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8일 일요일

35. 백제 왕흥사와 일본의 法興寺



2007년 10월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왕흥사적의 목탑기초(심초석)부분에서 서기 577년 (위덕왕 24년) 제작되어 수납된 사리장엄구와 각종의 장식품등을 발굴하였으며, 완전한 모습으로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발표하였다. 왕흥사적목탑은 실재하지않으나 조사결과 가로세로 1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었다. 사리용기에 백제왕의 이름이 각인된 명문이 발견되어 당시 역사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577년 2월 15일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위덕왕의 실명)이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 이 명문에 의하여 왕흥사적의 사리장엄구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 창건되었다는 것,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년경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제시대 왕흥사는 사비성이 있는 부소산에서 봐서 금강 건너편 대안의 울성산(131미터) 산록에 건축되었다. 삼국사기는 왕훙사 창건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왕 2년 (600) 정월 왕흥사 창건착수하여 무왕 35년 (634) 2월 낙성되다. 절은 강변에 붙었고 채색장려하다. 왕은 항상 배에 타고 절에 들어가 분향한다.

현재의 일본 아스까데라(飛鳥寺)는 아스까촌 (明日香村)의 넓지않은 경내에 安居院이라는 조그만 전당과 상처투성이 大佛의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스까데라의 전신인 호꼬지(法興寺)는 당시의 숭불파였던 소가노 우마꼬 (蘇我馬子)가 用明천황 2년 (587)의 발원에 의하여 세워진 소가씨의 사원이다. 소가씨는 587년 배불파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와의 전쟁에 앞서 싸움에 이기면 불사를 건립하겠다고 서원한 바 있어 승전후 아스까의 마가미노 하라 (眞神原)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崇峻天皇 원년 (588) 백제왕에게 法師와 工匠의 파견을 부탁한 바, 백제에서 승려, 사리, 목수, 주물기술자, 기와기술자, 화공이 헌상되었다. 또 여승을 백제에 보내 법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592년 法興寺의 불당과 보곽공사를 시작하다. 593년 推古天皇 원년 탑의 심초에 사리가 안치되고 심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596년 8년만에 아스까데라의 낙성식이 있었다. 아스까데라는 탑을 세개의 금당으로 둘러 싼 일탑삼금당 양식의 가람배치였다. 이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는 四天王寺식이나 法隆寺식과 다른, 유례가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그보다 약 1세기 먼저 조성된 고구려의 금강사(金剛寺) 사지인 청암리 사지와 같은 양식으로 알려져 왔다.

을사의 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나까노 오호애황자와 나까토미 가마타리의 초대면이 이 절에서 이루어졌고, 645년 소가노 이루까를 암살한 혁명군은 이 절에 군영을 설치하고 甘樫丘 (아마까시노 오까)에 웅거하고 있던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까의 부친)를 압박하였다.

2008년 4월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절로 알려진 나라의 아스까데라의 원형은 부여 왕흥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를 내 보냈다. 신문은 와세다 대학의 오호하시 가츠아끼 (大橋一章)교수등 일본연구팀이 금월 초 부여 왕흥사유적지를 조사한 결과 거기서 출토된 기와의 문양과 탑의 구조등이 아스까데라의 유물과 거의 일치함을 밝혔다. 오호하시교수는 두 절이 동일한 기술자에 의해 창건되었다는데 이견이 없다고 말했다. 아스카데라는 일본유일의 1탑3금당식이다. 왕흥사는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연결된 사천왕사식으로 보이나 회랑의 동서에 있는 부속건물이 후일, 아스카데라를 지을 때 금당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함께 연구에 참가한 국학원대학의 鈴木靖民 (스즈끼 야스타미 ) 교수는 아스카데라 창건은 백제왕과 왜왕간의 활발한 교류를 의미하며 역사서에 당시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꼬가 낙성식에서 백제의 의복을 입고 참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이 연재기사를 읽어 온 독자들은 이때 백제와 야마토가 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소가노 우마꼬가 백제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 저자 주)

