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0일 금요일

51.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2009년 3월31일 이명박 정부는 서울시 송파구 잠실에 제2롯데월드의
건축을 허가하였다. 정부는 31일 오전 세종로 중앙청사에서 민관합동 행정협의조정위원회 본회의를 열어 제2롯데월드를 건립하더라도 서울공항의 비행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결론내리고 제2롯데월드를 허용키로 최종확정했다. 이로써 15년을 끌어온 제2롯데월드 건축이 마침내 허용됐다.

제2롯데월드의 초고층 빌딩이 空軍의 서울공항 비행안전과 관련된 고도제한 이슈를 돌파하고 당국의 건축허가를 받은 것이다. 2015년 완공예정인 이 건물은 112층 555미터 높이로 당분간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전망이다. 예정지는 현 롯데월드 옆 석촌호수 북쪽이다. 주위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으며 이 장에서 거론하는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이 지척에 있다. 2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백제의 古都에 기념비적인 건물이 세워 지는 것이다.

古代의 首都임을 증명하려면 성곽과 궁전의 유적이 있고 밀도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야 된다. 풍납토성은 수도로서 이러한 요건을 잘 만족시키고 있으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제국의 위광을 사해에 떨치던 시절 거대하게 축조되었을 옛 왕실의 古墳이 주위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한성백제의 고분으로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남아 있는 석촌동고분군과 방이동고분군이 이에 해당되는 유적이다.

이 고분군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한성 백제 시대 중심묘역이다. 사적 243호인 석촌동 고분군은 일제시대만 해도 80기 이상 (석총 66기 포함) 의 고분이 남아 있다고 조사되었다. 이후 1974년 잠실지구 유적조사단에서 발굴하였을 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3.4호분 적석묘와 5호분 봉토분 뿐이었다. 석촌동 고분군은 1983 – 1984년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토광묘 계통과 적석묘 계통, 즙석봉토분, 火葬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백제 한성시대 (493년간)란 제1대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백제를 건국하여 제21대 개로왕의 위례성이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함락된 서기 475년까지를 말한다. 이후 백제의 역사는 웅진(공주)에서 64년간 (475 – 538), 사비(부여)에서 123년 (538 – 660) 존속한다.


서울시 석촌동 일대에 위치한 고분군은 시기적으로 백제초기에서 4세기에 해당하며 형태로는 계단식 돌 무지 무덤 (積石塚) 이다. 석촌동 무덤들은 백제초기 만들어진 무덤으로 일제 때 처음 조사되었다. 1호, 2호 무덤은 주민들이 농사짓는 땅으로 이용해서 내부구조가 크게 훼손되었고 유물역시 대부분 유출되거나 파손된 상태였다. 다만 3호 무덤은 기원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 형식인 계단식 돌 무지 무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974년 서울대학교박물관 고고학과에 의해 일제강점기부터 그 존재가 잘 알려저 왔던 석촌동 3호 및 4호 적석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1983년과 1984년 재조사 결과 3호분은 고구려 적석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제 1단의 크기가 동서 50.8미터, 남북 48.4미터, 높이 4.5미터로서 集安의 최대적석총인 태왕릉 (1변 길이 60미터)보다는 작으나 장수왕릉 (1변 길이 30미터)보다 큰 초대형급 적석총으로서 왕릉임이 분명하다. 이 무덤은 石山에서 깍아 온 막돌로 쌓아 올려 현재 3단까지 남아 있으며 제1단은 바깥면에는 고구려 성벽에서 보는 바와같은 장방형상자형으로 다듬은 돌을 써서 정면하였고 제1단의 땅에 닿는 부분에는 넓고 큰 석판을 한줄 돌려 깔아 북한에서 부르는 기단식적석총의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후대의 교란이 심하여 매장 주체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축조 기반층으로 판단되는 점토 섞인 자갈층에서 東晉代의 청자 반구호 구연부편이 출토되어 근초고왕(346 – 375 재위) 릉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1987년 4호분과 5호분사이의 정비복원지역을 대상으로 조사가 진행되어 석촌동 1, 2호분등의 적석묘와 함께 여러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석촌동 고분군에는 토광묘, 옹관묘, 봉토묘, 기단식적석묘 등 다양한 백제의 묘제가 확인되었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및 1988년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고분군을 관통하던 도로 (백제 고분로)를 지하화 하고 석촌동 3호분, 4호분, 5호분 등을 복원하는 한편 발굴과정에서 새로 발견된 적석총등을 정비하여 공원화하고 사적 제 24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석촌동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결합된 쌍분으로 규모는 22.3 x 12.8 x 1m인데 북분의 경우 상부구조가 완전히 파괴되어 정확한 구조를 밝히기 어렵지만, 방형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를 점토로 채운 형태이다. 남분은 전형적인 고구려 적석묘로 역시 상부가 파괴되어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없지만 잔존 석축 내부에서 석곽 4기가 조사되었다. 석촌동 2호분은 4호분 남쪽에 위치하며 규모는 17.4 x 16.2 x 3.8m이고 석축을 축조하면서 점토로 채운 내부에서는 목관 1개가 조사되었다.

