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神功 65년(서기 385)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이 죽었다. 왕자인 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인 辰斯 (제16대, 재위 385 – 392)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 (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
삼국사기 진사왕8년(392)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일본서기 應神 3년(서기 385) 백제에서 辰斯王(제 16대, 재위 385 – 392)이 즉위했다. 서기 392년, 카시코키 쿠니(貴國)의 천황에게 禮를 잃었다. 그리하여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하노 스쿠네(石川宿禰), 쯔쿠노 스쿠네(木兎宿禰)를 파견하여 그 외교자세를 따지자 백제의 國人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들은 阿花 (제 17대 아신왕, 재위 392 – 405)를 즉위시키고 귀환하였다.
삼국사기 아신왕4년 (서기 395) 가을 8월 좌장 眞武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담덕(광개토왕)이 친히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패수(浿水)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이었다. 아신왕6년 (서기397)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일본서기 應神 16년 百濟記에 나오는 기사일까. “ 아화왕 (阿花王, 第17代 阿辛王, 재위 392 – 405)이 카시코키 쿠니 (貴國, 귀수왕의 의미)에 대하여 禮를 잃었다. 그 때문에 영토의 토무타레(枕弥多禮, 현재 전남 해남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 켄난(見南), 시시무(支侵), 코쿠나(谷那)라 하는 東韓의 땅을 잃었다. 그리하여 왕자의 토키(直支) (후의 제18대 腆支王) 을 조정에 파견하여 관계를 수복했다.” 백제 아신왕(372 – 424) - 일본이름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도 대고구려전의 패전 책임으로 서기405년 퇴위되어 일본에 돌아가 서기 424년 사망했다.
삼국사기 아신왕 14년 (서기 405) 9월 왕이 죽었다. 일본서기 應神16년 百濟의 阿花王(第17代 阿辛王, 在位 392 - 405)이 죽었다. 천황은 인질로 와 있던 토키왕 (直支王, 第18代 腆支王, 在位 405年 - 420年) 을 귀국시켜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잃어버린 東韓의 탈환에 협력했다. 여기서 東韓이란 카무라노 사시(甘羅城), 카우난노 사시(高難城), 니리무노 사시(爾林城)를 말 한다.
삼국사기 전지왕(391 – 432) 원년 (서기 405) “전지왕(腆支王) 혹은 직지(直支)라고도 하였다.” 양서(梁書)에는 이름을 영(映)이라고 하였다. 아신(阿莘)의 맏아들이다. 아신이 재위 제3년에 태자로 삼았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攝政]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였다.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혈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전지는 왜인(倭人)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니 아들 구이신(久尔辛)을 낳았다.
삼국사기 전지왕12년 (서기416) 동진(東晉)의 안제(安帝)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명(冊命)하여 사지절(使持節) 도독 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서기 420년 남송의 高祖 劉裕가 황제가 되자 백제왕의 관직을 鎭東將軍에서 鎭東大將軍으로 올렸다. 高祖 劉裕를 우리는 백제의 침류왕이었던 兎道稚郞子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백제와 왜의 외교기사가 이 때 남송에 집중된다고 본다.
일본서기 應神 25년 백제의 直支王(第18代 腆支王, 在位405 – 420) 이 죽었다. 그래서 구이신 (久爾辛, 第19代 久尓辛王, 在位420 - 427)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모쿠만치(木滿致) 가 국정을 행하였다. 그러나 王母 八須부인과 통정하는 등 횡포한 짓이 많았다. 천황이 이를 듣고 그를 소환하였다.
위의 기사에 이어서 일본서기는 “百濟記”를 인용한다. “모쿠만치(木滿致)는 모쿠라콘시(木羅斤資)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여성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 아비의 공적으로 미마나(任那)의 업무를 담당했다. 백제에 온 뒤 카시코키 쿠니(貴國)를 왕래했다. 야마토 조정으로 부터 직제를 받아, 백제의 중책을 맡았다. 권세가 한창일 때 야마토 조정이 그 횡포함을 알고 소환하였다.”
남송 少帝 景平二年 (서기 424) 映이 長史 張威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서기 423년 모쿠만치(木滿致)와 구이신왕이 몰락하고 전지왕이 다시 왕위에 복귀 한 것으로 보인다.
남송 태조 元嘉2년 (서기 425) 황제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에게 장문의 격려의 메세지를 보낸다. 서기 430년 元嘉7년 백제왕 餘毗가 공물을 보내니 餘映에게 주었던 직함을 여비에게 주었다. 毗有왕이 427년 즉위하고 전지왕은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제왕의 길 보다 철학적 사유를 더 사랑했던 사나이였다. 백제 전지왕의 황후 八須부인은 스님같은 제왕보다 신하인 모쿠만치(木滿致)의 매력에 빠졌다.