2008년 11월 중순 동경 국학원대학에서 백제 왕흥사유적 관련 심포지움이 열렸다. 2007년의 발굴조사 결과 일본最古의 사원 아스카데라와 왕흥사의 가람배치에 유사점이 눈에 띄어 연구자를 크게 자극하였다. 지난 반세기동안 아스카데라의 원류는 고구려 평양의 청암리(淸岩里) 사지 (寺址)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움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표되었다. 한국 문화재청의 김용민 발굴조사과장의 보고에 의하면 왕흥사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정림사(定林寺)와 능산리사 (陵山里寺) 두개의 사원에서 금당의 동서로 긴 건물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제까지 탑과 금당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사천왕사식으로 보아왔으나 이로써 왕흥사와 닮은 구조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병호학예원은 “왕흥사만이 특별한 구조를 가진게 아니라 백제에는 사천왕사식과 다른 독자의 가람배치가 있었다”고 한다. 능산리사는 강당의 양 옆구리에도 건물이 부속되는 등 세부는 다르나 백제식이라는 호칭명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2008년 12월 4일 아사히신문 문화면 기사)

여기에서 1탑3금당이니 하는 가람배치 용어가 나오는데 설명이 필요하다. 사찰하면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떠 올리게 되지만 사찰의 기본은 대웅전이 아니라 탑이다. 원래 사찰의 가장 본질적인 경배의 중심은 대웅전 밖에 호젓이 서 있는 탑 구조물이다. 탑(Stupa)이란 인도의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의 무덤을 의미하며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수납했던 곳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 탑(Stupa) 중심구조였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불상중심구조로 변화하므로 탑과 금당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찰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초기 불교에는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의 근본취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아이콘적인 구체형상으로서 부처를 기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의도로 불교에서는 우상숭배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대웅전에 안치된 금빛찬란한 오늘날의 부처님의 형상은 훨신 후대에 대승불교운동과 함께 출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대에 따라 탑과 금당의 배치관계에 변화를 수반하므로 불교사학자들에게 가람의 배치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정림사는 왕궁에서 연장된 대로에 면한 부여의 상징, 능산리사는 왕가의 능묘를 수호하는 절이었다 하며 왕흥사보다 앞 서 서기 567년 지어졌다. 성왕이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한 뒤 성왕의 아들 위덕왕 시절 사비성은 사찰건립의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리라. 요새 말로 하면 백제에서 사비성 천도와 함께 시작된 건설붐이 推古天皇 시대 아스카(飛鳥)의 건설붐으로 이어진다. 이 시대의 백제와 일본관계를 근대국가의 외교관계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 백제 성왕의 장자가 위덕왕 (일본에서 야타노 다마까스노 오호애황자)으로 사비성 사찰건립의 주체였고, 일본의 敏達, 用明, 崇峻, 推古天皇이 위덕왕의 동생들이다. 위덕왕은 부왕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았고 부처님에 의지하여 부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그는 일본의 동생들에게도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도록 독려하고 사찰건립을 지원하였다. 그의 뜻을 받들어 그의 동생들 , 조카들(聖德太子), 손주(敍明天皇)들이 불법을 일으키고(法興), 불법을 융성하게 하고 (法隆), 불법을 널리 퍼뜨린(廣隆) 결과가 호꼬지(法興寺), 호류지(法隆寺), 고류지 (廣隆寺)등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백제 사비성에서 터득한 대형사찰 건축및 불상제작의 노하우는 당시 일본의 사찰을 건립하는데 그데로 전해 졌다. 백제의 첨단 건축기술이 채용된 첫 번째 사례가 아스카데라였다. 아스카데라는 일본에 처음 등장한 기와지붕이었으며 그 기둥이 주춧돌위에 세워진 첫번째 건물이었다. 백제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은 아예 가족을 데리고 거기서 살게 되었으니 일본의 아스까 문화란 백제의 문화인 셈이다.






