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 Eta Funayama)고분은 큐유슈우 쿠마모토(熊本)현 타마나(玉名)군 나고미마치(和水町,舊 菊水町)에 있는 세이바루(淸原) 고분군 가운데 최고 최대의 고분으로 75문자를 은상감한 대도가 출토된 것으로 유명한 전방후원분이다. 이 고분은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축조되었다고 보이며 분구길이 62미터, 방패모양의 주호(周濠)가 있다. 1873년 이 고분 내부에서 총수 92점의 호화로운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전장 90.6센티미터, 날(刃)의 길이 85.3 센티미터의 대도(大刀)가 나오고 이 대도에 은상감의 명문 약 75자가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台(治)天下獲□□□鹵大王世、奉事典曹人名无□(利ヵ)弖、八月中、用大鉄釜 并四尺廷刀、八十練、□(九ヵ)十振、三寸上好□(利ヵ)刀、服此刀者、長寿、子孫洋々、得□恩也、不失其所統、作刀者名伊太□(和)、書者張安也
획(XXX)로 대왕 시대에 무리테(대도의 주인 이름)가 문서를 관리하던 관청에 봉사하였다. 8월에 큰 가마로 정성껏 만들어 낸 대도이다. 이 칼을 지닌 자는 장수하고 자손도 번성하리라. 대도는 伊太和가 만들고, 張安이 명문을 썼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와 “누구”인데 윗글은 의문만 증폭 될 뿐이다. 표현된 문자도 선명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서 처음에 대왕의 이름중 위의 로(鹵)를 치(齒)로 읽게 되었다. 더구나 대왕의 이름 다섯 글자 가운데 처음과 끝의 두자 밖에 알아 볼 수 없었다. 일본천황의 이름가운데 다행히 反正天皇 (380 – 438) 蝮之水齒別命 (타지히 미즈하와케노 미코토)가 있어서 처음에는 이 사람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로부터 95년후 1968년 사이타마(埼玉)현 교다(行田)시 이나리야마(稻荷山, Inariyama)고분에서 전장 73.5센티미터, 중앙의 검의 너비 3.15센티미터인 철검이 발견되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1978년 보존수리 결과 전문 115자의 금상감 명문이 조각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앞면에 57자, 뒷면에 58자가 각인되어 있다.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垝其児多加利足尼其児名弖已加利獲居其児名多加披次獲居其児名多沙鬼獲居其児名半弖比(表)其児名加差披余其児名乎獲居臣世々為杖刀人首奉事来至今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事根原也(裏)
신해년 (보통 서기 471년으로 본다) 7월중 씀. 오와케노오미. 첫 조상의 이름 오호히코. 그의 아들 타카리노 스쿠네 (또는 타카리타루니), 그의 아들 테요카리와케 (또는 테미카리와코), 그의 아들 타카히하와케 (또는 타카히지와코), 그의 아들 타사키와케, 그의 아들 하테히 (전면), 그의 아들 카사히하오 (또는 카사히요), 그의 아들 오와케노 오미, 世世 杖刀人(경호부대)의 우두머리가 되어 봉사하기 오늘에 이른다. 와카타케(키)루(로) 대왕의 寺, 시키(斯鬼)의 궁에 있을 때, 이 백련의 利刀를 만들어 나의 봉사의 근원을 밝힌다. (뒷면)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의 대도에 보이던 2글자를 포함하여 대왕의 이름 다섯자가 선명히 나타나서 獲加多支鹵대왕 임이 확실하다. 큐우슈우의 아리아케 바다(有明海) 안쪽 깊숙한 쿠마모토현 타마나군과 칸토오(關東)지방의 사이타마현 교다시는 거리상으로 그 옛날 도저히 사람의 왕래가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무덤속에서 같은 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철검과 대도가 발견되었다.
칼의 양면에 날이 있는 것을 검(劍)이라 하고 한면만 날이 있는 것을 도(刀)라 한다. 사이타마현에서는 철검, 쿠마모토현에서는 대도가 나왔다. 그런데 검에 보이는 獲加多支鹵대왕이란 이름이 일본서기나 고사기에 나오지 않는 이름이라서 오늘 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이나리야마고분이 발견되므로서 獲加多支鹵大王이란 명칭은 확실해졌지만 와카타케루라 읽을지, 와카타키로로 읽을지 또는 와카다시로로 읽어야 하는지 모른다. 일본은 와카타케루로 읽어 雄略을 뜻한다고 밀고 나간다. 그런데 이름에 鹵를 쓰는 경우가 희귀하므로 이 글자만 봐도 백제 개로왕(蓋鹵王)을 떠 올린다. 우리는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무왕의 상표문”에 나왔던 왜무왕의 477년과 478년의 남송에 보낸 상표문기사를 알고 있다.