일본서기 雄略 11년 秋七月 (서기467) 백제국에서 도망해 온 자가 있다. 구이신(貴信)이라 하며 吳나라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기 423년 久尓辛王은 모쿠만치(木滿致)와 八須부인의 몰락과 함께 실각되어 유송으로 피신했다가 467년 일본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실각된 뒤 4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도 이미 노령이었다.
서기420년 죽었다고 기록된 腆支王은 423년경 다시 왕위에 복귀했었고 서기 427년 서자 비유왕(412 – 465)에게 양위하고 奈良 葛城市에 치온지(置恩寺)를 세우고 승려로 살았다.
일본서기 應神39년 백제의 직지왕 (제18대 전지왕)이 그의 누이 시세쯔히메(新齊都媛)를 파견하였다. 서기 427년 新齊都媛은 7명의 여성을 데리고 왔다. 古事記는 反正천황(380 – 438)의 황후를 쯔노노이라쯔메(都怒郞女)라 하고 일본서기는 쯔노히메(津野媛) 라고 기록했다. 백제의 서울여자라는 뜻이다. 모쿠만치(木滿致)와 八須부인 문제는 反正천황이 처리했을 것이다. 反正천황은 유송의 兎道稚郞子의 장남이니 전지왕과 같은 항렬로 사촌간이다. 왜의 5왕 가운데 “讚”이 이 사람이다. 남송의 兎道稚郞子는 고구려 공격으로 부터 야마토를 지키기 위하여 장남 “讚”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그의 이름이 反正천황으로 기록되었다.
腆支王의 “腆支”라는 단어가 역사의 침식을 견디고 錢取塚의 “錢取”로 남아 있다. 葛城市 葛城山의 동쪽 산 기슭, 나라 분지를 내려다 보는 표고 200m의 고지대에 후타쯔카 고분(二塚古墳)이 있다. 보통 제니토리총(錢取塚)으로 불린다.
치온지(置恩寺)는 行基(668 – 749) 開基 전승을 갖는 사원이나 실재는 布施氏(置始氏)의 氏寺로서 奈良시대에서 平安시대초에 걸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문화재의 십일면관음입상은 치온지 관음당의 본존으로 12세기풍의 걸작이다. 나라현 카쯔라기시(葛城市)의 岩橋山(659m) 산록에 위치한 치온지는 無住(Unattended)로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보호하고 있는 조그만 절이지만 여기에 모셔져 있는 藤原시대의 십일면관음입상으로 유명하다.
오오호도왕 (意富富杼王)은 古事記, 上宮記에 전해오는 고분시대의 황족. 오오이라쯔코(大郞子), 오오호도왕 (意富富杼王), 오오호도왕(意富富等王), 오오호도왕(大大迹王)등으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는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應神천황의 아들이며 繼體天皇의 高祖父)이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누이동생, 오시사카 오오나카쯔 히메(忍坂大中姬)는 允恭천황의 황비이며, 다른 누이동생 琴節郞女一名衣通女命가 允恭천황이 말년에 푹 빠졌던 후비이다.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는 백제 阿莘왕의 일본 이름이다.
古事記에는 오오호도왕 (意富富杼王)이 오키나가 사카키미(息長坂君)・酒人君・三国君・筑紫의 메타노키미(米多君)등의 시조로 되어있다. 또 “上宮記” 逸文의 文章系譜 에 의하면 나카시치노 미코토(中斯知命) 황비와의 사이에 오이왕(乎非王)을 낳았고, 오이왕의 손자가 오호도왕(男大迹王 또는 袁本杼王) 즉 繼體천황이다. 이로 인하여 繼體천황이 應神천황의 5대손 임이 밝혀진다.
