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1일 토요일

48. 倭建命의 東征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신화로 기록된 야마토 타케루의 행적을 찾아 신화의 내용을 살펴 본다. 앞에서 소개 된 (2. 야마토 타케루) 의 신화편에 해당된다. 야마토 타케루는 천황으로 기록되지 않고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12대 景行天皇( Emperor Keiko) 기사에 景行천황의 아들이라면서 야마토 타케루의 기록을 함께 취급하였는데 주로 야마토 타케루에게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분량이 방대하여 이번에는 신화의 내용만을 발췌하고 역사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은 다음 기회에 다룰 것이다.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神話는 야마토 조정 (大和朝廷)의 東國에의 세력확대를 상징하는 4세기경의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이야기이다. 고사기가 和銅5년 (712), 일본서기가 養老4년 (720) 편찬될 때 야마토 타케루 전승은 그 때보다 400년전 옛날의 이야기로, 야마토(大和)측의 視野로 씌여져, 모두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를 보고 당시의 정세를 추측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야마토 타케루는 12대 景行天皇(Emperor Keiko)의 아들로 천황의 명에 의하여 南九州의 구마소 타케루(熊曾建)와 이즈모(出雲)의 이즈모 타케루(出雲建)를 정벌하는 西征을 완수한 뒤, 아즈마노쿠니 (東國)의 에미시(蝦夷)정복의 東征을 떠난다. 야마토 타케루는 고사기에서 倭建命(야마토 타케루노미코토), 일본서기는 日本武尊(야마토 타케루노미코토) 라는 서로 다른 한자를 쓰고있다.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路는 고사시와 일본서기가 약간 다르며, 일본서기 쪽이 미치노쿠(陸奧), 히타카미(日高見)등 보다 북쪽까지 진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東征路는 다음과 같다.

고사기: 야마토(倭) – 이세(伊勢) – 오와리(尾張) – 스루가(駿河) – 사가미 하시리미즈(相模 走水) – 카미쯔후사 (上總) – 히타치 니이바리 (常陸新治) – 쯔쿠바(筑波) – 사가미 아시가라 (相模足柄) – 가이(甲斐) – 시나노(科野) – 오와리(尾張) – 오미 이부키야마(近江 伊吹山) – 이세 노보노 (伊勢 能煩野)


일본서기: 야마토(倭) -이세(伊勢) -스루가(駿河) -사가미 하시리미즈(相模 走水) -카미쯔후사 (上總) – 미치노쿠(陸奧) – 히타카미(日高見) -히타치 니이바리 (常陸新治) -쯔쿠바(筑波) -가이(甲斐) – 무사시(武藏) – 카미쯔케노(上野) – 우스이사카 (碓日坂) – 시나노(信濃) -오와리(尾張) -오미 이부키야마(近江 伊吹山) – 이세 노보노 (伊勢 能煩野)

한반도의 문명의 빛은 한반도에 가까운 큐우슈유와 이즈모에 먼저 들어와 2 – 3세기 현재의 킨키(近畿)지방에 야마토라는 정권이 형성된다. 그러나 일본의 혼슈우(本州)는 지리적으로 문명의 소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을 가지고 있으니, 혼슈우의 한 가운데 동서를 가로 막고 있는 쥬우부(中部) 지방의 산악지대이다.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히타(飛驒)산맥, 키소(木曾)산맥, 아까이시(赤石)산맥이 모두 이곳에 있다. 중국의 정사 구당서의 일본전에 “일본의 북과 동의 끝에 大山 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大山이란 일본의 알프스를 뜻하는 것이다.

일본의 알프스는 토오쿄오 지역과 오오사까 지역을 가로막는 니이카타 현, 나가노 현, 기후 현, 시즈오까 현 등을 포함하는 산악지대이다. 이 산악을 중심으로 하여 토오쿄오 지역을 칸토오(關東), 오오사까 지역을 칸사이(關西) 또는 킨키(近畿) 지방이라 한다. 쥬우부지방의 거대한 산악지대는 천연적인 장벽이 되어 킨키와 칸토오지방의 문명의 교류를 차단하여 일본의 동북부 지역은 역사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야마토 타케루의 東征이란 이 장벽을 넘어 칸토오 지방과, 보다 북부의 토오호쿠(東北) 지방에 문명을 소통시키고자 하는 야마토 조정의 의지의 산물이다. 문명의 소통을 다른 말로 하면 야마토의 권위의 인정 아니면 정벌이 되는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씌여지고 있던 8세기 초에도 야마토의 동정은 계속되고 있었고 712년과 720년의 동정진출에 출입이 있는 것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720년에는 712년 때보다 더 북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마토 타케루의 동정진출 기사는 먼저 씌여진 고사기가 더 사실에 가깝다.