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34. 부여풍장은 누구일까

서기 665년 9월 23일 당은 백제진장 유덕고(劉德高)와 곽무종(郭務悰)을 일본에 파견했다. 파견원 254명, 7월 24일 쓰시마 도착, 9월 20일 쓰쿠지를 거쳐 9월 22일 표함을 진상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663년 백강의 전투에서 백제-왜의 동맹군을 격파한 뒤 승전의 여세를 몰아 일본에 들어 온 점령군이었다. 이들의 최대의 관심은 백제의 마지막 항전의 구심점이었던 풍장왕의 행방이었다. 백강의 전투중 홀연히 사라져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인물, 부여풍장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범(戰犯)이었다.

敍明 3년 3월 (631년)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 서기의 이 기사는 분명히 엉터리이다. 왜냐하면 631년 백제왕은 무왕이며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므로 631년 백제 의자왕이 야마토의 敍明天皇에게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낼 수는 없다. 왜 이런 기사가 필요하였을까. 이는 역사를 하루하루 일기처럼 기록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100년 후에 역사를 한꺼번에 기록한다면, 기록자는 후일의 일을 미리 알고 현재의 일을 기록하므로 후일을 알기 때문에 일으킬 수 있는 실수이다. 풍장이 백제왕자로 일본에 인질로 있어야만 훗날 어떤 역할을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敍明 7년 (635) 쯔루기 연못 (劍池)에 기이한 연꽃이 피었는데 한 줄기에 두 송이의 꽃이더라 (一莖二花). 한 줄기에 두송이의 꽃이란, 원래는 한 사람인데 두 사람의 역할을 하는 일인이역의 배우같은 것일까.

660년 당 – 신라군이 백제를 멸하자 백제의 잔존세력이 일본에 구원군을 요청하면서 체일중인 왕자풍장을 국주로 맞을 의향을 전해 왔다. 齊明天皇은 661년 (齊明 7년) 1월 6일 九州에 가서 백제부흥군을 진두지휘코자 나니와(難波)를 출항하여 九州를 향하여 서진한다. 1월 8일 오까야마(岡山)시 동남부에 위치한 오호쿠(大伯)에 닿자 오호다황녀 (大田皇女)가 딸을 출산하였으므로 이름을 오호쿠황녀 (大伯皇女)라 지었다. 오호다황녀는 齊明天皇의 손녀이며 황태자 나까노 오호애황자 (中大兄皇子)의 딸이다. 출항한지 이틀만에 출산할 만큼 산월이 가까운 임산부까지 백제원정단에 포함시킨 걸 보면 황실의 구성원은 남녀불문 총 출동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쟁준비로 난리통인 九州의 쓰쿠지(筑紫)에서 오호다황녀 (644 – 667)는 663년 두째, 오호즈황자 (大津皇子)를 출산한다. 오호즈(大津)는 오미(近江)의 오호즈가 아니라 쓰쿠지의 나노 오호즈 (娜大津)이다. 661년 첫째 오호쿠황녀, 663년 두째 오호즈황자를 낳은 것이다. 또 우노노 사라라 황녀 (645 – 703, 훗날의 持統天皇)도 662년 쿠사가베황자를 출산한다. 두 여인이 모두 天智天皇의 딸로 형제간인데 동일한 남편,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의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오호아마황자는 훗날의 天武天皇 (622 – 686)이며 天智天皇 (619 – 671)의 동생이다.