意富富杼王의”意富”는 “大”의 의미이며 富杼 = 富等로 쓰여진 “호도”는 Buddha(浮屠)의 옛 표현이라고 본다. 백제 腆支王의 일본이름이 큰 부처라는 뜻의 意富富杼이며 그는 불교에 심취하여 제왕의 자리보다 승려를 원 하였다. 그는 왕좌를 버리고 奈良의 치온지(置恩寺)에서 승려로 살았으나 서기 432년 고구려의 允恭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한 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允恭천황은 개인적으로 큰 부처님 意富富杼의 매제가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6년 (서기 397) 여름 5월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以太子腆支爲質.) 그러나 전지왕에게 야마토도, 백제도 모두 자기 집 안방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인질이란 이상한 표현이다. 그것은 다만 삼국사기 편자의 견해일 뿐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에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남하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공격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수 차례에 걸쳐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여 서기 404년경 백제의 아신왕은 맏딸 오시사카노 오오나카쯔 히메(忍坂大中女命)를 고구려에 바쳤다. 그녀는 腆支王 (意富富杼王) 의 친 누이이다. 고구려는 그녀를 고구려의 왕자 高珍의 배필로 삼았는데 고진이 일본을 점령하고 允恭천황이 된 것이다. 백제의 仁德천황, 履中천황 부자가 전사하였고 高珍은 나니와(難波)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다. 妹弟 高珍이 입성한 서기 432년, 奈良에 있는 치온지(置恩寺)의 큰 부처 意富富杼王은 사망했다. 혁명적인 역사의 현장에 있던 황후 오시사카노 오오나카쯔 히메(忍坂大中女命)의 힘으로도 친 오빠 意富富杼王를 살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리하여 백제의 전지왕, 意富富杼王은 葛城市 葛城山의 동쪽 산 기슭, 나라 분지를 내려다 보는 표고 200m의 고지대에 있는 후타쯔카 고분(二塚古墳)에 묻혔다. 보통 제니토리총(錢取塚)으로 불리나 실재로 腆支塚일 것이다. 고분의 동쪽으로 大和 三山 (耳成山, 畝傍山, 天香久山)을 내려다 보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고분의 규모는 전장 60m, 후원부경 36m, 전방부폭 41m로 높이 10m의 전방후원분이다. 1개의 고분에 횡혈식 석실이 3개나 설치된 것이 이 고분의 특징이다.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57. 大山守命의 왕자의 난
역사는 영속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백제의 역사 또는 야마토의 역사가 따로 따로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보는 식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독립된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된 실체란 다만 우리의 사유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역사란 눈 위에 남겨진 발자국 같은 것이다. 피차 왕래가 많았다면 섞일 수 밖에 없다. 지배계층의 왕래가 많았다면 한 쪽만의 역사는 반쪽의 역사에 불과하다.
민족(Nation)이나 국가(State)라는 말은 19세기부터 쓰기 시작한 최근의 용어이며 고대 역사에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이 시대에 야마토와 백제가 요즘 용어로 민족이나 국가로 얼킨 관계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오고 갈 수 있는 땅이었다. 그 시대 토지는 어느 곳이고 지천으로 있었고 부족한 것은 인력이었다. 외부에서 이주 해 오는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환영을 받았다. 부국강병의 알파와 오메가는 인구의 증가였다. 자연출산보다 인위적인 인구증가가 최상의 방법이었다. 전쟁을 통하여 적국의 백성을 강제로 뺏아가는 기사도 비일비재하다. 근초고왕과 應神천황 父子는 대대적으로 백제인을 야마토로 이주시켰다. 그후 광개토대왕의 남진으로 한반도의 피난민이 전란을 피하여 대규모로 일본으로 이주 하였다.
일본서기 應神 40년 (서기 374) 춘정월 천황은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를 불러, “너희들도 자식 이쁜 줄 알게다”라고 말 하니 둘이 함께 대답했다. “예. 알고 있읍니다”. 그러자 천황은 “다 큰 자식과 어린 자식이 있으면 어느 쪽이 더 귀여우냐?” 하고 물었다. 大山守命는 “나이 많은 쪽입니다.”하고 답 하였다. 오호사자키 (훗날의 仁德천황)는 천황의 안색을 보고 그 마음 속을 헤아려, “다 큰 자식에게 불안이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러나 어린 자식에게는 여러가지로 신경쓰게 되므로 애정도 더 깊을 것입니다.”라 하니, 천황이 매우 기뻐하며 “그 말이 맞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菟道稚郞子를 태자로 세우고 싶어서 나이 많은 아들들의 의향을 물어 본 것이다. 같은 달, 菟道稚郞子를 태자로 정하고, 大山守命에게 산천임야등 국토관리를 맡겼다. 大鷦鷯尊는 태자의 보좌역을 맡겼다. 서기 374년 부왕의 의중의 인물인 菟道稚郞子 11세, 大山守命가 28세 때였다.
삼국사기 침류왕 원년 (서기 384).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요 어머니는 아이(阿尔)부인이다.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 마라난타가 晉 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서기 神功64년 (서기384) 백제 貴須王이 죽었다. 왕자였던 토무루 왕(枕流王, 제 15대, 재위 384 – 385)이 즉위했다. 우리는 야마토의 菟道稚郞子가 백제의 토무루 왕 (枕流王)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삼국사기 침류왕 2년 (서기 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일본서기 神功 65년(서기 385) 백제의 토무루왕이 죽었다. 왕자인 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인 辰斯 (제16대, 재위 385 – 392)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 (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叔父辰斯奪立爲王).
삼국사기 진사왕 원년 (서기 385) 진사왕(辰斯王)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晉書 권9 효무제본기 太元11년 (서기386) 여름 4월조에 “百済王世子 余暉”이라 하여 백제왕의 이름이라 생각되는 인명이 나온다. 이 余暉을 세자란 표현때문에 阿莘王이라고 보는 설도 있으나, 年次의 면으로 보아 辰斯王에 비정하는 설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이름을 ”暉”이라 하는 백제왕의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 진사왕 기록을 보면 386년 15세 이상의 국민을 징발하여 국방용의 성을 쌓아 북방의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386년부터 고구려와 소규모의 전쟁이 있었고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기 392년 7월 고구려 왕 談德이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 하니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구원의 행궁에서 진사왕이 죽었다.