이세(伊勢), 오와리(尾張), 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가이(甲斐), 이즈(伊豆), 사가미(相模), 무사시(武藏), 후사(總), 히타치(常陸), 미치노쿠(陸奧) 의 아즈마노쿠니 (東國) 12개국이 야마토 大王의 명에 따르도록 정벌하는 것이 야마토 타케루의 임무였다. 출발 전 그는 이세의 대신궁을 참배하고 숙모 야마토히메(倭比賣)에게 인사를 드린다. 숙모는 떠나는 그에게 스사노오노미코토 (須佐之男命)가 이즈모에서 처치한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의 꼬리에서 나온 것을 아마테라스오호미카미 (天照大神)에게 헌상하였던 아메노무라쿠모(天叢雲)의 劍과 필요할 때 열어 보라면서 주머니를 한개 주었다.

오와리(尾張)에 들러 호족의 딸 미야즈히메(美夜受比賣, 宮簀媛)를 만나 東國을 평정한 뒤 혼인하자는 약속을 한다. 미야스히메의 오빠 타케이나다네노미코토 (建稻種命)가 오와리의 수군을 이끌고 副將軍으로 동국평정에 합류한다. 고사기에 미스키토모미미타케히코 (御鋤友耳建日子), 일본서기에 기비노타케히코(吉備武彦)로 나오는데 이 전쟁에서 귀로상의 바다에서 사망하였다. 나고야의 아쯔타(熱田) 신궁에서 모시는 신 가운데 하나이다.

오와리의 카야쯔(萱津) 神社에 들른 뒤 오토타치바나히메(弟橘比賣) 가 합류하여 함께 사가미(相模)국에 이른다. 야마토 타케루는 사가미국의 쿠니노미야쯔코(國造)로부터 “이 곳에는 커다란 못(沼)이 있는데 그 곳에 너무나 다루기 힘 든 자가 살고 있읍니다” 라는 말을 듣고 그 자를 보기 위하여 들판으로 나갔다. 기회를 보던 사가미의 쿠니노미야쯔코는 들판에 불을 붙이니 삽시간에 야마토 타케루 일행은 火攻의 불길에 쌓인다. 속은 것을 안 야마토 타케루가 야마토히메가 준 주머니를 열어보니 부싯돌이 들어 있었다. 아메노무라쿠모의 보검으로 주위의 풀을 제거하고 접근해 오는 화염 쪽으로 맞불을 놓자 천우신조로 바람의 방향까지 우호적으로 바뀐다. 위험에서 빠져나온 야마토 타케루는 배신자를 처단하고 불 속에 던져버린다. 현 시즈오까 현의 야키즈시(燒津市)는 여기서 연유하는 도시이다. 이 일이 있고부터 아메노무라쿠모노 쯔루기(劍)는 쿠사나기(草薙)노 쯔루기라고도 불리게 된다. 풀을 벤 칼이라는 뜻이다. 이 보검은 현재 아쯔타 신궁 (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다.

사가미에서 더욱 동진하여 하시리미즈노우미(走水海)에 이르렀는데 현재의 우라가 수도(浦賀水道)이다. 현 요꼬스카에서 바다를 건너 지바현의 보오소오 반도(房總半島)로 갈 때 그 해협의 신이 노하여 큰 파도를 일으켜 배가 추풍낙엽처럼 딩굴며 나아 갈 수 없었다. 이때 오토타치바나 히메가 “내가 제물이 되어 신의 노여움을 풀겠읍니다. 황자께서는 東征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천황에게 보고해야 되는 존귀하신 분입니다. 사네사시 사가미 벌판의 불 속에서 나를 구해 주신 은혜를 어찌 갚겠나이까 ”. 오토타치바나히메가 바다에 빠지자 해신의 노여움이 풀려 야마토 타케루 일행은 바다를 건너 카즈사 (上總, 千葉縣)에 상륙한다. 그로부터 7일 후 오토타치바나히메의 머리 빗이 해안에 흘러 왔으므로 빗을 수습하여 오토타치바나히메의 미하카 (御陵)를 만들고 그 안에 매장했다.


