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왕이 언제부터 대왕을 칭하였나 하는 문제는 나라의 국력 및 주권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다. 왜냐하면 백제라는 대왕국이 뒤에 버티고 있는 한 일본은 대왕을 칭할 수 없다. 백제의 왕권을 갖는 사람만이 일본에서 대왕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다.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 것은 백제를 대왕국으로 받든 것을 의미한다. 구다라는 한자로 “大王”이라고 쓴다. 그런데 이나리야마 검이나 에다 후나야마 대도에 대왕이란 단어가 나왔다. 이 시절 어떤 일본의 역사서도 직접적으로 대왕이란 호칭을 역사적인 개인에게 사용한 적이 없는데 대왕이란 말이 세번 째로 스다 하치만 신궁의 인물화상경에 나타났으니 놀랄 일이 아닌가.
삼국사기 백제 무왕 37년(서기 636) 3월 왕은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泗沘河)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양쪽 언덕에는 기이한 바위와 돌이 들죽날죽 서 있고, 간간이 기이하고 이상한 화초가 끼어 있어 그림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수행한 자들도 여러차례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곳을 대왕포(大王浦)라 하였다. 그곳을 21세기의 지금 구드레 포구(부여시 구드레 공원)라고 부른다. 구다라란 말은 정확히 대왕이란 말과 대응한다.
2009년 1월20일 익산 미륵사지를 발굴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봉안기를 발굴하여 서기 639년 탑을 만들 때 창건내역을 밝힌 당시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가로 15.5cm, 세로 10.5cm의 금판에 194자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속에 “원 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 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 라고 나온다. 구다라(百濟)는 “대왕폐하”를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스다 하치만 신사의 인물화상경은 청동제로 지름 19.9cm, 근세의 지지류(地誌類)에도 이 거울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주 옛날 출토(?)된 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출토 연대나 출토지는 모른다. 경배(鏡背)는 원형의 꼭지(鈕)를 중심으로, 내구에 고대중국의 전설상의 인물인 동왕부, 서왕모등 9명의 인물이 나타나고, 그 주위에 반원형과 방형으로 되는 문양대, 그 외측에는 톱니문양을, 테두리에 한자 48자로 이루어진
명(銘)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주출하였다.
이 거울의 원경(原鏡=母鏡)에 해당되는 화상경은,
오오사카 부(大阪府) 야오 시(八尾市)의 코오리가와 쿠루마쯔카 (郡川車塚)
고분, 동(同) 후지이데라 시(藤井寺市) 나가모찌야마(長持山) 고분, 쿄우토 부(京都府) 쿄우타나베 시(京田邊市)의 토쯔카 고분, 후쿠이 현(福井縣) 와카사 쵸우(若狹町)의 니시쯔카(西塚) 고분, 토우쿄우 도(東京都) 코마에 시(貃江市) 의 카메즈카(龜塚) 고분등에서, 동형경(同型鏡) 또는 동형경의 자손에 해당하는 거울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견본이 된 거울과 이 거울은 동왕부, 서왕모를
중심으로 그려진 문양이 모두 거꾸로 주조되어 있다. (Wikipedia)
수입한 중국경(中國鏡)을 모형(母型)으로 일본에서 주형(鑄型)을 만들고 그 주형에 의해 주조된 거울을 모경에 대한 동형경(同型鏡)이라 한다. 또 동범경(同范鏡)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한 주물형에서 태어난 형제 거울들을 말한다. 따라서 동형경과 동범경은 다른 뜻을 갖는다.
이 인물화상경은 일본에서 많이 출토된 중국경의 모조품으로 품질이 열악하여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본다. 이 거울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치 시유(高市志友, 1751 – 1823)가 1812년에 편술한 “키이국 명소도회(紀伊國 名所圖會)”라는 서물이다. 저자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 소개하면서 이 거울이 원래 진구우(神功)황후에게 헌상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이 거울을 장기간 보관하여 온 스다 하찌만(隅田八幡)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호무다와케노 미코토(譽田別尊), 타라시 나카쯔 히코노 미코토 (足仲彦尊) 그리고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노 미코토 (息長足姬尊)의 3명, 즉 오우진(應神), 쥬우아이(仲哀), 진구우(神功)이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 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 / 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 / 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
/ 上同二百旱作此竟
사진에 보이듯 거울의 테두리 빙 둘러 48자의 글이 위와 같이 새겨져 있다. 보기 편하도록 10자씩 갈라 놓았다.
거울의 테두리에 48자의 글자가 들어가도록 정확히 설계되었으므로 글자 한자 한자를
빠짐없이 해석해야 된다.
“계미년 8월10일 대왕치세에 男弟王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시마(斯麻)가 장수를 기원하여 개중비직(開中費直)과 예인 금주리(穢人今州利)의 두 사람을 보내 품질 좋은 백동 2백 근을
구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혹자는 “日十大王”을 日十大王이란 왕명이 있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또 혹자는 大왕으로 보지 않고 大를 六으로 보기도 한다. 大를 六으로
본다면 日十大王年은 日十六王年 이 되어 대왕이 사라지게
된다. 十六日이라 표기하지 않고 日十六으로 표기한 것은 16왕년과
16일의 “16”이 중복되어 하나를 생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계미년이 언제인지, 男弟王과 斯麻가 누구인지 밝혀져야 된다. 일본역사에서 男弟王이 등장하는 것은 이곳 뿐이며 男弟王이라는 해독이
오류일 가능성도 있다. 七支刀 銘文 가운데 璽書를 聖音이라고 오독한 것처럼 男弟王이 오독이라면 모든 논의는 여기서 시작되어야 된다.