일본서기 응신 3년(서기 385) 백제에서 辰斯王(제 16대, 재위 385 – 392)이 즉위했다. 카시코키 쿠니(貴國)의 천황에게 禮를 잃었다. 그리하여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하노 스쿠네(石川宿禰), 쯔쿠노 스쿠네(木兎宿禰)를 파견하여 그 외교자세를 따지자 백제의 國人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들은 阿花 (제 17대 아신왕, 재위 392 – 405)를 즉위시키고 귀환하였다.
應神천황의 아들 가운데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 우지노 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와카누케 후타마타(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繼體天皇의 高祖父)의 4명은 여기서 언급해야 되는 인물들이다. 大山守命은 백제의 辰斯王, 大鷦鷯尊는 야마토의 仁德천황, 菟道稚郞子는 백제의 침류왕, 稚野毛二派는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 서기 391년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XX)新羅以爲臣民”의 기사와 맞물리는 싯점이다. 삼국사기 는 광개토대왕의 南征을 392년으로 기록하였으나 광개토대왕비는 서기 391년으로 하여 1년의 차를 보인다.
서기 385년 백제의 침류왕 (菟道稚郞子)는 12살된 동생 阿莘王에게 백제를 맡기고 중국에 들어간다. 前秦황제 부견이 383년 11월 비수대전에서 패하여 대륙의 화북전역이 다시 권력의 재편성 단계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어린 동생 菟道稚郞子 에게 태자의 자리를 빼앗기고 절치부심하던 39세의 오호야마모리(大山守)가 쿠테타를 일으켜 阿莘王을 몰아내고 백제왕이 되니 그가 제 16대 진사왕이다. 이것이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서기 392년 貴國의 천황에게 失禮하였다는 기사의 “貴國”은 貴須王(근구수왕)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책임을 물어 應神은 휘하의 장수 4명(모두 武內宿禰의 아들)을 백제에 보내 진사왕 大山守命을 야마토로 압송하고 실각되었던 阿莘王을 복위시킨다. 阿莘도 이제 나이 20이 되었다.
오호사자키(大鷦鷯) 는 應神천황의 네째 아들이다. 應神41년 춘2월 (394) 천황이 사망했다. 태자 菟道稚郞子는 황위를 大鷦鷯尊에게 양보하고 즉위하려고 하지 않았다. “ 아버지가 어린 저를 태자로 정한 것은 자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다만 어린 자식이 귀엽기 때문이었읍니다. 형님은 외모로 보나 자질로 보나 대왕에 걸 맞는 분입니다. 국가나 집안을 이끌어 가기에 저는 적합하지 않읍니다.” 大鷦鷯도 지지 않았다. “아버님은 하루라도 황위를 비워두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너를 태자로 정하여 미리 국민에게 알린 것이다. 아버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두사람은 서로 사양하면서 황위에 오르지 않았다.
大山守命는 아버지 應神천황이 자기를 후계자로 하지 않은 데 불만을 품고 있었고, 또 오호사자키가 국정을 대행하고 있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 둘이서 서로 양보하며 아무도 황위에 오르지 않겠다면, 태자를 죽여버리고 내가 즉위하겠다”고 마음을 정 하였다.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는 이러한 움직임을 탐지하고 태자에게 군사를 대비시키도록 당부하였다. 大山守命는 상대가 경계하고 있는 줄 모르고 수백인의 군사를 인솔하고 밤중에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녘 우지(菟道, 京都府宇治市)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우지강 건너 우지(菟道)마을에 菟道稚郞子가 살고 있었다
이 때 태자는 남루한 의복차림으로 노를 잡고 뱃사공들과 섞여 大山守命를 배에 태웠다. 그리고 배가 강의 가운데 쯤 왔을 때 배를 흔들어 전복시킨다. 大山守命와 태자는 강물에 빠져 떠 내려간다. 大山守命은 전투복 차림의 중무장, 태자는 간단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大山守命는 매복한 군사들이 강가로 나오는 것을 막았으므로 강에서 익사했다. 태자의 이 때의 심경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솜씨 좋은 名人이여, 우지 나루에 서 있는 가래나무(梓)여, 박달나무(檀)여, 그것을 베어 활을 만들까 했는데, 그것을 취하여 활을 만들까 했는데, 뿌리를 보면 兄을 생각하고, 가지(枝)를 보면 누이가 생각나네, 가슴이 매이고 슬픔이 솟구치네, 베지 말고 돌아서자, 가래나무여, 박달나무여.”
