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제왕을 중심으로 전개되나 때로는 제왕들의 존재감이 별 볼 일 없는 시대가 있다. 서기 484년 飯豊皇女사망 이후부터 서기 531년 안칸(安閑)천황이 즉위하여 제왕의 권위가 회복될 때까지 47년 동안 야마토의 왕권은 안정되지 못하고 쿠데타를 주도한 신하들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 시대 오호토모노 무라지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면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 카나무라 (大伴大連金村)는 언제 어떻게 역사의 별이 되었을까?
4세기 말의 소위 오진(應神)王朝 (河內王朝) 시대까지 오호토모 씨(大伴氏)의 활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50년 후 인교우(允恭)천황 시대 무로야(室屋)가 등장하면서 정계에 大伴氏의 중량감이 느껴진다. 역사상 大伴氏의 실재를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가 처음이다.
인교우(允恭) 11년 (서기 442) 오호토모노 무라지노 무로야 (大伴連室屋), 천황의 명에 의하여 소토오시노 이라쯔메 (衣通郞姬) 를 위하여 후지하라베(藤原部)를 설치하였다. 衣通郞姬 (藤原琴節郞女・弟姬。皇后 忍坂大中姫의 妹) 란 “23. 19대 允恭天皇 그 역사기록의 허상” 에서 거론된 바 있는 마리린 먼로 (Marilyn Monroe, 1926 – 1962)처럼 섹시한 백제의 공주이다. 아신왕의 막내딸로, 서기 427년 전지왕이 反正천황에게 보낸 시세쯔히메(新齊都媛)와 7명의 여성 가운데 衣通郞姬가 끼어 있었다.
일본서기 應神39년 백제의 직지왕 (제18대 전지왕)이 그의 누이 시세쯔히메(新齊都媛)를 파견하였다. 서기 427년 新齊都媛은 7명의 여성을 데리고 왔다. 古事記는 反正천황(380 – 438)의 황후를 쯔노노이라쯔메(都怒郞女)라 하고 일본서기는 쯔노히메(津野媛) 라고 기록했다. 백제의 서울여자라는 뜻이다.
서기 432년 고구려 세력이 야마토를 점령하자 백제계의 反正천황은 북쪽 해안 미야즈(宮津)로 도망가 목숨을 보전하다가 438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衣通郞姬는 윤공천황의 황후 오시사카 오호나카쯔 히메 (忍坂大中姬)의 막내 동생인데 윤공천황이 후비로 들이기를 원 하였다. 忍坂大中姬가 한사코 반대하였으나 천황의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천황은 오우미 국(近江國, 滋賀縣) 사카타(坂田)에서 살고 있던 衣通郞姬을 서울로 불러 들여 궁에 가까운 후지하라(藤原) 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게 하였다.
궁에 가까운 곳에 젊은 애인을 두고 출입이 빈번해 지자 황후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그것도 황후의 친동생이다. 천황은 할 수 없이 궁에서 멀리 떨어진 카와치의 찌누(茅渟, 大阪市남서부)에 새로 집을 지어 衣通郞姬를 살게 하였다. 그 뒤로 천황은 히네노 (日根野, 泉佐野市日根野)에서 사냥을 한다고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천황 9년 춘 2월 찌누방문, 추 8월 찌누 방문, 동 10월 찌누 방문, 10년 춘정월 찌누를 방문했다. 그러자 황후가 “나도 이제 지쳤읍니다. 오토히메 (弟姬)를 질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천황이 자주 찌누를 내왕하면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통촉해 주십시요.” 하고 애원하니 하는 수 없이 출입하는 횟수를 줄일 수 밖에 없었다.
11년 춘 3월 찌누노미야(茅渟宮)에 가니 衣通郞姬가 불평하였다. “언제나 보고 싶지만 당신은 바닷가에 흘러오는 해초처럼 가뭄에 콩 나듯 오십니다.”
