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神功 65년(서기 385)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이 죽었다. 왕자인 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인 辰斯 (제16대, 재위 385 – 392)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 (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
삼국사기 진사왕8년(392)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일본서기 應神 3년(서기 385) 백제에서 辰斯王(제 16대, 재위 385 – 392)이 즉위했다. 서기 392년, 카시코키 쿠니(貴國)의 천황에게 禮를 잃었다. 그리하여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하노 스쿠네(石川宿禰), 쯔쿠노 스쿠네(木兎宿禰)를 파견하여 그 외교자세를 따지자 백제의 國人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들은 阿花 (제 17대 아신왕, 재위 392 – 405)를 즉위시키고 귀환하였다.
삼국사기 아신왕4년 (서기 395) 가을 8월 좌장 眞武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이었다. 아신왕6년 (서기397)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일본서기 應神 16년 百濟記에 나오는 기사일까. “ 아화왕 (阿花王, 第17代 阿辛王, 재위 392 – 405)이 카시코키 쿠니 (貴國, 귀수왕의 의미)에 대하여 禮를 잃었다. 그 때문에 영토의 토무타레(枕弥多禮, 현재 전남 해남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 켄난(見南), 시시무(支侵), 코쿠나(谷那)라 하는 東韓의 땅을 잃었다. 그리하여 왕자의 토키(直支) (후의 제18대 腆支王) 을 조정에 파견하여 관계를 수복했다.” 백제 아신왕(372 – 424) - 일본이름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도 대고구려전의 패전 책임으로 서기405년 퇴위되어 일본에 돌아가 서기 424년 사망했다.
삼국사기 아신왕 14년 (서기 405) 9월 왕이 죽었다. 일본서기 應神16년 百濟의 阿花王(第17代 阿辛王, 在位 392 - 405)이 죽었다. 천황은 인질로 와 있던 토키왕 (直支王, 第18代 腆支王, 在位 405年 - 420年) 을 귀국시켜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잃어버린 東韓의 탈환에 협력했다. 여기서 東韓이란 카무라노 사시(甘羅城), 카우난노 사시(高難城), 니리무노 사시(爾林城)를 말 한다.
삼국사기 전지왕(391 – 432) 원년 (서기 405) “전지왕(腆支王) 혹은 직지(直支)라고도 하였다.” 양서(梁書)에는 이름을 영(映)이라고 하였다. 아신(阿莘)의 맏아들이다. 아신이 재위 제3년에 태자로 삼았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攝政]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였다.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혈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전지는 왜인(倭人)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니 아들 구이신(久尔辛)을 낳았다.
삼국사기 전지왕12년 (서기416) 동진(東晉)의 안제(安帝)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명(冊命)하여 사지절(使持節) 도독 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서기 420년 남송의 高祖 劉裕가 황제가 되자 백제왕의 관직을 鎭東將軍에서 鎭東大將軍으로 올렸다. 高祖 劉裕를 우리는 백제의 침류왕이었던 兎道稚郞子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백제와 왜의 외교기사가 이 때 남송에 집중된다고 본다.
일본서기 應神 25년 백제의 直支王(第18代 腆支王, 在位405 – 420) 이 죽었다. 그래서 구이신 (久爾辛, 第19代 久尓辛王, 在位420 - 427)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모쿠만치(木滿致) 가 국정을 행하였다. 그러나 王母 八須부인과 통정하는 등 횡포한 짓이 많았다. 천황이 이를 듣고 그를 소환하였다.
위의 기사에 이어서 일본서기는 “百濟記”를 인용한다. “모쿠만치(木滿致)는 모쿠라콘시(木羅斤資)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여성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 아비의 공적으로 미마나(任那)의 업무를 담당했다. 백제에 온 뒤 카시코키 쿠니(貴國)를 왕래했다. 야마토 조정으로 부터 직제를 받아, 백제의 중책을 맡았다. 권세가 한창일 때 야마토 조정이 그 횡포함을 알고 소환하였다.”
남송 少帝 景平二年 (서기 424) 映이 長史 張威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서기 423년 모쿠만치(木滿致)와 구이신왕이 몰락하고 전지왕이 다시 왕위에 복귀 한 것으로 보인다.
남송 태조 元嘉2년 (서기 425) 황제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에게 장문의 격려의 메세지를 보낸다. 서기 430년 元嘉7년 백제왕 餘毗가 공물을 보내니 餘映에게 주었던 직함을 여비에게 주었다. 毗有왕이 427년 즉위하고 전지왕은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제왕의 길 보다 철학적 사유를 더 사랑했던 사나이였다. 백제 전지왕의 황후 八須부인은 스님같은 제왕보다 신하인 모쿠만치(木滿致)의 매력에 빠졌다.
일본서기 雄略 11년 秋七月 (서기467) 백제국에서 도망해 온 자가 있다. 구이신(貴信)이라 하며 吳나라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기 423년 久尓辛王은 모쿠만치(木滿致)와 八須부인의 몰락과 함께 실각되어 유송으로 피신했다가 467년 일본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실각된 뒤 4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도 이미 노령이었다.
서기420년 죽었다고 기록된 腆支王은 423년경 다시 왕위에 복귀했었고 서기 427년 서자 비유왕(412 – 465)에게 양위하고 奈良 葛城市에 치온지(置恩寺)를 세우고 승려로 살았다.