<서기 477년 기사> 興、死す。弟、武立つ。(왜흥왕이 죽고 동생 무가 즉위하다)
自ら、使持節、都督倭・百済・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国諸軍事、安東大将軍、倭国王と称する。
<서기 478년 기사> 順帝の昇明二年、使いを遣わして上表して曰、
「封国は偏遠にして、藩を外に作す。昔自り祖禰、みずから甲冑を擐き(つらぬき)、山川を跋渉して、寧所に遑がない 東の毛人五十五国を征し、西の 衆夷六十六国を服し、渡って海北の九十五国を平す. 王道 融泰にして、土を廊きて(ひらきて)、畿を遐にする。累葉朝宗して、歳に愆らず。」
○ 臣、下愚だと雖も、悉く(かたじけなく)先緒を胤ぎ(つぎ)、統べる所を駆率して、天極に帰崇す。道は百済を遥て(へて)、船舫(せんぼう)を装治す。而るに、句麗は、無道にして、図りて見呑を欲する。辺隷を掠抄し、虔劉して已まず。毎に(つねに)稽滞を致し、以て良風を失う。
路(みち)に進むと曰うと雖も、或いは通じ、或いはしからず。
臣の亡考済、実に寇讎の天路を壅塞することを忿る(いかる)。
控弦百万、義声に感激して、方に(まさに)大挙しようと欲するのに、奄に(にわかに)父兄を失い、垂成の功をして、一簣を獲ず。居りて(おりて)諒闇に在って、兵甲を動かさず。是を以て偃息して、未だに捷たず. 今に至りて、甲を練り、兵を治めて、父兄の志を申すと欲する。
○ 義士・虎賁(こほん)、文武、功を效し、白刃を前に交われども、また顧みる所なし。若し、帝の徳の覆載を以て、この強敵を摧き(くだき)、克く(よく)方難を靖めようとすれば、前の功に替わること無し。竊に(ひそかに)自ら開府儀同三司を仮し、其の余りは咸各(みなおのおの)仮授して、以て忠節を勧めた」
詔して武を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国諸軍事・安東大将軍、倭王に除す。
우리는 위의 기사를 왜무왕 = 斯麻王의 상표문으로 보았으며 사마왕의 돌아가신 아버지 濟를 백제 개로왕으로 보았다. 亡考濟는 475년 한성의 위례성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되었다. 478년 기사에 동으로 모인55국을, 西로는 여러 오랑케 나라 66국을 정벌하고 바다건너 북쪽의 95국을 평정하였다고 아버지 濟의 업적을 나열한다. 毛人 55국은 관동지방, 중이66국은 큐유슈우로 본다. 해북 95국이란 광개토대왕 남하시 고구려에 항복한 가야지방의 소국들이다. 사이타마현은 모인국의 하나이며 쿠마모토현은 중이국의 하나이다.
왜의 5왕중 濟는 443년, 451년, 460년 남송에 공물을 보내고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겸 안동장군을 제수 받았다. 이 기간 그는 모인55국, 중이66국, 해북95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서기 455년부터 475년까지 그는 백제 개로왕이었다. 위의 상표문 가운데 나오는 倭王 興을 우리는 곤지로 보았다. 461년부터 477년까지 그는 淸寧천황이었고 남송에 보낸 상표문에는 倭興王으로 표기하였다.
삼국사기 개로왕 18년(472년) 개로왕은 北魏에 장문의 표(表)를 올려 고구려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며 힘을 합쳐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부추긴다. 현금의 학자들 가운데, 선택된 어휘나 문장구성으로 보아, 개로왕 18년(472년) 북위에 보낸 표문과 위의 왜무왕의 남송에 보낸 상표문(478년)이 동일한 사람의 손으로 씌여졌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탁월한 안목이라고 본다. 사실 이 시대 백제와 왜는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이다. 개로왕과 곤지왕은 형제간이며 왜무왕은 그 아들이다. 한학에 밝은 동일인의 신하가 개입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삼국사기 문주왕 3년(서기 477년) 4월 왕의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맏 아들 삼근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고 나온다. 이는 야마토에 있던 곤지가 477년 백제에 나왔다는 것을 말 함이다. 곤지는 백제에 들어오기 전 사마왕을 倭武王으로 삼고 야마토의 왕권을 넘겼다. 倭武王이 477년 남송에 상표문을 올린 것이 이때이다. 상표문의 내용은 온통 아버지 濟 즉 개로왕의 업적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개로왕의 왕자들이 모두 사망한 지금 사마왕은 개로왕의 뒤를 이을 맏 아들이 된 것이다.
따라서 477년부터 484년까지 왜무왕이 천황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백제와의 관련을 피하기 위하여 왜무왕은 아예 천황에서 제외되었다. 왜무왕을 계산하면 22대 淸寧, 23대 왜무왕, 24대 飯豊皇女, 25대 顯宗의 순으로 된다.
