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일 수요일

86. 이와이의 난(磐井の乱)을 보는 새로운 시각



서기 536년 센카(宣化, 467 – 539)가 야마토의 왕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타케 오히로쿠니 오시타테 (武小広国排盾)이며 안칸(安閑)의 친 동생이다. 그는 70세의 고령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 해 2월 전과 같이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를 오호 무라지(大連),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粗鹿火)를 오호 무라지(大連)로 하고,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를 오호오미(大臣)로 임명하였다.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라는 인물이 일본서기에 처음 등장한다. 그것도 구시대의 거물 정치인 오호토모 카나무라 (大伴金村),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粗鹿火)와 나란히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라는 정치신인이 오호오미(大臣)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10년 간 그와 그의 후손들이 야마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나메(稻目)는 킨메이(欽明, 510 – 571)천황과 비슷한 연배로 동시대를 살았으므로 오호오미(大臣)로 전격 발탁된 것은 그의 나이 30세 무렵이다. 그러나 그의 어버지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왜 무명의 인사가 갑자기 오호오미가 되었는지, 일본서기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일본의 학계에서도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의 계보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그것을 입증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의 타케시우찌(武内宿禰)의 아들 가운데 소가노 이시카와 (蘇我石川宿禰)가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타케시우찌(武内宿禰)의 후손으로 처리하고 싶어 하지만 연대가 맞지 않는다.

서기 536년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506 -570)가 오호오미(大臣)가 된 다음 이 가문(蘇我氏)은 야마토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대를 이어 천황에게 봉사하였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1– 626),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586– 645),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 610 – 645)로 대를 이어 왔으나 서기 645년 나카노오호에(中大兄) 황자가 정변을 일으켜 궁중에서 소가노 이루카를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함으로서 소가(蘇我) 가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였다.

서기 536년 센카(宣化)의 등극과 더불어 그 때까지 무명이었던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가 어떻게 오호오미(大臣)가 되어 야마토의 국정을 주도하는 권력을 갖게 되었을까?

일본서기가 기록한 역사의 단편들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전후좌우의 상관관계는 밝히지 않고 천황가의 이데올로기를 확보하는 선에서 적당히 소설을 쓴 것이 일본서기의 본질이다.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라는 인명자체가 당대에 사용되던 실명이 아니며 후대의 역사가들이 지어낸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소가가문을 이어 온 4 사람의 이름은 모두 역사가들이 붙인 가명일 것이다.

케이타이(繼體, 450 – 531)천황 시대에 이와이(磐井)의 난(乱)이 일어났다. 이와이(磐井)라는 이름은 전후좌우의 설명도 없이 한 번의 사건에 나올 뿐이다. 따라서 일본서기를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이와이(磐井)란 이름 역시 가명이며 일본서기가 기록한 사건의 맥락은 소설일 뿐 진실은 따로 존재한다. 그 시대 등장하는 또 한 사람 오우미노 케나노 오미(近江毛野臣)도 가명이며 당대의 실명이 아니다.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라고 보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일본서기는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천황제라는 종교를 위해 쓰여진 경전(經典)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후좌우 맥락을 잃고 홀로 떠도는 역사의 파편으로 존재하므로 문자자료에 얽매어 역사를 보려고 하면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

단편적인 역사의 파편들을 퍼즐처럼 맞추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파편들이 필요하다.

부레쯔(武烈) 6년(서기 504) 10월 쿠다라(百済)가 마나키시(麻那君)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천황은 쿠다라가 얼마 동안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이 수상하여 사자를 붙잡아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붙잡아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열도에 머물러 일생을 보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마나키시(麻那君)를 백제의 특사라고 기록했지만 그는 큐유슈우를 장악하고 야마토의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에게 야마토를 백제의 무령왕에게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일본서기는 이와이(磐井)라는 이름을 빌어 야마토의 천황에게 반란을 일으킨 지방호족 정도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기가 단편적이나마 이런 기사를 남겼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부레쯔(武烈) 7년(서기 505) 4월 쿠다라의 왕이 시가키시(斯我君)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그리고 특별한 문서를 제출하였는데 “이전에 파견한 마나키시(麻那君)는 백제국의 왕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새로 시가키시(斯我君)를 파견하여 삼가 봉사하도록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시가키시(斯我君)가 낳은 아들이 호후시키시(法師君)이며 야마토노 키미(倭君)의 조선(祖先)이다.

마나키시(麻那君)를 보낸지 1년 후 백제는 시가키시(斯我君)라는 왕족을 열도에 보냈다. 마나키시가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시가키시(斯我君)는 그를 배경으로 야마토를 압박하였다. 사태의 전개를 보면 케이타이(繼體)천황을 처단하고 왕이 되는 안칸(安閑)천황이 바로 시가키시(斯我君)이다. 그리고 불교 색채를 풍기는 호후시키시(法師君)란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가 열도에 들어 와 사용한 이름이다. 그가 바로 킨메이(欽明)천황이다. 케이타이(繼體) 7년(서기 513) 8월 백제의 태자 순타가 죽었다(百済太子淳陀薨)는 일본서기 기사는 또 하나의 역사의 파편이다.