서기 394년 應神천황이 사망하여 중국에서 전전하고 있던 菟道稚郞子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하여 돌아 왔을 때 부친이 정 한 태자가 뒤를 이어야 된다고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가 주장한다. 菟道稚郞子는 이를 거부하고 오호사자키를 민다. 백제 진사왕으로 부왕의 허락없이 즉위했다가 일본으로 압송된 바 있던 大山守命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서기 395년 다시 황위를 노리고 태자 菟道稚郞子를 살해하려고 군사행동에 나섰으나 사전에 대비한 太子에 의하여 우지강(宇治川)에서 익사한다. 우지강은 수량이 많고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강이다. 이것이 大山守命의 제2차 왕자의 난이다.
황위를 사양하고 태자는 우지(菟道)의 집에 틀어 박혔다. 그러나 오호사자키(大鷦鷯)도 버티기를 3년, 역사는 이 때를 공위(空位)의 3년이라고 기록했다. 서기 394년에서 397년까지이다. 태자는 “형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살이있는 것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하여 自害를 시도하였다. 태자가 빈사의 중증이라고 들은 大鷦鷯尊는 나니와(難波)에서 우지(菟道)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태자가 의식을 잃은지 3일이 지났다. 大鷦鷯尊가 울면서 “나의 동생 태자여!”하고 세번 부르자 태자가 눈을 떴다. “너무나 슬픈 일이 벌어졌다…. 왜 자해를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 뭐라고 하겠느냐?” 하였다. 태자는 “저희들 두 사람 너무 심했다고 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는 형님이 몇번이고 사양했다고 말 하겠읍니다.”라고 대답하며 “제 누이 야타(八田)황녀가 걱정됩니다. 형님이 후비로 거두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하고 당부하며 숨이 멎었다.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는 소복으로 갈아 입고 한동안 오열을 멈추지 못 하였다. 그리하여 태자를 우지산에 매장했다. 그런 다음 大鷦鷯尊가 천황으로 즉위하니 그가 仁德천황이다.
그럴듯하게 소설을 쓰고 있으나 菟道稚郞子는 중국대륙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그는 야마토라는 작은 나라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3년상이 지나면 중국에 돌아 가 그 곳에서 그의 꿈을 실현하고자 이미 작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菟道稚郞子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때 일본을 떠난 뒤 다시 일본에 돌아 온 역사기록은 없다는 선언이다. 그는 이때 일본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부친의 3년상을 끝내고 서기 397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東晉의 정치상황은 내일의 일을 알 수 없는 혼란된 상황으로 빠져 들고 있었고 광개토대왕의 말 발굽은 만주벌판을 종횡무진으로 주름잡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호태왕의 시대였다.
2009년 5월 15일 금요일
56.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 - 乎鞆王 在意柴沙加宮時
와카야마(和歌山)현 하시모토(橋本)시에 있는 스다 하찌만 신사(隅田八幡神社)가 소장하고 있던 동경(銅鏡)으로 경배(鏡背)에 씌여 진 48자의 명문(銘文)은 일본 고대사의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고대일본에서 오오키미(大王)를 기술한 금석문으로서는 이나리야마 철검명(稻荷山鐵劍銘), 에다 후나야마 철도명(江田船山鐵刀銘)이 있는데,
이 인물화상경도 오오키미(大王)란 단어를 쓰고
있어서 야마토의 왕이 언제 오오키미(大王)를 칭하였는지를 해명해 줄
단서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의 왕이 언제부터 대왕을 칭하였나 하는 문제는 나라의 국력 및 주권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다. 왜냐하면 백제라는 대왕국이 뒤에 버티고 있는 한 일본은 대왕을 칭할 수 없다. 백제의 왕권을 갖는 사람만이 일본에서 대왕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다.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 것은 백제를 대왕국으로 받든 것을 의미한다. 구다라는 한자로 “大王”이라고 쓴다. 그런데 이나리야마 검이나 에다 후나야마 대도에 대왕이란 단어가 나왔다. 이 시절 어떤 일본의 역사서도 직접적으로 대왕이란 호칭을 역사적인 개인에게 사용한 적이 없는데 대왕이란 말이 세번 째로 스다 하치만 신궁의 인물화상경에 나타났으니 놀랄 일이 아닌가.
삼국사기 백제 무왕 37년(서기 636) 3월 왕은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泗沘河)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양쪽 언덕에는 기이한 바위와 돌이 들죽날죽 서 있고, 간간이 기이하고 이상한 화초가 끼어 있어 그림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수행한 자들도 여러차례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곳을 대왕포(大王浦)라 하였다. 그곳을 21세기의 지금 구드레 포구(부여시 구드레 공원)라고 부른다. 구다라란 말은 정확히 대왕이란 말과 대응한다.
