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8일 토요일

49. 신화에서 역사로

神武東征이나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이 어느 때의 일인지 초미의 관심사이지만 명백한 역사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명백한 역사기록이 없으면 역사학자들은 말 하지 않는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 (塩野七生, 1937 -)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 크다. “확실한 사료의 뒷받침이 없으면 다룰 수 없는 학자나 연구자와 달리 우리는 아마추어다. 아마추어는 자유롭게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이 허용된다.”

일본에서 “曲學의 徒”라고 자처하는 아마추어 역사가가 연구하여 발표한 결과를 인용한다. 우리의 관심인 일본의 초기천황들의 몰년기록을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뽑아서 그라프화 한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총체적인 초기천황들의 시대가 드러난다. 그라프를 보면 고사기의 몰년기사의 신뢰성이 증명되며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얼마나 무리하게 초대천황 神武의 기년을 기원전 660년으로 끌어 올리고자 했는지 스스로 드러난다. 다음은 “曲學의 徒”의 글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마지막 글자 記紀를 두 역사서의 호칭으로 쓴다

< 記紀에 보이는天皇崩御年(没年)의 차이>

일본서기는 神武부터 시작하여 天皇 崩御年과 사망시의 연령을 기록하였다. 고사기는 사망시 연령기록 없이 일부 천황에게 붕어년의 간지를 기록하였다. 이 간지로 추측되는 연차와 일본서기의 연차를 비교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천황 붕어년을 그라프에 표시하면 위와 같다. 27대 安閑부근 이후의 붕어년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거의 일치한다. 고사기가 완성된 것이 712년, 일본서기는 720년이라 하므로 그로부터 200여년 전의 安閑부근의 연대는 믿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19대 允恭부근을 경계로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술에 괴리가 나타난다. 적어도 15대 應神이전의 연대는 양쪽 모두 틀렸거나 어느 한쪽이 틀렸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일본서기는 초대 神武이전을 神代, 神武이후를 人代로 하여 人代이후 年次를 기록한다. 神武가 카시하라(橿原)에서 즉위하였다는 辛酉년을 현재의 서력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660년이 된다. 그러나 이 연차를 史實로서 믿을 수 는 없다. 그 이유는 神武이후의 천황의 수명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장수한 것으로 된다. 사실이 확인된 천황으로 부터 세대수를 헤아려 봐도 도저히 神武의 즉위연대를 기원전 660년까지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의 초기연차는 神武의 즉위연차를 의도적으로 옛날로 설정함으로서 전체적으로 연대가 올라갔다고 본다. 메이지의 역사학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에 의하면 이것은 1260년마다의 辛酉의 해에 대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는 중국의 참위(讖緯)사상에 의해 神武의 즉위연대를 짜 맞춘 것이다. 지금은 이 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라프는 19대 允恭부근에서 초대神武의 즉위년이 660년이 되도록 시대를 古代로 끌어 올렸다는 모양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가 기록한 연차로 神武시대의 실재연대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서기도 4세기말이 되면 부분적으로 조선사서의 삼국사기와의 대응을 시도 할 수 있다. 일본서기의 다음 기술은 神功무렵의 실연대와 120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神功五十五年(乙亥255年)百済 肖古王死す(日本書紀)
百済近肖古王死す(三国史記・乙亥375年)

神功六十四年(甲申264年)百済 貴須王死す(日本書紀)              
百済近仇首王死す(三国史記・甲申384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간지는 같으나 일본서기는 간지를 2회 즉 120년 올려 기록했다. 그러므로 이 무렵의 일본서기 연차에 120년 더 하면 실연대가 복원된다. 그러나 고사기의 붕어간지로 재현되는 연대에는 명백한 作爲의 경향을 발견할 수 없다. 아무 기록도 없이 빠져있는 천황이 많은 것이 작위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고사기의 경우 간지만으로 연차를 확정할 수 는 없다. 예를 들면 崇神붕어의 간지, 戊寅을 서력 318년으로 볼 수 도 있고, 258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라프의 경향을 보면 崇神붕어년은 258년보다는 318년쪽이 타당하다고 보인다.

10대 崇神천황의 몰년 서기 318년은 역사적인 사실로 본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12대 景行천황 아들 成務의 몰년 355년과 야마토 타케루의 아들 仲哀의 몰년 362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야마토 타케루가 어느 때 사람이며 그의 東征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야마토 타케루도 경행천황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일단 야마토 타케루가 이 무렵의 인간이란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서기 318년 景行천황의 아들로 기록된 이호키노이리히코노 미코토 (五百木入日子命, 273 – 318), 오호우스노미코토 (大碓命, 295 – 318)와 위의 崇神天皇이 사망한다. 大碓命의 쌍둥이 동생이라는小碓命 (오우스노미코토, 295 – 375) 만 이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318년 崇神과 景行간에 명운을 건 전쟁에서 잃어버린 왕국 백제는 다시 일본열도를 장악한다.야마토 타케루의 동정은 318년 이후 (아마 320년에서 330년 사이) 열도를 확실하게 백제의 관리하에 두기 위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야마토 타케루는 이 작전을 완수한 뒤 백제로 나간다.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그의 아버지는 백제의 비류왕 (304 – 344재위) 이었고 근초고는 346 – 375까지 왕위에 있었다. 야마토란 나라의 성립은 야마토 타케루와 그의 아들 호무다와케 (應神, 320 – 394)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이들 부자의 역사상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여 이를 희석시키기 위하여 등장시킨 것이 神功皇后 (336 – 390)라는 小說이며 이를 통하여 백제의 영향이 없었던 것처럼 역사가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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