이 해(서기 442) 천황은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노 무라지(連)에게 “최근 나는 끝 내주는 여자를 손에 넣었다. 황후의 同母妹 인데 내 가슴을 설레게 해. 후세까지 먹고 살 수 있도록 뭔가 해 주어야 되겠는데….” 그리하여 室屋連가 제안하여 諸國의 미야쯔코(造)들에게 명하여 衣通郞姬를 위하여 후지하라베(藤原部)가 결성되었다. 베(部)란 토지와 노동력을 갖춘 황실의 사유재산을 말한다.
서기 442년 允恭천황이 마음에 꼭 드는 젊은 애인에게 준 선물이 후지하라베(藤原部)였고 오호토모노 무로야 (大伴室屋)에게 이 일을 맡겼다. 은밀하게 이런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황후와는 관련이 전혀 없는 천황쪽 사람일 것이다. 추측컨데 이 사람은 백제계가 아니라 순수한 고구려계의 사람이리라. 추후 야마토 정국의 추이는 백제보다 고구려쪽으로 선회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雄略紀 천황 즉위시(서기 456) 大伴室屋는 物部目과 함께 大連로 임명된다. 또 이 무렵 무로야(室屋)와 그 아들 카타리(談)는 유게이( 靫負) 三千人을 인솔하여 左右衛士府를 맡았다고 한다. 천황의 신변을 경호하는 최측근의 무장집단이다. 雄略 9년、카타리(談)는 키노 오유미(紀小弓)와 함께 신라에 파견되어 전사하고, 小弓은 陣中에서 病死하였다. 이때 천황의 詔에, 大伴卿 (室屋)과 紀卿(小弓)이 같은 나라에 사는 이웃으로 예부터 가까운 사이라고 하였다. 이 언급은 무로야와 오유미가 당시 이웃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만 같은 고구려 출신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雄略二十三年(서기 479), 天皇은 임종 무렵, 室屋등에게 명하여 星川皇子의 反逆을 막고, 皇太子를 도와 천하를 다스리도록 한다. 이때 室屋의 民部 広大하여 나라에 가득하였다한다.
淸寧即位 前紀 (서기 461) 室屋는 야마토노 아야노 쯔카노 아타이(東漢掬直)에게 命하여 호시카와(星川)皇子의 난을 진압한다. 일본서기의 유랴쿠(雄略)와 세이네이(淸寧)천황 재위 기간은 조작되었다.
雄略은 서기 458년 퇴위되어 감금되었고 461년 백제의 곤지가 야마토를 장악한다. 백제 개로왕의 서자 호시카와 (星川)皇子가 곤지의 입성을 거부하였으나 大伴室屋가 곤지를 도와 호시카와(星川)皇子를 불 태워 죽이고 곤지가 淸寧천황으로 즉위하였다. 고구려 세력의 회복을 꿈꾸던 大伴室屋로서는 불가피한 일보 후퇴의 선택이었다.
서기 485년 飯豊皇女에 이어 顯宗천황이 즉위한다. 顯宗천황의 이름은 弘計로 백제 동성왕의 친동생이다. 顯宗천황은 雄略의 손자 나니와노 오노왕(難波小野王)을 황후로 세우고 백제를 등지고 친고구려 정책을 편다.
顯宗 치세 3년,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 (紀生磐宿禰)가 任那와 고구려을 왕래하면서 三韓의 王이 되고자, 官府를 정돈하고 스스로 神聖이라 칭하였다. 任那의 사루(佐魯), 나카타 코우하이( 那奇他甲背) 등이 계략을 써서 백제의 챠쿠마쿠니게 (適莫爾解)를 니린성(爾林城)에서 죽였다. 시토로모로노 사시(帶山城)를 쌓고 東道를 막아 지켰다. 食料를 운반하는 항구를 장악하고 , 軍을 굶주리게 하였다.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 (紀生磐宿禰)는 雄略 9년 병사한 키노 오유미(紀小弓)의 아들이다.