2009년 1월20일 익산 미륵사지를 발굴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봉안기를 발굴하여 서기 639년 탑을 만들 때 창건내역을 밝힌 당시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가로 15.5cm, 세로 10.5cm의 금판에 194자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속에 “원 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 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 라고 나온다. 구다라(百濟)는 “대왕폐하”를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수입한 중국경(中國鏡)을 모형(母型)으로 일본에서 주형(鑄型)을 만들고 그 주형에 의해 주조된 거울을 모경에 대한 동형경(同型鏡)이라 한다. 또 동범경(同范鏡)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한 주물형에서 태어난 형제 거울들을 말한다. 따라서 동형경과 동범경은 다른 뜻을 갖는다.
이 인물화상경은 일본에서 많이 출토된 중국경의 모조품으로 품질이 열악하여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본다. 이 거울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치 시유(高市志友, 1751 – 1823)가 1812년에 편술한 “키이국 명소도회(紀伊國 名所圖會)”라는 서물이다. 저자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 소개하면서 이 거울이 원래 진구우(神功)황후에게 헌상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이 거울을 장기간 보관하여 온 스다 하찌만(隅田八幡)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호무다와케노 미코토(譽田別尊), 타라시 나카쯔 히코노 미코토 (足仲彦尊) 그리고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노 미코토 (息長足姬尊)의 3명, 즉 오우진(應神), 쥬우아이(仲哀), 진구우(神功)이다.
계미년을 두고 여러 설이 있으나 서기 443년과 503년설이 지금까지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443년이라면 왜왕 제(倭王濟)가 유송(劉宋)에 사자를 보내 안동장군왜국왕의 칭호를 받은 해이므로 대왕은 인교우(允恭)천황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 오시사가궁(意柴沙加宮)은 오시사카노 오호나카쯔히메(忍坂大中姬)
황후와 뭔가 연관성이 있다고 보인다. 男弟王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503년 설은, 당시 왜국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갖고 대륙의 문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던 백제 무령왕 (재위 502 – 523)의 이름이 시마왕(斯麻王)이므로 거울의 작자 시마를 무령왕으로 추정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男弟王을 케이타이(繼體) 천황으로 본다. 그러나 케이타이(繼體)는 개로왕(蓋鹵王)의 사생아였지만 시마왕보다 12세 연상이다.
서기 383년 설은 어떨까? 역사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료 부족으로 증명이 안 되니까 그냥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역사이다. 그러면 “서기 383년(16 왕년) 8월 16일 乎鞆王이 옷사카(忍坂)의 궁에 있을 때 시마노 스쿠네(斯麻宿禰)가 장수를 기원하여 開中費直과 穢人今州利를 보내 질 좋은 백동 2백 근을 구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라고 새길 수 있다.
AD 383年 神功皇后는 태자 乎鞆王(大鞆和気命)을 즉위시키고 父 誉田別命를 야마토로 귀국시킬 계책을 세운다. 神功皇后는 그 즈음 40대 중반의 나이였고 건강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斯麻念長寿라는 문구는 명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神功皇后의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 너무 늦기 전 皇后를 보살펴 달라는 의도로 隅田八幡神社 人物画像鏡을 만들어 백제에 보내 貴須王을 압박하였을 것이다.
일본의 왕이 언제부터 대왕을 칭하였나 하는 문제는 나라의 국력 및 주권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다. 왜냐하면 백제라는 대왕국이 뒤에 버티고 있는 한 일본은 대왕을 칭할 수 없다. 백제의 왕권을 갖는 사람만이 일본에서 대왕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다.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 것은 백제를 대왕국으로 받든 것을 의미한다. 구다라는 한자로 “大王”이라고 쓴다. 그런데 이나리야마 검이나 에다 후나야마 대도에 대왕이란 단어가 나왔다. 이 시절 어떤 일본의 역사서도 직접적으로 대왕이란 호칭을 역사적인 개인에게 사용한 적이 없는데 대왕이란 말이 세번 째로 스다 하치만 신궁의 인물화상경에 나타났으니 놀랄 일이 아닌가.
삼국사기 백제 무왕 37년(서기 636) 3월 왕은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泗沘河)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양쪽 언덕에는 기이한 바위와 돌이 들죽날죽 서 있고, 간간이 기이하고 이상한 화초가 끼어 있어 그림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수행한 자들도 여러차례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곳을 대왕포(大王浦)라 하였다. 그곳을 21세기의 지금 구드레 포구(부여시 구드레 공원)라고 부른다. 구다라란 말은 정확히 대왕이란 말과 대응한다.
