 일으키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던 그는 서기 599년 백제왕이 되었다.

이와같은 상황은 서기 598년 위덕왕의 왕자 아좌태자 (일본명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의 요절과 연관되어 혜왕과 법왕이 즉위하였다. 역사는 법왕이 서기 600년 붕어하여 그의 아들 서동 (마동)이 뒤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무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