곤지는 477년 백제에 나가 사마왕이 개로왕의 피를 이어받은 장자이니 태자로 봉 해야 된다고 형 문주에게 요구하였을 것이나 문주는 자기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다. 곤지의 주청은 무위로 그치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삼국사기는 그가 이때 백제에서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일본에 돌아간 곤지는 그 해가 가기도 전에 형 문주왕의 사망소식을 들었고 2년후인 479년에는 조카 삼근왕의 사망소식이 날아왔다. 백제에서 개로왕과 문주왕의 혈통이 끊어진 것이다. 이때 야마토의 곤지가 飯豊황녀의 동생 億計를 백제 동성왕으로 내 보낸것이 479년의 일본서기 기사이다.
이 무렵의 일본서기는 곤지의 역사는 雄略의 기록으로 감추고, 사마왕의 천황즉위 사실은 철저히 배제한다. 이러한 기반위에서 5세기의 왜의 5왕을 규명하려고 하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진짜 몰라서가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는 영원히 미궁에 묻어두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학문의 수준으로 이 정도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의5왕을 규명하는데 백제 개로왕, 곤지왕과 사마왕을 빼 놓고는 규명할 길이 없다. 거기에 더 하여 이제 우리는 獲加多支鹵大王이라는 새로운 이슈가 이들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신해년은 471년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531년일 수도 있고 411년일 수 도 있다. 통설데로 신해년을 471년으로 보면 오와케가 모신 獲加多支鹵大王은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大長谷若建 (오호하쯔세와카타케루)命. 大泊瀨幼武 (오호하쯔세 와카타케루), 즉 雄略天皇에 해당되거나, 혹은 “송서 왜국전”에 보이는 倭王武라고 판단된다는 것이 일본측 견해이다. 獲加多支鹵를 와카타케루로 읽어서 후대의 한자표기로 바꾸면 若建 또는 幼武가 되어 雄略천황의 이름과 일치하게 된다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 일본 학자들의 속내이다. 이것은 일본서기 기록데로 雄略천황 재위기간을 서기 456년에서 479년까지로 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 雄略천황 재위기간을 456년에서 458년까지로 보고 있다. 458년 雄略천황은 개로와 곤지에게 제압되어 폐위되었다(24. 제 21대 雄略天皇편 참조). 461년 곤지가 야마토에 들어 온 것은 외국에 온 게 아니라 자기 집 안 마당에 돌아 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의 獲加多支鹵大王은 과연 누구일까.
서기 432년부터 453년까지 고구려의 아들 允恭천황이 야마토에 군림하고 있던 440년 경부터 백제의 반격이 시작되는데 이 작전의 책임자가 개로왕자, 즉 왜제왕이었다. 그는 야마토의 예봉을 피해서 일본 서해안에 상륙하여 毛人55國을 회유하고 다시 큐우슈우의 중이 66국을 자기편으로 끌여 들인다. 그때 현해탄 건너 가야지역이라고 생각되는 海北95국을 다시 백제편으로 돌려 놓았다고 왜무왕이 남송에 보낸 상표문에 적혀있다.
야마토의 혼란은 453년 允恭사망, 456년 安康사망, 458년 雄略폐위, 461년 곤지 靑寧천황 즉위로 숨가픈 역사의 변전을 기록한다. 亡考濟가 이루어 놓은 모인55국과 중이66국과의 인적 넷트워크는 이후 淸寧천황과 왜무왕시대에도 수월하게 재가동되었으리라. 바로 이런 지역에서 이나리야마 검, 에타 후나야마 대도가 발굴되었다.
獲加多支鹵大王을 모시던 오와케 경호실장이471년 자기의 역사를 劍위에 기록으로 남겨 가보로 삼았다. 이나리야마 고분의 성립연대를 6세기 초로 보면 그 후손의 시대에 이 철검이 사이타마현의 이나리야마고분에 부장 되었다고 본다. 이 무덤이 검의 제작자인 오와케의 무덤인지 어떤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獲加多支鹵大王을 모시던 무리테 비서실장이 대도를 만들어 영광스러운 자기의 역사를 대도에 기록하여 가보로 삼다가 후손의 시대, 6세기초에 쿠마모토현의 에다후나야마고분에 부장품으로 매장되었다. 이 역시 무리테 자신의 무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이 시대에 조성된 묘지로 가장 확실한 기록을 과시하는 백제 무령왕 묘지가 서기 523년 만들어 졌다. 전문가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 무령왕묘, 이나리야마고분, 에다후나야마고분의 순으로 조성된 것으로 본다.
대우의 김우중 씨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가? 우리는 이제 역사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말해야 될 것 같다. 역사란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싯점에서도 씌여지고 있는 것이다. 歷史는 生物이다.
댓글 1개:
안녕하세요..인사올립니다.
선생님이 올리신 글을 읽고 있습니다. 최근에 일본사를 나름대로 연구하다가 구글검색을 통해 들렸습니다. 이 곳에 익숙치가 않아서 덧글을 통해 틈틈이 인사 올리겠습니다만 선생님의 글에서 많은 배움의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요.
저의 네이버(한국의 포탈사이트)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koviet2입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