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14일 토요일

47. 寶冠弥勒 - 木造 弥勒菩薩 半跏思惟像

京都의 우즈마사(太秦)에 있는 고류지(廣隆寺) 영보전에 미륵보살반가상 (弥勒菩薩半跏思惟像) 이라 불리는 赤松으로 만든 불상이 있다. 일본의 미륵보살 가운데 가장 오래 된 7세기초의 작품으로 보나 제작자와 제작과정에 관한 기록은 없다. 상은 높이 84.2 센티, 총 높이 123.3 센티로 한 개의 적송 통나무로 만든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그 스타일은 중국의 북위의 불상에 보이는 양식을 답습한 것이며, 의자에 앉아, 어떻게 중생을 구제할까를 보살님이 사유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표정은 한 없이 부드럽고 아늑하다." 라고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1833 – 1969)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격조 높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 불상은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그러니 한일 양국간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 하였다. "나는 고대 그리스 제신들의 彫像도 보았고, 로마시대 만든 유명한 조각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 십년에 걸친 철학자의 생애에서 이 만큼 인간실존의 진실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갖는 마음 속의 평화의 이상을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서기 推古11년과 31년 성덕태자가 하다노 가와까쓰(秦河勝)에게 불상을 하사하여 하치오까데라 (蜂岡寺)를 건립하고, 그 후 신라에서 보내 온 불상을 고류지에 안치했다는 기사가 있어서 이 불상이 신라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무로마치(室町)시대 편찬된 고류지유래기에 백제의 불상이 성덕태자에게 헌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류지 불상이 백제에서 만든 것이라는 학설의 근거가 되었다. 이를 종합하여 한국측 주장은 7세기 신라에서 불상이 제작되어 일본에 건너갔다. 그 근거는 재목의 종류와 제작방법, 관련기록등이다. 일본의 목조불상의 대부분이 구스노끼인데 반하여 이 반가상은 당시 신라에 많이 자생하고 있던 적송이라는 점. 일본의 목조불상 대부분이 몇개의 토막으로 만들어 조립한 것인데 이 불상은 한 개의 통나무를 깎이 만들어 일본양식과 다르다는 점등이 한국측 주장의 요지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적송은 한국에만 있는게 아니고 일본에도 있음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목조불상이 한국 국내에 남은 게 전무한 상황에서, 즉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서, 재질과 제작방법이 일본의 방식과 다르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신라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적송으로 만든 불상은 일본에 다른 예가 없다. 그러나 조선반도에는 적송제를 포함, 882년 이전의 목제불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비교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일본의 일반적 양식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조선반도제라고 결론지을 수 는 없다. 일본서기에 신라인이 7세기에 불상일체를 고류지에 모시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나 증거로 되지 않은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불상이 곧 이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 고류지는 창건이래 무수한 불상을 보유해 왔으며, 또한 여러 번의 화재와 전란으로 불상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신라의 금동미륵보살상과 닮았다고 하는 것도 증거로 볼 수 없다. 불상은 양식을 답습하여 만드는 것으로,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고류지 영보전에 또 하나의 일본국보인 머리에 상투를 튼 모습의 “보계반가상”이 있다. 보계반가상은 높이 66.4 센티로 한개의 통짜베기 녹 나무로 제작한 것인데 신라에서 헌상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의 추고 31년(623) 신라에서 보내 온 불상이라고 생각된다. 상투를 높이 틀어 올려서 보관을 쓰지 못하여 “보계미륵” 또는 “우는 미륵”으로 불린다. “미륵보살반가상”은 한사코 일본에서 만든 것으로 우기면서도 보계미륵은 녹 나무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신라에서 온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한편으로 기특하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2층 불교조각실에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안치되어 있다. 6세기말에서 7세기초 작품으로 보는데, 신라의 작품인지 백제의 것인지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웬 일인지 한국의 이 금동미륵상이 일본의 목조미륵상과 너무 유사하여 양국 국민들을 놀라게 한다. 1976년 한국미술오천년전이 일본에서 열려 이 불상이 일본국민에게 소개되었을 때 자기들의 국보와 너무 흡사한 모습을 보고 충격적으로 받아 들였다. 고류지의 반가사유상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은 그 크기와 양식과 표현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일하다.

2008년 10월 10일 연합뉴스 "한국 문화예술을 유럽지역에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한국페스티벌이 9일 오후 (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보자르예술센터(CFA)에서 개막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올리버 샤스텔 벨기에 외무담당 국무상,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 비스카운트 에티엔느 다비뇽 CFA회장등 양국관계자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을 가진 한국 페스티벌은 부처의 미소 (Smile of Buddha, 1600 Years of Buddhist Art in Korea)라는 주제로 국보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비롯한 국보 4점등을 전시하는 한국불교미술 특별전시회를 시작으로 하여 내년 2월까지 진행된다."


국보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金銅弥勒菩薩半跏像) 은 국보제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함께 국내 최대의 금동반가상이다.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서 삼산관반가사유상 (三山冠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미술품으로 이번이 7번째 “해외 나들이”라 한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도 하고, 일제 때 밀반출 되었다고도 하여 출토지가 불분명하여 제작지를 알 수 없으나 국보제 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함께 삼국시대 불상중에서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으로서 높이가 93.5센티로 제일 크고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 코, 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기술을 보여준다.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반가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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