2009년 1월20일 익산 미륵사지를 발굴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봉안기를 발굴하여 서기 639년 탑을 만들 때 창건내역을 밝힌 당시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가로 15.5cm, 세로 10.5cm의 금판에 194자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속에 “원 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 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 라고 나온다. 구다라(百濟)는 “대왕폐하”를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스다 하치만 신사의 인물화상경은 청동제로 지름 19.9cm, 근세의 지지류(地誌類)에도 이 거울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주 옛날 출토(?)된 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출토 연대나 출토지는 모른다. 경배(鏡背)는 원형의 꼭지(鈕)를 중심으로, 내구에 고대중국의 전설상의 인물인 동왕부, 서왕모등 9명의 인물이 나타나고, 그 주위에 반원형과 방형으로 되는 문양대, 그 외측에는 톱니문양을, 테두리에 한자 48자로 이루어진
명(銘)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주출하였다.
이 거울의 원경(原鏡=母鏡)에 해당되는 화상경은,
오오사카 부(大阪府) 야오 시(八尾市)의 코오리가와 쿠루마쯔카 (郡川車塚)
고분, 동(同) 후지이데라 시(藤井寺市) 나가모찌야마(長持山) 고분, 쿄우토 부(京都府) 쿄우타나베 시(京田邊市)의 토쯔카 고분, 후쿠이 현(福井縣) 와카사 쵸우(若狹町)의 니시쯔카(西塚) 고분, 토우쿄우 도(東京都) 코마에 시(貃江市) 의 카메즈카(龜塚) 고분등에서, 동형경(同型鏡) 또는 동형경의 자손에 해당하는 거울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견본이 된 거울과 이 거울은 동왕부, 서왕모를
중심으로 그려진 문양이 모두 거꾸로 주조되어 있다. (Wikipedia)
수입한 중국경(中國鏡)을 모형(母型)으로 일본에서 주형(鑄型)을 만들고 그 주형에 의해 주조된 거울을 모경에 대한 동형경(同型鏡)이라 한다. 또 동범경(同范鏡)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한 주물형에서 태어난 형제 거울들을 말한다. 따라서 동형경과 동범경은 다른 뜻을 갖는다.
이 인물화상경은 일본에서 많이 출토된 중국경의 모조품으로 품질이 열악하여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본다. 이 거울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치 시유(高市志友, 1751 – 1823)가 1812년에 편술한 “키이국 명소도회(紀伊國 名所圖會)”라는 서물이다. 저자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 소개하면서 이 거울이 원래 진구우(神功)황후에게 헌상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이 거울을 장기간 보관하여 온 스다 하찌만(隅田八幡)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호무다와케노 미코토(譽田別尊), 타라시 나카쯔 히코노 미코토 (足仲彦尊) 그리고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노 미코토 (息長足姬尊)의 3명, 즉 오우진(應神), 쥬우아이(仲哀), 진구우(神功)이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 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 / 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 / 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
/ 上同二百旱作此竟
사진에 보이듯 거울의 테두리 빙 둘러 48자의 글이 위와 같이 새겨져 있다. 보기 편하도록 10자씩 갈라 놓았다.
거울의 테두리에 48자의 글자가 들어가도록 정확히 설계되었으므로 글자 한자 한자를
빠짐없이 해석해야 된다.
“계미년 8월10일 대왕치세에 男弟王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시마(斯麻)가 장수를 기원하여 개중비직(開中費直)과 예인 금주리(穢人今州利)의 두 사람을 보내 품질 좋은 백동 2백 근을
구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혹자는 “日十大王”을 日十大王이란 왕명이 있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또 혹자는 大왕으로 보지 않고 大를 六으로 보기도 한다. 大를 六으로
본다면 日十大王年은 日十六王年 이 되어 대왕이 사라지게
된다. 十六日이라 표기하지 않고 日十六으로 표기한 것은 16왕년과
16일의 “16”이 중복되어 하나를 생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계미년이 언제인지, 男弟王과 斯麻가 누구인지 밝혀져야 된다. 일본역사에서 男弟王이 등장하는 것은 이곳 뿐이며 男弟王이라는 해독이
오류일 가능성도 있다. 七支刀 銘文 가운데 璽書를 聖音이라고 오독한 것처럼 男弟王이 오독이라면 모든 논의는 여기서 시작되어야 된다.
七支刀 銘文
(表)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暢德興福祖
(裏)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 世子奇生 璽書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에 등장하는
왕명은 男弟王이 아니라
乎鞆王(オトモノオホキミ)이다. 일본 고대사에 鞆라는 글자를 쓰는 왕은 한 사람 뿐이다. 大鞆和気命가 그 사람이다. 銘文에는革과丙으로 분리하여 革만 취한 것이다. 鞆라는 글자의 왼편에 보이는 것이 가죽 革 변이다. 옳은 명문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八月日十六王年 / 乎革(丙)王在意柴沙加宮時 / 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 / 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 / 上同二百旱作此竟
503년 설은, 당시 왜국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갖고 대륙의 문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던 백제 무령왕 (재위 502 – 523)의 이름이 시마왕(斯麻王)이므로 거울의 작자 시마를 무령왕으로 추정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男弟王을 케이타이(繼體) 천황으로 본다. 그러나 케이타이(繼體)는 개로왕(蓋鹵王)의 사생아였지만 시마왕보다 12세 연상이다.