석촌동 3호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적석묘로 제 1단의 규모가 동서 50.8m, 남북 48.4m로 중국 集安의 최대 적석묘인 태왕릉과 거의 비슷한 규모이다. 현재는 3단까지 남아 있는데 원래 높이는 6m였다고 추정된다. 3호분의 남쪽에 위치한 석촌동 4호분은 8.7 x 8.7 x 2m 규모로서 점토 입방체의 사방을 석축이 둘러싼 형태를 보이는데 석축이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다시 2단의 석축을 돌린 3단의 적석묘이다. 4호분 전체의 크기는 17 x 17m이다. 무덤은 내부점토를 4.6 x 4.6m 정도 파 내고 연도가 달린 석실을 설치했다.

고분이 자리잡은 석촌동의 표고 20미텨 정도의 남북방향의 대지위에는 1917년 당시만 해도 60기 이상의 적석총이 남아 있었으나 1970년대 지상에 墳形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여기 지정된 2기 (3호, 4호)뿐이었다. 그러나 1987년 발굴에 의하면 4호분에서 남쪽으로 240미터 위치에 있는 5호분 봉토분과 4호분사이에도 10여기의 돌무지 무덤과 석곽묘등 백제 초기 고분의 잔구가 남아있었다.

이 송파구 석촌동 방이동 일대에는 여러가지 형식의 고분들이 있으나 그 중 적석총과 굴식돌방무덤이 왕족 귀족들의 묘제였다고 생각되며 4세기에는 고구려의 적석총을 짓다가 점차 백제식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형으로 발전하여 갔으며 5세기에 들어가면서 석실분으로 유행이 바뀌게 된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과 유사한 고분이 중국의 지린성 지안의 국내성 환도산성 산성하 고분군에 다수 남아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연재의 글 "48. 倭建命의 東征 " 의 마지막의 언급을 기억하고 있다. “ 能褒野에서 야마토(大和)를 향해 한 마리의 백조가 날아갔다. 이 백조가 최초로 내려 와 앉았다는 전설지의 하나가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코토히키하라 (琴彈原)로 이곳에 白鳥陵이 있다. 내려와 앉았던 백조는 기운을 차려 다시 하늘로 솟아 오르더니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 현 大阪府 羽曳野市)에 머문다. 이 일을 기념하여 이곳에도 시라토리노 미사사기 (白鳥陵)을 만들었다. 그후 백조는 다시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를 떠나 먼 서쪽 하늘로 날아 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그 간 곳을 모른다.”

이 신화의 주인공 야마토 타케루는 백제 근초고왕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야마토를 떠난 백조는 현해탄을 건너 백제 위례성에 모습을 드러낸다. 근초고왕은 51세때 백제왕이 되어 서기 346년부터 375년까지 왕위에 있었고 그의 장남 호무다와케 (應神天皇, 320 - 394)는 야마토를 맡고 있었다. 이 시절 일본서기 神功紀 – 應神紀는 백제인의 대대적인 야마토 이주와 문물의 교류를 기록하고 있다. 근초고왕 부자는 백제인을 대거 야마토로 이주시켜 야마토라는 새로운 나라를 가와치(河內)에 건설하여 일본열도에서 독보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한다. 應神天皇의 무덤이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현 오오사카 하비키노시) 에 남아 있고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천황 능이 오오사카 사카이(堺)에 다이센(大仙) 고분으로 남아있다. 모두 길이 400 미터를 넘는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이다.

댓글 없음: