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일본서기 웅략천황 20년의 기록은 “百濟記”라는 역사서를 인용하고 있는데…. 개로왕 을묘년 겨울에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을 7일낮 7일밤 공격하니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慰禮)를 잃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통해 하남 위례성은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 백제의 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남위례성”이 어디인가를 놓고 학계에서는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어느 역사서에서도 신빙성있는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7년 풍납토성(風納土城)이 발굴되면서 백제연구는 단연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풍납토성의 발굴은 오랫동안 한성백제 (BC18 – AD475)의 왕성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따른 논란을 잠 재울 유력한 후보로 떠 올랐다. 하남위례성의 후보군으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그리고 범위를 더 넓힌 남한산성과 경기하남시 이성산성이 거론된다. 그러나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은 삼국사기에서 설명하는 하남위례성의 특징인 북쪽으로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라는 대목에 위배된다. 또 백제 석촌동 고분유적과 멀리 떨어져 있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중 하나가 하남위례성일 것으로 본다.
이 중 몽촌토성은 풍납토성이 발굴되기 전까지 강력한 하남위례성 후보로 대두되었다. 몽촌토성은 높이 6-7m, 둘레 약 2285m, 전체면적 13만 1634평의 토성으로 한강이 근처에 흐르고 있다. 위치상으로 풍납토성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방사선탄소 측정결과 3세기 중후반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한성백제 멸망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 3만대군에게 7일낮 7일밤만에 북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남성이 무너지면서 그곳에 있던 개로왕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현재의 풍납동과 올림픽 공원으로 겨우 700m 떨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성이 국내성과 환도성처럼, 平時城과 非常城으로 짝을 이루고 있으므로, 백제의 경우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짝을 이룬 성이다. 백제의 첫 수도의 위치가 산성이었다면 이 처럼 완벽하게 1천 5백년동안 사람의 시야를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토성이었으므로 백제가 웅진으로 옮겨간 후 한강변의 위례는 곧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 1500년 동안 사람의 눈에 띄지않고 황무지로 남게 되었다.
국립문회재연구소는 2000년 4월 풍납토성의 유적에서 나온 시료를 통해 방사성탄소 연대측정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풍납토성의 축성시기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일 것이라는 추정연대가 나왔다. 이형구(선문대 고고학과) 교수의 측정결과에 따르면, 풍납토성은 둘레가 약 3.5km, 밑변이 30 – 40m, 높이가 15m, 넓이 약 26만평이다. 이는 현존하는 토성중 국내 최대규모다. 9.9m이상의 토성 성벽으로 둘러싸인 9평방키로 면적의 중국 은나라 수도 유적은 1만여명이 일년에 330일씩 18년이상을 작업해 축조했다. 이를 참고했을 때 풍납토성 정도 규모의 성을 짓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과 안정된 국가체제가 필요하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데로 기원전을 전후해 백제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는 증거가 된다.
1925년 한반도 중부를 강타한 대홍수로 인해 삼국시대 백제의 고도 하남 위례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풍납토성 남쪽 성벽 가까운 곳에서 한개의 항아리가 모양을 드러냈는데 그 속에는 주전자 비슷한 청동초두 2개가 들어 있었다. 주로 신성한 제사 때 쓰인 것으로 고대 귀족 계층에서 사용한 물건이다. 이후 1964년 10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발굴단이 참여해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은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이 토성의 성벽은 版築 (돌을 판판하게 깔고 위에 흙을 다지는 것) 방법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며 한강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현재의 지명을 따라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현재 남아있는 토성은 북벽이 300미터, 동벽이 1500미터, 남벽이 200미터 정도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 197번지 일대 이른바 미래마을은 풍납토성내 서쪽 한강변 쪽으로 서벽에 임한 약 1,652평방미터에 이르는 지역에 2-3층 연립주택이 가득 들어찬 주거지역이다. 재건축 붐이 한창이던 1997년 풍납동 일대 현대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백제왕궁 유적이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풍납토성 내에서 행해지는 건축행위는 문화재 관리법의 적용으로 선발굴 후개발이 적용되고있다. 2000년 5월 16일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을 보존하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훈령이 있은 다음 사적으로 지정 공고되고 미래마을은 이 조치에 따라 발굴하게 되었다. 2006년 미래마을 발굴에서 바닥을 여러 겹으로 다지고, 그 위에 자갈을 깔고, 복판에는 납작한 판석을 깐 도로가 발견되었다. 공방이나 창고 저장 구덩이 등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지역에서 이렇게 정교하고 노폭이 큰 도로가 부설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궁성안의 도로계획의 일단을 알아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시설물이다.
2007년은 1997년 이 일대에서 백제왕궁 유적이 발견된 10주년이 된 해였다. 이 해 6월 8일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국제학술대회을 개최하려던 회의장을 풍납동 주민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태평로 프레스센터로 장소를 옮겨 간신히 보고회 정도로 마치기도 하였다. 2008년 재개된 2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미래마을의 역사적 평가는 크게 높아졌다. 지난 6월에는 미래마을 서쪽의 대형 건물지 안에서 소의 견갑골 (크기 34cm)에 낮은 홈을 파고 불을 지져 점을 쳤던 흔적이 있는 甲骨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 도로와 수십동의 창고 건물지가 발굴되고 창고 안에서는 대형 술독이 발굴되었다. 미래마을 지역은 주거지 창고 공방이 밀집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어서 풍납토성 내 경당유적에서 재개된 발굴에서도 대형 궁궐 건물지와 목조와 석조로 결구한 대형 우물이 발굴됐다.
아직 풍납토성이 완전히 하남위례성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사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을 두고 여전히 많은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발굴된 이후 백제가 기존의 인식보다 더욱 강력한 국력을 가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풍납토성의 규모는 여느 성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역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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