百濟王이 크게 노하여 , 古爾解、나이토우노 마쿠코게(內頭莫古解)등을 보내、兵을 인솔하여 帶山을 공격하였다.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裲)는 軍을 보내 맞아 싸웠다. 위세등등하게 맞서는 적을 추풍낙엽처럼 넘어 뜨렸다. 일당백의 기세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힘이 소진된 듯 任那에서 철수했다. 그리하여 百濟는 佐魯、那奇他甲背등 三百人을 죽였다.
백제의 동성왕과 야마토의 켄죠우(顯宗)천황은 친 형제간이다. 그러나 켄죠우는 백제를 배반하고 친 고구려 정책을 편 것을 보고 동성왕은 격노하였다.
서기 488년 백제의 동성왕은 일본에 돌아 와 배신자 顯宗천황을 응징하고 왕위에 오르니 제 24대 仁賢천황(447 – 498)이다. 그가 왕위에 있던 10 년간 소강상태에 빠졌던 정국은 그의 사망과 더불어 다시 고구려계의 반격이 시작된다. 允恭에서 시작되어 雄略, 顯宗으로 이어진 고구려 인맥은 仁賢천황이 사망하자 서기 4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쿠데타의 주역은 大伴室屋의 손자 大伴金村였다.
武烈即位 前紀(서기 499) 카타리(談)의 아들 카나무라(金村)가 헤구리노 오미노 마토리(平群臣 眞鳥)와 시비(鮪, 志毗) 父子의 乱을 平定하고, 皇太子를 即位시켜, 스스로 大連가 된다. 以後 金村는 半世紀에 걸쳐서 政治的 指導權을 掌握한다. 일본서기는 승자의 편에 서서 헤구리노 마토리(平群臣 眞鳥)가 난을 일으켜 이를 진압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실상은 고구려 세력이 백제세력을 몰아내고 야마토를 장악하고 백제에 대항하였다. 이 쿠데타로 백제는 야마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武烈천황은 이때 나이 10세의 어린이였으며 오호토모노 오호무라지 카나무라 (大伴大連金村)가 전권을 잡았다.
백제 쪽은 모대왕(牟大王)이 서기 501년 백가에게 살해되고 502년 무령왕이 등장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곧 이어 무령왕의 야마토 탈환작전이 전개된다. 야마토의 탈환작전은 “26. 구주백제의 성립”에 나온 데로이다. 서기 504년부터 백제의 九州공격이 시작되자 서기 506년 大伴大連金村는 武烈천황을 살해하고 무령왕의 이복형 오오도왕(男大迹王, 450 – 531)을 繼體천황으로 옹립하여 무늬만 백제계로 바꿔 백제의 공격을 무마코자 하였다. 코시노쿠니(越國) 후쿠이(福井)에 살고 있던 백제 개로왕의 서자 男大迹王은 이때 이미 58세의 노인이었다.
繼體라는 이름 때문에 역사는 이 사람이 이후의 천황들에게 왕통의 피를 이어주는 천황쯤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철저한 일본서기의 위장이다. 천황의 혈통은 繼體가 아니라 무령왕에서 欽明천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繼體 치세 7년(서기 513) 추 8월 26일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 이 기록은 이 보다 100년 또는 200년후에 기록되었을 것인데 왜 백제 무령왕의 태자 순타의 죽음이 일본서기에 기록될 필요가 있었을까?
순타(淳陀)태자는 성명왕의 동생인데, 이때 죽었다는 기록은 이 사람이 야마토에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바로 欽明천황이다. 백제 무령왕의 아들로 성왕의 동생이다. 서기 513년 순타는 3살이었다. 순타는 3세에 백제에서 죽었으니, 아메쿠니 오시하루키 히로니와 (天国押波流岐広庭)天皇, 즉 欽明은 백제와 관련없는 일본출신의 천황이라는 것이 일본서기의 의도이다.
일본에서 혈통을 찾아야 하니 繼體천황 후손으로 호적이 위조된다. 繼體를 이어 즉위하는 安閑, 宣化도 繼體의 자식이 아니라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시 어린 아이였으므로 살아 남은 백제 개로왕의 아들로 무령왕의 동생들이다. 繼體는 大伴大連金村의 괴뢰로 이용되었던 노인이었다. 欽明, 安閑, 宣化를 繼體의 아들로 출산했다는 황후 기록도 모두 위조된 역사의 편린들이다.