七支刀 銘文
(表)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暢德興福祖
(裏)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 世子奇生 璽書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에 등장하는
왕명은 男弟王이 아니라
乎鞆王(オトモノオホキミ)이다. 일본 고대사에 鞆라는 글자를 쓰는 왕은 한 사람 뿐이다. 大鞆和気命가 그 사람이다. 銘文에는革과丙으로 분리하여 革만 취한 것이다. 鞆라는 글자의 왼편에 보이는 것이 가죽 革 변이다. 옳은 명문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八月日十六王年 / 乎革(丙)王在意柴沙加宮時 / 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 / 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 / 上同二百旱作此竟
503년 설은, 당시 왜국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갖고 대륙의 문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던 백제 무령왕 (재위 502 – 523)의 이름이 시마왕(斯麻王)이므로 거울의 작자 시마를 무령왕으로 추정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男弟王을 케이타이(繼體) 천황으로 본다. 그러나 케이타이(繼體)는 개로왕(蓋鹵王)의 사생아였지만 시마왕보다 12세 연상이다.
서기 383년 설은 어떨까? 역사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료 부족으로 증명이 안 되니까 그냥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역사이다. 그러면 “서기 383년(16 왕년) 8월 16일 乎鞆王이 옷사카(忍坂)의 궁에 있을 때 시마노 스쿠네(斯麻宿禰)가 장수를 기원하여 開中費直과 穢人今州利를 보내 질 좋은 백동 2백 근을 구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라고 새길 수 있다.
서기 383년은 神功摂政 治世이므로 366년 등장하는 斯摩宿禰가 383년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해석에서 하나의 단서가 나타난다. 서기 383년 왕위에 오른지 16년 째인 왜왕이 있었나? 서기 383년이 16 왕년이라면 368년 왜왕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서기 368년 왜왕을 임명했던 기록은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가미 신궁 (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칠지도(七支刀)의 기록과 맞물린다.
神功紀 年表
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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仲哀天皇が筑紫の橿日の屋敷で亡くなった, 古事記は壬戌年(362)崩御と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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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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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后は筑紫で誉田天皇を生ん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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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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豪族たちは皇后を皇太后(天皇の母)と呼ぶことにした. これを摂政の元年と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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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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誉田別皇子を皇太子(後継ぎ)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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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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斯摩宿禰を卓淳国に派遣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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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倭王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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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奇生 璽書 故爲倭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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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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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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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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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低たちが千熊長彦とともにやって来た. そして七枝刀、七子鏡等様々な宝物を献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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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16倭王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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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年八月日十六王年乎鞆王在意柴沙加宮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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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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枕流〔トムル〕王卽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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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68년 乎鞆王이 왜왕이 되었으나 나이 6세에 불과하여 神功皇后가 이와레(磐余)의 와카사쿠라노미야 (若櫻宮)에서 섭정하였다. 이와레(磐余)의 와카사쿠라노 미야(若櫻宮)는 乎鞆王의 거처인 옷사카(忍坂)궁에서 가까운 곳이다.
神功十三年, 武内宿禰와 太子가 쓰누가(角鹿)(福井県敦賀市)의 케히대신(笥飯大神)을 참배하였다. 거기서 태자는 자기 이름 대신 호무다와케(譽田別)라는 이름을 쓰기로 약속하였다. 태자의 이름은 乎鞆(オトモ)였는데 호무다와케(譽田別)라는 이름을 쓰기로 약속함으로서 역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본래의 호무다와케(譽田別)가 존재하고
태자도 호무다와케가 되었다면 두 사람의 譽田別가 있는 셈이다. 두 사람을 한 사람인
것처럼 神功紀에
기록하였다. 応神天皇(品陀和氣命)와 大鞆和気命(おおともわけのみこと)를 아버지와 아들로 구분해야 神功紀는 이해된다. 品陀和氣命는 神功皇后의 아들이 아니라 남편이었다.
応神天皇에게는 다음과 같은 많은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 胎中天皇과 大鞆和気命는 태자의 이름이다.
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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譽田天皇, 誉田別尊, 胎中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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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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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陀和氣命, 大鞆和気命(おおともわけのみ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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播磨国風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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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太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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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宮記』逸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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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牟都和希王(ほむたわけのみ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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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功皇后(AD 340年代 出生)の夫と御子の名前
AD 32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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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6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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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功十三年 笥飯大神参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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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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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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誉田別 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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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誉田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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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誉田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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貴須王
退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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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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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誉田別 出生
元の名は大鞆和気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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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子の御名は誉田別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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枕流〔トムル〕王卽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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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83年 神功皇后는 태자 乎鞆王(大鞆和気命)을 즉위시키고 父 誉田別命를 야마토로 귀국시킬 계책을 세운다. 神功皇后는 그 즈음 40대 중반의 나이였고 건강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斯麻念長寿라는 문구는 명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神功皇后의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 너무 늦기 전 皇后를 보살펴 달라는 의도로 隅田八幡神社 人物画像鏡을 만들어 백제에 보내 貴須王을 압박하였을 것이다.
AD 384年 神功皇后의 뜻대로
貴須王이 退位하고 枕流〔トムル〕王이 즉위하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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