나까노 오호애황자 (훗날의 天智天皇)의 동생 오호아마황자 (훗날의 天武天皇)가 이 아이들의 아버지인데 그 무렵 전혀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백제왕자로 적힌 풍장만 쓰쿠지의 전진기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왕족은 齊明天皇, 나까노 오호애황자, 백제왕자 풍장, 풍장의 숙부 새성 충승 (塞城 忠勝)뿐이다. 새성 충승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새성이란 아명이며 충승이란 어른이 된 뒤 품위를 갖춰 붙인 이름일까? 역사가 명백한 기록을 하고 있지 않지만 충승은 충지(忠志)란 동생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백제 부흥군으로 주유성에 있다가 패전후 항복했다고 당 나라 기록이 전한다. 일본서기에 야마토의 敍明天皇밑으로 기록된 두명의 동생, 中津王 - 多良王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그러면 오호아마황자는 일본서기 어디에 등장할까? 敍明 2년 (630) 敍明의 가족소개에서 大海皇子 (오호아마황자, 훗날의 天武天皇)로 등장한다. 다음은 天武 원년 (672)의 자기소개에서 어릴 적 大海人皇子 (오호아마황자)라 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전부이다. 그것도 첫번에는 大海, 두번째는 大海人이다. 敍明紀, 皇極紀, 孝德紀, 齊明紀의 629년부터 661년까지 형인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대활약을 보인 반면 동생 오호아마황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661년 오호다황녀가 백제원정단의 뱃길에서 오호쿠황녀를 출산했다. 아이 아빠라는 오호아마황자는 어디에도 보이지않고 왕자풍장과 동행한 백제 구원군의 선상에서 생긴 일이다. 662년 우노노 사라라황녀가 다시 오호아마황자의 아들을 낳고, 663년 오호다황녀가 두째 오호즈황자를 출산한다. 주변에 황실의 남자라고는 풍장뿐이다. 오호아마와 풍장 즉 天武와 豊璋은 한 줄기에 핀 두 송이의 연꽃이었다.

631년 백제의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 이 때 풍장뿐 아니라 풍장의 동생 선광 (善光 후일 禪廣, ? – 692)이 함께 야마토의 아버지, 敍明天皇 옆으로 왔다. 둘 다 敍明과 齊明간에 九州의 나까즈에서 태어 난 아들이다. 풍장이 10세, 선광이 6세정도의 나이였으리라. 선광은 정치보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지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백제왕자 신분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당의 유덕고는 그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나 天智天皇이 완강히 저항하여 선광은 승려로 일생을 보냈다.

당과 일본의 전후처리 협의 과정에 오호아마황자는 그 아이덴티티에 의심을 받지 않았다. 인질이었던 백제왕자 풍장은 자국의 전쟁에 가서 행방불명으로 일본은 그 이상은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왕자 풍장과 관련된 사람들은 당의 관리와 대질심문 전에 살해되었으리라. 665년 하시히토 황녀가 죽었는데 667년 2월 어머니인 齊明과 합장하였다. 이 무렵 오호다황녀의 무덤이 곁에 있었다고 하였다. 오호다황녀는 667년 24세로 죽었다.

그 해 3월 수도를 오미(近江)로 옮긴다. 이 때 야마토 지역은 당의 관할지역으로 양도하고 九州에 당의 쓰쿠지 도독부가 설치된다. 일본도 백제처럼 당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은 죽은 사람의 무덤까지 확인했는지 제명천황과 간인황녀의 합장이 이 무렵 이루어진다. 제명천황은 전쟁을 명령한 당사자이므로 시체까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길고 긴 줄다리기 끝에 당과의 전후책임문제가 매듭지어진 후에야 나까노 오호애황자는 천황에 즉위하니 668년 정월이었다.

2008년 12월 13일 토요일

33. 百濟觀音 (Kudara Kannon)

백제관음은 나라현 이까루가쵸의 호류지(法隆寺)가 소장하고 있는 아스까시대의 목조관음보살상이다. “목조관음보살입상 (백제관음) 1구”가 국보로 지정된 정식명칭이다. 길이 210.9 센치의 가늘고 늘씬한 이 불상은 아스까시대 7세기 중반경 제작되었다고 보며 제작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1997년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백제관음의 특별전시가 이루어졌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프랑스의 야마토의 해”및 “야마토의 프랑스의 해”란 취지로 양국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이때 양국의 국보급 미술품 1점씩을 상대국에서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때 야마토에서 “백제관음”, 프랑스에서 우젠느 드라크로와의 대표작 “민중을 인도하는 자유의 여신”이 선택되었다.

백제관음이 루브르 미술관에서 공개되었을 때 불란서에서는 일본의 비너스로 절찬을 받았으며 1개월간 30만이상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 불상은 세계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백제관음은 옆에서 보는 모습도 매우 아름다워서 法隆寺에서는 측면에서도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일본국내最古급의 부처인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의 혼을 흔드는 최고도의 미를 갖추고있다.

