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 42년 (641) 봄 3 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武)라 하였다. 무왕의 원자 의자왕은 무왕 재위 33년(632) 태자로 정해졌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야마토의 34대 敍明천황 (Emperor Jomei)은 서기 641년 10월 붕어하여 대궐북쪽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를 백제대빈이라 하였다. 敍明天皇에 이어서 서기 642년 2월 그의 황후가 35대 皇極天皇 (Empress Kogyoku)으로 즉위한다. 을사의 변이란 서기 645년 6월 14일 궁중의 皇極天皇의 면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을 탈취한 사건을 이른다.
우리가 보고있는 황실의 역사기록 (일본서기)은 이긴 자의 후손들이 손 본 내용이다.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천황가는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천황가에 배반하는 나쁜 놈,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를 처단한 것으로 기록하고 이왕 나선 김에 개혁 (大化의 改新)을 내세워 무늬만 개혁을 하는척 한다. 개혁이란 예나 지금이나 혁명뒤에 따라다니는 법이다.
이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일본서기 皇極天皇 조에 나와있는데 그 기술이 하도 불친절하여 일류 탐정소설을 읽는 것 같다. 현재까지 어떤 역사학자도 이 무렵의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백인 백색, 오직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맛이나 보고 넘어가자.
서기641년 11월 백제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다. 서기 642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및 같은 어머니가 낳은 누이 - 여자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거기에 유명인 40여명이 섬에 유배되었다. 백제국왕은 “새성 (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저지르니 사자들 편에 귀국하겠다고 하거든 천황이 허락하지 말라”고 전했다. 2월 천황은 교기를 불러 아즈미의 야마시로노 무라지의 집에 살도록 해 주었다. 4월 교기가 종자를 데리고 천황을 배알했다. 소가노 에미시가 우네비의 집으로 교기등을 초대하여 담소한 뒤 많은 선물까지 주었다. 그러나 이 때 새성 (塞城 또는 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5월 교기등을 불러 말타고 하는 활쏘기를 구경시켰다.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5월 24일 교기가 처자를 데리고 쿠다라의 오호이 (지명, 百濟大井)의 집으로 옮겼다. 7월 22일 대좌평 지적등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교기앞에서 씨름을 시켰다. 지적등은 연회가 끝나고 교기의 집까지 가서 문전에서 배웅했다.
죽었다던 지적이 조정의 연회장에 살아 나타나는데 대한 설명이 없다. 백제왕자 교기(翹岐)를 翹企로 쓰면 “긴 줄 후미에서 발 돋움을 하면서 제 차례를 기다린다”는 뜻이 되므로 교기라는 명칭은 많은 함축을 가진 말일 것이다. 그러나 훗날 역사의 전개에 이 이름은 다시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이름들만 나오므로 교기가 훗날의 누구에 해당하는지 알수 없다.
서기 644년 봄 1월,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는 신관(神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임하지 않았다. 그때 카루황자 (輕皇子)도 다리가 아파서 조정에 출사할 수 없었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는 가루황자와 친한 사이였으므로 병 문안을 갔다. 카루황자는 자기의 사랑하는 황비 아헤노 우지를 보내 카마코가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봐 주었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는 공명정대하고 충성심이 강 한 사람이었다 (쿠데타 주체세력이 혁명에 성공한 뒤 기록한 내용임). 그는 황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전횡을 일 삼는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를 제거하고 황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지도력을 가진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차차 나카노 오호에 황자 (中大兄皇子)에게 기울었다. 나카노 오호에황자가 어느 날 法興寺에서 축구를 하다가 신발이 벗겨져 날아갔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카마코가 신발을 줏어와 무릎을 꿇고 나카노 오호에황자 에게 신겨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미나부치 쇼안 (南淵請安)의 학당(學堂)에 함께 다니면서 공자와 주공의 가르침을 강의 받았는데 오고 가는 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소가씨를 섬멸할 방도를 모의하였다. 카마코는 소가씨 일족이면서 소가노 에미시 (蘇我蝦夷, 이루카의 부친), 소가노 이루카에게 비판적인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 (蘇我倉山田石川麻呂)를 한편으로 끌어들여 이시카와마로의 딸과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혼인시켜 결속을 다진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자들이 공물을 바치는 날을 소가노 이루카 암살의 날로 정했다.
혁명 주체세력은 나카노 오호에황자 (中大兄皇子), 카루황자(輕皇子), 나카토미노 카마코 (일명 나카토미 카마타리, 훗날 후지와라 카마타리),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의 4명이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이 일본서기의 이 시점에서 처음 등장하므로 과거에 이들의 아이덴티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쿠데타의 결과로 당시의 권력자 소가노 이루카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皇極天皇은 퇴위되어 현 시코쿠 (四國) 高知市 아사쿠라 (朝倉)신궁에 유폐된다. 그러나 쿠데타의 실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皇極天皇곁에 시립하고 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 615 – 645)였다. 이 사람은 백제 의자왕의 장자로 皇極天皇 다음 천황이 될 신분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 사건후 승려가 되어 목숨을 보전코자 간청하였으나 3개월 뒤 모반죄로 처형된다. 모반자가 누구인지 정말 헷 갈리는 것이 역사이다. 황위 정통 승계권자를 젖히고 방계의 황자가 천황의 자리를 도둑질한 것이 을사의 변의 진상이다.