야마토 타케루는 카즈사(上總)에서부터 奧地에 이르기까지 멋 모르고 날뛰는 에미시(蝦夷)들을 복종시키고, 이곳 저곳의 거친 귀신들을 평정한 후 귀로에 오른다. 아시가라 도우게 고개 (足柄峙) 에 이르러 乾飯을 먹는 중 그 고개의 귀신이 하얀 사슴으로 변하여 공격해 왔다. 얼떨결에 먹고 있던 노비루(野蒜) 로 후려쳐 사슴의 눈을 맞추어 사슴을 죽였다. 아마토 타케루는 이 고개에 올라 오토타치바나히메를 목 메어 부른다. “아즈마(吾妻)하야”, “아즈마(吾妻)하야”, “아즈마(吾妻)하야” 하고 세번이나 절규하니 이를 따라 東國을 아즈마노쿠니(東國)라 하게 된 것이다. 이 “아즈마하야”라는 말은 한국어 “아줌마야”로 본다. 한국어 아줌마는 옛날 고귀한 신분의 여인네를 칭 하는 말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말을 와가 쯔마 (= 나의 처)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방에 따라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없는 내용도 전해 오므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 귀로에 가이(甲斐), 시나노나가노(信濃長野), 미노노오오이(美濃大井), 가마토(釜戶), 이케타(池田)에서 오와리의 국경, 우쯔쯔토우게(內津峙) 에 왔다. 거기에 종자의 구메노야하라(久米八腹) 가 급히 말을 달려 와 가이(甲斐)에서의 전투이후 토오카이도(東海道)를 통과하고 있을 터인 타케이나타네노미코토(建稻種命)가 스루가(駿河)의 바다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야마토 타케루의 손 윗 처남인 동시에 東征의 부사령관이다. 야마토 타케루는 “우쯔쯔가나” “우쯔쯔가나” 하고 탄식하며 타케이나타네노미코토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이곳에 우쯔쯔신사 (內內神社) 가 세워지게 되었다. 우쯔쯔 토우게 (內津峙) 고개는 아이치현 가스카이시(春日井市)와 기후현(岐阜縣) 다지미시(多治見市)를 잇는 표고 320m의 고개이다. 이 “우쯔쯔가나”라는 탄식의 언사는 한국어 “어찌할까나” 또는 “어이할까”가 아닐까.

우스이토우게(碓氷峙)는 군마현(群馬縣) 安中市와 나가노현(長野縣) 北佐久郡의 경계에 있는 험준한 고개이다. 표고 약 960m. 일본 알프스의 험준한 산맥이 이 곳 중부지방에 끝 없이 펼쳐져 있다. 시나노카와(信濃川) 수계와 토네카와(利根川) 수계를 가르는 중앙분수령이다. 이 고개의 나가노현 쪽에 내린 비는 일본해에, 군마 현 쪽에 내린 비는 태평양으로 흘러간다. 옛부터 坂東과 信濃國을 잇는 길로 사용되었으나 길이 험하기로 유명하였다. 日本書紀 景行紀에 야마토 타케루가 坂東平定에서 돌아오다 우스이사카(碓氷坂)에서 아와오키 (安房沖)에서 물에 빠져 죽은 아내 오토타치바나히메가 그리워 “아즈마하야” 라고 세 차례나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고사기에는 이 일이 아시가라사카(足柄坂)에서 일어난 일로 되어있다.

아시가라도우게(足柄峙)는 스루가국(駿河國)과 사가미국(相模國) 국경이 되는 고개이며 시즈오카(靜岡)현과 카나카와 (神奈川)현 아시가라市 사이에 있는 고개로 표고 759m이다. 이 고개를 넘어, 가이(甲斐)로 가서 사카오리노미야(酒折宮)에 머물 때 “니이하리(新治) 쯔쿠바(筑波)를 지나 몇 밤이나 잤을까” 라고 감회를 노래하자, 夜警의 불을 지피던 노인이 “날짜를 겹쳐서 밤으로 아홉밤, 낮으로 열흘” 하고 곧장 노래를 이었으므로 그 노인을 칭찬하고 아즈마노쿠니노 미야스코의 칭호를 내렸다. 이후로 가이(甲斐)의 사가오리노미야(酒折宮) 는 연가(連歌)의 발상지로 불리게 된다.