이 녹나무(樟木, 쿠스노끼)로 조각된 불상의 출생은 의문에 쌓여있다. 일본의 대표작으로 뽑혀 루브르 미술관에 보낼 정도로 아름다운 이 불상을 두고 일본사람들이 백제 커넥션을 당연히 거부한다. 이름에 백제가 붙어있긴 하지만 당시의 한반도에는 佛師가 구스노끼를 사용한 예가 없고, 아무래도 일본국내에서 만들어진 듯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스까의 도읍지에는 백제관음과 같은 타잎의 가늘고 긴 부처는 발견된 게 없다. 이 정도의 천재적인 불사라면 많은 부처를 만들었을 테고,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부처일까.

문예평론가 가메이 가쓰이치로 (龜井勝一郞)가 야마토 古寺風物誌에 기록한 감상을 보자.
1937년 나라를 처음 방문하여 여늬 부처의 좌상을 봐도 모두 그렇고 그런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거대하면 거대할 수록 그런 느낌은 더 했다. 그러나 입상의 아름다움은 언어를 단절하는 매력으로 나를 압도하였다. 특히나 法隆寺 금당에 우뚝 선 백제관음은 불상에 대한 본인의 편견을 일거에 부셔버리고 말았다. 이 미불의 인도에 의해 나는 일보일보 많은 고불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슴프레한 어둠속에 그 희미한 체구가 불꽃처럼 똑바로 서있는 모습을 본 순간, 관찰보다는 먼저 합장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대지에서 피어오른 영원의 불꽃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상이라기 보다 인간의 탑 – 생명의 불꽃이 생동하고있는 탑이었다. 가슴에도 동체에도 사지에도 사실적인 노출같은 것은 없다. 근육도 물론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달한 피안의 체구(體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라고나 할까.

40여년전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화상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일본을 보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한다면 나는 한점의 미술품을 가지고 나가겠다. 그것은 호류지(法隆寺)의 백제관음보살상이다.” 목조로 된 이 백제관음은 천의(天衣)자락 휘날리는 몸매와 은은한 미소로 세계최고의 걸작조각품으로 꼽힌다.

이 불상이 언제부터 백제관음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옛 기록이 별로 없다. 백제관음은 그 명칭때문에 종전직후 한국정부가 반환요구한 첫번째 문화재였다. 이에 대해 백제관음의 재질인 구스노끼 (樟木, 녹나무, Campho tree)는 일본특산종으로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으므로 백제관음은 한국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 진 불상이라는 주장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녹 나무로 불상을 조각하는 일은 아스까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대부분의 아스카 불상이 녹 나무로 밝혀져 녹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왔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 하게 들리지만 한 반도에 녹 나무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녹 나무는 녹 나무과의 대표적인 수종으로 한 반도의 난대림 즉 상록활엽수림대의 대표적 구성종의 하나이다. 나무전체가 향기를 내며 나무껍질과 뿌리에서 나온 향이 계피향과 비슷하여 옛부터 음식물의 향신료로 쓰였고 고대 이집트 인들은 이 나무의 살균력을 잘 알고 미이라의 방부제로 썼다. 이 나무는 벌레가 생기지 않으므로 가장 이상적인 건축재, 가구, 조각재료로 쓰인다.

호류지 창건당시인 750년 기록에 이 백제관음에 해당하는 불사의 기록이 없고 11세기 후반에 작성된 금당일기에도 백제관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 호류지의 기록에서 백제관음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 훨신 훗날인 겐로쿠(元祿) 11년 (1698) “겐로쿠 호류지 諸堂佛體數量記” 이다. 여기에 “허공장입상, 길이 7척5분”이란 불상높이 기록때문에 백제관음에 해당한다고 추정되고 이것이 백제관음의 존재를 기록한 최고의 문헌으로 본다. 호류지 제당불체수량기는 이 허공장보살을 “백제로부터 도래”라는 글이 보이고 백제관음 대좌 아래에도 허공장 대륜 (虛空藏 臺輪)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로써 백제로부터 도래했다는 기록과 함께 백제관음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 한국측 학자들의 주장이다. 메이지 19년 (1886년) 일본정부가 최초로 호류지의 보물조사를 실시한 조사보고서는 이 불상을 반도에서 온 관음으로 판단하여 "조선풍 관음"으로 기록하였다. 최초의 학자들은 국가적인 편견 없이 학자적인 양심으로 보았으나 후일 국수주의적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호류지 측은 허공장 보살이란 명칭을 원 하였으나 보살상의 보관(寶冠)에 아미타여래의 화불이 조각되어있어 관음보살로 확인되었다.