일본서기 應神39년 백제의 직지왕 (제18대 전지왕)이 그의 누이 시세쯔히메(新齊都媛)를 파견하였다. 서기 427년 新齊都媛은 7명의 여성을 데리고 왔다. 古事記는 反正천황(380 – 438)의 황후를 쯔노노이라쯔메(都怒郞女)라 하고 일본서기는 쯔노히메(津野媛) 라고 기록했다. 백제의 서울여자라는 뜻이다. 모쿠만치(木滿致)와 八須부인 문제는 反正천황이 처리했을 것이다. 反正천황은 유송의 兎道稚郞子의 장남이니 전지왕과 같은 항렬로 사촌간이다. 왜의 5왕 가운데 “讚”이 이 사람이다. 남송의 兎道稚郞子는 고구려 공격으로 부터 야마토를 지키기 위하여 장남 “讚”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그의 이름이 反正천황으로 기록되었다.
腆支王의 “腆支”라는 단어가 역사의 침식을 견디고 錢取塚의 “錢取”로 남아 있다. 葛城市 葛城山의 동쪽 산 기슭, 나라 분지를 내려다 보는 표고 200m의 고지대에 후타쯔카 고분(二塚古墳)이 있다. 보통 제니토리총(錢取塚)으로 불린다.
치온지(置恩寺)는 行基(668 – 749) 開基 전승을 갖는 사원이나 실재는 布施氏(置始氏)의 氏寺로서 奈良시대에서 平安시대초에 걸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문화재의 십일면관음입상은 치온지 관음당의 본존으로 12세기풍의 걸작이다. 나라현 카쯔라기시(葛城市)의 岩橋山(659m) 산록에 위치한 치온지는 無住(Unattended)로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는 조그만 절이지만 여기에 모셔져 있는 藤原시대의 십일면관음입상으로 유명하다.
오오호도왕 (意富富杼王)은 古事記, 上宮記에 전해오는 고분시대의 황족. 오오이라쯔코(大郞子), 오오호도왕 (意富富杼王), 오오호도왕(意富富等王), 오오호도왕(大大迹王)등으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는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應神천황의 아들이며 繼體天皇의 高祖父)이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누이동생, 오시사카 오오나카쯔 히메(忍坂大中姬)는 允恭천황의 황비이며, 다른 누이동생 琴節郞女一名衣通女命가 允恭천황이 말년에 푹 빠졌던 후비이다.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는 백제 阿莘왕의 일본 이름이다.
古事記에는 오오호도왕 (意富富杼王)이 오키나가 사카키미(息長坂君)・酒人君・三国君・筑紫의 메타노키미(米多君)등의 시조로 되어있다. 또 “上宮記” 逸文의 文章系譜 에 의하면 나카시치노 미코토(中斯知命) 황비와의 사이에 오이왕(乎非王)을 낳았고, 오이왕의 손자가 오호도왕(男大迹王 또는 袁本杼王) 즉 繼體천황이다. 이로 인하여 繼體천황이 應神천황의 5대손 임이 밝혀진다.
意富富杼王의”意富”는 “大”의 의미이며 富杼 = 富等로 쓰여진 “호도”는 Buddha(浮屠)의 옛 표현이라고 본다. 백제 腆支王의 일본이름이 큰 부처라는 뜻의 意富富杼이며 그는 불교에 심취하여 제왕의 자리보다 승려를 원 하였다. 그는 왕좌를 버리고 奈良의 치온지(置恩寺)에서 승려로 살았으나 서기 432년 고구려의 允恭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한 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允恭천황은 개인적으로 큰 부처님 意富富杼의 매제가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6년 (서기 397) 여름 5월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以太子腆支爲質.) 그러나 전지왕에게 야마토도, 백제도 모두 자기 집 안방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인질이란 이상한 표현이다. 그것은 다만 삼국사기 편자의 견해일 뿐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에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남하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공격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수 차례에 걸쳐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여 서기 404년경 백제의 아신왕은 맏딸 오시사카노 오오나카쯔 히메(忍坂大中女命)를 고구려에 바쳤다. 그녀는 腆支王 (意富富杼王) 의 친 누이이다. 고구려는 그녀를 고구려의 왕자 高珍의 배필로 삼았는데 고진이 일본을 점령하고 允恭천황이 된 것이다. 백제의 仁德천황, 履中천황 부자가 전사하였고 高珍은 나니와(難波)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다. 妹弟 高珍이 입성한 서기 432년, 奈良에 있는 치온지(置恩寺)의 큰 부처 意富富杼王은 사망했다. 혁명적인 역사의 현장에 있던 황후 오시사카노 오오나카쯔 히메(忍坂大中女命)의 힘으로도 친 오빠 意富富杼王를 살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리하여 백제의 전지왕, 意富富杼王은 葛城市 葛城山의 동쪽 산 기슭, 나라 분지를 내려다 보는 표고 200m의 고지대에 있는 후타쯔카 고분(二塚古墳)에 묻혔다. 보통 제니토리총(錢取塚)으로 불리나 실재로 腆支塚일 것이다. 고분의 동쪽으로 大和 三山 (耳成山, 畝傍山, 天香久山)을 내려다 보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고분의 규모는 전장 60m, 후원부경 36m, 전방부폭 41m로 높이 10m의 전방후원분이다. 1개의 고분에 횡혈식 석실이 3개나 설치된 것이 이 고분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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