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일 토요일

54. 다뉴세문경

다뉴세문경((多(金+丑)細文鏡) 이란 거울 뒷면에 여러 개의 꼭지와 가는 무늬가 있는 구리거울(銅鏡)을 말 한다. 1985년 조사된 후쿠오카 시(福岡市) 요시타케 타카키(吉武高木)유적의 3호 목관묘에서 다뉴세문경이 청동기 무기류와 함께 출토되었다. 요시타케 타카키(吉武高木) 유적은 후쿠오카(福岡)시 서구 사와라(早良)평야에 있다. 이이모리(飯盛)산 산록에 펼쳐진 선상지(扇狀地) 로 한가운데 무로미강(室見川)이 흐르고, 남쪽으로 사가(佐賀)현과 경계를 접하는 背振山系에 연결된다. 강을 내려가면 현해탄이다. 현해탄의 의미는 이곳이 곧 바로 한반도와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일대는 요시타케 유적군으로 알려져 있고 부근에는 야요이(弥生) 후기에서 古墳시대에 걸쳐 大集落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野方遺跡의 주거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다뉴세문경은 거울 뒷면에 2 –3개의 꼭지(金변에丑)가 있고 가는 선의 기하학문양을 가진 조선반도계의 구리거울(銅鏡) 이며 야요이(弥生)시대 中期前半에 열도에 들어왔다고 본다. 조몬시대(繩文時代)까지 일본열도에 금속제의 거울이 대륙에서 들어온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야요이시대에 들어와 최초로 출현하는 동경이 다뉴세문경이다. 이 거울은 조선반도를 중심으로 일부는 랴오닝성과 연해주등 동북아시아의 일부로 퍼져 나갔다. 야요이시대 중기전반이 되면 日本古來의 마가타마(勾玉)등과 함께 부장품으로 출토된다.

킨키지방에는 야요이시대 중기경 동경전파의 제1파로서 다뉴세문경이 들어왔다. 유행은 단기간이었으나 큐유슈우에서 킨키, 다시 중부지방의 나가노 현(長野縣)까지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파되어 현재까지 9점의 다뉴세문경이 출토되었다.

北九州나 야마쿠치(山口)에서는 동검(銅劍), 동모(銅矛), 동과(銅戈)등 3종의 청동기무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는 지역의 지배자들의 부장품이 정형화되어 간 것으로 본다. 다뉴세문경 유행기로부터 50 – 100년후 중국에서 동경이 대량으로 들어오는 야요이 중기후반이 되면 지역의 지배자의 묘에 1개의 동경이 아니라 대량의 동경이 매납되었다. 이는 중국이나 조선반도에 유례가 없는 왜인사회 특유의 현상이며 이 습속은 고분시대까지 계속된다.

고대의 사람들이 銅鏡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였는지 또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물건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얼굴을 보는데 필요하리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쉽게 소유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종교의식을 위한 물건이거나 무병장수나 영혼불멸등의 믿음체계와 관련되었을 수 도 있다 .

다뉴세문경과 중국경은 다소 다른 점이 있다. 꼭지(손잡이)의 수는 전자가 2 – 3개인데 반해 후자는 1개이다. 경면은 전자가 약간 오목하고(凹面) 후자는 평면 또는 약간 볼록면(凸面)이다. 문양은 전자가 기하학문이며 후자는 신선계(神仙界)의 圖文외 다양한 문양을 자랑한다. 명문은 전자에는 없고 후자에는 있는 경우가 많다. 거울의 크기는 양자가 거의 동일하고 형체 또한 원형으로 같다. 다뉴세문경과 비파형동검은 고조선계열의 유물로 중국의 황하문명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양식과 문양 및 전파지역을 가진다. 만주, 한반도, 일본에 국한된 이들 유물의 연구는 극히 중요한 일이나 한국에 동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한국측 검색창에 드러나는 다뉴세문경에 관한 정보는 극히 단조롭고 거의 모두 국보 제141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소장의 다뉴세문경의 기록이다. 청동기 시대의 구리거울로 지름 21.2 센티미터이고 뒷면에 꼭지가 2개가 있으며 내구, 중구, 외구로 3등분하여 각 구에는 사선삼각형문과 대향삼각형문을 동심원식으로 배치하였으며, 외구에는 세로로 엇물리게, 중구에는 가로로 엇물리게 하였고, 내구에는 이를 4구분하여 세로와 가로로 엇물린 것을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이 밖에도 외구에는 동심원 8개를 2개씩 짝지어 상하좌우에 배치하였다.

이리하여 빛의 반사를 변화무쌍하게 연출하게 되니 옛날 사람들이 이를 보고 겁을 먹지 않았겠는가. 위세품으로 당당한 물건일 것이다. 거울의 재료는 주석이 많이 함유된 소위 백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빛이 더욱 잘 반사된다. 다뉴세문경은 북방계 청동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며 여기 사용되는 삼각형문양은 주술에서 재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에서 과학적 보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3D 스캔 데이터를 이용한 기본형상을 조합하여 8개월만에 세문의 도면화에 성공하였다 한다. 그 과정에서 다뉴세문경은 가로 21.2 센티, 세로 21.8센티의 원 속에 새겨진 줄무늬의 갯수는 무려 1만 3천개, 1 mm에 3줄 무늬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현대 첨단 과학기술로도 아직까지 복제품을 만들어내지 못 했을 정도로 정교한 제품임이 증명된 것이다.

1971년 전남 화순군 대곡리 마을에서 우연히 다뉴세문경 2점, 팔주령 2점, 쌍두령 2점,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 와 새기개 등 총 11점이 발견되어 이듬해 국보 제 143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같은 장소를 조사하여 청동검 2점을 더 찾아내었다. 이렇게 하여 2400여년 전 청동기인들이 영원불멸(?)을 기원하며 부장했던 청동기 세트를 모두 찾아 낸 것이다. 이 대곡리 유적은 적석목관묘로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적석목관묘가 기원전 3 – 4 세기쯤 출현하여 기원전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곡리 청동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다뉴세문경과 청동방울이다. 2400여년 전 재정일치 시대의 왕은 제사장이었다. 그는 양손에 든 청동방울을 흔들며 신을 부르고 가슴팍에 단 다뉴세문경으로 태양의 신비로운 빛을 백성들에게 비추어 위세를 과시하였을 것이다. 빛은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이며 이해할 수 없는 신령스러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청동방울 특히 팔주령과 쌍두령은 비슷한 시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로 알려져있다. 팔주령은 방사상의 여덟개 가지 끝에 방울을 만든 형태이다. 오목한 불가사리 모양의 판에 방사상의 돌기가 달리고 그 끝에 각각 둥근 방울이 하나씩 붙어있다. 방울 안에는 청동구슬이 들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난다. 쌍두령은 양끝에 방울이 있고 그 안에 구슬을 넣었다.

대곡리 청동기 사진은 남녀 1조의 퍼포먼스를 암시하고 있다. 큰 거울은 남자용, 작은 거울은 여자용, 팔주령은 남자용, 쌍두령은 여자용, 동검 또한 그런 모습으로 짝지어 질 것이다. 멀고 먼 옛날, 신과 인간의 사이를 연결한다고 믿어졌던 제사장 부부는 이러한 기구를 동원하여 퍼포먼스를 벌리며 조직사회의 운명을 예언하고 조직의 미래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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