2008년 12월 6일 토요일

32. 敍明天皇 ( Emperor Jomei)

“오키나가 타라시히 히로누카 천황 (息長足日廣額天皇)은 敏達天皇의 손자이고,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 (彦人大兄皇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누카테히메황녀 (糠手姬皇女)이다. 推古29년 (621) 황태자 토요토미미 (豊聰耳, 성덕태자)가 죽은 뒤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推古36년 (628) 천황이 죽었다”. 일본서기 敍明紀는 이렇게 시작된다.

위의 시호가운데 足日廣이 脩書에 기록된 왜왕 多利思北孤에 해당한다. 敏達(30대 천황), 用明(31), 崇峻(32), 推古(33)로 이어진 형제자매가 60여년간 황위를 즐기는 바람에 한 세대를 건너뛰어 그들의 장손자 敍明天皇이 629년 (당시 36세) 34대 천황이 된다. 백제의 위덕왕이 이들 형제자매 가운데 적장자이며 崇峻을 제외한 모두가 백제 성왕의 아들 딸이다 (崇峻은 欽明의 아들).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 – 敍明天皇 (多利思北孤 훗날의 의자왕) –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로 이어지는 것이 백제왕실 적장자의 명단인데 아좌태자가 598년 부왕 위덕왕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 때문에 백제왕위는 598년 위덕왕 사후 다시 혜왕 –법왕으로 위덕왕의 늙은 형제들이 채웠다. 리스트의 마지막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 615 – 645)는 이런 혈통을 가졌기 때문에 방계황자들의 타겟이 되어 645년 을사의 변 (Isshi Incident)으로 희생된 비운의 황태자였다.

이들의 혈통이 황위에 오르는데 필요한 조건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루히토노 오호에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나카노 오호에황자도 나중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의 딸, 야마토히메를 황후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위에 오르려면 그만큼 혈통이 중요했던 것이다. 야마토히메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황후가 되어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명목상의 부부였을 것이다.

치세 2년 (630) 정월 타카라 황녀 (寶皇女)를 황후로 세워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 가츠라기황자 (葛城皇子)
두째 하시히토 황녀 (間人皇女)
셋째 오호아마황자 (大海皇子)

다음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딸 호테이노 이라츠메 (法提郞女)부인에게서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를 낳았다.

다음 敏達天皇의 딸 타메황녀 (田眼皇女)를 비로 세웠으나 자식의 기록이 없다.

641년 10월 敍明天皇 쿠다라노 미야 (百濟宮)에서 서거. 그때 동궁 히라카스와케 황자(開別皇子)가 16세였다.

위에 인용된 몇줄의 기록은 이 시대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하다.

630년 타카라 황녀를 황후로 세워 2남1녀의 역사상의 인물들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발언은 皇極과 齊明이 처음부터 동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타카라황녀는 敏達의 딸 타메황녀의 다른 이름이며 齊明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630년 황후가 된 것은 皇極이지 齊明이 아니며 皇極은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齊明의 무덤은 奈良市 高市郡 高取町 오찌노 오카노에노 미사사기 (越智崗上陵)이며 황극은 奈良縣 橿原市 고타니고분 (小谷古墳)으로 알려져 있다.

皇極/齊明의 68세 사망설은 皇極의 생년 594년 기준이며 齊明은 601년생으로 61세 사망이 타당하다. 帝王編年記는 齊明의 출생을 601년으로 기록하고있다. 두 사람 다 661년 사망했는데 皇極 594년생, 齊明 601년생이다.