서기 383년 설은 어떨까? 역사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료 부족으로 증명이 안 되니까 그냥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역사이다. 그러면 “서기 383년(16 왕년) 8월 16일 乎鞆王이 옷사카(忍坂)의 궁에 있을 때 시마노 스쿠네(斯麻宿禰)가 장수를 기원하여 開中費直과 穢人今州利를 보내 질 좋은 백동 2백 근을 구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라고 새길 수 있다.
서기 383년은 神功摂政 治世이므로 366년 등장하는 斯摩宿禰가 383년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해석에서 하나의 단서가 나타난다. 서기 383년 왕위에 오른지 16년 째인 왜왕이 있었나? 서기 383년이 16 왕년이라면 368년 왜왕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서기 368년 왜왕을 임명했던 기록은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가미 신궁 (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칠지도(七支刀)의 기록과 맞물린다.
神功紀 年表
362.2
|
仲哀天皇が筑紫の橿日の屋敷で亡くなった, 古事記は壬戌年(362)崩御とする.
|
362.12
|
皇后は筑紫で誉田天皇を生んだ
|
363.10
|
豪族たちは皇后を皇太后(天皇の母)と呼ぶことにした. これを摂政の元年とする.
|
365
|
誉田別皇子を皇太子(後継ぎ)とした
|
366
|
斯摩宿禰を卓淳国に派遣した
|
368 (倭王元年)
|
世子奇生 璽書 故爲倭王
|
369.11.16
|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
|
372.9
|
久低たちが千熊長彦とともにやって来た. そして七枝刀、七子鏡等様々な宝物を献上
|
383 (16倭王年)
|
癸未年八月日十六王年乎鞆王在意柴沙加宮時
|
384
|
枕流〔トムル〕王卽位
|
서기 368년 乎鞆王이 왜왕이 되었으나 나이 6세에 불과하여 神功皇后가 이와레(磐余)의 와카사쿠라노미야 (若櫻宮)에서 섭정하였다. 이와레(磐余)의 와카사쿠라노 미야(若櫻宮)는 乎鞆王의 거처인 옷사카(忍坂)궁에서 가까운 곳이다.
神功十三年, 武内宿禰와 太子가 쓰누가(角鹿)(福井県敦賀市)의 케히대신(笥飯大神)을 참배하였다. 거기서 태자는 자기 이름 대신 호무다와케(譽田別)라는 이름을 쓰기로 약속하였다. 태자의 이름은 乎鞆(オトモ)였는데 호무다와케(譽田別)라는 이름을 쓰기로 약속함으로서 역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본래의 호무다와케(譽田別)가 존재하고
태자도 호무다와케가 되었다면 두 사람의 譽田別가 있는 셈이다. 두 사람을 한 사람인
것처럼 神功紀에
기록하였다. 応神天皇(品陀和氣命)와 大鞆和気命(おおともわけのみこと)를 아버지와 아들로 구분해야 神功紀는 이해된다. 品陀和氣命는 神功皇后의 아들이 아니라 남편이었다.
応神天皇에게는 다음과 같은 많은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 胎中天皇과 大鞆和気命는 태자의 이름이다.
日本書紀
|
譽田天皇, 誉田別尊, 胎中天皇
|
古事記
|
品陀和氣命, 大鞆和気命(おおともわけのみこと)
|
播磨国風土記
|
品太天皇
|
『上宮記』逸文
|
凡牟都和希王(ほむたわけのみこ)
|
神功皇后(AD 340年代 出生)の夫と御子の名前
AD 320年代
|
AD 362年
|
神功十三年 笥飯大神参拝
|
AD 384
|
|
夫
|
誉田別 出生
|
父 誉田別
|
父 誉田別
|
貴須王
退位
|
子
|
子 誉田別 出生
元の名は大鞆和気命
|
太子の御名は誉田別になった
|
枕流〔トムル〕王卽位
|
AD 383年 神功皇后는 태자 乎鞆王(大鞆和気命)을 즉위시키고 父 誉田別命를 야마토로 귀국시킬 계책을 세운다. 神功皇后는 그 즈음 40대 중반의 나이였고 건강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斯麻念長寿라는 문구는 명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神功皇后의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 너무 늦기 전 皇后를 보살펴 달라는 의도로 隅田八幡神社 人物画像鏡을 만들어 백제에 보내 貴須王을 압박하였을 것이다.
AD 384年 神功皇后의 뜻대로
貴須王이 退位하고 枕流〔トムル〕王이 즉위하였다.
- 끝 -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