일본서기 기록과 역사적 진실과의 괴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쿠다라(百済)의 마나키시(麻那君)에 대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마나키시(麻那君)라는 실명 대신 이와이(磐井)라는 가명을 쓰고 있다.

케이타이(繼體) 21년(서기 527) 6월 오우미(近江)의 케나노오미(毛野臣)가 6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임나(任那)에 가서 신라에게 패망한 남가라(南加羅), 토쿠코톤(喙己呑)을 탈환하여 다시 임나와 병합하려고 하였다. 이때 쯔쿠지(筑紫) 쿠니노 미야스코(国造) 이와이(磐井)가 은밀하게 반역을 도모하고 꾸물꾸물 세월을 보내며 일의 어려움을 겁내 틈을 엿보고 있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이와이에게 뇌물을 보내 케나노오미의 군대를 방해하도록 권하였다.

그에 편승한 이와이는 히젠(肥前), 히고(肥後), 부젠(豊前), 붕고(豊後)등을 억눌러 직무를 하지 않도록 하고 밖으로 해로를 차단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등의 나라에서 공물을 운반하는 배를 속여 빼앗고 안으로 임나에 파견된 케나노오미의 군대를 차단하고 케나노오미에게 항의하였다. “지금 너는 조정의 사자인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동료로 살을 비비며 같은 솥의 밥을 먹던 사이다. 사자가 되었다고 하여 네가 나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복종하지 않고 교전을 마다하지 않은 채 기세 등등하였다.

서기 527년 8월 천황의 조칙이 내렸다.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는 가서 이와이(磐井)를 토벌하라. 나가토(長門, 関門海峡) 동쪽은 내가 다스리지만 찌쿠지 서쪽은 네가 통치하고 상벌도 네 맘데로 해도 좋다. 일일히 보고하지 않아도 좋다.”
서기 528년 11월 대장군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는 적의 수령 이와이(磐井)와 찌쿠지(筑紫)의 미이노코오리 (三井群)에서 교전하였다. 양군의 깃발과 북이 상대하고 군세가 일으키는 먼지가 뒤섞여 서로 승기를 잡으려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드디어 아라카히(麁鹿火)가 이와이(磐井)를 베고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12월 찌쿠지노 키미(筑紫君) 쿠즈코(葛子)는 부친 이와이(磐井)의 죄에 연좌되어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카스야(糟屋)의 미야케(屯倉)를 헌상하고 죽음을 면해 주도록 청원하였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이와이(磐井)의 난 평정기사는 케이타이(繼體)의 야마토군과 백제군의 전쟁을 묘사하였다.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物部麁鹿火)와 백제의 장군 마나키시(麻那君)가 명운을 걸고 큐우슈우의 미이노 코오리 (三井群)에서 마주쳤다. 일본서기는 아라카히의 승리로 이 전쟁을 기록하였지만 아라카히가 그 후 큐우슈우를 다스렸다는 흔적은 없다. 오히려 이 전쟁으로 야마토의 주력군이 야마토를 비운 사이 시가키시(斯我君)가 이끄는 백제군이 야마토를 접수하고 케이타이(繼體) 천황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천황과 황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지만 일본서기는 시치미를 떼고 승자 시가키시(斯我君, 466 – 536)가 케이타이(繼體, 450 – 531)의 아들이라고 계보를 조작해 버렸다.

큐우슈우의 이와이(磐井)가 전사하고 야마토(倭)의 주인이 바뀌었다. 백제가 다시 야마토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 전란을 통하여 백제의 국익에 가장 공헌한 사람은 누구일까? 시가키시(斯我君)는 왕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왕위에 올라 안칸(安閑)천황이 되고 기득권 층의 재산을 몰수하여 열도의 방방곡곡에 미야케(屯倉)를 설치하였다(참조: 79.  현해탄은 알고 있다). 백제의 장군 마나키시(麻那君)는 전사하였으나 일본서기는 지나치듯 조그만 단서를 남겨 두었다.

“찌쿠지노 키미(筑紫君) 쿠즈코(葛子)는 부친 이와이(磐井)의 죄에 연좌되어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카스야(糟屋, 현 福岡県 糟屋郡)의 미야케(屯倉)를 헌상하고 죽음을 면해 주도록 청원하였다. “

이것이 바로 일본서기 저자들이 그나마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남겨 둔 단서이다. 마나키시(麻那君)가 아들을 남겼다는 내용이다. 찌쿠지노 키미(筑紫君) 쿠즈코(葛子)도 가명일 터이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야마토의 개국공신으로서 오호오미(大臣)로 등용된 것이 서기 536년이며 그의 나이 30세 무렵이다. 일본서기는 그에게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라는 이름표를 붙여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나게 하였다. 이와이(磐井)와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부자지간이다.

주: 일본서기 기사는 단편적이고 모호하여 역사적 맥락이 이해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주목하지 않으면 일본서기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케이타이(繼體) 시대의 애매모호한 일부분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한 것입니다. 개인적 소견이므로 반론이 있을 수 있읍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