가츠라기황자, 히라카스와케황자, 나카노 오호에황자, 天智天皇은 동일인의 명칭이다. 641년 히라카스와케황자가 16세였다는 기록은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나이를 속이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삽입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를 敍明천황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속이려면 626년생이라는 꼬리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敍明천황의 친아들이라면 이러한 사족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그 시점 동궁(東宮)이었다는 기록도 믿기 어렵다. 지금 공식적인 역사서 모두가 그의 나이를 이 일본서기기록을 근거로 626년생으로 못 박고 있으나 (641-15 = 626)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齊明이 시집올 때 데려 온 아야황자 (漢皇子) 및 교기(翹岐)로 보는 이 글에서는 그의 생년을 619년으로 한다. 天智天皇의 619년 출생설은 一代要記에 적혀있다. 齊明은 619년 天智를 낳고 620년 시집와서 나카즈의 나카즈노미야 (中津宮)에 살면서 622년 오호아마황자를 낳았다. 天武天皇은 65세를 살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622년생이 합당하다. 一代要記, 興福寺略年代記, 神皇正統錄, 本朝皇胤紹運錄이 천무의 622년 출생을 기록하고 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615년생으로 본다. 615년으로 보는 이유는 641년 敍明이 떠날 때 후루히토가 즉위하지 않고 皇極이 즉위한 이유를 그 때 후루히토가 30세가 되지 않아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641년 후루히토가 27세이므로 皇極이 3년 정도 황위에 있다가 후루히토가 30세를 넘으면 황위를 넘겨 줄 계산이었다. 그 시절 백제왕은 대강 40세, 야마토 천황은 30세 정도의 연령 가이드 라인이 있었다고 보인다. 백제 무령왕, 의자왕 모두 40세이후에 즉위하였다. 645년 후루히토가 31세가 되므로 천황으로 즉위할 연령이 되었으나 그 때에 맞춰 을사의 변이 일어난 것이다.

후루히토황자는 敍明天皇의 아들가운데 최연장자이며 어머니가 소가노 우마코의 딸이다. 소가집안은 당시 최고의 실세이며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자였다. 후루히토가 차기 천황이 되리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기 618년 백제 무왕의 딸 齊明이 시집왔을 때 호테이노 이라츠메 히메와 타메황녀는 시집와서 이미 여러 해를 지냈을 것이다. 호테이노 이라츠메와 타메황녀는 박힌 돌, 齊明은 그 당시 굴러 온 돌이 아니었을까. 헌데 서기 619년 齊明이 갑자기 출산하는 일이 발생한다. 갑자기라는 의미는 敍明천황에게 시집온지 열 달이 채 되기 전이라는 뜻이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일본서기에 아야(漢)황자라고 기록되었다. 일본서기는 아이의 아버지를 타카무쿠(高向)왕이라 하였으나 아이덴티티가 파악되지 않는 인물이다.

이렇게 의문속에 태어난 아야황자는 자기보다 4살 많은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 보면서 자랐으리라. 일본서기는 아야황자와의 연관성을 밝히지 않은 채 교기(翹岐)라는 이름을 등장시킨다. 교기(翹岐)라는 이름은 많은 것을 함축하는 의미로 선택된 용어이다. 서기 629년 敍明천황이 야마토의 천황으로 옮길 때 타메황녀(타카라황녀 즉 皇極)와 16세의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함께 아스카노 오카모토노미야 (飛鳥岡本宮)로 따라갔고 齊明과 그 아들들은 九州 오오이다현의 나카즈노미야에 남았다. 큐우슈우에 남아 구주백제왕으로 봉해진 齊明이 야마토의 황후가 되었다는 것은 후대의 창작이다. 敍明이 붕어했다는 641년 27세의 동궁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는 이미 어엿한 어른이었다. 16세의 동궁 히라카스와케 운운 할 처지가 아니었다. 실제 오오이다현의 나카즈에서 성장한 교기는 641년 23세의 청년이었다. 나카노 오호에황자를 626년생으로 만들기 위하여 16세의 동궁 히라카스와케 운운하는 해괴한 기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622년생인 天武가 동생이 아닌 형이 되고 만다.