継体六年(512年) 金村는 任那四県을 百済에게 割譲하고 代償으로 다음 해 百済가 五経博士를 日本에 보낸다. 任那四県이란 오코시타리(上哆唎), 아로시타리(下哆唎), 사다(娑陀), 무로(牟婁) 의 4현을 말하며 전남 여수, 돌산, 순천, 광양이 다시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513년 백제는 기문(己汶, 전북 남원)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이 해 야마토는 백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구주의 공격자 斯我王을 繼體천황의 황태자로 선언한다. 514년 繼體천황은 기문(남원)과 타사(滯沙, 하동군 고전면)를 백제에게 내 주었다
서기 523년 5월 백제의 무령왕이 사망하고 524년 1월 태자 明이 즉위하여 聖明王이 되었다. 무령왕의 힘에 억눌려있던 야마토는 527년 6월 오미의 게나노 오미(毛野臣)에게 6만의 군사를 주어 남가라(김해)와 훼기탄(김해시 진영읍)을 탈환하여 임나와 합병하려 하였다. 일본역사는 이때 이와이 (磐井)의 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찌쿠지의 이와이(磐井, 475 – 528)는 肥前, 肥後, 豊前, 豊後등과 연합하여 케누노 오미의 작전을 방해하였다. 繼體천황이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麁鹿火)에게 토벌군을 보내면서 “나카도(현 야마구치 현)에서 동쪽은 내가 다스릴테니 찌쿠지국의 서쪽은 임자가 가져도 좋아. 상벌도 임자 마음데로 해. 일일히 보고하지 않아도 돼”라고 하였다.
継体二十一年(527年)筑紫에서 磐井가 反乱을 일으키자 金村는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麁鹿火)를 장군으로 파견하여 다음 해 진압에 성공한다. 磐井는 이 사건 때문에 잠깐 역사에 등장할 뿐으로 그의 내력은 의문에 쌓인 채 남아있다. 전쟁터가 되었던 미이군(三井郡)과 磐井의 무덤이 남아있는 야메시(八女市)는 원래 고구려의 왕자 고진이 九州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땅이다.
528년 11월 11일 치쿠지의 미이노고오리(三井群)에서 처절한 전투끝에 이와이가 참수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백제의 요구가 계속된다.
529년 백제는 가라 다사진(韓多沙津, 하동군 고전면)을 내 놓으라고 요구한다.
일본서기는 繼體천황 마지막 부분을 묘하게 끝맺고 있다. “ 어떤 책에 의하면 천황은 치세 28년 붕어했다고 한다. 그것을 치세 25년붕어로 한 것은 백제본기에 의해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 “치세 25년 3월, 진군하여 안라에 이르러 걸둔성(乞屯城)을 쌓았다. 이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 들리기를 일본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와 맞춰보면 신해년은 치세 25년에 해당한다. 후세에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백제의 무력 시위 앞에서 야마토의 大伴金村는 繼體천황, 황태자, 황자를 모두 죽이고 구주백제군을 야마토에 무혈 입성시킨다. 이 때부터 구주백제의 斯我王이 야마토의 27대 安閑천황 (466 – 535)으로 기록된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 535년 安閑천황이 야마토에서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며 구주백제왕인 사비왕이 야마토로 가서 28대 宣化천황(467 – 539)으로 즉위하고 구주백제왕으로 무령왕의 두째왕자 사귀왕(斯貴王)이 부임한다. 이 사람이 29대 欽明天皇(510 – 571) 이며 백제 聖明王( - 554)의 친 동생이다.
大伴金村는 安閑, 宣化의 시대까지 大連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欽明 一年(540年)金村는 三韓政策의 失敗를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등에게 추궁받아 스미요시(住吉)의 自宅에서 稱病하고 은거한다. 大伴氏의 퇴장과 더불어 역사의 무대에 蘇我氏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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