쿠데타 이후 카루황자가 36대 孝德天皇 (Emperor Kotoku)으로 즉위하고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황태자로 봉한다. 카루황자는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외삼촌이다. 카루황자와,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 齊明은 일본서기에 찌누왕 (茅渟王) 소생으로 되어 있으나 찌누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백제 무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가 훗날의 37대 齊明天皇 (Empress Saimei, 601 – 661)인데 孝德天皇(? – 654)이 죽은 뒤 655년 천황으로 즉위하여 661년 죽었다.
따라서 나카노 오호에황자는 17년간 황태자 신분이면서 실제로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왜 그는 17년간 권력의 실세였으면서도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의 출생의 약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의 역사의 전개는 그가 즉위하지 않은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나카토미노 카마코가 간언하여 즉위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가 일찍 즉위하였다면 백제멸망 이후 당나라에 의해 전쟁범죄자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齊明天皇을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이메이와 코오교쿠를 동일인으로 일본서기를 기록함으로써 시호이외의 이름, 타카라황녀, 타무라황녀, 타메황녀등을 누구로 봐야 하는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름들이 皇極천황의 이름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皇極天皇(Empress Kogyoku, 594 – 661, 비타쯔 천황과 스이코 천황의 딸)과 齊明天皇 (Empress Saimei, 601 – 661, 백제 무왕의 딸 또는 찌누왕의 딸)이 동일인이라고 일본서기는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렇게 되면 황실의 위협이었던 소가노 이루카를 처치하여 황실의 권위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것이 을사의 변이다. 을사의 변으로 천황이 폐위되어 유폐된 일은 없었다고 일본서기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하여 일본황실은 을사의 변을 일으킨 쿠데타 주체세력의 후손들이 맡게 되었고 조상들이 저지른 권력탈취의 수치스련 기록을 황실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서기1948년 부여읍에서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가 발견되었다. 여기 나오는 대좌평 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서기654년 세운 석비로 “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게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옥을 파 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그 높고 자애스런 모습은 신령으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라는 내용이 해독 가능하다. 지적이 나카토미 카마코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교기가 나카토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천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나카토미 카마코 (中臣鎌子)의 이름이 출세함에 따라 나카토미 카마타리 (中臣鎌足)로 또 후지와라 카마타리 (藤原鎌足)로 바뀐다. 후지와라씨(藤原氏)는 일본역사상 최고의 명문명가이면서도 어디서 왔는지 의문에 쌓여있고 후지와라씨의 원조로 알려진 카마타리(鎌足)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게 없다. 그가 백제에서 온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위에서 이미 언급된 누군가일 수 도 있다. 들어갈 수록 미로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일본역사의 재미이다.
야마토의 33대 스이코 천황 (推古天皇, 593 – 628재위)시절 서기 600 – 629년 구주백제왕으로 야마토를 지배하였던 多利思北孤는 백제 아좌태자의 장자였다. 아좌태자는 일본에서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彦人大兄皇子)로 불렸고 敏達天皇의 황자로 기록했다. 스이코 천황은 넷째 딸 타메황녀 (眼田皇女)를 多利思北孤의 황후로 주었다. 수나라 기록에 나온 왕비 계미(鷄彌)이며 훗날의 皇極天皇이다. 그런데 618년 백제의 무왕은 齊明공주를 多利思北孤에게 시집보냈다. 多利思北孤는 무왕의 조카이다. 이 여인이 훗날의 齊明天皇 (601 – 661)이다.
사이메이는 조숙한 편이었던지 시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서기 619년 아야(漢)황자를 출산하였다. 多利思北孤의 자식으로 보기에는 너무 빠른 출산이었다. 일본서기는 타카무쿠왕( 高向王)과의 사이에 아야황자 (漢皇子)을 두었다고 하였으나 타카무쿠왕( 高向王)이 누구인지 파악되지 않는다. 아야황자 (漢皇子)는 多利思北孤 즉 敍命천황의 소생으로 입적되나 왕위계승 서열에서 밀려난다. 이 글에서는 아야황자를 위에 나온 백제왕자 교기로 본다. 혈통상 황위를 넘볼 수 없는 왕자이므로 翹企 (긴 줄 후미에서 발돋움하며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림)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쿠데타에 의지하여 권력을 탈취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多利思北孤의 구주백제 수도는 오오이다 현(大分縣) 나카즈시 (中津市)였으며 수 나라의 사신 배세청이 서기608년 방문했던 왜의 수도란 이 곳을 말한다. 齊明는 서기 618년경 구주백제 수도였던 나카즈시로 시집와서 629년 多利思北孤가 야마토의 敍明天皇으로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이 기간에 齊明은 하시히토황녀 (間人皇女),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 百濟王 善光을 낳았다.
서기 629년 敍明天皇은 왕비 계미(鷄彌) 즉 타메(田眼)황녀 또는 타카라황녀(寶皇女)와 함께 야마토로 떠나고 구주백제는 서기642년까지 齊明이 맡았다. 641년 敍明天皇이 백제 의자왕으로 떠나자 타카라 황후가 皇極天皇으로 즉위한다. 敍明천황의 장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와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가 천황의 최측근이었다.
서기642년 구주백제에서 齊明의 모후가 사망한다. 일본서기 皇極조에서 1월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나온 것이 이것이다. 헌데 그때 齊明의 남동생 카루황자 (輕皇子, 훗날의 孝德天皇)가 정변을 일으켜 구주백제왕이 되고 齊明, 교기를 비롯한 가족 측근 모두를 추방한다. 거기서 쫒겨난 사람들이 야마토로 몰려들어 3년후 을사의 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다. 그때 구주백제왕이었던 카루황자도 정변에 참여하므로서 자동적으로 구주백제가 야마토에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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