645년 6월 12일 皇極天皇은 아스카노 이타부키노미야 (飛鳥板蓋宮)의 다이고쿠덴 (大極殿)에 좌정하고 있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가 곁에 시립하고 있었다. 쿠데타의 주모자들은 三韓의 사자들의 조공을 받는 자리에 출석할 소가노 이루카 (蘇我入鹿)의 무장해제를 확인했다. 소가노 이루카가 참석하고 쿠라야마타노 마로가 조서를 낭독하는 사이 나카노 오호에황자의 명에 의하여 궁중의 통행문이 차단되었다. 소가노 이루카가 공격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쓰러지면서 천황을 향해 말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였읍니까?”. 이 광경을 보면서 천황이 나카노 오호에를 향해 “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소리쳤다. “쿠라쯔쿠리 (鞍作, 이루카의 실명)가 황실을 빼앗으려 하였읍니다” 나카노 오호에의 대답이다. 쿠라쯔쿠리가 쓰러지자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가 정신없이 밖에 나와 외쳤다. “카라히토(韓人)들이 쿠라쯔쿠리를 헤쳤다. 억장이 무너진다.” 하고는 내전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당시 구주백제는 백제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야마토 사람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말의 억양만 들어도 구주사람인지 야마토 사람인지 구별할 수 있었으리라. 카라(韓)란 원래 한반도의 마한 진한 변한의 한이므로 반도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 사람을 카라히토 라고 했을 것이다. 카라히토들이 쿠라쯔쿠리를 죽였다는 증언은 구주백제에서 온 교기, 카루황자, 나카토미노 카마코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로부터 3개월 뒤 후루히토노 오호에황자 (古人大兄皇子)도 모반죄로 처형된다.

2남1녀중의 하시히토황녀 (間人皇女)는 나중 孝德天皇(위의 카루황자)의 황비가 되는데 나카노 오호에황자와 연인사이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근친상간의 시대라 하더라도 동부동모형제간의 치정관계는 좀 심하다. 敍明天皇이 나카노 오호에의 친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부동모간의 치정관계).

1997년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 기비이케 (吉備池)제방에서 7세기중반의 거대한 사원 금당터로 보이는 기단이 출토되었다. 금당터는 동서 약 37미터. 남북 약 27미터의 면적이며 서쪽으로 86미터 떨어진 곳에 일변 약 30미터의 탑기단과 회랑, 중문, 승방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기단의 규모로 보아 아쓰카 시대 최고층의 높이 90미터 정도의 탑으로 추정한다. 기비이케 하이지 (吉備池廢寺)로 불리는 이 유적이 敍明天皇 11년 (639년) 조영이 시작된 쿠다라 오호데라 (百濟大寺)가 아닐까하고 단연 주목을 받고있다.

百濟大寺는 최초의 칙원사 (勅願寺) – 國營寺院으로 敍明紀 11년 7월 쿠다라 강(百濟川) 양쪽에 오호미야 (大宮) 및 오호데라 (大寺) 를 건설한다. 구다라 강의 서쪽 주민은 百濟大宮을 짓고 동쪽주민은 百濟大寺를 지었다. 639년 12월 百濟川邊에 구중탑을 세웠다. 640년 10월 百濟宮으로 옮겼다. 641년 10월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일본서기에서 이렇게 붕어한 그는 현해탄을 건너 백제 사비성의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吉備池 廢寺의 발견은 百濟大寺의 소재지를 놓고 논쟁중인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조영시기는 백제대사의 시기와 일치한다. 동시대의 다른 사원을 압도하는 기단의 규모는 국가가 총력을 경주하여 착수한 칙원사에 어울린다. 吉備池 廢寺가 있는 곳은 이와레(磐余)라 불리는 지역이며 5 – 6 세기 야마토 왕권이 궁을 집중적으로 지었던 지역이다. 推古天皇의 豊浦宮 (토요우라노 미야) 부터 飛鳥 (아스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궁을 옮겨가는데, 서명천황이 백제대사와 백제궁을 다시 磐余 (이와레)에 조영하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