그후 오와리(尾張)에 도착한 야마토 타케루는 약속데로 미야스히메(美夜受媛)와 결혼한다. 그리고는 이세의 신검 쿠사나기노 쯔루기를 미야스히메에거 맡긴 채 이부키야마(伊吹山)의 귀신을 맨 손으로 처치하겠다고 나선다. 이부키야마는 표고 1,377m로 시가현(滋賀縣)과 기후현(岐阜縣)의 경계에 있는 산이며 옛부터 영봉(靈峰)으로 알려져 왔다. 맨 손으로 이부키야마의 귀신과 대결하러 가는 야마토 타케루 앞에 하얀 멧돼지가 나타난다. 야마토 타케루는 귀신이 보낸 심부름꾼이라 생각하고 무시하였으나 실재 귀신 자신의 화신이었다. 귀신이 눈 사태를 일으키며 공격하자 야마토 타케루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로 하산하나 깊은 병에 들고 말았다.


독기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야마토 타케루는 타마쿠라베(玉倉部)의 시미즈(淸水)를 마시고 몸을 추스렸다. 거기 淸水는 효과가 있어 고열이 내렸다고 전해 온다. 야마토 타케루가 상처를 치료했다 하여 이자메노 시미즈(居醒 淸水)로 불리며 사메가이(醒井)란 지명이 여기서 생겼다 한다.

이부키야마의 전투이후 피로에 지친 야마토 타케루는 岐阜縣 養老町 부근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다리는 부어올라 “내 다리는 걸을 수도 없고 무언가 끌어 당기는 것 같다”고 하여 후에 이곳을 타기노(當藝野)라 부르게 되었다.

스즈카 야마(鈴鹿山)을 바라보며 현재의 미에현(三重縣) 요카이치시(四日市市)에서 스즈카시(鈴鹿市)에 들어 온 야마토 타케루는 너무 피로하여 지팡이에 의지하고 고개에 올랐다하여 이 고개를 쯔에쯔키자카 (杖衝坂, 杖突坂) 라 부르며 舊東海道에 이 이름이 남아있다.

야마토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으나 체력이 바닥나 “내 다리가 세겹으로 굽은 듯 너무 힘들어” 라고 말 했다하여 이 곳을 미에(三重)라 부르는 것이다.

<야마토는 아름다운 땅, 청산으로 푸른 담장을 두른 아름다운 야마토여!> 야마토 타케루의 종언의 땅이 되는 노보노(能褒野, 能煩野) 에 이르러 마지막 감회를 읊으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소식이 궁에 전해지자 妃와 皇子들이 도착하여 노보노에 陵을 만들었다. 조문하는 사람들이 슬픔에 젖어 탄식하는데 능에서 한 마리의 백조가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야마토를 향해 날아갔다. 고사기에 의하면 야마토 타케루는 죽기 전 야마토를 그리워하며 <야마토는 아름다운 땅, 청산으로 푸른 담장을 두른 아름다운 야마토여!>라고 쿠니시노비우타(思國歌)를 불렀다하며 이 노래는 태평양 전쟁 중 동 아시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병사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었다 한다.

야마토 타케루의 능이라 주장하는 고분은 白鳥塚 (鈴鹿市加佐登), 武備塚 (鈴鹿市長澤), 雙兒塚 (鈴鹿市長澤), 王塚 (鈴鹿市國府), 丁字塚 (龜山市田村町) 등 여럿이다. 메이지(明治) 12년 내무성은 龜山市의 노보노(能褒野)신사 서쪽에 있는 丁字塚이라 불리는 전방후원분을 야마토 타케루의 능으로 지정했다. 미에현(三重縣) 가메야마시(龜山市)에 있는 能褒野 御墓는 전장 90m, 후원부의 직경 54m, 높이 9m로 三重北部最大의 前方後圓墳이다. 能褒野神社는 야마토 타케루와 오토타치바나히메 (弟橘媛)를 제사드린다.

能褒野에서 야마토(大和)를 향해 한 마리의 백조가 날아갔다. 이 백조가 최초로 내려 와 앉았다는 전설지의 하나가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코토히키하라(琴彈原)로 이곳에 白鳥陵이 있다. 내려와 앉았던 백조는 기운을 차려 다시 하늘로 솟아 오르더니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 현 大阪府 羽曳野市)에 머문다. 이 일을 기념하여 이곳에도 시라토리노 미사사기 (白鳥陵)을 만들었다. 그후 백조는 다시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를 떠나 먼 서쪽 하늘로 날아 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그 간 곳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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